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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존브라이트 3. 남은 자는 회개하라 -남은자 사상

by 은총가득 2020. 9. 17.

3. 남은 자는 회개하리라 (1)


북이스라엘의 멸망과 선지자 호세아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 자청했던 이스라엘들은 ‘혈통’이라는 기준으로 여호와의 선민임을 자부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선지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진짜와 가짜로 구별된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준은 애초에 ‘혈통’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처했지만,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 백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따름이었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과 그분의 언약에 대한 그들의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를 정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보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하나님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심판과 멸망 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북왕국의 멸망까지...
슬프게도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은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졌습니다. 북왕국의 중흥을 이룬 여로보암 2세가 죽자 곧이어 피비린내 나는 반역과 쿠데타가 반복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아래 정리된 내용을 보시면서 지극히 짧은 시간동안 얼마나 끔찍한 반역과 내란이 있었을지 상상해 봅시다.


ㆍ여로보암 2세의 아들 스가랴가 즉위 → 6개월 후 살룸에 의해 살해
ㆍ살룸의 즉위 → 1개월 후 므나헴의 공격으로 죽음.
ㆍ므나헴의 즉위 → 10년 통치, 아들 브가히야에게 왕위를 물려줌
ㆍ브가히야의 즉위 → 2년 후 베가의 반역으로 살해
ㆍ베가의 즉위 → 20년 후 호세아에 의해 살해
ㆍ호세아의 즉위 → 9년 후 앗수르의 공격으로 북왕국 멸망


우리가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 앗수르의 세력 약화는 일시적이었습니다.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이르러 앗수르는 강대한 제국으로 다시 힘을 떨치고 반세기 가량의 평화를 깨뜨리기 시작합니다. 므나헴 왕은 앗수르를 달래기 위해 막대한 조공을 바쳤으나, 베가는 반앗수르 정책을 펼칩니다.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아람-애굽-북이스라엘의 동맹이 맺어집니다.
그들은 남유다에도 가담을 요청하였으나 유다 왕 아하스는 이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동맹군은 남유다를 향해 총공세를 펼치려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유다 왕의 마음은 "삼림이 바람에 흔들리듯" 두려워 떨었습니다(이사야 7:2). 이 때 남유다의 이사야 선지자는 왕에게 믿음으로 용기를 낼 것을 요청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 '진정하여라. 안심하여라. 겁내지 마라. 르신과 그가 거느린 시리아인, 그리고 르말리야의 아들이 격분한다고 해서 정신을 잃지 마라. 그들은 연기나는 두 횃불 끄트머리에 불과하다. (이사야 7:4, 공동번역)


그러나 아하스 왕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이- 이미 계획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앗수르에게 붙으면 되지! 믿을 건 강대국 앗수르 뿐이다.'
왕의 속마음을 알아챈 이사야는, 앗수르에 붙는 것만은 안된다고 설득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전하며 앗수르를 끌어들이는 행위는 민족을 멸망으로 이끌어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야훼께서 아시리아 왕으로 하여금 너와 너의 겨레와 너의 왕실을 치게 하실 터인즉, 그 날은 에브라임이 유다와 갈라지던 날 이후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불행한 날이 되리라. (이사야 7:17, 공동번역)

 

아하스 왕을 설득하는 이사야 선지자

 


이사야의 설득은 실패로 끝납니다. 아하스 왕은 앗수르에 구원을 요청하고 이를 기다렸던 제국의 디글랏-빌레셋 왕은 즉시 군대를 출진시켜 북왕국 대부분의 땅을 점령합니다. 이듬해에는 아람을 정벌해 버립니다. 이제 북왕국에는 한 조각의 땅(사마리아) 정도만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호세아가 반역하여 베가를 죽이고 앗수르에 서둘러 항복하지 않았다면 북왕국의 멸망은 좀 더 당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왕 역시 정세의 절박함으로 그렇게 했던 것 뿐이었습니다.디글랏-빌레셋이 죽고 살만에셀 5세가 앗수르의 왕으로 즉위하자, 그는 애굽과 손을 잡고 앗수르에 조공을 중단합니다. 이에 살만에셀 5세는 즉각 반역국가를 응징합니다. 기대했던 애굽은 전혀 북왕국을 도울 여력이 없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앗수르의 포위를 2년 이상 버터내지만 결국 멸망하고, 북왕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사마리아의 멸망」, William Brassey Hole


북왕국의 멸망은 너무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는데, 이것은 앗수르의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앗수르는 피정복민의 저항력을 원천봉쇄시키기 위해 백성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킵니다. 북왕국 상류층 대부분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추방되었고, 사마리아 땅에는 바벨론과 다른 지역사람들이 이주되어 살게 됩니다. 그들은 남아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혼합되어 버렸고 훗날 '사마리아인'으로 불리우는 혼혈민족이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의 신들도 함께 유입이 되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유대인들이 이들을 멸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렇게 영토로도 민족적으로도 완전히 끝장나버린 것이지요.


이러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에 대해 열왕기서 기자는 단호한 필체로 서술합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고 이집트 왕 파라오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열왕기하 17:7)


북왕국의 멸망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도, 외교 정책의 실패도, 이웃나라와의 관계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왕국의 멸망을 피해 남유다로 내려온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예언자의 기록 하나가 전달이 됩니다. 그것은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쓴 예언서였습니다 (당연히 북왕국의 마지막 왕 호세아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 그 문서에는 유려한 문장으로, 때로는 시의 형식을 빌려 사마리아의 멸망을 예언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의 예언 : 북왕국의 배교
호세아 선지자는 여로보암 2세때 예언활동을 시작해서 그의 활동 무대였던 북이스라엘이 몰락할 무렵까지 활동했다고 합니다. 아모스가 북왕국의 중흥 시절에 나타나 활동했다면, 호세아는 이후 피비린내 나는 반역과 구테타의 시대를 지켜보며 예언을 한 것이지요.


                                      「선지자 호세아」, Duccio di Buoninsegna


호세아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매우 독특하고 과감한 형태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혼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결혼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분의 "아내"로 삼으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관계에 기초했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간음"을 했다고 고발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성실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혼" 즉, 국가적 파멸 뿐이라고 예언합니다.


호세아서에도 비윤리적 행위와 물질주의, 안일함에 대한 비판이 나오지만 그보다 더 집중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배교입니다. 그의 공격 목표는 우상숭배 즉,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분리시킨 모든 질병의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실한 언약적 사랑인 헤세드(hesed)를 요청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종교적, 외적 형식으로만 그것을 대신할 뿐이었습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 (호세아 6:6, 공동번역)


호세아는 자신이 직접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살며 하나님의 마음을 절절히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바로 간음한 여인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회개는 일시적이었고, 난감한 상황을 잠시 빠져나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속에는 하나님께 돌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호세아는 아모스와 같이 이스라엘 국가에 남은 것은 심판과 파멸 뿐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호세아 6:4, 공동번역)


거친 들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는 그 파멸이 끝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혼'하고 그들을 멸망시키셔야 하는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미래를 준비하십니다.
호세아 선지자 본인도 수많은 불륜을 저지른 자신의 아내를 값을 주고 다시 사오게 됩니다(호세아 3장 참조).

선지자가 그토록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무엇을 느꼈을까요?
"인간인 나도,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하게 되면 이렇게 다시 다가가게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실까... 우리가 치명적인 죄를 범했다고 우리를 완전히 버리실까?"

 

호세아는 하나님의 자비가 결코 인간보다 못할 수 없다고 결론짓습니다. 설령 인간의 헤세드(hesed)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헤세드는 절대 실패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엄밀히 말해 그분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서 11장에서는 인간으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타는 듯한 사랑이 분출됩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내어주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만들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네가 너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구나.
아무리 노여운들 내가 다시 분을 터뜨리겠느냐. 에브라임을 다시 멸하겠느냐. 나는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은 아니다. (호세아 11:8~9, 공동번역)


실제로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과 다시 시작할 계획을 알리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새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를 꾀어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주리라. 거기에 포도원을 마련해 주고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주리라. 그제야 내 사랑이 그 마음에 메아리 치리라 이집트에서 나오던 때, 한창 피어나던 시절같이. 그 날이 오면, 너는 나를 주인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낭군이라고 부르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 바알이란 말을 그의 입에서 씻어버려 다시는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하리라
....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 (호세아 2:16~22, 공동번역)
위의 본문 1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시 시작하시는 곳이 어디인가요? 공동번역에는 '빈들'로 나와 있고 쉬운성경에는 '광야',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에는 '거친 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미드바르'(????) 라는 이 단어는 주로 성경에서 '광야'로 해석됩니다. 우리가 알듯 광야는 고난과 절망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에게 놓여진 운명도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두가 끝났다고 여기는 그곳에서 이스라엘과 새로운 약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비극을 뛰어넘는 소망, 새로운 출발, 새 언약의 씨앗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논하기 전에 이제 남유다로 눈을 돌려봅시다. 북왕국의 멸망 이후 남유다는 더욱 힘겨운 운명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태였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3. 남은 자는 회개하리라 (2)
기적에도 불구하고 폐허가 된 유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스라엘의 분단 이후 북왕국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북왕국이 앗수르에 멸망한 이후 이제 남유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합니다. 앗수르는 제국의 위용을 떨치며 유다에까지 손길을 뻗치게 되는 것이지요.
남은 소망, 유다?


북왕국의 멸망 이후 이제 모든 소망은 유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유다 역시 멸망을 눈 앞에 둔 것과 다름없는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두 왕국이 함께 존재할 때도 모든 면에서 북이스라엘이 부유했고, 남유다는 그에 비하면 시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군사적인 면에서도 남유다는 북이스라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이제 북왕국이 없어진 지금 남유다는 침공의 경로가 완전히 열려버린, 바람앞에 촛불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지난 글에서 북왕국과 아람 연합군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사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에 붙어버린 아하스 왕을 보셨지요? 그 선택은 유다의 자유를 팔아먹은 꼴이 되었습니다. 앗수르가 유다를 구해준 대가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마치 IMF시절 우리나라 경제의 모든 부분을 간섭하도록 외부에 내어준 것처럼, 앗수르의 강압적인 종교정책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 도입되었습니다. 유다는 전통적인 여호와 신앙 상당부분을 포기해야 했지요. 백성들의 마음 역시 '강대국의 신'에 대한 호기심에 빠져 우상숭배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북왕국을 파멸로 몰아갔던 도덕적 부패는 남왕국 유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미가는 유다의 부패와 악행들에 관해 예언한 사람입니다. 그의 예언들은 아모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유다의 죄악상을 낱낱이 고발합니다. 유다의 권세자들과 지도자들은 가난한 자를 수탈하였고, 법정을 뇌물의 거래소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마리아가 천벌로 받은 불치병이 유다에까지 번져와, 기어이 예루살렘에 다다랐다. (미가 1:9, 공동번역)
... 야곱의 지도자들아, 들어라. 이스라엘 족속의 지도자들아, 귀를 기울여라. 너희는 마땅히 정의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했다. 산채로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그 살을 뜯어 냈다. 너희는 내 백성의 살을 먹고 있으며 가죽을 벗기고 뼈를 부러뜨리고 있다. 가마에 넣을 고기처럼 내 백성을 잘게 썰고 있다. (미가 3:1~3, 쉬운성경)

 


                                                            선지자 미가


선지자들도 깊이 부패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례금을 받으며 금액에 따라 예언을 날조하였습니다.
... 예언자라는 것들은 돈을 보고야 점을 친다. 그러면서도 야훼께 의지하여,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재앙은 무슨 재앙이냐?" 하는구나! (미가 3:11, 공동번역)
앞선 글들에서 선지자들이 북이스라엘의 그릇된 여호와 신앙을 지적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이 사랑하시는 공의에는 무관심한채, "여호와께서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천박한 낙관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심각한 문제에 있어 남유다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시온산 한 가운데에 여호와의 성전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민족적 프라이드는 도를 넘어 자신들이 우물 안 개구리 처지인 것도 모른 채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민족주의자 히스기야


이러한 상황에서 아하스가 죽고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즉위합니다. 히스기야는 아하스와 완전히 다른 성격을 소유한 인물이었습니다. 앗수르에 꿇어 엎드린 아버지와 달리, 그는 민족주의적 독립노선을 선택합니다. 다행히 이 시기에 앗수르는 바벨론을 포함한 북방의 여러 민족들과의 전쟁에 힘을 쏟고 있어 팔레스타인에 신경쓸 여력이 부족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민족의 굴욕적 상황을 타개하기 원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미혹하던 우상과 미신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의 조상 다윗처럼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했습니다. 그는 산당들을 없애고 돌 기둥들을 부수고 아세라 우상을 찍어 버렸습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까지도 모세가 만든 놋뱀에게 향을 피워 섬기는 것을 보고 그 놋뱀도 부숴 버렸습니다. 그 놋뱀은 느후스단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믿고 의지했습니다. 유다의 모든 왕 가운데서 히스기야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없었습니다. (열왕기하 18:3~5, 쉬운성경)

 

             「모세의 놋뱀을 제거하는 히스기야」, Bernard Salomon


히스기야 이전에도 유다에는 선한 왕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들의 개혁은 그릇된 전통을 없애는 데 한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그들보다 본질적인 여호와 중심주의의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비록 통치 초기에는 신앙심보다 민족주의에 기반한 개혁이었다는 평이 있지만, 미가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의 후원을 받았던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즉위한 이후, 제국은 유다의 행동들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B.C 701년에 앗수르의 군대들이 이리처럼 내려와 처절하게 유다를 유린했습니다. 46개에 달하는 요새화된 유다의 성읍들은 완전히 함락되어 앗수르의 땅이 되거나 파괴되었습니다. 히스기야의 요청으로 달려온 애굽 군대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습니다. 예루살렘에 갇혀버린 히스기야는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을 산헤립에게 바치게 됩니다.


하지만 앗수르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유다의 완전한 항복을 요구합니다. 거기까지 응할 마음이 없는 히스기야 왕은 결사항전의 각오로 맞섭니다. 상대가 될 수 없는 포위전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는 왕에게 믿음을 가질 것을 격려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야훼께서 아시리아 왕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소.
'그는 이 성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 성에 활을 쏘지도 못하리라.
방패를 가지고 이 성에 쳐들어오지 못할 것이며 토성을 쌓지도 못하리라.
그는 제가 온 길로 되돌아갈 것이며 이 성에는 결코 발을 들여놓지 못하리라. 이것은 야훼의 말이다.
나 자신을 보아서, 그리고 나의 종 다윗을 보아서 내가 이 성을 지키고 구원하리라.'"
(열왕기하 19:32~34, 공동번역)


그리고 그 예언은 실재가 되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날 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앗수르 군인 185,000명을 쳐서 죽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그 사건을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으로 서술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앗수르는 철수하게 되고 이후 산헤립 왕은 암살당합니다. 여호와께서 참으로 그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천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Tanzio da Varallo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유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앞에서 겨우 목숨만 건진 것 이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무사했던 것은 예루살렘 뿐이었고 나머지 유다 땅은 완전히 황폐화되었습니다. 자유를 위한 히스기야의 도전은 가상한 것이었으나 그 대가로 백성들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유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가 된 이스라엘 민족에게 희망은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은 과연 당신의 백성을 다시 일으키실까요?
극도의 고뇌와 절망이 뒤덮던 이 시대에도 과감할 정도로 놀라운 소망을 써내려간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진정한 백성들과 함께 만드실 나라와 메시야 사상을 노래합니다. 그의 이름은 우리가 앞서 몇 번 소개했던 이사야입니다

 

 

3. 남은 자는 회개하리라 (3)
이사야 선지자가 발견한 소망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뒤이어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민족주의와 여호와 중심주의로 독립 노선을 택했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으로 위기를 넘기지만 유다 땅은 앗수르의 잔혹한 노략으로 황폐화됩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 속에서 유다는 힘이 없었고, 그 누구도 희망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라는 선지자는 이러한 시련 속에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지고 있고 더욱 소망할 이유가 있음을 예언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의 예언들을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남왕국 사회를 비하는 이사야

 

이사이사야 선지자는 아마 성경의 선지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사야서의 구절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대선지서인 이 예언서에는 하나님과 유다를 가슴에 품은 선지자의 안타까움과 소망이 넘쳐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 미가 선지자와 같이 이사야도 유다의 죄악들을 고발합니다. 그는 B.C 8세기의 선지자답게 격렬한 분노와 높은 윤리의식을 가지고 그 죄악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재물을 인간이나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는 소유에 대한 탐욕을 아모스 이상으로 신랄하게 비난하였습니다.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집을 연달아 차지하고 땅을 차례로 사들이는 자들아! 빈터 하나 남기지 않고 온 세상을 혼자 살듯이 차지하는 자들아! (이사야 5:8, 공동번역)
... 악법을 제정하는 자들아,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만드는 자들아! 너희가 영세민의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고 내가 아끼는 백성을 천대하여 그 권리를 짓밟으며 과부들의 재산을 털고 고아들을 등쳐먹는구나. (이사야 10:1~2, 공동번역)

 

 

                                     선지자 이사야

 

 

또한 이사야는 북왕국처럼 공의를 내팽개친채 형식만 차리는 종교예식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의로운 행동 없는 예배는 위선과 외식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너희가 나를 보러오는데 도대체 누가 너희에게 내 집 뜰을 짓밟으라고 하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야 1:11~17, 공동번역)


아울러 왕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하스 왕은 격려의 징조까지 보여주셨음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고 앗수르에 의지하여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개혁국가조차도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굽에 도움을 구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충고를 거절하고 타국의 도움으로 자신을 구하려고 생각하는 이 국가를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이사야 31:1~3)


이러한 이사야의 비판은 아모스나 호세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언약관계에 근거하여 나왔습니다. 우리는 2장에서 아모스서를 함께 살펴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얼마나 오해하고 업신여겼는지 함께 보았습니다(기억나시지요?). 이사야도 마찬가지로, 유다 백성들이 상호적인 사랑의 언약을 기계적인 거래로 바꿔버렸다고 비난합니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탄식이 아래와 같이 토해집니다.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이제 내가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너희에게 알리리라. 울타리를 걷어 짐승들에게 뜯기게 하고 담을 허물어 마구 짓밟히게 하리라. (이사야 5:4~5, 공동번역)


하나님은 포도원으로 비유되는 이스라엘과 언약하셨고, 그들에게 아낌없는 자원을 부어주시며 공의와 순종이라는 최상급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셨지만 그 포도원에는 쓸모없는 들포도가 열러버렸습니다. 이런 포도원은 주인을 욕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다시 열매맺지 못하도록 멸해버릴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소망은 전혀 없는가?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완전한 절망을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을 "빛이 아닌 어둠의 날"로 묘사했지만, 이사야는 그 어둠을 넘어 "깊은 흑암에 드리운 땅에 비추이는 큰 빛"(이사야 9:2), 즉 소망을 보았습니다.


그는 유다를 지극히 사랑했던 애국자였습니다. 예루살렘 시민이었던 이사야는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과 법궤가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는 반역과 쿠데타가 반복해서 일어난 북왕국과 달리, 유다에 다윗 왕조가 지속되고 있음을 지켜보았습니다. 또한 그는 앗수르의 포위공격에서 기적으로 예루살렘을 건져주신 하나님의 손길도 생생하게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가 외친 소망은 애국적 낙관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외친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과의 언약이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은 어처구니 없이 실패했고 타락하였습니다. 미가와 이사야가 선언한 유다 공동체의 죄악상은 조금도 과장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실패했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까요?
이는 이사야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선지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되 그것을 완고하기 그지없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루실 것입니다. 유다에는 여전히 미래가 있고, 그 미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이것이 이사야의 소망이었습니다.


동시에 이사야는 유다가 북이스라엘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고 확신했습니다. 분명 남유다에 불의가 있었고 개탄스러운 점이 많았지만, 북왕국에서 보였던 우상숭배와 사회적 죄악만큼은 아니었습니다(저자는 신학적, 역사적으로도 이것이 어느 정도 확인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시종일관 악한 왕들이 통치했던 북왕국과는 달리 유다에서는 선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개혁에 동참했던 왕들도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그 절정이었습니다.

 

"이 땅에는 죄악과 거짓이 넘쳐나지만, 그래도 자세히 보면 소수의 경건한 자들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구나!"


여기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진정한 이스라엘을 발견합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를 말입니다. 주민의 십분의 일이 그 땅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마저 상수리나무, 참나무가 찍히듯이 쓰러지리라. 이렇듯 찍혀도 그루터기는 남을 것인데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다 (이사야 6:13, 공동번역)

 

남은 자의 사상


우리가 종종 어려운 일을 당하여 고민하며 기도할 때 "연단"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우리는 어떤 의도로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일까요? 비록 지금 내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 어려움은, 내가 단순히 벌을 받거나 고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겸손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숙하게 하시는 도구라는 의미이겠지요.
이사야도 국가의 재난을 이런 관점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유다가 장차 맞게될 시련은 분명 그들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간은 하나님의 백성을 깨끗하게 만드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죄악과 부조리에 가려저 쉽게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이 정화되어 나타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치겠다. 잿물로 씻어 내듯 너희의 허물을 씻어 내겠다. 너희의 찌꺼기를 모두 없애 버리겠다.
옛날처럼 재판관들을 다시 세우고, 처음에 한 것처럼 참모들을 다시 세우겠다.


그런 다음에야 너를 '의로운 성', '충성스런 성'이라 부를 것이다." (이사야 1:25~26, 쉬운성경)
"남은 자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이들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실 것이다"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은 이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아모스, 호세아가 선언한대로 국가는 심판의 대상일 뿐,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 될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줄기차게 국가를 개조하여 하나님의 형상에 맞춰보려 했지만 죄악만 저지를 따름이었지요. 그렇기에 이스라엘 국가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국가가 아닌, 그 안에 진실되게 그분을 경외하는 소수, 즉 '남은 자'들이라고 이사야는 선언합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가문의 생존자는 자기들을 치기나 할 자를 다시는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느님 야훼를 진심으로 의지하리라.


남은 자가 돌아온다, 용사이신 하나님께로. 야곱의 남은 자가 돌아온다. 이스라엘아, 너의 겨레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살아 남은 자만이 돌아온다. 파멸은 이미 결정된 것, 정의가 넘치리라. (이사야 10:20~22, 공동번역)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릴 메시야

이사야는 이 남은 자들을 다윗 계열의 메시야가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우리는 1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윗 왕국에 대한 향수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착각이고, 오해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바라보는 이 지도자는 그런 세속국가의 왕을 뛰어넘습니다. 메시야는 스스로 교만해진 나라가 아닌, 쓴 잔을 마시고 불같은 시련을 통과하여 그루터기만 남은 백성들에게 오실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받아 왕으로 세워질 것입니전사가 아닌, 자그마한 아기로서 우리 앞에 오실 것입니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평화가 굳게 세워지고 정의와 공평이 넘칠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과 완벽히 일치할 것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왕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히 살아 계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시다.
그의 왕권은 점점 커지겠고, 평화가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다윗의 나라에서 다스릴 것이다.
그가 정의와 공평으로, 이제부터 영원토록 그 나라를 견고하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자기 백성을 뜨겁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사야 9:6~7, 쉬운성경)

 

 


                                      「The Good Shepherd」, Bartolome Esteban Murillo

 

또한 그 나라는 옛 다윗 왕국의 모습이 아닌,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회복이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평화가 온 땅을 지배할 것이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피조물간의 깨어진 모든 관계가 회복될 것입니다.


그 때에 이리와 어린 양이 평화롭게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어린 황소가 함께 다니고,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닐 것이다.


암소와 곰이 사이좋게 풀을 뜯을 것이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다.
젖먹이가 독사의 구멍 앞에서 장난치고, 어린아이가 살모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어디에도 그들을 해치는 것이나 다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듯이, 그 땅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 찰 것이다. (이사야 11:6~9, 쉬운성경)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과 메시야 대망은 유다가 멸망한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소망을 주게 됩니다. 그들은 국가의 멸망과 포로의 삶을 겪으며 형언할 수 없는 시련과 치욕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직전 이사야의 메시지가 그들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토록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지만, 이것이 진짜 하나님 백성을 만들어내는 연단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좌절의 끝에 우리를 통치하실 다윗 계열의 메시야가 오실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이와같은 이사야의 사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관념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서 국가 안에 있는 '교회'로 옮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은 자의 사상 속에서 혈통적 이스라엘과 이상적 이스라엘 사이에 구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국가'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고난받는 순결한 백성들이 그 나라를 이어받을 것입니다. 오직 참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입니다.

 


순결한 남은 백성으로의 길


이사야의 남은 자 사상은 우리에게도 묵직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이것은 크나큰 위로일 수도 있고 서슬퍼런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서건 '남은 자'는 존재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복음을 위해 고통받는 자, 세상의 요구를 거절하다 쓰라린 대가를 치르는 자,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며 간곡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소망은 없을 것입니다. 설령 내가 세상적으로 망한다 해도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며, 당신의 순결한 백성으로 만들어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안락과 현실의 이익 속에서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어떤 교회에 출석하건, 얼마나 오래 신앙생활을 했건 관계없이- 이 시간이 그들에게 전혀 좋은 시간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고난을 제대로 당해본 사람들은 결코 그것을 쉽게 요청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택함받는 지점은 엄밀히 말해 고난 속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고난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은 고난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본질적인 것을 구하게 하는 자리로 인도하시는 도구로 가장 많이 사용하시는 것이 고난입니다. 이는 신약의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자연스러운 운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예수가 겪은 고난에도 참여해야 한다"(로마서 8:17)고 말합니다.


우리는 헛된 쾌락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것입니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포기의 길로 갈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그분을 섬기며 진실한 그분의 백성이 되어갈 것입니다. 이사야가 노래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 어떤 비극적인 시대가 온다 해도, 심지어 교회마저 세상의 압력이나 유혹에 굴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항상 남은 자, 남은 교회는 존재하여 하나님과 함께 그분의 뜻을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누가복음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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