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다케 -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디다케>는 초대교회 문헌에서 독보적입니다.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 문헌 중에 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며, 사도시대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사도 이후 초대교회 상황을 가늠할 수 있는 문헌입니다.
<디다케>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과 더불어 초대교회 상황을 알 수 있는 문헌입니다.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은 저작 시기와 저자가 불투명한데 비해, <디다케>는 저자는 알 수 없지만 저작 시기는 기원후 100년쯤으로 확실합니다.
장소는 시리아 시골에서 제작된 것입니다.
이 시기는 사도들이 죽고 속사도들이 교회를 지도하는 시기였고, 교회가 틀을 잡아가는 과도기였습니다.
<디다케>는 초대교회 당시 교회의 정황과 체계를 잡아가는 교회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는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명칭
디다케는 ‘가르침’이란 헬라어 ‘Διδαχή’를 그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디다케는 두 가지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열두 사도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주님의 가르침> 또는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입니다. 예루살렘 사본에는 두 이름이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초기에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열두 사도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주님의 가르침>으로 확장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저는 줄여서 <디다케>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2. 디다케의 역사와 영향력
그동안 디다케는 여러 문헌 속에서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디다케는 사도들이 편지와 맞먹을 만큼의 정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후 교회에서 잊힙니다. 그러다 1873년 그리스 정교회 주교였던 필로테오슨 브리엔니오스(Bryennios)가 예루살렘의 성묘 수도원 도서관에서 디다케 전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사본으로 불리는 이 문헌은 헬라어로 적혀 있으며, 1056년에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브리엔니오스 주교는 발견한 120장 중에서 일부가 디다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이것을 188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출판하게 됩니다. 디다케는 4세기 초에 1-6장까지가 라틴어로 번역되었습니다. 4세기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시리아역은 <사도 헌장> 7권에 <디다케>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콥트어, 에티오피아어, 등으로 번역되어 여러 문서 속에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디다케는 다른 문서와 다르게 교부들과 다른 많은 문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디다케>를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었고,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를 보여 줍니다.
디다케가 초대교회 문헌 중에서도 중요한 이유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저작 시기입니다. 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는 2세기 초에 작성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요한계시록이 90-96년 사이에 기록된 것을 고려한다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도들의 서신과 맞먹는 권위를 가졌습니다. 교부문헌에 디다케에 대한 이야기와 인용이 많습니다. 이것은 디다케가 교회 안에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 번째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규정과 신도들의 실제 생활과 규칙들을 비교적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4세기 이후 ‘주일’의 개념이 생겼다고 하는 학자들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이미 ‘주님의 날’의 개념이 있었고, 그 이후 교회 안에 안식 후 첫날, 즉 일요일에 신약교회는 예배를 드렸다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역사가들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초기에 함께 하면서 점차 분리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일리 있는 주장이면서도 반박도 적지 않습니다. 아마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옮겨온 기독교인들이 따로 모이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바울의 베드로 외식에 관한 책망 부분에서 유대인 기독교인들과 이방인 기독교인들 간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이유를 보면 <디다케>는 쓰인 초기부터 교회 안에 영향력 있는 문서로 자리 잡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디다케> 안으로 직접 들어가 봅시다.
3. 구조와 내용
1) 구조
<디다케>는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디다케>가 한 사람이 아닌 몇 사람 또는 어느 정도 시간의 간격을 가지고 정리된 것으로 보입니다.
제1부 두 가지 길(1-6장)
제2부 교회 전례(7-10장)
제3부 교회 규범(11-15장)
제4부 예수 재림(16장)
2) 내용
제1부 두 가지 길(1-6장)
1부에서 다루는 두 가지 길은 죽음과 생명의 길입니다. 생명의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며,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금식합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다른 쪽도 돌려댑니다. 천 걸음을 요구하면 이천 걸음을 가고, 겉옷을 빼앗거든 속까지 주십시오. 자신의 것을 가져가면 달라고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음행하지 않고, 낙태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처럼 1부의 내용은 생명의 길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4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을 기억하고 그를 주님처럼 여기라’고 권면하기도 합니다. 얻기보다 주기 위해 손을 펴고, 주는 것을 망설이지 않으며 하나님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5장에서는 죽음의 길을 말합니다. 죽음의 길은 성경에 나타난 대로,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우상 숭배, 마술, 위증, 교활, 오만, 악행, 음담패설, 진리를 미워함, 거짓을 사랑함, 정의 보수를 모르는 자들, 억눌린 이를 짓누르고 부자들을 옹호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멸하십니다.
1부에 나타난 내용은 사복음서와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디다케>는 바울서신이나 요한서신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뚜렷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많은 학자는 <디다케>의 상당 부분을 마태복음을 그대로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제2부 교회 전례(7-10장)
2부에서는 교회 규례를 다룹니다. 7장에서는 세례를, 8장에서는 금식과 기도를, 9-10장에서는 ‘감사 기도’를 말합니다. 세례는 ‘이 모든 것들’ 즉 1부에 나오는 생명과 사망의 길을 숙지시킨 다음이란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디다케>는 세례교육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살아있는 물은 흐르는 물을 말하며, 만약 흐르는 물이 없다면 다른 물로 하고, 찬물로 하되 없으면 더운물로 해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약 ‘둘 다 없으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머리에 세 번 부으라’고 알려 줍니다. 이것은 모든 세례는 물에 온몸을 담그는 침례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침례교의 주장에 확실하게 반박하는 내용입니다.
세례, 즉 머리에 물을 뿌리는 방식은 후대에 교회가 대형화되고 체계화되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머리에 물을 뿌리는 현대적 세례는 이미 초대교회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다만 침례를 원칙으로 하되 여의치 않으면 세례도 가능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세례 행위 자체가 아닌 의미에 더욱 비중을 둔 것이 분명합니다.
8장의 기도 역시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곳에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기도문이 그대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옮기면 이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우리가 일용할 빵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이들을 용서하듯이
우리에게도 우리 빚을 용서하시며,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당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송영은 마태복음에 없지만, 후대에 신앙 고백적으로 첨가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기도문은 하루에 세 번 암송했다고 합니다.
제3부 교회 규범(11-15장)
3부는 교회 지도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알려 줍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몇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처럼 교회마다 떠돌아다니는 순례 지도자들이 있고, 디모데와 요한과 같은 한곳에 머물며 교회를 지도하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대개 그들은 사도 또는 예언자들로 불렀습니다. 사도는 열두사도는 아니지만 사도와 같은 권위와 성경적 지식을 갖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이들을 대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릅니다. 먼저, 그들은 주님처럼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루나 이틀만 머물러야 합니다. 만약 사흘을 머물면 거짓 예언자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또한 떠날 때 다른 곳에 유숙하기 전까지만 버틸 수 있는 빵만 받아야 한다. 그 이상이나 돈을 요구한다면 거짓 예언자가 됩니다. 만약 한곳에 오래 머무는 교사나 예언자의 경우는 그들은 최고의 것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방문한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사흘 이상 집에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이한 점은 그들이 거짓 선지자인지 참 선지자인지는 그들이 가지는 ‘생활 태도’로서 밝혀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신앙과 삶을 거의 동일시했으며, 삶으로 증명되지 않는 신앙은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삶은 신자들의 일상이며 법을 준수하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공의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3부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부분은 ‘주일’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주님의 주일마다 여러분은 모여서 빵을 나누고 감사드리시오. 그러나 그 전에 여러분의 범법들을 고백하여 여러분의 제사가 깨끗하게 되도록 하시오.” 이것은 전통적인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에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떡을 나누고(성찬) 제사(예배)를 드렸음이 분명합니다. 주일날 모여 예배를 드린 흔적인 이미 사도들이 서신서에 나타납니다.(요20:1, 19:26, 고전16:2) 그들은 예배 시간에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화해했으며, 성찬 시간에 감사했습니다. 이러한 순서들은 예배 시간에 회개의 시간을 갖는 것이 가톨릭교회에서 가져왔다는 주장에 반하는 것입니다.
또한 매 주일 예배와 성찬이 함께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5장에서는 감독과 봉사자의 선출 방식을 알려 줍니다. 이곳에서 감독과 봉사자들이 ‘예언자들과 교사’들과 함께 존경을 받는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초대교회는 아직 사도적 권위를 가진 ‘예언자들과 교사’가 교회 내에서 선출된 감독들과 봉사자들보다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에 ‘예언자들과 교사’들은 사라지고 감독자들과 봉사자들이 교회를 지도하는 유일한 그룹으로 대체됩니다.
제4부 예수 재림(16장)
마지막 4부인 16장은 예수님의 재림을 다룹니다. 사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강조하며 종말론적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지체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나 <디다케>가 기록된 2세기 초반은 아직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사상이 교회 전반에 스며있었습니다. 그래서 16장에서는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등잔불을 꺼지지 않게 하고, 자주 모여 영혼에 필요한 것을 채우고, 이단과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고 충고합니다. 거짓 예언자들과 종말에 대한 현상들은 마태복음 24장 종말에 대한 예언과 거의 닮았습니다.
예를 들어, 거짓 예언자들이 신자들을 유혹하고,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고, 범법이 자라고, 가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유혹하고, 거짓 기사와 표징을 행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날 때 현상들도 마태복음 24장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4. 나가면서
<디다케>는 사도들의 직접적인 가르침은 아니지만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감독들과 장로들이 교회를 지도하는 방식이 자리 잡은 2세기 중반 이전의 과도기적 교회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디다케>의 저자는 아마도 유대인이었으며, 사도바울과 같은 유대교 전통을 잘 알고 있고,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도들의 제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디다케> 안에는 이미 일요일에 드려지는 주일예배가 보편화 되었고, 성찬이 곧 예배라는 형식을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침례와 세례가 병행되었고, 감독이라는 새로운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기 시작했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 속에 있었으며, 이단들과 잘못된 가르침들이 교회 안에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신학적인 이론이 깊이 있게 논의되지는 않았지만 거룩한 일상의 삶을 통해 믿음을 증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디다케>를 통해 초대교회의 모습이 현재의 교회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재차 확인합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삶과 신앙이 분리되지 않았고, 신앙은 반드시 삶으로 증명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대로 살고, 사는 것이 곧 믿음이어야 합니다. 신앙의 고백은 삶의 고백이며, 삶의 고백은 곧 신앙의 삶이어야 합니다. 2000년 전의 초대교회 신자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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