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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칭찬받는 믿음/ 달란트 비유

by 은총가득 2020. 9. 8.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이 크다고 칭찬받은 두 사람

첫째, 두로와 시돈 지방의 한 여인의 믿음(마 15:21~28).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둘째, 백부장의 믿음(마 8:5~13 ; 눅 7:1~10 ; 요 4:43~54).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

비록 작은 믿음일지라도 소중하고 귀한 것이다.

제자들의 작은 믿음 속에 두려워하는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려움과 의심이라는 불순물이 섞여 있을지라도 하나님께는 작은 믿음이 필요하다. 이유는 완전한 믿음을 우리는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네사렛에서의 사역 - 두로와 시돈 - 에바다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예수께서 배에 오르시니,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런데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물결에 막 뒤덮일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갈릴리 바다는 실제로는 소금기가 없는 담수호이나 이러한 헬라어의 용례에 따라 ‘갈릴리 바다’ (마 4:18) 뿐만 아니라 ‘디베랴 바다’ (요21:1)로도 불리워졌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이 -213m이며 수심이 61m 정도 되는 거대한 호수이며 이와 같은 특이한 지형적 특징으로 해수면의 온도가 급상승하는 경우에는 남동쪽의 고원으로부터 급작스럽게 바람이 불어와 큰 파도를 일으키곤 했다.

한편 우리말 ‘놀 은 ‘바다의 큰 물결’을 가리키는 뱃사람들의 말이다. 그러나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세이스모스’는 ‘엄청난 파도'나 ‘거대한 폭풍’(마 8:24)이란 의미와 더불어 ‘폭력이 수반된 소란’이나 ‘동요’ 또는 ‘지진’ (마 24:7)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태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당한 풍랑의 기사를 기록하면서 이러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을 암시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갈릴리 바다는 세상이요, 예수님과 제자 이 탄 배는 교회이며, 그들이 만난 폭풍은 교회에 대한 핍박, 특히 죽음이나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교회가 당하는 환난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을 취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과 환난을 당할 경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훈련시키시기 위해 그들을 갈릴리 바다로 이끌고 폭풍을 겪게 만드신 것이 된다.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제자들이 다가가서 예수를 깨우며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들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사람들아!" 하고 말씀하시고 나서,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다.

병행 구절인 막 4:40에는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로 나와 있다. 이처럼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으로 볼 때 마가복음의 내용은 매우 강력하게 기록된 반면에 본문에서는 믿음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믿음이 적다고 책망하는 정도로 그쳐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책망의 정도를 약화시켜 보도하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러나 원어 성경을 통해서 보면 본문과 마가복음의 병행 구절이 그렇게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즉 본문에 나오는 ‘올리고피스토이’ 의 원형 ‘올리고피스토스'는 믿음이 약하여서 굳건하게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막 4:40 에 사용된 ‘우포’는 어느 특정한 시기를 넘어서서 시간을 더 이상 연장할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형용 부사로서 ‘아직도 아니(still not)’라는 의미이다. 즉 많은 기적들과 기사들을 목격하고, 여러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능력과 그의 인격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본서나 마가복음의 의미는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은 풍랑을 잔잔케 하신 방법이 기록된 본문의 부분을 제외하고는 요나서 1장에 나오는 요나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을 살펴보면 (1) 예수님 (요나)께서 탄 배가 풍랑을 만났으며(4절), (2) 예수님 (요나)은 풍랑이 일고 있음에도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고(5절), (3) 배에 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요나)을 깨워서 어떤 행위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6절).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대로 풍랑을 잠잠케 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두 사건은 판이하게 달랐다. 즉 요나는 자신이 제물이 되어 바다로 들어갔지만(15절)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권위로 바람과 바다를 다스리셨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본문을 본서의 일차 독자인 유대인들에게 매우 친근한 요나서의 구조와 동일하게 기록하므로써 예수님께서 ‘요나보다 더 큰 이’(12:41), 즉 더 큰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구조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사람들은 놀라서 말하였다.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이분에게 복종하는가?"


 

달란트 비유 (마 25장)

 

 

달란트 비유( 마 25:14 -30)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또 하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그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다.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곧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다.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와 같이 하여, 두 달란트를 더 벌었다.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가서 땅을 파고, 자기 주인의 돈을 숨겼다.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오랜 뒤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그들과 셈을 하게 되었다.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주인님, 주인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가와서 주인님, 주인님께서 두 달란트를 내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였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나아와서 주인님, 나는, 주인이 굳은 분이시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줄로 알고,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무서워하여 물러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에 그 돈이 있으니, 받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자 그의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너는,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렇다면, 너는 내 돈을 돈놀이하는 사람에게 맡겼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내가 와서,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받았을 것이다.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가진 사람에게는 더 주어서 넘치게 하고, 없는 사람에게서는 있는 것마저 빼앗을 것이다.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이 쓸모 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

 

 

 

 

칭찬과 상을 받는 성도(마 25:14-30)

[ 성경묵상 ] 25장 요약 ; 2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는 종말을 대비하는 자의 자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성경묵상 ]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마음과 뜻을 바르게 알지 못했다(마 25:24-26). 자신에게 한 달란트를 맡긴 이유, 의도, 뜻을 바르게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항상 상대방이 말하는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말을 듣고 그대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그 내용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본문에 나타난 한 달란트 맡은 종은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을 바르게 알지 못한 것 때문에 올바르게 행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한 달란트를 남겼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한 죄로 벌을 받았다.

주인은 종들의 역량만큼 맡긴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15절의 '그 재능대로'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각각 그 재능에 따라 풍성한 은사를 부여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준비한 그릇의 분량대로 우리에게 맡기시고 사용하신다. 딤후 2:20-21에는 주인의 쓰시기에 합당한 자가 해야 할 일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라는 표현을 보면 '이런 것'에서 깨끗하게 하라고 하고 있다. '이런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를 잘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재능대로 풍성한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주신 하나님을 위해 재능을 성실하게 활용해야 한다.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달란트를 받은 자의 자세는 대상 29:11-12의 말씀과 같이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활용해야 한다. 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주재하도록 해야 한다. 롬 8:32, 약 1:17. 고전 12:11에는 '그의 뜻대로' 각각 은사를 나눠주신다고 하였다.

그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equality(평등)'과 'equity(형평)'의 차이점, 차별과 구별의 차이점, 탕자비유에서 나오는 큰 아들의 경우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벧전 4:10 선한 청지기처럼 서로 봉사해야 한다. 청지기에게 맡겨진 것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경향이 많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에 대해 우리가가져야 할 자세, 곧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달란트를 받은 자는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알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 결과에 대해 반드시 결산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살아가야 한다. 어떤 일이든지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들이 주인답게 사는 자들이다.

 

 

칭찬과 상급 받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사명에 감사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를 주셨는데"라고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주인께서 주셨다고 하면서 감사하였다.(역대하 내가 받은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왔사오니)

충성된 종들은 다섯(두) 달란트를 더 받게 되었고, 내게 많은 것을 네게 맡기는 복을 받았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결산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주인을 굳은 사람이라고 잘못된 평가를 하면서 변명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반대 방향으로 갔다고 볼 수 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순종하였다.
이처럼 칭찬 받는 자들은 감사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 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둘째, 사명에 충성하며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 하였도다"의 의미는 무엇인가?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을 잘 알지 못하면서, 주인을 자신의 생각대로 평가하고 있으며, 자신은 주인을 잘 안라고 말하는 자이다. 잘 못 알고 있으면서 잘 못 행동한 결과는 이를 갊이 있게 되었다.

"적은 일"ㅇ[ 충성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벧전 4:10, 고전 4:2의 말씀처럼 맡겨진 자는 충성을 해야 한다.

결론 : 주님 맡겨 주신 사명에 감사하며 순종하여, 충성된 사람이 되어 하나님 나라 확장하는 일에 유익을 끼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 성경 내용분석 ]

열 처녀 비유를 마치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길게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신다(14-30절).

재림을 대비하는 성도의 자세를 교훈하는 본장의 세 비유 가운데 1-13 절의 열 처녀 비유가 철저한 준비로써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면, 본단락의 달란트 비유는 소명에 대한 성실과 열심으로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두 비유는 다같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시점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 주님이 갑자기 오신다는 사실, 그리고 마지막 심판 시점에서 주님과 더불어 즐거움을 누리는 자와 쫓겨나 통곡하는 자의 두 부류로 확연히 분리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한편, 본문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확실히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갈 때 ~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또’로 번역된 ‘가르’는 등위 접속사가 아니라, 이유와 원인 그리고 단언과 결론을 나타내는 불변사이다. 문맥상 본문에서 ‘가르’는 단언적 의미를 나타내는 불변사로 쓰였다. 주님은 여기에서 천국의 상황이 진실로 달란트 비유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같다는 사실을 말씀하고자 이 단어를 사용하시는 것이다. 즉 천국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재능을 맡기고 그로부터 기대되는 유익을 얻지 못할 경우 ‘무익한 종’으로 분류하여 쫓아내는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편, ‘타국에 갈제’로 번역된 ‘아포데몬’은 ‘외국에 가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아포데메오’의 현재 분사형으로서, 주인이 ‘외국에 나가면서’ 그의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겼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어떤 사람’ 곧 주인은 주님을 의미하며 ‘타국에 갔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 숭천하신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자기 종들에게 맡기신 ‘자기 소유’란 주님께서 승천하신 때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 부재하신 동안 성도들에게 맡기신 주의 모든 사명을 가리킨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복음 전따를 들 수 있다(마 28:19,20), 한편 주인이 모든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 것은, 성도들은 비록 그 분량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누구나 예외없이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음을 시사해 준다. 그렇다. 주님은 성도 각자의 재능에 따라 알맞는 사명을 주시고 그것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원하신다.

본 달란트 비유는 눅 19:17-27의 므나 비유와 유사하다. 때문에 일부의 사람들은 두 비유를 같은 비유로 본다. 하지만 이 두 비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구별되는 비유로 보는 것이 옳다.

첫째, 달란트 비유에서는 종들이 받은 달란트가 달랐던 반면, 므나 비유에서는 종들이 받을 므나가 각각 한 므나씩으로 같았다.
둘째,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의 뜻을 잘 이행한 종들에게는 상급이 같았던 반면, 므나 비유에서는 결과에 따라 달랐다.
셋째, 달란트 비유에서는 게으른 종에게 엄한 형벌이 주어진 반면, 므나 비유에서는 단순히 주어졌던 므나만 회수되었다.
넷째, 달란트 비유에는 종들의 주인에 대한 반감과 그에 대한 주인의 진노가 므나 비유에 나온다.
다섯째, 달란트 비유에서는 주인이 얼마간 여행한 것으로 나오는 반면 므나 비유에서는 주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떠난 것으로 나온다.
여섯째, 비유의 목적이 다르다. 즉 달란트 비유는 주님의 재립을 대비하는 성도의 충성을 강조하는 반면, 므나 비유는 주님의 왕권에 대한 오해를 시정하기 위해 주어졌다. 즉 므나 비유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하여 제자들이 주님이 곧 왕이 되실 것이라고 오해한 데 대하여, 주님은 지금 마치 왕위를 얻기 위해 먼 곳으로 간 귀인같이 장차 왕으로 다시 오시기 위해 죽음과 부활 숭천으로 이 땅을 떠나시려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심을 강조하기 위해 주신 비유인 것이다.

25:14 자기 소유를 맡김


주인은 타국으로 갈 때 자기의 소유를 자기 종들에게 맡겼다. 고대 앗시리아나 이집트 등에서는 재산가나 귀족 신분의 사람이 종이나 소작인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재산을 맡은 사람은 그것을 자본금으로 일을 해 원금과 이자를 돌려 주고 그 나머지 부분만 취할 수 있었다. 본 달란트 비유는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둔 이야기로 보인다.

‘자기 소유를’로 번역된 ‘타 휘파르콘타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의 손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주인이 아끼며 관리하던 그의 재산을 가리킨다. 그는 이것을 그의 종들에게 맡긴 것이다.

여기에서 ‘맡기다’는 의미로 번역된 ‘파레도켄’의 원형 ‘파라디도미’는 ‘어떤 것을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주다’, ‘어떤 것을 사용하고 관리하도록 넘겨 주다’는 의미이다. 주인은 그가 평소에 아끼며 관리하던 그의 재산을 그의 종들에게 주어 관리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재산을 종들에게 양도한 것은 아니며 또한 단순히 재산을 맡아 보전하도록 맡긴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주인은 재산의 증식을 기대하며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도 우리 성도들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더욱 풍성해지기를 기대하신다.

25:15 각각 그 재능대로


‘그 재능’으로 번역된 ‘이디안 뒤나민’은 ‘그 자신의 능력’이라는 의미이다. ‘뒤나민’의 원형 ‘뒤나미스’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힘 또는 능력’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주인은 그 종들이 감당할 만한 능력에 비례하여 자기 소유 곧 달란트를 맡겼다. 즉, 한 달란트를 감당할 만한 힘이 있는 종에게는 그에 어울리는 한 달란트를, 두 달란트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는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다섯 달란트를 감당할 만한 힘이 있는 종에게는 그에 비례하여 다섯 달란트를 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각 종들에게 맡겨진 달란트는 그들에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당한 양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성도가 감당하기에 알맞는 달란트를 맡기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이 받은 사명과 재능과 은사가 다른 사람의 그것에 비해 적든 많든 자기 비하에 빠지거나 교만해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고전 15:41).

25:21 ‘작은 일’

이는 수나 규모가 작거나 양이 적은 것, 또는 정도가 가볍고 사소한 것을 나타내는 형용사 ‘올라고스’의 목적격 복수이다. 사실 다섯 달란트를 받아 그것으로 장사한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돈의 액수도 큰 것이며, 장사의 규모도 큰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그러한 것에 대해 ‘작고 사소한 것’이라고 한 것은 그 종이 앞으로 보상으로 새롭게 담당하게 될 일에 비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또한 상징적으로 주님으로부터 받은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주인이 누리게 될 즐거움이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부끄러움을 참으셨다’는 히 12:2 말씀을 고려할 때, 주인의 즐거움이란 재렴과 종말론적 심판 이 후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리게 될 영화(榮華)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성자 예수님은 원래 육신이 되시기 이전, 창세 전에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나(요 17:5), 인간을 구속하기 위하여 육신이 되시는 그 시점부터 그 영화를 잠시 보류해 놓으셨다(빌 2:7). 이러한 영화는 부활 승천 이후 그분이 다시 우주의 통치자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서신 때부터 다시 누리고 있는 것이다(빌 2:11). 자기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한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그리스도가 누리는 영광과 즐거움의 자리에 초대될 것이다. 다섯 달란트의 이윤을 남긴 성실하고 지혜로운 종은 장사하면서 당한 어려움을 그러한 즐거움을 바라보면서 극복했을 것이다(롬 8:18).

25:24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한 달란트를 받아 전혀 일하지 않고 그것을 땅 속에 묻어두었던 종도 결산의 날 주인에게 나올 수밖에 없다. 그는 앞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이 말한 (20.22절)과 달리 자기의 한 달란트를 주인이 주신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자기가 일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 변명 또한 일하기 힘든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주인이 인색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는 자기가 일을 하지 않고 이윤을 전혀 남기지 않은 이유가 다 인색하고 냉정한 주인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주인에게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굳은’으로 번역된 ‘스클레로스’는 땅 등이 딱딱하게 말라 있는 것을 묘사한 동사 ‘스켈로’에서 유래한 형용사로서 ‘굳은’, ‘뺏뺏한’, ‘거친’이라는 의미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5회 사용되었는데, ‘매섭고 거친’(약 3:4), ‘죄로 굳어진 마음에서 나오는 강팍하고 완악한’(유 1:15), ‘해롭고 고생스러운’(행 26:14), ‘이해하기 힘든’(요 6:60) 등의 의미로 번역되었다. 본문에서는 사람의 마음 상태를 묘사하고 있으므로, ‘강팍하고 완강하며 가혹하고 냉정한’ 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삼상 25:3 ; 사 19:4).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그의 주인을 인정머리 하나 없는 인색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규정해 버린다. 즉, 투자는 적게 해 놓고서 거기에서 많은 소득을 얻어보려고 종들에게 채찍질하는 인색한 영감 정도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을 잘못 평가하였다(26절). 이러한 경향이 오늘날 인간들에게도 있다. 운명론에 빠져 자기의 적은 능력을 더 이상 개선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개발과 발전을 포기하며, 자기에게 기회를 주지 않은 하늘을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25:24 심지 않은 데서…모으는 줄을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유사적 평행 대구 방식으로 주인을 원망하고 있다. 즉, 본절의 ‘심다’와 ‘헤치다’, 그리고 거두다’와 ‘모으다’는 서로 유사한 내용의 다른 표현 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히브리적 속담투로 보이며 (A.L. Williarns)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고 불로 소득을 얻어보려는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심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스페이라스’의 원형 ‘스페이로’는 ‘씨를 뿌리다’는 의미이다(13:3). 그러므로 심지 않은 데서 거둔다는 말은 씨를 뿌리지도 않은 에서 추수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자연 법칙과 경제 법칙을 거스르는 행동이다.

‘헤치다’라는 다소 모호한 의미로 번역된 ‘디에스코르피사스’의 원형은 원래 ‘널리 흩뜨리다’, ‘분산시키다’는 의미(막 14:27 ; 행 5:37)의 동사인데, 본문에서는 곡식알을 흩뜨리는(disperse)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곡식 낱알을 쭉정이로부터 분리해 거둬들이기 위해 키질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키질을 통해서 알곡이 모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치지 않은 데서 모은다’는 표현은 키질을 통해 곡식을 위로 흩뿌리지도 않으면서 알곡을 모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이 또한 불로 소득을 해보려는 자의 태도인 것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이와 같이 자기 주언을 투자도 하지 않으면서 많은 소득을 얻어보려는 게으르고 악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그른 것이며, 주인에게서 적게 받은 데 대한 분노와 원망의 마음이 그를 판단 착오를 하는 사람으로 만든 이다. 또한 이러한 원망은 어쩌면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자기 자신에게 해당된다.

25:24 내가 알았으므로

한글 개역 성경은 원어 성경에 있는 인칭 목적격 대명사 ‘세’를 번역하지 않았으며, 직설법 동사를 이유를 나타내는 부사적 용법으로 번역하였다. 물론 이러한 번역도 원문의 의미를 잘 전달하기는 하나 원어 성경을 직역하는 것이 강렬한 의미를 훨씬 잘 전달한다. 한편 ‘에그논’의 시제가 부정과거로서 안 시점이 언제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이미 과거부터 잘 알고 있었다는 뒤앙스를 지닌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은 편견에 따른 것이며, 건전하고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므로, 그가 주인에 대해서 인색하고 냉정하며 불로 소득만을 노리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판단한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청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