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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가복음의 구조

by 은총가득 2020. 10. 28.

 

마가복음의 구조

1. 서론 : 예수의 복음에 대하여
A. 머리말
1. 제목 :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시작

2. 보충설명
a. 구약 전통 계승 : 세례요한
b. 예수가 영을 보다(1:9~13)

B. 주제 :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
1:1~15
1:1~13
1:1


1:2~13
1:2~8

1:14~15
2. 본론 :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하여
A. 갈릴리 / 지방 / 피지배지역 - 배척당함
1. 권세/제도와의 대립/충돌

2. 담화 : 비유적

3. 예수의 전도 여행
a. 제자 세우기 : 경계선 없애기
1) 갈릴리 / 이방인
- 바다를 건넘(거라사 - 요단강 돈편)
- 귀신, 축출, 병 고침
- 고향에서 배척당함
- 귀신, 축출, 병 고침
- 군중을 먹인 사건 : 12 바구니 남김 -> 잔치

2) 유대인 / 이방인
- 바다를 건넘(벳세다)
- 귀신 축출, 병 고침
-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배척당함
- 귀신 축출, 병 고침
- 군중을 먹인 사건 : 7 광주니 남김 -> 잔치

b. 총정리 : 설명 - 제자도
1)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 예수의 복음
2) 보충설명

B. 예루살렘 / 도시 / 지배자 영역 - 배척당함
1. 권세 / 제도와의 대립 / 충돌
2. 담화 : 종말론적
3. 전도 여행의 결말 : 예수의 수난과 죽음, 제자들 도망
1:16~15:47
1:16~10:52
1:16~3:35

4:1~34


4:35~10:52

4:35~8:10
4:35~6:44
4:35~41
5:1~43
6:1~5
6:6~29
6:30~44

6:45~8:10
6:45~52
6:53~56
7:1~23
7:24~37
8:1~10

8:11~10:52
8:11~21
8:22~10:52

11:1~15:47

11:1~12:44
13:1~37
14:1~15:47
3. 결론 : 예수 다시 살아내기
A. 첫 번째 이야기 : 갈릴리로 가라

B. 두 번째 이야기 : 안식 후 첫날
1) 증언과 제자들의 불신
2) 예수의 현현, 명령, 약속
16:1~20
16:1~8

16:9~20
16:9~14
16:15~20

 

다음의 질문들을 함께 생각해봅시다.

1.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17,21)

2. 아직도 믿음을 갖지 못하느냐?(4:40)

3. 바람을 보고 두려워함과 "떡 떼시던 일"이 무슨 상관이 있나?(막6:51~52)

4. 마가복음에서 예루살렘의 의미

 

첫째,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17,21)는 질문의 의미는 무엇일까? 예수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8:15)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그 말뜻을 오해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군중을 먹이던 두 번의 사건을 되새겨주며 먹고 남은 바구니와 광주리의 숫자를 묻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질문이 이어집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21) 이에 대한 제자들의 대답 여부나 예수의 추궁 또는 설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느닷없이 다른 이약가 다소 길게 이어질뿐입니다.(8:22~10:52)의 이야기는 앞에 나온 예수의 질문,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와 연관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글의 구조상, 이 이야기가 예수의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대답이자 보충설명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소경이 눈을 뜨는 사건을 두 번 등장시키는데, 이를 이야기의 처음(8:22~26)과 끝(10:46~52)에 각각 배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경우는 예수가 소경의 눈에 두 번이나 손을 대면서 서서히 시력이 회복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에 반해 뒤에 나오는 에피소드에서는 예수가 손도 대지 않고 단숨에 소경의 눈을 뜨게 합니다. 여기서 '보다'는 단지 '눈에 들어오는 사물을 인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마음 속에 들어온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두 번의 소경이 눈뜨는 사건 사이에 예수는 세 번에 걸쳐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해 이야기합니다.(8:31, 9:31, 10:33~44) 하지만 제자들은 번번이 예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8:32~34, 9:32~34, 10:35~45) 이 중 가장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8:29)라는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에수의 반응과 꾸중입니다. 물론 우리말 성경은 "꾸짖었다"는 말을 쓰지 않고, 단지 '경계, 경고, 당부"했다고 번역합니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이 생생한 증언은 마태복음 16:16절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칭찬, 그리고 소위 "메시아 비밀"이라는 가설에 묻혀 후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중요한 대목을 질문 없이 그냥 지나쳐 갈 수 없습니다. 예수는 왜 베드로의 고백을 꾸짖었을까요? 더 정확히 말해, 마가복음의 저자는 왜 예수가 베드로를 꾸짖었다고 써야만 했을까요?

 

둘째, "아직도 믿음을 갖지 못하느냐?"(4:4)라는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큰 광풍으로 인해 제자들이 무서워하자 예수가 바람을 꾸짖으며 했던 말인데 무서워하는 것이 믿음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두려움은 의지와 이성과는 달리 감정의 영역이 아닌가요? 또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무슨 뜻인가요? "믿음을 갖다"는 말과 관련해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11:22)는 표현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 본문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뜻으로, 예수가 전한 "하나님의 복음"(1:14)과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가 바다 위를 걸어오는 것을 본 제자들의 반응에 관한 질문입니다. 저자는 제자들이 놀란 이유를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라"(막6:52)라고 설명합니다.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한 것과 예수의 떡 떼시던 일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흥미로운 것은 "떡에 관하여"란 표현을 성경 번역본마다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 떡 떼시던 일"(개역개정), "빵의 기적"(표준새번역), "빵을 먹이신 기적"(공동번역), "the miracles of the loaves"(KJV), "about the loaves"(NKJV). 킹제임스버젼에는 '기적'이란 말은 원문에 없는 의역입니다. 헬라어 표현은 단순히 "빵/떡에 대해서"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떡의 상징적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놀랐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읽을 때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은 바로 '떡'의 의미입니다. 이를 하나의 기적적인 사건으로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겁니다.

 

넷째, 마가복음에 실려 있는 두 개의 긴 담화문의 문학적 기능은 무엇이며, 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사건과 사건이 긴박하게 이어지는 마가복음의 이야기 형식으로 볼 때 독립된 담화가 삽입되어 있는 것은 다소 예외적인 현상입니다. 더구나 이런 담화가 두 번 나옵니다. 4장에 나오는 첫 번째 담화에서 예수는 운집한 군중에게 비유로 이야기합니다. 다른 하나는 13장에 있는 묵시적인 담화로 예수가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사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는 갈릴리에서 공개적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비밀리에 행해집니다. 이 둘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상징적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과는 달리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오직 한 번 방문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생애를 마감합니다. 예수의 공생애는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요단강 동편, 유대 땅을 거쳐 예루살렘 입성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는 11장에 가서야 비로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만,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마가복음 처음부터 등장합니다.(1:5, 3:8) 그리고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감시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3:22)이 예수를 힐난하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7:1) 예수와 그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합니다. 마가복음 전반에 걸쳐 저자는 예루살렘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특정 정치 집단, 이데올로기를 함축한 말입니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지만(눅9:51, 13:33),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한창 잘 나가고 있을 때 이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습니다.(3:6, 11, 18) 표면상의 이유는 신성모독죄(2:7, 14:644)입니다. 하지만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낳은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이것은 다분히 정치적 보복에서 비롯된 처형입니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은 예수를 해치는 일에 일찌감치 뜻을 모읍니다.(3:6, 12:13) 이렇게 마가복음에서 예루살렘이라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갈릴리가 지방이라면, 예루살렘은 지배체제의 핵심으로 재판과 형벌을 관장합니다.

 


마가복음의 구성

마가복음은 서론, 본론, 결론의 형태를 갖춘 이야기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이야기의 현장감과 박진감을 높이기 위해 마가복음은 여러 가지 독특한 표현 형식을 사용합니다. "즉시로"라는 표현이 마가복음에만 무려 41번 쓰입니다. 참고로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에는 5번, 누가복음에는 1번, 요한복음에는 3번 쓰였다. 또한 "~하기 시작했다", "또 다시" 등은 마가복음 저자가 특히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현장감을 높이기 위해 과거의 지난 사건들을 현재형으로 묘사하는 방법을 도입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마가복음에만 무려 150번에 걸쳐 나옵니다.

마가복음의 서론(1:1~15)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밝합니다. 서론의 요지는 예수의 복음, 곧 하나님의 복음에 관한 것이며, 이를 믿고 실천하며 살도록 사람들을 초대한다.(1:14~15)

본론(1:16~15:47)은 서론에서 밝힌 것을 논증 형식으로 서술합니다. 여기에서는 등장인물과 함께 일련의 사건들이 어떤 줄거리에 맞추어 전개되는데, 그 주된 줄거리는 하나님 나라와 복음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이 세상의 지배체제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힘겨루기로 구성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지배세력, 군중, 예수의 친족과 제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거부하거나 깨닫지 못합니다.

결론(16:1~20)은 주제를 다시 되새기며 제자들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할 것을 독려합니다. 즉, 제자들의 삶의 자리인 갈릴리로 가서 하나님의 복음, 곧 예수의 복음을 살아내라는 요구입니다. 결국 마가복음의 결론은 독자들, 곧 우리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8:22~10:52의 역할

그러면 마가복음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우리는 막8:22~10:52의 역할을 정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실마리를 풀어보기로 합시다. 앞서 첫 번째 질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 단락이 문학적으로 하나의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은 형식과 내용에서 밝혀집니다. 형식상 처음과 끝에 비슷한 사건을 넣는 수사학적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이 단락은 하나의 문학적 집합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배치된 3개의 예언이 비슷한 구조로 발전합니다. 말씀(8:31, 9:30~31, 10:33~34) 오해(8:32, 9:32, 10:35~37) 가르침(8:34~9:1, 9:33~37, 10:38~45) 문제는 이 독립되어 보이는 문학적 단위가 앞 단락(8:11~21)에 직접 연결되는가, 아니면 뒤에 오는 단락(11장)과 더 긴밀한 연관을 갖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된 질문이 "예루살렘"의 역할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밝힌 대로 예루살렘은 마가복음 첫 부분부터 등장합니다.(1:5, 3:8) 11장에 이르러서는 예루살렘이 여러 번 언급되며(1, 11, 15, 27절) 그 후에는 15:41에 한 번 더 나옵니다. 즉,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11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루살렘의 의미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11장 이후 예수의 행적을 앞부분과 비교해보겠습니다.(도표 참고)

 

  갈릴리 / 지방 전도(1:16~10:52) 예루살렘 / 수도입성(11:1~15:47)
처음 사건 제자 부름(1:16~20) 두 제자 보냄(11:1~10)
권세와 대립/충돌 회당에서(1:21~28)
무슨 권세 -> 1:21~28
성전에서(11:11~33)
무슨 권세 -> 11:27~33
지도자들과 분쟁 서기관, 바리새인, 헤롯당(2:1~3:6)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12:1~34)
서기관 예루살렘에서 올라옴(3:22, 7:1) 예루살렘에 주둔(12:35~44)
주요 설교 씨 뿌리는 자 비유(4:1~34) 마지막 때(13:1~37)
반응 제자-깨닫지 못함(8:17, 21)
믿음 없음 -> "have no faith"(4:40)
제자-예수를 부인, 도망(14:50),
믿음 없음 -> "have faith of God"(11:22)
  이방인, 소외된 자 - 예수를 따름(10:52) 여자 / 이방인 - 예수를 따름(15:39~41)

 

갈릴리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것과 같이, 예루살렘에 들어서면서 예수는 두 제자를 마을로 보냅니다. 공생애 초기, 갈릴리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지배체제와 부짖치게 되는데, 마간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지배체제와 충돌합니다. 이후 두 번의 설교(담화)가 이어지고, 예수에 대한 몰이해가 제자들에게까지 나타납니다. 전반부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면(8:17, 21) 후반부에 이르면서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를 버리고 도망합니다.(14:50) 두 경우 모두 제자들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4:40, 11:22) 그런 와중에도 예수를 따르는 무리가 있었는데, 바로 이방인과 소외된 자들입니다.(10:52, 15:39~41)

이처럼 마가복음 11장 이후는 전반부와 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용면에서도 예수의 활동은 예루살렘 변방에서 예루살렘 지배체제의 감시 하에 있다가, 마침내 그 중심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서론(1:1~15)과 결론(16:1~20)을 제외하고, 본론에 해당하는 1:16~15:47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때 그 분기점이 바로 11장입니다. 1:16~10:52까지는 갈릴리/지방/피지배지역에서 예수의 행적을 그리고 있고, 11~15장은 예루살렘/도시/지배체제 하에서 예수의 행적을 적고 있습니다.

갈릴리 - 그리고 이방과 유대 땅 - 에서 예수의 전도 여행(4:35~10:52)은 갈릴리 바다를 중심으로 배를 타고 옮겨 다니며 진행됩니다. 여기에서 바다는 단지 지형이나 자연환경을 넘어 유대와 이방지역 사이를 가르는 일종의 경계선 역할을 합니다. 긜고 바다에 이는 파도는 단순한 기후 변화라기보다는 두 문화 사이의 심각한 이데올로기 충돌을 함축합니다.

 

  4:35~6:44 6:45~8:10
바다를 건넘 4:35~41 6:45~52
귀실 축출, 병 고침 5장 6:53~56
예수 배척당함 6:1~5 7:1~23
귀신축출, 병 고침 6:6~13 7:24~37
군중을 먹임 6:30~44 8:1~10

 

4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4:1~34)이후에는 유사한 이야기가 되풀이하여 전개됩니다. 바다를 건너는 사건(4:35~41), 귀신축출 등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5장), 고향 사람들의 예수 배척(6:1~5), 귀신축출과 병고침(6:6~13),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인 사건(6:30~6:44) 등은 또 다른 바다를 건너는 사건과 함께 재연됩니다.(6:45~8:10) 예수가 바다를 걸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6:45~52) 귀신축출 등 병자를 고칩니다.(6:53~56)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병을 고치며(7:24~37), 다시 한 번 군중을 먹이는 (8:1~10) 사건들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바다를 건넘과 병자를 돌보는 이야기, 중간에 삽입된 배척당하는 이야기, 그리고 군중을 먹이는 사건이 문학적으로 평행구조를 이룹니다. 여기에 나열된 사건들의 핵심은 바다를 오가는 것으로 상징되는 '경계선 없애기'이며, 이것이 예수가 추구하는 신학(신앙)의 길이 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신학 다시 하기'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가 배척당하는 이야기가 위치하는데, 이 부분이 예수의 복음과 세상의 복음(이데올로기)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바로 정체성의 충돌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의 첫 번째 질문인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8:17, 21)의 의미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이 질문의 발단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경고에서 비롯됩니다.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8:15) 여기서 '누룩'은 제자들이 문자적으로 이해했듯이 '떡'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헤롯당의 '가르침'을 상징합니다.(마16:12은 이것을 풀어 썼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다")

 

이 이야기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는 데 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에서 표적은 말 그대로 싸인입니다. 마치 신호등처럼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표식입니다. 예수는 이미 두 번에 걸쳐 바다를 건너면서 행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사람이 마땅히 살아야 할 바를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신령이 예수 안에 들어간 이후(1:10~11) 드러난 예수의 삶 자체가 당연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예수에게서 하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또 다른 표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이것이 '시험하다'(8:11)라는 말을 통해 저자가 고발하려는 바리새인의 편 가르기입니다. 그들이 구하는 표적이란 자신들의 가치관, 신학, 이데올로기에 따른 일확천금과 같은 초자연적인 기적입니다. 이는 예수의 신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복음"(1:14)을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기술한 예수의 행적은 한 마디로 '경계선 없애기'입니다. 예수는 지배체제가 만들어 놓은 분리와 정복, 그리고 이런 체제에 순응해 사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구태의연한 태도와 가르침을 타파하고자 했으며 더불어 사는 삶을 주창했습니다. 두 번의 바다를 건너는 사건이 지배체제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을 허무는 행위의 시작이었다면, 이것의 절정은 축배요 잔치가 됩니다. 두 번의 군중을 먹이는 사건을 통해 드러난 예수의 더불어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화합과 용서, 감사와 나눔으로 경계와 차별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예수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입니다.

이렇게 8:11~21은 예수의 갈릴리 전도여행을 종결짓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과 예루살렘의 지배신학을 조심하라고 거듭 당부합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8:17, 21) 결론적으로, 8:22~10:52는 4장부터 전개하고 있는 예수의 신학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이어지는 보충설명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8:22~10:52이 문학 구조상 앞부분(8:11~21)에 긴밀히 연결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구조분석이 남긴 교훈

이상과 같이 구조분석을 통해 살펴본 결과 마가복음의 초점이 본론부분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줄거리(플롯)를 찾는 것은 독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마가복음은 끝까지 읽고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읽고 놓친 것이 있으면 다시 찾으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뇌리에 영상처럼 새겨지고 귓가에 맴도는 "갈릴리로 가라"(14:28, 16:7)는 말의 의미입니다. 갈릴리와 예루살렘은 단순히 지역 이름이 아닌 상징적인 무대설정입니다.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면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메시지를 내포한 말입니다. 예루살렘 지배체제의 영(더러운 영)을 따라 살지 않고 갈릴리 예수의 영(성령)을 따라 살고 실천합니다. 이것이 갈릴리와 예루살렘이라는 말에 담긴 또 다른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그들이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막16:8) 가장 오래된 사본에 의하면 마가복음은 여기서 마칩니다. 너도 두려워하느냐? 너희도 침묵하려느냐? 막16:9이후는 이에 대한 응답입니다.

 

생각해볼 문제들

1. 마가목음을 오디오 성경을 통해 듣는 것과 눈으로 읽는 것 사이에서 이해의 차이는 무엇이 있을까요?

2. 마가복음의 문학적 구성과 관련해, 내가 가진 궁금한 점은 무엇인가요?

3. 예수 곁에 있으면서도 예수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나의 어떤 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무엇을 깨닫을 수 있을까요?

4. 내가 그려보는 '제자도'란 어떤 것일까요?  <출처: 신학 읽어주는 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