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기적(마 14:15-21)
전도 사역에 참여했던 제자들은 예수님께 돌아와서 사역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보고를 들으신 후에, 그들에게 휴식할 시간을 주시기 위해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있는 벳새다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을 본 무리들도 도보로 벳새다 광야를 향해 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곳에서도 쉬지 못하고 계속해서 사역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목자를 잃은 양처럼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친히 그들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먹여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벳세다 광야에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15)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5-16)."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것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35),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6)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막 6:35-37)"
"날이 저물어 가매 열 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있는 여기가 빈 들이니이다(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눅 9:12-13(상)).."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4).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5),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6).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4-7)."
예수님의 가르침은 벳새다 광야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어느 덧 날이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날이 저물어 가는 것을 보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에는 무리들이 먹을 음식을 구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서 무리들을 촌과 마을로 보내서 그들이 먹을 것을 구하게 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요청은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합리적이었습니다. 그 곳에 인적이 없는 광야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해지기 전에 그들을 마을로 보내서 식사를 해결하도록 조치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 날 모두 굶은 채 잠자리에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갈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요한복음을 보면 이 때에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에서 음식을 사서 이 무리들을 먹이겠느냐?"고 물으셨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이미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을 먹일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립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빌립은 5천명이나 되는 군중에게 빵을 조금씩만 먹여도 200 데나리온이 넘는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가 받는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므로 200데나리온은 노동자가 약 8개월을 일해야 벌 수 있는 큰 돈이었습니다. 만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하면, 200일 임금은 약 1000만원이나 되는 큰 돈이었습니다. 당시에 모인 사람이 남자만 5천명이었다면,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치면 최소한 1만명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000만원으로 빵을 산다고 해도 한 사람에게 1,000원정도의 빵밖에는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인적이 없는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빵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사람들을 각 마을과 촌으로 보내서 식사를 해결하게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너희 중에 떡이 얼마나 있느냐?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마 14:17)."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막 6:38)..."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나이다! 하였으니,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됨이러라(눅 9:13(하)-14(상)."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 6:8-9)"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떡이 얼마나 있는지 알아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을 먹이시기 위해서 현재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되는 지 알아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을 하실 때에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남에게 줄 것이 없다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얼마든지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 드리면,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이웃을 위해서 놀라운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가 도와야 할 사람은 없습니까? 우리는 우리 힘으로 그들을 도울 수 없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불평을 그치고, 우리가 가진 것을 예수님께 드립시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이웃들을 위해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 했습니다. 그들이 조사한 결과, 그들에게 있는 음식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소금에 절여 굽거나 말린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음식을 가지고는 두 사람도 제대로 먹기 어려웠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 급히 도보로 달려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또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들도 오랫동안 말씀을 듣는 동안에 배가 고파서 음식을 먹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날 제자들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때에 이 사실을 보고한 사람이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그 음식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다음과 말했습니다.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때에 안드레가 한 말은 모세가 광야에서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고 부르짖던 말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때에 모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민 11:13,22)"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수많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200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와 같이 지금도 예수님도 벳새다 광야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이 모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창조주이시며,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 되십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믿음으로 이 떡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전도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휴식을 주시기 위해서 벳새다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곳에서도 쉬지 못하시고 계속해서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광야였기 때문에 무리들이 음식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께 가서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서 식사를 해결하게 하자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립은 무리들을 조금씩만 먹여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남아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되는 지 알아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음식이 얼마나 있는 지 조사한 후에, 안드레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5개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습니다. 안드레는 그 것을 예수님께 가지고 와서 "이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안드레가 가지고 온 음식으로 5,000명을 먹이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축사하시고 음식을 나누어주심.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마 14:18-19)..."
"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혹 백씩 혹 오십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시매(막 6:39-41)..."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눅 6:14(하)-16)..."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요 6:10-11)."
예수님은 안드레가 가지고 온 음식을 가져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무리를 지어 앉히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 곳에는 잔디가 많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식사할만한 장소가 많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리들을 잔디 위에 50명, 100명씩 떼를 지어 앉혔습니다. 이러한 대형은 식사 분배와 야영에 적합한 대형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마치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진을 치고 야영했던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광야에서 하늘에서 만나를 비처럼 내리게 해서 200만명을 먹여주셨습니다. 또 하나님은 수많은 메추라기 떼를 보내셔서 그들이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지금 벳새다 광야에서 5,000명의 무리들을 먹여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떡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축사하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무리들을 먹여주실 것을 믿고 미리 감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바라보고 감사 기도를 하신 것은 양식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그 떡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것을 무리들에게 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도 축사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원문을 보면 제자들이 "무리들 앞에 떡과 물고기를 놓았다"는 말이 미완료형(계속적인 행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제자들이 계속해서 무리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갖다 주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떡과 물고기는 무리들이 모두 먹을 때까지 계속해서 공급되었습니다. 옛날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를 먹여주신 것처럼, 예수님도 5,000명이 넘는 무리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먹여주셨습니다.
2. 5000명이 풍족히 먹고 12광주리가 남음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 14:20-21)."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막 6:42-44)."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두니라(눅 9:17)."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2-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리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거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무리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거두었습니다. 제자들이 남은 음식을 거두어 보니 모두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본문에 사용된 광주리는 가는 가지를 엮어서 만든 작은 휴대용 광주리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벳새다 광야에서 음식을 먹은 사람이 남자만 5,000명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사람들은 50명, 100명 단위로 앉았기 때문에 숫자를 세는 일이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고로 당시에 가버나움과 벳새다의 인구가 약 2,000-3,000명 정도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남자만 5,000명이 모인 것은 매우 큰 숫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배부르게 먹이고도 12광주리나 남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여 주셨던 창조주이시며, 또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떡과 물고기를 받아서 무리들에게 나누어 준 제자들은 그 많은 떡과 물고기가 어떻게 나왔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손에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5,000명을 먹이고도 남을만큼 많이 음식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전도 사역을 마치고 온 제자들은 휴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의 육체는 피곤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예수님의 신성을 통해서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 날에 그곳에서 떡과 물고기를 먹은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고백했습니다(요 6:14). 여기에 언급된 "그 선지자"는 모세가 장차 올 것이라고 예언했던 선지자를 말합니다. 옛날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선지자가 오시면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했습니다. 1차적으로 모세가 말한 선지자는 후계자 여호수아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대신할 선지자로 여호수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모세가 말한 선지자가 예수님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를 대신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했지만, 그는 모세를 대신할 만한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모세를 대신할 선지자는 종말에 와서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모세처럼 벳새다 광야에서 수많은 무리들을 먹여 주셨습니다. 그 날 모세는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보내주실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그 분이 오면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선지자는 벳새다 광야에서 많은 무리들을 먹여 주셨습니다. 그 날에 벳새다 광야에 왔던 무리들은 '생명의 떡'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영혼의 양식을 먹었을 뿐 아니라, 육신의 양식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가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떡'입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 분에게 나아가는 사람 영생을 주는 생명의 떡을 먹을 수 있습니다.
물위를 걸어오신 예수님(마 14:22-33)
예수님은 벳새다 광야에서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무리들이 먹고 남은 떡을 모아보니 열 두 광주리나 되었습니다. 모세 때에 하나님은 광야에서 장정만 6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벳새다 광야에서 5,000명이 넘는 무리들을 먹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여주셨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육신과 영혼의 양식을 주시는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그 날 벳새다 광야를 찾아 왔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여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기적을 목격한 후에, "모세가 예언했던 그 선지자가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열광하는 무리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보고 열광하는 무리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 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기도하러 산으로 가심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22),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 14:22-2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45),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막 6:45-46)."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14).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4-15)."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명이어의 기적을 본 무리들은 모세가 예언한 '그 선지자'가 오셨다고 생각하고 열광했습니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면서 무리들은 강제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먼저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가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홀로 남아서 급히 무리들을 돌려보내셨습니다. 만일 이 때에 무리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게 되면, 예수님은 로마 당국에 의해 로마에 도전하는 정치 지도자로 인식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은 로마 당국에 의해 요주의 인물이 되어서 구원 사역을 완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열광하는 무리들을 급히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가셨고, 그 곳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신 기록이 3번 나옵니다. 이 세 번의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안식일에 행한 기적을 본 무리들이 흥분해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1:35-39). 2) 5병 2어의 기적을 본 무리들이 흥분해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6:45-). 3)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14:26-42). 이 세 가지 사건을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세 사건은 모두 다 밤에 일어났고, 군중이 열광하여 소요가 일어날 위험이 있었으며, 또 예수님께서 심각한 영적인 위기에 직면했을 때였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복음서 첫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복음서 첫 부분에서 예수님의 시험 사건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마가는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신 세 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세 가지 시험 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시험 사건에서 사단은 예수님을 1) 기적을 행하는 메시아와 2) 떡을 위한 메시아가 될 것을 요구했고, 또 3) 불법의 세력과 타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 영적인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때에 영적인 위기감을 느끼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영적인 위기가 올 때마다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시간을 통해서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시고 새로운 힘을 얻으셨습니다.
2. 바다 위를 걸으시는 예수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24).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마 14:24-25)..."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47),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은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막 6:47-48)..."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16),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17), 큰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요 6:16-18)."
예수님께서 홀로 남아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에 도착했을 때에 갑자기 큰 바람과 파도가 그 배를 덮쳤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제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서 크게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련하게 온 힘을 다해서 큰 바람과 파도와 맞서 싸웠습니다. 그들이 바람과 풍랑과 싸우는 모습은, 마치 예수님께서 악한 세력들과 싸우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홀로 영적인 전쟁을 하실 때에, 제자들이 탄 배도 강한 바람과 파도로인해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이나 떡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시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에서 북풍을 만나 크게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는 이 때가 밤 사경쯤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밤 사경은 로마 시간으로 새벽 3시-6시 사이에 해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풍랑과 맞서 싸우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가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마가는 이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탄 배를 "지나가려고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지나치려고 했다"고 번역된 말은 중요한 뜻을 가진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지나가신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 앞에서 지나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출 33:19,22). 둘째로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셨을 때에 그를 "지나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왕상 19:11). 셋째로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그가 내 앞으로 지나가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으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욥 9:8,11)." 이와 같이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하나님께서 지나가셨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위기를 만난 성도들을 구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사실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가장 적당한 때에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어려움을 당한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환난을 만난 성도들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잠시 침묵하며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적당한 때가 되면 그들에게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을 환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5병2어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모세가 예언한 '선지자'가 왔다고 생각하고 열광했습니다. 그들은 열광해서 억지로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신 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홀로 남아서 무리들은 집으로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에 제자들은 바다 한 가운에서 광풍을 만나 크게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바다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을 구원해 주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말라!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26),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 14:26-27)."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지르니(49),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막 6:49-50)."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 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19),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요 6:19-20)"
이 때에 제자들은 육지에서 십 여리 쯤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이상한 물체 하나가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놀라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를 보면 밤의 영들이 사람들을 찾아와서 재난을 갖다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우리가 바다에서 물귀신이 나타나서 항해하는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자신들이 있는 곳으로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하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안심하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가시덤불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모세는 가시떨기에 나타나신 하나님께 그 이름을 물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여호와라!"고 대답하셨습니다(출 3:14). 여기에 나오는 "나는 여호와라!"는 말을 직역하면 "나는 나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또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종종 두려워하는 백성들에게 나타나셔서 "안심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시 115:9, 118:5, 사 41:4,13, 43:1, 44:2, 51:9 참조). 복음서 기자들 역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해서 "고난 당하는 제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광풍을 만나 크게 고생할 때에,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성도들이 고통받을 때에 그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2. 베드로의 반응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28),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29),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30),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 14:28-31)..."
베드로는 그 음성을 듣고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자기도 바다 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서 바람과 풍랑이 치는 바다 위로 걸어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에 바다에 빠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지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도 바다 위를 걷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다 위를 걸어가다가 바람이 불어오게 되자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 그는 바다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크게 놀라서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손을 잡고 그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고 순종했을 때에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는 순간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께 순종하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염려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시 무력한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32).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 14:32-33)."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51),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 졌기 때문이라(막 6:51-52)."
예수님은 베드로를 건져주신 후에 제자들이 탄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강하게 휘몰아치던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배에 오르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는 순간 그렇게 미쳐 날뛰던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장면을 보고 크게 놀라서 예수님께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신 것은 예수님께서 바다를 주관하시는 창조주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 때에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걸어서 건널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바다 위를 걸으시고, 또 베드로가 바다를 걸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 동안 제자들을 괴롭히던 바람과 파도를 잠잠케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바람과 파도가 잠잠해진 것을 보고 두려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 모습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예수님이 주시는 음식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예수님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어려움이 오면 자주 우리 힘으로 해결하려고 애쓰다가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는 순간, 우리를 괴롭히던 모든 어려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의 문제는 풍랑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역경 중에도 예수님을 믿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 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14:28-33)
베드로의 믿음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음에도 수시로 믿음의 실수를 했다. 그래서 우리의 실수에 대한 변명이 되며 안도감까지 준다. 그러나 그의 믿음이 우리 생각만큼 결코 적거나 약하지 않았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라 오늘날의 신자에 비해 교리적 체계가 잡히지 않았다 뿐이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그의 열정에는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다.
본문 같은 상황에서 과연 우리라면 물에 띄어들 수 있겠는가?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이 다 죽게 되었다고 걱정할 만큼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었다. 그 캄캄한 밤에 물 위를 걷겠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시도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꿈도 꾸지 못하는 짓이다.
“만약 주시어든”(28절)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만, 그가 주님인지 아닌지 의심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미 “내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주님과 함께라면 나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충만했다. 예수님의 크신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는 “저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능력을 달라”, 혹은 “제가 뛰어 내릴 테니 주님이 저를 붙들어 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단지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했다. 말씀으로 명령만 하시면 제가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만한 믿음이 과연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어쨌든 그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졌다. 예수님도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했다. 또 그래서 지금껏, “아무리 위급하고 고통스러워도 그 환경을 보지 말고 환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승리하라.”고 배워왔다. 이 진술만 따로 떼어 보면 분명히 진리다. 신자가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본문의 상황에는 부적합한 가르침이다. 원론적으로는 옳지만 깊이 따져볼 여지가 많다.
주께 시선을 붙들어 맨 베드로
우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힐난조가 아니다. 어떻게 물에 빠지게 되었는지 잘 따져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한번 잘 생각해보라. 그 무엇보다 베드로가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 시선을 뗐을 리는 만무하지 않겠는가? 한국의 조오련이나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 같은 수영천재라도 그 상황에선 예수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물의 전문가는 물이 얼마나 무서운지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지금 베드로가 한가하게 스포츠나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야말로 역사상 어느 누구도 걸어 가보지 못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 즉, 바다 위를 걸으려는 판국이다. 주위 경관을 쳐다볼 여유라곤 없다.
성경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다고 말한다. 바람은 듣는 것이지 보는 것이 아니다.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는 것을 보았다는 뜻이다. 캄캄한 바다에 파도가 치니까 순간적으로 예수님이 안 보인 것이다. 물에 눈이 튀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을 닦으려고 눈을 비비는 사이에도 주님은 안 보였을 것이다. 다시 보려니 또 파도가 치니까 주님이 보였다 안 보였다 했을 수 있다. 큰 파도가 좀 오래 치니까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이러다 물에 빠지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났을 것이다.
베드로는 한 번도 예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거나 돌린 적이 없었을 것이다.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수록 주님 쪽만 바라봤을 것이다.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변의 여건이 예수님을 향해 갈구하는 시선마저 가로막은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칠흑 같은 바다 위에 분명히 계셨다. 또 베드로 쪽을 향해 계속 걸어오고 계셨고, 둘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베드로가 잠시 주님이 자기를 향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환난이 닥치면 새벽기도에 나오라고 강요나 권면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온다. 고난이 겹칠수록 하나님만 더욱 바라본다. 교회에 건성으로 왔다 갔다 하는 교인도 어려움을 겪으면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만약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과 그 권능이 크심에 대해 의심을 하면 기도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자꾸 응답이 지체되니까 베드로처럼 주님이 지금 가까이 오고 있고 그 거리가 단축되고 있음에 대해 망각하는 것이다. 또 그래서 환경이 커 보이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아서 환경이 크게 보인 것이 아니다. 환경이 크게 보이니까 주님을 찾았지만, 자꾸 여건이 더 어려워지므로 주님을 더 찾아도, 응답이 늦어져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말하자면 물 위를 걷는 기적에는 지금껏 배워온 내용과는 조금 다른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다.
기적의 과학적 의미
기적을 과학적으로 따지면 어떤 의미가 되는가?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그 만물이 운행되도록 일정한 법칙을 부여해 놓았다. 또 그 법칙은 마지막 날에 예수님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꿀 때까지는 한 치의 어김없이 작동하게끔 되어 있다. 예컨대 해는 영원토록 동에서 떠서 서로 지지 그 반대로 되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인간은 절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법칙도 있다. 왜냐하면 중력(重力), 부력(浮力), 만유인력(萬有引力) 같은 물리적 법칙이 작동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은 이런 엄청난 법칙들의 작동을 그가 걸어가는 주위에만 일시적으로 중지시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기적에는 다른 기적들과 구별되는 특성이 또 하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근 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서 떡과 물고기를 받아먹기만 했다. 또 불치병이 낫거나, 귀신이 쫓겨 가는 이적도 거의 전부가 주님이 일방적으로 베푼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진 12년 된 혈루병 여인의 경우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믿었다. 그러나 베드로도 주님이 나를 물 위를 걷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밤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본문의 기적에선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보다 한 차원 높은 믿음을 요구하고 있다. 또 그런 믿음이 있어야만 서너 가지 물리적 법칙을 중지시켜주셨다. 여전히 파도가 베드로 개인은 물론 배까지 삼킬 듯 흉흉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무협지 스타일로 공중 부양을 시킨 것도 아니요, 한 발이 빠지기 전에 다른 발을 움직일 수 있도록 발에 모터를 달아준 것도 아니요, 축지법을 가르쳐 준 것도 아니다.
베드로가 반드시 믿음으로 순종하여 한 발자국을 떼야만 그 발이 디디는 부분만 딱딱하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인의 믿음과 상관없이 줄지어 서서 마른 땅을 건넌 홍해나 요단의 기적과는 완전히 달랐다. 예수님은 물리적 법칙 몇을 빼고 신자의 믿음의 법칙을 하나 첨부시킨 것이다. 인간 베드로의 믿음과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권능이 반드시 톱니처럼 함께 물려야만 기적의 효능이 발휘하게끔 한 것이다.
배에 남아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서 베드로가 한 발자국을 뗄 때마다 박수와 감탄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의 발이 닫는 부분 외에는 평상시와 동일했다. 몸이 파도에 흔들려 기우뚱거렸을 것이다. 어쩌면 몸에 지니고 있던 물건이 떨어져 물에 가라앉는 경우도 있었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파도와 바람을 잠잠케 하고 수면을 고요하게 한 후에 콘크리트 바닥처럼 만들어 모든 제자가 걸을 수 있게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베드로의 몸은 흔들거렸을 것이다. 예수님이 보였다 보이지 않았다 했다. 차츰 두려움이 다가오자 그가 내딛는 발에 힘이 빠지고 그 밑의 물도 물컹물컹해지는 듯이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 예수님은 오직 베드로 개인의 믿음을 걸고 당신의 권능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두려움이 커지자 이 기적에 부여한 믿음의 법칙의 효력도 줄어들었다. 즉, 베드로의 믿음이 약해지자 주님은 물리적 법칙을 조금씩 다시 가동시킨 것이다. 그러다 급기야는 그로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든 것이다.
다른 말로 이 모든 상황을 지금 예수님이 주도하고 계셨다. 요컨대 베드로를 물에 빠트린 것도 예수님이었다. 그럼 그 캄캄한 밤중에 믿음을 걸고 엄청난 도전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너무 냉혹하고 야속하고 짓궂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성경 해석의 중요 원리
성경을 해석함에 아주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다. 한 기사나 한 문맥 안에 동일한 표현이나 내용이 반복해서 나오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포인트다. 물 위를 걷는 기적 기사인 마태복음 14장 22절에서 33절까지 정확하게 똑같은 표현과 내용이 두 번 나온다.
먼저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자 제자들은 유령인줄 오해했다.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고 했다.(26,27절) 똑같은 내용이 오늘의 본문에도 나온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아 주고 배에 함께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30,31절) 제자들과 베드로는 무서워서 소리 질렀고, 예수님은 그 즉시 구원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신자가 힘들 때에 기도하자마자 응답해주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베드로에게 부여되었던 믿음의 법칙은 지금 효력이 다했다. 고난이 겹치고 또 겹쳐서 새벽기도에 나와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했는데도 여전히 사방은 캄캄히 막혀 있다. 그래서 기도할 힘조차 나지 않고 하나님의 실존 여부마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은 살아 역사하시고 신자의 기도를 듣고 신자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환난에도 당신의 자녀에게 피할 길은 열어 놓으신다. 아무리 사방이 완전히 다 막혔어도 하늘을 향한 위쪽은 항상 활짝 열려 있다. 무서울수록 끝까지 하나님을 소리 질러 불러야 한다. 주위에 믿음이 좋은 신자들이 고개를 흔들고 목사님조차 침묵하며 포기한 듯한 표정을 지을 때에도 하나님의 권능은 손곱만큼도 줄지 않는다. 그분의 사랑은 오히려 무한대로 더 커진다.
신자의 믿음의 법칙이 산산조각이 나서 세상에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고 자기 인생이 완전히 끝이 났다고 여겨질 때에 하나님은 또 다른 법칙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 모든 허물과 고난과 실패를 바로 잡아주시는 하나님 당신의 은혜의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은 절대로 율법적, 기계적, 자동적, 인과응보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에는 법칙이라는 말이 함께 사용될 수 없다.
저도 목사이지만 목사님들이 너무 쉽게 주위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권한다. 물론 틀린 말은 절대 아니지만, 고난 때에는 누구나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 오히려 평온하고 형통할 때에 그 시선이 더 쉽게 세상으로 향하게 된다. 저도 목사지만 힘들면 주님을 찾고, 더 힘들어지면 두렵고 염려가 끊이지 않기에 죽기 살기로 주님을 붙들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의 믿음이 약해져도 혹은 자꾸 두렵거나 의심이 들어도 넘치도록 부어지기에 은혜인 것이다. 믿음이 강건하고 전혀 의심이 들지 않을 때만 은혜를 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보상이자 공로인 것이다. 인간의 어떤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부어주실 때에 은혜가 비로소 은혜다워지는 것이다.
믿음에는 법칙이 없다.
하나님 쪽의 은혜에 법칙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수 없다면, 인간 쪽의 믿음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역사는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초월하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어떤 위대한 일에도 정밀함에서 전혀 부족하지 않고, 아무리 세밀한 일에도 당신의 광대함은 함께 하신다.
믿음이란 그래서 광대하고도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가슴을 크게 열고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받아들이느냐는 차원이다. 인간 쪽의 수용의 한계를 넘어서 부어주시는 그분의 은혜를 제대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믿음과 은혜의 상관관계를 어떤 공식으로 제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신자가 그 오묘하고 아름답고 광대한 은혜의 강에 완전히 빠져 현실의 삶에서부터 세밀하고도 풍성하게 체험하고 누리며 사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라. 당신께서 모든 인간의 죄 값을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어 죄인을 구속한다는 진리는 당시나 지금이나 일반인들은 다 싫어하고 분노마저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사상, 철학, 도덕, 지혜, 종교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러나 일단 성령의 거듭남으로 그 은혜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인간이 쌓아놓은 모든 자랑거리가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 오직 예수만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귀하게 된다. 신자가 현실의 매일의 삶에서 실제로 그분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이자 은혜라는 것이다.
베드로는 당시 최고의 믿음을 가진 자였다. 주님만 믿고 따르는 열정에선 역사상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베드로 혼자만을 위해서 해와 달과 바다를 움직이는 그 엄청난 물리적 법칙을 일시 중지시켰다. 대신에 그에 상응하는 베드로 쪽의 믿음과 순종의 행위를 보이길 분명히 요구하셨다. 반드시 신자의 믿음이 따라야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위 여건이 너무 두려워서 그 믿음에 실패하자 징벌을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진짜 더 큰 은혜를 베푸셨다. “주여, 주여, 주여!”라고 교회 모임에서 결단력을 높이려는 의식 절차로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너무 힘들고 두려워서 속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울부짖음으로 주님을 부를 때에 주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주신다. 하나님만의 속력으로 달려오신다. 신자로 거의 빠질 뻔 하게는 해도, 완전히 빠져 죽게는 하지 않으신다.
위급할 때만 드리는 기도
시편 50편 15절을 보라.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여기까지는 너무나 당연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이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어 있는가?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한다”가 아니라,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다.
위급할 때만 겨우 기도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믿음이라도 하나님은 아주 기뻐하시고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다니 너무나 엄청난 은혜 아닌가? 그것도 하나님이 기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전제로 기뻐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환난을 주고선 할 수 없어서 기도하게 하고는 짐짓 모른 척하고 구해주는 즉, 병 주고 약 주는 분은 결코 아니다. 인간이 겪는 고난의 99%가 사실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 때문이지 하나님에게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진심으로 부르짖으면 건져 주신다고 한다. 사방이 막힌 것 같은 고난을 겪도록 묵인하는 것은 당신을 더 간절히 찾아서 당신을 정확하게 바로 알라는 것이다. 아는 만큼 당신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기에 당신과의 참 사랑의 관계로 초대 혹은 인도한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물 위를 실제로 걸었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상하게도 유독 베드로의 이 실패만큼은 우리 모두가 심정적으로 굉장히 아쉽게 여겨진다. 이왕이면 끝까지 물 위를 걸어서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유유히 배에 올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미련이 생긴다. 물론 그랬다면 베드로는 역사상 최고의 믿음의 영웅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조차 산산조각 났을 때에 즉시 달려와 구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는 실종될 것이다.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 주도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물에 빠트렸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베드로에게 동료 제자들 앞에서 자신을 높여보려는 소영웅주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그것까지 꿰뚫어보셨을 것이다. 그래도 주님은 그가 완전히 빠지기 전에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이 진정한 은혜라는 것이다.
기지도 못하는 아기가 일어나 걷겠다고 설친다고 치자. 뼈의 발육에 안 좋으니까 바른 부모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아기가 넘어져야 정상이고 또 부모도 넘어지도록 놓아둔다. 그러나 아기가 일어서려고 용을 쓰는 모습이 매우 안쓰럽기는 해도 너무나 귀엽고 예쁠 것이다. 나아가 아기가 억지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너무 힘을 주면서 버티면 부모로선 몸에 무리가 가겠다 싶어서 즉시로 손을 잡아주지 않겠는가?
위급할 때만 겨우 기도하는 우리의 연약한 모습에도 하나님이 영화롭게 여기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 불신자들은 자연의 물리법칙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인생은 오직 그 법칙들에 의해서만 좌우된다고 믿는다. 기적은 당연히 믿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자신을 기계나 물체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기도 응답 받는 것도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한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우연의 일치는 기도할 때에 훨씬 더 자주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자가 환난이 닥쳐야 겨우 기도를 해도 그 기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죄악과 술수가 지배하는 인간 세상에서 자신의 계획과 지혜만 믿고 행했더니 남은 것은 실패와 좌절과 상처와 고난뿐이었다는 실토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떻게 하든 그 어둡고 힘들었던 세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전한 지배를 받고 싶다는 뜻이다. 신학적으로 그런 구체적인 의미는 몰랐어도 흑암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들어오고 싶다고 부르짖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리가 있겠는가?
올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정말로 지난해의 묵은 실패, 분노, 상처, 고난 그 모든 것을 해결해달라고 주님 앞에 부르짖어 보라. 모든 짐을 그분 앞에 완전히 내려놓는다면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은혜를 반드시 누리게 될 것이다. <박신 목사> cafe. 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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