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강화 -산상수훈(마 5-7장)
제5-7장은 그 유명한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이다. 마태복음에 수록된 대 강화 가운데 첫번째 강화인 산상 수훈에 대해서는 신학적 입장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 사이를 살아갈 기독교인에 대한 윤리 헌장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의 도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천국은 이미 세상에 임하였으며, 또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한 이들은 천국 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천국은 이미 임하였으나 그 완성은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역사의 종말에 천국이 완성될 때까지 천국 시민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사단의 불법이 혼재(混在)하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산상 수훈은 이렇게 천국을 현재적으로 이미 맛보고 누리며, 또 종말에 그것의 완성을 소망하며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이 땅의 성도들에게 새 시대의 새 기준으로 그리스도께서 직접 입법하신 새 법으로 성도들의 종교적 · 윤리적 삶의 절대 규범으로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산상 수훈은 이미 구원을 얻은 천국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행위 구원론과 무관하다. 또한 실천 불가능한 것을 단지 은혜를 구하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제시된 것도 아니다.
이런 산상 수훈은 그리스도께서 어느 한 시기에 한꺼번에 주신 것은 아니다. 5:1에 의하면 마치 그리스도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고 제자들이 나아오는 어느 한 시기에 산상 수훈을 다 주신듯이 묘사하고 있다. 산상 수훈은 그리스도께서 제1차 갈릴리 사역 기간 중(A.D. 27~28년 경)에 여러 번에 걸쳐 갈릴리 지역의 야산에서 행해진 일련의 설교들을 본서의 저자인 마태가 그의 주제별 편집 원칙에 따라 여기에 모아 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 설교가 행해진 산은 디베랴 서쪽, 막달라 남쪽에 위치한 완만한 구릉인 핫틴산(Horns of Hatin)으로 추정 된다. 오늘날 이곳은 팔복산(Mount of the Beutitudes)으로 불리워지며 산 정상에는 팔복 교회가 세워져 있다.
한편 산상 수훈의 전체적인 주제는 ‘의(義)’이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을 통해 진정한 의가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으며, 그 의가 성도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신다. 이런 점에서 산상 수훈은 구약의 율법과의 밀접한 연속선상에 있다. 왜냐하면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바 역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상 수훈에는 구약의 율법과 근본적인 차별성이 존재한다. 구약의 율법이 주로 인간의 외적(外的) 행위를 규정하고 있다면, 산상 수훈은 율법의 규정의 기준을 절대적 차원으로까지, 율법 준수의 기준을 인간의 내적(內的) 영역으로까지 확대하고 있다. 즉, 산상 수훈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바라시며 어떤 수준의 삶을 사기를 원하시는가를 보여 주는 것으로서 구약의 율법을 절대적 · 내면적 차원으로까지 확대,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오신 목적이 율법을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는 것에 있다고 하신 것이다(5:17).
이런 이해의 맥락 속에서 산상 수훈의 세부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산상 수훈의 배경과 교훈의 대상을 밝히는 서문 (5:2)
새로운 신약적 의의 기준 제시 (5:3-48)
· 팔복 선포 (5:3~12)
· 성도의 정체성과 근본 역할을 가르치는 빛과 소금의 비유 (5:13-16)
· 율법의 완성자로서의 예수의 자기 선언 및 천국 시민의 의의 수준 제시 (마 5:17-20)
· 율법 규정의 기준을 절대적 차원까지, 율법 준수의 기준을 내면적 자세로까지 확대한 새로운 교훈의 실례들(마 5:21-48)
성도의 삶에 있어서의 의의 적용 및 실천 (6:1-7:12)
· 각종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계 및 참 기도의 모텔로 주신 주기도문 (6:1~18)
· 재물에 대한 바른 태도 및 재물과 신앙 사이의 우선 순위 문제 (6:19~24)
· 의식주 염려에 대한 교훈 및 성도의 우선 순위 (6:25-34)
· 무분별한 형제 비판 금지 명령과 영적 분별력에 대한 교훈 (7:1-6)
· 기도 응답의 확신 촉구 및 황금률 제시 (7:7-12)
성도들을 향한 의의 적극적 실천 촉구 (7:13-27)
· 생명의 문과 멸망의 문의 대조 및 거짓 선지자의 분별과 경계 촉구 (7:13-20)
· 실천적 신앙의 촉구 (7:21-27)
산상 수훈의 종결 (7:28~29)
이상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진 산상 수훈 가운데 본론부에 해당하는 5:3~7:27의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전반부인 5:3-48의 네 문단은 진정한 의(義)가 무엇인가에 대해 제시하고 있다.
5:3-16 사이의 두 문단은 천국 백성의 복을 선포하며 복받은 성도들의 거룩한 책임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가운데 앞 문단인 5:3-12이 산상 수훈의 요강이라 할 수 있는 팔복(Beatitudes)의 선언이다.
구약 율법의 핵심이 십계명인 것처럼 팔복은 산상 수훈의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었다. 구약에서 십계명 이외의 율법이 십계명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법규를 언급하는 것과 같이, 산상 수훈에서도 팔복 이후의 내용은 팔복의 원리를 실천적인 측면에서 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여기에서의 여넓 가지 항목은 복을 받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은 자의 내면적 상태에 대해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홀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은 복받은 자들이며, 천국이 임하면 천국은 다름아닌 이들의 것이 될 것이다. 이는 당시의 물질적 복의 개념과 상반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의롭게 여기시고 천국을 약속하는 자가 어떤 자인가를 내면의 측면에서 규정하는 것이다.
다음 5:13~16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천국 백성의 정체성(Identity)을 선언하고 있다.
구약의 선민 이스라엘이 세계에 대한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부름을 받았던 것과 같이(출 19:5, 6), 천국의 시민들인 신약의 성도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자들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구약 선민의 부르심이 은혜이면서 거룩한 책임을 수반한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 시민들인 신약의 성도 역시 엄청난 은혜를 받음과 동시에 세상에서 의를 실천할 거룩한 책임을 수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5:17~20은 예수님을 통한 율법의 완성과 성취 및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의의 수준 을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파기자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으며(5:17), 따라서 천국의 백성들에게는 서기관과 바라새인보다 더 높은 의의 수준이 요구되는 것이다(5:20). 그렇다면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그토록 철저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어떻게 더 나은 의를 가질 수 있는가?
바로 5:21~48에서 율법 규정의 기준이 절대적 차원까지, 율법 준수의 기준이 내면적 자세로 까지 확대된 것을 살인, 간음, 맹세, 보복 등의 몇 가지 실례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이를 설명하고 있다.
율법은 주로 외적인 행동을 규정한다. 살인의 경우를 예를 들 때, 바리새인은 타인에 대해 증오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살인은 하지 않는다. 율법의 기준에 의하면 그는 죄인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의 근저(根底)에 깔려 있는 인간의 내변의 동기와 의도에 중점을 두신다. 예수님의 ‘완성된’ 표준에 의하면 그는 준엄한 심판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22-23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단지 외적으로 행하는 것에 불과하였지만, 천국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수준은 내적인 기준면에서까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철저한 요구를 연약한 인간이 행하기란 불가능하다. 산상 수훈은 바로 외적인 행함만을 강조하는 섣부른 행동주의(Activism), 혹은 율법주의(Legalism)를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께서는 율법의 사소한 것일지라도 소홀히 여기거나 어기는 것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계신다(5:19). 여기서 강조된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格的) 관계성이다.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은 명령임과 동시에 그 명령을 순종할 때 산상수훈의 가르침들에 순종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연약한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는 외적인 수준에서 뿐만 아니라 내적인 수준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준엄한 율법의 계명들을 준수할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시하신 율법 준수의 새 기준 앞에서 천국의 시민은 자연히 가난하고 애통한 심령이 될 수밖에 없으며 자기 자신의 힘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의에 목말라 하며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에게 그가 목말라 하는 의를 부여하시며 그의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워주신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인 것이다.
중반부인 6:1-7:12 사이의 다섯 문단은 전반부에서 제시한 의가 실제적인 종교적 · 윤리적 삶의 영역들에서 어떻게 적용(適用)되어야 하는지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먼저 6:1~18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는 것을 경계하며, 대표적인 것으로 기도와 금식의 자세와 내용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을 다루고 있다. 이는 팔복 중 심령의 가난, 애통함, 마음의 청결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기도를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고 기도를 자기의 공로로 여기는 풍토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가르침으로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개인적이고도 은밀한 관계 가운데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다음 6:19-34 사이의 두 문단은 천국 백성의 재물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는 팔복의 넷째와 여덟번째와 밀접히 연관이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는 재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즉 천국 백성은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하고 적극적으로 그 의를 추구해야 하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과 재물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것에 결정적인 장애가 될 수 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염려 문제 역시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극복될 수 있다(6:32~33).
중반부의 마지막 두 문단인 7:1~12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앞의 7:1~6에서는 타인에 대한 비판 금지와 영적 분별력에 대한 교훈을, 뒤의 7:7~12에서는 대인 관계에 있어서의 핵심 원리인 황금률(the Golden Rule)을 다루고 있다. 이는 팔복 중 긍흘, 온유, 화평케 함과 관련이 있다. 즉,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되고 이것이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온유와 긍홀로 나타난다. 남을 비판하고 허물을 잡기보다 감싸고 용서함으로써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가 되 는 것이다.
후반부인 7:13-27 사이의 두 문단에서는 신자들의 실제 삶에서의 의의 추구가 쉽지 않음을 보이며 순종을 촉구하고 있다.
7:13~20은 생명의 문과 멸망의 문을 대조하고 있다.
생명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하다. 따라서 찾는 이들이 적다. 대다수는 넓고 편한 길로 간다. 더구나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성도들로 하여금 우선 살기에 편한 넓은 길로 가도록 현혹한다. 그러나 넓은 길의 결국은 멸망에 이르는 것이다. 성도들은 삶의 열매로 분별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한다. 좁고 험해도 그것이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문이기에 그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7:21~27은 집을 짓는 두 건축자의 비유를 들므로써, 실천적인 신앙을 촉구하고 있다.
산상 수훈의 마지막 문단에서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들에 대해 심판이 경고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그 집이 무너지게 될 것임과(7:26, 27), 또 열매 맺지 않는 자들에 대한 최종적 심판이 언급되어 있다(7:19). 이는 행위에 의한 구원과 심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의를 소유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내적 의에 합당한 의의 열매를 삶에서 맺게 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상 수훈이 말하고 있는 의는 내적인(inward) 의로서, 그 내적인 의는 반드시 신자의 외적인(outward)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상 수훈의 말씀은 종교적 형식에 자족하며 그 내면이 천국의 복음으로 변화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심판의 경고임과 동시에, 열매 맺는 참된 의를 사모하고 추구하도록 하는 강력한 권면인 것이다.
산상 수훈의 의는 내면적인 것이지만, 인간의 내부에서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의가 결핍된 자신을 깨닫고 목말라 하며 하나님께 구할 때 위로부터 부어지는 ‘믿음의 의(the Righteousness by Faith)'이다. 따라서 천국의 시민된 성도들은 팔복의 기준에 비추어 진정한 의가 결핍된 자신의 내면을 살피며, 목말라 하는 자의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의를 구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그 의를 힘입어 삶의 현장에서 의의 열매를 맺어나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옥스퍼드 주석. .pp.308-312.
산상보훈
‘기독교의 대헌장’ 또는 ‘기독교 윤리의 근본’이라고 불리는 ‘산상보훈’은 마태복음 5-7장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문을 일컫는 말로서, ‘산상설교’, ‘산상수훈’(山上垂訓)...
m.terms.naver.com
‘기독교의 대헌장’ 또는 ‘기독교 윤리의 근본’이라고 불리는 ‘산상보훈’은 마태복음 5-7장에 수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문을 일컫는 말로서, ‘산상설교’, ‘산상수훈’(山上垂訓) 등으로 불린다. ‘산상설교’라는 명칭은 교부 어거스틴(Augustine)이 ‘산에서 하신 주님의 설교’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고, 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확실하게 정착되어 오늘에 이른다. 한편, 누가복음 6:20-49에는 이보다 짧은 형태의 병행 기사가 소개되는데, 예수께서 산 위에서 하신 설교를 모은 ‘산상보훈’과는 달리 ‘평지에 서시니’(눅 6:17)라는 말에 근거하여 ‘평지설교’라고 일컬어진다. 이 두 개의 설교는 각각 공통의 자료를 사용했지만 각 기록자의 의도대로 수집한 것에서 차이점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1. 산상보훈의 성격 -
① 산에서 행한 설교다(마 5:1; 8:1). 여기서 산은 단지 지리적인 의미의 산이라는 개념 이상으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계시하는 장소이다. 예수는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 산(시내 산)에 임하셨던 그 하나님으로서, 산상보훈은 곧 하나님의 계시다(마 7:21, 24).
② 종말론적인 성격을 지닌 설교다. 산상보훈에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7회 언급되는데(5:3, 10, 19, 20; 6:10, 33; 7:21), 천국 복음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복음이다. 산상보훈은 바로 이 새 시대에 부름받은 천국 백성의 법과 규범이다.
③ 천국 백성의 순종과 실천을 전제한 설교다. 산상보훈은 취사 선택의 문제도 아니고 실천 불가능한 명령도 아니다. 예수님을 믿는 천국 백성의 기본적인 윤리요 삶이다. 예수께서 그들 속에 항상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산상보훈을 행하게 하는 능력이 되어 주신다(마 1:21-23; 28:20).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시는 예수께서 행하신다. 이것이 믿음이다.
2. 산상보훈의 특징 -
① 사고의 통일성과 논리의 연속성 및 형식의 일관성이 돋보인다.
② 단순히 의식(율법)적이고 외적인 행위보다 그 행위 뒤에 숨겨진 동기와 정신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③ 천국 백성에 걸맞는 고도의 윤리, 도덕적 수준의 실천적 교훈들을 제시하고 있다.
④ 천국 백성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복과 경험하게 될 복을 언급하고 있다.
⑤ 두 영역(세상과 천국)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근본적인 가치관과 그 생활에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⑥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그 나아갈 길과 삶의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다.
3. 산상보훈의 대상 -
① 천국 복음을 듣고 회개한 자들에게 주어진 설교다(마 4:17-22).
② 예수를 좇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설교다(마 5:1).
③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설교다(마 4:19; 7:28-29; 28:19).
4. 산상보훈의 내용
<천국 백성의 자격>
① 천국 백성의 특징과 그들이 경험하는 8가지 복(마 5:3-12).
② 천국 백성의 존재 이유(마 5:13-16).
③ 천국 백성의 의(義)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마 5:17-20).
④ 천국 백성이 추구해야 할 삶의 내용(마 5:21-48).
<천국 백성의 가치관>
① 위선을 벗고 진실과 사랑을 근본으로 할 것(마 6:1-4).
② 하나님만을 의식할 것(마 6:16-18).
③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의 올바른 재물관(마 6:19-34).
<천국 백성의 생활>
① 이웃에 대한 태도(마 7:1-6).
② 하나님에 대한 태도(마 7:7-13).
③ 천국 백성의 삶의 자세(마 7:13-14).
④ 천국 백성의 올바른 분별력(마 7:15-20).
⑤ 천국 백성의 지혜로운 삶(마 7:21-27).
5. 산상보훈의 평가 - 산상보훈의 메시지가 얼마나 생명력 넘치는 말씀이었든지 교회 안과 밖을 막론하고 오늘날까지 온 세계 인류에게 큰 감화를 끼치고 있다.
이에 대한 평가들을 몇 가지 소개하면,
① ‘산상보훈은 인간 윤리의 최고봉이다’(T.H. Robinson).
② ‘산상보훈은 천국 시민의 대헌장(Magna Charta)이다’(F. Tholuck).
③ ‘산상보훈은 세계 문학 사상 최고의 강화이다’(C. Erdman).
④ ‘산상보훈은 수백 개의 보석으로 꾸며진 왕관이다’(黑埼幸吉).
10:1~11:1 사이의 네 문단은 예수께서 12제자를 불러 사도로 임명하시고, 이스라엘 전국 각지로 순회 전도를 떠나도록 파송하시면서 주신 교훈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 중 10:1-4의 내용은 12사도 임명을, 그 다음 10:5-42까지의 내용은 전도 파송 이전의 교훈의 내용으로서 마태복음의 대 강화(講話) 중 5-7장의 산상 수훈에 이은 두번째의 강화에 해당한다. 그리고 11:1의 한 절은 예수께서 강화를 마치신 후 자신도 전도를 위해 떠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12사도를 임명하신 시점은 공생애 2년째인 A.D. 28년 초이고, 12사도를 전도 훈련을 위해 파송하신 시점은 A.D 28년 말 또는 29년 초 무렵이다. 그러므로 두 사건 사이에는 실제로 약 6개월 내지 1년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마태가 이 두 사건을 서로 묶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한 주제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그의 기록상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마태는 엄격한 연대기적 순으로가 아니라, 각 주제 전개의 논리적 순서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자신의 복음서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12사도의 임명과 파송 사건은 8장과 9장에서의 각종 이적 사건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해야 하며, 직접적으로는 8장과 9장을 총요약한 35, 38절의 내용에 그 배경이 제시되어 있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 전역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하셨으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수많은 무리들을 혼자서 다 감당하실 수는 없으셨다. 따라서 전장인 9장의 마지막 37, 38절에서 예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다고 하시며, 추수할 일꾼이 더욱 필요함을 시사하셨다. 이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께서는 추수할 일꾼들, 곧 천국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사도(the Apostles)들을 세우시고 파송하시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12사도의 임명과 파송은 그의 사후 복음 전파를 주도적으로 담당해야 할 사도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 10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개관하자면, 먼저 1~4절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임명하시고 권능을 부여하시는 내용 및 사도로 임명된 제자들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다. 5절 이하는 예수께서 임명된 12사도를 파송하시기 직전에 하신 당부와 교훈의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좀더 세분해서 보자면,
5~15절은 전도의 대상과 내용 및 전도 사역자로서의 자세에 대한 당부의 내용이다.
여기서 전도의 대상으로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한정하신 것은, 인류 구속 사역의 핵심인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경륜은 천국 복음이 먼저 이스라엘에 전파된 후 이방인에게로 본격적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었다(마 28:19 ; 행 1:8).
이어 16~39절은 사도들이 전도 사역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때에 직면하게 될 핍박과 고난을 미리 예고하시고, 이를 어떠한 자세로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40~42절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이 어떤 복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심으로써, 사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3년에 이르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12사도의 임명과 훈련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있어서 실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의 기간 동안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또 공생애의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써 인류 구속에 필요한 모든 일을 완수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신 구속 사역의 효력이 전인류에게 미치려면, 그 분의 사역을 계승하고 확장시킬 자들이 필요하였다. 즉 예수께서 지상의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이미 도래한 천국을 확장시키고 완성시킬 사역자들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12사도들을 임명하시고 훈련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진행될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복음 사역자들은 사도적 지위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 사역의 계승자라는 점에 있어서는 사도적 전통(使徒的 傳統)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고 세움을 입은 자들은, 전도 사역을 앞에 둔 사도들을 위해 하신 예수님의 강화(講話)에서 다음의 몇 가지 교훈을 새겨야 할 것이다.
첫째, 사역자들에게는 핍박과 고난이 예고되었다는 사실이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주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았지만 모든 이에게 환대만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예고하셨다. 이 고난들은 주님의 제자로서 필연적인 것이다. 선생이며 상전이신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셨거늘, 그 제자이며 종인 사역자들이 환대와 명예만을 기대한다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사람들로부터의 냉담한 반응과 배척에 민감할 필요가 없다. 핍박과 고난이 제자된 삶의 실체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는 진정한 용기와 인내심을 갖게 한다.
둘째, 자신의 사역에 보람과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이 받을 복을 언급하시면서, 제자들과 자신과 성부 하나님이 유기적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음을 밝히셨다(40절) . 즉 복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이는 복음 사역자들을 잘 접대하면 그 접대의 대가로 복을 받는다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복음 사역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때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접하는 셈이 되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인류에게 최대 · 최고의 선물을 들고 가는 셈이다.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 이보다 더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으로, 복음 사역자의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도(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즉, 사도는 보내는 자의 전갈(Messages)과 권위(Authority)를 함께 가지고서 보내신 자를 대신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자인 것이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 복음 사역자가 그 권위를 자신의 사리 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주님께서는 “너회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심으로 권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셨다(10:8).
또 다른 면에서, 복음 사역자의 권위가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것이라는 사실은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당당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스펼션(Spergeon)은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면 비굴하게 굴지 말고 왕이 되어라!"라고 말한 바 있다. 복음 사역자의 권위의 출처는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로서 복음 사역자는 그리스도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대사이다. 따라서 복음 사역자들은 인간의 눈치를 보거나, 환경에 위축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당당한 자세로 자신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옥스퍼드 주석. pp. 712-714.
두번째 강화 - 제자들 파송(10장)
10:1~11:1 사이의 네 문단은 예수께서 12제자를 불러 사도로 임명하시고, 이스라엘 전국 각지로 순회 전도를 떠나도록 파송하시면서 주신 교훈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이 중 10:1-4의 내용은 12사도 임명을, 그 다음 10:5-42까지의 내용은 전도 파송 이전의 교훈의 내용으로서 마태복음의 대 강화(講話) 중 5-7장의 산상 수훈에 이은 두번째의 강화에 해당한다. 그리고 11:1의 한 절은 예수께서 강화를 마치신 후 자신도 전도를 위해 떠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12사도를 임명하신 시점은 공생애 2년째인 A.D. 28년 초이고, 12사도를 전도 훈련을 위해 파송하신 시점은 A.D 28년 말 또는 29년 초 무렵이다. 그러므로 두 사건 사이에는 실제로 약 6개월 내지 1년 정도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마태가 이 두 사건을 서로 묶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한 주제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그의 기록상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마태는 엄격한 연대기적 순으로가 아니라, 각 주제 전개의 논리적 순서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자신의 복음서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12사도의 임명과 파송 사건은 8장과 9장에서의 각종 이적 사건의 연속선상에서 파악해야 하며, 직접적으로는 8장과 9장을 총요약한 35, 38절의 내용에 그 배경이 제시되어 있다. 즉 예수께서 갈릴리 전역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각종 병자들을 치유하는 사역을 하셨으나,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수많은 무리들을 혼자서 다 감당하실 수는 없으셨다. 따라서 전장인 9장의 마지막 37, 38절에서 예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다고 하시며, 추수할 일꾼이 더욱 필요함을 시사하셨다. 이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께서는 추수할 일꾼들, 곧 천국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사도(the Apostles)들을 세우시고 파송하시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12사도의 임명과 파송은 그의 사후 복음 전파를 주도적으로 담당해야 할 사도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제 10장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개관하자면, 먼저 1~4절에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임명하시고 권능을 부여하시는 내용 및 사도로 임명된 제자들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다. 5절 이하는 예수께서 임명된 12사도를 파송하시기 직전에 하신 당부와 교훈의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를 좀더 세분해서 보자면,
5~15절은 전도의 대상과 내용 및 전도 사역자로서의 자세에 대한 당부의 내용이다.
여기서 전도의 대상으로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한정하신 것은, 인류 구속 사역의 핵심인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경륜은 천국 복음이 먼저 이스라엘에 전파된 후 이방인에게로 본격적으로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었다(마 28:19 ; 행 1:8).
이어 16~39절은 사도들이 전도 사역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때에 직면하게 될 핍박과 고난을 미리 예고하시고, 이를 어떠한 자세로 극복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40~42절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이 어떤 복을 받을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심으로써, 사도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3년에 이르는 예수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서, 12사도의 임명과 훈련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있어서 실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예수께서는 공생애 3년의 기간 동안 천국 복음을 전하시고, 또 공생애의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심으로써 인류 구속에 필요한 모든 일을 완수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신 구속 사역의 효력이 전인류에게 미치려면, 그 분의 사역을 계승하고 확장시킬 자들이 필요하였다. 즉 예수께서 지상의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도 천국 복음을 전파하여, 이미 도래한 천국을 확장시키고 완성시킬 사역자들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 12사도들을 임명하시고 훈련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예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진행될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한편,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나 복음 사역자들은 사도적 지위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 사역의 계승자라는 점에 있어서는 사도적 전통(使徒的 傳統) 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고 세움을 입은 자들은, 전도 사역을 앞에 둔 사도들을 위해 하신 예수님의 강화(講話)에서 다음의 몇 가지 교훈을 새겨야 할 것이다.
첫째, 사역자들에게는 핍박과 고난이 예고되었다는 사실이다.
복음의 사역자들은 주님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았지만 모든 이에게 환대만 받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주님은 예고하셨다. 이 고난들은 주님의 제자로서 필연적인 것이다. 선생이며 상전이신 예수께서 수난을 당하셨거늘, 그 제자이며 종인 사역자들이 환대와 명예만을 기대한다는 것은 모순인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은 사람들로부터의 냉담한 반응과 배척에 민감할 필요가 없다. 핍박과 고난이 제자된 삶의 실체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는 진정한 용기와 인내심을 갖게 한다.
둘째, 자신의 사역에 보람과 긍지를 가져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자들이 받을 복을 언급하시면서, 제자들과 자신과 성부 하나님이 유기적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음을 밝히셨다(40절) . 즉 복음 사역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그를 보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이는 복음 사역자들을 잘 접대하면 그 접대의 대가로 복을 받는다는 단순한 차원을 넘어, 복음 사역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일 때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영접하는 셈이 되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은 인류에게 최대 · 최고의 선물을 들고 가는 셈이다.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 이보다 더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이 어디에 있는가?
마지막으로, 복음 사역자의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도(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즉, 사도는 보내는 자의 전갈(Messages)과 권위(Authority)를 함께 가지고서 보내신 자를 대신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자인 것이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 복음 사역자가 그 권위를 자신의 사리 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주님께서는 “너회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심으로 권위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용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계하셨다(10:8).
또 다른 면에서, 복음 사역자의 권위가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된 것이라는 사실은 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당당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스펼션(Spergeon)은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시면 비굴하게 굴지 말고 왕이 되어라!"라고 말한 바 있다. 복음 사역자의 권위의 출처는 바로 왕이신 그리스도로서 복음 사역자는 그리스도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대사이다. 따라서 복음 사역자들은 인간의 눈치를 보거나, 환경에 위축될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당당한 자세로 자신에게 맡겨진 그리스도의 사역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옥스퍼드 주석. pp. 712-714.
세번째 강화 - 천국의 비유(마 13장)
본 단락에서 시작되는 13:1-52절까지의 네 단락은 마태복음의 대 강화(講話) 중 세번째 강화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천국에 대한 일곱 가지 비유들을 기록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보면 1-23절까지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24-43절까지는 가라지 비유 및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어 44-46절은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 비유를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47-52절의 내용은 예수께서 그물 비유를 말씀하신 후, 천국에 관해 깨닫게 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의무를 주지시키신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유(Parable)란 추상적 원리나 교훈을 일상 생활의 친근한 사물이나 상황 등에 빗대어 전달하는 일종의 수사학적 기법으로서, 교훈하고자 하는 내용을 상대로 하여금 좀더 쉽고도 인상깊게 이해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천국을 인간의 언어로 직접 묘사하기에는 인간의 지력(知力)에 한계가 있으므로, 예수께서는 당시 팔레스틴의 친숙한 생활 풍경을 소재로 천국의 특성과 그 도래 과정에 관해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 혹은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이다. 즉 천국은 창조 당시 가졌던 의와 행복을 상실한 인간 가운데 하나님께서 에멘 동산에서 인간의 범죄 직후에 세우신 예수를 통한 구속의 법에 따라 택함받고 회개한 성도들에게 다시금 영원한 생명과 의와 행복을 회복시켜 평안히 거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 만드신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이다. 이러한 천국은 영적인 것이요, 실제로 천국이 육적으로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천국의 육적인 실현은 이 세상 끝나는 날 새롭게 형성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천국은 이미(already) 임했으나 아직(yet) 완전히 임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13:1-52에 언급된 천국 비유는 현재적 천국과 미래적 천국에 관한 내용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때문에 본 천국 비유는 천국 도래 과정에 대한 비유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한편 여기서 예수께서는 천국의 특성 및 그 도래 과정을 단지 쉽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에서만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비유를 사용하시는 것은 이중적(二重的) 목적, 즉 천국의 비밀을 ‘드러내기(reveal)’ 위한 것 뿐 아니라(35절), ‘감추기(conceal)’ 위한 목적도 동시에 가지고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다(13-15절). 이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가 제자들에게는 더 깊은 깨달음을 주는 것이었지만, 바라새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에 트집만을 잡고자 하는 대적자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더욱 잘 깨닫도록 베풀어졌던 비유가 왜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의 눈과 귀를 막는 작용을 하게 되었을까?
이는 예수님의 비유가 그 형식의 내용에 있어서는 쉬우나, 비유의 내용이 의미하고 있는 바 천국의 특성이 당시 유대인들의 천국 혹은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Heaven or the Kingdom of God)에 대한 이해와 너무나 판이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천국을 지상적이고 정치적인 왕국으로 이해하였다. 메시야가 오시면 열방을 심판하시고, 잃어버린 다윗의 왕권을 되찾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물론 구약의 예언에 메시야가 심판의 주(主)요,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자로 묘사된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의 문제는 이것을 민족 이기주의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 문제였다. 메시야는 단지 한 민족의 왕이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셨으며, 그의 심판은 열방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도 포함되었으며, 또한 그가 회복할 이스라엘은 팔레스틴의 한 민족인 육적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신약 교회인 영적 이스라엘이었다. 더구나 메시야의 궁극적 심판은 세상의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이며, 그 이전에 먼저 메시야는 인류의 구속 사역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다. 그러므로 메시야와 그의 왕국을 민족 이기주의의 편협한 차원에서만 이해했던 유대인들은 초라한 모습으로 오시고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메시야의 왕국인 천국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유대적인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로서는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가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를 배경으로, 유대인들의 천국관과 일곱 가지 비유에서 예수께서 제시하신 천국의 특성이 어떻게 달랐는지 요약적으로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관련하여 볼 때, 유대인들의 천국에 대한 기대는 메시야의 임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집단적이고도 민족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천국이 각 개인의 복음에 대한 반응에 따라 임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가라지 비유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의 천국에 대한 기대는 메시야이신 왕이 임하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의로운 자들이 곧바로 왕과 더불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라지 비유는 천국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추수 때까지는, 즉 세상 끝날 까지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섞여 있게 될 것을 제시하고 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와 관련하여, 유대인들은 천국이 큰 능력과 영광으로 시작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천국은 처음에는 작고 하찮은 것에서 출발하여 점차 크고 위대하게 자라가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작은 것에서 시작한 천국의 왕성한 확장력(擴張力)을 공통적으로 교훈하고 있지만, 겨자씨 비유 가 천국의 외적(外的) 성장 내지 확장에 중점이 있다면, 누룩 비유는 천국의 내적(內的) 성장 내지 성숙에 중점이 있다는 것에서 변별성(辦別性)이 있다.
다음으로, 감추인 보화와 값진 진주는 모두 천국의 귀중성(preciousness)을 교훈하는 것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개념과 대조해 볼 때, 두 비유는 교훈의 초점에 있어서 다소 방향이 다르다. 즉, 유대인들은 천국을 공식적(public)이며 민족 전부를 위한 것으로 여겼으나, 감추인 보화 비유는 천국이 ‘감추어져(hidden)’ 있으며 개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또 유대인들은 천국은 값진 것을 가져다 준다는 차원에서만 이해했으나, 값진 진주 비유는 천국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가치들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물 비유와 관련하여서 유대인들은 천국은 초기부터 의인과 악인을 분리시킬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물 비유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현재적 천국에서는 의와 불의,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들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마지막 심판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고 었다.
현대의 성도들은 천국 비유들의 드러난 의미에 이미 익숙해 있다. 물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천국에 관해 많은 계시를 허락받은 점에서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과는 비할 수 없이 복되다. 그러나 비유들의 드러난 의미에 익숙해 있다고 해서 천국에 더욱 가까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유들의 의미에 익숙해 있는 것이 이미 천국의 속성을 알고 있다고 하는 인식론적(認識論的) 타성과 안일에 빠뜨리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그것은 곧 진정 천국을 좀더 이해하고 누리고자 하는 영적 열망을 식게 만들 위험으로 연결될 수 있다.
강조하건대, 예수님의 일곱 가지 비유들에 담긴 전체적인 교훈의 핵심은 곧, ‘천국은 겸손한 자에게 더욱 많이 계시된다’고 하는 것이다. 천국의 비밀이 겸손한 제자들에게는 허락되고, 완악한 마음으로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것(13:11)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천국을 더 많이 깨닫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박사조차도 이론적으로 천국의 특성에 대해 논할 수는 있어도, 그 천국의 실재(實在)를 누리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은 한 말씀이라도 소중히 간직하며 순종하는 자들에게 천국의 왕이신 예수님은 천국을 계시해 주실 것이며, 또 그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은혜를 허락해 주실 것 이다. 옥스퍼드 주석. pp. 205-207.
네번째 강화 (10장)
18장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대 강화(講話) 중 네번째 강화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는 그리스도를 주로 모신 새로운 공동체(New Community)인 제자 상호간 혹은 성도 상호간의 관계성에 관한 교훈으로서, 겸손과 인간 존중 및 용서를 강화 전체의 주제로 꼽을 수 있다.
먼저 이러한 강화가 나오게 된 배경은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입니까?’라고 하는 제자들의 질문이 발단이 되었다(1절).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야이시며, 또한 그의 왕국이 공공연하고도 영광스럽게 임하게 될 것을 확신하였다. 즉 제자들의 질문은 곧 영광 가운데 도래할 메시야의 왕국의 모습과 메시야 왕국에서의 자신들의 위치에 대해 골몰하고 있는 그들의 잘못된 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과의 공동 생활이 2년여 지속되면서, 또한 그들이 따르는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때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제자들 상호간에는 제자 생활 초기에 발견되지 않았던 경쟁과 시기와 같은 문제들이 대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예수님의 강화는 개별적인 윤리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천국 공동체의 구성 원리의 차원에서 제시된 것이다.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본장의 내용을 좀더 세분해서 보자면,
먼저 1-14절은 천국에서 누가 큰가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으로 주신 교훈이다.
여기서 주님은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 또한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임을 교훈하셨다. 즉 겸손(Humulity)이 천국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필수적 덕목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와 같은 소자 한 사람을 실족게 하는 죄의 심각성을 경고하심으로써, 제자들은 겸손의 자세로 타인을 존중하며 소중히 대해야 함을 역설하셨다.
이어 15-20절은 형제의 범죄에 대한 처리책에 관한 것이다.
다른 형제가 범죄했을 때, 1단계로 범죄한 형제와 단 둘이 만나 회개를 권면하고, 만일 듣지 않으면 2단계로 두세 증인과 함께 가서 재차 권면하라고 하신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3단계로 교회에 공식적으로 알리라고 하신다. 만일 교회의 공식적 권면조차 듣지 않으면 불신자처럼 여기라고 명하신다. 이는 현대적인 측면에서 교회의 치리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기도 하다. 전후 문맥 관계를 고려할 때, 이 강화의 초점은 형제의 범죄에 대한 공식적 · 행정적 절차를 밝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한 사람의 범죄에 대한 치리를 행사함에 있어서도 신중하고도 사랑에 기초하여 행하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교회 공동체는 회개치 않는 완고한 범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되, 소자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18:14)이라는 측면에서 신중하게 치리권을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1~35절에서는 용서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형제가 범죄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 하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무한대의 용서를 베풀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예수께서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하여 만일 우리가 형제를 중심(中心)으로 용서치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비유에 동장한 악한 종처럼 여기실 것이라고 경고하심으로써, 성도 각자가 하나님께 받은 용서의 은혜에 기초하여 서로를 온전히 용서해야 함을 강조하신다.
이상의 겸손, 인간 존중, 용서의 덕목은 단지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서 권장할 만한 미덕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主)로 모시는 천국의 백성들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능한 한 겸손하도록 노력하라’가 아니라 ‘겸손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또한 ‘가능하면 남을 존중하라’가 아니라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면 화가 있을 것이다’는 것이다. 용서에 있어서도 ‘가능하면 남을 용서하도록 하라’가 아니라 ‘중심으로 용서치 않으면 천부께서도 그와 같이 대할 것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백성된 성도들은 위의 덕목들을 상대적 차원으로 끌어내릴 것이 아니라, 절대적 차원에서 순종하며 실천하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pp. 578-579.
다삿번째 강화 (마 24-25)
24장과 25장은 마태복음에 나오는 대 강화(講話) 중 마지막 다섯번째 강화로서, 종말과 재림에 관한 예언 및 교훈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유명한 감람산 강화(Discourse on the Mount of Olives)이다.
이 감람산 강화는 성 고난 주간 (Holy Passion Week)의 셋째날인 화요일 후반기에 있었는데 마치 구약 신명기 31, 32장에서 출애굽 사명을 완수한 모세가 약속의 땅을 목전에 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행한 고별 설교와 같이, 혹은 여호수아서 23, 24장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여 각 지파별로 땅을 나누어 주기를 마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과 그 지도자들을 향하여 그 땅의 완전한 정복을 명령하고 오직 여호와만을 청종하도록 행한 고별 설교와도 같이, 이제 메시야로서 3년의 공생애를 마감할 시점에 이르신 예수께서 장차 닥칠 일에 대해 미리 예고하고 이에 대비하도록 하는 마지막 가르침을 주고 계신 것이다.
이 감람산 강화는 물론 1차적으로는 예수께서 죽음과 부활 승천으로 말미암은 자신의 부재(不在)시에 닥쳐올 상황에 대해 당시의 제자들을 준비시키는 맥락에서 주어진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초림(初臨)과 재림(再臨) 사이를 살아갈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성경의 예언(據言)들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사건의 전후와 시기를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것이 많다. 이는 성경의 예언자들이 다중적 관점(Multiple Perspectives)을 가지고서, 가까운 미래에 발생할 한 사건을 가리키기도 하며 동시에 미래에 반복적으로 발생할 사건들 혹은 궁극적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들을 복합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성경의 예언은 예언을 듣고 있는 1차 대상들에게와 2차 대상들인 다가올 미래의 사람들 모두에게 구속사적인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예언의 묘사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에서 궁극적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으로 제시된 것은 바로 이 예언 목적의 복합성(複合性) 때문이다.
먼저 예수님의 강화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주어졌다. 앞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신 데(23:37-39) 이어 예루살렘 성전의 철저한 파괴까지 예언하시자(24:1, 2), 감람산에서 제자들이 성전 파괴의 때와 재림, 종말의 징조에 대해 질문한다(24:3). 이에 예수께서는 종말의 징조와 종말에 임박한 즈음의 대환난에 대해 먼저 예언하시고(24:4-28), 그리고 재림의 양상과 시기에 관련된 교훈 및 재림에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교훈하신다(24:29-25:46).
이를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24:4-14의 내용은 종말이 가까운 것을 알리는 여러 징조(징조)들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 전쟁, 민족간의 분쟁, 기근, 지진, 거짓 선지자의 미혹, 불법의 성행, 인간애(인間愛)의 실종 등이 언급되어 있다.
이어 24:15-35은 대환난(the Great Tribulation)에 대한 예언 및 환난에 대비한 성도들의 자세에 관한 교훈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대환난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중의적(重意的)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예수님의 예언은 가까이는 A.D.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이루어진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완전한 파괴를 가리키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종말에 임박할 때 있을 창세 이후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환난(21절)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24:29 이하 25장 끝까지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예언 및 교훈들이다.
먼저 24:29-35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의 양상 및 재림 시기 분별에 관한 교훈을 다루고 있다.
재림은 시기적으로 대환난이 있은 후 천체의 일대 변동을 동반한 사건이며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볼 수 있을 정도로 확실한 징조를 동반한 사건들임을 밝히고 있다(29-31절). 또한 재림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시대의 징조들이 있음과, 성도들이 그것을 분별하여야 한다는 것을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교훈하신다(32-35절).
이어 24:36-51에서는 정확한 재림 시기의 불예측성 (Unpredictability) 및 이에 따른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고 있다.
비록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 시기가 가까운 것을 분별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 날과 때 즉 재림의 정확한 시기는 아무도 알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재림 시기의 불예측성이 바로 성도가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와 직결되고 있다는 점이다(42.43절) .
25장의 세 단락은 그리스도의 정확한 재림 시기를 알 수 없는 성도들의 재림을 대비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세 가지 비유를 통해 교훈하고 있다.
1-13절의 열 처녀 비유, 14-30절의 달란트 비유, 31-46절의 양과 염소의 비유는 재림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지만,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각각 준비성, 소명에의 성실성, 사랑의 실천을 변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감람산의 그리스도 - 조반니 벨리니
우리가 그리스도의 감람산 강화를 대할 때 특별히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감람산 강화의 궁극적 목적이 종말의 비밀을 미리 알려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대비하도록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는 데 있다고 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예언은 강화의 전체 내용 중 성도의 자세에 대한 교훈에 비해 극히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더욱이 종말과 재림의 정확한 시와 때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밀에 붙여두고 있다. 심지어 예수께서는 종말과 재림의 구체적인 때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모르신다고 말씀하셨다(24:36). 이는 예수께서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전지성(全知性)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구속 사역의 진행에 있어서 성자(聖子)의 성부(聖父)께 대한 완전한 복종과 겸손을 나타내신 것이며, 이로써 종말의 때를 알고자 집착하는 태도의 무익성과 교만을 강조하시기 위함이다.
감람산 강화는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깨어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24:42). 그러므로 종말 시기에 집착하여 아무 일도 않고 종말의 때만 기다리거나, 집단 은둔식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성경의 의도를 완전히 곡해한 것이다. 25장의 세 비유를 통해서 본 것처럼, 진정한 종말 신앙을 가진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의 삶에서 최선을 다한다. 영적으로 늘 깨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에 충실하며, 내 이웃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의 감람산 강화를 통하여 한 가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현상태의 우주는 반드시 종말을 맞게 된다는 사실이다. 일반 세속적인 시간 사상은 시간이 계속해서 순환한다는 순환 사상이다. 이러한 세속적인 시간 사상은 국가의 멸망과 같은 부분적이고 지엽적인 종말은 인정하지만 역사적인 종말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적 시간 사상은 시간이 태초로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 직선적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단회적이며 역사와 현상태의 우주는 종말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본문의 감람산 강화는 역사적 종말이 있게 될 것이라는 우주 만물에 대한 주권을 지니신 제2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 도의 분명한 선언이다. 그렇다. 지금 이 땅 위의 역사는 그것 자체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옛 낙원이었던 에덴 동산이 그곳의 관리자였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폐쇄된 이래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질 새 낙원 곧 천국을 향하여 진행되는 것으로서 그 종말이 분명한 중간기에 불과한 것이다. 곧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완성(the Completion of God's Salvation History)’을 향하여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참 평화와 축복이 있는 영원한 거처는 오직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일 뿐이며 지금 이 세상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참으로 인간 역사에는 종말이 있고 그 종말은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초림(初臨)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는 임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으로 하나님 나라는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나라가 완성이 될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세상 속에서 여러 형태의 환난 속에서 인내가 요구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먼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방향으로(24:14) 남은 인간의 역사는 전개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종말의 어두운 징조들이 나타난다 하여도, 무서운 환난이 온 세상을 혼란스럽고 두렵게 한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대망하는 가운데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며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감람산의 그리스도 / 도메니코 테오토코풀로스(Domenico Theotokopoulos)
<청지기>
'4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의 3대 사역(마 4:23, 9:35) (0) | 2020.09.08 |
---|---|
칭찬받는 믿음/ 달란트 비유 (0) | 2020.09.08 |
열 두 제자의 파송 및 전도자의 수칙 (0) | 2020.09.08 |
마 9장에 등장하는 샌드위치 기법 / 메시야의 비밀 (0) | 2020.09.07 |
마태복음 9장 연구- 새 술은 새 부대에 (0) | 2020.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