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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 13장 천국비유들

by 은총가득 2020. 9. 8.

 

마태복음 13장 원어 강해

 

마 13:1~9 씨뿌리는 자의 비유

복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

13장에는 7개의 비유가 담겨있다. 이 비유들은 천국이란 주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본 문단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천국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4가지로 분류하여 다루고 있다.

1. 바닷가에서 교훈을 베푸심(1-3절)

예수님의 전도 근거지인 가버나움은 갈릴리에 있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가 모일 수 있는 바닷가에서 교훈을 베푸셨다.

1) 바닷가에 앉으심
(!En th'/ hJmevra/ ejkeivnh/ ... ejkavqhto para; th;n qavlassan ;엔 테 헤메라 에케이네…에카데토 파라 달라싼,1절)
'그날에'란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방문하였던 날을 지칭한다. 그 동일한 날에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갈릴리 호수로 나갔다. 본문에서는 '집에서 나가사'로 되어 있는데, 이 집은 아마 베드로의 집일 것을 짐작된다(36절;8:14;12:46).
예수께서 앉으신 '바닷가'는 파라 텐 달라싼(para; th;n qavlassan)이라 했다. 달라싼(qavlassan)이란 육지 안에 있는 큰 물(호수)을 가리키는 말이며, 페라고스(pelago";18:6;행27:5)는 해양으로서의 바다를 가리킨다. 본문의 바다는 물론 갈릴리를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 바닷가에 앉으셨다. 카데마이(kavqhmai;앉다. 정착하다)라는 동사가 직설법 미완료중간태 3인칭단수로 쓰여진 에카데토(ejkavqhto)라는 말은 마태의 입장에서 볼 때, 특별한 목적을 둔 행위를 뜻하지 않는다.

2) 큰 무리가 모여듬
(kai; sunhvcqhsan pro;" aujto;n o[cloi polloiv ... ejpi; to;n aijgialo;n eiJsthvkei ;카이 쉰에크데산 프로스 아우톤 오크로이 폴로이…에피톤 아이기아론 헤이스테케이,2절)
많은 사람들이(o[cloi polloiv;오클로이 폴로이) 예수께서 바닷가에 계심을 알고 모여들었다(막4:1). '모여들었다'는 동사 쉰에크데산(sunhvcqhsan)은 쉰아고(sunavgw;함께 모이다)라는 동사가 직설법 제1단순과거 수동태 3인칭복수로 쓰인 것으로 예수님을 중심하여 모여든 사실을 말한다.
모여든 무리들이 많아지자, 예수께서는 배를 띄우고(눅5:3) 해변에 선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시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므로 예수께서는 모인 무리들을 잘 볼 수 있고, 또 음향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해변'은 아이기아로스(aijgialo";해변, 물가, 육지, 요21:4)인데 이는 모래와 자갈이 덮인 해변을 암시하고 있다.

3) 비유로 말씀하심
(kai; ejlavlhsen ... ejn parabolai'" levgwn ;카이 엘랄레센…엔 파라볼라이스 레곤,3절)
명사 파라볼레(parabolhv)는 여격 여성복수로 쓰여졌다. 이 파라볼레라는 말은 본래 '곁에 놓다'또는 '곁에 던져진'이란 뜻을 지닌다. 여기서는 '비교, 비유, 예증'이라는 의미가 부여 된 것 같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7회, 마가복음에서 13회, 누가복음에서 8회 사용되었고, 히브리서에서는 2회 사용되었다.
이러한 비유는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 되었다. 특히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한 교훈에 정통하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법칙들을 통하여 차원 높은 영적, 윤리적 교훈 속으로 인생들을 인도한다. 예수께서 일상적인 삶을 등한히 하지 않았고, 그 속에서 일정한 법칙과 교훈을 이끌어 내셨듯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애정과 관심으로 살피기만 하면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또 예수께서 쉬운 것을 통하여 높은 영적인 교훈을 주셨듯, 목자는 쉽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2. 길가와 돌밭에 떨어진 씨앗(4-6절)

본 단락에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중에 나타난 마음들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길가와 돌밭이란 각각 천국 복음을 듣고 처음부터 마음을 닫아 버린 자와 응답을 말한다. 막4:4-6과 눅8:5,6이 병행 본문이다.

1) 길가에 떨어진 씨앗
(a} me;n e[pesen para; th;n oJdovn ... peteina; katevfagen aujtav ;하 멘 에페센 파라 텐 호돈 …페테이나 카테파겐 아우타,4절)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더러는'(a} me;n;하 멘) 길 가에 떨어졌다. 호돈(oJdovn;길)이라는 말은 목적격 여성단수로 사용되었는데, 파라 텐 호돈(para; th;n oJdovn)은 '길 가'라는 뜻보다는 '길을 따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팔레스틴에서는 이랑 사이가 보통 길 모양으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왕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랑 사이는 단단히 굳어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씨앗을 뿌릴 때에도 얼마간의 씨앗은 이 단단한 길바닥이랄 수 있는 이랑 사이에 떨어졌다. 예수께서는 이 점을 잘 알고 계셨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대개 새들의 몫이 되었다. 페테이나(peteina;)는 일반적인 날짐승을 말하고 있는데, 관사가 붙은 것으로 보아서는 예수의 교훈에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이 머리에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새일 것이다. '먹어 버렸다'는 말은 카테스디오(katesvqiw;먹어 없애다. 써 버리다)인데, 본문에서는 직설법 제2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단수로 사용되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의 비유는 편견이나 교만 등으로 천국 복음이 전혀 효과를 거둘 수 없는 닫혀진 마음을 말한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다져져 어떤 반응도 나타낼 수 없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2)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
(e[pesen ejpi; ta; petrwvdh ... eigh'n pollhvn ;페센 에피 타 페트로데…에이켄 겐 폴렌,5절)
에페센(e[pesen)은 '떨어지다'라는 동사로 직설법 제2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단수이다. 단순히 씨앗이 떨어진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전치사 '-위에'(ejpiv)의 목적어 페트로데(petrwvdh)는 페트라(pevtra)라는 중성명사의 목적격복수로 사용된 것이다. 원문은 그냥 '돌'이지만, 여기서는 돌밭이라 하는 것이 좋다. 돌밭은 흙이 많지 않은 밭이다. 본문에는 겐 폴렌(gh'n pollhvn)을 부정사 우크(oujk)가 이끌고 있다. 여기서 겐(gh'n;흙, 땅, 세상)이란 명사는 '많다'는 형용사 폴렌(pollhvn)의 수식을 받고 있어 '흙이 많은'의 뜻이다.
예수께서 팔레스틴에 있는 대부분의 땅이 밑은 석회암층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흙이 얇게 덮여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땅은 10㎝만 파도 돌이 나오는데, 대낮의 역기로 쉽게 달구어져 식물들의 뿔 리가 마르곤 한다. 바로 그러한 땅을 비유에 담으신 것이다.

3) 뿌리가 말라 버림
(de; ajnateivlanto" ... mh; e[cein rJivzan ejxhravnqh ;헬리우 데 아나테이란토스… 메 에케인 리잔 에케란데,6절)
헬리오스(hJlivo";해, 햇빛)는 속격명사로 사용되었다. '솟아 오르다'는 동사 아나텔로(ajnatellw)는 단순과거분사 능동태 속격남성 단수로 쓰여졌다. 팔레스틴에서는 태양이 뜨고 짐에 따라 온도 차이가 커서 결국 식물들은 며칠 못 가서 뿌리부터 타 들어가 말라죽고 만다.
에케란데(ejxhravnqh)는 크세라이노(xhraivnw;말리다, 마르게 하다)라는 동사의 단순과거 수동태 3인칭단수인데, 태양의 뜨거움으로 뿌리가 마르게 되어짐을 표현하고 있다. 천국 복음에 잠깐 반응할지라도 이와 같이 오래 견디지 못하고 근본부터 말라버리는 경우는 많다.

3. 가시밭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7-9절)

본 단락에서는 씨앗 뿌리는 자의 비유에 들어있는 마음 밭을 설명하고 있다. 가시밭은 세상 염려 등으로 결실치 못하는 마음 밭을 말하고, 좋은 땅은 천국 복음이 충분히 결실하는 마음 밭을 말한다. 막4:8과 눅8:8에서 병행되고 있다.

1)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앗
(e[pesen ejpi; ta;" ajkavnqa", kai; ajnevbhsan ... e[pnixan aujtav ;에페센 에피 타스 아칸다스 카이 아네베산…에프닉산 아우타,7절)
어떤 씨앗은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다. 가시떨기는 아칸다스(ajkavnqa")인데, 아칸다(ajkavnqa)가 목적격여성복수로 쓰인 것이다. 여기서 아칸다란 '가시가 돋은 식물'을 말한다(7:16;눅6:44;히6:8).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다지만, '위에'라기보다는 그 '사이'나 '속에' 떨어진 것이 맞다. 떨어진 씨앗이 '자란다'는 말을 여기서는 아네베산(ajnevbhsan)이라 했는데, 이는 아나바이노(ajnabavinw;기어오르다, 상승하다, 자라다)라는 동사가 직설법 제2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복수로 사용된 것이다. 자랐다고 했을 때는 가시떨기도 자라고 농부가 뿌린 씨앗도 자랐다는 말이다. 그 자란 가시떨기는 씨앗으로부터 자라 오른 식물을 찌르게 된다. 그래서 결실이 없다(막4:7). 가시떨기는 언제나 좋은 씨앗보다 성장력이 완성하여 좋은 씨의 기운을 막는다(막4:7). 본문의 아우타(aujtav)라는 대명사는 씨앗으로부터 발아하여 자란 '식물'을 가리킨다.

2)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
(ejpi; th;n gh'n th;n kalh;n kai; ejdivdou karpovn ; 에피 텐 겐 텐 칼렌 카이 에디두 카르폰, 8절)
학자들 중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오히려 '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Barclay, D. A. Carson). '좋은 땅'은 텐 겐 텐 칼렌(th;n gh'n th;n kalh;n)이다. 칼렌(kalh;n)은 '아름다운, 좋은'이란 뜻을 지닌 형용사 칼로스(kalov")의 목적격 여성단수로 여기서는 여성명사 '땅'(gh'n;겐)을 수식한다. 이렇게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 목적격 남성단수로 쓰여진 카르폰(karpovn)은 원래 나무에 열린 열매를 가리키나(12:33;막11:14;눅6:44;고전9:7), 어떤 일에서 기인된 결과나 산물을 나타내기도 한다(7:16;21:43). 에디두(ejdivsou)라는 말은 디도미(divdwmi;주다 나누어 주다)라는 동사가 직설법 미완료능동태 3인칭단수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열매는 씨앗이 떨어진 시점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열매가 맺어지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이 가능하다. 실제로 낟알 하나가 백 배의 결실로 이어질 수 있음은 농부들이라면 잘 알고 잇다. 천국 복음을 듣고, 응답하는 마음들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복음을 받아들여 잘 자라게 될 때에는 백 배의 수확을 거두어 들이는 결과가 나타난다. 천국 복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일은 다 마찬가지이다.

3) 귀 있는 자는 들으라
(oJ e[cwn w&ta ajkouevtw ;호 에콘 오타 아쿠에토,9절)
본문에서 호(oJ)는 정관사이지만 주격남성단수로서 대명사 요업으로 사용되었다. 즉 그 말은 귀 있는 자라는 뜻이다. 명령법현재 능동태로 쓰여진 아쿠에토(ajkouevtw)는 아쿠오(ajkouvw;듣다. 들리다)란 동사이다. 이러한 구절은 11:15;13:43에도 나타나고 있다.
귀 있는 자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이해할 뿐 아니라,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가다듬어져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진리를 향하여 의욕에 차 있는 사람들만이 진리에 대하여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닌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들을 말씀하시면서 비유를 이해할 만한 귀를 가진 자를 일차적으로 생각 하셨고, 더 나아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사모하여 듣고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마음에 두셨다(렘6:10)

마 13:10~23 비유가 지닌 목적

효과적인 천국 복음의 전달 수단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시는 의도는 천국 비밀을 어떤 사람들에게는 제한하려는 것같이 보이지만,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자로 더 풍성하게 하고, 영적인 불구자의 상태를 명백히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앞서 교훈하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해석하여 주신다(막4:10-20;눅8:9-15).

1. 비유를 통한 예수의 의도(10-12절)

비유를 사용하시는 뜻은 천국의 비밀을 아는 자, 진리를 아는 자로 더욱 풍성케 하시려는 목적이 있음을 알리신다.

1) 제자들이 비유의 의도를 물음
(Kai; proselqovnte" oiJ maqhtai; ... Dia; tiv ejn parabolai'" lalei'" aujtoi'" ;카이 프로셀돈테스 호이 마데타이…디아 티 엔 파라볼라이스 랄레이스 아우토이스,10절)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왔다'는 말, 프로셀돈테스(proselqovnte")는 제2단순과거분사 능동태 주격 남성복수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동사가 의미하는 바는,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간 시점이 에이판(ei; 말하다, 지지하다)이라는 제2단순과거 능동태 동사보다 앞선 것을 나타낸다.
한편 대명사 아우토이스(aujtoi'")는 '저희들'로 번역되었는데, 아들은 어떤 특징 집단을 말하기보다는 '제자들 밖의' 사람들을 통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막 4:10은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제자들과 함께한 사람들'(oiJ peri; aujto;n toi'" dwvdeka;호이 페리 아우톤 쉰 토이스 도데카)이 그 비유에 대하여 물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된다.

2) 천국 비밀의 제한성
(o{ti uJmi'n devdotai gnw'nai ta; musthvria ... ejkeivnoi" de; ouj devdotai ;호티 휘민 데도타이 그노나이 타 뮈스테리아…에케이노이스 데 우 데도타이,11절)
천국의 비밀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제한되어 있다. 본문에 나타나는 비밀(뮈스테리온 musthvrion;신비, 비밀 교리)이란 말은 그냥 비밀이 아니다. 입문한 사람들에게만 비밀리에 전달되고 교육되어지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 안에 들어가지 않은 자는 그 내용을 전혀 알 수 없다.
예수께서도 그러한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의 제자가 되지 않는다면, 그의 비유를 깨달을 수 없다. 모두에게 열려진 비유나 진의는 알 만한 사람만이 알게 되는 제한성이 있다. '허락되었다'는 말은 디도미(divdomi;주다)라는 동사를 직설법 현재분사 3인칭단수로 쓰고 있다. 즉 '아는 것이 주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현재분사를 쓰고 있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하는 시각과 일치되는 시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3) 있는 자가 더 받게 됨
(o{sti" ga;r e[cei, doqhvsetai aujtw'/ kai; perisseuqhvsetai ;호스티스 가르 에케이 도데세타이 아우토 카이 페리슈데세타이,12절)
호스티스(o{sti")는 의문사이지만, 여기서는 대명사적 관계사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불특정의 '가진 자'를 나타내고 있다.
좀 잔인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가진 자들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된다는 것이다. 받게 될 것이란 말은 도데세타이(doqhvsetai)라고 하여, 디도미(divdomi)가 직설법 미래수동태로 쓰였다. 그들은 받되 풍족히 받게 될 것이다.
페리슈데세타이(perisseuqhvsetai)는 페리슈오(perisseuvw;넘치다, 풍부하다)라는 동사의 미래수동태 3인칭단수이다. 모두 앞으로 받게되어질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현실 속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지식을 탐구하는 것도 있는 자가 더 풍족한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선을 행하는 것도 이 일에 힘쓰는 자가 하지 않는 자에 비하여 더 많은 선행을 할 수 있다. 믿음의 세계에서는 많은 경우 있는 자가 더 나은 축복과 은혜를 받게 되는 모순이 존재한다.

2. 영적인 불구자(13-17절)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불구자가 있는 반면, 정신적으로 잘못된 불구자도 있다. 특히 천국복음을 들었음에도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들은 가장 심각한 불구자이다.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마음이 완악할 대로 완악하여져 전혀 감각을 느낄 수 없는 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1) 보아도 보지 못함
(o{ti blevponte" ouj blevpousin kai; ajkouvonte" oujk ajkouvousin oujde; sunivousin ;호티 블레폰테스 우 블레푸신 카이 아쿠온테스 우크 아쿠우신 우데 쉬니우신,13절)
막4:12은 비유로 말함이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본문은 듣는 자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도록 하려고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원문에서 '보다'(블레폰테스)와 '듣다'(아쿠온테스)는 모두 현재분사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를 쓰고 있다. 이 단어들은 '보지 못하며,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직설법 현재 능동태의 동사에 시제가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우(ou;not)…우크(oujk;not)…우데(oujde;neither)라는 형식을 빌어 계속적인 부정을 하므로 그 어리석음의 정도를 강화하고 있음도 본문이 지니는 특징이다. '깨닫다'는 말은 쉬니에미(aunivhmi; auvn+i{hmi)라는 동사가 직설법 현재 능동태 3인칭 복수로 쓰인 것이다. 이 동사의 의미는 본래, '함께 보내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분명히 깨닫다(눅2:50;18:34) 등의 의미를 갖는다.

2) 성취된 예언
(kai; ajnaplhrou'tai aujtoi'" hJ profhteiva !Hsai?ou ;카이 아나플레루타이 아우토이스, 헤프로페테이아 에사이우,14-16절)
본절은 이사야가 사람들 속에 큰 각성을 일으키고자 한 말이다(사6:9-10). 예언(프로페테이아;profhteiva)이란 말은 여기서 주격 여성단수로 쓰여졌다.
여기서 '저희들'이란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이다. '이루어졌다'는 헬라어 아나플레루타이(ajnaplhrou'tai)는 직설법 현재 수동태 3인칭 단수동사로, 지금 그들 중에 이루어진 사실을 나타내고 현재도 계속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사 아나플레로오(ajnaplhrowv)는 복음서에는 여기 한 곳에서만 나타난다. 그러나 서신서에는 몇 곳에 나타난다(고전14:16;빌2:30).
이렇게 성취되어졌다는 예언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기쁨을 주는 격려의 말로 쓰여졌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들을 귀가 있어 예수의 말씀을 깨달으나, 다른 이들은 귀와 눈이 어두워 깨달을 수 없다는 식의 비교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3) 선지자가 보고자 했던 일
(o{ti polloi; profh'tai kai; divkaioi ejpequvmhsan ijdei'n a} ;호티 폴로이 프로페타이 카이 디카이오이 에페뒤메산 이데인 하,17절)
프로페타이(profh'tai;선지자들)는 주격남성 복수명사인데, 의인을 뜻하는 디카이오이(divkaioi;의인들)는 형용사의 대명사적 용법으로 주격 남성복수이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보고 듣는 것들을 그렇게 보기를 원했었다.
여기서 '원했다'는 말은 에피뒤메오(ejpiquvmew;갈망하다, 원하다, 욕심을 내다)라는 동사가 직설법 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 복수로 쓰였다. 이는 선지자와 의인들이 원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구약은 메시야와 그의 구원을 예표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시대라면, 지금은 메시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들을 수 있기에 복되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3.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해석(18-23절)

제자들에게 앞서 하신 비유의 말씀을 여기서 해석하여 주고 있다. 그것은 동일한 인물이 동일한 씨를 뿌렸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 큰 차이가 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그것이 천국 복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문제라는 점에서 그 차이의 심각성을 알게 된다.

1) 천국 말씀을 들음
(jUmei'" ou&n ajkouvsate th;n parabolh;n tou' speivranto" ;헤메이스 운 아쿠사테 텐 파라볼렌 투 스페이란토스,18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비유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를 원하신다. 헤메이스(JUmei'")가 제일 앞에 나온 것은 '너희들'이라 지칭되는 제자들을 강조하려는 이유일 것이다. '들으라'(아쿠사테; ajkouvsate) 동사는 여기서 명령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2인칭으로 사용되었으니, 제자들에게 명령함이다. 그분의 명령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지닌 참뜻을 배우라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dpeivranto";스페이란토스)는 단순과거분사 능동태 속격 남성단수로 쓰였다.

2) 깨닫지 못한 자와 넘어지는 자
(kai; mh; sunievnto" ... eujqu;" skandalivzetai ;카이 메 쉬니엔토스…유두스 스칸달리제 타이,19-21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길가에 뿌린 자의 의미는 씨앗은 떨어졌어도 깨닫지를 못하여 천국 말씀을 빼앗긴 자의 경우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길가에 떨어진 씨는 '깨닫지 못한 자'의 비유이다. '깨닫다'는 의미의 '쉬니엔토스'는 현재분사 능동태 소유격으로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아무리 천국의 비밀한 말씀을 들었어도 깨닫지 못할 때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깨닫지 못하는 마음밭은 길가 모양으로 단단하게 굳어지고 닳아진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한 마음은 어떤 감동도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진리에도 관심이 없다.
한편 돌밭에 뿌린 자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쁨으로 받으나 어려움에 쉽게 넘어지는 자이다. '넘어지다'는 동사는 스칸달리제타이(skandalivzetai)라고 하였다. 이는 스간달리조(skandalivzw;길에 덫을 놓다, 실족하다, 넘어지다)라는 동사의 현재분사 수동태 3인칭 단수로 넘어진다는 상태를 암시한다. 뿌리는 식물 자체를 유지하는 것인데, 이 뿌리가 약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견디는 지구력이 없다. 결국은 실족하고 넘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천국복음에 대한 반응만이 아니라, 인생살이 자체에서도 이같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쉽게 시작하고 쉽게 넘어지는, 그래서 수없이 도전하나 어떤 결실도 맺지 못하는 신자의 삶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3) 결실치 못하는 자와 결실하는 자
(kai; hJ mevrimna tou' aijw'no" kai; hJ ajpavth tou' plouvtou sumpnivgei to;n lovgon ;카이 헤 메림나 투 아이오노스 카이 헤 아파테투 플루투 쉼프니게이 톤 로곤,22,23절)
가시떨기에 뿌리워진 씨앗은 결국 결실치 못한다. 세상의 염려(메림나;mevrimna)와 물질의 유혹(아파테;ajpavth) 때문이다. 이러한 가시들이 말씀의 성장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만든다. 여기서 '말씀을 막는다'는 말로는 쉼프니게이(sumpnivgei)라는 직설법 현재능동태 3인칭 단수로 썼는데, 이 말은 '함께 질식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말은 바로 현재적인 문제임을 나타내고 있다. 13:7에서는 이와 비슷한 단어로 에프닉산(e[pnixan)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는 '목을 졸라 죽이다'는 말이다.
이러한 말 뜻에서 나타나듯이 세상 염려와 세상 유혹은 영적 삶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막아버림으로 질식케 하고 기아에 시달리게 한다. 자들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 항상 이같은 염려와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적인 요소들은 아주 빨리 자라 신자의 마음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말씀의 기운을 막게 된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세심히 살핌은 물론, 전제와 극기로 이러한 염려와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마 13:24~35 좋은 씨와 가라지의 비유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천국

천국은 사단의 훼방에 노출되어 있으나 결국은 사단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또한 천국은 겨자나 누룩의 활동같이 조용하지만, 줄기찬 성장과 변화를 가져오게 됨을 교훈 하신다.

1. 천국은 좋은 씨앗을 뿌림과 같음(24-30절)

천국은 좋은 씨 위에 악한 씨가 덧뿌려지듯 유혹과 훼방에 노출되어 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이러한 사단의 유혹과 훼방도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1)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림
(oJ ejcqro;" kai; ejpevspeiren zizavnia ajna; mevson tou' sivtou ;호 에크드로스 카이 에페스페이렌 지자니아 아나 메손 투 시투,25절)
천국은 좋은 씨를 뿌렸기 때문에 좋은 결실을 맺도록 되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씨를 뿌린 주인을 훼방하는 자에게 항상 노출되어 있다.
본문에서도 '원수'(에크드로스;ejcqro;")는 씨 뿌린 자가 잘 때에 가라지를 뿌렸다. 가라지는 호밀풀의 일종으로 (NEB) 밀과 구분이 어렵다. 흔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독보리로 알려져 있는데, 먹게 되면 구토 증세를 일으키며 때로는 죽기도 한다. 그렇게 악한 독보리를 원수는 밤에 와서 고의적으로 덧뿌린 것이다. 에페스페이렌(ejpevspei ren)은 '~위에 뿌리다, 다시 뿌리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데(Moffatt), 직설법미완료 능동태3인칭단수로 쓰이고 있어, 과거에 씨앗이 뿌려진 상태로 지금까지 계속 이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천국은 사단의 훼방과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안일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이에 대한 충분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 또 천국의 모형이자 성취의 장소인 지상 교회에도 하나님의 자녀와 사단적인 인간들이 공존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씨 뿌리는 자의 입장에서는 원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2) 곡식이 다칠까 염려됨
(sullevgonte" ta; zizavnia ejkrizwvshte a{ma aujtoi'" to;n si'ton ;쉴레곤테스 타 지자니아 에크리조세테 하마 아우토이스 톤 시톤,26-29절)
'가라지를 뽑다'(쉴레곤테스;sullevgonte")라는 동사는 쉰(suvn;함께)과 레고(levgw;따다, 뽑다, 가두다)의 합성어이다. 그래서 직역하면, '모아 거둔다'이다. 본문에는 현재분사 능동태 남성 2인칭복수동사로 쓰였다. 그런데 에크리조세테(ejkrizwvshte)라는 동사는 '뿌리채 뽑다'라는 말로 에크리조오(ejkrizovw)의 가정법 단순과거 능동태2인칭복수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이는 뽑힐 우려가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곡식(시톤;si'ton)은 일반적 곡식이나 밀을 말하지만(마3:12), 복수로 쓰여질 대는 빵이나 음식을 말하게 된다(행7:12). 좋은 일을 하려다가 그 여파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는 실로 많다. 가라지를 제거하려다가 곡식을 함께 뽑게 되는 것 같이, 교회 안에서도 가라지를 골라내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실족시키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3) 곡식과 가라지를 분리하여 거둠
(pro;" to; katakau'sai ... sunagavgete eij" th;n ajpoqhvkhn mou ;프로스 토 카타카우사이…쉬나가게테 에이스 텐 아포데켄 무,30절)
곡식 중에 자라고 있는 가라지라도 이삭이 나와 추수 때가 되면 구별이 쉽게 된다. 그래서 곡식을 벨 때, 가라지는 꺾어 뉘든가 아니면 이삭만 먼저 잘라내고 불사르게 된다. 흔히 꺾어 뉜 가라지는 나중에 거두어 묶어 땔감으로 쓰게 된다고 한다(Jeremias)
카타카우사이(katakau'sai)는 단순과거부정사로 여기서는 능동태로 전치사 프로스(pro;")의 지배를 받아 목적격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가라지를 불사른다는 단순한 사건 발생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곡식, 밀(시톤;si'ton)은 모아 곳간에 들여진다. 쉬나가게테(sunagavgete)란 명령법 제2단순과거 능동태2인칭 복수로 쓰여지고 있어, 예수의 제자들에게 추수와 분별의 사명이 부여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2. 겨자씨의 비유(31,32절)

천국은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성장함을 교훈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요란하지 않으나 선한 듯을 두고 지속적으로 자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1)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
(parevqhken aujtoi'" levgwn ... kovkkw/ sinavpew" ;파라데켄 아우토이스 레곤…콕코 시나페오스,31절)
이 겨자씨의 비유가 시간적으로 다른 비유에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태가 그와 같이 모아 놓은 순서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제자들과 앉으셔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원문에서는 파라티데미(parativqhmi)라는 동사가 단순과거능동태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 말의 원뜻은 '곁에 놓다, 앞에 놓다, 뜻을 풀다'라는 것이다. '말하다'는 헬라어 레곤(levgwn)은 현재분사 능동태로 쓰여지고 있어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앉으신 사건과 시간적인 일치를 꾀하고 있다.
스페르마(spevrma)가 씨앗의 집합명사인데 비해 콕코(kovkkw/)는 낱알 하나를 뜻한다. 그러므로 원문의 뜻은 아주 보잘 것 없이 적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별히 겨자씨라는 것은 팔레스틴에서 생장하는 배추과의 식물로 씨는 맵고 향기로워 약재나 양념으로 쓰인다. 그런데 이것은 여러 식물의 씨앗 중 극히 작은 씨앗이기 때문에 '겨자씨같이 작은'이라는 유대인의 경구가 생겨났다(Alfred Flummer).
예수님의 이 비유는 천국복음이 어떻게 왕성하게 되는지에 대한 비유이다

2) 나물보다 큰 나무가 됨
(aujxhqh'/ mei'zon tw'n lacavnwn ejsti;n kai; givnetai devndron ;아우제데 메이존 톤 라카논 에스틴 카이 기네타이 덴드론,32a절)
겨자씨는 작은 것이지만, 그것은 나물보다 큰 나무가 될 가능성을 그 생명력 속에 지니고 있다. 나물을 뜻하는 라카나(lacavna)는 팔레스틴에 나는 나물의 일종이다(pulpit). 원문은 비교법을 써서 '보다 큰'(메이존;mei'don)이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아욱쎄데(aujxhqh')는 아욱싸노(auvxavnw;자라게 하다, 성장하다, 흥하다)라는 동사가 가정법 단순과거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한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천국 복음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라온 역사를 살피면 이해하기 쉽다. 그것은 유대의 아주 작은 마을로부터 극히 적은 무리들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교회는 자라서 온 세계를 품게까지 되었다.
3) 공중의 새가 깃들게 됨
(w{ste ejlqei'n ta; peteina; tou' oujranou' kai; kataskhnou'n ;호스테 엘데인 타 페테이나 투 우라누 카이 카타스케눈,32절)
겨자씨는 제대로 크게 되면 약 12피트(feet)까지도 자란다. 그래서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보금자리를 틀거나 쉬어갈 수 있는 나무가 된다. 새를 뜻하는 페테이나(peteina;)는 페테이노스(peteinov";날개 있는, 신속한)라는 형용사의 명사적 용법이다. 이 말은 어떤 특정한 새를 의미하기 보다 날짐승 일반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겨자나무에는 검은 방울새와 홍방울 새가 떼를 지어 깃드는 것이 일반이라고 한다(pulpit). '깃들다'(카타스케눈)라는 말은 카타스케노오(kataskhnovw;거처를 정하다, 살다)라는 동사가 현재 부정사 능동태로 쓰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들이 계속적으로 깃드는 형상을 그리려고 했다.

3. 누룩의 비유(33-35절)

누룩은 농경 사회에서 음식을 만드는 데 일반적으로 쓰이는 효소이다. 그것의 특징은 보이지 않고 조용한 중에 작용을 일으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내적인 변화를 거듭한 끝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비유한다.

1) 가루 서 말을 부풀림
(zuvmh/, h}n labou'sa gunh; ejnevkruyen eij" ajleuvrou savta triva ;쥐메 헨 라부사 귀네 에네크뤼프센 에이스 알류루 사타 트리아,33절)
누룩은 반죽을 변질시킨다. 그래서 누룩은 죄나 부패 등을 상징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천국을 누룩으로 비유로 사실에 의구심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누룩의 변질시키는 능력을 긍정적인 입장에서 천국을 비유하는 데 사용하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에 있어 이 비유는 적절하다.
여기서 누룩(쥐메;zuvmh)은 '끓다, 끓어오르다'라는 동사인 제오(zevw)에서 파생한 것이다. 누룩은 술을 빗거나 빵을 부풀게 하는 발효제로 이용되었다.
원문에서는 여자가 가루 서 말에 이 누룩을 넣었다고 했다. '서 말'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음식을 만들 때, 쓰인 양을 말하는 것 같다. 혹자는 이 서말은 백명의 사람에게 풍족한 양이라고도 한다(E. Schweitter). 넣었다는 동사는 엥크뤼토(ejgkruptw;숨기다, 감추다)인데, 본문에서는 직설법 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로 쓰여졌다. 누룩을 넣되, 서 말이라는 양에 비하여 극히 적은 분량이기에 '감추었다'는 식의 말을 쓴 것이다.
이 누룩 비유는 겨자씨의 비유와 흡사한 점이 있으나, 보다 은밀하게 숨겨진 작용과 꾸준한 노력이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천국이 어떻게 작용하며, 제자들이 어떻게 일하여야 하는지를 알게 한 교훈이기도 하다.

2) 비유로만 말씀하심
(kai; cwri;" parabolh'" oujde;n ejlavlei aujtoi'" ;카이 쿠리스 파라볼레스 우덴 엘라레이 아우토이스,34절)
본문의 말씀은 10-17절의 말씀의 내용과 흡사하다. 그러므로 같은 이해의 시각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말씀하지 않다'는 말은 우크 엘랄레이(oujk ejlavlei)인데 '엘랄레이'는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로 쓰였다. 이는 제자들과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엘라라센 evlavlhsen)라는 단순과거 능동태와 대조를 이루는 동시에 어떤 진행의 상황을 암시한다. 제자들과 말씀하신 과거의 단순한 언급에서 발전하여, 이제는 비유로만 말씀하시곤 하는 습관적인 단계로 접어든 것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잘 잊혀지지 않고, 호기심을 자극하며, 어떤면에서는 이해하기가 좋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복음서의 입장에서 보면 비유하지 않은 것을 전혀 말씀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많은 비유를 쓰셨고, 그것을 민중들에게 중요한 교훈의 수단으로 사용하였음을 뜻한다.

3) 감추었던 비밀을 드러냄
(ejreuvxomai kekrummevna ajpo; katabolh'" 팳ovsmou¼ ;에륙소마이 케크륌메나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35절)
'선지자의 말'이라 할 때, 시내 사본과 이디오피아역 사본 그리고 클레멘트의 설교와 제롬의 인용, 또 유세비우스의 설명을 근거로 웨스트코트와 홀트역의 난외주에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인용된 말씀은 시78:2의 인용으로 이는 아삽의 시이다(pulpit). 카타볼레스(katabolh'")는 카타볼레(katabolh;시작, 시초)의 속격이다. '감추어져 있는 것들'(케크륌메나;kekrummevna)은 비밀, 수수께끼의 뜻이다. 에륙소마이(ejreuvxomai;드러내리라)는 에류고마이(ejreuvxomai;선포하다, 큰 소리로 말하다)라는 동사의 직설법 미래 중간태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하여 당신 스스로가 명확히 말씀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과거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숨겨져 있었다고 볼 만큼 명확하게 계시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획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마 13:36~50 보화와 진주의 비유

천국은 심판과 상급의 때임

본문은 천국에 대한 비유의 해석과 기타 비유를 말한다. 보화의 비유는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우연한 기회에 이를 발견하고 자기의 전 재산을 여기다 건 내용이고, 진주의 비유는 자기가 바라고 찾던 것을 찾았기에 자기의 전 재산을 건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은 우연이든 탐구의 결과든 천국은 전 생애를 걸만큼 가치 있는 것임을 나타낸다.

1. 좋은 씨와 가라지의 해설(36-43절)

24-30절에 있는 좋은 시와 가라지의 비유가 여기서 정확히 해설되어지고 있는데, 특별히 분별과 심판이 강조되고 있다.

1) 가라지의 비유를 해석하심
(oJ de; ajgrov" ejstin oJ kovsmo" ... oiJ uiJoi; th'" basileiva" ;호 데 아그로스 에스틴 호 코스모스…호이 휘오이 테스 바실레아스,36-38절)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내고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은 가라지의 비유가 지닌 참뜻을 물었다. 이 비유는 선과 악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좋은 씨를 뿌리는 자(인자)와 가라지를 뿌린 자(마귀), 좋은 씨(천국의 아들)와 가라지(악한 자의 아들)등이다.
원문의 코스모스(kovsmo";세상)란 말은 본래 '정연한 질서, 조화 있는 구조'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세상'과 '우주'를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씨는 천국 복음에 비유되었는데, 여기서는 천국의 아들로 비유되고 있다. 여기서 씨가 뿌려진 장소는 분명 '세상'이다. 그것은 교회도 천국도 아니라 바로 세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가라지를 심은 원수
(oJ de; ejcqro;" oJ speivra" aujtav ejstin oJ diavbolo" ;호 데 엑스드로스 호 스페이라스 아우타 에스틴 호 디아볼로스,39절)
원수라는 말, 엑스드로스(ejcqro;")는, '적의 분리'등을 나타내는 말 엑스드라(e[cqra)이 파생어로 여기서의 뜻은 '대적하는 자'의 의미이다. 형용사의 대명사적 용법으로 쓰여진 이 단어는 남성단수이다. 목적어 아우타(aujtav)는 가라지를 뜻한다. 그리고 마귀(디아볼로스;diavbolo")는 '중상하고 모략하는 자'란 뜻이다. 원수라는 말이 하나님을 대적한 마귀의 속성을 나타내 준다면, 마귀라는 말이 갖고 있는 뜻은 하나님과 인간을 중상하고 이간하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마귀의 의도는 분명하다. 가라지를 심어서 천국의 아들들에게 타격을 주고 세상을 마귀의 속성대로 더욱 악하고 추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마귀는 이같은 목적을 갖고 중상모략을 일삼지만, 영원히 활약하지는 못한다. 세상의 끝이라 할 추수 때가 섭리 안에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3) 불법자는 풀무불에 던져짐
(th;n ajnomivan ... eij" th;n kavminon tou' purov" ;텐 아노미안…에이스 텐 카미논 투 퓌로스,41-43절)
세상 끝 날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 경고되어지고 있다. 심판을 받고 풀무불에 던져질 자들은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자'이다. 여기서 넘어지게 하는 자는 성도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한 세력들이요, 불법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사는 무법자들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사는 무법자들이다. 풀무불(카미논 투 퓌로스;kavminon tou' purov")은 50절에 다시 한번 나타나는데, 이는 마태의 독특한 표현으로, '볼못'(계19:20), '영원한 불'(25:41;눅16:24)과 동일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나는 카미노스(kavminon";아궁이, 화덕, 화로)를 비롯한 이러한 표현은 한마디로 지옥을 나타내며, 그것이 지니고 있는 끔찍한 고통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래서 이 풀무불에 던져진 자들의 상황을 본문은 '울며 이를 간다'고 말해 준다.
이렇게 고통스러운 지옥의 상황과 대조적으로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란 표현을 통하여 그들이 지닐 영광을 나타내고 있다.

2. 보화와 진주 비유(44-46절)

보화를 만난 비유는 천국의 가치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이고, 진주를 만난 비유는 탐구의 결과로 발견한 경우이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전 재산을 걸 만한 가치 있는 발견이란 점에서 천국의 가치를 알려주고 있으며 소유한 자의 기쁨을 보여준다.

1)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기쁨
(qhsaurw'/ kekrummevnw/ ... th'" cara'" aujtou' ;데사우로 케크륌메노…테스 카라스 아우투,44절)
재난이 많은 지역에서는 금은 보화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 중 하나로 땅에 묻는 방법을 택하곤 하였다. 팔레스틴도 양 대륙을 잇는 교두보적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끊임없이 전쟁이 있었기에 금은 보화를 땅에 묻곤 하였을 것이다. 보물이 발견되었을 때, 그 보화는 분명 밭 임자의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내용은 도덕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관심하는 것은 그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발견한 보화만큼이나 천국은 귀한 것이고, 보화를 차지한 사람만이 느끼는 특별한 기쁨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감춰진'이란 뜻의 케크륌메노(kekrummevnw/)는 크립토(kruvptw;감추다, 숨겨두다)의 분사완료형 수동태 남성단수이다. 그러므로 이는 보화가 숨겨진 상태로 지금가지 내려오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찾은 자의 '기쁨'은 카라(carav)인데, 헬라어에는 기쁨을 나타내는 몇 가지 말이 있다. 아갈리아시스(ajgallivasi";행2:46)와 엔프로쉬네(enjfrosu'nh; 행 2:28) 그리고 동사로서 오니네미(ojnivnhmi;몬20)등이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천국의 가치와 그것을 얻은 자가 누리는 기쁨이다. 그리고 우연히 얻게 된 천국일지라도 이를 위하여는 전 재산을 걸 정도로 헌신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2)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
(ejmpovrw/ zhtou'nti kalou;" margarivta" ;엠포로 제툰티 카루스 마르가리타스,45절)
상인은 아름다운 진주를 구하며 다녔다. 이 진주(마르가리타스;margarivta")는 복수로 쓰였다. 그런데 그가 만난 진주(마르가리텐;margarivthn)는 단수로 쓰여졌다. 곧 상인은 이 마음에 드는 진주 하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판 것이다. 상인은 엠포로스(e[mporo";여행자, 상인, 장사꾼)인데 여행자와 상인이 같은 의미로 쓰임은 그 당시에는 상인들이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한다'는 말은 제테오(zhtew;조사하다, 바라다, 구하다)의 현재분사 능동태 남성단수로 현재 구하는 상태를 나타낸다.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끊임없이 이 일에 몰두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얻는다지만 인간이 전혀 노력하지도 사모하지도 않는다면 문제가 된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게 된다고 하듯, 본문의 상인처럼 천국은 열심히 구해져야 할 것이다.

3)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삼
(pevpraken pavnta o{sa eikai; hjgovrasen aujtovn ;페프라켄 판타 호사 에이켄 카이 에고라센 아우톤,46절)
'그가 가진 것'은 에이켄(ei)인데, 이는 직설법 미완료능동태 3인칭단수동사로서, 그가 지금까지 모은 모든 것을 의미한다. 페프라켄(pevpraken;팔다)은 완료형능동태 3인칭단수로 쓰여졌는데, 이는 팔아버린 행위의 완료를 뜻한다. 그만큼 상인은 마음에 드는 진주 하나를 사고자 미련 없이 자기의 전 재산을 처분하였다. 그리고 에고라센(hjgovrasen)이라는 말이 제1단순과거능동태로 쓰여졌듯이 미련 없이 그 진주를 샀다. 원문은 '샀다'는 말을 단순한 과거 사실로 처리하므로 그 상인의 결단력 있는 행동을 나타내고 있다.
이 진주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천국의 가치와 그 천국을 끝내 찾아낸 자의 기쁨을 말 가치와 그 천국을 끝내 찾아낸 자의 기쁨을 말씀하신다. 우리는 보화의 비유에서처럼 이를 위하여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와 헌신적인 믿음이 필요함을 깨닫는다.

3.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 비유(47-50절)

가라지의 비유가 선악간의 분별과 최후 심판을 보여주고 있듯이,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 비유도 이 세상에서 선악이 공존하나 결국 선악간에 구별이 이루어지고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가라지 비유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그물 비유는 최후 심판에 좀더 강조점이 있다는 것이다.

1) 각종 고기를 모으는 그물
(saghvnh/ blhqeivsh/ ... ejk panto;" gevnou" sunagagouvsh/ ;사게네 블레데이세…에크 판토스 게누스 쉬나가구세,47,48절)
이 비유는 갈릴리 바다를 배경으로 교훈 되어졌을 것이다. 여기서 '그물'(saghvnh;사게네)은 신약성서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인데, 저인망(seine)을 말한다. 호수 밑바닥까지 흩어 각종 고기를 모을 수 있는 그물이다. 그물을 '치고'라는 말, 블레데이세(blhqeivsh/)는 발로 던지다, 뿌리다, 퍼붓다는 과거분사수동태 여성단수이다. 즉 그물이 바다에 던져진 상태를 가리킨다. 게누스(gevnou")는 게노스(genov";자손, 후손, 가족 종류)라는 명사의 속격중성단수이다. 각종 물고기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부류의 인생들을 상징한다.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있듯이 이 세상은 또한 선인과 악인, 그리고 하나님의 자손과 악의 자손이 함께 공존한다. 그러나 그물이 바다 밑바닥까지 흩어 모든 고기를 모으듯이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벗어날 인생은 없는 것이다. 또 가시적 교회가 그물질을 하여 사람들을 모을 때에는 그 그물에 여러 부류의 인생들이 다 걸려든다. 사람으로서는 분별이 어렵다. 그러나 심판의 때에는 확연히 분별될 것이다.

2) 천사가 의인과 악인을 갈라냄
(ejn th'/ sunteleiva/ tou' aijw'no": ejxeleuvsontai oiJ a[ggeloi kai; ajforiou'sin ;엔 테 쉰텔레이아 투 아이오노스 엑세류손타이 호이 앙겔로이 카이 아포리우신,49절)
세상(아이오노스;aijw'no")이라는 속격의 수식을 받는 쉰텔레이아(sunteleiva/)는 '완전한 결합, 완료, 결말'의 뜻이다(히9:26). 그러므로 직역하면, '세상이 완성(료)되는 때'를 말한다. 그 때에 보냄을 받은 천사들(앙겔로이)은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게 된다. 원문에는 아포리우신(ajforiou'sin)이란 말이 쓰였다. 이 말은 아포리조(aforvizw ; ajpov+rvixw; 경계선으로 구분하다, 나누다)라는 동사로 '~로부터 끌어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는 미래 능동태 동사로 쓰여지고 있는데, 이 말은 심판의 때에 선악간에 엄정한 구분이 있을 것을 경고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 세상의 결말이 반드시 있을 것과 선악간에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을 예언겸 경고하고 있다.

3) 풀무불에 던져지는 고통
(kai; balou'sin aujtou;" ... oJ klauqmo;" kai; oJ brugmo;" tw'n ojdovntwn ;카이 발루신 아우투스…호 크라우드모스 카이 호 브뤼그모스 톤 오돈톤,50절)
아우투스(aujtou;")라는 대명사는 나쁜 고기로 비유되어진 악인들이다. 그들은 풀무불에 던져질 것이다. 동사 발루신(balo'sain)은 '던져질 것이다'는 뜻으로 직설법 미래 능동태로 사용되었다. 본문의 동사들은 모두 미래형을 취하고 있어 앞으로 도래할 심판을 예고하고 있다. 한편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말은 42절에도 나타났다. '울부짖다'는 헬라어 크라우드모스(klauqmo;")는 짐승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이를 간다'는 말, 브뤼그모스(brugmo;")도 그 고통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본문에서는 의인들이 받게 되어질 상급과 영광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라지의 비유에서 언급되어진 의인들의 상급(43절)은 이 본문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마 13:51~58 고향에서 가르치심

메시야를 배척하는 고향

2차 갈릴리 사역을 끝내시면서 잠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 겪으신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다. 예수께서 고향에서 겪으신 일은 한마디로 푸대접이었다. 따라서 준비되어 있지 않고, 사모하지 않는 고향 지역에서는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다.

1. 천국 비유를 마치심(51-53절)

천국에 대한 7가지 비유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그 비유의 뜻을 이해하였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깨달은 제자들은 천국의 제자로서 소임을 감당하여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1) 깨달음을 물으심
(Sunhvkate tau'ta pavnta_ levgousin aujtw'/, Naiv ;쉬네카테 타우타 판타; 레구신 아우토 나이,51절)
지금까지 마태가 기록한 비유의 의미를 제자들이 깨달았는지의 여부를 예수께서 물으셨다. '모든 것'이라는 말 판타(pavnta)는 지금까지 하신 7가지의천국 비유를 말한다. 쉬네카테(Sunhvkate)는 쉬니에미(sunivhmi), '함께 보내다'에서 유래하여 '깨닫다, 이해하다, 지혜있다'는 뜻을 지니며 단순과거 능동태 2인칭 복수로 쓰여졌다. 그러므로 단순히 깨달은 사실 여부를 묻고 있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는 말 레구신(levgousin)은 직설법 과거분사로 쓰였는데, 이는 시제상 '이해하였느냐'고 묻는 동사의 동시성을 나타내고 있다.

2)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pa'" grammateu;" maqhteuqei;" ... kaina; kai; palaiav ;파스 그람마튜스 마데튜데이스…카이나 카이 팔라이아,52절)
여기서의 서기관(grammateu;";그람마튜스)는 그 당시의 율법학자로서의 서기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천국 복음을 이해하고 있는 새로운 측면에서의 서기관을 말씀하고 있다(Barclay). 마데튜데이스(maqhteuqei;")는 '제자되다'는 동사 마데튜오(maqhteuvw)의 과거 분사 수동태 주격 남성단수이다.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달아 이제는 천국의 제자 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한편, '새것과 옛것'(카이나 카이 팔라이아)은 서기관이라는 말과 관련지어 볼 때 구약과는 다른 새로운 약속으로서 예수님의 진리를 대조시킨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옛 시대와 새로운 시대간에 중재의 역할을 담당하고, 또한 옛 약속과 새 약속 사이에서 중재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말씀일 것이다(Alford).

3) 비유를 마치심
(o{te ejtevlesen oJ !Ihsou'" ta;" parabola;" tauvta", meth'ren ejkei'qen ;호테 에테레센 호 예수스 타스 파라볼라스 타우타스, 메테렌 에케이덴,53절)
'예수께서…마치신 후'라는 말은 새로운 장면으로의 전환을 예고한다. 종속 접속사 호테(o{te;;때, 날에)는 이 새로운 행동을 연결하고 있다. 한편, 비유를 '마쳤다'는 말 에테레센(ejtevlesen)은 단순과거 능동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예수의 비유가 마쳐진 사실을 단순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모든 것'은 대명사 타우타스(tauvta")인데, 지금까지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7가지 비유 모두를 대신해 주고 있는 명사이다.
한편 에케이덴(ejkei'qen)은 지금까지 예수께서 머물고 있었던 곳으로 알고 있는 가버나움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제 제2차 갈릴리 여행을 마치면서 고향 나사렛을 찾기 위하여 가버나움을 떠나게 된 것이다. '떠났다'는 말, 메테렌(meth'ren)은 같은 구절에서 '떠났다'는 말과 같은 단순과거능동태로 쓰여지고 있다. 이는 마태가 예수의 지난 행적을 있는 그대로 객관성 있게 전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2. 고향에서 가르치심(54-56절)

예수께서는 그 동안 기거하며 활동하던 가버나움을 떠나 고향 나사렛에 이르신다. 그를 대하는 고향인들의 의아해 하는 모습과 함께 예수님의 가족이 소개된다. 예수님의 가족에 관한 기록은 일부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이 허구임을 알게 한다.

1) 예수의 지혜와 능력에 놀람
(w{ste ejkplhvssesqai aujtou;" ... sofiva au{th kai; aiJ dunavmei" ;호스테 에크프레쌔스아디 아우투스…소피아 하우테 카이 하이 뒤나메이스,54절)
예수께서는 고향에 이르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이는 예수께서 회당으로부터는 아직 배척을 받지 않고 있음을 시사한다.
에크프레쎄스다이(ejkplhvssesqai)는 에크플렛소(ejkplhvssw;놀라다, 기이하게 여기다)의 부정사 수동형으로, 이는 무리들이 예수님에 의해 놀라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이 고향인들에게 충격을 주듯 놀라운 일이었던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놀라워한 것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 지혜라는 말 소피아(sofiva)는 다양한 지식에 대하여 적용되었지만 일반적으로 넓고 완전한 지식에 대하여 적용되는 말이다. 그리고 능력을 뜻하는 뒤나미스(dunavi")는 힘, 전능, 세력을 의미한다. 여기서 고향인들이 놀라워한 것은 진리에 대한 넓고 깊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시는 이적에 기인한다.

2) 예수님의 가족들
(oujc ou|tov" ejstin oJ tou' tevktono" uiJov" ;우크 후토스 에스틴 호 투 테크토노스 휘오스,55절)
본문의 내용은 고향인들이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곧 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선입견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준다. 그들은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 여러 형제들 중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알고 있던 예수가 아닌 전혀 다른 예수로 고향에 나타났다. 본문은 반어법을 써서 그들의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는 우크(oujc; 아니)와 물음표 ' ; '를 통하여 반문하는 문장을 이루고 있다. 한편 '목수'라는 말 테크토노스(tevktono")는 테크톤(tevktwn)의 속격 남성단수이다.
본문에는 예수님의 부모와 여러 동생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누이들'이란 말은 막3:32과 여기에만 나타난다. 그 누이들의 이름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다 우리와 함께 있다'는 말을 썼고, 마가복음은 '여기'라는 말을 썼다. 따라서 예수께서 나사렛을 방문하였을 때, 가족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음을 알려 준다.
한편 이러한 가족에 대한 언급은 마리아의 '영원한 처녀성'에 대하여 로마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이 허구임을 밝혀 준다. 이러한 로마 가톨릭측의 주장은 에피파니우스(Epiphanius)가 동생들을 요셉에게서 난 이복 동생들이라 해석하고, 제롬(Jerome)이 형제들을 사촌들이라고 해석한 것에 기인한다.

3) 예수의 능력을 궁금해 함
(povqen outouvtw/ tau'ta pavnta ;포덴 운투토 타우타 판타,56절)
포덴(povqen; 어디서)은 의문부사로 쓰였다. 판타(pavnta;;모든)는 예수님이 고향 사람들에게 베푸신 교훈이나 능력 그리고 그들이 인근 마을로부터 전해 들은 여러 사실들을 일컫는 말이다.
고향인들은 예수의 지혜와 능력의 출처가 알고 싶었다. 그들의 궁금증은 놀라움에 기인된 것으로 진리에 입각한 궁금증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일개 목수의 아들이란 출생 성분이 그들에게는 멸시하고 배척할 수 있는 빙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호기심의 대상 이상으로 생각지 않았고, 말씀을 따르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다. 이렇게 사람들은 선입견 때문에 진리를 보지 못하며, 구원의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

3. 고향에서 배척받으심(57,58절)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알았던 고향인들의 선입견은 메시야를 배척하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선입견으로부터 생겨난 호기심을 만족시키려 하지는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정작 더 많은 능력을 행하여야 할 곳에서, 더 이상 능력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1) 예수를 배척함
(kai; ejskandalivzonto ejn aujtw'/ ... th'/ patrivdi kai; ejn th'/ oijkiva/ aujtou' ;카이 에스칸달리존토 엔 아우토 … 테 파트리디 카이 엔 테 오이키아아 우투,57a절)
'에스칸다리존토'의 동사는 에스칸달리조(ejskandalizw)인데, '(길에) 덫을 놓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는 뜻이다. 본문에서는 직설법 미완료수동태 3인칭 복수로 쓰였다. 그러므로 본문은 예수로 인하여 고향인들이 실족하였고 그것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태임을 알려 준다.
그런데 이들이 실족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잘못이 아니라, 그들의 선입견과 악함으로 인하여 초래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수의 신분을 잘 알기에 그분의 능력이나 지혜를 불쾌하게 생각하여 영접치도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배척으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격언적인 표현을 쓰셨다. 곧 선지자가 고향과 집에서는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인간들의 선입견과 짧은 안목이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오는지를 알려 준다.

2) 고향에서 당하는 예수님의 어려움
(Oujk e[stin profhvth" a[timo" eij mh; ... patrivdi ;우크 에스틴 프로페테스 아티모스 에이 메 …파트리디,57b절)
'고향에서'는 엔 테 파트리디(ejn th'/ patrivdi)인데, 파트리스(patriv";조상의)라는 말로부터 나왔다. 이는 조상의 마을이란 뜻이다. '존경받지 않음'이란 말은 티메(timhv;평가하다, 존경하다)하는 말에 부정하는 아(aj)가 붙어 '존경받지 못하다'는 뜻을 지니게 된다. 에이 메(eij mh)는 '~이 아니라면'(if not)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고향이나 가족을 제외하고는 존경을 받았다는 것이다(눅4:28-30).
어떤 사람의 주위 환경이나 가족 관계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가 지금 어떠한 존재냐 하는 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선입견에 의하여 평가를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예수께서 경험한 고향에서의 어려움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반복된다. 교회는 빈부귀천에 따라 성도를 평가해서는 안 되며, 과거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에 과거의 기준은 이미 쓸모가 없는 것이다.

3) 능력을 행치 않으심
(kai; oujk ejpoivhsen ejkei' dunavmei" polla;" dia; ... ajpistivan aujtw'n ;카이 우크 에포이에센 에케이 뒤나메이스 폴라스 디아 … 아피스티안 아우톤,58절)
에포이에센(ejpoivhsen)은 포이에오(poievw;행하다, 되게 하다)의 단순과거 능동태 3인칭 단수이다. 이를 부정사 우크(oujk)가 앞에 놓여 '행하지 않다'라는 단순과거의 뜻을 알려 준다(막6:5). 에케이(ejkei;거기서)라는 대명사는 나사렛을 말한다.
전치사 디아(dia;)는 예수께서 능력을 행하지 않으시는 '이유'를 이끌고 있다. 그 이유란 믿음이 없는, 곧 불신 때문이다. 본문에는 이 불신을 아피스티안(ajpistivan)이라 했는데 부정을 나타내는 아(a)가 '믿음'을 뜻하는 피스티스(pivti")에 접두어로 붙었다.
예수께서 고향에서 능력을 많이 행하지 않으신 것은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자세는 예수의 변화를 기이하게 바라보는 것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천국 복음과 능력이 낭비되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1-9)

 

 

1. 비유로 가르쳐 주시던 때의 상황(마 13:1-3(상), 막 4:1-2, 눅 12:1))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1),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2),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마 13:1-3(상))..."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 바다에 떠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다 곁 육지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에게 이르시되(막:4:1-2)..."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눅 8:4)..."

예수님은 집에서 나가서 바닷가에 가서 앉으셨습니다. 그 때에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 인해 그대로 사람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호수에 배를 띄워놓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배를 강단처럼 사용해서 효과적으로 그곳에 모인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 무리들에게 하신 비유들

마태복음에 나타난 8개의 비유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마 13:1-35)에 나오는 4개의 비유들은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무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비유였습니다. 이 네 가지 비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비유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요소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에 도전하는 적대적인 세력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적대적인 세력이 사단의 방해, 뜨거운 햇빛, 돌, 그리고 가시떨기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가라지 비유에서는 적대적인 세력이 원수가 주인 몰래 밭에 뿌린 가라지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또 겨자씨 비유에서 적대적인 세력은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누룩 비유에서는 적대적인 세력이 누룩이 변화시킨 밀가루로 비유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비유들은 모두 다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도전하는 세력들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러한 반대 세력들은 은밀하게 또는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해칠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이 비유들은 예수님을 통해 시작된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고, 겨자씨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밭에 겨자씨를 심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 누룩 비유에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 여인이 넣은 누룩이 밀가루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셋째로 이 비유들은 모두 다 원수들 강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 성공적으로 확장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에서 옥토밭에 떨어진 씨앗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고 있고, 가라지 비유에서는 가라지 속에서도 곡식들성공적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또 겨자씨 비유에서는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었고, 누룩 비유에서는 누룩이 모든 밀가루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네 가지 비유는 모두 다 대적들의 강력한 방해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성공적으로 확장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제자들에게 르쳐 주신 비유들

이 네 가지 비유들은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공개적으로 하신 비유였습니다. 그러나 후반부(마 13:36-53)에 나오는 네 가지 비유들은 예수님께서 에서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가르쳐 주신 비유였습니다. 이 비유들은 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비유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이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헌신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보화 비유에 나오는 농부밭에 숨긴 보화를 발견한 후에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을 샀으며,진주 비유에 나오는 상인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한 후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샀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농부와 상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사람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 그물 비유에 나오는 어부그물을 치고 그물로 물고기를 몰고 있습니다. 이어부는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전도자를 말합니다. 또 마지막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옛 것과 새 것을 창고에서 가지고 집 사람들에게 때를 따라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청지기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때를 따라 하늘의 양식을 공급해주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말합니다.

둘째로 이 비유들은 받은 사람만 아는 은밀한 기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산 농부와, 극히 값진 진주를 산 상인은 남이 모르는은밀한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고향애 데리고 가려고 찾아왔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가족을 넘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육신의 가족보다 하나님 나라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모친이며 동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생각해 볼 본문(마 13장, 막 4장, 눅 8장)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 4장에는 4개의 천국 비유들이 나오고, 마 13장에는 7개의 천국 비유들이 소개되고 잇으며, 또한 눅 8장에는 2개의 천국 비유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천국 비유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는 충성제자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에 나오는 농부와 상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좆았습니다. 또 그물 비유에 나오는어부는 어장에 그물을 치고 열심히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또 마지막 비유에 나오는 청지기도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서 창고에서 새 것과 옛 것을 부지런히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네 가지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전적으로 헌신한 충성된 제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비유들을 에서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동시에 이 비유들은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모든 충성된 일꾼들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은 지금도 역시 신실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를 담고 잇습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8개의 천국 비유들에 대해서 간단히 요약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시간부터 이 비유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생각해 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2차 갈릴리 전도 여행 때부터 종교 지도자들의 반대가 본격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면서 예수님을 고소할 기회를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그 의미를 모호하게 하심으로 반대자들이 흠을 잡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기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비유들은 반대자들의 강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리들을 가르쳐 주신 후에 집에 들어가서 제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또 다른 비유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그 나라를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한 충성된 사람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공개적으로 말씀해 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에 대해서 차례로 생각해 볼 것입니다.

 

1. 들으라!(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가가 소개한 비유들은 "들으라!"는 말로 시작헤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니라!"는 말로 끝맺고 있습니다. "들으라!"는 말은 이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실 말씀을 마음을 열고 집중해서 들을 것을 요구하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실 비유들은 마음을 열고 집중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이는 이 비유들 안에 숨겨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은 이 비유가 아무나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성령님께서 눈과 귀를 열어주신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비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눈과 귀를 주신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이러한 사람들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은 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흠잡을 기회만 엿보는 사람들에게는 닫혀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활짝 열려 있지만, 반대자들에게는 굳게 닫혀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를 들을 때에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귀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 씨뿌리는 자의 비유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3(하)), 뿌릴 쌔(마 13:3(하)-4(상)..."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막 4:3(상))..."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쌔(눅 8:5(상)..."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씨를 뿌리는 농부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때가 언제인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내용을 읽어 보면, 이 때는 밭에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10월경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농부의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그들이 모두 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에 무리들은 멀리서 농부가 밭에 밀이나 보리를 파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무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해변으로 오는 도중에, 농부들이 밭에 씨를 뿌리고 있는 장면을 보았을 지도 모릅니다. 또 그들 중에는 직접 밭에 나가서 씨를 뿌린 경험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농업은 비교적 단순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몇 군데에서 씨를 뿌리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사 28:24-25, 렘 4:3, 호 10:11-12).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도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농경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묘사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씨를 뿌리는 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성경 구절들랍비의 기록들을 참고해 보면, 농부들은 길고 무더운 여름철이 끝날 무렵에 밭에 나가서 밀이나 씨앗을 굳은 땅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씨앗을 덮기 위해서 쟁기로 흙을 갈아 젖혔습니다. 그리고 나서 농부들은 겨울비가 와서 싹이 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유에 나오는 농부는 씨앗을 담은 주머니를 목에 달고 다니면서 씨를 뿌린 것으로 보입니다. 이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가슴에 달고 율동적인 걸음으로 밭고랑을 다니면서 씨를 뿌렸습니다. 이 때에 농부가 뿌린 씨앗 중에 일부는 농부가 원하는 밭을 벗어나서 떨어졌습니다. 밭을 벗어난 씨앗들은 과, 흙이 얇은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이 일을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는 동안에, 이러한 일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3.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해석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마 13:4(하)-9)."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 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니라 하시니라(막 4:3(하)-9)."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5(하)),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6),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7),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눅 8:5(하)-8)."

이 비유의 묘사는 평범하면서도 정확합니다. 첫째로 농부가 뿌린 씨앗 중에 일부는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앗들은 단단한 길에 떨어졌기 때문에, 싹을 내지 못하고 새들의 먹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떤 새들은 밭에 뿌려진 씨앗마저 먹으려고 덤벼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 농부가 새를 쫓았습니다. 둘째로 농부가 뿌린 씨앗 중에 일부는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돌밭 위에 떨어진 씨앗은 곧 싹을 냈습니다. 그러나 석회석이 있는 팔레스타인의 돌밭은 흙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싹은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해가 돋아서 햇빛이 강하게 내려쪼이게 되자, 그 씨앗은 뜨거운 열기에 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셋째로 농부가 뿌린 씨앗 중에 일부는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앗들 역시 곧 싹을 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나서 곡식이 성장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곡식들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뿌린 씨앗 중에 일부가 다른 곳애 떨어져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농부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이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거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싹을 내고, 뿌리를 깊이 내리고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리고 곡식은 무더위와 바람과 비를 이겨내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곡식의 평균 수확은 뿌린 씨앗의 10배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때로 풍년이 들면 30배와 60배의 수확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기적적으로 100배의 수확을 거두기도 했습니다(창 26:12). 그러므로 농부는 자신이 뿌린 씨앗 중에 일부가 길,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져도 크게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농부가 뿌린 씨앗이 나중에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결실을 거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수확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을 들은 무리들은 놀랐을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예수님에 의해 시작되고 성령님의 역사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여러 가지 강력한 반대 세력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인해 이 모든 도전과 반대를 이기고 기대보다 훨씬 크고 빠르게 확장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리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강하게 반대해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마13:10-17)

 

 

예수님바닷가에서 무리들에게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첫째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농부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농부가 밭에 나가서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씨앗의 일부가 길가,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에 떨어졌습니다. 이 씨앗들은 결국 결실을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이 일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자라서 30배, 60배, 그리고 100배의 결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비유로 가르치신 이유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0-13)."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 두 제자로 더불어 그 비유들을 묻자오니,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막 4:10-12)..."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눅 8:9-10)."

예수님은 비유로 무리들을 가르쳐 주신 후에 잠시 동안 홀로 계셨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혼자 계시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묵상을 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의 비밀 아는 것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도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두 종류, 즉 '너희'와 '저희'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너희"와 "저희"는 누구일까요? 1차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너희"는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좀더 넓게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일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따랐습니다.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성령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이 열려져 있었습니다.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적절한 예화를 사용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주변에서 익숙하게 알고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쉽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는 탁월한 교수방법이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저희"는 누구일까요? 여기에 나오는 '저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과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도 마음을 닫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보고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진리를 아는 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흠을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천국 비밀을 숨기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직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악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닫으셨습니다. 유대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어려서부터 종교 훈련을 받으며 자라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메시아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기심과 잘못된 메시아관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증거들을 보고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천국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닫아두셨습니다.

 

2.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4-17)."

이러한 일은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이미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사야는 오래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듣고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심판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닫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수많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거역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거두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을 보고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달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직접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이 듣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얼마나 귀한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전에 살았던 수많은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고 듣기를 원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간절히 보고 듣기를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종말에 오실 메시아께서 이 땅에 세우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알기 원했습니다. 이 나라는 마지막 때에 메시아를 통해서 세워질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 나라를 먼 발치에서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서 이 나라에 대해서 듣고 이 나라를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장차 이 나라가 도래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께서 가르쳐 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직접 보고 듣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창세 이후로 어떤 세대도 누리지 못한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직접 보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교훈을 직접 들었으며, 또한 그 분이 행하시는 수많은 기적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특권을 누리면서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조상들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직한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을 통해서 천국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정직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완고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완고한 사람은 수많은 표적과 말씀을 보고 들어도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열려진 "너희"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닫혀진 "저희"입니까?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씨뿌리는 비유의 해석(마 13:18-23)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에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이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와, 씨뿌리는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쳐 주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정직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다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비유는 이해하기 힘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알고 있는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서 가르치는 탁월한 교수 방법이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비난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뜻을 모호하게 하심으로, 대적들에게 비난거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길가에 뿌려진 씨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마 13:18-19)..."

"또 가라사대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찐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막 4:13-15)."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눅 8:11-12)."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씨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모든 하나님 나라의 비유 중에서 기본이 되는 비유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하면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1) 씨를 뿌린 농부=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 2) 농부가 뿌린 씨앗=천국 복음, 3) 농부가 씨를 뿌리는 것=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 4) 네 가지 밭= 천국 복음을 듣는 사람들의 네 가지 마음 상태. 첫째로 흙이 단단한 길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닫고 그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완고한 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고의로 말씀을 거부하기 때문에, 사단이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천국 복음은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 바로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시기와 전통으로 인해 마음이 굳어져서 예수님의 말씀을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단단한 길가처럼 단단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뿌리를 박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2. 돌밭에 뿌려진 씨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20),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 13:20-21)..."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16),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간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막 4:16-17)."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눅 8:13)."

둘째로 흙이 얇은 돌밭은 처음에는 기쁘게 말씀을 듣지만, 말씀 때문에 박해나 환난이 찾아오면 복음을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처음에는 흙 속에 있는 습기를 흡수해서 싹을 냅니다. 그러나 돌밭은 흙이 얇기 때문에, 해가 돋은 후에 해가 내리쬐게 되면 싻이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말라버립니다. 그들은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믿음의 뿌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씀 때문에 핍박이나 환난이 찾아오면 복음을 떠나버립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전해주시는 말씀을 듣고, 도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필요한대가는 지불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말씀 때문에 박해와 환난이 찾아오게 되자, 즉시 말씀대로 사는 일을 포기했습니다.

 

3. 가시밭에 떨어진 씨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마 13:22)..."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18),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8-19)..."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눅 8:14)."

셋째로 가시은 처음에는 기쁘게 말씀을 듣지만, 생활의 염려재리의 유혹을 인해 말슴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가시 밭에 떨어진 씨앗은 처음에는 흙의 수분을 흡수해서 싻을 냅니다. 그러나 싻이 자라나면서 가시도 함께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곡식보다 가시의 성장력이 더 왕성했기 때문에, 곡식은 가시의 기운에 막혀서 시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기쁘게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욕심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세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세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 주인을 섬겼으며 성령님과 육신 사이에서 오락가락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말씀과 세상을 향한 탐욕이 함께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따르려는 힘보다 세상을 따르려는 욕망이 더 강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세상의 영광을 포기하지 못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4. 좋은 땅에 떨어진 씨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막 4:20)."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 하는 자니라(눅 12:15)."

마지막으로 좋은 땅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함으로 많은 결실을 맺는 사람들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흙의 수분을 흡수해서 싻을 냅니다. 그리고 그 싻은 흙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여러 가지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었고, 성령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사단은 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움이 찾아올수록 성령님을 더 많이 의지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어려움 속에서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결실을 얻게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정직한 사람들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어려움이 찾아 와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확장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위의 네 가지 중에 어디에 해당합니까? 우리는 말씀을 듣고도 고의로 거부하는 길과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우리는 말씀을 받은 후에 환난과 박해가 오면 쉽게 넘어지는 돌밭과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또 우리는 세상과 예수님을 동시에 섬기면서 생활과 재물의 염려로 말씀을 떠나는 가시 밭과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이러한 사람들은 아무리 말씀을 듣고 배워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중도에 포기하고 아무 열매도 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님께 눈과 귀를 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말씀을 깨달은 후에는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인내하면서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내하며 말씀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땅과 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 비유(마 13:24-30)

 

 

우리는 앞에서 씨뿌리는 비유은밀히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씨뿌리는 비유대적들의 강한 반대와 도전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은밀히 자라는 씨앗의 비유하나님 나라가 성령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통해서 스스로 성장해 나갈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강한 성령의 생명력이 있기 때문에, 복음 전도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성장해 나갑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일꾼들은 대적들의 방해와 도전에 대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니 나라는 성령님에 의해 모든 역경과 장애물을 극복하고 온 세상에 확장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것입니다.

 

 

1.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마 13:24-26)..."

마태는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해주신 또 다른 비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기록된 것으로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유능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품질이 우량한 좋은 씨앗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일꾼들을 시켜서 좋은 씨앗자기 밭에 뿌리게 했습니다. 그 후에 원수가 몰래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원수는 일꾼들이 자는 을 이용해서 가라지를 덧뿌렸습니다. 원수는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밭 전체에 가라지를 뿌렸지만, 일꾼들은 밭에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봄이 되자, 밭의 여기 저기에서과 함께 가라지도 자라났습니다. 일꾼들은 그 때서야 밭에 밀 뿐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뿌려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라지는 그 모양이 밀과 매우 비슷했기 때문에, 익숙한 농부들이 아니면 밀과 가라지를 구별해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꾼들은 숙달된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밀과 가라지를 구별해 낼 수 있었습니다.

 

2. 추수 때까지 가만 두어라!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마 13:27-29)."

일꾼들은 가라지를 보고 놀라서 즉시 농부에게 가서 그 일을 보고했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가서 "밭에 좋은 씨를 뿌렸는데 어떻게 해서 밭에 가라지가 생기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원수가 이렇게 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때에 일꾼들은 주인에게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에게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하고 말했습니다. 그 농부는 가라지들이 곡식이 흡수해야 할 수분과 양분을 빼앗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곡식과 가라지는 그 뿌리가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섣불리 가라지를 뽑으면 곡식들도 함께 뽑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곡식이 다칠 것을 염려해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도 그대로 두라고 지시했습니다. 농부는 추수 때가 되면 추수꾼들을 시켜서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단으로 묶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농부는 그 단을 불을 피우는 연료로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농부는 추수꾼들에게 밭에서 남은 곡식을 모아서 창고에 넣으라고 지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 가라지 비유 설명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36-43)."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무리들을 떠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비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1)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인자, 즉 예수님이다. 2) 세상을 의미한다. 3) 좋은 씨앗천국의 자녀들이다. 4) 가라지악한 자의 자녀들이다. 5) 가라지를 심은 원수마귀이다. 6) 추수 때세상의 끝을 말한다. 7) 추수꾼천사들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그 복음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사단이 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은밀히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인본주의와 여러 가지 악한 사상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사단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을 의지하며 사는 사단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단을 따르는 사단의 자녀들이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이 공존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떻게 해서 세상에 악한 자의 자녀들이 존재하는 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왜 세상에 악한 자들이 존재하게 되었는 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단이 자신의 가르침과 술수로 악한 자의 자녀들이 생기게 되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은 에수님께 악인들을 제거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지막 날까지 악인들을 그대로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장에 악한 자들을 제거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까지 해를 입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단의 자녀들이 유대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이 모두 제거되면 하나님의 자녀들도 다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 때까지 악인에 대한 심판을 유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 때가 되면, 천사들을 보내서 먼저 악한 자들을 골라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은 그들을 불에 던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후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모아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농부가 일꾼들을 통해서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원수가 밤에 와서 몰래 그 위에 가라지를 덧 뿌렸습니다. 봄철이 되자, 일꾼들은 밭에서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왜 곡식을 뿌린 밭에서 가라지가 자라고 있는 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일꾼들은 즉시 농부에게 가서 그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 농부는 그 말을 듣고 "원수가 밭에 가라지를 뿌렸다"고 말했습니다. 일꾼들은 농부에게 가라지를 뽑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지만, 농부는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도 다칠 것을 염려해서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라고 지시했습니다. 농부는 추수 때가 되면 추수꾼들에게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서 연료로 쓸 것이며, 그 후에 곡식을 거두어서 창고에 들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농부는 예수님을 가리키고, 좋은 씨는 하나님의 자녀를, 그리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수는 마귀를 상징하고, 추수꾼은 천사들을, 그리고 추수 때는 마지막 심판 때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는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악에 대해 인내하지 못하는 성도들

이 비유는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악한 자의 자녀들 공존하고 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농부원수가 등장하고 있고, 또 곡식가라지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농부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주도하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원수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마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밭에 자라는 곡식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을 의미하고, 가라지악한 자의 자녀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과, 복음을 거부하고 사단을 따르는 악한 자의 자녀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운 일꾼들은 어찌해서 세상에 악한 자의 자녀들이 존재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가서 그들을 심판할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인을 심판하다가 의인들이 다칠 것을 염려해서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에 악한 무리들이 온갖 불의를 행하면서 형통하는 것을 보고 불평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가서 왜 악인을 속히 심판하지 않고 그대로 두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우리는 불의를 행하는 악인을 즉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공의를 시행해야 한다는 이유로, 악인들을 당장 심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로 인해서 교회가 큰 어려움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지금 그 악인을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를 지금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죄인을 그대로 방임하거나,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악인에 대해 재판을 하는 것을 금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교회의 정화를 위해서 치리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교회에서 어떻게 죄인을 징계할 것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마 18:15-17). 징계는 꼭 필요한 경우에 시행하되, 반드시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시행해야 합니다. 또 징계는 징계 받는 사람을 정죄하기 보다, 그를 구원하고 회복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또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법을 집행하는 사람은 법의 정신을 따라 분명하게 시비를 가려서 악인을 징계하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일을 위해서 사법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롬 13:1-3). 그러나 악인들에 대한 심판이 항상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악에 대해서는 심판을 연기하시면서, 최후 심판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이 비유를 보면, 일꾼들이 악한 자의 자녀들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농부는 추수 때까지 기다리라고 지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일꾼들은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악인들을 심판해야 한다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판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악인을 모두 제거하면 의인들에게도 해가 돌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 날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날이 되면 천사들을 통해서 "그들을 분류해서 불에 던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세상에 존재하는 악한 자의 자녀들

우리는 때로 왜 선하신 하나님이 악인을 허용하는 지 궁금해 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은 세상에 하나님 나라반대하는 사단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화로운 천사장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땅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세상에 하나님에 대한 거역과 불순종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사단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넘어뜨리고 있습니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게 만들고, 또 죄인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서 악을 행하게 만듭니다. 사단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거부해도 죽지 않으며, 자기 뜻대로 살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단의 유혹을 좇아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한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 된채, 유한한 자신의 자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사단과 세상의 풍습을 따라,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다 본문에 나오는 악한 자의 자녀들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바로 이러한 자들로 인해 전쟁과 분열, 그리고 온갖 불법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러한 자들로 인해 크게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직접-간접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방해하고 있습니다.

 

3.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용납하시는 이유

그러면 왜 예수님은 악인들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실까요? 하나님께서 악을 즐기시는 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롭고 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허용하고 계실까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허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허용하는 이유는 악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긍휼하시기 때문에, 악인들도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악인들을 위한 심판을 연기하심으로 그들에게 회개하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넓어서 그 크기를 헤아릴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껫 악인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당장에 악한 자들을 모두 심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장에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심판하면 의인들도 다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장에 악인들을 모두 제거하신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할 아침에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의사도 부족하고, 법률가도 부족하며, 미화원도 부족하고, 다른 모든 분야에 필요한 사람들이 부족하게 될 것입니다. 주일에 일하는 불신자들이 하루 아침에 모두 다 사라졌다고 합시다. 그러면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교회에 오는 성도들도 주일에 교회에도 나올 수 없습니다. 대중 교통은 불신자인 운전사가 운전을 해야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또 불신자들이 모두 사라지면 발전소도 쉬게 되어 교회에 전기 공급이 끊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일에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일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치기 위해서 전염병을 돌게 하면, 신자들도 이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들이 해를 당하지 않도록 마지막 날까지 악인들을 기다려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때때로 심판을 통해서 악인들을 제거하십니다. 세상에는 그대로 두면 안될만큼 사악한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은 제거해서 세상이 악이 지배하지 않도록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악들은 참고 안내하시면서 마지막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악인을 심판하고 어떤 악인은 인내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심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악인을 용납하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곡식과 가라지 비유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이유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천국, 교회, 가라지 (마13:24~30) / 박윤선 박사 (주석에서 발췌)


마 13:24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여기 "천국"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헬라원어로 헤이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곳을 가리킨다. 이것은 현세에 있어서는 진정한 교회요, 내세에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이고(계21:1,22:5), 사후의 세계에는 천당이다(요14:1-4). 이 귀절들에 나온 비유에서는 천국이란 말이 교회를 의미한 방면이 농후하다. 진정한 "좋은 씨"란 말은 예수님께서 이 뒤에 해석하신 대로(마13:38), "천국의 아들들"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으 마음속에 참되어 받은바 되어 그 생활에 변화를 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약1:18; 벧전1:23).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은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과 같다. 그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히 받으면 생명을 받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생활이 이세상의 사람과 달라진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산다.

 

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 뒤에 해석하신 대로 (마13:38,39)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원수는 마귀"이다. 이것은 교회 안에 마귀의 말을 듣고 순종하는 악도들도 섞여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의할 말씀은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왔다는 것이다. 곧, 이것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악한 씨가 들어온다는 말씀이다. (1)악한 씨는 신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마음에 들어와서 자라고 커서 장차 그의 신앙생활을 무실하게 만든다. (2)우리가 어떤 때에는 무엇을 선하고 유익하다고 하여 택하였으나 후에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악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도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참으로 선한 것이 아닌데 우리가 마귀에게 속아 그것을 택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교회 안에 있는 악도도 한 동안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결실의 시기에는 그 본색을 나타낸다.

마 13:28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이것은 교회의 사역자들이 가라지와 같이 악한 결과를 나타낸 교회원을 교회에서 아주 단절시키고 아무런 소망도 두지 않으려는 심정을 비유한 말이다. 그러한 처분은 교회의 권징이 아니고 마지막 심판인 것이다. 권징은 단절하여 내어버리는 처분이 아니고 회개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려고 실시하는 사랑의 처리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라지를 뽑는 것과 같은 행동이 아니고 자극성 있는 약을 주는 것과 같은 일종의 배양 행위이다.

마 13:29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이 말씀은 윗말에 있는 바와 같이 범과자를 아주 심판하여 내어 버림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권징 행위를 금지함이 아니다. 교회가 범과자에게 대하여 권징하여야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바 있다(마18:15-20). 권징 실시의 필요에 대하여는 신구약이 일률적으로 가르친다.(고전5:1-13; 살후3:14,15).

마 13:30

둘 다 추구 때가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이것은, 교회가 그 교훈 노선이나 생활 노선을 분변 없이 해도 좋다는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사상이나 행위에 대하여 처리하는 것을 금함이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마16:6,12). 이 구절들에 있는 말씀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인신에 정죄함을 금지하는 것뿐이다. 인신 정죄는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다. 풀러라는 학자는 인간으로서 인신 정죄를 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말하였다. 그것은 (1)교회에 있는 외식자를 인간의 지혜로는 지목하기 어려운 까닭 (2)그렇게 불가능한 일을 인간이 한다면 악한 신자들도 외식자로 오해될 우려가 있다. (3) 교회에서 그렇게 불가능한 심판을 한다면 아직 나타나지 못하였던 귀한 영광의 그릇들이 쓸 데 없는 자로 오해되어 내어 던짐이 될 우려가 있는 까닭 (4) 진실한 신자들과 불신실한 자들이 서로 섞여 있으므로 신자들이 깨어 있게 되고 더욱 경건한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겨자씨 비유의 교훈

(마 13:31,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 13:31-32).


예수님께서 천국을 겨자씨 한 알 가지고 비유하셨는데 과연 이 겨자씨의 비유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 배우고자 합니다.

 

값진 진주 인생

마태복음 13:44-4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시고 부르실 때, 그리고 이 교회에 성도로 여러분을 초청하실 때에 우리 가운데 하늘의 평화와 은혜로 하늘의 사랑과 하늘의 소망으로 넘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여러분들 가운데 풍성하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한 여자가 자기 생각에는 좀 과분하다고 생각되는 남자와 약혼을 했습니다. 부모님도 기뻐하고 친구들도 부러워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 동안의 약혼 기간이 지나고 결혼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갑자기 여자는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나오지를 않습니다. 남자가 찾아가서 이유라도 들어보자고 아무리 말을 해도 대답도 하지 않고 문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이렇게 과분한 혼처를 버린다면 다시 그런 남자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설득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찾아가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부모는 전문가에게 상담을 요청해서 딸의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들어보도록 했습니다.

상담자가 딸을 찾아가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6개월 동안 그 남자와 사귀는 동안에 마음고생이 정말 많으셨군요.”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그 여자가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정말 인간적으로 존중받고 보석과 같이 소중히 여김을 받으며 살고 싶었습니다.” 한번 말문이 얄리니 그 여자는 계속 자기 속에 있는 얘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 남자는 내가 다시 만날 수 없을 만큼 조건이 좋고 나에게 과분합니다. 그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인격적으로 존중해 주지 않았고 보석과 같이 소중히 여겨 주지 않았습니다.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 남자와 나는 평생 동안 살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존중받으며 살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받을 때 진정한 인격자로 성숙하도록 지어놓으셨기 때문에 존중받지 못하면 진정한 인간성을 개발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은 존중받을 때에 I am O.K. 인생을 살 수 있지만 존중받지 못하면 I am not O.K.의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라오는 동안에 존중받으며 살아왔습니까? 아니면 그 반대로 무시당하고 불신 당하고 비판받으며 정죄 당하며 비교 당하며 폭력 당하며 그렇게 살아왔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음에 고통이 가라앉지 않고 성격적으로 문제를 계속 일으키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정받지 못하며 살아왔고 무시당하며 살아왔고 비교와 차별 당하며 살아왔고 폭력 받으며 살아왔던 그 경험들이 우리 속에 쌓여서 상처가 되었기 때문에 마음에 고통이 오고 성격적으로 이상한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과거는 과거이고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갔다 나는 그것을 기억지도 못한다고 생각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과거는 지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람한 나무가 하나 여기에 있습니다. 무성한 나무입니다. 멋진 나무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르면 나이테가 있습니다. 산림학자들은 나이테를 하나하나 보면서 그 나무가 그 나이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그 경험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해에 가뭄이 있었다면 나이테는 달라집니다. 그 해에 병충해가 있었다면 그 나이테에는 병충해의 경험을 거기에 보여줍니다. 그 해에 폭풍이 있었다면 그 경험이 나이테 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우람하고 멋지고 아름다운 나무일지라도 그 속에는 나무의 과거가 그대로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더 분명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심지어는 엄마가 나를 임신할 때 또는 임신하기 전에 경험까지라도 우리 속에 그대로 들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아이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을 성인 아이라고 하는데, 성인 아이를 연구하는 신경정신과 의사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사람이 성격에 특별히 문제가 있다면 그 사람을 들쑤셔 보면 그 사람의 단순한 과거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엄마가 임신하기 이전의 경험부터 나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엄마가 아들을 낳고 싶었는데 태어나고 보니 딸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세상에 올 필요가 없는 원하지 않는 자식이었다.’ 그때부터 문제가 시작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깊은 상처의 원인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둘째, 불신 당하는 것입니다.

셋째, 비교하고 비판당하는 것,

넷째, 폭력을 당하는 것,

 

이 네 가지는 단순한 상처를 넘어서서 그 사람의 일생동안 저주스러운 고통으로 남게 될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의 성격에도 큰 문제를 가져오게 됩니다. 실제로 부부 상담을 하다보면 부부가 헤어질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성격의 차이라는 것인데, 실제로 그런 사람들의 문제를 깊이 분석하고 다루다 보면 그들 부부 속에 숨겨진 상처가 가정생활을 하면서 건드려 지니까 그 상처가 튀어나오면서 분노하고 원망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고통 하는 것들이 성격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십대들의 쪽지>라고 하는 잡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들의 절반 이 부모님들 때문에 상처 입었다고 합니다. 20%는 친구들과 가까운 선배들 때문에 상처 입었다고 합니다. 10%는 선생님 또는 가까운 어른들 때문에 상처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청소년이 상처 입을 때에 80% 정도가 아주 가까운 사람들 때문에 상처 입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가깝기 때문에 배려하지 못합니다. 그냥 툭툭 말을 던지잖아요. 그저 함부로 말이 나갑니다. 우리는 행동 속에 자녀들 그 자체를 보는 것보다는 자녀들의 문제, 우리 식구들의 문제를 봅니다. 그래서 요즘 상담학에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문제를 보면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람이 이러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대로 이러 이러한 문제를 가져서 그것 때문에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 거기에 초점을 맞춰야 된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모든 이야기의 중심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존중받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존중받을 때에는 우리에게 행복이 있고, 존중받지 못할 때에는 상처가 오고 저주가 온다는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문화가 전부 그렇지 않습니까? 어려서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상처를 입지 않으면 안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 누구든 어려서부터 어렸기 때문에, 어리기 때문에 부모님들에게 무시당한 경험이 한 두 번입니까? 여자이기 때문에 무시당한 경험이 한 두 번입니까? 우리 문화 자체가 우리를 상처 입히는 문화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제 친구가 자기 자신을 옹이 먹은 춘양목이라고 비유를 했습니다. 그는 경북 봉화군에 이는 춘양이라는 동네에 살았습니다. 주로 백두대간에 서식하는 소나무를 춘양목이라 합니다. 그곳에 있은 소나무는 아주 똑바로 올라갑니다. 결이 고와서 최고의 목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끔 폭풍에 피해를 입든지 가뭄의 피해를 입게 되면 꼿꼿이 올라가던 춘양목에 옹이가 생기면서 옹이 먹은 춘양목이 된다고 합니다. 결이 깨어져 버리고 올라가서 나무가 구부러져 버리고 그래서 쓸모없는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아이들, 문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옹이 먹은 춘양목이라고 부릅니다. 자기는 스스로 생각해 볼 때 옹이 먹은 춘양목이었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지 못해서 멍청하다 소리를 들었습니다. 특히 사춘기 때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여학생들에게 접근하면 여학생들마저 한결 같이 멍청이 온다 그러면서 밀어내어 마음에 한이 맺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속으로 '나 같은 멍청이가 세상에 왜 태어났느냐' '나 같은 멍청이가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나에게도 미래가 있느냐?' 그는 이런 멍청이 각본이 걸려서 옹이 먹은 춘양목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통해 큰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병자는 베데스다 못에 얽힌 얘기를 듣고 그 못 가에 온지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한번 씩 파도가 일고 물이 움직이는데 그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치유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이 병자도 그렇게 해서 자신의 몸을 치유 받고 싶었지만 항상 이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에 38년 동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는 실패의 대명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병자는 자기 스스로의 능력과 힘으로서는 도저히 자기 문제를 풀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병자야 말로 자기보다 더 큰 옹이를 먹고, 자기보다 더 고통스러운 저주의 사람이었는데 자기 스스로 극복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을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더니 요한복음 5:6에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묻고 요한복음 5:8에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실 때에 마치 그 말씀이 38년 된 병자가 아니고 자기에게 들려주신 말씀처럼 들었습니다.

그는 무의식중에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꿇고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오 주님이시여! 주님은 이렇게 옹이 먹은 춘양목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 같이 나를 고쳐 주심을 믿습니다.”

여러분 이 예배의 자리는 고침 받는 치유의 장소입니다. 특별히 주일은 한 주간 동안의 세상의 일을 내려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전에 나와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통해 새 힘을 얻는 날입니다. 우리는 왜 주님을 만나야 합니까?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부디 주님을 꼭 만나셔서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억눌리고 쌓이고 맺힌 모든 상처들이 치유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시면 고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렇게 어려서부터 무시당하면서 상처입고 옹이 먹은 춘양목같이 쓸모없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그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의 보석으로 만들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마태복음 13:46입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저는 처음에 이 말씀을 읽을 때 극히 값진 진주가 무엇을 말할까를 생각하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시기 위해서 우리의 소유를 다 팔아 예수님 한 분만 모셔야 된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45절을 읽지 않아서 그런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3:45을 보겠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여기에서 천국을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고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천국이란 말이 나오면 그 말씀은 예수님과 동일시하면 됩니다. 누가복음 17:21입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3:2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 역시 회개하라 예수님이 여기에 가까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해석 잘 하는 찬송가가 438장인데, 3절 가사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천국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3:45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진주를 구하는 장사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3:46입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예수님은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그 진주를 얻기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파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버리셨습니다. 천국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서 짐을 지고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리셨습니다. 생명도 버리셨습니다. 피 한 방울까지도 다 파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여기에 극히 값진 진주는 바로 우리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에게 오셔서 너는 극히 값진 진주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정에 오셔서 우리 가족들을 보시며 너희 가정 식구는 모두 극히 값진 진주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극히 값진 진주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의 눈으로 보는 게 중요합니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한 권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기도하는 가운데 영적인 눈이 열려 귀신의 세계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분한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영의 눈이 열린다는 것은 자신의 주관적인 경험과 체험으로 귀신의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는 대로 함께 보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나를 볼 때 이제까지는 쓸모없는 자, 멍청한 자, 옹이 먹은 춘양목으로 보았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니 나는 예수님 앞에 극히 값진 진주요, 하나님의 보석이 되어 있는 걸 보게 됩니다. 이게 영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여러분, 영의 눈이 열려지길 바랍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나 자신을 먼저 봐야 돼요. 내가 예수님의 극히 값진 진주임을 보아야 다른 사람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영의 눈이 열려서 우리의 자녀들을 보면 자녀가 극히 값진 진주가 됩니다. 아내를 보면 아내가 극히 값진 진주가 되고 남편을 보면 남편이 극히 값진 진주가 되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 열려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정이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교회가 새로워지는 거예요. 이 민족이 새로워지는 거예요. 여러분 이 민족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문제 있는 사람이 많습니까? 얼마나 실수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비판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인간의 눈으로 본 것이고, 예수님이 그분들을 보면 극히 값진 진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님, 저분들이 예수님의 극히 값진 진주임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저 곳에 주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극히 값진 보석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장실에 갔다가 휴지가 없어서 뭘 꺼내다 보니까 빳빳한 만 원 짜리 한 장이 휴지와 함께 떨어지면서 거기에 변이 묻고 말았습니다. 버리고 나올까요? 가지고 나올까요? 저는 버리고 나오지 못합니다. 가지고 나와서 물에 닦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또 하나의 만 원짜리가 있는데, 이건 오랫동안 놔두다 보니까 꼬깃 꼬깃 꾸겨져서 아주 볼품이 없이 되었습니다. 또 한 장의 만 원짜리는 어떤 사람이 그걸 쓰면서 "내게로 돌아오라" 낙서가 되어 있어요. 또 빳빳한 만 원 짜리 한 장이 있습니다. 저에게 넉 장의 만 원권, 하나는 누렇게 뜬 것, 하나는 꼬깃꼬깃 구겨진 것이고, 하나는 낙서가 되어 있는 것이고, 하나는 빳빳한 만 원짜리입니다.

어느 만 원짜리가 더 구매력이 높을까요?

넉 장 가지고 가면 어느 만 원짜리에 더 많이 줄까요? 똑 같습니다. 왜 똑 같아요. 이유는 태어날 때에 만 원짜리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 원짜리는 죽어도 만 원짜리입니다. 살아도 만 원짜리 입니다. 꾸겨져도 만 원짜리요. 묻어도 만 원짜리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고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어서 그 아들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씻어 정결케 하시길 원하실 만큼 우리가 소중하고 소중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이 가운데에 변이 조금 묻은 사람도 있지요. 냄새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 사람 집에 오면 냄새난다고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지요. 꾸깃 꾸깃 되어서 찟어지고, 정말로 문제 있는 사람도 있지요. 낙서가 된 것처럼 뭐가 묻어서 옹고집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 빳빳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앞에는 우리는 똑같이 값진 진주요 보석들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의 눈이 열려져서 우리 만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의 극히 값진 진주입니다.”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학교 간증에 실린 글입니다.

어느 아버지는 아주 승승장구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던 소문난 실력자였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실력을 자랑스러워하고 자존심이 그 실력에 걸려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평사원으로 들어가서 40대에 대기업의 이사까지 되었던 이분이 54세가 되는 해에 갑자기 회사에서 구조조정에 의해 퇴출되었습니다. 그는 막막했지만 나름대로 새로운 일을 찾아보려고 노력도 하고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3개월쯤 되어도 아무런 진전도 없고 회복도 안 되고 돌파구도 안 보이니까 극심한 좌절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자존심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살아갈 의미를 상실하고 자살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분의 54회 생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아내와 대학 다니는 딸과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 셋이서 모여 이번 아빠 생일에 아빠에게 특별한 생일이 되게 하여 아빠를 일으켜 세우자고 결정을 했습니다. 아버지의 생일 날, 네 식구는 양수리 강가에 찻집에 가서 둘러앉았습니다.

아내가 먼저 이야기합니다. “여보 오늘 당신의 54회 생일인데 우리 식구들이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꺼내더니 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냅니다. 그 종이에 54가지 남편에게 고마운 일, 남편이 가족들을 위해서 해 준 일들을 읽고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제 대학 다니는 딸이 아버지에게 54가지 고마운 일, 아버지 때문에 이 만큼 되었다는 것을 읽어드리고, 아버지 손을 잡으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보내주신 선물입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54가지 아버지가 얼마나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지를 말하고 나서 역시 고백했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가정의 보석이요 하나님이 주신 극히 값진 진주이십니다.” 아들이 그 말을 할 때에 아버지가 엉엉 울면서 일어나서 가족들을 포옹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내 실력이 나의 자존심에 기초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나를 이렇게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가족들이 있는데 내가 여기에서 무너질 수 있느냐? 나는 이제 가족들을 위해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존중하고 나를 소중히 여기는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 나는 생명을 걸고 일을 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을 위해서 생명을 거셨습니다.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피로 우리의 더러운 것을 씻어 주시고, 우리의 금 간 것을 고쳐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보석으로 오늘 세워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일 아침에 부디 그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값진 진주인 것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면서 이제까지 미워보이던 사람이 하나님의 보석으로 보이는 영적인 눈이 열려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난 날의 성처 때문에 몸과 마음의 고통을 가지고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오 하나님이여 저분들에게 오셔서 하늘의 보석을 만들어 주시옵소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하여(마13:1 - 52)

 

주님의 몸된 교회(그리스도인)가 가장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성경에서 자신을 구속 주로 계시한 하나님과 또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일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창조주요 구속 주이신 하나님을 섬김이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신 방법을 따라 섬김이 아니라 이교적인 방법을 좇아 섬기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대한 이해까지 부족하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살기보다 괴상한 허무의 세계를 사모하게 되며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에서 오히려 도피하려는 어리석음 만을 계속하고 있는 일들이 많다.

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성경을 통해 하고자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계시(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배우지 않고 천국 여행객이라 자청하는 무지한 자들을 통해 천국을 듣고 배우다 보니 천국에 대한 개념이 너무나 잘못되어 있고 그 개념이 잘못되다 보니 천국 백성으로 사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 큰 문제이다.

그 결과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을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 정도로 이해하여 사후세계 곧 죽어서나 가는 어떤 초월의 세계로까지 잘못 알고 있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이 자신들에게 부여된 직무(사명)를 망각하고 사는데 이것이 가장 슬픈 일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천국(하나님의 나라)을 가르치실 때 항상 비유로만 가르치셨다.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서 보이시는 계시역할도 하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를 감추고 숨기시는 은닉역할도 함께 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특별한 교육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고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신 목적은 그 시대 자기백성 곧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자세히 가르치기 위함이셨고 반면 무지한 군중들에게는 철저하게 숨기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너무나 철저하게 숨겨져 있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다.

이것이 비극적인 일이긴 하지만 다른 시각 곧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성취여서(사6:9-10, 마13:14-15) 불의한 우리로서야 뭐라 판단 할 수 없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의 비유를 바르게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이 아니고는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사역을 보는 눈을, 그리고 그의 말씀을 듣는 귀를 복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마13:16-17).

비유란 언어의 한 표현 방법이다. 한 사물이나 어떤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거나 연상할 수 있는 다른 사물(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함으로서 이해를 돕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비유는 그 중심주제 곧 비유로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밝히지 않으면 그 내용을 바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 중심주제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백번 아니라 천번을 읽어도 그것은 자기의 종교적 경력에 불과할 뿐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별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비유의 주제를 잘 파악해야만 한다.

우리 주님은 "천국은 .....와 같다" 고 하시며 비유의 주제를 분명히 제시하셨다.
그리고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늘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그 차이가 크다.
성경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이해되는 언어의 차이점도 극복해야 할 문제이지만, 마태복음에만 '천국'으로 기록되었고, 동일한 부분을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막1:15, 눅13:18,20).
고로 거기에는 마태복음의 특수성과 그렇게 표현한 저자(사도 마태)의 의도가 있음을 파악해야 할 대목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 희랍어(바실레이아-신약)와 아람어(말쿨-구약)는 택함 받은 백성과 관계하여 하나님의 위치, 역할, 그의 사역을 표현하기 위해 채용된 특수한 단어이지 결코 하늘에 있는 어떤 장소를 지칭한 말이 아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할 때 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서의 통치사역,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속적 활동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 육신하심으로서 이 땅에 왔다.
주님의 비유는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좋은 씨를 뿌리는 농부요, 씨가 떨어지는 밭은 세상이다. 씨를 뿌려서 천국의 아들들을 불러 모으신다.
주님은 이것을 천국이라고 말씀하셨다(마13:3-9, 18-23).
즉 천국이 이와 같은 것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시면 이미 천국은 온 것이다.
우리 주님은 씨를 뿌리되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원수(사단)가 가라지를 덧 뿌린 것이다. 그로 인해 천국의 아들들이 악한 자들에 의해 고통을 당한다. 천국이 고통을 당한다. 주님은 이것을 천국으로 비유하셨다(마13:24-30, 36-43).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가? 천국은 좋은 곳, 아름다운 장소, 희락이 넘치는 곳, 온갖 좋고 고상한 말로 꾸며서라도 천국을 극락보다 나은 곳이라고 선전해야 되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휘황찬란하고 멋진 곳이 아니라 악한 자들 때문에 고난 당하고 고통받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 천국은 우렁찬 나팔소리도 없이 아주 미미하게 겨자씨처럼 시작되었다.
주님의 오심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나라는 겨자씨가 자라듯 또 누룩 한 덩이가 가루 서말을 전부 부풀게 하듯 성장하고 변화될 것이고 마침내는 모든 인류가 그 나라를 시인하고 그의 권세 앞에 굴복할 것이다(마13:31-33).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천국'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천년 동안이나 자라 왔다. 그리고 이 천국은 지금도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천국이 고통을 당하고 미미하게 시작하고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해서 그럼 천국이 시시하고 저속하고 저급한 것이냐 할 때! 천국은 가장 값진 보화와 같은 것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 해서라도 소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을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마13:44-46).

이미 바다에 그물을 치고 물고기를 잡듯, 천국의 그물은 쳐졌으며, 복음의 씨는 뿌려지고 그로 인해 천국은 겨자씨처럼 또 누룩처럼 성장하고 변화되고 있으며 또 계속 자랄 것이다.
그러나 마냥 자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시기가 있으면 추수할 시기도 있고 그물을 쳤으면 끌어내어 고르는 때도 있는 법이다(마13:47-50). 그리고 가라지와 나쁜 고기로 비유된 악한 자들은 마지막 때 심판하심으로서 천국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군중들은 그런 시시하고 저급한 천국을 원하지 않았으며 그런 힘없는 메시야요 왕을 원치않았다.
모세같은 힘있는 군주, 우렁찬 나팔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왕, 로마제국을 처 부수고 세상 위에 군림하는 유대왕국, 그들의 하나님나라 천국개념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이 기대하던 나라가 아니었기에 그들은 천국의 초대를 거절했고, 또 십자가에 못박히신 초라한 예수를 그들의 구주 곧 왕으로 영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시대는 어떤가? 사람들이 어떤 천국을 기대하며 사모하고 있는가?
기대가 크면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어떻게 되겠는가?
기대하던 그런 나라가 아니어서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그의 다스림을 외면하고 죽어서나 가는 하늘나라를 사모하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서 이 땅에 왔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미 그의 왕으로서의 통치는 종말론적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리스도안에서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요 천국은 이미 와있는 것이다.
이 천국이 성장하고 또 변화되고 자라서 마지막 날 완성될 것이다.
이 나라를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며 그를 섬기고 그의 지배를 받는 자는 그와 함께 살며 그와 더불어 영원한 삶을 살 것이다. 이것을 믿음이 우리의 신앙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예배당에 자주 출입하고 각종 종교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며 그곳과 항상 좋은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시인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곧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고백하는 것이고, 이제 그리스도를 섬기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신하로서 살겠다고 서약하며 그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 이 천국 외에 다른 천국이 또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천국은 없다. 없는 세계를 있다고 가상하고 믿는다고 해서 없는 것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없는 세계를 있는 것처럼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어찌 자기확신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믿는 것이 믿음이겠는가?

그런데도 자기확신과 자신의 신념으로 없는 세계를 있는 것처럼 믿고 그곳에 가기 위해 일생을 소비하고 전 재산까지 탕진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거짓 가르침에 속아 산다고 해서 누가 그 생을 보상해준단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 대한 이해를 잘 못 하고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가 없다.

 

다시 반복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죽어서나 가는 저 하늘의 어떤 장소가 아니다.
천국은 지금 이 땅에 있고 이천년동안 자라 왔고 그리고 지금도 자라고 있다. 이 천국이 마지막 추수 때가 되면 완성되고 영원한 세계요 새로운 질서로 변화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은 없는 세계를 있는 것처럼 믿고 자기 확신 속에 사는 뜬구름 잡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시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 나라의 왕으로 고백하며, 그에게 연합된 그의 몸된 교회로서 살고, 그의 왕으로서 통치가 우리의 삶을 통해 확장되도록 어두움의 권세인 죄와 악과 더불어 전투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 곧 우리의 가정과 직장으로 소명되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주님을 왕으로 섬겨야 하고 그 왕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살기 위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려고 하면 그곳에는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악한 자들에 의해 고난당하는 곳으로 비유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백성들의 고난과 희생 속에서 성장하고 자라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봉사하는 것이 아닌가?
죽어서 저 하늘에 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섬기며 그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생명이요 구원이며 영광이요 영생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곧 그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세상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 이 사회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원치 않는다.
거짓과 속임만이 가득하여 육체적인 만족을 인생에 있어 최고의 낙으로 삼는 곳이어서 악이 지배하는 사회요 사단이 추구하는 나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출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에 초대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된 백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요, 왕으로 섬기는 자들이기에 이전처럼 육체적인 욕망과 쾌락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와 악을 오히려 멀리하고, 또 그런 악과 더불어 투쟁하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나라가 우리의 삶을 통해서 확장되도록 헌신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고 사는 자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거룩한 소명을 받은 자로서 정치인은 정치 현장에서, 교사는 교단에서, 학생은 학업에서, 경영인은 기업 현장에서, 직장인은 일터에서, 주부는 가정에서, 또 부모는 부모의 위치에서, 자녀들은 자녀의 자리에서 ...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죄와 악과 투쟁하면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헌신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가?
이 세상은 더럽고 악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곳이므로 악과 더불어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면 되고, 오로지 소망이 있다면 저 천국, 죽어서나 가는 저 하늘나라만 동경하면서 그것을 고귀한 믿음인양 소망하고 사는 자들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고로 그것은 천국백성의 삶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백성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요 사단의 하수인으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예배당을 열심히 출입하는 것인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왕으로 섬기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을 받기 위함이 아닌가?

예배당은 그리스도인의 학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오늘날은 어떻게 사역하시는지를 깨달았다면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주님의 몸된 교회인 우리의 삶을 통해서 진행된다면 이것보다 아름답고 고귀한일이 이 땅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자라고 성장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같이 천한 자들을 그리스도안에서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부르시고 초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존귀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 아 멘 -

 

추수 때까지 자라게 두라

마태복음 13:24-30

 

우리는 지금 결실의 계절 가을 한복판에 살고 있습니다. 봄과 여름에 수고하여 가꾼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결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들판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른 봄부터 피땀 흘린 농부들의 그 거룩한 수고를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늘에서 비를 주시지 않았다면 벼가 그처럼 자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놓았다 해도 큰 비바람 한번이면 일 년 농사가 하루아침에 물거품 되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수고하고 내가 정성을 들였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실은 은혜이며, 심판입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둡니다. 좋은 것을 심었으면 좋은 것을 거둘 것이요, 나쁜 것을 심었으면 나쁜 것을 거둘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요, 도덕의 이치요, 종교의 이치입니다. 씨앗을 심는다는 것은 하나의 신앙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농부는 상당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아까운 씨앗을 땅 속에 넣고, 흙을 덮고, 발로 밟고, 그리고 싹이 날 것으로 믿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것으로 믿고, 추수 때를 바라보며 논과 밭을 떠납니다. 이것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농부는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고, 그 소박한 믿음으로 농사에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서 5:7에서 농부의 인내를 배우라고 했던 것입니다. 농부는 가을까지 계속 수고하고 땀을 흘리면서 참고 기다립니다.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기다립니다. 여기에 생명의 신비가 있습니다. 농부가 심지만 자라게 하고 거두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린아이를 키워보셨습니까? 아기의 성장을 위해 우리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젖을 먹이거나 우유병을 물려주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겨우 그것뿐인데 아기 몸이 균형 있고 고르게, 총기 있게 자라나는 것을 보면 역시 생명은 신비합니다. 우리가 한 일은 하찮은 것에 불과합니다.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엄청난 구원의 역사, 그 생명의 사역 안에서 우리는 조금 거들고 수고할 뿐입니다.

 

 

이제 심어놓은 이상 거둘 때에는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많이 거두든 적게 거두든 오로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거두어야 합니다. 워낙 내가 한 일은 적은데 무슨 불평이 있으며 무엇인들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 이치 앞에 겸손한 사람은 절대로 불평이 없습니다. 오늘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해도 그것이 다 내가 심은 대로 거두고 있을 뿐입니다. 이 이치 안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온유하고 겸손할 수 있습니다.

 

부인은 교회에 나오지만 남편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한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마침 남편이 감기로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좋은 기회다 싶어 여러 번 권면을 해도 교회에 나오지 않는 그분에게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몸이 괴로우십니까?” 하고 물으니 그분 대답이 아주 엉뚱합니다. “죄가 많아서요.” 제가 모른 척하고 또 물었습니다. “아니 무슨 죽을병이라면 몰라도 감기쯤 걸린 것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그분은 워낙 못할 짓을 많이 하고 살았거든요.” 하면서 언제나 삐끗할 때마다 어이쿠 내 죄 때문에, 여기서 터지는구나.’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선한 씨를 심어놓고 열매 맺기를 기다립니까? 아니면 도처에 뿌려놓은 악의 씨앗이 언제 싹이 나고 자라서 나를 찌를까 하고 깜짝깜짝 놀라면서 살아가십니까? 내가 어느 편에 속하는지 솔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3장 전반부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비유의 연장입니다. 본문은 씨 뿌리는 자비유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주제는 천국입니다. 천국의 임재와 확장, 그리고 완성을 말씀하는 아주 중요한 비유입니다. 마음 밭에 좋은 씨, 즉 복음을 뿌렸습니다. 이 씨가 이제 자라는 중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분명 좋은 씨를 뿌렸는데 어느 틈에 가라지가 섞여 자라고 있습니다.

가라지를 헬라어로 지자니아, 를 말합니다. 피는 벼와 모양이 비슷해서 알아보기 힘듭니다. 모내기할 때 보면 가끔 피가 섞여 있습니다. 잎만 보면 알 수 없으나 뿌리를 보면 차이 납니다. 피 뿌리는 하얗고 벼 뿌리는 노랗습니다. 그렇게 해서 벼와 피를 구분하는데, 잎을 보고는 비슷비슷해서 언뜻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줄기와 잎은 비슷하고 뿌리와 열매가 다른 것입니다. 악이 바로 그런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악의 모습과 선의 모습에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뿌리와 열매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과정에 있어서는 때로 비슷해 보이지만 시작도 결과도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기까지는 악과 선을 구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결실할 때가 다 되어서야 종들이 가라지를 발견했습니다. 마태복음 13:27~28입니다.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우리는 좋은 씨를 뿌렸는데 왜 여기에서 가라지가 났을까요? 주인님, 당장 뽑아버릴까요?”

종들은 지금 당장 뽑아 버릴 듯 막 서두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 초등학교 때, 하루는 한 친구가 아침에 학교에 왔는데, 몸에서 술 냄새가 났습니다. ‘참 이상하다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다음날 아침에 또 술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이 녀석 아버지가 마시다 남긴 술을 몰래 마셨구나.’라고 생각하고 선생님께 일러 바쳤습니다. 선생님은 그 친구를 야단치시려고 불렀습니다. 다짜고짜 너 아침에 술 마셨지하고 나무랐습니다. 이 아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합니다. “아니에요, 선생님. 저는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먹을 것이 없어 양조장에서 버린 술 찌꺼기를 주워 먹고 왔습니다.” 이 기막힌 사연을 듣고 선생님은 성급히 화낸 것을 후회하셨고, 또 우리도 친구의 사정을 모르고 선생님에게 일러바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우리는 그 아이를 끌어안고 생각 없이 의심한 것 잘못했다고 울면서 회개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것이 악이다, 이게 가라지다.’ 생각하며 뽑고 보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평가를 내렸는데, 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보니 그 내면에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이 있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정치인들 치고 정의 자유 평화를 말하지 않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저마다 나라를 사랑한다며, 모두가 정의를 내세우고, 진리를 내세우며, 뭔가를 바르게 한다고 하면서 실은 더 큰 악을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가라지를 의식하고 저것을 빼버려야겠다.’ 하는 것만 생각하다가 어느 사이에 나도 가라지가 되어버린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원하는 곡식과 원하지 않는 가라지가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사는 사회가운데도 여전히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악을 용납하실까? 왜 선과 악을 함께 자라게 하실까?’ 이것이 영 못마땅하게 여겨지지만 그래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잠언 24:19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여러분, 악한 사람이 잘되는 것을 질투하지 마십시오. 왜 선인과 악인과 함께 있느냐고 묻지도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역사는 변해도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수천 년이 흘러도 주님께서 주신 귀한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악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이스라엘을 유린할 때에도 하나님은 저들과 싸우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징계의 방망이로 쓰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합니다. 악 자체가 존재하는 것이 불만이요, 악인이 더 형통하는 것에 못마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성경은 이로 인하여 범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제거하려다가 선을 잃고, 악을 뽑는다고 하다가 더 큰 악을 행하고 역사를 그르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의 역사가 온통 그런 실수들로 얼룩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니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묻지 마시고, 다만 현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지혜가 있습니다.

 

알곡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가 있듯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공존합니다. 가짜가 왜 생깁니까? 진짜 때문입니다. 다이아몬드가 귀한 물건이 아니라면 왜 모조 다이아몬드가 나왔겠습니까? 요즘은 가짜 목사도 있다고 합니다. 왜입니까? 귀한 직업, 성스러운 직업이기에 가짜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6거짓 형제라 표현되는 가짜 교인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6에 나오는 다른 복음가짜 복음 말합니다.

로마서 10:3하나님을 모르는 의가 나오는데 이것은 가짜 의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1 이하에 불법의 사람'’이라고 표현 된 가짜 그리스도, 적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9사단의 회당이라는 가짜 교회도 있습니다.

진짜가 너무 중요하기에 수많은 '가짜''거짓'이 있는 것입니다. 이 가짜들은 진짜를 가장 한 채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또 말씀이 내 안에서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 말씀을 깨끗한 마음으로 받으려는 사람에게 귀를 막아 못 듣게 하고, 그것을 왜곡시켜서 자라지 못하게 하며 바른 길에 서지 못하게 가라지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가 더 성하고, 더 훌륭하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밭주인으로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29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예수님은 지금 선과 악의 공존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악과 선이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선과 악은 임시로 공존합니다. 가라지를 뽑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것은 악을 방치하자는 것이 아니요 선을 보호하시려는 것입니다. 밭주인이 곡식보다 가라지를 더 사랑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선보다 악을 아끼시겠습니까? 가라지 하나 뽑으려다 알곡을 다칠까봐 걱정하는 것이 주인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 성을 기억하시지요? 이 성이 멸망할 당시의 인구가 오만 명이었습니다. 소도마이트(sodomite;동성연애자)가 오만이나 되는, 이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더러운 성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습니다. 당장 멸망시켜도 시원치 않을 악의 소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18:32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성을 의인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죄인 오천 명 중에 의인이 한 명만 있어도 그 하나를 보시고 전체를 용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한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악한 것만을 보려고 합니다. 나쁜 점만, 가라지만 보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 사람을 만나지만 어떤 분은 만날 때마다 늘 어려운 이야기만 합니다. 세상이 썩었느니 망했느니, 어떻다느니 하고 이상한 이야기만 합니다. 그런 사람은 다시 만나는 게 싫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어두워지거든요, 좋은 이야기도 많은데 하필이면 못된 이야기만 골라서 할 게 뭡니까? 그것도 참 못 고칠 병입니다.

 

언제나 밝은 면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라지만 생각하다가 아예 가라지 속에 묻히지 말고, 알곡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선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마음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세상을 보든지 교회를 보든지, 자기 자신을 보든지 이웃을 보든지, 언제나 장점을 극대화하는 바로 거기에 문제 해결이 있습니다. 악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시기도 방법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의인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그 고난 속에서 선을 성장케 하시는 역사임을 알아야 합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기 쉬운 가장 크고 흔한 오해는, 언제나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문제요, 문제가 없는 것 같이 생각하는 것 역시 위선입니다.

 

옛날 영국에서 냉동시설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 물고기를 물탱크에 넣어 가지고 산채로 수송했습니다. 그러나 먼 바다에서 항구까지 오는 동안 물고기들은 아무리 살아서 온다 해도 긴 여행에 지쳐서 비실비실 합니다. 신선도가 낮아지고 값도 내려갑니다. 그런데 어느 지혜로운 사람은 물고기 넣은 탱크 속에 상어 새끼 몇 마리를 함께 집어넣어 왔다는 것입니다. 물고기들은 상어 새끼한테 잡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도망 다닙니다. 그렇게 해서 자연히 운동이 되고 건강한 물고기로 항구에 도착하는 것입니다. 물론 몇 마리 잡아먹히기는 하지만 그 대신 전체가 삽니다. 선과 악이 왜 공존하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있어야 하겠기에 있는 것입니다. 악 때문이 아니요 선 때문입니다. 선에 유익하기 위해서 악이 공존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백성을 위하는 데에 그 초점이 맞추어짐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는 선과 악이 공존한다 하더라도, 좀 불공평하게 여겨지는 현실일지라도 추수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이르기 전, 주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주님 오실 때에 명백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그날이 올 것을 믿고 오늘은 묵묵히 선과 의, 거기에 우리 마음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고 보면 내 마음속에도 선과 악이라고 하는 두 세계가 항상 갈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21에서 바로 이 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곧잘 진실하고 깨끗하게 살다가 어쩌다 그만 참지 못하고 화를 벌컥 내든가 실수를 저지르고 나면 이것을 너무 크게 생각합니다. 가슴을 치면서 나는 못된 놈이다. 구제 불능이다하고 자학합니다. 자기를 너무 가혹하게 책망하는 나머지, 그만 완전 절망해버립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며 수학자인 파스칼(Blaise Pascal)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나만 보면 절망하게 되고, 나를 보지 않고 하나님만 보면 교만하게 된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나,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깜짝 놀라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합니다. 여러분, 바울의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안에 악한 마음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놀라지 마시고 이상하게 여기지도 마세요. 어디에나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있습니다. 함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뿌리로 알고 열매로 알게 될 것입니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이 현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악을 빼내려고 너무 애쓰지 마세요. 그러다가 절망하기 십상입니다. 차라리 잊어버리세요. 그리고 선을 키우십시오. 어떤 사람은 그 악한 것, 이것 하나 고치겠다고 거기에 집중하다가 그만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은사를 다 소멸해버립니다. 그 많은 기회를 다 잃어버립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가라지를 생각하느라고 참으로 귀하고 선한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답답한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선을 키우시고, 내게 주신 하나님 말씀, 그 복음에 온 몸과 마음으로 순종합시다.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고 악을 이기는 길이 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심판의 시기와 방법은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선한 종자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선한 종자를 자라게 하고, 이것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가라지에 대해 더 이상 시비하지 말고 묵묵히 선한 일을 찾아갑시다.

 

가라지와 알곡을 구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무 염려 말고 심판을 그분께 맡깁시다. 나의 나됨을 지켜 나갑시다. 말씀을 따르고, 받은 은사를 극대화합시다. 그리고 주께서 주시는 가을에 알곡의 영광을 누리게 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립시다. 이 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 13장 요약강해] 씨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

 

[내용개요]


본장은 천국에 관한 일곱 가지 비유들을 모아놓은 천국비유집이다. 그 내용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에 대한 설명(1-23절), 가라지 비유(24-30절), 겨자씨 비유(31-32절), 누룩 비유(33절), 가라지 비유에 대한 설명(34-43절), 밭에 감추인 보화와 극히 값진 진주 비유(44-46절), 그리고 그물 비유이다(47-50절). 이 모든 비유의 결론으로서 곳간에서 옛 것과 새 것을 내어 오는 집주인의 비유를 말씀 해 주신다(51-52절). 이 모는 비유를 마치신 후에 예수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능력을 행했으나 고향 사람들은 목수의 아들인 예수를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않으셨다(53-58절).


[강해]


본장은 그 유명한 씨 뿌리는 비유와 천국 비유가 있는 장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유형을 말해 주고 있으며, 천국 비유를 통해서는 사람이 천국에 가려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과 천국의 특성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께서 고향 사람들에게 영접받지 못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 씨 뿌리는 비유

 

1) 길가에 떨어진 씨
길가에 떨어진 씨는, 길이 너무 단단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구원의 가능성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길의 땅처럼 너무 단단하고 완악하여 전혀 받아들일 여지를 가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에 초대하고 계시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 초대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a. 영접지 아니함(요1:11)
b. 내어 보냄(마8:34)

 

2) 돌밭,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
돌밭, 가시떨기 밭은 싹이 나기만 할 뿐 그 싹이 계속해서 자랄 환경은 제공해 주지 못합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어 일단 수긍은 하되 열매 맺기까지 자라지 못하고 세상의 것에 넘어져 중도에 복음을 포기하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실로 이 세상에서 천국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 오직 끝까지 견디고 이기어 의와 생명 의 열매를 맺은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a. 근심하고 가는 청년(마19:22)
b. 배교자(벧후2:20)

 

3) 옥토에 떨어진 씨
옥토는 영양소를 풍부히 담고 있어 한번 떨어진 씨가 싹을 내면 열매를 맺기까지 자라게 해줍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되 끝가지 받아들여 의와 생명의 열매를 맺는 신실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을 소유한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한편 같은 옥토라도 그 열매 맺는 정도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옥토가 되되 가급적 많은 열매를 맺는 옥토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 좋은 신자(딤후4:6-8)

 

2. 천국 비유

 

1) 농사와 고기잡이 비유
예수께서는 자신이 전파하는 천국을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비유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그 세 가지 비유 중 첫번째 비유는 선별에 관한 비유입니다. 사람들은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을 때 좋은 것만을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립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농사와 고기잡이 비유로 천국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백성이 들어가는 곳임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 추수할 일꾼(마9:38)

 

2) 겨자씨와 누룩 비유
예수께서 제시하신 천국 비유 중 두번째 비유는 확장하고 성장해 가는 천국에 관한 것입니다. 겨자씨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그러나 그 씨가 싹을 내고 자라면 크게 자라 쉴 만한 그늘과 공간을 제공해 줍니다. 누룩 또한 반죽 속에 들어가면 반죽 전체가 부풀도록 만듭니다. 결국 이 비유는 천국도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여 제자들이라는 작은 모임으로 출발하나 결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를 이를 것임을 교훈해 줍니다.
a. 겨자씨(막4:31-32)
b. 셀 수 없는 큰 무리(계7:9)

 

3) 값진 보화 비유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 비유 중 세번째 비유는 선택에 관한 비유입니다. 보화가 감추인 밭을 발견하고는 자기 소유를 팔아 그 밭을 산다는 것과, 값진 진주를 발견한 후 자기 소유를 다 지불하고 그 진주를 산다는 말씀은 곧 천국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획득하는 것임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실로 천국은 너무나도 값진 것이고, 이 세상 것과 대립하는 것이어서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는 획득할 수 없습니다(참조, 마16:24).
a. 자기 포기(마10:39)
b.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김(빌3:8)

 

3. 메시야 배척

 

1) 배척한 당사자들
예수께서 권능을 행하시고 권세 있는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배척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예수의 친척들과 동향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은 예수의 누이의 남편들, 곧 예수의 처남들이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참조, 막6:3).
a. 사위들(마13:56)
b. 고향 사람들(눅4:22)

 

2) 배척한 이유
예수의 친척들이나 동향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치 아니하고 배척한 이유는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아 왔던 인간 예수의 모습에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자라실 때에 보였던 평범한 인간의 모습만을 머리 속에 그려 넣고 그 사실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예수의 탁월성과 초월성을 보고도 마음을 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들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면만 보면 결국 그들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a. 목수의 아들(막6:3)
b. 고향에서 외로운 선지자(눅4:24)

 

3) 배척의 결과
예수의 친척이나 동향 바람들 중에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배척한 사람들은 그 결과로 중대한 불이익을 당하였습니다. 그것은 첫째, 구원의 기회를 상실한 것이고, 둘째, 주의 축복을 살아서도 더 이상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척한 결과는 이처럼 참담합니다.
a. 능력을 행치 아니하심(마13:58)
b. 심판(요3:18)

 

결론
천국은 하나님의 구윈의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가운데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되 죽을 때까지 간직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자에게 허락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소유, 경험 따위를 다 버리고 오직 주를 영접하고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단어해설]


2절. 큰 무리가. 원어 <o[cloi:오클로스>는 '일단의 무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당시의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소외된 사람들의 영혼에 깊은 관심을 보이셨음을 알 수 있다.

3절. 비유. 원어적으로는 '옆에 던지다'라는 의미인데 예수께서는 비교, 대비 등을 통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무리들을 교육하셨던 것이다.

4절. 길가. 여기서는 자신의 경험만을 내세우며 교만으로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5절. 흙이 얇은 돌밭. 여기서는 삶의 경험이 그리 많지 않거나 인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진리를 피상적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미한다.

7절. 가시떨기. 원어적으로는 '쓸모 없는 것'을 뜻하며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장애물 즉, 고난이나 신앙의 퇴보 등을 의미한다.

8절. 좋은 땅.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의 상태가 되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15절. 완악하여져서. 원어 <pacuvnw:파퀴노>는 '둔하다, 살이 찌다'라는 뜻을 가지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인 반응을 할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완악한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는 결과를 가져온다.

18절. 들어라. 여기서는 단순히 듣는 것 뿐만 아니라 들은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도 포함한다.

22절. 재리의 유혹.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소용되는 물질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요소로 작용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30절. 추수 때에. 종말의 의미로만 사용되는 말인데 이 세상의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진다.

31절. 겨자씨. 배추과의 일년 생 풀로서 약재, 양념 또는 식용으로도 사용되는 씨앗이 다른 식물보다 작은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는 하나님 나라의 은밀성과 확장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신학주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본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12장 끝부분부터 13장 끝부분까지를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12장 끝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이요 나의 형제들이라고 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은 누구나 나의 모친이요 나의 형제들이라고 했다. 즉 제자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고 정의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설명해 주는 것이 본장에 나오는 천국 비유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천국이 임했음을 믿고, 천국 복음 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정신적인 믿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물 비유에서 이러한 사실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천국믄 그물과 같다고 했다. 그런데 천국 그물에 잡힌 물고기들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한다. 천국 그물 안에도 악인이 있다는 강력한 암시를 주는 비유이다.

그렇다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아직도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변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드디어 예수께서는 결론적으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비유를 말씀하신다. 서기관이란 율법을 베껴서 보존하고 해석하여 가르치는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제자 된 사람들이 이러한 서기관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또한 옛 것과 새 것이란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교훈을 말한다.

 

집 주인이 옛 것 과 새 것을 곳간에서 내어 와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처럼,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교훈을 적절하게 잘 활용하여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이 해야 할 일이 다. 이것이 바로 천국 그물에 걸린 고기들을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골라내는 기준 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과 천국 복음을 믿는 믿음이 기준 없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명확한 기준을 가진 믿음이라는 사실 을 알 수 있다.


[영적교훈]


하나님께서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밭을 심판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알곡이 다칠 것을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인내의 표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려내어 영생과 영벌을 주시는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은 온다. 우리는 항상 깨어서 믿음의 삶과 성실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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