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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렙돈 /세겔/ 동방박사

by 은총가득 2020. 9. 8.

성경의 화폐-렙돈

성경의 화폐(1)-렙돈

구약 시대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일정한 가치의 기준이 되는 오늘날의 화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상거래나 어떤 상황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때에는 주로, 금, 은, 청동, 철과 같은 금속들이나 양, 염소, 새, 곡물, 기름가 포도주 같은 가축이나 농산물이 화폐의 기능을 대신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세겔”이라는 단위가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세겔이라는 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게의 단위입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23장에는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사라를 매장할 땅을 헷 사람 에브론에게 구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에브론에게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창 23:16) 주었다고 하는데, 이 표현은 사백 세겔 무게의 은을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은의 모양은 덩어리 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장신구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발굴물 중에는 은을 철사와 같이 길게 뽑아 놓고 마치 실타래 처럼 뭉쳐 놓은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런 형태로 은을 달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교환 가치에 따라서 그것이 은 일수도 있고, 금일 수도, 청동이나, 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세겔이라는 무게 단위를 세겔이라는 화폐로 생각하시면 성경을 읽다가 혼동이 올 수도 있습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지불한 은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 수있는 단서가 위의 성경 구절에 있는데요.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상인들은 바벨론(고대 바벨론 제국 1894–1595 BCE)의 무게 단위를 국제 통용 무게 단위로 사용했습니다. 바벨론 세겔은 그 무게가 약 8.3-8.5g이니까, 400세겔은 은 3.4kg을 준 셈이 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세겔의 단위는 항상 일정했는가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또는 같은 시대라도 지역에 따라서 세겔의 무게가 제 각각이었습니다. 아래의 예는 매우 간단히 몇가지를 소개하는 시대와 지역별 세겔의 표준 무게입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건넌 세겔은 그 무게 단위가 수메르-바벨론 세겔이고요.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성전세를 내게 하시는데, 그 때의 세겔은 아마도 이집트 세겔을 사용했을 겁니다.

수메르-바벨론 세겔 (아브라함 가족들의 시대) 8.3-8.5g

이집트 세겔 (출애굽 시대) 11-13g

앗수르 세겔 (히스기야 시대) 10g

바벨론 세겔 (포로기 시대) 8.3-8.4g

요세푸스 (예수님 시대) 13.6g

 

이렇게 세겔 무게 단위의 금이나, 은, 청동이나 철들을 교환하다보면 반드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바로 저울을 가지고 다녀야한다는 거지요. 그리고 무게를 가늠하는 저울의 추도 가지고 다녀야합니다.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동전입니다.

 

오늘날의 동전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스에서 국가 또는 지역 통치자들이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조폐공사를 만들었습니다. 지역마다 세겔의 무게가 다르고, 저울 추를 믿을 수 없어서 고안해낸 제도입니다. 조폐공사에서 균일하게 무게를 맞춘 금과 은들을 휴대하기 쉽게 둥글 납작한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게가 일정한 공인된 화폐라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그 위에 문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오늘날의 동전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그리스식 동전이 지중해 주변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성과 편이성 때문에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시작해서 나라마다 동전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동식물이나, 글자, 또는 통치자의 형상들을 문양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당시의 동전들의 이름을 많이 소개합니다. 드라크마, 데나리온, 아사리온, 고드란트, 렙돈과 같은 동전의 이름들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동전의 단위는 “렙돈”(λεπτὸν)이라는 단위입니다.

아마도 성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헌금함을 지나가는 부자들이 헌금을 하는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는 그 누구보다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였다는 칭찬과 함께 말이지요. 그럼, 두 렙돈을 지금 대한민국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의 가치일까요?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마 20:10). 돈의 단위 상으로 1 데나리온은 64 고드란트입니다. 그런데, 렙돈은 그 고드란트의 절반(2 렙돈=1고드란트)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략 하루의 노동시간이 8시간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하루 노동으로 1데나리온(64 고드란트)을 받는다면, 한 시간에 8 고드란트를 받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한 시간 최저 시급이 2019년을 기준으로 8,350원이니, 1 고드란트(=2 렙돈)는 약 1,000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데나리온 = 64 고드란트 = 128 렙돈

1 렙돈 ≈ 500 원

금이나 은이 아니라 청동으로 만든 동전 렙돈을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가치로만 이해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드리는 여인의 믿음의 무게로 그 두 렙돈을 평가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믿음의 무게를 늘려나가는 2020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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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화폐(1)-렙돈 PDF

성경의 화폐 -세겔

예수님의 시대에 로마의 지배 아래에 살던 지역들에 부과된 세금이 절대로 가볍지는 않았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세금의 종류와 수가 다르기는 했지만, 로마가 정복한 땅에 부과하는 세금이 100가지가 넘었다고 하니, 정복 당한 민족이 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로마 제국의 주 수입원은 전쟁을 통한 약탈과 세금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날마다 하는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승리해서 얻게 되는 전리품은 승리하는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테니, 일정하고 안정된 수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금으로 유지되는 제국’이 로마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에게는 중요했지만, 납세자인 시민들에게는 무거웠던 세금들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군인들을 동원해서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100가지가 넘는 세금에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이들의 부패까지 있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세금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 세금”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남자들은 20세부터 50세까지 의무적으로 내야했고, 여자들은 3세에서 62세까지 내야했습니다. 그냥 쉽게 말해서 태어나자마자 부터 죽는 날까지 세금을 내야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마태복음 5장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돌려 받을 가능성이 없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말고 들어주라는 이 가르침이 바로 세금에 때문에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서 매정하게 등돌리지 말아야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로마 제국이 부여하는 세금과 함께 유다 땅에는 종교 세금도 있었습니다. 성전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전세는 지역과 관계없이 모든 유대인들이 성전에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지역과 관계가 없다는 말은 그가 사는 곳이 유다이든, 아니면 로마이든 유대교인이라면 의무적으로 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전세는 로마의 세금과는 달리 내야한다는 의무규정이 있을 뿐, 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강제징수 규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릇된 제의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한 쿰란의 종파는 성전세를 내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였고, 그 외에도 성전에 내는 세금을 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셨을까요?

“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내시려던 세금이 로마에 내는 세금인지, 아니면 성전에 내는 성전세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이야기에 많은 성경 책들은 표제어로 “성전세를 내시다”라고 표제어를 달아 놓았습니다. 마태복음의 이야기로 보건데, 당시 세금은 1인에 반세겔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갈릴리 호수에 낚시를 던져 고기를 잡으면 그 고기의 입 속에 한 세겔이 있을 것이라시며, 베드로와 예수님의 몫으로 그 한 세겔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물고기의 입에서 꺼낸 한 세겔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헤롯 이전 시대에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유다와 그 주변의 지역들에서 널리 통용되던 세겔은 “두로의 세겔”(Shekel of Tyre)입니다. 지중해 변의 두로 지역에서 주조된 화폐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 동편의 레반트 지역에서 통용될 화폐를 제조하는 지역으로 두로를 선정하였고, 그 지역에서 제조된 화폐에는 그 지역의 이름을 새겨 넣어서 일종의 화폐 실명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두로에서 제조된 화폐에는 ΤΥΡΟΥ ΙΕΡΑΣ ΚΑΙ ΑΣΥΛΟΥ (투로우 이에라스 카이 아술로우, “두로(에서 제작한) 거룩하고 신성한 (세겔)”)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헤롯의 시대에 와서는 성전건축(20/19BCE)과 동시에 예루살렘에서 화폐를 제작하게 됩니다. 일종의 “두로 조폐공사 예루살렘 지청”를 만든 셈입니다. 이것은 헤롯의 외교력의 승리였습니다. 화폐 제조를 통해서 벌어들일 수 있는 경제적인 이득이 막대했기 때문입니다. 두로 조폐공사의 지청이었기 때문에 두로에서 제작한 화폐의 모양을 그대로 차용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지청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표시해 두어야했으므로 헤롯은 ΚΑΡ(ΚΡΑΤΟΣ ΡΩΜΑΙΩΝ 크라토스 로마이온 “로마의 힘”)라는 글자의 머릿글자를 추가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두로의 세겔처럼 그리스-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새겨 넣었습니다.

 

두로에서 만든 세겔보다는 예루살렘에서 만든 세겔이 그 형태가 조금은 엉성하고 불순물도 조금더 많이 섞여 있어서 “조잡한 세겔”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19/18BCE부터 66CE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그 주변 지역에서 “헤롯의 세겔”(Herodian Shekel)이라고 불리는 이 화폐는 널리 사용되었고, 아마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의 입에서도 이런 모양의 세겔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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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화폐(2)-세겔

 

동방 박사

베들레헴에 예수님 탄생교회에 가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에 손을 대어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누우셨던 구유를 기념하는 작은 예배 처소에서 깊은 묵상에 잠기고는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 탄생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의 할례를 기념하는 작은 제단이 있다는 것과, 탄생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기념하는 작은 제단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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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에서 동방에서 온 박사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성경 만으로는 그들의 이름도, 몇 명이 왔는지도 알수 없습니다. 기원후 2세기,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100여년 뒤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세 명이었다. 또는 네 명이었다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의 수 (황금, 몰약, 유향) 때문에 세 명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로마의 카타콤 도미띨라 (Domitilla)에는 네 사람이 그려져있고, 로마의 또 다른 카타콤 프리실라 (Priscilla) 에는 세 사람이 그려있는 것으로 보아서, 처음에는 세 명이었는지 네 명이었는지 확실히 그 수의 일치를 보지 못하다가, 세 명이라는 전통이 확정된 듯합니다 (기원후 2세기). 그리고 5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이 동방에서 온 왕들이며, 그 이름은 발다사르 (Balthassar-아라비아의 왕), 멜키오르 (Melchior-페르시아의 왕), 카스파르(Caspar-인도의 왕)라는 전통이 생겨납니다. 동방박사의 역사적인 진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동방에서 온 세 명의 사람들과 우리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되, 자기 생각에 견주어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하게 우리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보려하니 말입니다.

&amp;lt;img aria-describedby="caption-attachment-1796" class="wp-image-1796 size-full" src="https://biblia.co.il/wp-content/uploads/2017/02/priscilla1.jpg" width="1024" height="620" /&amp;gt;

 

프리실라 (Priscilla) 카타콤의 동방 박사. 세 사람의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에게 찾 아와서 경배하고 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수님께서 왕궁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문화에서 “왕”이라고 불릴 이가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상아 장식과 황금 장식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침대가 아닌 구유에 누워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꼭 그들의 문화 (페르시아로 추정) 에서만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모르고 있다고 가정할 때에, 우리도 역시 이 땅에 “왕”으로 오실 이의 탄생의 소식을 접하며 그 분이 어디에서 태어나셨을 것같냐는 질문을 던진들, 대부분은 모두 예루살렘 왕궁을 상상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억지로 우리 예수님을 휘황찬란한 금색 궁전의 왕좌에 앉혀 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회 운동가 중의 하나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이가 편안한 삶을 살았을리 없고, 가난한 자의 편, 피지배층의 입장에 서있을 예수님을 상상하며, 부자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이들을 향해, 그들이 얻은 부와 명예에 “불공정”이란 딱지를 붙이거나, 심지어는 어찌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인이 부요로울 수 있는가? 라며 비난합니다. 그렇게 성경을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틀에서만 대입시켜 이해하려고한다면, 예수님이 스스로 노동하지 않고 한 둘도 아닌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자기들은 쓰지 않는 아프디 아픈 가시면류관을 예수님께만 씌우려 할까요?

 

이스라엘에 와서 놀랐던 것 하나는, 많은 것들이 제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마를 것 같은 광야는 푸르렀고, 대단히 넓었을 것 같았던 요단강은 개울 같았고, 조그마한 호수 같을 것이라 생각했던 갈릴리는 엄청나게 넓었습니다. 사해바다는 가도 가도 끝이 없구요. 이스라엘 살면서 알게된 것은 내 생각에 견주어 성경이 증언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제한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비문

나사렛 비문

프랑스 루브르 (Louvre) 박물관의 큐레이터였던 프뢰너 (Wilhelm Froehner)가 1878년에 그리스와 중동 지역의 유물들을 취급하는 고고학 유물상으로부터 대리석 돌판 하나를 사들였습니다. 자기의 개인 소장고에 보관하던 그 대리석판은 프뢰너가 죽고 난 다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요. 발견될 당시 이 대리석 석판에는 “1878년에 나사렛에서 온”이라는 메모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돌판은 그 이후로 ‘나사렛 비문’ (Nazareth Inscription) 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대리석 돌판에는 22줄에 걸쳐 그리스어가 쓰여있는데, 로마 황제의 칙령이었습니다. 이 칙령은 무덤과 묘실에 대한 로마의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글씨의 필체를 보아서 대략 기원전 1세기 또는 기원후 1세기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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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1878년에 나사렛에 온”이라는 메모가 쓰여 있기는 하였지만, 누구로부터 사들였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발굴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기록들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이 석판의 존재에 대해서 고고학자들 사이에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이 대리석 석판에 프뢰너가 “나사렛에서 온”이라고 적어놓기는 하였지만, 정말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진 나사렛에서 왔다고 과학적으로 증명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돌에는 나름대로 돌들만의 지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돌을 분석해 보면, 이 돌이 어디에서 떠낸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돌판이나 토기가 발견된 경우, 그 돌과 토기의 성분이 그 지역이나 그 지역 주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대리석 석판을 분석해 보았는데, 나사렛과는 너무나 떨어진 터키 지역의 코스(Kos) 섬에서 뜬 돌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분석을 토대로 한 부류의 학자들이 주장하기는, 이 칙령이 로마 배경에서 로마 제국의 터키 지역에서 발효되었던 칙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기원전 30년 대에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의 권력을 뒷배 삼아 코스 섬을 다스리던 통치자 니키아스(Nikia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정치가 가혹하여 그의 학정에 치를 떨던 섬의 주민들이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사망한 후 (31BCE), 더 이상 정치적으로 뒤를 봐줄 사람이 없는 니키아스가 죽자 (20BCE), 그의 무덤을 훼손하고 니키아스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헤쳐 끌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니키아스의 뼈들이 길거리에 내동댕이 쳐진 이야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당대의 로마 시인들이 이 사건을 노래했더랬습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신약성경의 아우구스도 황제)는 이런 야만적인 보복을 금지하는 칙령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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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마의 매장 방식이 주로 화장이었고, 가족 묘의 형태는 로마의 무덤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칙령에서는 명시적으로 가족묘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나 소아시아의 매장 풍습과 맞지 않습니다. 또 무덤과 묘실을 막는 돌들을 두는 매장 방법은 전형적인 유대아(Judaea)식의 매장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부류의 학자들은 이 석비가 어디에서 발굴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유대아식의 매장 방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로는 로마에서는 극 소수의 매우 부유한 사람들 만이 호화로운 개인 무덤 건축물(Mausoleum style tomb)을 소유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화려한 건축물에 침입하여서 그 안에 있는 사치스러운 부장품을 약탈하려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칙령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호화로운 무덤 건축물 역시 가족이 아니라 개인을 위한 무덤이었으므로 이 칙령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추측하기로는 아마도 이 칙령의 시작은 로마의 역사적인 정황과 연관이 되어 있었겠지만, 로마의 한 특정 지역을 위한 칙령이 아니라, 로마가 다스리는 전 영토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칙명이 내려 졌으며, 유대아 역시 이 칙령에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아 지역에는 특별히 가족묘 형식의 동굴 매장 형태가 반영된 칙령이 대리석판에 기록되어 로마로부터 전해 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칙령은 예수님 시대는 물론, 그 이후 시대에도 여전히 로마 사회에서 유효한 법으로 지켜졌습니다. 이 칙령을 이해한다면, 마태복음 28장의 한바탕 소동을 한 걸음더 들어가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다음, 빈 무덤을 본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뒤늦게 무덤이 빈 것을 알게 된 경비병들이 성에 들어가서는 대제사장들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지요. 이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 해갔노라고 거짓말 할 것을 종용합니다 (마 28:11-15). 그런데, 이 거짓말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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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는 예수님께서 그 예언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아마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두번째로는 자신들에게 날아올 비난의 화살이 두려웠을 겁니다. 그의 부활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알려진다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하는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하다고 우쭐대던 장로들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앞장서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인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유대아의 사람들도 가만 있을리 없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마지막으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사렛 비문의 칙령은 아우구스도 황제(아우구스투스 Augustus 황제)의 시대로부터 예수님의 시대,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칙령에 따르면, 무덤이나 묘실을 훼손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무덤의 돌을 옮기고 시신을 옮긴 사람들이라고 고발한다면, 황제의 칙령을 어긴 셈이 되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입장에서는 손 안대고 코 푸는 겪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유대아에서 없앨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거짓말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꽤나 어려웠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케테프 힌놈 (제사장의 축복 기도문: 민 6:24-26)

‘복’은 누구나 받고 싶은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걸어가는 앞길을 지켜주시고, 잘되게 해주시길 바라는 것은 당연한 바램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걸어가는 그 길에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은 기복이라기 보다는 자연스러운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들에게 그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민수기에서 말입니다.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수기 6:24-26)

유대인들은 “제사장의 축복”으로 알려진 민수기 6장이 이 구절을 안식일이나, 명절, 그리고 중요한 예식에서 빠뜨리지 않고 암송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길 원하는 바램과 더불어,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그렇게 해주시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 대로 살아가야 하며,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상이 “복을 주셔서 그를 지키시고, 얼굴을 비추어서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얼굴을 드셔서 평강을 주신다.”는 것이지요. 마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토끼를 기다리는 것[수주대토 守株待兎]이 복이 아니라, 그 복을 받을 만한 자격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한다는 가르침은 지금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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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제부터 민수기의 아름다운 하나님의 축복, 또는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을 기억하며 입술에서 되뇌었을까요? 1970년대 이전까지는 제사장의 축복을 비롯하여서, 이스라엘의 성전에서 제사장이 이끌었던 제의와 제의에서 불렀던 노래와 기도들이 “정말 모세와 아론의 성막과 솔로몬이 건설한 성전에서 행해졌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 그리고 중반에 이르는 시대에 고대 서아시아 지역에 해당하는 나라들에서 고고학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고고학 발굴의 성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제의에 대한 지식들이 축적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성경의 제의와 유사한 메소포타미아의 제의들이 속속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바벨론의 제의의 모습과 이스라엘의 제의가 비교 연구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과거 유다의 멸망을 전후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사람들이 다시 유다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는 성경 이야기를 기초로, 둘 사이의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하는 자연스러운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유사점이 발견될 때마다, 바벨론의 것을 우위에 두고, 성경의 것은 바벨론 포로기(기원전 6세기)에 바벨론에서 영향을 받은 유다 사람들이 성경을 기록하면서 차용하였다는 주장이 마치 정설처럼 학자들 사이에 유행을 했더랬습니다. 출애굽 때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제의 율법들이 포로기에나 이르러 기록되었거나, 포로기 때에 경험한 바벨론의 제의 모습을 마치 이스라엘 고유의 것인양 빌어 와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윤색하였다는 투의 주장입니다. 이 주장에 근거한다면, 오경에 나오는 성막 제의는 성전 제의의 뿌리를 설명하기 위한 후대의 창조적인 기록이며,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데에까지 이릅니다. 특별히 창세기부터 민수기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제사장 신학’에 근거한 하나님의 말씀은 거의 대부분이 솔로몬의 성전 시기에는 있지도 않았다고 믿는 이들도 있었고, 그런 주장들이 설득력 있는 가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민수기 6장에 나오는 제사장의 축복 기도도 제사장 신학에 근거한 하나님의 말씀이니, 이 또한 포로기 이전에는 있지도 않았던 후대의 창작물이 된 셈입니다. 일종의 문화 사대주의 정신에 근거한 매우 서구 제국주의 정신이 스며들어 있는 설명입니다. 사실 당시 고고학자들 역시 점령군처럼 현재의 중동 땅에 들어가 발굴을 했으니, 이런 해석들의 뒤에는 발굴물을 해석하는 이의 정신 세계가 반영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1975-76년에 걸쳐서 텔아비브 대학교의 고고학 발굴팀이 기원전 9-8세기에 잠시 사람들이 살았던 시나이 반도의 쿤틸렛 아즈루드(Kuntillet ‘Ajrud)에서 제사장의 축복 기도를 떠올리게하는 문구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포로기 이전에 이미 제사장의 축복 기도가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장들에 의해서 읊어졌으며, 또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1979년에 오트만 시대(1517-1917년 사이 현재 이스라엘 땅을 지배하였던 제국)에 무기 창고로 사용하던 고대의 무덤들 중의 하나에서 우연히 목걸이 장신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장신구들의 용도를 추측하면서, 아마 부적처럼 그것을 목걸이로 하고 다니면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만든 장신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그 무덤은 대략 650BCE를 전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는데요. 가로 27mm 세로 97mm의 얇은 은판이 원통형으로 돌돌 말려있는 것들을 하나 하나 펴보니, 그 위에는 고대 히브리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비록 금속 제품의 특성상 일부가 부식이 되어서 사라지기는 하였지만, 남아 있는 글자들로 그 내용을 재구성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아주 잘 보존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신구 중의 하나를 폈을 때, 성서학과 고고학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민수기 6:24-26에 적혀있는 바로 그 제사장의 축복 기도문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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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견으로 오경에 나와있는 성전 제의와 관련된 일련의 규정과 체계들이 기원전 6세기 초반 또는 그 이후에 바벨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창조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기존의 주장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학자들이 주장하던 포로기 이전, 그러니까 분열 왕국 시대였던 기원전 7세기부터 이미 이스라엘 땅에서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위해서 민수기에 나오는 축복의 기도를 했었고, 그 기도문이 이스라엘과 유다의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어서, 사람들이 그 기도문을 목걸이로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니기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니까요. 몇몇 글자들에 대해서는 읽는 방법에 대해서 서로 다른 독법을 제시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은목걸이에 새겨진 글이 제사장의 축복 기도문이라는 데에는 아직까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 왜 이리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박물관에서 고고학 유물들을 볼 때마다, 땅 속 어딘가 고대의 흙 속에 숨어있을 하나님의 흔적들이 세상의 빛을 볼 그 날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기다리게 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참조한 글들: Barkay, Gabriel et al. “The Amulets from Ketef Hinnom: A New Edition and Evaluation.” Bulletin of th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334 (2004): 41-71. Wellhausen, Julius. 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Ancient Israel: With a reprint of the article Israel from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Translated by Black, Sutherland, and Allan Menzies. New York: Meridian Books, 1957. (Originally published in German, 1883) Olitzky, Kerry M. (Rabbi), “The Priestly Benediction” from https://www.myjewishlearning.com/article/the-priestly-benediction/

 

그리스어 레위기, 하나님의 이름 (DSS 4Q120-4QpapLXXL)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י (요드), ה (헤이), ו (바브), ה (헤이)라는 네 개의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기록합니다 (Tetragrammaton). 히브리어 성경 뿐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주변의 나라에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을 יהוה 라고 소개합니다 (참조. 메사 석비). 영어로는 YHWH 라고 쓰지요. 그런데 영어 철자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네개의 글자에는 모음이 없습니다. 굳이 우리 식으로 빗대어 표현하자면,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ㄷㅎㅁㄴㄱㄱ”이라고 써놓은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히브리어는 원래부터 모음이 없었습니다. 모음은 관습처럼 부모의 세대에서 자녀의 세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었거든요.

 

모음이 없는 히브리어 표기 전통은 곧 매우 난처한 경우를 맞이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 되어 있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스스로 드러내신 이후에 한번도 불러보지 못한 하나님의 이름 יהוה (요드-헤이-바브-헤이) 는 모세 이후 몇 백년 뒤에 결국 아무도 어떻게 읽는지 모르는 이름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 (히. השם 하쉠), 또는 “주님” (히. אדני 아도나이)이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는 יהוה를 “the Lord” 라고 번역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서 “주님”이라고 번역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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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하나님의 이름 יהוה를 “여호와”라고 읽습니다. 아마 우리 말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과감하게(?) 부르는 것은 초기 영어 성경 번역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는 듯합니다. 1611년 이래로 영어 성경의 표준이 된 흠정역 (King Jame Version, KJV)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화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실 때 (출 6:3), 그 이름 יהוה를 Iehovah(Jehovah, 흠정역이 개정되면서 Jehovah로 영어식 표기가 바뀜)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흠정역을 기준으로 미국에서 번역한 미국표준역 (Amerian Standard Version, ASV)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을 Jehovah 라고 번역했거든요. 우리나라로 성경이 전래될 때, 아마 영미권 선교사들을 통해서 그들이 사용하던 성경책의 하나님 이름 Jehovah 를 그대로 음역해서 “여호와”로 표기한 것은 아닐까요?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지요. “영어 성경은 어떻게 유대인들도 알지 못한 יהוה 의 모음 음가를 알았을까?” 이것은 매우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아도나이’ (יהוה, ADONAI)의 모음을 떼어다가 그대로 히브리어 (YAHOWAH)에 적용해서 발음한 것입니다 (참조. 히브리어 ‘요드’ י 는 영어로 Y, I 또는 J 로 환원이 가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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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정말 하나님의 이름 יהוה를 어떻게 읽어야할 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히브리어와 고대 셈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가지 중요한 고고학 발굴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오늘날의 시리아에 위치한 고대 에블라 (Ebla, Tel-Mardikh)에서 1974-1976년 사이에 8,000여개의 토판들이 대규모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돌판들은 대략 2,500-2,250 BCE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는데요. 이 토판들에 새겨진 신들의 이름 가운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 יהוה를 고대 서아시아식으로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된 것입니다. 신의 이름이 쓰여진 에블라 토판의 쐐기 문자를 읽으면 ‘이아베일루’ (Ia-á-ve-ilu, Ia-ve-ilu) 또는 ‘이아우움일루’ (Ia-ú-um-ilu) 라고 읽을 수 있는데요. 이 발음에 근거해서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이름을 ‘야웨’ 라고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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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을 ‘야웨’라고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는 대표적으로 두 개를 더 들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집트 18 왕조 (약 1550-1295 BCE)부터 지중해 동편 이스르엘 골짜기-아쉬켈론-시나이 반도 지역에 이르는 지중해 동쪽 해변가에 살았던 샤수 (Shasu)에 대한 아멘호텝 3세 Amenhotep III (기원전 14세기)와 람세스 2세 Ramesses II (기원전 13세기)의 기록에서 샤수들이 살던 땅 (가나안)을 가리켜, “야오(를 섬기는) 샤수의 땅” (ta Shasww yhwaw) 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증거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을 위해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경 사본들입니다. 기원후 3세기 이후에 기록된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는 יהוה가 나올 때마다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이름을 ‘쿠리오스’(κύριος, ‘주님’)으로 번역했지만, 기원 이전에 번역된 그리스어 구약성경(DSS 4Q120-4QpapLXXLevb)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리스어 알파벳 ΙAW (YAW, ‘이아오/야오’)로 바꾸어 쓴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아오/야오’와 비슷한 발음의 ‘야웨’가 하나님의 이름에 조금 더 가까운 발음이 아니었을까요?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지에 대해서는 정답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DSS 4Q120-4QpapLXXLevb 라는 말은;

  • 사해바다 주변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DSS) 네번째로 발견된 쿰란 동굴(4Q)에서 120번째로 발견된 성경 (120)
  • 네번째로 발견된 쿰란 동굴 (4Q)에서 발견된 파피루스(pap) 중 그리스어 칠십인역 (LXX) 레위기 (Lev)의 b 버전 (b)

이라는 뜻입니다. <BIB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