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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by 은총가득 2020. 10. 28.

마태복음과 마가 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서론


알란(John A. Allan)은 ?십자가에 못 박힌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 이란 글에서 마가 복음의 요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 글을 통해 그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해 냈다 비록 복음서에는 속죄에 대한 가르침이 매우 적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죄를 이룬 방법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이 적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속죄라는 사실이 마가복음서 전체에 깔려 있다. 복음서는 .속죄에 관한 책들’이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 저자들은 복음서에 실을 자료들을 선정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행위를 바로 전하기 위해 어떤 단어로 그것을 표시할 것인가를 정한다. 최근의 저작들을 보면 모두가 동의하는 바가 있다. 복음서는 신학적인 목적에서 씌어진 책들. 이라는 것이다. 그 신학적 목적이란 바로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으며 그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이루신 일들이었다. 그 복음전도자들에게 있어서 복음의 핵심은 바로 십자가였다. 하나님이 하신 일들이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만이 유일한 주제란 말도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십자가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오래 동안 예수 님의 일과 인격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복음에 그 중요한 것들을 표현했다 복음서는 객관적인 역사책들이 아니다. 미 문의 편지와 같은 문학 작품도 아니다. 말 그대로 복음이다. 얼핏 살펴보기만 해도 복음서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씌어졌음을 알 수 있다. 모든 것들이 십자가라는 절정을 향해 모여든다. 저자들은 복음서의 1/6에서 1/3에 해당하는 양을 수난에 활에 했다. 이런 것들 이야말로 가장 깊은 관심을 끄는 사건이요, 복음서 전체 가 그 사건에 따라 엮어진다. 만일 우리가 복음서 저자들이 속죄에 관해서 말한 내용에 대해 살펴보려면, 거의 복음서 전체를 훑어야 한다. 단지 십자가에 대해서 말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보아야한다. 다른 구절들 혹은 다른 주제들도 전체 내용을 다 담고 있을 수 있다. 그림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단지 캔버스의 중심부만 보아서는 안 된다. 우리 시선을 중심부로 옮기게 하는 부수적인 모티프들도 보아야한다. 아무 목적도 없이 그저 그림 속에 끼워 넣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 복음서의 첫 세 권은 한데 묶어서 이해한다. 예수 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해 거의 같은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는 복음서를 따로 따로 다뤄야 한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는 좀 다른 의미에서 속 죄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가 취한 방식은 약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같다. 그러므로 마태와 마가는 묶어서 생각해 보고, 누가복음에 관해서는 다른 장에서 다루기로 하자


본론


하나님의 구원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


마가의 서언을 보면 그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서술 할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는 말 뒤에 곧 이어서 하나님의 복음 (막1:14), 그 복음(1:15) 등 복음이라는 말이 첫머리에 세 번이나 등장한다. 복음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볼 때 좋은 소식(g∞d new)를 가져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 혹은 .좋은 소식.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어원만 가지고는 마가가 전하려는 복음에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위의 세 구절에서 복음 앞에 등장하는 수식어를 통해 어느 정도 복음에 대해 알 수 있다 15절의 .그란 말은 복음의 유일 성을 나타낸다. 14절의 .하나님의(of God) 란 수식어는 그 기원이 하나님이란 뜻이다 1절의 .예수그리스도의 (of Jesus Christ) 란 말은 복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졌으며, 그의 행위가 복음의 중심 내용이 될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마가의 서두는 그가 쓰려는 글 단순한 역사, 혹은 이야기나 금언집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중심으로 한 복음임을 분명히 나라낸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이 들어야 할 좋은 소식이 되는 까닭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의 죄를 어떻게 다루셨는가 하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마태는 누가와는 좀 다르게 족보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람들은 케케묵은 족보 이야기가 뭐 볼 게 있느냐고 말할 지 모르나, 마태에게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그 족보 이야기를 통해, 그는 자신이 말 하고자 하는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원한 이야기임을 주장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계보에는 하나님이 택한 아브라함을 통해 메시아를 주시겠다 약속하신 왕 다윗이 들어 있다. 동시에 예수 님의 처녀 수태, 예수라는 이름, 임마누엘 등의 뜻을 풀어 이름으로써, 구원이 어떤 인간의 노력도 배제된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서 비롯되었음을 주장한다. 서두의 공언 이후, 마태와 마가는 각기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이란 말을 다시 상기 시켜 준다. 그 중에서도 .천국 복음. (마4:23, 9:35)이란 말을 보면, 천국이 복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복음은 일시적이거나 하찮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카드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이 세상 끝까지, 그리고 온 세상에 가득 차도록 선포되어야 한다.


천국은 인간에게 회심과 회개를 요구한다. 인간에게는 돌이킴이 필요하다(마18:3).씨뿌리는 자의 비유도 바로 그 점을 말한다(마13:15, 막4:12). 자기 죄에서 돌이켜야한다. 또한 회개, 즉 자신을 의지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바뀌는 일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에 인간의 공로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회심이나 회개가 인간 쪽에서 필요한 것이기 는 하나, 그것으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이다. 포도 원 일꾼 비유(마20:1-16) 역시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 이루어짐을 나타내 준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주인의 대우를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공명정대한 의로 판단치 않으신다. 만일 그랬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자가 없다 하나님은 그 은혜에 근거하여 우리들을 대하신다. 마11:28절도 하나님의 주권을 뜨러낸다. 사람은 구원 문제에 있어서는 스스로 도울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나아와 그를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모는 자들을 만족시키신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마19:26, 막 10:27).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쉽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27:42절 마태는 이 구절에서 세인들의 비난과 함께 변함없는 진리를 말해 주고 있다. 구원에는 .대가 지불이 있어야 한다. 예수 님은 자기를 구원하시려 한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죄 가를 지불하여, 그들을 구원코자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 값이 다 치러졌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이 성취되었다. 구원은 이제 성취된 현실이다 하나님이 이루실 수 있는 일이며, 또한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이다. 선택(마24:22, 24,31, 막 13:20, 22 )이나 택함 받는 것(마22: 14)에 대해서 언급한 구절들을 보아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택하고 구원하시기로 하고, 간섭하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인간중심의 세대에서는 하나님의 선택이나 주권 등은 이해하기 힘든 말일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강조를 축소시키고 있다.


복음에는 또한 .최후 수단 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예수 님 당시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 그 효력을 발한다 그런 까닭에 복음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막13:10, 14:9, 마28:19).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복음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복음은 인간의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대답이다. 구원에 관해 자세히 살펴보기 이전에, 우리는 서론 삼아 두 가지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로, 죄는 심각한 문제이며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고통은 전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라 선에 이르는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모두 낯선 말일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죄의 심각성


마태와 마가의 좋은 소식은 죄라고 하는 어두운 배경을 깔고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죄가 매우 심각한 문제이며 죄는 비참한 결과 초래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는 것은 이처럼 엄청난 인간의 죄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죄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다.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는 죄의 엄청난 결과가 기다리고있을 뿐이다 세례요한, 예수님, 제자들 모두가 동일하게 외치는 것이 바로 이 회개다(마 3:1, 4: 17, 막6:12).마태와 마가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로부터 시작해서 복음서의 마지막 부활까지 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그 죄는 소위 사회적 지위와 빈부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퍼져 있어서, 모두가 다 회개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의 차손도, 종교 지도자도 다 회개치 않으면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 한다는 메시지이지만 정작 복음서는 세례요한의 회개 촉구로 시작되고있다.(마3:8-14). 사람들은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심각한 문제이다. 사람들은 단지 기독교를 윤리 종교로 축소시키려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를 인간의 가장 심각한 문제로 다룬다. 소위 중도를 지향하는 윤리적인 삶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전히 거룩함을 죄로부터 완전히 깨끗하게 됨을 요 구하시기 때문이다. 산상 수훈도 바로 이 점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도 있지만, 산상 수훈의 결론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온전함 같이 우리도 온전할 것을 원한다는 사실이다(마5:48). 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심판을 면치 못한다. 아름다운 열매률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느니라~(마7:19).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도 역시 심판으로 끝나고 있다(마18:34. 35). 악한 포도 원 농부들의 비유도 마찬가지로 심판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야기를 끝맺는다(마21:43-46, 막12:9). 성령을 거스르는 죄도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한다 (마12:32, 막3:28). 유다 같은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한다(마26;24, 막14:21) 아이를 실족케 하는 것은 연 자 맷돌을 목에 감아 물에 빠뜨리는 것보다 더 악하다(마18:6)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면치 못한다(막 16: 16). 이러한 회개 촉구와 심판의 경고는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이 심판이 소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에게 경건하다 자랑하는 지도자들에게 선포되었다. 두로와 시돈이 그리고 소돔이 이 성의 백 성들보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쉬울 것이다(마 11:20-24).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관원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마21:31). 이상으로 볼 때 두 복음서에서는, 죄가 매우 끔찍한 것이라는 사실과, 동시에 그 죄의 결과 역시 그러하다는 것을 동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고난의 의미


사람들은 고난을 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서에 의하면 고난은 인간의 삶에,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이어서 꼭 있어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막4;17 13:13절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림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특히 말씀으로 인해서 고난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은 고난받도록 부르셨다. (막4:17 13:9 13) 고난은 제자들에 있어서 필수과목이다. 왜 그렇습니까? 마태와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 고난에는 구원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인간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의미하는 것은 고난은 받는 사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축복의 통로가 된 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들을 축복하시는 통로임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이러한 고난이 자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주어졌음을 밝히셨다(막10:38). 즉, 제자가 되려면 그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

 

(1)죽음과 사명


예수 님의 죽음은 그의 사명을 총괄적으로 나타낸다. 그의 죽음은 곧 그의 사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그는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순히 비극으로 치부하고 만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고, 이 세상의 왕으로 인정받으려던 예수가 예루살렘입성 이후 그의 대적 자들과 자신의 측근이던 유다 와 의 음모를 통해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을 읽는 이로 하여금 비애를 느끼게 하고 그것을 통해 영혼을 정화하는 비극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분명 그 이상인 것이다.


예수 님은 어쩌다 보니 왕이 될 뻔했다가 운수 나쁘게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분이 아니다. 예수 님의 광야 시험을 보면. 마귀는 처음부터 예수 님께 온 세상의 왕이 될 것을 제안했으나, 예수 님은 이를 거절 하셨다(마4:1-11) 새 포도주는 새 부대라고 하는 말씀도 역시 예수 님이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일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실 것임을 암시한 것이다(마'19:16, 막2:21). 예수 님의 죽음은 어쩔 수 없이 맞이한 운명이 아니다. 예수 님은 죽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것이 그의 사명이요 오신 목적인 것이다.


인자와 고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막8:31)라는 말을 보면 인자와 고난이 맞물려 있다. 인자는 예수 님의 많은 칭호 중에 예수 님이 자청하신 고유 칭호이다. 특히 이 칭호는 당시의 사람들이 그리던 정치적 메시아가 아닌 메시아의 참 모습을 그려내는 이들이었다. 인자 칭호를 바로 이해하려면 구약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편8편 4절이나, 에스겔서에 나오는 인자처럼, 예수 님도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낼 때 이 말씀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특히 다니엘서 7장13절은 해석의 열쇠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 님이 대제사장의 심문을 받으실 때 바로 이 구절을 인용 하셨기 때문이다.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4:62). 여기에서 인자는 하늘로부터 온 자요,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 할 자이다.
그러한 인자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역설이다. 그러나, 바로 이 역설 속에 성경의 진리가 숨어있다. 인자가 고난받음은 스스로를 위함이 아니요 많은 사람을 위함(섬김)이다.
(막10:45). 사53장의 고난받는 종이 바로 이를 드러낸다. 즉, 예수 님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 많은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는 것이다. 그의 고난은 속죄요 대 속이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받으셨다. 이 사실은 예수 님을 따르는 자들(즉, 그의 제자들)이 고난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가를 암시해 준다.


그 밖의 고난에 대환 암시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 님의 죽음에 대해서 초두부터 계속해서 여러 기자로 강조하고 있다. 금식에 관해 설명하실 때도 죽음을 예고 하셨다 (마9:15 막2;19) 신랑을 빼앗길 날에 주목하라. 신랑은 그리스도의 메시아 적 별명이다. 빼앗긴다는 말속에 폭력에 의해 희생될 것임이 드러나 있다. 즉, 예수 님의 예수 님의 죽음은 메시아 적 사명이심을 암시한 것이다.
변화 산에서 내려오실 때에도 인자가 고난받으실 것을 예언하셨다.(마17:12. 막9; 12). 세베대의 아들들이 영광나라의 보좌 좌, 편의 자리를 요구하셨을 때에도, 나의 마실 잔과 받을 세례라는 말씀을 통해서 죽음이 자신의 사명이심을 밝히셨다(마20:22 막10:38)
베다니의 기름부음 사건에서 여인을 나무라는 사람들에게 여인이 자신의 장례를 미리 예비했다고 말씀하셨다(막14:8, 마26:12)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시면서 또한 입성하시면서 자신의 고난이 어쩔 수 없는 것 이 아니라 자초하는 것이요 궁극적인 목적임을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입성 시에 사람들이 환호했으나, 예수 님의 왕 되심은 그들이 꿈꾸고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그 것은 십자가로 이어지는 왕권이었다. 오직 십자가 안에서만 드러나는 것이요 눈 있는 자만이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사람들의 환호를 통해서 스가랴에서 예언된 왕이심도 밝힌다(마21:4-5 슥9:9, 사62:11). 그는 죽으러 오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셨다. 즉,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고 오신 것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막 1;15). 처음 외치신 말씀을 볼 때, 천국과 예수 님의 사명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천국을 이 땅위에서 출발시키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다 천국 복음(마4:23, 9:35, 24:14, 13:19의 천국말씀도 같은 의미) 이라는 말도 바로 그것을 암시한다. 예수 님이 가져오신 기쁜 소식은 천국에 집중되어 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곧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두 구절이 병행 구로 쓰였음을 보면 알 수 있다(막9:43, 45, 47). 예수 님의 주기도문 역시 천국의 도래를 기원한다.(마6:10). 천국 비밀은 오직 제자들에게만 허락되었다. (마13; 11, 막4: 11). 마태복음은 천국의 비유로 가득하다(13장" 19:23, 20:1, 22:2 25:1 등)결국, 이러한 사실들은 천국, 예수 님과 천국의 연관성, 동시에 예수 님을 향한 태도 여하에 따라 천국에 들어가는 여부가 결정됨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마가가 기록한 백부장의 고백과 상통한다 막15:39절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십자가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상충되지 않는다.


(2)무죄한 자 그리스도


복음서 기자들은 십자가를 통해 고난을 말한다. 그 고난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죽으심은 자기 죄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였다. 죄로 가득한 사람들의 구주가 되시기 위해 예수 님은 죄 없으신 분이셔야 했다.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벌어진 재판에서 예수 님의 무죄하심이 분명히 드러난다. 유다는 자신이 무죄한 피를 배반했다고 말했다(마27:l). 빌라도 역시 예수 님이 아무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마27:23, 막15:14),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로 인해 죽게 되었음을 인정했다(마27:18).또한 자신의 사형 판정을 두고 손을 씻음으로써, 의인의 피에 대해 자신이 무죄하다고 했다(마27:24). 마가가 예수 님을 십자가 죽음과 연관시키면서 유대인 의 왕으로 불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막15:2, 9, 12, 18, 26, 32). 이보다 더 어떻게 예수 님의 무죄함이 강조 될 수 있겠는가?


(3)죄인 그리스도


예수 님의 식탁 교제는 예수 님이 자신을 죄인들과 동일시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
대적 자들은 예수 님을 죄인과 세리들의 천구라고 말한다. 당시 종교지도자 들은 죄인들 가운데 살았으면서도 자신들은 죄인과는 다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죄인들은 희망이 없는 존재들로 여겼다. 예수 님은 그들과 정반대였다. 예수 님은 죄 없으신 분이시면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다. 그들을 찾으셨다. 그들을 섬기셨다. 그분의 모든 사역은 바로 죄인들을 위한 것이었다(마9: 12, 막2:17).
예수 님의 세례 받으심은 바로 이점을 분명히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였다. 그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자신을 죄인과 통일시 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사역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 님이 동일시했던 죄인들은 심판 받을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님의 받으신 세례는 십자가에서 완성할 대속 적인 고난을 스스로 받아들이심이었다
세례요한이 예수 님의 세례 받으심을 거절했고, 이에 대해 예수 님은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기어코 세례를 받으셨다(마3:14, 15) 물론 마태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기사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 님이 이루시고자 한 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행위로서 얻는 의가 아니다. (사53:11)절이 말하고 있는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용서에 기초한 의이다. 예수 님은 바로 하나님의 용서를 위해 필요한 대속 제물이 되신 것이다. 결국, 예수 님은 세례 받으심으로써 자신이 죄인들과 같이 여김을 받으며,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상에서 영원한 의를 얻으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을 마치실 것임을 시사한 것이었다. 변화산 사건 역시 같은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세와 엘리야의 대화를 해석함에 있어서, 그들을 율법과 선지자들을 대변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통념이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후에 산을 내려오시면서 하신 말씀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에게 다른 특성이 부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백성들의 죄로 인해 너무도 마음 아파하던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백성들과 함께 죄짓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남의 속성에 동참하고 있었다. 죄를 미워하시되, 그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동참했던 것이다. 여기에 바로 구원의 긴장이 있다.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려고 했을 때 그 두 사람들이 겪었던 싸움을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 들의 싸움이 비록 그 규모에 있어서는 작았지만 본질상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4)버림받으신 그리스도


예수 님이 과연 십자가상에서 버림을 받으셨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논란을 일으킨 신학적 난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님을 버리셨을 경우 ,예수 님의 인격과 삼위일체에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글로버 CT. R. Glover)는 그리스도께서 도저히 버림받으실 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예수 님의 말씀은 당시 예수 님의 버림받은 기분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가 어려운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과도 같다. 테일러(Vincent Taylor) 역시 .예수 님이 자신을 죄인들과 너무나도 동일시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말씀하셨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버리셨다 (was C forsaken) 라고 기록하고 있다.
혹자는 죽음의 순간에 시편 22편을 암송하신 것을 보면 종교적 경외 심, 하나님과의 연합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말씀은 정반대로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표현한다. 고통의 순간에 시편 암송을 통해 예수 님이 스스로 위로하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그 고통의 순간에 예수 님이 그토록 깊은 명상에 잠길 수 있었다는 상황적 암시가 전혀 없다. 현대 심리학적 해석 무의식 세계를 단말마적인 고통의 언어로 표출한 것이라 고 해석한다. 그러나, 예수 님은 그 순간에 분명한 의식을 갖고 말씀하셨다. 어떤 것을 보아도 만족할 만한 답을 찾기 어렵다. 이 말씀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로 이전의 사건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왜 주님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정도로 기도하셨어야 했을까?(막14:33) 바로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고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잔 이란말로 표현되었듯이 거기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죄를 멀리하신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한다(사59:2). 그는 지옥까지 내려가야 했다(고후5:21, 갈3:13)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던 그분이 처음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해야 했다. 진정 그분 아파했던 것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단절이었다.
그렇다면 삼위 일체의 연합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 문제는 예수 님의 성육신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성육신은 벌써 예수 님이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암시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먼저 온전하신 사람이었던 예수 님이 우리 죄의 온갖 쓴맛을 다 보셨다는 점이다. 몸소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하여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죄인의 운명에까지 처하셨다. 둘째로 하나님의 신성이 인성과 연합한 상태에서 고난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고난을 피하시고, 인성만이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3. 고난의 결과


(1)죄 사함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두 저자들은 죄의 용서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세례 요한의 세례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임을 언급하면서 복음서 전체를 통해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중풍병자의 이야기를 보라. 사람들은 병고 침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수 님은 보다 본 질적인 죄 사함을 말씀하셨다 (막2:5, 9:2)그리고 나서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용서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용서받지 못할 죄도 있다(마12:31, 막3:28).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 자도 용서받지 못한다(막4:12, 마 13:15). 동료를 용서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마6:14,18:21-35, 막 11 :25)용서와 죄 사함은 깊은 관련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보충해 주며, 둘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하나를 언급하면 또 다른 하나를 말해야 한다. 마태복음18장 15절을 보라. 해를 입은 사람이 해를 끼친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용서 빌기를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라, 찾아가서 용서하라는 것이다. 무리한 요구로 들리는가?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풀어주신 은혜임을 알아야 한다. 결국, 복음서 기자는 누가 주도권을 쥐고 용서 하셨는가 하는 점을 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야말로 분명하게 용서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 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말씀하신 바 많은 사람의 죄를 사하는 언약의 피(마26:28)는 렘31:31절 말씀에 비춰보아야 한다 이 새 언약의 특징은 내가 그들의 죄를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 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렘31:35). 결국, 예수 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이란 뜻이다.


(2) 많은 사람의 대속물


예수 님의 죽음을 대속물로 표현한 곳은 단 한 곳밖에 없다. (마20:28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가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 속물이란 말은 고대에 주로 속박된 사람을 풀어 주는 대가로 지불하는 돈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전쟁 포로, 노예 등을 풀어 주는 대가를 의미했고, 구약 성경에서는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을 살려 줄 때 치르는 대가를 의미했다(출21:30).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이전에는 죄의 포로요, 노예요, 죄로 말미암아 사형 선고를 받은 자였다. 예수 님은 그러한 우리들을 죄의 속박에서 풀어 주시려고 자신을 대 속물로 삼으셨다. 이는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셨음을 의미한다. 우리를 죄에서 그리고 죄의 결과에서 건져내신 것이다.


(3)악에 대한 승리


사역 초부터 악한 영들의 공격을 받는 예수 님이지만 마지막은 예수 님의 승리로 끝난다 귀신들림이 성경의 주요 주제는 아니지만 성경은 분명히 예수 님과 귀신을 적대관계로 묘사한다. 귀신들은 예수 님을 하나님의 거룩한자라고 말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원망하나, 예수 님은 그들을 쫓아내신다. 그러나, 그 사역이 축 귀 전문가와 같지 않다. 예수 님은 독특하게 사탄의 공격 대상이 되셨고 그들을 퇴치하는 방법도 독특하셨다. 또한 완전하게 승리하심에 있어서도 독특하셨다. 제자들도 당연히 예수 님과 귀신과의 적대 관계에 연관되어 있었다. 이유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제자들이 어떤 때는 많은 귀신들을 쫓아냈고 (막6:13), 어떤 때는 무력함을 보였다.(막9:18). 때로는 제자 범위밖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 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낼 정도였다(막9:38)분명한 것은 예수 님의 이름이 권세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포도 원 일꾼 비유에서 말씀하신 .모퉁이 돌 역시 예수 님의 최후 승리를 암시한 말이다(마21:42 막12:10) 사람들이 예수 님을 버릴 것이지만 예수 님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셔서, 결국에는 승리하실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도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최후에는 예수 님이 승리하심을 암시했다.
자신의 죽음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승리 가운데 세우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백부장의 고백이야말로 예수 님의 죽음을 승리로 인정한 것이다(막15:39 마27:54).성전 휘장의 찢어짐과 지진도 예수 님의 죽음이 승리였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모든 것들보다 더 확실한 승리의 외침이 있다. 그것은 복음서가 예수 님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분의 부활을 전하는데 있다. 복음서의 절정인 십자가는 부활의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예수 님은 부활을 통해 모든 악을 정복하셨다. 죽음 그 자체를 이기셨다. 예수 님이 살아 계셨을 때 반복적으로 부활을 예언 하셨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마16:21, 17:22, 막8:31, 9:31, 10:34). 예수 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셨다. 이는 죽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예수 님은 사단의 최후 최대 공격을 이기고 부활하셨다. 그는 정복 자셨다. 마 28:20절은 이 승리가 부활 당시로 끝나지 않고 영원히 이어질 것을 말씀해 주신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즉, 예수 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 님처럼 고난을 받을 것이나,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말이다.


4. 구월의 길 믿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이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 신약 성경은 오로지 한 가지 대답을 제시할 뿐이다. 우리들은 믿어야 한다. 복음서에서도 이 믿음이 계속 강조되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막5:34, 10:52). 제자들이 간질 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은 ale음이 적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할 수 있거든 이라고 묻는 아이 아버지의 말에, 예수 님은 할 수 있거든 이 무 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대답하셨다. 그렇다면 믿음이 능력이 있는 것인가? 믿음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예수 님의 능력이 무시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 님은 능력을 베푸실 수 있으나,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에게만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능력 베푸심의 필요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 님은 믿음과는 상관없이 기적을 일으키시기도 했다(요5장 의 중풍병자) 예수 님은 단지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믿음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예수 님은 기적을 일으켜서 인기나 끌려는 분이 아니셨다. 그분의 깊은 관심은 개개인의 삶 전체의 태도에 있었다. 예수 님은 사람들이 예수 님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기를 원하셨다. 예수 님을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훤하셨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은 당장 코앞에 닥친 일에만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이 언급된 것도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 뒤에 따라나온다(막11:22, 마21 :21 비교).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복음서는 예수 님이 요구하는 믿음이 단순히 인정의 차원이 아니라 의지하는 태도인 것을 강조하신다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의로운 자로 믿고, 그의 말대로 행했다. 그러나 예수 님은 그런 믿음 이상의 것을 요구하신다. (마21:32) 제자들이 아직도 믿지 못함 믿음이 적음 때문에 책망 들었던 것과 달리, 백 부장(마8:10), 혈루증 앓던 여인(마9:22 막5:34), 소경 바다매오 (마9:29, 막 10:52), 수로보니게 여인(마 15:28, 막 7:29) 등이 각각 그들의 믿음으로 칭찬 받은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마가복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라고 시작해서,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막16:16)라고 끝을 맺는 것을 보라. 예수 님은 이러한 믿음이 마치 어린아이의 의지함과 같다고 말씀하셨다(막10:14). 즉 예수 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온 마음을 다해 주님만을 의지하는 태도이다. 그런 믿음을 가질 때만. 주님이 주시는 떡과 잔에 동참 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믿음이 바울 서신과 같은 다른 곳에서 말하는 믿음과 똑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같은 태도가 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님을 좇으라는 요구가 바울의 표현에서도 돋보여 보인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하나 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용어는 다를지 모르나 그 밑에 깔려 있는 경험은 똑같은 것이다.


요약 및 결론


이상의 모든 것을 통해서 볼 때, 두 복음서 기자들은 속죄에 대해서 깊이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속죄를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죄가 보편적이며 심각한 나머지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죄인들에게 임할 것으로 보았다. 고난, 그것도 그리스도의 고난이 이런 상황을 타개해 줄 것이었다. 이 고난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고,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이 그의 선지자들을 감동하여 예언하셨고, 그의 아들을 통하여 그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고난이 그리스도의 목적이었으며, 이 세상에 오게 된 이유였다. 스스로는 무죄하시나, 그는 죄인들과 같이 되셨고, 그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 버리심을 받았다. 그 결과 죄 사함을 가져왔고, 많은 사람의 대속 물이 되셨다. 그는 승리하셨다. 이에 복음서 기자들은 믿음을 요구하며, 그 믿음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에 던져 넣으라고 말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위에서 살펴 본 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속죄의 모든 내용은 아니다. 다른 관점에서 이 중심 교리를 더 풍부하게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바로 그 주제에 대해 할 말 이 너무나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십자가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가정하면 오산이다. 위와 같이 짧게만 살펴보아도 십자가의 중요성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들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이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일로 본다. 이상과 같은 해석을 통해 볼 때, 대 속, 그리스도의 버리심 받은 이유, 그의 승리, 죄 사함 등의 개념을 바로 알 수 있다. 마태와 마가 두 기자는 가장 위대한 핵심인 구원의 진리를 자신들의 말로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은 각 저자들이 표현한 그 진리를 만나 볼 수있다.   .cafe.daum.net/JESUSCHANYANG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