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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공생애 시작- 첫 갈릴리 사역 (마 4:12-17)

by 은총가득 2020. 9. 15.

 

 

갈릴리 사역의 시작

(마 4:12-17)


세례와 시험을 거치신 후 갈릴리 지방에서 복음 전파 사역 시작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께서 모세의 홍해 도하에 해당하는 '세례'와 40년 광야 경험인 '시험'의 과정을 마치신 후 드디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다. 본래 시간적인 순서에 무관심한 편이었던 마태는 시험과 갈릴리 전도 시작까지의 근 1년에 가까운 예수의 유대 전도를 생략하였다. 공관복음서는 일관되게 예수의 갈릴리 전도에 중점을 두고 있다.

1. 전도의 근거지를 확보하심(12,13절)


예수께서 갈릴리 전도를 시작하신 상황에 대해 마가복음이 간략하긴 하지만 본서와 거의 일치하며(막1:14), 누가복음은 요한의 잡힘에 대해 생략하고 있다(눅4:14).

1) 요한의 사로잡힘
(!Akouvsa" de; o{ti !Iwavnnh" paredovqh아쿠사스 데 호티 요안네스 파레도데, 12a절)
예수의 갈릴리 사역은 세례 요한이 일년 이상 장기적으로 옥에 갇힘으로써 선구자의 활동이 막을 내리자 시작되었다. 즉 예수가 유대에서 활동할 때에는 요한과 함께 사역한 것이 되지만 이제 요한이 잡힘으로써 예수 혼자 사역하게 되었음을 마태는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예수가 갈릴리에 돌아오시게 된 이유가 요한이 감옥에 갇혔기 때문이라는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인상을 주는 예수의 갈릴리로 오심이 요한의 사로잡힘을 '들으시고'에 해당하는 아쿠사스(!Akouvsa")라는 부정과거분사의 시제적 용법에 함축되어 있다(F.Rienecke). 이와 같은 마태의 기록은 세례 요한이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선구자적인 사람이었다는 인식을 통해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요한은 자신이 늘 말했던 것처럼 자신보다 능력이 더 크신 이가 올 때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는(3:11) 인물로 살다가 삶을 마칠 사람이었다.

2) 갈릴리 나사렛으로 물러가심
(ajnecwvrhsen eij" th;n Galilaivan아네코레센 에이스 텐 갈릴라이안, 12b절)
'물러가셨다'로 번역된 아네코레센(ajnecwvrhsen)은 본래 '가다, 출발하다'라는 뜻이었으나 때때로 '위험으로부터 탈출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H.H.Moulton & G.Milligan). 그러나 흠정역성경(KJV)은 이것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떠났다'라고 번역하고 있으며(TEV), 국제공인역(NIV)도 역시 '되돌아갔다'라고 약한 의미로 기록하지만, RSV나 NASB는 강한 의미로 '숨으셨다'라고 정확한 뜻을 살리고 있다. 이렇게 '위험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아네코레센의 올바른 뜻이라면, 마태는 이 단어를 통해 그가 생략한 예수의 유대 전도 때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같은 시기에 비슷한 장소에서 사역하던 요한이 잡힘을 들으시고 자신에게도 닥칠 위험을 피해 갈릴리 지방으로 물러나 그의 고향 나사렛으로(13절) 피신하신 것이다. 아직 예수가 잡히거나 사역을 중단당할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갈릴리 전도의 근거지가 된 가버나움
(ejlqw;n katwv/khsen eij" Kafarnaou;m th;n paraqalassivan ejn oJrivoi" Zaboulw;n kai; Nefqalivm:엘돈 카토케센 에이스 카파르나움 텐 파라달라씨안 엔 호리오이스 자불론 카이 네프달림, 13절)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난 이우는 나사렛인들의 배척 때문이었다(눅4:29-31). 하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예수의 전도 사역이 잠시 위험을 피해 온 그의 고향에 한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가 이주하신 곳은 가버나움으로서 다른 복음서들 역시 가버나움이 예수의 갈릴리 전도의 근거지가 되었다고 기록하지만, 그 이주를 기록한 사람은 마태뿐이다. 그래서 가버나움은 예수의 '본 동네'(th;n ijdivan povlin 텐 이디안 폴린, 9:1)가 되었다. 마태는 특히 메시야 예수가 가버나움에 거주하신 사실에 대해 주의를 집중하고 있다(F.F.Bruce). 이것은 특히 가버나움이 이방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해변의 어시장이었다는 점에서 본서를 읽는 유대인 청중들에게 도전을 줄만 했다. 역시 이방인들인 동방 박사의 내방 때에도 그랬지만(2:1-12),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된 곳이요 복음 전파의 중심지가 유대 지방이나 그런 도시가 아니었다는 점은 바로 복음의 우주성, 즉 탈유대주의적 성향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의 독특한 기사인 이사야 예언의 인용 부분(14-16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한편 예수께서 이곳 가버나움을 베들레헴과 나사렛에 이은 제3의 고향으로 삼으시고 정착해 사신 것은(katwv/khsen카토케센) 복음 전도를 위한 그의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증거이다. 또한 복음 전도를 위한 합리적 사고 방식도 보여주신다. 성직자들의 고집과 편견이 가득했던 유대 지역이나 심한 지방색과 질투심과 편견을 가졌던 나사렛 지역이 아니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비교적 큰 마을인 가버나움을 선교의 근거지로 택하셨기 때문이다.

2. 예언을 이루심(14-16절)

마태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예수의 가버나움 정착을 의미있게 다루면서 그 일이 구약 예언에 근거한 매우 중요한 일임을 시사하고 있다.

1) 예언의 자유로운 인용
(i{na plhrwqh'/ to; rJhqe;n dia; !Hsai?ou tou' profhvtou levgonto" ... Galilaiva tw'n ejqnw'n, 히나 플레로데 토 흐레덴 디아 에사이우투 프로페투 레곤토스…갈릴라이아 톤 에드논, 14,15절)
이 부분(14,15절)은 마태의 독특한 기사로 사9:1,2의 인용이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복음서 기자들이 70인역을 인용하는데 반해, 마태는 이 부분에서 히브리어 본문에서 자유롭게 인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구약 본문의 상황에 매이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사실상 바울 등 신약 저자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다. 본문에서 마태는 본래의 구약성경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요단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와 연결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항목들 모두를 연결시켜 16절의 '빛을 보았고'와 '빛이 비취었도다'에 연결되도록 하였다. 구약 본문에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는 예수가 정착하신 가버나움과 연관있는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이 장차 가지게 될 의미에 대해서 암시적인 전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야말로 빛을 드러내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태뿐 아니라 신약 저자들은 예수그리스도가 모든 일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신약성경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야 말로 진정한 진리요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i{na plhrwqh'/ to; rJhqe;n히나 플레로데 토 흐레덴)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예수가 이루신 독특한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한다.

2) 어두운 지역의 소외된 자들에게 전도하심
(oJ lao;" oJ kaqhvmeno" ejn skovtei fw'" ei&den mevga, kai; toi'" kaqhmevnoi" ejn cwvra/ kai; skia'/ qanavtou호 라오스 호 카데메노스 엔 스코데이, 토이스 카데메노이스 엔 코라 카이 스키아 다나투, 16c,c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찾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함이었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스라엘왕 베가 때에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이 침범하여 곤란을 겪다가 해방된 상황을 조망하고 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생명과 구원의 빛을 얻을 것이다. 오늘날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따라 소외된 자들을 향한 복음 전파를 위해 교회와 개인이 앞장서야 할 것이다.

3) 빛되신 그리스도
(fw'" eimevga, fw'" ajnevteilen aujtoi'"포스 에이덴 메가 포스 아네테일렌 아우 토이스, 16b,d절)
마태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함은 영적인 어두움과 사망의 그늘 아래 놓여 있던 곳에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비추어진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A.H.McNeile). 이 빛은 성경에서 지정한 지식이거나(시36:9)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생활(엡4:15,24), 기쁨(시97:11) 등을 가리키지만 흑암의 세력에 대한 반대어로 쓰인 '빛'(fw'"포스)이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킨다(요1:9사49:8).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둠의 세력에 있던 세상은 하나님에 대한 참다운 지식을 가지고 구원의 기쁨으로 가득 차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게 된다. 우리는 바로 빛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므로 그 빛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사명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3. 복음 전파의 메시지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17절)

예수께서는 갈릴리 전도를 위한 근거지를 확보하신 후 드디어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신다. 비록 1년 동안이나 유대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셨지만 이 갈릴리 지방에서의 첫 전파는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1) 공식적인 갈릴리 전도의 시작
(!Apo; tovte h[rxato oJ !Ihsou'"아포 토레 에륵사토 호 예수스, 17a절)
'이때부터'에 해당하는 아포 토테(!Apo; tovte)는 신약에서 마태 외에는 누가만 1회(눅16:16) 사용한 표현으로 마태가 자주 쓰는 매우 중요한 부사이다. 먼저 본절에서는 예수의 공식적인 갈릴리 전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고, 두 번째 등장하는 16:21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시점이고, 26:16은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기 시작한 때이다. 즉 이 단어를 통해 마태는 예수의 공적 사역, 수난 예고, 수난의 동기 등 매우 중요한 예수 생애의 전환점을 명시한 것이다.

2) 천국을 선언함
(khruvssein kai; levgein ... hJ basileiva tw'n oujranw'n케뤼쎄인 카이 레게인…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17b,c절)
'전파하여'에 해당하는 케뤼쎄인(khruvssein)은 3:1에서 세례 요한의 설교에 대해서도 사용된 단어로 마태가 이 단어를 예수의 천국 전파에 대해 적용하고 있는 것은 이미 옥에 갇힘으로써 중지된 요한의 사역을 예수가 이어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본래 이 동사는 '대사(大使)'에 해당하는 케뤽스(khvrux)에서 파생했다. 즉 이 동사는 '준비하면서 외치는 대사의 외침'을 뜻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이 동사는 대사 혹은 선구자가 아닌 예수의 선포를 묘사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마태가 이 단어를 예수에게 적용하는 것은 세례요한의 사역을 잇는 예수의 사역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의 연속성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지가 요한의 것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3) 회개하라는 복음을 전파함
(Metanoei'te: h[ggiken ga;r메타노에이테 엥기켄 가르, 17c절)
이 메시지는 바로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일치한다(3:2). 세례 요한은 천국의 도래와 함께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었다(F.F.Bruce). 그러나 선구자요 대사인 요한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외친 것과 그리스도가 오셔서 직접 선포한 외침이 같을 수가 없다. '회개하라'에 해당하는 메타노에이테(Metanoei'te)는 히브리어 슈브(bWv돌아서다, 회복하다, 새롭게 되다)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과 아울러 그 생활의 성향도 변화됨을 뜻한다(G.F.Moore). 세례 요한이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세례를 베풀 때 그에게 온 많은 사람들에게 각각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지적해 준 것도(눅3:7-18) 바로 회개의 근본적인 의미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러한 회개의 권유를 통한 천국의 입성이야말로 복음의 핵심 내용이며 모든 청중들이 깊이 새겨야 할 메시지이다.

 

 

 

처음 제자들을 부르심과 첫 대중 사역

(마 4:18-25)


천국을 선포하신 예수가 갈릴리에서 첫 번째 대중 사역을 시작하심
예수께서는 본격적인 갈릴리 사역을 시작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이 제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따랐던 핵심적인 인물들이다.

1. 베드로 형제를 부르심(18-20절)

베드로의 소명에 대해 마가는 본서와 유사하지만(막1:16-18), 누가는 유명한 고기잡이의 이적 사건을 기록한다(눅5:1-11). 그래서 이 기록을 다른 사건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같은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F.F.Bruce). 마태는 그의 복음서 기록 특성 중 하나인 사건을 축약해서 기술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즉 12절의 '물러가셨다'는 단어는 예수의 유대 지역의 사역을 함축하고 있으며, 또한 중풍병자의 기록에서도 '안심하라'(9:2)는 단어는 마가나 누가가 상세히 기록하는 지붕을 뚫는 장면을 생략한 효과를 충분히 내고 있다(막2:1-4눅5:17-19). 이같이 마태는 단순한 사건의 묘사가 아닌 사건의 요약 설명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1) 갈릴리 해변에서 일하던 자들을 부르심
(Peripatw'n de; para; th;n qavlassan th'" Galilaiva" ei... bavllonta" ajmfivblhstron eij" th;n qavlassan: hga;r aJliei'". 페라파톤 데 파라 덴 달라싼 테스 갈릴라이아스 에이덴…발론타스 암피블레스트론 에이스 텐 달라싼 에산 가르 할리에이스, 18절)
예수의 첫 제자들은 안드레와 시몬 제드로는 어부였다. 그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투망식의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었다. 암피블레스트론(ajmfivblhstron)은 그물을 어깨 위로 쳐들었다가 던지면 '원형'(ajmfiv암피)으로 퍼지면서 떨어지는 그물을 던질 때 쓰이는 단어이다(A.T.Robertson). 한편 20,21절에서 그물을 뜻하는 디크튀아(divktua)는 모든 종류의 그물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이를 보아 투망식 그물과 저인망식 그물 등을 통하여 어업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인망식 그물에 대해서는 13:47에서 사게네(saghvnh)가 사용되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예수께서 어업에 종사하는 자들을 현장에서 부르시는 것은 구약 시대부터 계속된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소명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모세가 양을 치는 현장에서 부름받았고(출3:1-10) 엘리사가 밭을 갈 때 부름받았듯이(왕상19:19-21), 첫 제자들도 그들의 생업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중 부름받았다. 또한 다른 제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으며(21,22절) 세리 마태도 세관에서 앉아 일할 때에 부름받았다(9:9)

2)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심
(Deu'te ojpivsw mou, kai; poihvsw uJma'" aJliei'" ajnqrwvpwn듀테 오피소 무 카이 포이에소 휘마스 할리에이스 안드로폰, 19절)
첫 제자들의 직업은 어부였다.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aJliei'" ajnqrwvpwn할리에이스 안드로폰, 사람들의 어부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미 유대 전도 때에 안드레와 베드로는 예수의 제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그의 형제 시몬 베드로와 함께 예수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요1:40-43). 하지만 지금 이 두 사람이 명령받은 것은 자신들의 직업을 버리고 전적으로 주님을 좇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베드로와 요한은 현재는 자기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예수를 따르고 그의 사역을 돕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 주가는 다소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눅5:1-11). 눅 5장에나오는고기잡이 이적 사건 이전에 베드로는 이미 예수를 잘 알고 있었던 바, 예수께서는 그의 집에 묵은 일도 있었다(눅4:38). 그러나 지금 이들은 전적인 사역을 위한 제자로 부름을 받고 있다. 더 이상 고기잡이는 하지 않고 대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요구받고 있다. 이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은 고기를 잡듯이 사람을 낚는 영적 어부라는 의미이다.

3) 제자도의 핵심인 '좇음'
(oiJ de; eujqevw" ajfevnte" ta; divktua hjkolouvqhsan aujtw'/.호이 데 유데오스 아펜테스 타디크튀아 에콜루데산 아우토, 20절) '좇으니라'에 해당하는 에콜루데산(hjkolouvqhsan)은 마태를 비롯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제자도(discipleship)를 표현하는 핵심적인 전문 용어이다. 이 용어는 당시 선생과 함께하며 그를 섬기는 자발적이고 순종적인 생도들의 행위를 잘 반영하고 있다(L.Coenen, E.Beyreuther, H.Bietenhard). 또한 이들이 예수의 부름에 대해 '즉시'(eujqevw"유데오스) 따랐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권위에 의해 말할 수 없는 감동과 능력이 마음에 작용해서 즉각적으로 행한 결정임을 반영한다.

2. 야고보 형제를 부르심(21-22절)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 뿐 아니라 야고보 형제들 역시 처음으로 택함받은 제자들이었다. 이 기사 역시 마가는 본문과 거의 유사하고(막1:19,20) 누가는 베드로, 안드로 형제와 함께 같은 마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들이 야고보와 요한이었고 그들이 이적적인 고기잡이 사건 때에 동업자로 함께 있으면서 예수께 감화를 받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눅5:10).

1)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심
(Kai; proba;" ejkei'qen eia[llou" duvo ajdelfouv", !Iavkwbon to;n tou' Zebedaivou kai; !Iwavnnhn to;n ajdelfo;n aujtou' ... katartivzonta" ta; divktua카이 프로바스 에케이덴 에이텐 알루스 뒤오 아델푸스 야코볼톤 우 제베다이우 카이 요안넨 톤 아델폰 아우투…카타르티존타스 타 디크튀아, 21a,c절)
베드로 형제와 더불어 예수의 제자들 중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야고보와 요한이 부름받는 장면이다. 베드로 형제와 동업자들이었으므로 이들이 부름받는 장소 역시 바닷가였으나, 특이한 것은 베드로 형제가 그물을 던질 때에 부름받은 반면, 야고보 형제는 '그물을 깁는'(katartivzonta"카타르티존타스) 일을 할 때에 부름받았다. 마태의 강조점은 위에서 말한 대로 첫 제자들이 그들의 생업 현장에서 부름받았다는 사실이다. 이같이 성도 된 우리들의 삶은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부름받을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2) 부모와 함께 있는 자들을 부르심
(ejn tw'/ ploivw/ meta; Zebedaivou tou' patro;"엔 토 플로이오 메타 제배다이우 투 파트로스, 21b절)
베드로 형제와 달리 야고보 형제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하는 생업의 현장에서 부름받았다. 이것은 또한 한 단계 다른 차원의 소명으로서 그들 형제가 가정의 장래 사업을 이어가야 할 책임이 있었던 것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물론 마가가 묘사하는 대로 야고보 형제들 외에도 세베대는 삯군(막1:20)들을 고용하고 있었으므로 당장 그들의 가계에는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버지와 함께하던 생업을 버리고 예수를 좇는 것은 어려운 결단을 요구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이 야고보 형제들을 부르신 일이나 그 부르심에 즉각 순종했던 형제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 가족의 정을 넘어서야 하는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19:29).


3) 모든 것은 포기하고 따르는 제자의 삶
(oiJ de; eujqevw" ajfevnte" to; ploi'on kai; to;n patevra aujtw'n hjkolouvqhsan aujtw'/호이 데 유데오스 아팬데스 토 플로이온 카이 톤 파테라 아우톤 에콜루태산 아우토, 22절)
여기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그 '배'(ploi'on플로이온)와 부친(patevra파테라)이 동일한 헬라어 음으로 시작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특히 이 두 단어들을 강조해서 읽었을 것이다. 마태는 이러한 언어 유희를 통해 야고보와 요한이 버린 것들을 강조하고 있다.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물뿐만 아니라 혈연까지도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제자이다. 왜냐하면 위에서도 당시의 핵심적인 제자도인 '좇음'에 대해 설명했듯이, 단순히 선생에게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의 생계를 돕는 섬김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삶을 통해 더 많은 가르침을 가져야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제자는 이처럼 자신의 삶의 기반 전체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주를 따라야만 한다. 진정한 제자됨은 삶 전체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헌신을 통해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3. 첫 대중 사역을 행하심(23-25절)

첫 제자들을 선택하신 예수는 갈릴리에서 처음으로 군중 사역을 시작하셨다. 본문은 그것을 요약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는 동일하게 이 부분에서 예수의 군중 사역의 핵심이 말씀 전파와 병자들의 치유라고 요약하고 있다(막1:393:7,8,10;눅4:446:17-19).

1) 천국의 두 메시지는 말씀 전파와 병자 치유
(Kai; perih'gen ejn o{lh/ th'/ Galilaiva/ didavskwn ejn tai'" sunagwgai'" aujtw'n kai; khruvsswn to; eujaggevlion th'" basileiva" kai; qerapeuvwn pa'san novson카이 페리에겐 엔 홀레 테 갈릴라이아 디다스콘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아우톤 카이 케뤼쏜 토 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이아스 카이 데라퓨온 파산 노손, 23절)
예수께서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신 후 행하신 사역들이 이곳에 요약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르치시며'(didavskwn디다스콘),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khruvsswn to; eujaggevlion th'" basileiva"케뤼쏜 토 유앙겔리온 테스 바실레아이스), 병자들을 '고치시니'(qeapeuvwn데라퓨온)가 바로 예수의 사역을 나타내는 단어들이다. 예수는 말씀을 통해 천국이란 어떤 곳인가 가르치시며 알려주셨고 각종 질병과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을 치유해 주시면서, 천국의 평화로운 모습을 실제로 보여주셨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천국을 전파하면서 행해야 할 일들도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사역으로 요약된다. 말씀을 전파하는 선교와 소외되고 병든 자들, 영혼에 상처입은 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겸해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교회는 모름지기 이 둘을 병행하면서 행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2) 예수의 소문이 이바에도 퍼짐
(kai; ajph'lqen hJ ajkoh; aujtou' eij" o{lhn th;n Surivan카이 아펠덴 헤 아코에 아우투 에이스 홀렌 텐 쉬리안, 25절)
본서에서 마태는 예수의 사역이 갈릴리에서 수행되었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국한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 처음에 가르침을 베푼 곳은 바로 유대인들의 회당이었다(F.F.Bruce). 예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인들을 향해서 사역을 하셨지만, 그 소문은 팔레스틴의 북부와 북동부에 위치한 이방 지역인 수리아에까지 퍼지게 되었다. 아펠덴(ajph'lqen퍼지니라)은 부정과거로서 이미 퍼진 사실을 암시한다. 이렇게 예수의 능력이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퍼진 것은 바로 복음의 능력이기도 하다. 마태가 본서의 말미에 기록하는 대위임명령(28:18-20)에 의하면 예수께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던 바, 이방으로의 복음 확산은 이미 예수의 선교 초기부터 시작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3) 허다한 무리가 좇음
(kai; hjkolouvqhsan aujtw'/ o[cloi polloi; ajpo; th'" Galilaiva" kai; Dekapovlew"카이 에콜루데산 아우토 오클로이 폴로이 아포테스 갈릴라이아스 카이 데카폴레오스, 25절)
본 단락에서 벌써 세 번째 등장하는 '좇으니라'(hjkolouvqhsan에콜루데산)는 단어는 생업의 현장에서 그 하던 일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모습(20절)이요, 재물과 혈연 관계도 포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모습(22절)을 가리킨다. 이제 본절에서 마태는 갈릴리 지방 뿐만 아니라 요단 강 건너편의 이방 땅, 그리고 갈릴리 바다 동편에 있던 '열 개의 도시'(Dekapovlew"데카폴레오스)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를 좇아왔다고 기록한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제목 : 나를 따라 오라

(Come, Follow Me)

성경 : 마 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로 물들어 사망 가운데 처한 온 인류를 구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주님이 먼저 하신 일은 뜻밖에도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구속주로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고 주님을 도와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맡을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이 땅에 남아 계속적으로 주님의 사역을 계승하며 교회를 이루는 사역에 모든 것을 바칠 자들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최초의 제자들을 예루살렘 같은 유식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가 아니라, 뜻밖에도 무식하고 천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 해변에서 찾아내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아무렇게나 쉽게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님을 오늘 본문이 증거합니다.

 

18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여기 ‘다니시다가’(페리파톤)란 동사는 그 원형이 ‘페리’(~의 주변에)와 ‘파테오’(~을 발로 밟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다)의 합성동사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주위를 마치 산책하듯이 여유를 가지고 거니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으로부터 당시 가장 번화한 해변 도시인 가버나움으로 이주하신 후 자주 갈릴리 해변을 거니시면서 말씀 묵상도 하시고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지켜보셨을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 천국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는 데 적합한 사람, 그리고 주님 승천 이후에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지도할 자가 될 제자를 부르기 위하여 면밀히 관찰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매우 간략하고 단호한 명령으로 주어졌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Come, follow me)”(19절).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단호한 명령 속에 들어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살펴보고,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는 우리의 영적인 자세를 가다듬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나를 따라 오라!”

 

 

1.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명령

 

19절=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자기 일상의 일을 매우 바쁘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두 사람은 형제 사이로서 벳새다 출신입니다(요 1:44).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동생 안드레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며, 먼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한 후 그의 형 베드로를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두 사람은 이 때 함께 투망그물을 던지며 열심히 고기잡고 있었습니다. 형제간에 우애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런 두 사람을 유심히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여러 가지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다시 봅시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마지막 문장인 “그들은 어부라” 앞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는 것은 그들이 어부였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어부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 삶입니까? 그들의 삶 속에 얼마나 문제가 많았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는 현장에 오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생활 속으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각자의 직업에 충성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을 때 주님은 소리없이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일에 충성하는 자를 들어 크게 사용하십니다. 주님은 게으르거나 무책임한 사람을 들어 쓰시지 않습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도 그가 목자로서 양을 몰고 있을 때였습니다. 엘리사를 부르실 때도 그가 밭을 갈고 있을 때였습니다. 심지어 세리 마태를 부르실 때도 그가 세관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특히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삶에 지쳐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이런 주님을 만난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닌 사람은 정말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이 왔다 가셔도 이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이미 준비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0절) 그들은 예수님의 소명에 즉시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주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머뭇거릴 건덕지를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을 만큼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음 장면인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21-22절=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주님의 명령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주님의 부르심에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엡 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계속되어집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처음이요 나중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시작이고 구원의 완성입니다. 믿음 학교를 졸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믿음이 증가하는 곳에 두려움은 사라지게 됩니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나를 따라 오라!”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언제 어느 때 어떤 희생을 요구하는 명령이라 할지라도 능히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2. 사람 낚는 어부로의 초청

 

19절=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의 말씀을 직역하면,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를 사람들의 어부로 만들 것이다’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절대적 주권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부르신 모습에는 당시의 관습과는 전혀 반대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당시의 관습은 제자들이 스승인 랍비를 직접 찾아가는 것이었던 반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직접 찾아 다니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의 주권과 섭리를 통해서 되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여기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말은 ‘사람들을 그물로 잡는 어부’ 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고기를 그물로 잡아들이는 어부와 같이 사람들을 복음으로써 포획한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특히 여기서는 관사 없는 복수형을 사용하여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닌 모든 인류를 복음전파의 대상으로 하여야 함을 암시합니다. 실로 전도자는 죄악의 바다에 표류해 있는 인간들을 구원의 배 안으로 모아들이는 사람 낚는 어부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못하고 가장 태만한 영역이 바로 개인 전도가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고자 함’이 분명한데도 현대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로 바로 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1년, 2년이 지나도록 한명의 영혼도 주님께로 인도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가 분명하다면, 우리는 주님에 의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자세가 주님이 원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한국교회는 영혼 구원 사역에 태만한 결과의 열매를 거두고 있습니다. 교회당 좌석을 가득 가득 채우던 6,70년대의 모습은 이제 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기쁨으로 삶의 의욕이 넘치는 성도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전도하지 않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영혼 구원에 태만했던 우리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 에스겔에게 주신 하나님의 엄위한 말씀을 기억합니다.

겔 33:8= “··· 네가 그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의 길에서 떠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우리의 오이코스들을 위하여 우리를 파숫군으로 삼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증거하지 않아서 그들이 멸망한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죄값으로 멸망하거니와 주님은 그들의 피값을 우리에게 찾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동안 전도하지 않은 죄를 아픈 마음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씨를 심고 그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시 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령의 부으심을 경험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세례를 경험하지 않고는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없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의 심령 속에서부터 전도하지 못한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먼저 나의 가까운 오이코스를 찾아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순종하는 자에게 놀라운 기쁨을 선물해 주십니다.

우리의 사역은 프로그램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예수님의 관심은 지금도 ‘사람을 낚는 데’ 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앞에 철저히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3. 전적 헌신을 요구하는 명령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향해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그들에게 전적 헌신을 요구하는 무거운 명령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전적 헌신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놀랍게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20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말씀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전적 헌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여기 ‘그물’(디크튀아)는 18절의 ‘그물’(암피블레스트론)과는 다른 것입니다. 18절의 것이 투망 그물이라면 20절의 그물은 모든 종류의 그물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사입니다. 베드로 형제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그들의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인 모든 그물을 다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어부라는 직업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속한 삶을 예수님 중심의 삶으로 완전히 전환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2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의 전적 헌신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합니다. 여기 야고보 형제가 ‘배와 부친을 버렸다’는 것은 한층 강화된 표현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삶에 필요한 물질을 제공해 주는 생업과, 육체의 안식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는 가정을 버린다는 것은 너무나 큰 희생입니다.

 

아버지 세베대가 누구입니까? 그는 예루살렘에 집이 따로 있었고, 휘하에 삯꾼들을 거느렸던 부자였습니다. 그는 당시 대제사장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요한이 후일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갈 때 베드로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부장적 사회였던 당시 유대 상황에서, 그리고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 세베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 맡긴다는 것은 전적인 헌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것도 희생할 수 있는 헌신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적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비장한 것이었습니다.

 

마 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이를 막아섰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러나 주님은 이런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할 것을 엄숙히 요구하셨습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르심이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부인(self-denial)’ 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 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부으심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적 세계입니다. 주님의 영이 나를 충만히 채울 때 내 속에 놀라운 헌신의 능력이 솟아납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만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1850년 5월 3일의 챨스 스펄젼의 ‘작은 비밀 일기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그 분의 십자가만을 사랑하고, 나의 전생애를 그 분의 뜻을 확장시켜 나가는 일과 그 분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데 바치기를 서약한다.나는 이 엄숙한 서약에 성실하기를 바란다. 바로 단 한가지 목적,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만을 염두에 두면서. 오, 주님 저를 도우사 당신을 존귀케 하며, 지상에서 살 동안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게 하옵소서!

 

윌리엄 보덴 씨는 1904년 시카고에서 고등 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큰 낙농장의 법적 상속인으로 이미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그에게 세계 일주를 시켰습니다. 그는 아시아와 중동과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고통받는 사람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마음에 큰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나는 일생을 전도사업과 그 일에 대한 준비에 바치겠습니다” 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날 그는 성경 뒷표지에 “지체할 수 없음(No Reserve)" 이라고 썼습니다.

 

윌리엄은 예일대학을 졸업하면서 좋은 보수가 보장된 일자리를 거절하고 성경 뒷장에 이번에는 “후퇴 없음(No Retreat)” 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중국에 있는 무슬림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항해하던 중 선교준비를 하려고 우선 이집트에 들렀습니다. 이곳에서 그만 뇌막염이 발병하여 한 달도 못되어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겠지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던 게야. 헛된 일을 했었군!”  그런데 윌리엄 보덴의 성경 뒷장에는 위에 썼던 두 가지의 결심 밑에 “후회 없음(No Regret)” 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생애의 어떤 때든지 적용이 됩니다. 지금 나는 이 순간에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지금 여러분의 가슴에는 타오르는 열정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열정입니까?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시는 주님을 따라 자신의 남은 생애를 복음 전파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했던 제자들의 뜨거운 심장 박동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나오는 말]

 

“나를 따라 오라” -- 이 말은 관심의 촛점을 오직 예수님께로만 향하라는 권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 당신을 따라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 오라’는 명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서 순전히 자기만을 뒤따를 것을 원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의 계획에 따라 우리 스스로 인생행로를 결정하고 이에 대하여 책임지는 삶을 살아왔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후로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오직 그분의 뜻만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믿음의 결단을 내립시다. 영혼 구원을 향한 작은 발걸음이라도 내디딥시다. 아직까지 주님께 내맡기지 못한 부분을 전폭적으로 내어맡깁시다. 나를 부인하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로 굳게 결심합시다.

마라나타, 주님이 속히 오십니다<박순오>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심, 두치오, 13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