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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존브라이트 1.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 국가

by 은총가득 2020. 9. 17.

1.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 국가 (1)

이스라엘 민족 안에 내재된 소망, '여호와의 날'

 

‘영점조정-이것은 사격이 정확하게 되도록 총을 조정하는 으로서 총기의 조준점과 탄착점이 일치하도록 가늠쇠와 가늠자를 개인에 맞게 조절하는 작업이다 .    한마디로 영점이 잘못되면 아무리 정확히 조준해도 결과는 실패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의 인생도 정확한 방향을 잡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을 낸들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심으로 충만한 사울을 만나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질문하셨던 것을 생각해 봅시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낯선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단순히 알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은 그들의 삶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그 나라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여호수아서부터 열왕기하까지 읽어보신 분들은 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국가는 분열되었고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흩어져버렸습니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이 결과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철저히 잘못된 방향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존 브라이트는 (이후로부터는 그냥 '저자'라고 부르겠습니다. 다른 책을 참조할 경우만 그 책의 저자명을 언급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시각을 그 이유로 꼽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영점을 갖고 있었고 그것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그들이 잘못되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인식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첫 메시지가 나옵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5, 개역개정)

이후에도 예수께서는 어디를 가시든 하나님의 나라(마태복음에서는 '천국')를 전파하셨습니다. 그 나라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 나라에 가려면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는지...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복음서를 제외하고는 신약에 거의 나오지 않으며, 구약에는 아예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 선포를 들었던 백성들은 예수께 "하나님 나라요? 그게 대체 뭔데요?"라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직접적인 단어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 그들에게는 그것만큼 익숙한 개념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에 대해 성경에서 몇 가지 사례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의 예언서 중 '아모스' 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아모스 5:18, 개역개정)

이 본문을 잘 살펴봅시다. 아모스 선지자는 "당신들이 그토록 여호와의 날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날이 정말 좋은 날이 될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착각이라고 책망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일단 제쳐둡시다. 중요한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모스 선지자는 이를 전제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례도 살펴볼까요? 많은 사람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이사야서를 찾아봅시다. 이사야서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여호와의 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빌론이 전에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여서 갈대아 사람들의 자랑거리였으나,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처럼 바빌론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이사야 13:19, 쉬운성경)
여호와께서 야곱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스라엘을 다시 선택하셔서 그들을 고향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외국 백성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와서 야곱 백성과 하나가 될 것이다.
여러 민족이 이스라엘 사람을 고향으로 데려다 줄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남종과 여종으로 삼을 것이다. 옛날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그들에게 사로잡혀 갔으나 이제는 그들을 사로잡고, 자기들을 압제하던 자들을 다스릴 것이다. (이사야 14:1~2, 쉬운성경)
그 날이 오면, 이새의 뿌리가 온 백성의 구원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민족들이 그를 찾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있는 곳은 영광으로 가득 찰 것이다. (이사야 11:10, 쉬운성경)

이사야 선지자는 백척간두에 있는 국가의 상황 속에서 여호와의 날을 노래하며, 그 날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국의 멸망과(13:19) 이스라엘의 회복(14:1~2), 그리고 참된 구원자가 와서 통치하는 시대(11:10)가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는 이사야만의 생각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모두의 의식속에 자리잡은 소망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이 되면 그 분이 친히 오실거야. 강대국들, 너희들이 잘난체 하지만 하나님이 너희를 다 벌하실거야. 그리고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앙망하는 민족으로 다시 세워질거야. 그 날이 오기만 한다면!" 이라는 정신이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 속에 다 있었던 것입니다.

소망의 원류(源流)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이 갈망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이스라엘이 어떤 역경을 만나더라도 인내를 할 수 있게 해 주 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생겨나게 된 걸까요? 이런 소망의 정신이 자리잡기 시작한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백성 중에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땅의 백성이 다 내게 속하였지만, 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여라. (출애굽기19:5~6, 쉬운성경)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선포되었는지 짐작하시나요? 네. 맞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출애굽 이후입니다. 출애굽은 그 자체로 큰 사건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의 표상이 되기도 합니다. 출애굽은 이집트의 압제 속에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끄집어 낸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 사건으로 이집트는 처참히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내 장자라"고 엄숙히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막판에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을 사로잡으려고 추격해 왔지만 그것은 오히려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더 큰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시내 광야의 산에서 모세를 불러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이 땅에 많은 백성들이 있지만 너희를 내가 특별히 선택해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겠다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수준으로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적 활동 가운데 자신들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며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셨음을 확신했습니다. 그 중 출애굽 후 맺은 언약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 민족 의식의 정수가 되었습니다.

 

 

시내 광야

 

여기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엉뚱한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신약은 은혜의 구원을 이야기하고, 구약은 행위의 구원을 이야기한다 ?"

 

혹시 설교를 듣다가, 혹은 성경 공부를 하다가 이런 말을 들어 보셨나요? 아마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혹은 에베소서를 주제로 하며 들은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약의 교리를 공부하다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율법'을 종종 대조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구약=율법=행위' 라는 오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고대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 -신약의 표현을 빌려- '값없는 은혜' 라는 개념에 익숙했습니다. 왜냐구요?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 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을 위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이집트의 기병들을 물 속에 함몰시키셨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했나요?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변함없는 언약을 시내산에서 맺으실 때 그들이 고안하거나 수정, 편집한 것들이 있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의 출발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그들 자신도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편' 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시는 날에는 -출애굽 시절처럼- 모든 원수들을 벌하시고 우리를 다시 일으키실거야'라는 소망을 그들의 삶 속에 뿌리내린 것입니다.

 

의식이 얼마나 강했냐 하면, 아모스로부터 예레미야에 이르는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깨우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구약의 신앙에 관해 갖고 있는 편견(율법의 종교)은 오해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언약은 신약에서처럼 항상 은혜의 언약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행위에 대한 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비판은 구약의 신앙이라기 보다, 그 당시 분위기의 유대교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 준수에 병적으로 매달리게 된 사연은 뒷부분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개념에 등장하는 핵심 인물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는 '여호와의 날'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잠시 멈추어서 눈을 감고 누구인지 맞춰봅시다.

 

너무나 많고 확실하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조금 많은 본문들을 인용하겠습니다.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걸어 주겠다. 그가 문을 열면 아무도 닫지 못하며, 그가 문을 닫으면 아무도 열지 못할 것이다. (이사야 22:22, 쉬운성경)
그 날이 오고 그 때가 되면 내가 다윗의 집안에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겠다. 그는 이 땅에서 옳고 의로운 일을 할 것이다 (예레미야 33:15, 쉬운성경)
내가 그들 위에 한 목자, 곧 나의 종 다윗을 세울 것이요, 그가 그들을 기르고 돌볼 것이다. 그가 그들을 돌보고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에스겔 34:23, 쉬운성경)
그들은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즉 너희 조상들이 살았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 거기서 영원히 살 것이요,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될 것이다 (에스겔 37:25, 쉬운성경
그런 뒤에 이스라엘 백성은 돌아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고 다윗 왕을 따를 것이다. 마지막 날에 그들은 여호와께 나아올 것이며, 주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호세아 3:5, 쉬운성경)
그 날이 오면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부서진 틈새를 막으며, 무너져 내린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 옛날처럼 다시 회복시켜 주겠다 (아모스 9:11, 쉬운성경)
그 날에 나 여호와가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을 지켜 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서 가장 약한 사람도 다윗처럼 강해질 것이다. 그리고 다윗 집안은 마치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천사처럼 되어 백성을 인도할 것이다 (스가랴 12:8, 쉬운성경)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누구인가요? 네,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할 때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가져다 준 다윗입니다. 다윗이 유명하고 믿음 좋은 인물이라는 건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이 얼마나 위대하길래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할 때 핵심 키워드 인물이 된 것일까요? 이것을 위해서는 약간이라도 이스라엘 역사를 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 국가 (2)
다윗의 등장과 이스라엘 국가의 변화

지난 글에서 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유대인들에게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그 날에 여호와께서 직접 개입하셔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시고 적들을 심판하시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정신 속에는 이러한 개념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데, 그 핵심에 '다윗'이라는 인물이 있음을 지난 시간에 많은 성경본문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어떤 업적을 세웠길래 이스라엘 민족들의 소망 가운데 '다윗'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각인된 것일까요? 이를 위해 다윗 이전의 이스라엘 역사를 간략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어떻게 바꾸어 왔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대한 어렵지 않게 설명드려야 할텐데 저도 긴장이 됩니다)

 

(1)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 카리스마 리더십의 지파 동맹 체제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 민족들이 광야에서 40년간의 방황을 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은 훨씬 일찍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한 세대가 지나서야 그것이 허락됩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여리고를 시작으로 하여 가나안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리고 정복한 땅은 열 두 지파에 고르게 분배됩니다. 그러면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자 이제부터 이곳은 이스라엘 국가야"라고 선포하며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파간의 씨족 동맹을 맺고 살았으며 국가라는 체제를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사기를 읽어 보셨지요? 주일학교 때부터 재미있게 들어온 왼손잡이 에훗, 여성으로서 이름을 날린 드보라, 소심한 영웅 기드온, 괴력의 장발 아저씨 삼손... 그들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일어나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으로 열 두 지파를 구해냈습니다. 이처럼 그 시대의 이스라엘은 상황에 따라 사사라 불리우는 이들이 나타나 지파들을 지휘하는 체제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사들이 실질적인 왕 아니냐?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왕이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미디안의 손에서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을 구해낸 기드온을 살펴봅시다. 그가 삼백 용사와 더불어 적들을 쳐부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에게 왕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를 다스리십시오. 당신과 당신의 자손들이 우리를 다스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나와 내 아들은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 (사사기 8:22~23, 쉬운성경)

 


삼백 용사들과 함께 미디안을 공격하는 사사 기드온


이와 같이 사사들은 이스라엘을 지휘했지만, 결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는 '지파적 신정정치', 즉 열 두 지파가 하나의 동맹체로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리심을 받는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엄격하고 굳건한 형태로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2) 카리스마 지파 동맹의 위기 - 블레셋의 출현
이러한 이스라엘 지파 동맹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다름아닌 블레셋이라는 민족의 도전이었습니다. 후기 청동기의 가장 약탈적인 해상 민족이었던 블레셋은, 과거 이스라엘이 점진적으로 쫓아냈거나 노예로 삼았던 가나안 원주민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철제 무기를 사용했고 봉건 군대를 거느린 귀족정치 아래 엄격한 훈련을 받고 조직되었습니다. B.C 1050년경 블레셋 족속은 당시 이스라엘이 주로 점령했던 내륙 산악지대를 향해 엄청난 대이동을 감행합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피할 수 없는 충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충돌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 박살이 나고 맙니다. 이스라엘은 첫 번째 전투에서 4천명, 두 번째 전투에서는 3만명을 잃는 처참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사무엘상 4장 참고)

 

 

블레셋의 위협 출처-베델성서연구 12과)


위의 그림은 베델성서연구 교재(컨콜디아사)에서 가져온 그림입니다. 그림 하나 하나가 이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체계화된 해양민족의 군대가 보이고 그들 앞에는 위엄있는 왕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군인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아 가지고 있습니다. 응집력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둥지둥 도망가기 바쁩니다. 카리스마 리더십은 실패했고 여호와의 백성들은 짓밟혔습니다.
왼쪽 아래에 있는 사람 머리 위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보이시나요? 네, 왕이 보좌에 앉아 있는 그림입니다. 국가 체제를 갖춘 블레셋에 유린당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앙집권화된 왕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다스릴 왕이 필요합니다. 왕이 있으면 우리도 다른 모든 나라들과 같게 됩니다.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릴 것입니다. 왕이 우리와 함께 나가서 우리를 위해 싸울 것입니다."
(사무엘상 8:19~20, 쉬운성경)

 

(3) 초대왕 사울의 추대 - 실제적 변화는 없음
지파 동맹 체제가 익숙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정으로의 전환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요. 그러던 가운데 중재자 사무엘을 통해 세워진 첫 왕이 -잘 아시듯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신장이 장대하고 용모가 준수했으며(사무엘상 9:2, 10:23) 아주 용감했고(11:1~11), 온순했으며(9:21) 관대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11:12~13). 우리는 사무엘상을 통해 사울 왕이 팔레스타인 심장부를 장악하고 있던 블레셋을 물리친 최초의 승전(13~14장)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이 사무엘로부터 책망받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당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왕이 된 사울이 지파 동맹 체제의 이스라엘을 어떻게 바꾸었냐는 것입니다. 왕이 세워졌으니 이제 이스라엘은 완전히 달라진 것이었을까요? 일단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옛 질서를 거의 바꾸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해 껍데기는 왕이었지만 실제적으로는 사사처럼 세워진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는 것이지요. 사울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구조를 거의 변경시키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결집을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국가를 창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울 체제에서는 행정 조직도 없었고 세금을 징수하지도 않았으며 궁전도 -그것을 궁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몹시 초라했습니다.
더구나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총공격을 해 온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은 그의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하고 맙니다(정확히는 자살). 그것으로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은 사라졌습니다. 블레셋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획득했고 그들의 군대는 그 땅에서 더욱 강력하게 진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다시 어두운 밤이 찾아온 것이지요.

 


Pieter Brueghel, '사울의 자결', 1562 - 길보아 전투를 16세기 모습으로 재현한 그림, 왼쪽에 자결하는 사울의 모습이 보인다


(4) 다윗의 등장 - 찬란한 왕정으로의 전환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운명을 극적으로 역전시킨, 그리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절정의 영광을 가져다 주었던 인물입니다. 다윗이 어떤 인물인가는 굳이 길게 설명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는 사울의 궁정에서 총애를 받았던 신하였고, 거인 골리앗을 죽인 영웅이었으며 백성들의 칭송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의 질투를 받아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나중에 블레셋으로 망명을 해야 할 정도로 위기를 겪었습니다.
사울이 죽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를 지배하는 왕이 됩니다(사무엘하 2:4). 곧이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죽자 다윗은 이스라엘 전역을 통치하는 왕이 되었습니다(사무엘하 5:1~5). 저자는 다윗 역시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세워졌다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사울이 왕으로 다스리고 있던 시대부터 다윗은 이런 명성을 얻습니다.
여자들은 악기를 연주하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적은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적은 만만이라네." (사무엘상 18:7, 쉬운성경)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있었지만, 백성들은 그에게 카리스마가 없었다고 판단했고 헤브론의 왕인 다윗을 추대했습니다. 즉, 다윗 왕정의 시작도 사울이나 옛 사사들과 같은 리더십에 근거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왕이 되자 이스라엘을 전적으로 변혁하려는 일련의 조치를 취합니다. 이것을 간략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위협을 '영원히' 물리쳤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분열이 수습된 직후를 노려 예루살렘을 두 차례 침공하는데, 이 전쟁에서 오히려 다윗이 승리합니다. 이후로부터 다윗은 연전연승을 거듭하여 그 대단하던 블레셋을 이스라엘에 종속시킵니다.
통일국가의 필요성을 깨달은 다윗은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습니다. 왜 굳이 예루살렘이냐?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남과 북의 중심에 위치한 도시로서, 어느 한 지파의 소유지가 아니었습니다. 수도가 어느 지파에 속해 있다면 모든 지파를 결집시키는데 방해가 되었겠지요? 다윗은 그곳을 직접 점령하여 '다윗 성'이라는 명칭을 붙입니다(사무엘하 5:6~7).
뒤이어 그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다른 가나안 도시들을 하나씩 굴복시켜 국가에 합병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모압, 암몬, 그리고 에돔의 족속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조공을 받았으며 아람국가까지 공략함으로써 엄청난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정복은 유례가 없는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닦아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북방 페니키아 연안까지, 그리고 다메섹에서 헷야즈에 이르는 무역로를 장악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는 두로의 히람 왕의 도움을 받아 해외 무역을 확장했고, 시바의 여왕도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다윗 왕의 영토 확장

 

이제 이스라엘은 이전이나 이후에는 결코 맛볼 수 없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귀는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 절정이 됩니다.


솔로몬은 해마다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를 세금으로 받았습니다. 그것 말고도 무역업자와 상인들이 바치는 금과 함께 아라비아 왕들과 이스라엘 땅의 장관들이 바치는 금도 받았습니다. 솔로몬 왕은 금을 두드려서 큰 방패 이백 개를 만들었습니다. 방패 하나에 들어간 금은 육백 세겔이나 되었습니다. ... 솔로몬 왕이 마시는 데 쓰는 모든 그릇은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레바논 수풀의 궁'에서 쓰는 모든 그릇도 다 순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은으로 만든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솔로몬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솔로몬은 이 세상의 어떤 왕보다 재산이 많았으며 뛰어난 지혜를 갖고 있었습니다. ... 솔로몬은 전차와 말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전차 천사백 대와 전차를 모는 사람 만 이천 명을 두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그들을, 전차를 두는 성과 예루살렘에 두었습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있는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은이 돌처럼 흔했습니다. 그리고 백향목은 언덕에서 자라는 뽕나무처럼 흔했습니다. (열왕기상 10:14~27, 쉬운성경)


자, 이러한 모든 것을 만들어낸 사람이 누구인가요? 다윗입니다. 지파를 통합시킨 이도 다윗이었고 왕정과 군사 체제를 만든 이도 다윗이었습니다. 이후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세금이 징수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카리스마는 왕권 체제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카리스마는 예루살렘에서 지도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세습 왕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옛 질서는 이제 남아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바뀐 것이지요.
이와같이 다윗이 만든 '국가'는 이스라엘에 황금시대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시대를 다시 맞이하지 못합니다. 문학과 문화가 그때만큼 번성한 적도 없었습니다. 유례가 없는 물질적 번영이 있었습니다. B.C 10세기에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충분히 프라이드를 가져도 되는 배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 가운데 다윗 왕국은 이제 잊을 수 없는 시대가 됩니다.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은 그들이 꿈꾸었던 그 어떤 국가보다 행복한 나라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름부으신 왕을 통해 그의 나라를 수립하셨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고난의 시대가 이르면 다윗 시대의 "그 행복했던 옛날"을 향수에 젖어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이 장차 도래할 메시야를 생각할 때, 다시 태어난 다윗, 곧 새로운 다윗을 제외하고는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다윗의 이미지는 유대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은 새로운 다윗이 와서 부강과 변영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날인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나라와 이스라엘 국가 (3)
이스라엘 국가 속에 싹트는 위험요소


지난 글에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를 따라가며 정치체제의 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스라엘은 씨족 지파 동맹 체제로 살아왔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신정체제를 유지했습니다. 민족이 위기에 빠질 때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사가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외부의 적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이러한 체제는 오래도록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철기문화를 바탕으로 중앙집권화된 블레셋 민족의 무서움을 경험하자 이스라엘도 왕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사울이 초대 왕으로 세워졌지만 그는 기존 이스라엘의 질서를 거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카리스마가 바탕이 된 리더였던 것입니다.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은 죽게 되고 이스라엘은 다시 위기에 빠집니다.
그러던 이스라엘에 다윗 왕이 등장합니다. 다윗 왕은 블레셋의 위협을 영원히 무력화시키고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정복하며 주변 국가를 속국으로 만드는 등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듭니다. 뿐만아니라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여 이스라엘을 진정한 왕정 체제의 통합 국가로 발전시킵니다. 확장된 영토를 바탕으로 한 무역은 경제적으로도 커다란 부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은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정도의 풍요를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에는 진정한 '국가'라는 왕정 체제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스라엘에 전무후무한 강함과 부요를 안겨주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했고, 그 나라의 이미지 속에는 다윗(새로운 다윗)이라는 인물이 빠질 수 없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포로로 잡은 종교
폴 존슨은 「유대인의 역사」(포이에마) 라는 책에서 왕정 체제로 넘어가는 시기의 다윗과 솔로몬을 비교합니다. 다윗은 고난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왕이 된 후, 중앙집권 체제의 필요성을 느꼈으면서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신정 체제가 약화되지 않도록 많은 고민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동시대 이방 왕들의 독재정치를 모방하지 않으려 했고, 이스라엘을 완전한 왕정 국가로 바꾸기를 주저했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인구조사(세금 징수의 전 단계라 할 수 있는)를 시행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24장). 또한 그가 숨을 거둘 때 아들 솔로몬에게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따를 것을 명령하는 장면도 바라보게 됩니다.
... 너는 훌륭하고 용감한 지도자가 되어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잘 지켜라. 그분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고, 율법에 복종하며 그분께서 말씀하신 대로만 하여라. 모세의 율법에 적힌 것을 지켜라. 그렇게 하면 너는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에게 하신 약속, 곧 '네 자손이 내 말을 잘 따르고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내 앞에서 행하기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릴 왕이 네 집안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게 하겠다'라고 하신 약속을 지켜 주실 것이다. (열왕기상 2:2~4, 쉬운성경)


다윗은 그의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죄를 뉘우칠 줄 알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속속들이 자신이 속한 세상과 그 시대의 자식이었지요. 그는 하나님의 통치원리를 무시한 채 망설임없이 이스라엘 왕정 체제로의 전환을 진행시킵니다.
솔로몬은 이방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며 강하고 화려한 이스라엘을 만들었지만, 번영과 함께 '위험 요소'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의 개인적 죄악 차원(이방 여자들과 정략 결혼을 했거나, 배교한 사실 등)에 머물러 논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월터 브루그만의 저서 「예언자적 상상력」(복있는 사람)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려 합니다.


Walter Brueggemann 의 '예언자적 상상력'
월터 브루그만은 왕정 체제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솔로몬 시대가 정의와 신앙의 관점에서 퇴보했다고 단언했으며, 세 가지 차원의 내용을 짚습니다.
첫째, 이스라엘의 풍요 이면에는 '빈부격차'라는 어두움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먹고사는 문제로 걱정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풍요는 왕국의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고, 소외된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정정치에 부합하는 사회로 진보하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둘째, 웅장한 궁궐과 성전 뒤편에 '강제 노역'이라는 억압의 정치가 있었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 그리고 그보다 훨씬 거대한 규모로 건축한 궁궐은 막대한 노동력을 동원한 결과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의 성을 재건하는 등 끊임없는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강제노역에 왕조 지파인 유다만 제외된 것은 다른 지파의 박탈감을 더욱 부추겼죠. 강압적인 정치와 무리한 건축으로 정의와 긍휼의 정신은 희미해져갔고, 백성들의 원성은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르호보암 왕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분열되는 원인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다 근본적인 요소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역할이 국가의 수호신으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브루그만은 이를 '하나님을 포로로 잡은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국가지원적 종교가 공식적으로 창출되었고 이러한 종교는 국가를 위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국가를 신성시하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브루그만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대기(waiting) 상태'로 있으며, 그에게 접근하는 일은 왕실이 통제한다. 이러한 개편으로 말미암아, 서로 얽혀 있는 두 가지 요소가 힘을 얻게 되었다. 우선, 이 개편 때문에 초월적인 저항과 항의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결과 왕에 대한 어떤 관념이라도 막힘없이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 편, 이제 왕이 독점권을 차지했으며, 그 결과 왕 주위의 사람들은 그 누구도 왕의 편에 서지 않고서는 결코 이 하나님께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는 왕에 대항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울부짖음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 바로 여기서 마르크스의 본질적 비판이 딱 들어맞는다. 종교는 기존의 경제와 정치를 정당화하고 원활히 돌아가도록 밀어준다.


저자(John Bright) 역시 이러한 위험성을 강조합니다. 국가와 예배는 서로 통합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시온산의 산당은 하나의 왕적 기구였습니다. 국가는 예배를 지원하고 예배는 국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왕은 예배 의식에서 하나님의 (양자된) 아들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착각 속으로 빠져드는 이스라엘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들이닥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가를 키우고 왕권을 공고히 하고 이방 민족과 교역을 활발히 하는 가운데 은밀한 위험 요소들은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은 이제 이방 제국의 양식을 완전히 적용시킨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보다 더 위험한 것은 이러한 풍요 속에서 싹트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대한 착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완성된 '이스라엘 왕국'이 얼마나 많은 모순점을 갖고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출애굽 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제사장 나라'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을까요? 여호와의 손으로 이루어짐을 기대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세속 문화로 가득찬 물질적 풍요와 화려함으로 만족되어버린 것이었을까요?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 왕국을 하나님 나라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그 국가 안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셨다고 착각하지는 않았을까요?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의 문제였습니다. 초반부에 제가 영점 조정을 말씀드렸었지요?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꿈꾸고 갈망하던 '하나님의 나라' 이미지는 이런 차원에서 잘못 설정된 영점이 아니었을까요? 국가 분열 이후 왕과 백성들을 미혹하던 거짓 선지자들은 이와 같은 허탄한 낙관론으로 백성들을 미혹했고 선지자들의 말씀은 그것을 부수기에 무력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옛날 이야기로 끝낼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하나님의 나라
저자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집니다. 거대한 성전과 왕궁이 있고 풍요와 안전이 보장되던 다윗 왕국... 하나님이 언제나 지켜주시던 그 나라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망했던 것처럼, 현대를 사는 우리도 그러한 나라를 지향하며,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실제로 7~80년대를 거치며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았습니다. 경제는 획기적으로 성장했으며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단숨에 진입했습니다. 교회 성도 수도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고, 수많은 선교사들을 해외로 파송했습니다. 세계가 인정하고 알아주는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과거 아픔의 역사를 생각할 때 믿기 힘든 은총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을 냉정히 분석해 보면 -솔로몬의 실패와 같이- 우리는 그 복을 감당하기에 한없이 부족한 자였다는 고백이 나올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물질의 부요로 교회는 타락했고, 성도들은 바알을 섬기듯이 맘모니즘을 숭배하며, 뉴스에서는 목회자, 리더와 선교사들의 온갖 죄악과 비리가 공개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보고 있습니다. 사회는 온갖 부조리와 불의가 판을 치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미약하기만 합니다.
일부 목회자나 성도들은 그 시대의 양적 성장을 회고하며, 하나님께서 '이만큼' 복주신 우리 나라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가, 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나라다운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측정하는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경제의 규모나 교회의 크기에 달린 것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물질의 축복이 따라올 수 있지만, 거꾸로 물질의 축복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충분한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현재의 체제 하에서 제공받는 소득 증가, 소비의 기회, 인터넷 정보, 수많은 사회 인프라, 종교의 보장, 문화의 향유에 만족하여 그 이상의 고상한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에 관심을 멈춘 것은 아닐가요?
오히려 우리는 선물로 주어진 축복들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붙들며 살고 있지는 않는 것일까요?
설상가상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 민족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그분의 보호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일까요?
이 질문들에 "그렇다"고 답해버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 자신의 물질적 충족을 위해 이용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주시고 사랑하신 우리 대한민국'을 언급할 때, 교회의 규모나 경제적 풍요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질문이 이스라엘 안에서는 어떻게 답변이 되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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