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심판 아래 있는 이스라엘 국가(1)
이스라엘의 분열, 그리고 추락
분단된 이스라엘
우리가 성경에서 본 대로 솔로몬은 말년에 노골적으로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됩니다. 열왕기상 11장은 솔로몬의 배교와 범죄에 대해 자세히 서술합니다.
솔로몬이 늙어감에 따라, 그의 아내들은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우상들을 섬기게 했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처럼 여호와를 참되게 섬기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시돈 백성의 여신 아스다롯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암몬 사람들이 섬기는 역겨운 신인 밀곰에게 예배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솔로몬은 그의 아버지 다윗처럼 여호와를 참되게 섬기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11:4~6, 쉬운성경)
그리고 솔로몬이 죽자,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이에 북쪽 백성들이 여로보암이라는 사람을 앞세워 왕과의 대면을 요청합니다.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 솔로몬은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했습니다. 강제노역을 비롯한 압제를 이제 중단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앞으로도 당신을 섬길 것입니다."
르호보암은 사흘의 말미를 달라고 하고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연로한 원로들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라고 진언하지만 젊은 신하들이 반대합니다. 안타깝게도 르호보암은 자신과 함께 자란 젊은 신하들의 말을 따릅니다. 백성들이 모이자 르호보암은 아래와 같이 으름장을 놓습니다.
"내 아버지는 너희에게 힘든 일을 시켰지만, 나는 너희에게 훨씬 더 힘든 일을 시키겠다. 내 아버지는 너희를 가죽 채찍으로 쳤지만, 나는 너희를 가시 돋친 채찍으로 치겠다." (열왕기상 12:14, 쉬운성경)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 허리보다 굵다"고 말하는 르호보암 (열왕기상 12:10), Hans Holbein
이 터무니 없는 대답으로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일부를 제외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르호보암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립니다. 강제노역 감독관인 아도니람을 때려죽인 백성들은 여로보암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게 됩니다. 깜짝 놀란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군대를 모으지만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그들을 진압하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였습니다. 선지자 스마야의 경고로 다행히 르호보암은 전쟁을 단념하고 돌아갑니다.
이후부터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 각각의 작은 왕국이 되어버립니다. 약해진 두 왕국은 자기들끼리 싸웠을 뿐만 아니라, 애굽과 다메섹 등의 나라로부터도 공격을 받습니다. 이스라엘은 점점 황폐함으로 나가가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하필 이때부터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제국이 출현하기 시작합니다)
분열된 이스라엘
오히려 추락하는 북이스라엘
자, 이제 북왕국을 잠시 주목해보겠습니다. 북왕국의 반역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둘 이상의 선지자(아히야, 스마야)로부터 후원을 받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의 건립은 솔로몬의 모순된 정치에 환멸을 느낀 이들이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외치며 일어난 혁명이었던 것이지요. 확실히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전통과는 너무나 상이한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추정컨대 그들은 이스라엘의 옛 질서로 어느정도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카리스마적인 인물이 다시 세워지고, 왕은 존재하되 세습 왕조는 없는, 즉 그 권위가 축소되는 방향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정작 나라가 세워지자 북이스라엘은 너무나 허무한 방향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그들이 기대를 걸었던 여로보암 왕은 백성들의 바람을 무시하고 아들 나답에게 세습을 합니다. 그러자 바아사라는 사람이 그를 살해하고 왕이 됩니다. 바아사도 자신의 아들 엘라에게 세습을 합니다. 왕위를 받은 엘라는 시므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시므리는 왕이 된 지 7일 후 반란을 일으킨 오므리 앞에서 자살합니다. 한 마디로 콩가루 나라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초대 왕 여로보암이 자신이 고안한 국가 제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백성들은 르호보암이 미워서 자신을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가 늘 한 공동체로 살아왔기에 그들은 언제든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가장 큰 가능성은 역시 지파동맹을 상징하는 솔로몬의 성전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이 어디에 있지요? 남 유다인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절기가 다가올 때마다 백성들의 마음은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제사는 드리러 가야하는 거 아닌가?' 라며 요동칠 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종교적으로도 백성들을 유다와 영원히 분리시킬 방법을 고안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벧엘과 단에 솔로몬의 성전과 대적할만한 산당을 세우고 금송아지 모형을 꾸며놓은 것입니다.
「우상에게 희생을 바치는 여로보암 1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여로보암 왕은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예배드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이스라엘아, 너희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신 너희의 신이 여기에 계시다." (열왕기상 12:28, 쉬운성경)
금송아지가 어떤 의도로 제작되었건 -예루살렘 성전의 그룹처럼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발등상- 그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우상으로 이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로 인해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을 죄악으로 이끈"사람으로 후손들의 마음 속에 새겨지게 됩니다. (열왕기서 기자는 북왕국의 왕이 세워질 때마다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따라갔다는 언급을 합니다)
솔로몬이 잘못 이끈 '하나님의 나라'를 다시 세워보고자 했던 북이스라엘은 시작부터 허무하게 몰락의 걸음을 딛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역대 최악의 왕 아합, 그리고 이세벨
북이스라엘은 오므리에 이어 아합이라는 인물이 왕위에 오릅니다. 한 번 쯤은 들어보셨지요? 이 왕은 이스라엘 역대 최악의 왕으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아합은 전에 있던 다른 왕들보다 더 악했습니다. 아합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지은 죄를 그대로 따라 했을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죄도 지었습니다.
아합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했습니다. 아합은 바알 신을 섬기고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합은 사마리아에 바알의 신전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바알을 섬기는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합은 아세라 우상도 만들어 섬겼습니다. 아합은 전에 있던 다른 어떤 왕보다도 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게 했습니다. (열왕기상 16:30~33, 쉬운성경)
아합은 통치 22년 동안 북이스라엘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이전 왕들도 악했지만, 아합은 그들의 죄악조차 가벼운 것으로 무시하는듯 더욱 큰 악행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아합은 시돈 왕의 공주 이세벨(그녀는 바알의 선교사였습니다!)을 왕비로 삼아 국가적으로 바알을 예배하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며, 여호와께서 금지 하신 여리고 성 건축도 강행했습니다. 이세벨은 이에 대항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위헙하는 정책도 불사합니다. 그녀는 무력으로 국가를 외국의 이방종교에 귀속시키려는 대담한 시도를 했습니다. 이 박해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아합의 죄악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사건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빼앗은 사건이었습니다. 나봇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포도원 팔기를 거절했지만, 아합은 이세벨의 충동으로 그를 죽인 후 포도원을 차지해 버립니다.
「아합에게 포도원 팔기를 거절하는 나봇」, Thomas Matthews Rooke
여기서 가나안의 토착 신 바알에 대해 짚고 넘어갑시다. 아합 이전에도 이스라엘은 늘 바알 우상숭배의 유혹을 받아왔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실제적인 소출을 주는 것은 바알이기 때문에 여호와도 섬겨야 하지만 바알도 섬겨야 한다"는 말들 때문이었습니다. 생업과 직결된 상황에 처한 백성들은 이 유혹에 많이 넘어가게 됩니다(오늘날 세속주의 우상과 참 비슷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합은 음지에서 행해오던 바알 제사를 공식화 했습니다. 저자는 바알 신앙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합니다.
바알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만드는 그 고유한 신앙을 파괴하였다. 인간들이 그들의 동물적 본성을 벗어나는 것을 전혀 물리치지 못하는 종교, 심지어는 그 동물적 본성을 양육시키는 종교가 여기 있었다... 또 그것은 공동체를 창출할 수 없고, 오히려 예배자의 이기적인 욕구들에 영합함으로써 진정한 공동체를 파괴하였다.
여호와와 바알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들은 전혀 다른 민족이 되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본성대로 바알을 따른다면 출애굽의 하나님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절규한 것처럼, 머뭇거림 없이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바알과 여호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으렵니까? 여호와와 바알을 함께 섬길 것이오? 여호와가 참하나님이시면 여호와를 따르고 바알이 참하나님이면 바알을 따르시오." (열왕기상 18:21, 쉬운성경)
2. 심판 아래 있는 이스라엘 국가(2)
아합왕조의 종말과 이스라엘의 중흥
우리는 이스라엘이 왜 분열되었는지, 그리고 떨어져나간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실패의 길로 치달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아합이라는 왕은 바알 종교를 공식화했고 왕비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핍박을 가했는데, 이는 북이스라엘 국가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커다란 위기가 됩니다.
예후의 쿠데타로 종결되는 아합의 왕조
아합은 선지자들의 경고에 잠시 양심의 가책을 받는 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심대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람과의 전투에서 죽고 맙니다. 그러나 아합 왕의 아들 요람이 아하시야에 이어 왕위를 물려받게 되고 변함없이 악을 행하며 나라를 다스립니다.
바알 신앙으로 물들어가는 이스라엘을 두고 보지 못했던 집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지자의 생도들'이라는 무리였는데요, 그들은 바알과 아세라 신앙을 앞세우는 아합 왕조에 맞서 보수적인 이스라엘의 정신을 지키려는 저항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 문화에 대해 극단적인 배타성을 보였습니다. 아합 왕 앞에서 이적과 기사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였던 선지자 엘리야와 뒤를 이은 엘리사는 그들의 리더 역할을 하였지요.
엘리사는 한 선지 생도를 통해 예후라는 장군에게 기름을 붓고 북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예후는 쿠데타를 일으켜 요람 왕과 이세벨, 그리고 왕의 아들 70명을 모두 죽이고 이스라엘 안에 있는 모든 바알의 선지자들을 잔혹하게 숙청합니다. 이로써 바알이라는 신에게 통째로 잡아먹힐뻔 한 이스라엘은 일단 외면적으로나마 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예후는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마자 호위병과 장교들에게 말했습니다.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을 죽여라. 한 사람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여라." 그리하여 호위병과 장교들이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을 칼로 죽이고 그 시체를 밖으로 내던졌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은 바알의 신전 내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바알 신전의 나무 우상들을 끌어 내어 불태우고, 바알의 돌 우상도 깨뜨렸습니다. 그들은 바알 신전까지 무너뜨리고 그 곳을 변소로 만들었습니다. 그 변소는 지금까지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후는 이스라엘에서 바알 종교를 없애 버렸습니다. (열왕기하 10:25~28, 쉬운성경)
「이세벨의 죽음」, 구스타프 도레
그러나 예후의 숙청은 영적으로 사실상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는 정치적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해 급진적 개혁을 했지만 이스라엘을 진실하게 정화시키는 목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미 이방종교는 다양한 우상숭배를 방해받지 않고 성행시킬 정도로 이스라엘의 피 속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겉으로는 이방종교를 근절한 것처럼 보였지만 정신적으로 이스라엘은 토착신들의 유혹에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상 겉만 바뀌었을 뿐 내면적으로 이스라엘은 아합 왕때의 정신을 그대로 갖고 있었습니다. 예후 왕 역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세운 금송아지 죄악으로부터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에 찾아온 중흥의 시대
이러한 이스라엘에 행운의 시대가 찾아옵니다. B.C 9세기 후반까지 북이스라엘은 다메섹의 아람이라는 나라로부터 극심한 괴롭힘을 당해왔습니다. 아람은 수시로 북왕국을 침략하여 비참하게 굴복시켰습니다(아합이 죽임을 당했던 것도 아람과의 전투였습니다).
아람의 유능한 장군 나아만을 아시지요? 나병에 걸린 그가 이스라엘에 병을 고쳐줄 유능한 선지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땅에 방문할 것이라는 서한을 보내자 이스라엘 왕이
"이 무슨 말이야? 우리가 제 병을 어떻게 고쳐? 우리를 침략할 명분을 만들려는거 아냐?"
라며, 두렵고 놀라서 옷을 찢을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아람은 이스라엘에게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고대국가 앗수르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며, 제국 앗수르는 북왕국의 가시와도 같았던 아람 왕국을 제압해버립니다. 게다가 앗수르는 거기에서 진군을 멈추고 이스라엘로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그 틈을 타 북왕국의 요아스 왕은 아람을 세 번에 걸쳐 격파하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오게 되지요. 그리고 앗수르 제국도 이후 50년동안 일시적으로 세력이 약화됩니다.
이런 행운의 정세를 틈타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때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데, 유다 왕 웃시야의 활약과 더불어 남북 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와 거의 비슷한 국가 크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무역이 재개되고 경제적 자원을 개발하며 국가적 부요가 찾아오는 제 2의 번영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북왕국 여로보암2세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영토, 거의 솔로몬 시대와 대등할 정도로 회복되었다.
번영의 이유
지금까지 우리는 이스라엘의 분단 이후 북왕국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참된 국가를 세우기 위해 일어났지만 이방 종교에 나라가 통째로 삼키울뻔 했고 다메섹의 아람 국가로부터 지긋지긋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앗수르 제국이라는 더 쎈 깡패(?)가 그들을 제압해 주었고 이스라엘 내부의 우상들도 예후에 의해 깨끗이 청소되었습니다. 더하여 여로보암 2세때는 솔로몬 때와 비견될 정도의 중흥을 이룹니다. 이스라엘은 서서히 옛 영광의 시대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자,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상황은 어떻게 해석되었을까요? 아래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간섭이 틀림없어. 앗수르를 도구로 사용하신거야. 그들을 통해 원수들을 징벌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나라'인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러나 열왕기서 기자는 이와 전혀 다른 역사적 해석을 내놓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스라엘에 종이나 자유자나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도와 줄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2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열왕기하 14:25~27, 쉬운성경)
이스라엘이 부강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세우신 언약 때문이며, 그들을 멸하기 즐겨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했거나 믿음이 뜨거웠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죄악 가운데 허우적대는 그들을 도와줄 자가 없음을 보시고 고난에서 건지시기 위함이었던 것이지요.
오히려 이스라엘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허우적대고 있었습니다. 국가는 영광의 시대를 다시 맞이하는 듯 했지만 사회의 내분은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허영, 공정하지 않은 재판, 물질 만능주의가 판을 쳤습니다. 종교 역시 탐욕을 기반으로 한 가증스러운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부터 믿고 있던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찼습니다. 아래와 같이 말이지요.
"고난 가운데서 우리가 드디어 일어섰다.
우리의 승리를 완성할 여호와의 날이여 어서 오소서!"
이러한 북왕국에 예언의 메시지를 던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화려함 이면에 있는 이스라엘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
게 고발합니다. 바로 드고아의 목자 출신 아모스 선지자이다.
2. 심판 아래 있는 이스라엘 국가(3)
선지자 아모스의 예언
분열 이후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의 실정과 아합의 바알 숭배로 위기를 맞이하지만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은 예후의 쿠데타로 인해 최악의 상황은 모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여로보암 2세에 이르러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야말로 여호와의 구원의 손길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의 번영의 이유에 대해 '치명적인 병에 걸린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라는 정반대의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신앙적, 사회적으로 죽음의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 오늘 소개드릴 아모스 선지자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어떤 사람인가?
소선지서로 분류되는 아모스서는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그는 남유다 드고아 땅의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로 건너와 예언했습니다!)
「선지자 아모스」, james Tissot
아모스는 드고아 마을의 목자였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때는 웃시야가 유다 왕이었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었으며, 지진이 일어나기 두 해 전이었습니다. (아모스 1:1, 쉬운성경)
그는 정식 선지자나 제사장이 아니었습니다. 아모스 자신도 본인이 정식 선지자 출신이 아님을 본문에서 직접 밝힙니다.
...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단지 목자이며, 무화과나무를 기르며 사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양 떼를 치던 나를 불러 내셔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모스 7:14~15, 쉬운성경)
아모스가 받은 단 하나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벧엘의 거대한 산당에서 드려지는 화려한 예배 가운데 나타나 울분을 토하며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모스의 메시지
저자는 아모스가 전한 메시지의 특성을 고전적(Classical)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이후 선지자들이 (근본적으로) 모두 아모스의 내용을 답습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분량에 관계없이) 그보다 결코 낫게 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아모스는 그 어떤 선지자보다 이스라엘의 죄악에 윤리적 저항으로 나아갔습니다. 본문을 가볍게 훑어만 보아도 우리는 그 속에 사회적 공의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강렬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비난합니다. (※ 앞으로 선지서의 본문 인용은 공동번역을 활용하겠습니다)
저주받아라! 너희, 공평을 뒤엎어 소태같이 쓰게 만들고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성문 앞에서 시비를 올바로 가리는 사람을 미워하고 바른 말 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너희가 힘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가는구나. 너희는 돌을 다듬어 집을 지어도 거기에서 살지 못하고 포도원을 탐스럽게 가꾸고도 거기에서 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가 나를 거슬러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지었는지, 나는 죄다 알고 있다. 죄없는 사람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물리치는 자들아! (아모스 5:7, 10~12, 공동번역)
동시에 그는 탐욕스럽고 안일하기 짝이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책망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마치 노아 시대처럼 임박한 대홍수를 앞두고 먹고 마시는데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이지요. 그의 신랄한 메시지를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저주받아라! 시온을 믿고 안심하는 자들아, 언덕 위에 자리잡은 사마리아를 믿어 마음놓고 사는 자들아, 일등 민족이라고 으스대는 유지들아, 이스라엘 가문이 믿고 찾아가는 유지들아,
...
너희가 불길한 날을 밀어내려고 하나, 결국 호되게 맞을 날을 재촉하고 있구나.
상아 침상에서 뒹굴고 보료 위에서 기지개를 켜며 양떼 가운데서 양 새끼를 골라 잡아먹고 외양간에서 송아지를 잡아먹는 것들, 제가 마치 다윗이나 된 듯 악기를 새로 만들고 거문고를 뜯으며 제 멋에 겨워 흥얼거리는 것들, 몸에는 값비싼 향유를 바르고 술은 대접으로 퍼 마시며 요셉 가문이 망하는 것쯤 아랑곳도 하지 않는 것들. (아모스6:1, 3~6, 공동번역)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엉망인 사회에 종교의식은 가장 성행했습니다. 아모스서의 상당부분이 절기와 제사의 허무함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반증이 되고 있습니다.
너희의 순례절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 냄새가 역겹구나.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1~24, 공동번역)
종교의 규모가 크다고 사회적 죄악이 치유될 수 있을까요? 아모스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소리칩니다. 공의를 짓밟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분주한 종교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분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통해 토해 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적절하지 않습니까?
아모스의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ㆍ하나님의 공의로운 법보다 탐욕과 불의를 좇는 사회는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다.
ㆍ사회를 치유하기는 커녕 사리사욕을 채우는 교회, 사회에 대한 책망이 결여된 교회는 가짜 교회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회개를 (통렬히 촉구했지만) 기대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파멸의 환상 앞에 아모스의 중보도, 하나님의 자비하신 유예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돌이킬 의사가 없었습니다. 심판은 확실하고 조만간 도래할 것이라고 그는 선언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림줄을 무시하고 지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부실공사의 총체였던 것입니다. (아모스 7:7~9)
건물의 기울어짐을 측정하는 다림줄
따라서 아모스는 장차 도래할 파멸을 실감했고, 마치 죽은 자를 대하는 것처럼 심판에 처한 국가의 운명을 슬픔으로 노래했던 것이지요.
처녀 이스라엘이 죽었구나.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구나. 그 쓰러진 곳이 타향도 아니건만 일으켜줄 사람 하나 없구나. (아모스 5:2, 공동번역)
하나님의 나라라 불리우는 이스라엘은 멸망의 운명에 처했습니다. 대체 무엇이 이스라엘을 이 지경까지 만들었던 것일까요?
택함받았다는 진정한 의미
아모스의 예언을 들은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 우리 사회가 많이 잘못된 건 인정해,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셔. 그건 오버야.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언약으로 선택하셨는지를 조금만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그런 말들을 쉽게 할 순 없을거야."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아모스가 기다렸던 말일 수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맹신해서는 안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약속', '언약'은 셀프가 아닌, 양 당사자간에 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시는 언약의 본질에는 이스라엘의 능동적인 참여가 요구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그분의 공의로운 법을 마음 다해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시내산 언약」, Jean Leon Gerome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가 상대방에게 프러포즈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나는 어떤 시련과 역경이 있어도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비바람이 불때 내가 당신의 우산이 되어 줄 것이며, 광야 길을 걸을 때 마실 물과 지팡이가 되어 줄 것입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당신이 싫어한다면 그만두겠습니다. 이처럼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십시오."
이것이 인격적이고 정상적인 청혼 아닙니까? 이제 아래의 다른 청혼을 봅시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내게는 당신의 막대한 재력과 인맥이 필요합니다. 나는 직장에서 성공해야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바쁩니다. 당신을 만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섭섭하지 않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시간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일요일 한 시간 정도는 할애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최선을 다해 짜릿하고(?) 즐겁게 해드릴테니 저를 많이 도와 주십시오."
이런 프러포즈를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결혼이 아닌 기계적인 거래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이런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셔야 하며 우리는 예배 의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예물로 그분을 섭섭치 않게 해드리면 된다' 는 생각,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어떤 관계를 바라시는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민이 없는 안일함이 그들의 치명적 질병의 원인이었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사회는 병들어가고, 역으로 종교적 행사는 화려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었다는 백성들이 실제로는 무당 굿해서 귀신을 달래는 이방 종교와 다를 것 없었던 것입니다.
아모스는 택함받았다는 것이 제멋대로 행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역설합니다. 그것은 이중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신 특별한 민족이야." 라는 이스라엘의 주장에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해 반론을 제기하십니다. 만국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 앞에 똑같이 서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가 나에게 있어 에티오피아 백성과 무엇이 다르냐?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낸 것이 나라면, 불레셋 백성을 갑돌에서 데려내오고 시리아 백성을 키르에서 데려내온 것도 내가 아니겠느냐?" (아모스 9:7, 공동번역)
아모스는 폭정과 압제를 뒤집어 엎으려는 선동가도, 사회 개혁가도, 휴머니스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하나님과의 언약이 맺어진 고대 신명기의 우물로부터 진리를 퍼올려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8세기의 모든 예언 속에서 가장 놀랄 만한 메시지를 전하는데,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라 주장하는 이들을 버리실 수 있고 또 버리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언약에 기초해 볼 때 이스라엘은 명백한 계약 위반자였습니다. 그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임하는 여호와의 날은 멸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저주받아라! 너희 야훼께서 오실 날을 기다리는 자들아. 야훼께서 오시는 날, 무슨 수라도 날 듯싶으냐? 그 날은 빛이 꺼져 깜깜하리라.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고 집 안으로 피해 들어가 벽을 짚었다가 뱀에게 물리리라.
야훼께서 오시는 날, 그 날이 밝은 날일 줄 아느냐? 아니다. 그 날은 다만 깜깜할 뿐 한 가닥 빛도 없으리라. (아모스 5:18~20, 공동번역)
국가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왕국이 세워졌을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 나라는 확실히 그분의 통치에 근접해 있었습니다. 이후 솔로몬의 세속 정치와 국가의 분열을 겪으며 백성들은 국가 체제의 한계를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가지 저항과 혁명, 숙청으로 국가 체제를 보완해보려 했습니다. 어느정도라도 하나님의 신정 질서와 가까이 가보려는 시도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무엇이었나요? 우리는 이러한 시도들로 국가가 하나님의 나라와 가까워졌다는 증거를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국가'라는 타이틀 안에 숨어 그 속에서 그분의 보호를 맹신하며 우상숭배와 탐욕을 추구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원수들 가운데 속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따름입니다. 아모스는 이런 관점에서 국가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습니다.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 국가를 거부하되, 완전히 거부하셨습니다.
따라서 국가를 하나님의 언약 대상으로 두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아모스의 메시지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이스라엘 국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모든 면에서 그렇다"고 주장합니다. 본서가 집필되던 당시가 냉전의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던 시대였으므로 북미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유혹에 더욱 빠질 수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러시아에는 하나님이 없는 무신론 국가고 미국은 교회를 가진 고상한 기독교 국가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축복하고 보호하시리라는 착각 말이지요.
사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치, 사회 요직에 신실한 기독교인이 세워지고 불신자들을 실력으로 굴복시켜 나라 전체가 기독교화 되는 이상을 우리는 꿈꿨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전도하고 선교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만들면 사회도 자동으로 교정(?)되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복과 보호를 아끼지 않으시리라는 기대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승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소망들에 대해 아모스는 철저하게 "아니오"를 외칩니다. 그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이해해 봅시다. 하나님은 그런 의미에서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상에 있는 국가를 기독교화하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불의와 탐욕, 그리고 분열이 넘치는 것을 무시하고 교세와 기독교적 영향력을 키우는데 급급한 사회, 더하여 그런 교세 확장과 화려한 예배로 죄악들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사회가 기대할 것은 멸망과 심판 뿐입니다. 아모스는 정치적 실재들이 아닌 도덕적 실재들에 관해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을 욕되게 하는 사회는 하나님의 사회가 결코 아니고 영원히 지속될 수도 없다."
저자의 글을 인용하며 2장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계속하여 기도한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적절한 기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순종적인 자녀가 아니면서 감히 어떻게 그것을 기도하겠는가? 만일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해야 한다면, 우리는 또한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의미하는 바를 진지하게 파악해야 할 것이다.<브런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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