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병자를 고치심 (마 9:1-8)
치유와 축사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전 지역에 전파되었고, 또 사역이 확장되어 감에 따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가와 누가는 갈릴리에서 일어난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의 충돌 사건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했던 문제는 신성모독적인 발언, 죄인들과의 교제, 금식 문제, 그리고 안식일 문제 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질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지셨을 뿐 아니라,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권세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전하심(마 9:1, 막 2:1-2, 눅 5:17)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마 9:1)..."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조차 자리가 없는 상태에서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막 2:1-2)..."
"하루는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이 앉아 있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 5:17)."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로 인해서 자신의 소문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공개적으로 마을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밀려 드는 무리들로 인해서 공개적으로 사역을 하지 못하고 마을 바깥에 있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의 다시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아마 이때에 예수님의 일행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에 머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식은 즉시 온 갈릴리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또 병도 고치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을 찾아 온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시몬의 집은 문 앞에도 사람들이 서 있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에 그 자리에는 갈릴리와 유대,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가르치는 내용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가버나움을 방문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2.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3, 막 2:3-5, 눅 5:18-20)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올 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막 2:3-5)..."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서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18-20).."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에 네 사람이 침상에 누인 한 중풍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 왔습니다. 네 사람이 메고 온 것을 보면 이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중증 환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문밖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계단을 통해서 평평한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붕을 뚫어서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앞으로 그 환자를 매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예수님께서 능히 중풍병자를 고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에게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이러한 비상식적인 시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매달아 내린 환자를 보고,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에 합당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질병이 그의 죄로 인해 생겼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병을 치료하기 전에 먼저 그의 죄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 예수님은 병을 치유하기 전에 먼저 죄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모든 병이 죄로 인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질병은 죄로 인해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서기관들의 반응(마 9:3, 막 2:6-7, 눅 5:21)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마 9:3)."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신성모독 적인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눅 5:21)"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동시에 마지막 때에 우리를 심판하실 심판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심판할 권한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어 돌아가실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실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그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에 그 곳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이러한 예수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전문 교사로서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가 용서를 받았느니라!"고 하시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또 죄인을 위해서 돌아가실 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감히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으로 이미 예수님을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말씀을 전하셨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예수님을 조사하기 위해서 파견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때에 네 친구가 한 중풍병자를 침상 째 메고와서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매달아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시고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그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1. 사죄의 권세를 가진 예수(마 9:4-6(상),막2:8-10(상),눅 5:22-24(상))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마 9:4-6(상))..."
"저희가 속으로 이렇게 의논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막 2:8-10(상))..."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눅 5:22-24(상))..."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신적인 권세를 가진 것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러한 생각을 하느냐?"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말이 더 쉽겠느냐?"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죄 선언을 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일은 병을 고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는 병을 낫게 하는 일은 말씀으로 선포하면 되지만, 죄를 용서하는 일은 그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대신 죽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 하는 일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실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친히 속죄 제물이 되어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실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무리들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일부러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통해서 자신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신적인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말세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이양 받을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분이었습니다(단 7:13-14). 당시에 유대인들은 다윗과 같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 받아 사역에 장애를 받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을 "인자"로 소개하셨습니다(8:31, 9:12,31, 10:33, 14:21 등).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사죄의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심으로 자신이 다니엘이 말한 종말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2. 일어나 침상을 들고 가라!(마 9:6-7, 막 2:11-12, 눅 5:24-25)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마 9:6-7)..."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막 2:10-12(상))..."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눅 5:24-25)..."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셨습니다. "일어나서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 예수님은 그의 병의 원인인 죄를 먼저 제거한 후에 그가 원하는 중풍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병이 나았다고 선언하신 후에 그의 병이 낫는다면 그 중풍병자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도 믿을 수 있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중풍병자의 병이 낫지 않는다면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믿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그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칩상에서 일어나서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메고 걸어나갔습니다. 중풍병자가 건강해져서 자기 발로 걸어나간 것은 그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실 때에 우리의 영혼과 질병을 모두 고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원과 치유는 완전합니다. 이러한 치유 사건은 예수님을 통해 시닥된 메시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메시아 시대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절름발이가 뛰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35:6, 렘 31:8 등 참고).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예언을 실제로 성취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러한 일들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고, 또 예수님께서 성경에 예고된 종말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무리들의 반응(마 9:8, 막 2:12(하), 눅 5:26)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 9:8)."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막 2:12(하))."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눅 5:26)."
그 중풍병자는 인간적으로 전혀 희망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죄와 질병을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무리들은 이 일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을 보고, 크신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무리들은 이 일을 보고 이 기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예수님께서 특별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심히 두려워하면서 "우리가 (전에는)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오늘 목격한 일은 전에는 전혀 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기적을 보고도 계속해서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우리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자신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졌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둘째로 이 사건은 복음이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온전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믿는 사람의 죄(영혼의 질병)를 용서받게 해주고, 장차 우리의 몸을 예수님처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이 사건은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으며, 예수님께서 성경에 예언된 종말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오래 전에 메시아께서 오시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와 절름발이가 뛰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일을 성취하심으로 메시아 시대가 도래했으며, 또한 자신이 종말에 오기로 약속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태(레위)를 부르심(마 9:9-13)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할 권세가 있는 하나님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신격화하고 신성모독적인 언행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당시 죄인으로 간주되었던 세리(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제를 금한 세리를 부르시고 그들과 교제한 일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큰 저항과 비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의사가 환자와 함께 있는 것처럼, 죄인을 구하러 온 자신도 죄인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셨습니다.
1. 세리 레위(마태)를 부르심(마 9:9, 막 2:14, 눅 5:27-28)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마 9:9)."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막 2:13-14)."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7-28)."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로 가셔서 무리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르침을 마친 후에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지나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마태는 이 사람의 이름을 마태라고 소개하고 있는 반면, 마가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소개하고 있고, 누가는 레위라 하는 세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레위)가 속한 세관은 가버나움에 있었습니다. 가버나움은 헤롯 빌립이 통치하는 지역으로, 갈릴리 북쪽에 있는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마태(레위)는 분봉왕 헤롯 안디바에게 소속된 세리였습니다. 그는 세관에 앉아서 가버나움의 간선도로(북쪽으로 지중해와 다마스커스 사이에 있는)를 통과하는 상품에 대해 헤롯을 대신해서 세금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세리들은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했기 때문에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서 혹독하게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헤롯의 고용인이 되어 많은 강제로 세금을 뜯어내는 세리들을 쓰레기같이 취급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세리들은 백성들에게 크게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가족 중에서 누가 세리가 되면 그를 가정과 사회에서 추방해 버렸습니다. 또한 그들은 재판정에서 증인이 될 수도 없었고 회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습니다. 또 가족들도 여러 가지 직업 중에서 세리를 가장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멸시받는 세리들도 사랑하셨습니다. 마태(레위)의 부름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멸시받던 사람을 수용하신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마태(레위)는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신뢰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를 부를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그에게 "나를 좆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마태, 즉 레위는 즉시 일어나서 예수님을 좆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강력한 권위가 있었으며, 레위 또한 예수님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직업을 버리고 즉시 예수님을 좆았습니다.
2. 바리새인들의 비난(마 9:10-11, 막 2:15-16, 눅 5:29-3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0-11)"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 2:15-16)"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눅 5:29-30)"
그 후에 마태(레위)는 기쁨으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이 잔치는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축하하고, 또 그 동안 함게 했던 친지들과 송별하는 잔치였습니다. 마태(레위)는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게 자신이 세리를 떠나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알리기를 원했습니다. 복음서에서 종종 "세리와 죄인들"이란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이 말은 백성들에게 가장 멸시받던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일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참석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초대받지 않았지만 죄인과 교제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감시하게 위해서 참석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세리들을 매우 경멸했습니다. 그들은 정결법을 따라 식사하지도 않고 십일조도 드리지 않는 세리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오래 전에 시리아 왕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가 유대를 크게 박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 왕은 성전에 돼지를 제물로 드리고, 안식일과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에 유대 백성들 중에는 생명을 걸고 율법을 준수하기로 헌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바리새인의 기원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배우고 지키는 일에 헌신했고, 철저하게 율법의 규례를 따라 생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세리나 죄인들과 교제하면 부정해진다고 생각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금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모르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너희 선생이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먹느냐?"
3. 주님의 대답(마 9:12-13, 막 2:17, 눅 5:31-3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2).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3)."(마 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31),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2)."(눅 5:31-32)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가 있지 않느냐?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느니라!(17)" 의사들이 환자를 고치려면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환자에게 전염될 것을 두려워해서 환자를 멀리하는 의사는 환자에게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죄인을 불러서 회개시키기 위해서 죄인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율법을 모르는 세리들과 교제하는 것을 기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해주시고 그들의 아픔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세리들이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예수님을 정죄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에수님은 이 일로 인해서 다시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열심인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의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이 세리들에 비해서 율법을 준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서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의인보다 죄인들과 함께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의사로서 죄인들에게 깊은 동정심과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사가 환자들을 돌아보듯이 죄인들의 영혼을 돌아보셨습니다. 의사가 환자와 함께 있는 것을 비난할 수 없듯이, 영적 의사인 예수님께서 영적 환자인 죄인들과 함께 있는 일도 비난할 수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내가 제사보다 긍휼을 더 원한다"고 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제사 드리는 일보다, 그들이 어렵고 힘든 긍휼한 마음으로 죄인들을 돌아보기를 더 원하셨습니다.
교회가 가진 숭고한 사명 중의 하나는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존경받는 사람들이나 보통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마땅히 예수님과 같이 죄에 빠진 사람들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죄인들을 예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하는 일도 계속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정죄하고 교제하는 일을 무조건 금하는 것은 바리새인들과 같이 소극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처럼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하며, 또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우리는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항상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세력에 정복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믿음으로 죄인들에게 다가가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능히 죄의 세력을 극복하고 죄인들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마 9:14-17)
우리는 앞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게 된 두 가지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선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때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교제가 금지된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부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교제가 금지된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할 본문에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충돌하게 된 세 번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건의 시작은 금식 문제로 인해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과 여러 가지 문제로 충돌을 경험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새로 시작될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낡은 종교 형식에 억지로 짜 맞추려고 하면 둘 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금식에 대한 질문(마 9:14, 막 2:18, 눅 5:33)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마 9:14)"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혹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막 2:18)"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 5:33)."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일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인기를 얻는 것에 대해서 시기하고 있었습니다(요 3:26).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해서 비평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어느 날 그들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 데, 어찌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과 기도를 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원래 구약 성경에서 금식을 명한 것은 유대인들이 매년마다 정기적으로 지키는 대속죄일이었습니다(출 20:10, 레 23:26-32, 민 29:9-11).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속죄일에 죄를 회개하면서 금식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금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1) 애도의 표시(삼하 1:12), 2) 국가적 재앙을 만났을 때(느 1:4), 3) 죄에 대한 회개(왕상 21:2), 4) 자발적인 금식. 이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날에 매년마다 4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1) 4월 17일: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다가 징계 받은 일을 잊지 않기 위한 금식. 2) 5월 9일: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날을 잊지 않기 위한 금식. 3) 7월 3일: 바벨론이 세운 총독(그달랴)이 살해된 날을 기억하는 금식(왕하 25:25). 4) 10월 10일: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공략한 날을 기억하며 금식(렘 52:14).
유대가 바벨론에 포로가 된 후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은 금식을 공로를 쌓는 일로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금식은 점점 종교적인 가치가 약해지고 형식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포로 시기와 그 이후의 선지자들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금식 태도를 종종 지적했습니다. 이때에 선지자들은 참된 금식은 음식을 먹지 않는 것보다 죄를 회개하고 떠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슥 7:5 이하). 1년에 4번씩 하는 금식 기도의 관습은 예수님께서 살았던 1세기에도 계속되었습니다(슥 7:5, 8:19).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일로 정하고 금식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들은 경건과 자기 헌신을 위해서 매주 2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하는 날이 올 수 있도록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금식하는 날이 늘어나면서 금식 행위는 점차 강제적이고 형식적이며, 또 과시용으로 행해지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반대한 금식 행위는 바로 이러한 형식적인 금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금식을 하셨지만, 그것은 자발적인 영적 훈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마 4:2, 6:16-18). 그러나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세례요한과 바리새인들이 1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하는 금식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금식 대신 종종 잔치에 참석해서 연회를 즐겼습니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이러한 일에 대해서 불만을 품고 있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왜 정기적인 금식에 참여하지 않느냐?고 묻게 되었습니다.
2. 첫 번째 비유(1): 결혼식 비유(마 9:15, 막 2:19-20, 눅 5:34-3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마 9:15)."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도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막 2:19-20)."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눅 5:34-35)."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들어서 금식 문제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결혼식을 예로 들어서 지금은 자신과 제자들이 금식할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한 손님들은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을 하지 않습니다. 결혼식은 큰 경사이며 중요한 축제입니다. 만일 하객들이 결혼식장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금식을 하면 신랑 신부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결혼식 잔치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사람들에게 하늘의 온갖 비밀과 축복들을 소개하셨습니다. 이때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때로서 인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쁜 때였습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고 축하하며 그 말씀을 듣고 베푸시는 놀라운 일들을 기쁘게 반응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에 예수님은 제자들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즐겁게 지내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이때에 금식하며 어두운 얼굴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원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을 때에 제자들이 금식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시 후에 제자들이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올 것인데, 그 때에는 자기 제자들도 세례요한의 제자들처럼 금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곧 인류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예수님은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서 심한 매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슬픔 속에 금식하게 될 것입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실 때까지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부터는 다시 기쁨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 시대에 교회들에게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들과 함게 하시는 복음의 시대에는 슬픔과 찡그린 얼굴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때때로 죄를 회개하거나 영적인 훈련을 위해서 금식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한 이유 없이 성령 시대에 일부러 금식을 습관화 하거나 고행적인 삶을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3. 두 번째 비유: 옷감 비유(마 9:16, 막 2:21, 눅 5:3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마 9: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막 2:21)."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라.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눅 5:36)."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신 비유는 옷감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은 새 옷(카이논; 질적으로 새로운 옷)에서 옷감을 오려내서 헌 옷(파라이온; 사용하여 닳아 없어진 옷) 위에 깁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이렇게 하면 새 옷과 헌 옷을 모두 다 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옷은 새로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헌 옷은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따랐던 옛 종교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옛 종교 형식에 맞추려고 하면 둘 다 불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실 새로운 하나님 나라 운동은 구약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패러다임으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옛 생각과 사고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참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스스로 모순에 빠져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머물게 될 것입니다.
4. 세 번째 비유: 술과 부대(마 9:17, 막 2:22, 눅 5:37-39)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막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눅 5:38-39)."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해주신 세 번째 비유는 포도주와 포도주 부대에 대한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은 "낡은 술 부대에 새 술을 담는 사람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면 새 술이 발효되면서 낡은 부대가 터져서 술과 자루를 모두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22).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새 포도주"(네온; 신선한, 완전히 발효되지 않은 포도주)로 비유하셨고, 종교지도자들이 주장해 온 옛 종교를 "낡은 부대"(파라이우스; 낡아서 부서지기 쉬운 부대)로 비유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옛 언약의 전통을 따라서 기계적인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한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께서 오시기 전에 백성들을 회개시켜서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회개를 위한 금식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께서 오신 후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약속이 성취된 예수님의 때에는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고와 행동 양식이 필요했습니다. 이 시대에는 예수님에 의해 죄와 사망이 세력이 무너지고 모든 죄가 용서를 받는 시대였습니다. 또한 이 시대는 죄에 대해 패배하던 성도들이 성령님을 통해서 승리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금식보다 축제가 어울리는 시대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요구하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고행보다 기쁨과 축제의 삶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대는 성령님을 통해 자원하여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새로운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애를 쓰는 시대와는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고와 기치관이 필요했습니다. 새 시대는 그 시대에 맞는 사고와 행동방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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