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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 시험받으심

by 은총가득 2020. 9. 15.

 

사탄 예수님 시험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마4:1-11)


구체적 사역에 앞서 40일간의 광야 생활을 체험하신 후 마귀의 시험을 받으심

예수의 세례받으심이 본격적 공생애를 시작하기 위한 첫 관문이었다면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사건은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서가 다 언급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은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으며(막1:12,13), 누가는 마태와 같이 자세히 다루고 있다(눅4:1-13). 누가의 기록은 마태와 비교할 때 그 순서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다.



1. 첫 번째 시험(1-4절)

정확한 시간 간격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지만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수세(受洗)후에 곧바로 이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암시하고 있다. 첫 번째 시험에 앞서 마태는 예수께서 시험받으실 때의 상황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1)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oJ !Ihsou'" ajnhvcqh eij" th;n e[rhmon uJpo; tou' pneuvmato" peirasqh'nai uJpo; tou' diabovlou호 예수스 아네크데 에이스 텐 예레몬휘포 투 프뉴마토스 페이라스데나이 휘포 투 디아볼루, 1절)
예수의 시험받으심에 대하여 동일한 전치사 휘포(uJpov)가 '성령'(pneuvmato"프뉴마토스)과 '마귀'(diabovlou디아볼루)에 각각 연결되어 있다. 예수의 시험에 영향을 미친 두 동인(動因)을 이야기하는 '휘포'는 수동태와 결부하여(peirasqh'nai페이라스데나이;시험을 받으러) '…에 의해'(by)라는 뜻이다. 이 전치사가 하나만 사용되어 성령과 마귀가 카이(kaiv그리고)로 연결되지 않고, 각각 따로 연결되어 사용된 것은 예수의 시험에 미친 각각 다른 영향력을 암시한다. 마귀는 예수를 유혹했고 성령은 예수를 도왔다. 이것은 개역성경은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라고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2)육체적 욕망에 대한 시험을 받으심
(nhsteuvsa" hJmevra" tesseravkonta ... Eij uiJo;" ei& tou' qeou', eijpe; i{na oiJ livqoi ou|toi a[rtoi gevnwntai. 네스튜사스 헤메라스 테쎄라콘타…에이 휘오스 에이 투 데우 에이페 히나호이 리도이 후토이 아르토이 게논타이, 2,3절)
'40일간'의 금식은 구약의 모세(출34:28)나 엘리야(왕상19:8)의 금식 경험과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며 현대에도 인간 한계의 극한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40일동안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은 예수가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 경험을 체험화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마태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묘사하기 위해 다윗 왕의 왕통을 잇는 예수의 족보를 다루고 애굽으로의 피신과 출애굽을 과거 이스라엘의 경험과 연관하여 다루는 것 등을 볼 때, 이 40일간의 광야 경험 역시 구약적 의미가 충분히 내포되어 있다. 마귀가 시험하는 첫 번째 문제는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 욕망에 대한 것이었다. 마귀는 예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Eij uiJo;" ei tou' qeou;에이 휘오스 에이 투 데우)이라고 가정하는데, 이것은 예수의 수세시 하나님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3:17)라고 말씀하신 사실에 대해서 은근하게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담고 있다. 마귀의 논리에 의하면 돌을 떡이 되게 하여 먹을 수 없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천명이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마귀의 첫 번째 시험에서 숨겨진 함정이며 두 번째 시험에서도 역시 나타난다(6절).

3)떡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 함
(Gevgraptai, Oujk ejp! a[rtw/ movnw/ zhvsetai oJ a[nqrwpo", ajll! ejpi; panti; rJhvmati ejkporeuomevnw/ dia; stovmato" qeou'게그라프 타이 우크 에프 아르토 모노 제세타이 호 안드로포스 알 에피 판티 호레마티 애크포류오메노디아 스토마토스 데우, 4절)
예수께서 마귀의 시험을 이기는 방법은 '기록되었으되'(Gevgraptai게그라프타이)로 응답하시는 방법이었다. 이 동사는 완료 수동태로 기록된 그 말씀이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A.T.Rovertson). 이 인용 구절은 신8:3의 70인역이다. 우크…모노(Oujk ... movnw…만)는 떡의 필요성 그 자체를 부인하지 않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며, 그 이상의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렇게 말씀에 근거한 삶이야말로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삶이다.



2. 두 번째 시험(5-7절)

첫 번째 시험에서 실패한 마귀는 이제 장소를 옮겨 성전 꼭대기로 가서 인간의 과시욕 혹은 명예욕에 대한 두 번째 시험을 한다. 마태와 누가가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시험을 각각 차이를 두고 기술하는 데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시도되고 있으나 두 단계의 시험에 대해 도입하는 접속사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선 마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시험에 대해 각각 토테(Tovte,5절)와 '다시'를 뜻하는 팔린(Pavlin,8절)을 사용하고 있다. 반면 누가는 카이(kai, 눅4:5)와 데(de,눅4:9)로 두 시험을 연결하고 있다. 이 접속사들을 고려하면 마태는 시간적인 순서를 고려했음을 알 수 있고, 누가는 연속성보다는 서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G.Archer).



1)명예욕에 대한 시험을 받으심
(kai; e[sthsen aujto;n ejpi; to; pteruvgion tou' iJerou', ... bavle seauto;n kavtw카이 에스테센 아우톤 에피 토 프테뤼기온 투 히에루…발레 세아우톤 카토, 5,6a절)
개역성경이 '성전 꼭대기'로 번역하는 토 프테뤼기온 투 히에루(to; pteruvgion tou' iJerou')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프테뤼기온 자체가 '작은 날개'라는 뜻이 있는 만큼 성전의 망대 중 '작은 날개'라고 불렸던 남쪽 망대일 가능성이 높다(H.A.W.Meyer, H.Alford). 이 남쪽 망대 아래로는 여호사밧 골짜기가 깊게 패여 있어서 그 높이가 더욱 높아 보였다. 마귀가 여기서 제안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즉 성전의 망대와 같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서 아무 곳도 상하지 않는다면 메시야를 기다리는 군중들의 심리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터이고, 그로 인해 예수는 그가 오신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도 이러한 명예욕과 과시욕을 부추기면서 접근해 온다.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군중들의 호기심과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여 목적은 단번에 성취하는 듯한 편법에 대한 유혹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유혹에 대해 그리스도의 해결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성경을 인용하는 마귀
(gevgraptai ga;r o{ti Toi'" ajggevloi" aujtou' ... pro;" livqon to;n povda sou. 게그라프타이 가르 호티 토이스 앙겔로이스 아우투…프로스 리돈 톤 포다 수, 6b절)
성경으로 대답하시는 예수에 대한 대응으로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용하는 시91:11의 끝부분에 나오는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는 구절을 빠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구절이 포함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고통받는 의인들을 지키실 것을 약속하는 것이지만, 이 부분이 빠진다면 마치 어떤 불의한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성도를 지킬 것이라고 약속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마귀의 성경 인용의 간계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W.Hendriksen). 마귀는 성경을 그릇되게 인용하는 방법을 통해서도 우리 성도들을 미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말씀으로 무장하여 마귀의 간계를 능히 물리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엡6:11).



3)하나님을 시험치 말아야 함
(gevgraptai, Oujk ejkpeiravsei" kuvrion to;n qeovn sou게그라프타이 우크 에크페이라세이스 퀴리온 톤 데온 수, 7절)
성경을 잘못 인용하며 시험하는 마귀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역시 게그라프타이(gevgraptai기록하였으되)였다. 신6:16을 인용하여서 하나님에 대한 시험이 부적절함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시험치'에 해당하는 에크페이라세이스(ejkpeiravsei")에서 전치사 에크(ejk)는 '격렬하고 철저함'을 뜻하며 이 동사는 매우 의도적인 시험을 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J.H.Moulton & W.F.Howard). 그리고 그 대상이 하나님이므로 불경(blasphemy)에 해당하게 된다. 비단 마귀뿐만 아니라 성도들 역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적용할 때 이런 불경을 범할 수 있다.

 


3. 세 번째 시험(8-11절)

두 번째 시험 역시 실패하자 마귀는 예수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최후의 시험을 한다. 이 시험이야말로 영적인 의미를 가진 시험이었다. 물질적인 문제와 명예의 문제를 넘어서면 종교적이고 영적인 문제로 넘어가는 것이 인간사의 일반적인 과정이다.



1)사단에게 경배함으로 세상의 모든 것은 차지하라는 시험
(Pavlin paralambavnei aujto;n oJ diavbolo" ... deivknusin aujtw'/ pavsa" ta;" basileiva" tou' kovsmou ... soi pavnta dwvsw, eja;n pesw;n proskunhvsh/" moi. 팔린 파라람바네이 아우톤 호 디아볼로스…데이크뉘신 아우토 파사스 타스 바실레이아스 투 코스무…소이 판타도소 애안 페손 프로스퀴네세스 모이, 8,9절)
'보여'에 해당하는 '데이크뉘신'(deivknusin)은 명백한 역사적 현재형으로서 마귀가 예수에게 보이는 바를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결국 이 시험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경배를 마귀에게 하면 전세계의 통치권을 주겠다는 제안이다. 여기에는 단순하지 않은 세 가지의 복합적인 유혹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영적 통치권이 아닌 세상의 권세에 대한 유혹이며, 둘째는 그것을 즉각적으로 주겠다는 제안이며, 셋째는 마귀에게 경의를 표함으로 세상 영광을 받게 한다는 유혹이었다(A.H.McNeile).



2)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함
($Upage, Satana': gevgraptai gavr, Kuvrion to;n qeovn sou proskunhvsei" kai; aujtw'/ movnw/ latreuvsei". 휘파게 사타나 게그라프타이 가르 퀴리온 톤 데온 수 프로스퀴네세이스 카이 아우토 모노 라트류세이스, 10절)
예수께서는 신6:13을 인용하여 사단의 최후의 시험에 대한 단호한 선고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참소하는 자'(diavbolo"디아볼로스,1절)요 '시험하는 자'(oJ peiravzwn호 페이라존,3절)라고 불린 마귀의 본래 이름인 '사단'을 부르시며 그에게 떠날 것을 명하신다. '프로스퀴네세이스'(proskunhvsei"경배하고)와 라트류세이스(latreuvsei"섬기다)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신약의 용례에서 점차 종교적인 의미의 경배로 그 의미가 전용된 단어들이다(L.Coenen).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에게만 경배하는 것이다(소요리문답 1문).



3)마귀의 잠시 떠남과 천사들의 수종

음식물을 갖다 드리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많다(왕상19:5,6). 적어도 여기에는 음식의 공급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F.F.Bruce, W.Hendriksen).


광야의 시험(마4:1-11)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이 사건은 예수의 '구속 사역 취임식(Inauguration Ceremony)'이었다. 이 자리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하셨다. 그 후 예수께서 곧바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 40일 금식하셨고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좋은 때가 있으면 고난의 때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살펴보며 말씀의 은혜를 나눠보자.

 

 

1. 성령에 이끌리신 예수 (1절)

 

광야는 불모의 땅이다. 낮에는 뜨겁고 밤이면 아주 싸늘하다. 들짐승이 우글거리며 먹을 것을 찾기 힘든 곳이다. 광야는 에덴동산과 정반대되는 곳이다. 인간이 죄 범함으로 가시와 엉컹퀴를 내게 된 곳이 이 세상이며 광야이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 홍해를 건너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에 40년의 광야 생활을 해야 했다. 신앙인들 역시 영원한 천국을 향해 가는 길은 광야를 지나야 함은 필수이다.

예수께서도 구속사를 완수하시기 위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심은 필수 과정이었기에, 성령께서 예수를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게 하셨다. 성령은 신앙인을 항상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지 않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지나게 하신다.

신앙인은 성령에 이끌려 움직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 성령에 이끌리어 행할 때 우리는 모든 시험을 극복하고 마침내 목적을 이루게 되며, 그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2. 40일 금식하신 예수 (2절)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 나가신 예수는 육체의 소욕을 차단하는 금식을 40일 동안 하셨다. 이것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군인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함과 같이 예수는 앞으로 전개되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려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했다. 이것이 예수의 40일 금식의 의미다.

광야 생활에서 세례 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지만 예수는 자신 스스로 금식하시고 주리신 것이다. 그는 친히 인간들이 당하는 굶주림의 고통을 겪으셨다. 많은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굶주리고 죽기도 하지만 예수는 스스로 금식하신 것이다.
금식을 왜 하는가? 누구를 위해 금식하는가?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너희를 위하여 한 것이냐?"(슥7:5-6)고 물으시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는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6)고 답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의 결박을 풀어주고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금식하셨으며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금식하신 것이다.

금식은 하나님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하나님께 매달리는 행위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죄의 결박을 풀어주시며 육체의 질병도 치유하시고 영혼에 치유의 광선을 비추시기도 하신다.

 

 

3. 마귀의 시험 받으신 예수 (3-10절, 창3:1-6, 요일2:6)

 

마귀는 시험하는 자요, 거짓말쟁이며, 살인자요 파괴자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실재를 부정하거나, 또는 모든 잘못된 일이나 심지어 자기의 실수들도 모두 마귀의 짓으로 간주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마귀는 실재하며, 루시퍼라는 천사장이 타락하여 마귀 즉 사단이 되었고 모든 귀신들은 그의 하수인들이다.

죄 없으신 예수께서 시험을 받으심은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것이며, 시험을 이기심은 우리 신앙인들이 당하게 되는 시험을 이겨내는 비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마귀가 예수께 말을 시작하여 시험한 것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말하여 예수의 마음이 자기에게 쏠리도록 유도한다. 같은 수법으로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다.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은 먹는 것에 관한 시험이며 육체와 물질의 욕심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를 첫째로 꾀었던 것과 같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며, 먹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예수에게 ”이 돌들로 떡 덩이를 만들어 보라“고 유혹했다.

 

둘째로 뱀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했다. 이는 정신적인 유혹이며 안목의 정욕을 말한다. 사람들의 관심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심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관심을 둔다. 이것은 명예욕이나 자존심 또는 지위를 탐하는 것을 말한다. 사단은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한다. 그러면 이것을 본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하는 것을 기대하라며 시험한 것이다.

 

셋째로 뱀은 하와에게 “네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권세에 도전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교만과 우상숭배를 말한다. 마귀는 예수가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말하나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영광으로 대치하려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며 이생의 자랑인 큰 죄악이다. 이러한 영적 정신적 육체적 유혹이 우리에게 항상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마귀가 하와를 꾀이는데 사용했던 것과 같이 예수를 시험하였다. 이 세 가지를 요약하면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6)"이다. 이 유혹들은 항상 믿는 자들의 주변을 배회하면서 때와 여건이 적합할 때 공격한다. 마귀는 예수께서 40일 금식하시고 심히 주리실 때 마지막에 공격하여 시험한 것이다.

 

 

4.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 (마4:4-10)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을 예수께서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신8:3, 마4:4)고 말씀하시며 시험을 이기셨다.


두 번째 시험인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했는데 예수께서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신6:16, 마7)라는 말씀으로 이기셨다.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거짓으로 유혹했다. 예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시험을 물리치고 이기셨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 들었다.

 

 

5. 신앙인이 시험을 이기는 비결?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광야로 나가셨고, 40일 동안 매 순간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셨다. 또한 그는 40일 동안 금식하셨으니, 자기 절제의 삶을 실천하였던 것이다. 즉,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요 성부 하나님을 위한 삶이며 죄 범한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준비를 하시면서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언약하신 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외우며 생활화 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마귀의 모든 시험을 “기록되었으되”(마4:4,7,10)를 말씀하시면서 마귀를 물리치셨던 것이다. 이는 “성령의 검 즉 하나님의 말씀”(엡6:17)이며, 하나님의 전신갑주에서 오직 마귀와 악을 공격하는 유일한 공격용 무기다.

 

과연 나는 매 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며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얼마나 무장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사단 마귀를 물리치는 무기인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하고 있나? 나는 늘 읽고, 듣고, 묵상하며, 연구하고, 암송하며, 또 실행하며 전하고 있는가 살펴보며 항상 말씀 안에서 말씀을 사랑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가 되자.


시험을 이기신 하나님

(마 4:1-11)

 

예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로 나아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물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임하여 하늘로부터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성령 세례를 받으셨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들린 것은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볼때, 이는 분명 시편 2:7의 말씀과 연관된 구절임에 틀림없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성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라는 것을 증언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삼하 7:14; 시 89:26-27).

 

또한 그는 분명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새로운 세상을 다스리는 새로운 왕이 되어야 할 새아담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말씀이다(사 7:14; 9:5-7; 11:1-3; 6-10). 따라서 예수께서 복음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위로부터 예수님을 가리켜 하늘로부터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마 3:17)라고 말한 것은 복음사역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에게 그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정말 아담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죄와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새아담이라면 그는 당연히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자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됨, 곧 메시야 되심의 자격을 검정하는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의 복음사역을 시작하심에 있어서 마귀의 시험을 받는 이유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은 그가 받은 세 가지 시험을 통하여 앞으로 그가 메시야로서의 해야 할 일과 그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의 방법을 제시하는 목적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첫번째 시험은 식욕에 대한  것이다

 

돌멩이로 빵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40일을 금식하신 예수께 이 보다 더 달콤한 유혹은 없을 것이다. 이 시험을 물론 사람의 식욕을 자극하는 시험이다. 뱀도 아담에게 바로 식욕을 유혹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그 지식나무의 열매는 “먹음직 했다”(3:6)고 했다. 아마도 모든 인간에게 먹고 싶은 유혹을 참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옛 속담에 “사람이 사흘을 굶으면 이웃집 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배고픔은 참기 어려운 고통이다.

 

요한 1서에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하며, “육신의 정역, 눈의 욕망, 이생의 자랑”(요일 2:15)을 들고 있는데, 사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아담과 하와가 금기의 열매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창 3:6)라고 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탐하는 목록이고, 창세기나 요한1서에서 서로 병행되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기본적인 식욕을 얼마나 조절하고 억제할 수 있는가를 보고자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 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의 필요성을 정제하시고 영의 양식을 더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40일을 금식한 극한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영의 양식을 먼저 찾고 먼저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다. 그리고 그의 복음 사역은 로마의 식민통치 아래서 헐벗고 굶주린 그의 동족들에게 아무리 현실이 비참 할지라도 먼저 살기가 힘들어도 육신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을 먼저 구하고, 돌들로 빵을 만들겠다는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버리고, 땀 흘려 일하여 먹고 살려고 해야 한다. 예수님은 마귀의 첫번째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두번째 시험은 명예욕에 대한 것이다

 

자기 과시욕이다. 아담은 유혹의 열매가 보암직했다고 했다. 요한은 안목의 정욕이라는 말을 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다. 사람의 눈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그치지 않고 자기 전시욕에 사로잡혀 자기를 과시하고 싶어한다. 마귀는 예수께서 말씀으로 지혜롭게 대답하시기 때문에 자기도 말씀으로 새로운 도전을 한다. 예수께 성전에서 뛰어 내리라고 한다. 그러면 시편 91편 11-12절에 있는 말씀대로 천사들이 그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도록 떠받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의 성전은 요사이 웬만한 빌딩 10여층 정도 높이였다. 여기서 뛰어 내리면 천사들이 그를 받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성전에 있던 사람들이 이를 쳐다보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메시야를 향하여 경배하고 찬양할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쉽게 메시야로 인정받고, 온갖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을 것이다. 구태여 고생하며 십자가를 져야 할 필요가 없이 아주 쉽게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응답하셨다. 예수께서 쉬운 방법을 택하지 않으신 것이다. 기적을 일으키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과 자신의 하시는 일을 통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믿기를 원하신 것이다. 결국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에야 자신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라는 정체를 스스로 밝히셨다. 우리 가운데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나치게 자기를 과시하며 자기를 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쉽게 성공하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누릴만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부귀 권세나 명예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마치 성전에서 뛰어 내리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여 나를 지켜 주시리라고 믿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며, 그의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는 소유욕에 대한 것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들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그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예수께 주겠다고 유혹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물러가라. 기록되어 있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만을 섬겨라’ 하셨다.”고 응답한다. 허리를 굽혀 절 한 번만 하여 온 세상을 다 가질 수 있다면 그처럼 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절이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스쿠네요”(προσυνε、ω) 라는 말은 사람 앞에 엎드려 발이나 옷에 입을 맞추거나, 상대방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땅에 입맞추는 것을 의미하나, 보통 신적 존재 앞에서 경의를 표하는 자세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자세는 단호하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신 것이다. 마귀와의 대화나 협상 자체가 되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불의한 세력을 대항하고 그들의 악을 지적하셨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 고개 숙이고 악수 한번만 하셨더라도 좀 편한 복음사역을 하실 구 있었을 텐데, 계속 이들의 위선을 들추어내고, 헤롯대왕을 향하여 여우같은 간교한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질타하셨다. 세상 나라를 얻기 위해 불의한 세력들과 손을 잡지 않으신 것이다. 이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 자존심을 굽히고, 불의의 세력과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에게 머리를 숙이고 손을 잡는 것은 정도가 아니고 결국은 그 자신을 파멸의 길로 몰아 넣는 것이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마귀의 유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마귀가 모든 시험을 끝내고 기회가 올 때까지 그 분에게서 떠나갔다.”(눅 4:13)고 기록하고 있다. 마귀는 또 다시 예수님을 찾아 올 것이다.
마귀의 시험은 새아담으로서 자격을 떠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이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또한 예수님의 시험은 앞으로 예수께서 하실 복음사역의 성격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제자들도 식욕, 명예욕, 소유욕 등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의 연대성 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고 그 욕심을 불의한 쉬운 방법으로 채우도록 부채질한다. 그러나 땀을 흘리지 않고 얻는 빵, 수고와 고난이 없이 얻어진 명예,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여 얻어진 재물은 그에게 영광을 안겨 주기는 커녕 오히려 뼈아픈 수치와 비참한 종말을 가져다 줄 뿐이다. 마귀의 유혹은 한번 이겼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우리 대문 곁에서 올가미를 가지고 우리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 식욕과 명예욕과 소유욕을 제어하고 조절할 수 없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다. 우리 성도들은 40일 금식하신 예수님을 배우려고 힘을 쓰는 것 보다는, 우리들의 취약점을 파고드는 마귀들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시는 예수님을 본받고 따르려고 힘써야 한다. 그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신학주제] - 마귀의 세 가지 시험.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은 양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공격하는 특징과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을 무력화시키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번째 시험은 사십 일 동안 금식한 예수께 돌들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는 유혹이었다.

밥의 문제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 밥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한편, 돌들로 떡 덩이를 만들라는 마귀의 유혹은 예수의 메시야직 수행보다 배고픔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먼저 채우라는 유혹이었다.

그것은 메시야 사역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준엄한 선포를 하셨다.

 

두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보호해 줄 것인즉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이었다.

이는 명예에 대한 헛된 욕망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릴 때 천사들이 그 발을 보호해 준다면,

예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유명해질 것이다.

마귀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 가운데 하나인 명예욕으로 예수를 유혹하였다.

한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유혹은 예수 자신이 그러한 메시야적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메시야 되심을 증명해 보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메시야는 자기 능력의 과시를 통해서 증명될 수 있는 직분이 아니다.

메시야는 왕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져야 할 종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기 과시를 통한 명예의 획득은 비메시야적인 일이다.

즉 마귀는 교묘하게 인간의 심성을 부추겨서 예수로 하여금 비메시야적인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었다.

 

세번째 시험은 세상 의 모든 부귀영화를 줄 터이니 마귀 자신에게 경배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적인 시험에 속한다.

경배 받으실 분은 천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밖에 없다.

마귀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경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마귀의 궤계에 대하여 단호하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셨다.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결코 없다.

글: cafe.daum.net/correcttheology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심 / 사진 12장

 

시험받으심1

 

시험받으심2

 

시험받으심3

 

시험받으심4

 

시험받으심5

 

시험받으심6

 

시험받으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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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받으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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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받으심11

 

시험받으심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