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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 1-18장 핵심 연구

by 은총가득 2020. 9. 6.

마태복음 개요

 

1. 왕의 출현 / 마 1-10장

 

“천국이 가까웠느니라!”(3:2/4:17/10:7)

 

왕의 인성/1-4장

(1)그의 계보와 탄생/1-2장

(2)그의 사자(使者)/3장

(3)그의 시험받으심과 초기 사역 /4장

왕이 제시하는 원리/5-7장

왕의 능력/8-10장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연속적인 기적들

 

2. 왕에 대한 반역 / 마 11-13장

 

그의 사자를 거절함/11장 1-19절

그의 행사가 부정됨/11장 20-28절

그의 원리가 거부됨/12장 1-21절 이 사건들은 모두 하루 동안

그의 인격이 공격됨/12장 22-50절 에 발생하였으며 그의 사역에

결과: 왕국에 대한 비유/13장 있어 하나의 위기가 되었다.

 

3. 왕의 은거 / 마 14-20장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제자들을 준비시키심

 

베드로의 고백 이전/ 14장 1절-16장 12절

베드로의 고백-교회/ 16장 13-28절

십자가에 달리실 일에 대한 첫번째 언급(“이 때로부터...”)/16장 21절

베드로의 고백 이후/ 17-20장

십자가에 달리실 일에 대한 두번째 언급/17장 22-23절

십자가에 대한 세번째 언급/20장 17-19절

 

4. 왕에 대한 거절 / 마 21-27장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21:43)

11-13장의 반역이 공개적인 거절로 나타남

 

유대인에 대한 그의 공개적인 출현/21장 1-16절

종교 지도자들과의 갈등/21장 17절-23장 39절

장차의 왕국에 대한 그의 예언/ 24-25장

그의 고난당하심과 죽으심/ 26-27장

 

5. 왕의 부활/ 28장

 

 

마태복음 서론

 

1. 다른 복음서들과의 관계

 

마태복음은 유대적이며, 그리스도를 왕으로 제시한다(“다윗의 자손”/마 1:1).

마가복음은 로마적이며, 그리스도를 종으로 나타낸다.

누가복음은 헬라(그리이스)적이며, 그리스도를 완벽한 인간의 아들로 제시한다.

요한복음은 그 호소력에 있어 우주적이며, 그리스도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한다.

 

2. 마태복음에 나타난 유대적인 특징

 

레위라고 불리우는 유대인 세리(세금 징수자)에 의해 기록되었다(마 9:9-13/막 2:13-17/눅 5:27-32).

 

그 위치상 구약과 신약 사이의 교량적 역할을 한다.

구약 인용이나, 구약의 사건과 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구약 인용이 53회, 구약 구절들을 언급한 것이 76회로, 도합 129회나 구약이 마태복음에서 사용되었다. 구약 39권 중에서 25권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루어지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마 1:22/마 2:15/마 2:17/마 2:23 등).

 

그리스도가 자주 “다윗의 자손”으로 불리워졌다(마 1:1/마 9:27/마 12:23 등).

 

“천국, 하늘나라”에 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으며, “천국 복음”이라 한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이 단어는 엄밀한 의미에서 유대적인 개념이다.

 

다른 복음서에 실려 있지 않는 마태복음의 자료들은 유대적인 특징들을 보여 준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계보(마 1:1-17), 요셉에 대한 자료(마 1:18-25),

 

“이스라엘 자녀의 잃어버린 양”에 대한 제자들의 전도(10장), 바리새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공박(23장), 20-22, 25장에 사용된 몇 가지의 비유들이 포함된다.

 

3. 마태복음의 기본적인 주제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는 달리, 연대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마태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이시며, 자기 백성에게 거절당하시고 온 세상을 위하여 못박히셨고, 지금 하늘에 살아 계시다는 한 가지 특별한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생애로부터 자료를 추출하여 배열해 놓았다.

 

1-10장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오랫동안 기다려 온 유대인의 왕이심을 친히 드러내신다. 구약의 예언대로 탄생하셨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사자에 의해 알려졌으며, 그가 하시리라고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그 일들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셨다.

 

11-13장에서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에게 반역하였다. 그의 사자인 세례(침례)요한이 체포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마귀에 의한 일들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제시한 원리를 따르는 대신 인간이 만든 그들의 전통을 고집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셨으나 그 성들은 그를 거절하였다. 그 결과,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로 돌아 서셨고(“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 천국에 대한 비유를 베풀어주셨다(13장). 이 비유들에서 주님은 천국이 이 시대 동안 이 땅에서의 무엇과 같은지를 묘사하신다.

 

14-20장에서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은거하시며 십자가라는 큰 사건에 대해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물론, 주님은 공적 사역을 계속하고 계셨으나, 이 기간 동안은 특별히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의 위대한 믿음의 고백과 교회에 대한 첫 언급을 보게 된다.

 

21-27장에서 왕은 공개적으로 배척당하신다. 반역으로 시작된 것이 이제는 적개심이 되어 십자가형으로 치닫게 된다. 이 기간 동안에 주님은 종교적인 지도자들과 잦은 마찰을 일으키셨고, 제자들에게는 미래가 어떠하겠음을 가르치셨으며, “유대인의 왕“으로 기꺼이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마지막 장은 모든 권세를 가지신 왕으로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제시한다.

 

4. 천국

 

이 말은 마태복음에서 여러 차례 사용되고 있으므로,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해야 한다.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아담을 통하여 이 땅을 다스리셨으며, 아담은 지배하도록 지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스라엘 시대에는 왕들을 통하여 통치하셨고, 이스라엘이 멸망하자, 하나님은 이방의 군주들을 통해서조차 다스리기도 하셨다(단 2:37).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유대인들에게 내어주셨다(마 4:17). 요한복음 1장 11절에 기록되기를 “자기 땅(세상)에 오매 자기 백성(사람들)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라고 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그 왕을 거절하였으므로, 그 나라를 거절한 것이 된다.

 

마태복음 13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시대의 천국을 묘사하신다. 여기에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혼합되어 있으며, 이 안에 교회가 존재한다. 이 시대의 종말이 이르면 선과 악이 분리될 것이며, 그 나라가 순전함과 의로움 가운데 이 땅에 세워질 것이다. 이 나라의 건립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4-25장에 요약되어 있다.

 

교회는 천국 내에 속해 있으며, 나라(국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내용을 교회에 적용시킨다면 혼란을 초래하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보다 넓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 순복하는 모든 이들(성도나 천사)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 하늘나라는 이 땅에 관련되어 있고 진리와 거짓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과 무관하며, 구약의 성도들과 신약의 신자를 포함한 하나님의 참된 대상만을 내포한다(눅 13:28).

 

1. 마태복음 1장 /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마태복음의 처음 열 장은 왕의 출현에 대해 보여 준다. 그는 스스로 그의 인격성(1-4장)과 그의 원칙들(5-7장), 그의 능력(8-10장)을 나타내신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이요, “다윗의 자손”으로 증명하려 한다. 첫 장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계보를 제시하고(1-17절), 그 다음으로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에 대해 알린다(18-25절). 따라서, 예수께서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시다(계 22:16). 뿌리라 함은 그가 영원한 하나님으로서 다윗을 존재케 하셨다는 뜻이며, 자손이라 함은 그가 출생을 통하여 인간으로서 다윗과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계보를 통하여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신실한 섭리를 보여 준다. 하나님은 2,000여 년 간의 인류의 역사를 내려오며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시는 일을 조정하셨고 성취하셨다. (마 1:18-25)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여 주며, 그리스도께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오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1. 신실한 하나님의 섭리 (마 1:1-18)

 

섭리란 하나님께서 환경을 조절하심으로, 인간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유력하게 시행되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사단의 공략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의 오심을 방해하려고 사단은 어떻게 역사하였던가! 아브라함의 불순종 때문에 사라를 거의 잃을 뻔 함으로 약속된 씨를 파멸시킬 뻔하였고(창 12:10-20), 한 때는 어린 요아스를 제외한 모든 왕족이 살해되었었다(왕하 11:1-). 이 계보는 “막연한 이름들의 목록”이 아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통로인 아브라함의 자녀를 보존해 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록이다.

 

마태복음에 제시된 계보는 법적인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법률상의 아버지인 요셉의 계보이며, 누가복음에는 마리아의 계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둘 다 다윗의 자손이다.

 

이 명단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다. 여기에 기록된 네 여인의 이름, 즉 다말(3절/ 창 38장)과 라합(5절/ 수 2:1-/히 11:31)과 룻(5절/ 룻기), 그리고 밧세바(6절/ 삼하 11:1-)를 눈여겨보라. 또한 마리아도 언급되어 있는데, 이 여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예증한다.

 

다말-매음의 죄가 있었으나, 하나님은 그녀를 그리스도의 조상의 명단에 오르게 하셨다.

라합-창기이며 이방 여인이었으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룻-모압인, 곧 이방인이었다. (신 23:3-6)절에 따르면, 그녀는 10대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었다.

밧세바-다윗의 경악할 범죄에 가담한 여자였으나, 하나님은 그녀를 용서하시고 솔로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조상 중의 하나가 되도록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갈보리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 안에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고 그의 가족으로 삼으셨다!(엡 2:11-13/요일 3:1-3)

 

물론 이 계보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몇몇 이름이 빠져 있는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녀들이 명단을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중요치 않은 이름들을 제외시키는 것이 상례였다. 또한 14대씩 세 부분으로 묶음으로써 암기하기에도 쉬웠다. 1장 8절에서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가 빠져 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이 아합의 사악한 딸인 아달랴와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살아 있는 유대인 중에는 법적인 족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다. 모든 기록이 주후 70년, 성전이 파괴될 때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날 다윗의 보좌에 대한 권리를 증명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유일한 유대인이다.

 

2.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 (마 1:18-25)

 

유대인들 간에 “약혼식”(또는 정혼)은 결혼과 마찬가지로 구속력이 있었다. 요셉이 마리아의 형편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자연적으로 그녀가 그에 대해 불성실하였다고 추정하였다. 그의 신중함에 유의하자. “이 일을 생각할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내기를 더디하고” 문제를 사려깊게 생각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잠 21:5).

 

신 22:1-/신 23:1-/신 24:1- 절에 따르자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다. 나타난 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이것을 실행하지 않고 있었으며, 그 대신 불성실한 짝과 이혼하였다.

 

요셉이 꿈에 보인 하나님의 메시지를 믿는 데에는 대단한 믿음이 요구되었다. 하나님과 마리아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난받기를” 작정하게 만들었다. 그의 이웃들이 어떻게 말했을지 상상해 보라! 요한복음 8장 41절에서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간음에 의해 태어난 것으로 비방하였음을 시사한다. 사단은 항상 동정녀 탄생의 진리를 공격해 오고 있는데, 이는 그로써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성경의 진리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세주”라는 뜻으로서, “여호수아”라는 히브리 이름을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두 사람의 “여호수아”가 잘 알려져 있는데,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군인 여호수아와(여호수아서 참조), 스가랴서에 언급된 대제사장 여호수아이다(슥 2:1-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대장되시며 우리를 승리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또한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사야 7장 14절의 예언을 성취한다. 이사야 7장을 주의깊게 읽어보라. 아하스는 수리아의 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에게 공격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아사야를 보내어 아하스를 격려하셨고(1-9절) 아하스에게 어떠한 징조를 구하라고 지시하셨다. 아하스는 신앙심이 깊은체하며 징조를 구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그에게 뿐 아니라 “다윗의 집”에 징조를 주신다(마 7:13).

 

그 징조는 처녀 어머니에게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을 낳게 하는 것이었다. 이 징후는 그 때의 아하스에게는 아무런 관계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8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야의 아들을 사용하셔서 이 징조를 아하스에게 주신다(주의/ 사 7:14 에 나오는 히브리어 단어와 마 1:23 에 나오는 헬라어단어는 처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른 뜻은 없다.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의심하는 성경 번역판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요셉의 즉각적인 순종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24절). 그는 마리아를 순전하게 보존하는 일에 조심스러웠다.

 

성경에는 출생에 대하여 네 가지 방법이 나와 있다.

남자나 여자없이 태어남-아담의 경우로, 진흙에서 만들어짐.

남자는 있으나 여자가 없이 태어남-하와의 경우로, 아담의 옆구리로부터 만들어짐.

남자와 여자가 있어 태어남-모든 사람들의 경우.

여자는 있으나 남자는 없이 태어남-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처럼 이 땅의 어머니는 있으나 이 땅의 아버지는 없음.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죄없는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눅 1:1-). 그는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존재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어머니와 인간의 아버지에게서 태어날 수는 없으셨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이전에 결코 존재한 일이 없는 아이들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처녀 탄생을 부인하는 현대주의자들은 주님의 영원한 신성과 하나님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루어지다”(22절)는 단어는 본 서의 저자인 마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다. 그는 예수께서 왕에 관한 구약의 주요 약속들과 예언들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 실천적인 교훈

하나님은 역사를 조절하고 계신다. 수천 년의 인간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오심을 주도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 밖에 있었던 죄인들의 구원을 가능케 했다.

중요한 결정을 하기에 앞서 생각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하나님이 당신을 인도하시게 하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즉시로 순종하라.

 

2. 마태복음 2장 / 그리스도의 탄생

 

마태는 처음 10장까지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의 출현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1장과 2장에서는 구약 구절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나타내며 왕의 족보와 출현을 기록한다.

 

3장에서는 그의 “선두 주자”인 세례(침례)요한을 통하여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한다. 이 장은 세례(침례)요한(1-6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7-12절), 예수님(13-17절)의 출현을 보이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왕의 선두 주자, 왕의 적, 왕 자신을 보게 된다.

 

1. 세례(침례)요한의 출현 (마 3:1-6)

 

1) 그의 메시지(1-2절)-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제시되고 있음을 명심하자. 왕의 선두 주자로서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하고(마음을 변화시킴) 왕을 맞을 준비를 할 것을 요청한다. 예수께서도 이 메시지를 설교하셨고(4:17), 제자들도 그러하였다(10:7). 그 백성이 왕을 거절하자 왕국이 그들에게서 떠나갔다(21:42-43).

 

2) 그의 권위(3절)-

요한은 이사야 40장 3절에 나오는 약속을 성취하였다. 그는 마지막 구약의 선지자였다(눅 16:16). 이 민족은 400년 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3) 그의 인격(4절)-

그는 겸손하였고 행동과 옷 입는 것이 시골뜨기 같았다. 그의 옷은 엘리야의 옷을 상기시켜 준다(왕하 1:8). 말라기 4장 5-6절에 보면 하나님은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을 약속하셨다.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그가 엘리야인지 아닌지를 물었는데(요 1:21) 요한은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왕을 영접했더라면 요한은 오기로 된 그 엘리야가 되었을 것이다(마 17:9-13/ 마 11:14).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엘리야의 능력으로 왔다(눅 1:17). 말라기 3장 1절에 대한 본 서의 설명을 참조하라.

 

4) 그의 세례(침례/5-6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례(침례)가 아니었고(행 19:1-7) 회개의 세례(침례)였다(11절). 그의 세례(침례)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21:25-32). 즉, 그 민족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함과 그들의 마음에 왕의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유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세례(침례)를 베풀었는데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침례)를 주었던 것이다.

 

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출현 (마 3:7-12)

 

1) 그들의 성격(7-8절)-

바리새인들은 문자에 얽매여 율법을 무거운 짐으로 바꾸어 놓은 사람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어서 구약 중 많은 부분을 부정하였다(행 23:8 참조). 세례(침례)요한과 예수님에 의해서(12:34/23:33) 바리새인들은 세 번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리워졌다. 사단은 뱀이며 이 사람들은 사단의 자녀들인 것이다(요 8:44).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적이며, 마태복음에 자주 나오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시 결탁하는 것을 볼 수 있다(16:1/ 22:23/ 22:34).

 

2) 그들의 필요(9-12절)-

그들은 아브라함과 인간적인 연관을 맺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다(롬 9:6-/갈 3:7).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처럼 그들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뿌리에 닿아 계신다(10절). 이는 뿌리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8절). 요한이 어떻게 예수를 소개하며 오직 그분만을 찬미하는지 눈여겨보자.

 

11절에는 두 가지 세례(침례)가 나오는데 성령으로 세례(침례)받는 것(행 1:5 에서 오순절 날 성취됨)과 주님의 재림시에 성취될 불의 세례(침례)가 그것이다(말 3:1-2/눅 7:27 참조). “...과”라는 작은 단어 하나가 오랜 세월을 함축하고 있다. 오순절 날에도 불이 있었는데, 신자들의 위에 불의 혀 같은 것이 나타났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마 3:13-17)

 

1) 예수님과 요한(13-15절)-

주께서 세례(침례)를 받으러 왔다고 언급되어 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왜 세례(침례)를 받았을까? 우리는 다음의 여섯 가지 이유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①의무-

“모든 의로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요 8:29).

 

②헌신-

구약의 제사장은 몸을 씻은 후에 기름부음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물의 세례(침례)를 받은 후에 성령을 받으셨다(출 29장 참조).

 

③추천-

예수께서는 요한의 사역을 인준하셨으며, 사람들에게 요한의 말을 듣고 순종하라는 의무를 부여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을 거절하였다.

 

④선언-

이것은 요한이 유대 민족에게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소개한 일이다(요 1:31 참조).

 

⑤예상-

이 물세례(침례)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받으실 고난의 세례(침례)를 기대하게 했다(눅 12:50).

 

⑥동일시-

예수께서는 자신을 죄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하셨다. 이 일이 있은 직후에 성령은 그를 광야로 몰아 가셨다. 여기서 이 민족의 죄를 광야로 가지고 가는 “속죄양”의 상징을 볼 수가 있다(레 16:1-10).

 

예수께서 물에 잠기셨다는 데는 아무 의심할 바가 없다. 헬라어의 “세례(침례)”란 단어와 “물에서 나오실 때”라는 설명이 이것을 입증한다. 요한은 세례(침례)를 줄 때 “많은 물”을 필요로 하였다(요 3:23). 뿌리거나 붓거나 했었다면 많은 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예수님과 성령(16절)-

이것은 요한이 그리스도를 알아보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한 약속의 표시였다(요 1:31-34). 예수님과 요한이 육신적으로 친척이었으나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했던 것 같으며, 또는 육신적으로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확인을 원했을 것이다. 성령의 상징이 비둘기라는 점은 중요하다. 비둘기는 깨끗한(정결한) 새이며, 사랑에 있어 짝에게 매우 신실하고 평화로우며 점잖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나셨는데(눅 1:34-35), 또한 그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었다.

 

3) 예수님과 성부(17절)-

이것은 성부께서 하늘로부터 아들에게 말씀하신 세 경우 중에서 첫번째이다(마 17:5/요 12:28). 우리는 여기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알게 된다. 아들은 세례(침례)를 받았고 성령은 비둘기와 같이 임하였으며, 아버지는 하늘에서 말씀하셨다. 주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실 때 성부께서 아들을 추천하고 계시며, 주님이 그 십자가로 접근해 가실 때(마 17:5) 다시 성부 하나님의 추천을 받는다.

 

▣ 실천적인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순종하지 않았으며, 심판이 왔다.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외적인 도덕이나 종교와,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의사이에는 방대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종교나 인간적인 관계를 의존해서는 안된다(요 1:12-13).예수께서는 길을 가리키셨으며 순종함의 본이 되셨다. 그는 우리에게 세례(침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고 친히 세례(침례)를 받으셨다(마 28:19). 우리도 순종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현대의 거짓 이단들은 이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세례(침례)요한, 성령, 성부 하나님은 본 장에서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고 있다.

 

 

 

마태는 처음 10장까지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의 출현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1장과 2장에서는 구약 구절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나타내며 왕의 족보와 출현을 기록한다.

 

3장에서는 그의 “선두 주자”인 세례(침례)요한을 통하여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소개한다. 이 장은 세례(침례)요한(1-6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7-12절), 예수님(13-17절)의 출현을 보이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우리는 여기서 왕의 선두 주자, 왕의 적, 왕 자신을 보게 된다.

 

1. 세례(침례)요한의 출현 (마 3:1-6)

 

1) 그의 메시지(1-2절)-

왕국이 유대인들에게 제시되고 있음을 명심하자. 왕의 선두 주자로서 요한은 백성들에게 회개하고(마음을 변화시킴) 왕을 맞을 준비를 할 것을 요청한다. 예수께서도 이 메시지를 설교하셨고(4:17), 제자들도 그러하였다(10:7). 그 백성이 왕을 거절하자 왕국이 그들에게서 떠나갔다(21:42-43).

 

2) 그의 권위(3절)-

요한은 이사야 40장 3절에 나오는 약속을 성취하였다. 그는 마지막 구약의 선지자였다(눅 16:16). 이 민족은 400년 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3) 그의 인격(4절)-

그는 겸손하였고 행동과 옷 입는 것이 시골뜨기 같았다. 그의 옷은 엘리야의 옷을 상기시켜 준다(왕하 1:8). 말라기 4장 5-6절에 보면 하나님은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을 약속하셨다.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그가 엘리야인지 아닌지를 물었는데(요 1:21) 요한은 아니라고 부정하였다.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그들의 왕을 영접했더라면 요한은 오기로 된 그 엘리야가 되었을 것이다(마 17:9-13/ 마 11:14). 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엘리야의 능력으로 왔다(눅 1:17). 말라기 3장 1절에 대한 본 서의 설명을 참조하라.

 

4) 그의 세례(침례/5-6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례(침례)가 아니었고(행 19:1-7) 회개의 세례(침례)였다(11절). 그의 세례(침례)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21:25-32). 즉, 그 민족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기 위함과 그들의 마음에 왕의 오심을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유대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세례(침례)를 베풀었는데 요한은 유대인들에게 세례(침례)를 주었던 것이다.

 

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출현 (마 3:7-12)

 

1) 그들의 성격(7-8절)-

바리새인들은 문자에 얽매여 율법을 무거운 짐으로 바꾸어 놓은 사람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은 “자유주의자들”이어서 구약 중 많은 부분을 부정하였다(행 23:8 참조). 세례(침례)요한과 예수님에 의해서(12:34/23:33) 바리새인들은 세 번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리워졌다. 사단은 뱀이며 이 사람들은 사단의 자녀들인 것이다(요 8:44).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적이며, 마태복음에 자주 나오고 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시 결탁하는 것을 볼 수 있다(16:1/ 22:23/ 22:34).

 

2) 그들의 필요(9-12절)-

그들은 아브라함과 인간적인 연관을 맺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다(롬 9:6-/갈 3:7).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처럼 그들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뿌리에 닿아 계신다(10절). 이는 뿌리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8절). 요한이 어떻게 예수를 소개하며 오직 그분만을 찬미하는지 눈여겨보자.

 

11절에는 두 가지 세례(침례)가 나오는데 성령으로 세례(침례)받는 것(행 1:5 에서 오순절 날 성취됨)과 주님의 재림시에 성취될 불의 세례(침례)가 그것이다(말 3:1-2/눅 7:27 참조). “...과”라는 작은 단어 하나가 오랜 세월을 함축하고 있다. 오순절 날에도 불이 있었는데, 신자들의 위에 불의 혀 같은 것이 나타났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 (마 3:13-17)

 

1) 예수님과 요한(13-15절)-

주께서 세례(침례)를 받으러 왔다고 언급되어 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왜 세례(침례)를 받았을까? 우리는 다음의 여섯 가지 이유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①의무-

“모든 의로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요 8:29).

 

②헌신-

구약의 제사장은 몸을 씻은 후에 기름부음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물의 세례(침례)를 받은 후에 성령을 받으셨다(출 29장 참조).

 

③추천-

예수께서는 요한의 사역을 인준하셨으며, 사람들에게 요한의 말을 듣고 순종하라는 의무를 부여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을 거절하였다.

 

④선언-

이것은 요한이 유대 민족에게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소개한 일이다(요 1:31 참조).

 

⑤예상-

이 물세례(침례)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받으실 고난의 세례(침례)를 기대하게 했다(눅 12:50).

 

⑥동일시-

예수께서는 자신을 죄 있는 사람들과 동일시하셨다. 이 일이 있은 직후에 성령은 그를 광야로 몰아 가셨다. 여기서 이 민족의 죄를 광야로 가지고 가는 “속죄양”의 상징을 볼 수가 있다(레 16:1-10).

 

예수께서 물에 잠기셨다는 데는 아무 의심할 바가 없다. 헬라어의 “세례(침례)”란 단어와 “물에서 나오실 때”라는 설명이 이것을 입증한다. 요한은 세례(침례)를 줄 때 “많은 물”을 필요로 하였다(요 3:23). 뿌리거나 붓거나 했었다면 많은 물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예수님과 성령(16절)-

이것은 요한이 그리스도를 알아보도록 하나님께서 보내시기로 한 약속의 표시였다(요 1:31-34). 예수님과 요한이 육신적으로 친척이었으나 오랫동안 서로 보지 못했던 것 같으며, 또는 육신적으로 알고 있었다 할지라도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확인을 원했을 것이다. 성령의 상징이 비둘기라는 점은 중요하다. 비둘기는 깨끗한(정결한) 새이며, 사랑에 있어 짝에게 매우 신실하고 평화로우며 점잖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나셨는데(눅 1:34-35), 또한 그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었다.

 

3) 예수님과 성부(17절)-

이것은 성부께서 하늘로부터 아들에게 말씀하신 세 경우 중에서 첫번째이다(마 17:5/요 12:28). 우리는 여기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알게 된다. 아들은 세례(침례)를 받았고 성령은 비둘기와 같이 임하였으며, 아버지는 하늘에서 말씀하셨다. 주님이 공생애에 들어가실 때 성부께서 아들을 추천하고 계시며, 주님이 그 십자가로 접근해 가실 때(마 17:5) 다시 성부 하나님의 추천을 받는다.

 

▣ 실천적인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조심스럽게 대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순종하지 않았으며, 심판이 왔다.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외적인 도덕이나 종교와,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의사이에는 방대한 차이가 있다. 우리는 종교나 인간적인 관계를 의존해서는 안된다(요 1:12-13).예수께서는 길을 가리키셨으며 순종함의 본이 되셨다. 그는 우리에게 세례(침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고 친히 세례(침례)를 받으셨다(마 28:19). 우리도 순종하여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현대의 거짓 이단들은 이 사실을 부인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확실히 하고 있다. 세례(침례)요한, 성령, 성부 하나님은 본 장에서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고 있다.

 

 

마태는 우리에게 왕의 인성을 소개하고 있다. 왕은 다른 사람들을 통치하기 이전에 자신을 다스릴 수 있음을 입증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사울이 그의 왕권을 잃은 이유도 여기 있다. 그는 자신을 다스려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없었다). 4장에서는 왕이 “이 세상의 왕”인 그의 적을 만나 패배시키신다.

 

1. 모형적 메시지

 

이 시험에서 그리스도는 아담과 다윗의 두 가지 구약의 모형을 이루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아담(고전 15:45)

(1)아담은 아름다운 동산에서 시험을 받았고, 그리스도는 외로운 광야에서 받으셨다.

(2)아담은 시험을 받았을 때 최상의 조건에 있었고 그리스도는 굶주리셨다.

(3)아담은 옛 창조의 왕이었으며(창1:26) 그리스도는 새로운(영적) 창조의 왕이시다(고후5:17).

(4)아담은 범죄하여 지배권을 상실하였으나(히 2:6-9) 그리스도는 순종함으로 아담이 잃은 것을 되찾으셨다(롬 5:12-21).

(5)아담은 패배했으며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고, 그리스도는 승리하셨으며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다윗의 자손(마 1:1)

(1)다윗과 그리스도는 베들레헴 출신이다.

(2)둘 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기름부음을 받았다.

(3)둘 다 “추방”을 당하였으며 박해를 받았다.

(4)골리앗은 이스라엘을 40일간 조롱하였으며 또한 사단은 그리스도를 40일간 공격하였다.

(5)다윗은 거인을 죽이는 데 다섯 개의 돌 중에서 한 개를 사용하였다. 그리스도는 다섯 책(모세의 율법서들) 중에서 한 권(신명기)을 사용하여 사단을 물리치셨다.

(6)골리앗은 강한 사람이었고, 사단은 강한 사람에 비교된다(마 12:22-30).

(7)다윗은 거인의 검으로 그의 머리를 잘랐고, 그리스도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을 이기셨다(히 4:12).

 

2. 교리적인 메시지

 

1) 첫번째 시험-

사단은 몸 곧 육신의 욕망에 호소하고 있다. 굶주림 자체에 죄가 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사단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배고프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비밀을 털어놓지 않고 계신다”고 생각하기를 원한다(창 3:5 /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소. 사랑한다면 더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실텐데!”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그의 거룩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패배가 된다. 주님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하셨다(요 8:29).

 

그리스도는 신명기 8장 3절로 이 시험에 대처하셨다. 영적인 사람을 먹이는 것은 육신을 먹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신명기 8장 1-6절을 읽고, 하나님께서는 먹고 마시는 일 같은 일상적인 일들을 통하여 우리를 시험하시고 우리를 입증하신다는 것에 유의하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서 생활하셨다. 우리도 그렇게 함이 마땅하다.

 

2) 두번째 시험-

사단은 예수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입증해 보이라고 대든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하나님의 약속들 중에서 하나를 입증해 보이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라고 사단은 말한다. 사단은 시편 91편 11-12절을 잘못 인용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돌보심을 진실로 믿는다면 뛰어 내리라. 천사들이 받쳐 줄 것이다.”라고 사단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신명기 6장 16절로 사단에게 답하셨다.

 

사단은 “네 모든 길에”(11절)라는 중요한 구절을 빠뜨렸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길을 갈 때에 약속을 지키신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단은 언제나 성경에서 무엇을 첨가하거나 삭제한다. 그는 성경을 왜곡하여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짓도록 “성경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그 조건을 모를 때는 약속들을 연관된 구절들로부터 분리시켜 이끌어 내거나, 약속들을 주장하는 일을 삼가야 하겠다.

 

성경적인 권위 없이 무슨 일을 행하는 것은 죄이다.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며,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 개입하셔서 구해내라고 “감히 시키는” 것이 된다. 고의적인 불순종은 징계를 자초하는 것이다.

 

3) 세번째 시험-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왕이 될 수 있는 “쉬운 길”을 제안한다. 사단은 이 세상의 왕으로서(요 14:30) 왕국들 중의 일정한 양을 다스리도록 하나님께로부터 허락을 받고 있다. 시편 2편 6-9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미 이 왕국들을 그리스도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시편 2편 6-7절이 그리스도의 세례(침례)를 돌이켜 보게 함에 유의하자(“너는 내 아들이라...”).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왕국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다. 사단은 십자가로부터 그를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명기 6장 13절로 사단을 패배시키셨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을 우리는 섬긴다. 만일 돈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돈을 위하여 살고 돈에 순종한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하나님께 순종한다. 두 가지를 다할 수는 없다(마 6:24).

 

미래의 어느 날 사단은 왕국들을 적그리스도에게 넘겨 줄 것이다(계 13장).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 왕국들을 취하러 오실 것이며(계 19:11-21), 1,000년간 다스릴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3. 실천적인 메시지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으며 인간으로서 사단을 이기셨다. 이러하므로 그는 우리는 완전한 대제사장이신 것이다(히 4:15/히 2:17-18). 우리는 승리를 보장하는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주장할 수 있다.

 

예수께서 친히 본을 보이셨듯이 우리는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친다(엡 6:17-18). 말씀을 알고,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셨다(마 4:1). 성령은 사단과 그의 여러 가지 간계를 이기게 하신다.

 

사단은 성경을 알고 있다. 누군가 또는 누군가의 사역이 성경을 잘못 인용하거나 하나님이 의미하지 않으신 바를 말할 때는 이를 알아차려야 한다.

 

지리적인 위치는 마귀를 방어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그는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시험하였고 성전에서도, 높은 산에서도 시험하였다. 사단은 세상 어느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우리를 시험할 수 있다.

 

한 단계 한 단계 시험이 변화되는 것을 눈여겨보자. 첫번째 시험은 이성적인 시험이었고 두번째는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었으며, 세번째는 노골적으로 반대할만한 부당한 것이었다. 이처럼 죄의 성질은 점진적이다(시 1:1).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하여 우리는 베드로전서 5장 9절과 야고보서 4장 7절을 주장할 수 있다.

 

5. 산상 수훈

 

산상 수훈 서론

 

성경에서 산상 수훈 만큼이나 오해가 많고 잘못 적용하는 구절도 흔치 않다. 대체로 마태복음 5-7장에서 한 구절이나 문단을 택하고는 전후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 구절들을 여러 부분들로 나누어서 공부하기 전에 전체적인 시야로 이 중요한 설교를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 주제 :

5장 17-20절에서 그리스도는 주제로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의와 반대되는 “참된 의”를 말씀하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일들에 있어서 자신들을 백성들의 본보기와 모범으로 삼고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규율을 정하고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을 결정하였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미워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 설교에서 그들의 천박함과 속임수를 노출시켰기 때문이다(마 23 참조).

 

▣ 목적 :

그리스도께서 이 설교를 하신 데에는 세 가지 근본적인 목적이 있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된 의와는 반대되는 참된 의가 무엇인지를 그의 추종자들에게 말하기 위함.

주님의 나라의 법, 곧 사람들의 생활을 다스리는 데 사용하는 영적인 원리들을 설명하기 위함.

주님의 메시지를 구약과 또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전통과 관련시키기 위함.

 

▣ 세 가지 실수들 :

많은 사람들이 산상 수훈을 연구하면서 다음의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또는 모두)를 실수한다.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인데도 민족적으로 적용시킨다.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적용시킨다.

사실은 성령이 신자의 생활에서 역사하실 때 그리스도인이 어떠한가를 설명하는 것인데, 이것을 순종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법”으로 삼는다(롬 8:1-4).

 

▣ 산상 수훈과 바리새인들과의 대조점

 

산상수훈 바리새인

의(義)란 우선 내적이며 의는 외적으로 표현되는 행위이다.

다음으로 외적인 것이다.(5:1-16) (마 23:23-28/눅 11:37-41)

죄는 마음의 문제이다. 죄는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외적으로

행위문제만은 아니다(5:17-48) 나타난 행위에 있다.(눅18:9-14/ 막2:13-28)

의는 하나님께 보여지는 것이며, 인간들에게 보이기를 원한다.(마 23:2-12)

인간의 칭찬을 위한 것은 아니다.( 6:1-18)

하나님이 우선적이며, 재물은 둘째이다.( 6:19-31) 재물을 탐한다.(눅 16:14 이하)

비판하지 말라( 7:1-12). 맹렬히 비판한다.(눅 18:9-/마 12:22-)

 

▣ 오늘날의 적용 :

산상 수훈이 오늘날 우리를 위한 것인가? 마태복음이 “천국 복음”이기 때문에, 왕이 거절당한 일이 없는 이 나라에서는 산상 설교가 왕국시대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하는 학자들이 더러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더라면 이 법들은 실천되었을 것이다. 이들이 주님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마태복음 5-7장은 천년왕국을 기다려야 성취될 수가 있게 되었다. 마태복음의 시대 구분적인 특성을 주장하는 한편 산상수훈이 오늘날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잃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 만약 산상 수훈이 왕국시대에만 적용된다면 천년왕국에도 도적이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6:19) 거기에 바리새인들과(5:17-20) 거짓 선지자들이 있을 것인가?(7:15) 만일 사단이 천년왕국 동안에 갇히게 되어 있다면 왜 “악에서 우리를 구하옵시고...”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인가?(6:13) 천년왕국에도 금식이 있을 것인가?(6:16-18) 그리고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왜 하는 것일까?(6:10)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지도를 받는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왕국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인 기반을 잊어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의 왕국이 근본적으로 영적인 바탕 위에 세워지는 것임을 알림으로써 이 설교에서 그들의 생각을 뒤엎어 놓으셨다. 이 원리들은 모든 세대에 적용될 것이다. 사실상 산상 설교에 나오는 대부분의 자료들은 교회에 보내는 서신서들에서 이러저러한 면으로 반복되고 있다! 이처럼 5-7장이 경륜에 따르는 의미를 지니는가 하면,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 산상 수훈과 구원 :

수 많은 사람들이 산상 수훈을 실천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십계명을 실천하는 것보다 산상수훈을 실천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어떤 법을 실천함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갈 2:16/갈 3:10-11). 그리고 산상 수훈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욱 엄격하다 ! 모세의 율법 아래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을 때에 죄가 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미워하는 마음은 곧 살인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음욕은 마음에서 간음을 행한 것이다.

 

팔복이 먼저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 구절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조절을 받아 마태복음 5-8장에 설명된 방법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의 종류를 설명하고 있다. 팔복에 나타나 있는 진전 과정을 눈여겨보자.

 

심령이 가난한 사람 -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을 뜻한다.

애통하는 사람 - 이것은 죄를 인하여 슬퍼하며 회개하는 것을 뜻한다.

온유한 사람 -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 하나님의 의를 갈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 - 자비로운 사람이며, 자신을 탓하고 다른 이를 탓하지 않는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 - 이것은 결과이다.

화평케 하는 사람 -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노력한다.

핍박을 받는 사람 - 경건한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산상 수훈은 성령이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산상 수훈의 근본은 갈보리이며 산상 수훈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이시다.

 

다시 말하지만 산상 수훈은 순종해야 할 명령, “그리스도인의 율법”이 아니다. 산상 설교는 주님과 함께 행하는 데서 오는 성품, 참으로 의로운 사람의 성품을 설명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설교의 “정신”이다. 문자대로 이 설교를 실천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께서 정죄하신 “바리새인의 의”로 돌아가는 것이다.

 

 

▣ 산상 수훈 개요

 

1.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신 참된 의 / 마 5장 1-48절

 

핵심 구절: “... 너희도 온전하라”(5:48)

 

적극적인 면-의는 내적인 것이다/5장 1-16절

소극적인 면-죄는 내적인 것이다/5장 17-48절

살인-간음-맹세-복수

 

2. 신자들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의 / 마 6장 1절-7장 12절

 

예배에서-하나님과의 관계 /6장 1-18절(핵심 구절/ 6:1)

헌금-기도-금식

부(富)에 있어서-세상과의 관계/6장 19-34절(핵심 구절/6:33)

행함에 있어서-인간과의 관계 /7장 1-12절(핵심 구절/7:12)

 

3. 시험으로 입증되는 참된 의 / 마 7장 13-29절

 

핵심 구절 :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20)

 

자기부인의 시험/7장 13-14절

“나는 좁은 길을 걸을 것인가?”

열매맺는 시험/7장 15-20절

“내 삶으로부터 어떤 것이 나올 것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시험 /7장 21-29절

“나는 말씀대로 행하고 있는가?”

 

6. 마태복음 5장 / 팔복

 

마태복음 5장의 첫 16절은 참 그리스도인을 설명하여 성품의 문제를 다루는데, 산상 수훈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행위를 다룬다. 성품은 언제나 행위보다 선행되는 것으로서, 그 사람의 됨됨이가 그가 하는 행위를 결정짓는다. 예수께서는 참된 의는 내적인 것이라는 점과(5:1-16) 죄 역시 내적이라는 것을(5:17-48) 보여 주신다. 이로써 주님은 거룩함이 행위로 말미암으며 죄 역시 외적인 행위라고 가르치는 바리새인의 거짓 의를 폭로하셨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생의 운명이 마음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1. 종합적으로 본 팔복-“행복의 사다리를 오르라!”

 

성경에는 “팔복”(beatitude)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이 구절들에서 “복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서 단순히 “복”을 의미한다.

이 구절들에는 진전됨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신의 죄를 느끼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종국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습과, 그에 따르는 결과를 보여 준다.

 

①심령이 가난함-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로서, 자기가 무엇인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음을 느낀다.

 

②애통함-

죄에 대한 태도로서, 죄를 슬퍼한다.

 

③온유함-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서, 교훈을 받으며 자신을 옹호하려 하지 않는다.

 

④주리고 목마름-

하나님께 대한 태도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받아들인다.

 

팔복의 나머지 부분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새 생활의 결과를 보여 준다.

 

⑤긍휼히 여김-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⑥마음이 청결함-

삶을 깨끗하게 유지함으로, 그에게 있어서 거룩함이 행복이다.

 

⑦화평케 함-

그리스도인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또한 서로 불화한 사람들에게 화평함을 가져오며, 평화의 복음을 전파한다.

 

⑧핍박받음-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핍박을 받는다.

 

이 구절들은 마음가짐에 대한 것으로서, 그의 마음에 생각하는 바, 곧 인생관이라는 점에 유의하자. 팔복은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의 태도를 보여 준다.

 

2. 개별적으로 본 팔복

 

1) 심령이 가난함-

우리는 채워지기 전에 먼저 비워야 한다. 이에 대한 반대개념은 자기만족이다. 우리의 만족은 우리 자신에 대한 만족이어서는 안 된다(고후 3:5). 세상은 자기만족을 조장하지만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가진 자에게 거하신다(사 57:15). 이 말은 거짓된 겸손이나 비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얼마나 연약하고 죄악된지를 깨닫고 자신에 대하여 온건한 마음가짐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나오는 두 사람을 비교해 보라.

 

2) 애통함-

이것은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하여 진지하게 슬퍼하는 마음가짐이다. 죄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도 무관심하다 ! 우리는 죄에 대하여 핑계를 대지만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며, 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이 세상의 슬픔에 대해서는 삼가 조심해야 한다(고후 7:8-10). 베드로는 경건한 슬픔으로 애통해 하였으며 용서를 받았으나, 유다는 후회하여(이 세상에 속한 슬픔) 자신의 생명을 끊었다.

 

3) 온유함-

온유함이란 연약함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하셨으나(마 11:29)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몰아내셨다. 모세는 온유하였으나(민 12:3) 죄인들을 심판하였으며 아론의 죄마저도 들추어 내었다. 온유함이란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은 온유함을 나타내야 할 의무가 있다(엡 4:1-2/딛 3:2). 우리는 자기의 의지를 내세우기가 쉽다.

 

4) 주리고 목마름-

참된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일들에 대한 식욕을 갖는다. 그 사람이 무엇을 먹는지 물어보면 그 사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

 

5) 긍휼히 여김(자비함)-

이것은 법률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 원리를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비로우셨으므로 우리도 자비롭게 행한다면 자비가 우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눅 16:1-13/약 2:13/잠 11:17).

 

6) 마음이 청결함-

이는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요일 1:8) 내적인 진실성을 뜻한다(시 51:6). 하나님과 세상으로 나뉘어지지 않은 단일한 마음을 의미한다.

 

7) 화평케 함-

디도서 3장 3절은 전쟁 중에 있는 세상을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발에 평화의 복음을 신고 있다(엡 6:15). 따라서 그가 어디를 가든지 평화를 가지고 가야 한다. “어떤 값을 치러서라도 평화를 얻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에 기반을 둔 평화보다는 거룩함이 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약 3:17/히 12:14). 타협이란 평화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싸우기를 좋아해서는 안 되지만 신앙을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8) 핍박을 받음-

우리는 “거짓으로” 고발을 당하도록 되어 있음에 유의하자(딤후 3:12/벧전 4:15 참조). 우리는 박해를 받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산다고 하면 박해는 오게 되어 있다. 그 보상을 눈여겨보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선지자들의 반열에 있게 되며 천국에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결론 부분에서는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소금과 빛이다. 소금은 부패한 가상에 영향을 미칠 내적인 성품을 말하는 것이며, 빛이란 하나님을 나타내게 하는 착한 행실에 대한 외적인 간증을 말한다. 우리의 임무는 우리의 생활을 순전하게 유지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이 세상에 맛을 내고 부패하지 않도록 붙들어 두며 복음이 퍼져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한 행실은 헌신의 생활을 수반해야하며, 이때에 우리의 빛이 밝게 비추이게 된다.

7. 마태복음 6장 / 기도의 모범

 

마태복음 6장은 신자의 생활에서 실천되는 참다운 의를 다룬다. 이 부분은 사실상 7장 12절까지 계속되며 신자와 예배(6:1-18), 신자와 재물(6:19-34), 신자와 행함(7:1-12)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세상과의 관계이며, 세째는 인간과의 관계이다.

 

1. 신자와 예배 (마 6:1-18)

 

인간이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는 세상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결정짓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예배를 먼저 다루신다. 핵심 구절은 6장 1절이며, 사상은 우리가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는 비밀스러워야 하며, 하나님이 보시도록 해야지 인간이 박수갈채를 보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들과, 하나님으로부터 각기 상을 받음으로써 두 가지 상을 받도록 허락지 않으실 것이다.

 

1) 구제(6:2-4)-

바리새인들은 구제하는 일을 널리 알리기를 무척 좋아하였다(막 12:38-44).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구제를 많이 했다고 말하기를 좋아한다. 만일 이것이 구제하는 동기라고 한다면 그들은 인간들의 칭찬으로 이미 보상을 받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는 상이 없을 것이다.

 

2) 기도(6:5-15)-

예수께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라고 말씀하셨으며 “만일 기도한다면...”이라고 하지 않으셨음에 유의하자. 주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기대하고 계신다. 회심한 후의 바울을 특징짓는 것은 그의 기도 생활이었다(행 22:17).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기도하는 것은 죄라고 강조하신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이다. 물론 대중 기도가 성경에서 인준을 받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대중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위선이다.

 

예수께서는 기도에 대한 일반적인 세 가지 잘못을 지적하신다. 곧,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한 기도(6:5-6)와 공허한 반복이 계속되는 기도 말(6:7-8)과 마음에 죄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6:14-15).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용서하시는 것이다(요일 1:9). 그러나 용서하지 않는 영은 우리의 기도 생활을 방해할 것이며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낼 것이다(엡 4:32/딤전 2:8/눅 8:36-50).

 

6장 9-13절에 나오는 이른바 주기도문은 암송하여 반복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주신 본보기이다. 이것은 “가족기도”이다. “우리”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 것에 유의하자.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 그의 왕국, 그의 뜻이 이 땅에서의 필요보다 앞서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 기도문은 이기적인 기도에 대해 우리를 경고한다.

 

3) 금식(6:16-18)-

참된 금식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다(욜 2:13/사 58:5). 신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금식이란 기도 및 다른 영적인 실행을 위한 준비일 뿐으로, 그것 자체가 어떤 공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2. 신자와 재물 (마 6:19-34)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는 말씀이 이 부분의 핵심 구절이다. 하나님을 우선적인 위치에 두라. 그러면 물질적인 일들은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다.

 

1) 근본 원리(6:19-24)-

그리스도께서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물질을 위하여 사는 것이 왜 어리석은지를 설명하셨다.

한 가지는 이 세상의 물질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견직물은 보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좀이 못쓰게 만든다. 녹은 금속을 못 쓰게 만들며, 도둑은 부유함을 훔쳐간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된 보물은 영원히 지속되는 천국에 투자되는 것이다. 사람이 그의 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그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다. 그가 자기의 돈과 시간을 사업하는 데 사용하고 하나님을 등한히 여긴다면 그의 마음은 그의 사업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눈”에 대한 예화로서 창세기 13장 5-18절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라. 여기서 말하는 “눈”이란 “마음에 품은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의 눈(singl eye)이란 영적인 일에 고정된 눈을 뜻한다. 이는 야고보서에 나오는 두 가지 마음과는 반대되는 것이다(약 1:8/약 4:4/약 4:8 참조).

 

23절에 나오는 “악”은 단순함의 반대 의미로서, 죄악된 입장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중적인 시각을 뜻한다. 24절에서 예수께서는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볼 수 없으며,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면서 동시에 물질적인 부를 위하여 살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부를 정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일과 잘못 사용하는 일은 경고한다(딤전 6:9-11 ,딤전 6:17-18/히 13:5/눅 16:1-31 참조).

 

2) 일상생활의 실천(6:25-34)-

그리스도께서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원리를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시키고자 하심을 암시한다. 곧, 물질에 대하여 염려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염려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임을 보여 주신다.

 

또한 생이란 음식이나 옷보다 훨씬 귀한 것들로 구성되는 것임을 상기시킴으로 우리의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도록 하신다. 예수께서는 가난하셨으나,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스러우셨던가! 바울은 그가 “가난하나, 많은 것을 이룬다”고 말했다. 누가복음 12장 13-21절은 참된 부요(영적)와 불확실한 부요(물질적)의 구별되는 점들을 말해 준다.

 

그리스도는 꽃, 풀, 새와 같은 자연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는 데에 주의를 돌리시며,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고 말씀하신다. 천부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첫자리에 모신다면 그가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실 것이다.

 

오늘날 신자들은 6장 33절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매일 처음 시작될 때 하나님을 첫자리에 모실 수 있다. 즉,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다. 또한 하나님의 전에 성실하게 출석함으로 한 주일의 첫자리에 주님을 모실 수 있다. 매 급료날에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침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을 첫자리에 모실 수 있다.

 

롯은 하나님을 떠나 결정했다가 지독한 죄를 범하며 굴 속의 어두움 가운데서 종말을 맞는다 ! 그는 살아가며 가족을 일으킬 장소를 선택함에 있어 하나님을 첫자리에 모시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찾는 물질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영적인 일들과 평행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육신을 위하여 음식물을 공급하는 것과 같이 마음에 감추어진 속 사람에게 영적인 음식을 공급해야 한다(마 4:4/벧전 3:4). 우리가 몸을 감싸는 육신의 옷으로 장식을 하듯 영의 옷으로 자신을 규모있게 입혀야 한다(골 3:7-15). 육신이 물을 마시듯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영의 생명수를 마셔야 한다(요 4:13-14/요 7:37-39).

 

마태복음 7장 / 그리스도의 말씀

 

7장의 첫 부분은 산상 수훈의 두번째 부분으로서 신자들에 의해 실천되는 참다운 의(義)를 다룬다(6:1-7:12). 6장 1-18절에서는 예배에 강조를 두고 있으며 6장 19-34절에서는 부를 강조한다. 이제 7장 1-12절에서는 그리스도인의 행실, 즉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룬다. 산상 수훈의 마지막 부분은(7:13-29) “시험으로 입증되는 참다운 의”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다.

 

1. 신자와 그 행함(7:1-12)

 

이 부분의 핵심 구절은 7장 12절이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은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가지는 관계를 지배하는 “황금률”이다. 다른 종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지만 황금률은 적극적이라는 면으로 볼 때 확실히 기독교적이다. 이 말은 우리가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흉내 내어 행할 수 있을 만한 책임을 가지고 행동하여 결국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라는 것이다(5:16).

 

이 부분은 셋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기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

 

1) 비판(1-5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람들을 평가하는 일을 피하라거나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요일 4:1-6 참조). 세상은 거짓 그리스도인들로 가득 차 있고 사단의 목회자들도 있다(고후 11:13-15).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은 경성하여 “영들을 시험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시는 것은 인간의 동기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과 정당하지 못한 비평이다.

 

주님이 눈을 상징으로 사용하고 계신 것에 유의하자. 6장 22-23절에서 그리스도는 “눈”이란 그 사람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는 영적인 견해라고 정의하셨다. 모든 신자들은 상대방의 열매를 보아서 그 사람들을 시험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7:15-20).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사람의 동기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롬 14:1-/고전 4:5 참조).

 

그리스도의 이 명령이 교회의 징계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은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직히 대면하여 증거를 검토하고 철저하게 죄를 다루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고전 5:1-/마 18:15-18). 교회에서의 징계가 성경적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데살로니가후서 3장 11-15절과 갈라디아서 6장 1-5절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들 자신의 생활을 곧게 한 후에 다른 사람들을 도울 권리가 주어진다고 말씀하신다. 그의 말씀은 형제의 생활 속에서 죄를 제거하도록 돕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죄를 살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다루듯 다른 사람들의 죄를 다룸에 있어서도 엄격해야 한다는 뜻도 된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도사린 두 가지 위험을 지적하신다. 즉, 그 판단이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과 자신의 필요에 대해서는 눈멀게 되어 결국 자신이 도움을 받을 필요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2) 분별함(6절)-

이 명령은 앞서 하신 명령과 균형을 이룬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비판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또한 거룩한 것을 분별하는 일에 조심스러워야 한다. “거룩한 것”이란 제사장이 제단에서 가져가는 고기를 가리키며 “진주”는 “귀중한 약속의 말씀”이 있는 성경 진리를 상징한다.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동안 보다 깊은 진리들에 대해 부주의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가보를 값싸게 취급하는 결과가 된다. “개들과 돼지”라는 말은 구원을 받은 일이 없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벧후 2:19-22). 전도지나 성경을 부주의하게 배부하는 일이나 세상적인 사람들에게 귀중한 진리를 제시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일”의 실례들이다.

 

3) 기도(7-12절)-

그리스도께서 설교하는 중에 이 지점에서 기도를 권유하는 내용을 포함시키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우리의 힘과 지혜로 순종하기란 너무도 어렵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장 5절에는 예수께서 여기에 말씀하신 것을 반복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신자는 계속적으로 힘과 지혜와 요구되는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을 위해 하나님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에 기도의 근본을 두게 하셨다(9-11절).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대해도 되는 것이다.

 

2. 시험으로 입증되는 참된 의 (마 7:13-29)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입증하는 세 가지 시험을 요약해서 말씀하신다. 거짓 기독교, 다시 말해서 모조품 신앙은 이 시험에서 실패하게 된다.

 

1) 자기 부인의 시험(13-14절)-

두 가지 길은 인생의 두 가지 형태를 가리킨다. 즉, 쉽고 편안한 길.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어려운 길이다. 이 길은 두 개의 문들, 곧 헌신의 좁은 문, 또는 자기만족의 넓은 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된다. 참된 의는 자기 부인으로 인도해 간다. 마태복음 8장 18-22절에서 두 사람이 그리스도께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은 이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데마도 또한 이 시험에 떨어졌다(딤후 4:10).

 

2) 영적인 결실의 시험(15-23절)-

“거짓 선지자들”이란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설교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은 했으나 그 믿음이 잘못되어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들의 내적인 본성은 변화되지 않았다(벧후 1:4 참조). 이들은 다만 외적으로 양의 탈을 쓰고 있다.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며 신앙적인 행동을 하기조차 한다. 그러나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알아낼 수가 있는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열매를 구하신다.

-성령의 열매, 곧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열매(팔복/ 갈 5:22-23)

-입술의 열매, 곧 간증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히 13:15)

-거룩한 삶(롬 6:22)

-선한 행실(골 1:10)

-잃어버린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롬 1:13).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이 신앙인들의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으며 구원을 받은 것처럼 가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정직히 거듭났다면 생활에서 이러한 열매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모조품”들은 심판 때에 깜짝 놀라게 된다는 것을 눈여겨보자! 우리를 속일 수는 있다. 사단은 마음의 눈을 멀게 하며(고후 4:3-4) 사람들이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도록 속임수를 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신앙을 고백한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혀 구원을 받지 못한 자신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3) 불변성 또는 순종의 시험(24-29절)-

두 건축자는 이 생의 두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 이들은 같은 재료와 같은 설계도를 사용하였으므로 세상은 이 두 집의 차이점을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폭풍(시험 기간)이 오면 반석에 기초를 두지 않은 집은 무너져 내려 앉는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기초를 두고 있다(고전 3:11). 그의 의는 교회나 신조나 “선한 생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초하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를 시험하는 폭풍을 뚫고 지속해 감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증하며,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한다. 그는 단순히 말씀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인 것이다(약 1:22-25).

 

성경을 읽어가며 시험의 때를 당하여 거짓 신자들이 어떻게 떨어져 나갔는가를 살펴보자. 이스라엘 가운데 살던 혼혈아들(잡족)은 여행길에 곤란한 일들에 부딪히자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

 

로마에 사는 이른바 그리스도인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한 때에 바울을 저버렸다(딤후 4:9-18).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시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떻게 버텼는지 살펴보라.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베드로, 바울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이 폭풍을 통과하여 굳게 서 있음으로써 믿음의 실재를 입증하였다. 그들은 반석 위에 집을 건축하였다.

 

마태복음 8장 / 기적을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

 

이제, 우리는 마태복음의 새로운 부분으로 옮겨가는데, 여기서는 왕이 그의 능력을 나타내신다(8-10장).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가 어떤 능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한 약속들이 있는데, 마태는 열 개의 기적을 한 곳에 모아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왕의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을 입증한다.

 

주님은 그의 첫 설교에서(눅 4:18-19) 무리들의 병을 고치시고 도와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자신에게 임하여 있음을 증명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이사야서 35장에 보면 소경이 보게 되고, 절름발이가 걷는 왕국시대를 약속하고 있다(5-6절). 이러한 기적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신임장이었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 4장 23-25절과 연결된다.

 

1. 질병을 정복하는 능력 (마 8:1-17)

 

1) 문둥병-

예수님 시대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질병이었으며 치료법이 없었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들을 만져 자신을 더럽히셨다. 그러나 그의 어루만지심은 치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말씀으로 고치기도 하셨다(“깨끗함을 받으라!”).

 

레위기 13장에 보면 문둥병을 제사장이 검사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문둥병이 죄를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문둥병은 피부 아래로 깊숙히 스며들며(13:3), 퍼지고(13:7), 썩게 하며(13:44-45),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킨다(13:46). 그리고 불로 처리가 된다(13:52). 이스라엘 국가는 문둥병으로 썩어 가는 것으로 상징되었다(사 1:5-6).

 

2) 중풍병(8:5-13)-

여기서는 한 이방인이 도움을 받고자 그리스도께로 나아온다. 마태복음에는 이방인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경우가 두 군데 있는데 이곳과 15장 21-28절이다. 주목할 것은 두 경우 다 그리스도께서 먼 거리에서 고쳐 주셨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에베소서 2장 12-13절에 언급된 대로 “멀리 있던” 사람들이라는 표현과 비슷하다. 그리스도께서 두 경우 모두 믿음을 칭찬하셨다. 그리고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러한 기적들이 일어났다. 그리스도는 8장 10-12절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경고하신다. 그들은 왕국을 잃을 것이며, 그들 대신 이방인들이 받을 것이다.

 

3) 열병(8:14-17)-

무서운 질병인 문둥병에서 일반적인 병으로 상황이 바뀌어 졌는데, 그리스도는 이들을 모두 정복할 힘을 가지고 계신다. 만일 베드로가 아내가 있었는데 이것을 나쁜 본보기라고 하여 “그의 후계자들”인 교황들이 따르지 못할 일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누가 결혼할 수 있단 말인가!(고전 9:5 참조) 주님께서 그녀를 고치시자 그녀는 주님께 봉사하였다. 이것은 완전히 치료되었음을 뜻하며, 주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 그녀가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도 이렇게 해야 마땅하다.

 

마태가 이사야 53장 4절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한 구약의 증명으로 삼고 있는 데 유의하자. 어떤 사람들은 이사야 53장 4절을 들어 “구속에는 치료가 따른다”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오늘날 우리에게 육신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특권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태가 여기서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지칭한 것이다! 이사야 53장 4절은 갈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치료하시는 지상 사역을 하실 것임을 뜻한다.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이사야 53장 5절을 우리의 죄에 대한 치료의 의미로 적용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질병을 치료할 능력을 가지고 계신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 때문에 우리가 어느 날 육신의 구속을 받게 될 것이다(롬 8:18-24). 그러나, 이 구절을 오늘날 신유를 뜻한다고 적용시키지는 말자. 마태는 이것을 의미한 것이 아니며 우리도 또한 그러해야 한다.

 

2. 자연을 정복하는 능력 (마 8:18-27)

 

예수께서는 군중들에게 자신을 “내세우는” 대신 그들을 떠나셨다. 군중들에게 호소하며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를 좋아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명성”과는 얼마나 다른가! 19-22절은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신 이유를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기를 즐겨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적에는 흥미가 있었으나 자신을 모두 바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폭풍을 사단이 일으킨 것이라고 믿기도 하는데, 이는 바다에 대해 전문가들이었던 제자들이 무서워 떨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리스도를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공격이었을 것이다. 갈릴리에는 갑작스런 폭풍이 자주 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위험한 폭풍 중에서도 주무실 수 있는 주님의 평화로우심을 보자!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알때에 우리도 역시 가질 수 있는 평화이다. 주님은 다시금 그의 말씀으로써 바람과 바다를 조절하셨고, 즉시로 잠잠해졌다. 우리는 위대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나운 비바람을 벗어나(24절) 고요함에 이를 수가 있다(26절).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폭풍을 잔잔케 하실 수 있는 것에 참으로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시 107:23-31 참조).

 

3. 사단을 정복하는 능력 (마 8:28-34)

 

그리스도는 다시 한 번 그의 원수를 묘지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에베소서 2장 1-3절을 예화로 보여 주는 것이다. 죽음(묘지)이 있고, 귀신들림으로써 사단의 소유이며, 육신이 불결하고, 하나님을 향한 적개심을 무섭게 연출하고 있다. 마태는 두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다른 복음서들에는 한 사람으로 나온다. 아마도 보다 뚜렷하게 나타나는 한 사람을 언급한 경우일 것이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우리는 사단의 능력의 실재(엡 6:12)와, 인간의 육체를 멸하려 하며, 영혼을 정죄하여 지옥으로 보내려고 하는 사단의 욕구를 인정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기도 전에 그들을 괴롭히신다”는 귀신들의 두려움은(29절) 사단과 그의 군대들이 앞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귀신들이 이 세상에서 그들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몸을 지녀야 했다. 이것은 마치 성령이 그리스도인의 몸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롬 12:1-2). 귀신들이 돼지떼에게 들어가기를 간청했던 이유도 여기 있었다. 사단의 눈에는 돼지도 인간과 같이 좋아 보이는 것이다. 탕자가 어디서 종말을 짓는지를 보라. 돼지와 함께 있을 때이다.

 

귀신들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주님의 “가라!”는 한 마디의 말씀이 사람들에게서 그들을 쫓아냈다. 사단은 살인자이기 때문에 돼지들은 멸망을 받았다(요 8:44). 귀신들이 사람들에게 하려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들을 사단에게서 구하시려고 폭풍을 뚫고 가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주님은 또한 우리의 영혼을 구하시려고 인간들의 미움과 갈보리라는 폭풍을 뚫고 기꺼이 가려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 떠나라고 말한 시민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 사건을 누가복음, 마가복음과 비교하여 보면 그 묘지에서 세 가지 기도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고 고침을 받은 사람이 주님을 따르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며, 시민들은 예수께서 떠나실 것을 구했다.

 

그리스도는 오늘날 사단을 정복할 힘을 가지고 계시다(요 12:31/요 14:30/골 2:15). 귀신의 세력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계실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한다. 그러나 그들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사람은 교만의 귀신이 들렸고 다른 이는 육욕의 귀신이 들려 있다. 또 어떤 이는 돈을 사랑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구하여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

 

이 장에 나오는 말씀의 능력에 주의하자(8:8/8:16/8:26/8:32),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히 4:12). 우리는 설교를 함에 있어서나, 전도를 함에 있어서나 일상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해야 한다.

 

 

마태복음 9장 / 가버나움에서의 사역

 

이 장에서도 왕의 능력을 계속해서 제시하고 있다(8-10장). 앞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병을 정복하시는 능력(8:1-17), 자연을 정복하는 능력(8:18-27), 그리고 사단을 정복하는 능력을 보았다(8:28-34).

 

1. 죄를 정복하는 능력 (마 9:1-17)

 

1) 기적(9:1-8)-

중풍이란 반신불수의 한 형태로서, 그 사람을 폐인이 되게 한다. 예수님을 믿는 친구들이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 왔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 주심으로써 그들의 믿음에 응답하셨다. 그런데 주님은 그보다 훨씬 더한 일을 하셨다. 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다. “인자(人子)는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 그리스도를 비판하는 자들은 주님께 신성 모독의 죄가 있다고 고발하였으며, 이로써 그들은 주님의 왕이심과 인자되심을 받아들이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2) 결과(9:9-1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고발하고 반대할 이유를 찾기 시작하였다(9:3/9:11/9:34 참조). 마태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찬을 베풀고 그의 “동료 죄인들”을 초청하였을 때 바리새인들은 문제를 일으키려고 참석하였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죄악된 마음을 고치는 의사로 비유하며(9:12) 또한 사람들의 생활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신랑으로 비유하신다(9:15).

 

오늘날은 우리의 임무가 교회의 문을 열고 죄인들이 우리에게 오도록 초청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교훈하시기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로 복음의 메시지를 들고 가라고 하신다. “분리”(separation)가 “고립”(isolation)이 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람들과 접촉해야 하는 일에 실패하게 될 위험이 있다.

 

세례(침례)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요한의 제자들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후로 계속해서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들에 대하여 좀 더 알기를 원해 왔었다(11:1-6). 예수님의 사역은 자주 금식하는 바리새인들의 행위와는 달랐으므로(눅 18:12) 요한의 제자들은 설명을 듣고 싶어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새로운 것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새 옷과 새포도주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율법”이라는 오래된 그릇에 “복음”이라는 새로운 메시지를 부을 수는 없다. 율법과 은혜를 섞는 것은 혼란과 양자의 파멸을 일으키게 될 따름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은 새로운 형태를 취해야하는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을 혼합하는 일은 신앙의 혼란을 일으키게 한다.

 

2. 죽음을 이기는 능력 (마 9:18-26)

 

1) 욕망(9:18-19)-

이 사람은 종교적이었고 율법에 순종하고 있었으나 죽음이 닥치자 그의 종교는 아무런 도움을 줄 능력이 없었다. 율법은 죽이지만 성령은 살린다. 상세한 내용을 위해서는 누가복음 8장 41-56절과 마태복음 5장 22-43절을 보라.

 

2) 지체됨(9:20-22)-

피의 문제를 가진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님의 발 앞에 자신을 겸손히 낮추기를 원하였다. 세상의 의사들은 그녀를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막 5:26), 그녀는 크신 의사에게로 온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예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는 길을 늦추었다. 야이로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의 지체됨은 언제나 보다 큰 축복을 가져왔다(요 11장에 나오는 나사로의 경우를 참조하라). 단지 그 소녀를 고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

 

3) 조롱(9:23-24)-

죄인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그 소녀가 정말 죽었음을 입증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조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죄인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려 할 때에 세상이 우리를 조롱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엡 2:1-10).

 

4) 증거(9:25-26)-

주님께서 소녀에게 손을 대고 말씀하시자 소녀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세 사람을 살려내셨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성경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소녀-이 부분/ 젊은이-눅 7:11-16 / 노인-요 11 장). 죽음은 영적인 죽음을 상징한다(엡 2:1/요 5:24-25).

 

이처럼 죄는 모든 세대에 이르며, 더 나아가 모든 죄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지만 부패한 정도는 서로 다르다. 어린 소녀는 방금 죽었고 젊은이는 아마도 하루쯤 되었을 것이며, 나사로는 4일 동안 무덤에 있었다. “도덕적인 죄인”은 소녀와 같다. 부패하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죽어 있다. “부도덕한 죄인”은 나사로와 같다. 그의 죄는 냄새가 난다. 세 사람 모두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났으며 이는 요한복음 5장 24절을 잘 표현하고 있다.

 

3. 어두움을 정복하는 능력 (마 9:27-31)

 

우리는 이들이 어떻게 해서 소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질병으로 인해서 또는 나면서부터, 또는 사고로 소경이 되었을 수도 있다. 이들은 예수를 다윗의아들로 인정하였으며(1:1) 그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믿음을 가졌는지 물어보셨고, 그들은 믿었으므로 고침을 받았다.

 

8장과 9장에서 믿음을 어떻게 보여 주는지 주목하자. 백부장은 큰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8:10), 폭풍 속의 제자들은 믿음이 적었다(8:26). 친구들의 믿음은 중풍에 걸린 사람을 구원하였으며(9:2), 여자의 믿음은 병고침을 받게 했다(9:22). 야이로의 믿음은 길에서 지체함으로 시험을 받았고, 소경들은 믿음을 보상받았다. 누가복음 4장 18절과 이사야 61장 1-2절에 의하면 소경을 고치신 것은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4. 귀신을 정복하는 능력 (마 9:32-38)

 

이 기적은 큰 소동을 야기시켰다.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때가 없도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제시하며 왕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러나 종교적 지도자들은 주님을 거절하였으며, 사단과 동맹하고 있다고 그를 비난하기조차 하였다. 미래의 어느 날 이스라엘은 사단에게 능력을 받게 되는 거짓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이다(요 5:43). 이 비난이 점점 커지기 시작하여 12장 22-37절에 나오는 공개적인 반역으로 변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논쟁하지 않으셨음에 유의하자. 그보다는 그를 받아들이려는 사람들을 도우러 가셨다. 주님은 “천국의 복음”을 전파하셨는데, 이 말은 핍박이 있어도 여전히 그들의 왕으로서 자신을 드려 그 민족을 위하여 일하셨음을 뜻한다. 나중에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똑같은 복음을 전하게 하셨으며 똑같은 기적을 이루게 하셨다(10:5-8).

 

이 사명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은 아니다. 또한 감히 기적을 베푸는 능력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 일들은 교회가 아니라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과 연관된 일들이다.

 

오늘날의 대중은 여전히 목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만이 이들을 인도하고 먹일 수 있으시다(겔 34장). 그리스도는 자신을 목자로, 추수하는 사람으로, 추수의 주인으로 비유하신다. 추수는 주님의 일이다(38절). 영혼들을 구원받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요한복음 4장 31-38절을 보고 이와 비슷한 교훈을 살펴보라.

 

마태복음 10장 / 첫 선교사들의 파송

 

이 장은 마태복음의 첫 부분인 왕의 출현(1-10장)을 다루는 마지막 장이다. 1-4장에서 주님은 그의 인격을 나타내셨고, 5-7장에서는 주님의 원리를, 8-10장에서는 주님의 능력을 계시하셨다. 8-9장에서 그리스도는 연속된 기적을 통하여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는데, 이 장에서는 그의 대사들을 파송하여 기적들을 이루게 하시며 천국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표적이 생길 때는 반드시 유대인과 천국의 메시지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기” 때문이다(고전 1:22).

 

이 장을 읽다 보면 16절과 24절의 교훈들에 변화가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본 장을 모두 열 두 사도에 적용시킨다면 혼란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15-23절에서 예수께서는 수 세기를 뛰어넘어 대환란 기간 중의 왕국 메시지를 다루시기 때문이다. 본 장은 과거에 살았던 사도에게 주는 교훈(1-15절), 미래의 환란기에 살 사도들에게 주는 교훈(16-23절), 오늘날의 제자들과 종들에게 주는 교훈으로(24-42절) 되어 있다.

 

1. 과거의 사도들에게 주는 교훈 (마 10:1-15)

 

그리스도는 9장 36-38절에서 추수에 대하여 기도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을 추수에 봉사하도록 파송하신다. 잃어버린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에 응답하심에 있어서 당신을 사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1절의 “제자”(배우는 사람들)란 말이 2절에서 “사도”(보냄을 받은 사람들)로 변화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이들 열둘은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신적인 능력을 주셨다. 주님은 언제나 봉사 사역에 부르신 사람들에게 준비를 갖추게 하신다. 배반자 유다를 포함하여 인간이란 참으로 가지각색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일을 성취하시는 데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신다(고전 3:4-9/롬 12:3-8).

 

그들의 사명은 명백하였다. 왕국을 전파하며 오직 유대인에게만 가는 것이었다. 세례(침례)요한도 이같이 했으며(3:2), 예수께서도 이렇게 하셨고(4:17), 이제 그의 제자들이 전국으로 다니며 메시지를 퍼뜨리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일으키는 기적들은 그들이 왕을 대리하고 있다는 신임장이 될 것이다.

 

이 사명은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며 또한 오늘날의 각 선교사들에게 해당되는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능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의 나라를 허락하신 동안에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이 물질적인 일들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메시지를 전하려고 한다면 자신과 가족이 쓸 것을 준비하고 제공해야 한다(딤전 5:8). 오늘날의 선교사들은 10장 9-10절의 교훈을 따르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오늘날 선교사들이 하듯이 교회들이 자신을 후원해 준 일에 감사를 표했다.

 

끝으로, 우리는 왕국 복음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며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청한다. 이 부분의 영적인 원리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이 될지 모르나, 특정한 교훈들로서는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2. 미래의 사도들에게 주는 교훈 (마 10:16-23)

 

성경에서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도약”하는 일이 흔치 않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역사를 내려다보며 대환난 기간 중에 주님의 증인이 될 유대인들을 보고 계신 것이다. 이 구절들은 열 두 사도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5절에 보면 그들이 이방인들에게 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 18절은 이방인들에게 증거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시기 전에는 성령이 그들 안에서 말씀하실 수가 없다(요 14:17). 열 두 사도들이 박해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누가복음 9장 10절과 마가복음 6장 30절은 그들이 성공적인 사역을 했으며 즐거워했음을 시사한다. 22, 23절은 마태복음 24장 9, 13절과 비슷한데, 이 구절들은 명확히 말세에 해당되는 구절들이다.

 

이 부분은 “사도행전” 시대 동안에 있을 사도들의 사역, 특히 사도바울의 사역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대환란 기에 적용시키는 것이 옳다. 22절에 보면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 유의하자.

이 구절은 대환란 시기의 박해 기간 동안 그의 대사들이 믿음으로 인내해야 함을 말한다. 이러한 박해는 주님의 재림으로 종말을 고할 것이다.

 

3. 현재의 제자들에게 주는 교훈 (마 10:24-42)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계신 데에 유의하자. 이 단어는 유대인에게만 제한하여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에는 오늘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한 격려와 교훈이 들어 있다. 우리는 배우는 사람들(제자)이며 일군들(종)이다.

 

1)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경고(25-31절)-

주님도 그런 취급을 받으셨음을 말씀하시며 그들이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의 특권이라고 확신시키신다(빌 1:29/행 5:41). 28절은 사단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지옥에서 몸과 혼을 멸망시킬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심에 대한 확신을 주신다. 하나님은 참새들조차 돌보시는 분이다.

 

2) 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인 고백의 중요성(31-33절)-

이것은 그의 종들과 그들로 말미암은 개종자들에게 적용된다(롬 10:9-10/딤후 2:12 참조). 고백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고백은 구원의 자연적인 결과이다.

 

3) 복음은 사람들을 갈라놓는다(34-39절)-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며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지만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고백한 그 순간부터 적들이 생긴다. 그리스도께서는 분리시키시며, 가족과 친구라는 가장 강력해 보이는 자연적인 연관마저도 별 중요성이 없는 것으로 여기게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짐으로써, 십자가에 달려 그의 수치와 비난을 감수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섬길 수가 없다. 우리의 생명을 이기적으로 구하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잃는 것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는 많은 것을 가지면서도 다음 세상에서는 조금밖에 갖지 못하는 예가 얼마나 많은가!

 

4) 그리스도인의 종됨의 중요성(40-42절)-

그 종은 그리스도를 대리한다. 종을 거절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가 왕 중의 왕을 대리하고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에 주께서 우리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을 아는 일은 참으로 큰 격려가 된다.

 

이 부분에서(24-42절), 그리스도는 종의 지위(24-25절), 보호(26-32절), 특권(33-38절), 약속(39절), 그리고 실천할 사항(40-42절)을 요약해서 말씀하신다.

 

● 실전적인 면

현대의 “신유주의자들”은 마치 마태복음 10장 8절이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주장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이들이 “죽은 자들을 일으킨 일”이 있는가? 만일 이 구절이 오늘날의 “신유주의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들은 유대인들에게만 전도를 해야 하고 헌금을 받아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하고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종을 거절하거나 잘못 취급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종이 주인보다 높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주인을 대리한다.

 

. 마태복음 11장 / 요한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언

 

마태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에 봉착하게 된다. 왕의 출현은 이제 완성되었고(1-10장) 이제는 왕에 대한 반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11-13장). 이 부분에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 대하여 계시하신 모든 것을 반역한다.

 

● 요한에 의해 알려지심-요한이 체포되도록 방관함 / 11장1-19절

● 많은 기적들을 이루심-성읍들이 회개하기를 거절함 / 11장20-30절

● 자신의 원리를 알리심-그들이 원리에 대해 논박함 / 12장 1-21절

● 자신의 인성을 보이심-그를 사단의 공역자로 몰아세움 / 12장 22-50절

 

물론 그 결과로 예수께서는 그 백성에게서 돌아 서셨고(14-20장) 십자가로 향하신다. 여기에서 시작된 반역은 후에 노골적인 거절로 변한다.

 

1. 세례(침례)요한에 대한 설명 (마 11:1-19)

 

1) 의뢰(1-3절)-

이 때 요한은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었다(4:12). 성령께서 그에게 누가 메시야인지를 말씀하셨는데도(요 1:29-34) 그는 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의심하였는가? 그 답은 “다른 이라는 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었다. “다른” 이란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두 가지로 나오는데, 한 경우는 같은 종류로 하나 더란 뜻이고, 예수께서 “나와 같은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사용하신 단어이다.

 

마태복음 11장 3절에서 사용된 “다른”은 다른 종류 하나라는 뜻이다. 요한은 왕의 오심을 알렸고 심판과 고난의 날이 온다고 확언했었다(마 3:7-12). 그런데 예수께서는 자비의 사역을 하고 계셨다. 요한은 “당신은 메시야이십니까? 아니면 이 백성을 징계하고 죄를 심판할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으므로 요한의 시각이 어둡게 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요한에게 임했던 성령이 구약의 엘리야와 달랐던 것은 아니었다(왕상 19:1-4 참조).

 

2) 대답(4-6절)-

예수께서는 부드럽게 그의 종에게 확신을 주시며 요한의 믿음을 격려하신다. 이 구절을 누가복음 7장 18절과 비교해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병을 고치는 사역에 대하여 요한에게 보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예수께서 “가서... 요한에게 다시(우리 말 성경에는 없음) 알리라”고 하신 이유도 이것이다(11:4). 다른 말로 한다면, 예수께서는 구약이 이루리라고 말해주던 그 기적들을 성취하고 계심으로써, 자신이 그 왕이라고 요한에게 확신을 주고 계신다(사 35:5-6/사 61:1).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말라”고 예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이사야 8장 14-15절을 가리키신 듯하다. 그리스도는 요한을 격려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가 의심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도 좋은 교훈이 된다.

 

3) 승인(7-15절)-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요한을 인정하신 말씀은 굉장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드리려는 착하고 충성된 종에게 “잘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은 잘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받으려는 종이었다.

 

그리스도는 요한의 사역으로 말라기 3장 1절이 성취된 것이라고 언급하신다. 만일 그 민족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면 요한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엘리야였을 것이다(14절/ 마 17:10-13 참조). 이들이 요한과 예수님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말라기 3장 1-3절의 문자적이고 최종적인 성취는 말세에야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요한은 구약예언자들의 마지막이었다. 왜냐하면 요한은 왕국을 전파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천국 안에서 가장 못한(겸손한) 사람보다 낫지 못하다(11절).

 

4) 책망(16-19절)-

그리스도는 그 세대 사람들이 어린 아이인 것을 책망하신다. 민중을 기쁘게 하는 말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요한과 예수님은 생활이나 사역에 있어서 반대였으나, 그 어느 쪽도 어린 아이인 군중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25-26절에서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 같은 사람만이 그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셨다. 오늘날 세상은 마치 항상 오락과 새 것만을 찾는 응석받이 아이들과 같다. 이들은 삶이나 죽음에 대하여 진지해지기를 거부한다.

 

2. 성읍들에 대한 저주 (마 11:20-24)

 

예수께서 저주를 담은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많은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으며 그의 제자들도 기적을 행했다. 그런데도 성읍들은 주님을 거절하셨다. 가버나움은 특별한 축복을 받은 곳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주님의 사역 초기에 그리스도의 사령부를 두었던 곳이기 때문이다(마 8:5-17/9:1-).

 

가장 밝은 빛에 거하는 사람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심판을 받을 때에는 그 개인이 받은 빛의 정도의 많고 적음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진리를 알고도 등을 돌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3. 짐 진 자들에 대한 초대 (마 11:25-30)

 

이 시기는 그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의 어려운 시기였다. 왕에 대한 반역이 이미 형성되었고 공개적인 거절도 최고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를 드린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따라야 할 참다운 본보기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언제나 우리의 생활을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은 지혜있고 분별 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지나 단순하고 믿음 있는 보통사람들을 구원을 위하여 택하셨다(고전 1장).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비를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의 뜻을 찬양하고 순종할 수는 있다. 여기 나오는 그리스도의 초청은 그에게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다. 10장 5-6절에 보면 메시지가 유대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는 그에게 나아오게 될 모든 사람에게 문을 열어 놓으신다.

 

1) 나의 멍에를 메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짐을 지웠다(마 23:4). 그런데 그들의 종교는 백성들에게 쉼과 평안을 주지 못했다. 어떤 종교라도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없다. 그리스도는 괴롭히며 결박하는 바리새인들의 멍에와는 대조적으로 평안한 멍에를 주신다. “쉼”이란 말이 이중으로 사용되고 있음에 유의하자.

 

2)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쉼이란 구원과 함께 오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는 말씀 중의 “쉼”이란 헌신(항복)할 때 오는 하나님과의 평화이다(빌 4:6-9).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 실천적인 교훈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실망에 빠지기도 하며 믿음의 빛을 잃을 때도 있다. 세례(침례)요한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으나 그도 역시 사람이었다. 감옥에 있을 때의 바울의 태도와 비교해 보자(빌 1장).

 

우리의 직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어린 아이같은 일시적인 기분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는 마태복음 11장 16-20절이 사실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에게 지옥을 경고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이 세대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죄이다.

 

음란한 일들로 가득 찼던 소돔은 종교심으로 가득 찬 가버나움보다 심판 때에 견디기 쉬울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 가운데 사셨는데 그들은 그를 거절하였다. 특권에는 책임이 수반되며 책임은 언제나 해명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빛이 밝을수록 심판도 크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미약한 이해와 설명을 초월해 계신다(롬 11:33-36).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은 눈이 멀었고, 교회가

 

 

부름을 받게 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에 겸손히 경배하여 절하게 한다.

 

마태복음 12장 / 용서받지 못할 죄

 

12, 13장에 나오는 사건들은 우리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어려운 날들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왕에 대한 반역이 점점 더 맹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주님의 사자인 세례(침례)요한을 거절했다(11:1-19).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능력의 일들을 행하셨는데도 회개하지 않았다(11:20-30). 이제 그들은 주님의 원리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논쟁을 벌이며(안식일의 문제), 주님이 사단과 맺어져 있다고 힐난하기조차 하였다. 이 장은 대결로 가득 채워져 있다.

 

1. 안식일 문제로 인한 대립 (마 12:1-21)

 

1) 그들의 비난(1-2절)-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귀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그 민족과 맺으신 특별한 언약의 표시였다(출 31:12-17).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영적인 축복과 기쁨의 날을 의식 수행의 날로 전환시켰으며, 바리새인들의 법은 이 날을 축복이 아닌 짐으로 만들어 놓았다. 안식일은 교회에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의 언약일은 첫 날, 주의 날(主日) 곧 부활의 날이다.

 

2) 그리스도의 대답(3-8절)-

예수께서는 적들에게 대답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곤 하셨는데, 여기서는 배고팠던 다윗이 안식일에 성막에 들어가 진설병을 먹었던 일에 대하여 언급하신다(삼상 21:1-). 그 때 다윗은 예수님처럼 거절당한 왕이었다. 그리스도는 또한 제사장이 안식일에 일하며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율법(민 28:9-10)에 대해 언급하신다.

 

마지막으로는 선지서에서 인용하여(호 6:6)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해 주셨음과, 공허한 외적인 의식보다는 마음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는 담대하게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언급하시는데, 이 말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한 방편이었다.

 

3) 그들의 두번째 비난(9-21절)-

바리새인들은 “일하지 않는 것”을 대단히 엄격하게 규율로 만들어 놓았으므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죄라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규율이 잘못임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평범한 논리를 사용하신다. 그들은 주일에 가축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사람이 양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임을 주장하셨던 것이다.

 

14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멸하려는 계획을 시작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구절이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대처하셨는가? 주님은 스스로 철수하셨다. 이것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했던 것을 성취한 것이다(사 42:1-3). 주님은 적들과 논쟁을 하거나(19절) 그들을 심판하려 하지 않으셨다(20절).

 

어떤 이들은 20절의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가 연약하고 곤핍한 죄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적들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 같다. 그리스도는 정당한 때가 오기까지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18절과 21절에 나타나 있는 “이방인들”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왕이 그의 민족에게 거절을 당하시고 이방인들을 향하시게 될 것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41-42절에서 이방인들이 다시 나오는데, 주님은 니느웨와 스바의 여왕에 대해 말씀하신다.

 

2. 사단에 대한 논쟁 (마 12:22-27)

 

오늘날의 세상적인 사람들과 같이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무엇인가 비판할 것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인간을 치료하는 것을 기뻐하는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논쟁이 논리적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왜냐하면 이 말은 사단이 스스로 싸우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귀신을 내쫓을 수 있었다(27절/ 행 19:13 이하). 그렇다면 이 말은 그들도 사단과 결탁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언급하신 것은(29절) 주께서 먼저 귀신들의 지도자 사단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귀신들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인데, 주님이 사단을 이미 정복한 사실은 4장에 나온다. 이 논쟁은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무서운 말씀을 하시게 만든다.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다음의 사실들을 명심하자.

 

입술의 죄가 아니라 마음의 죄이다(34-35절). 입술의 말은 마음의 상태에 대한 증거이다. 그리고 악한 말들은 그들의 악한 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밝은 증거의 빛 가운데서 저지른 죄이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보았는데도 주님을 향하여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적인 죄였고, 지속적인 불신앙이며, 결정적인 거부였다. 간음이나 살인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다(요 8:1-11 /행 9장에서의 바울).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거절하며 마음이 지나치게 부패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때는 늦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세례(침례)요한의 메시지를 설교하시는 데에 주목하자(3:7).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시는데, 이들은 옛 뱀, 곧 마귀의 자녀들인 것이다(23:33). 그들은 형식상으로는 경건하였으나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다. 사단처럼 이들은 참된 경건의 흉내자들이었다(고후 11:13-15).

 

3. 표적에 관한 대결 (마 12:38-50)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도 이들은 표적을 구하였다(요 12:35-43).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의 표적만을 약속하셨는데, 곧 요나의 표적에 비유한 자신의 죽음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이었다. 요나가 이방인을 위한 사자였음을 기억하자.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될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요나보다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41절) 주님의 인격이 보다 위대하시다. 요나는 단지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주님은 헌신에 있어서 위대하시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의 메시지에 있어서 더 위대하시다. 주님은 심판이 임할 것을 전하지 않고 구원을 전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또 다른 이방인으로서 스바의 여왕(왕상 10장 참조)을 언급하시는데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왔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크신 그리스도의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43-45절에 나오는 비유는 “거듭남이 없는 개혁”이라고 말하면 어울린다.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에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다. 그 “집”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으나 비어 있었다. 이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도덕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공허했으며 그들의 종교도 공허하였다. 결국, 사단이 다른 죄들을 가지고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나라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나빠졌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런데 복음서에서는 그들 자신의 메시아를 죽였다.

 

이와 같은 일들이 각 개인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지 않는데도 자기의 생애를 “개혁”하고 교회에 등록하여 존경을 받고 살기는 쉽다. 이러한 “거짓 의(義)”는 잠시 동안만 지속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사단이 그 공허한 생애를 주장하여 몰락시킬 것이다.

 

종교란 외부를 정결케 함을 뜻하나, 구원이란 새 생명과 내적인 거룩함을 뜻한다. 구원을 참으로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한 비유가 있다.

 

11장의 끝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모두” 초청하고 계신다. 그런데, 여기서(12:46-50) “누구든지”라는 놀라운 단어를 사용하신다. 주님은 본성적으로 묶여진 모든 것들을 풀어 놓으신다. 그 민족은 주님의 메시지와 주님의 사역을 반역하였다. 이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세계적인 가족이 됨을 말씀하고 계신다.

 

마태복음 12장 / 용서받지 못할 죄

 

12, 13장에 나오는 사건들은 우리 주님의 사역에 있어서 어려운 날들의 하나였음이 분명하다. 왕에 대한 반역이 점점 더 맹렬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미 주님의 사자인 세례(침례)요한을 거절했다(11:1-19). 바리새인들은 주님께서 능력의 일들을 행하셨는데도 회개하지 않았다(11:20-30). 이제 그들은 주님의 원리에 대하여 그리스도와 논쟁을 벌이며(안식일의 문제), 주님이 사단과 맺어져 있다고 힐난하기조차 하였다. 이 장은 대결로 가득 채워져 있다.

 

1. 안식일 문제로 인한 대립 (마 12:1-21)

 

1) 그들의 비난(1-2절)-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귀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그 민족과 맺으신 특별한 언약의 표시였다(출 31:12-17).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영적인 축복과 기쁨의 날을 의식 수행의 날로 전환시켰으며, 바리새인들의 법은 이 날을 축복이 아닌 짐으로 만들어 놓았다. 안식일은 교회에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우리의 언약일은 첫 날, 주의 날(主日) 곧 부활의 날이다.

 

2) 그리스도의 대답(3-8절)-

예수께서는 적들에게 대답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곤 하셨는데, 여기서는 배고팠던 다윗이 안식일에 성막에 들어가 진설병을 먹었던 일에 대하여 언급하신다(삼상 21:1-). 그 때 다윗은 예수님처럼 거절당한 왕이었다. 그리스도는 또한 제사장이 안식일에 일하며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율법(민 28:9-10)에 대해 언급하신다.

 

마지막으로는 선지서에서 인용하여(호 6:6)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해 주셨음과, 공허한 외적인 의식보다는 마음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셨다. 그리스도는 담대하게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언급하시는데, 이 말은 자신이 하나님임을 주장하는 한 방편이었다.

 

3) 그들의 두번째 비난(9-21절)-

바리새인들은 “일하지 않는 것”을 대단히 엄격하게 규율로 만들어 놓았으므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도 죄라고 주장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규율이 잘못임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평범한 논리를 사용하신다. 그들은 주일에 가축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사람이 양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예수께서는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가치 있는 것임을 주장하셨던 것이다.

 

14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멸하려는 계획을 시작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구절이다. 그리스도는 어떻게 대처하셨는가? 주님은 스스로 철수하셨다. 이것은 이사야가 메시야의 사역에 대하여 설명했던 것을 성취한 것이다(사 42:1-3). 주님은 적들과 논쟁을 하거나(19절) 그들을 심판하려 하지 않으셨다(20절).

 

어떤 이들은 20절의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가 연약하고 곤핍한 죄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적들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 같다. 그리스도는 정당한 때가 오기까지는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18절과 21절에 나타나 있는 “이방인들”이란 단어에 주목하자. 왕이 그의 민족에게 거절을 당하시고 이방인들을 향하시게 될 것을 시사하는 구절이다. 41-42절에서 이방인들이 다시 나오는데, 주님은 니느웨와 스바의 여왕에 대해 말씀하신다.

 

2. 사단에 대한 논쟁 (마 12:22-27)

 

오늘날의 세상적인 사람들과 같이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무엇인가 비판할 것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인간을 치료하는 것을 기뻐하는 대신 그리스도께서 사단과 동맹을 맺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논쟁이 논리적이 아님을 지적하신다. 왜냐하면 이 말은 사단이 스스로 싸우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귀신을 내쫓을 수 있었다(27절/ 행 19:13 이하). 그렇다면 이 말은 그들도 사단과 결탁하고 있다는 뜻인가?

 

그리스도께서 최종적으로 언급하신 것은(29절) 주께서 먼저 귀신들의 지도자 사단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귀신들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인데, 주님이 사단을 이미 정복한 사실은 4장에 나온다. 이 논쟁은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무서운 말씀을 하시게 만든다.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다음의 사실들을 명심하자.

 

입술의 죄가 아니라 마음의 죄이다(34-35절). 입술의 말은 마음의 상태에 대한 증거이다. 그리고 악한 말들은 그들의 악한 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것은 밝은 증거의 빛 가운데서 저지른 죄이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기적들을 보았는데도 주님을 향하여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지적인 죄였고, 지속적인 불신앙이며, 결정적인 거부였다. 간음이나 살인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다(요 8:1-11 /행 9장에서의 바울).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리스도를 거절하며 마음이 지나치게 부패한 자리에 이르게 되면 때는 늦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세례(침례)요한의 메시지를 설교하시는 데에 주목하자(3:7).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부르시는데, 이들은 옛 뱀, 곧 마귀의 자녀들인 것이다(23:33). 그들은 형식상으로는 경건하였으나 하나님을 모르고 있었다. 사단처럼 이들은 참된 경건의 흉내자들이었다(고후 11:13-15).

 

3. 표적에 관한 대결 (마 12:38-50)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는데도 이들은 표적을 구하였다(요 12:35-43). 그리스도께서는 한 가지의 표적만을 약속하셨는데, 곧 요나의 표적에 비유한 자신의 죽음과 장사됨, 그리고 부활이었다. 요나가 이방인을 위한 사자였음을 기억하자.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거절하게 될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요나보다 얼마나 크신 분이신가?(41절) 주님의 인격이 보다 위대하시다. 요나는 단지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주님은 헌신에 있어서 위대하시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의 메시지에 있어서 더 위대하시다. 주님은 심판이 임할 것을 전하지 않고 구원을 전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또 다른 이방인으로서 스바의 여왕(왕상 10장 참조)을 언급하시는데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먼 길을 왔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유대인들은 솔로몬보다 크신 그리스도의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43-45절에 나오는 비유는 “거듭남이 없는 개혁”이라고 말하면 어울린다.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에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추방되었다가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다. 그 “집”은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으나 비어 있었다. 이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며, 외적으로는 도덕적인 생활을 하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공허했으며 그들의 종교도 공허하였다. 결국, 사단이 다른 죄들을 가지고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나라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나빠졌다. 구약에서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였다. 그런데 복음서에서는 그들 자신의 메시아를 죽였다.

 

이와 같은 일들이 각 개인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지 않는데도 자기의 생애를 “개혁”하고 교회에 등록하여 존경을 받고 살기는 쉽다. 이러한 “거짓 의(義)”는 잠시 동안만 지속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사단이 그 공허한 생애를 주장하여 몰락시킬 것이다.

 

종교란 외부를 정결케 함을 뜻하나, 구원이란 새 생명과 내적인 거룩함을 뜻한다. 구원을 참으로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앙을 고백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에 대한 비유가 있다.

 

11장의 끝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모두” 초청하고 계신다. 그런데, 여기서(12:46-50) “누구든지”라는 놀라운 단어를 사용하신다. 주님은 본성적으로 묶여진 모든 것들을 풀어 놓으신다. 그 민족은 주님의 메시지와 주님의 사역을 반역하였다. 이제 주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세계적인 가족이 됨을 말씀하고 계신다.

 

 

마태복음 13장 / 천국 비유

 

본 장은 성경에서 이해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장이며 모든 믿는 사람들이 철저하게 이해해야 하는 장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향한 반역은 그 절정을 이루고 있었고, 주님은 그 민족으로부터 방향을 바꾸어 그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향하시게 되었다(마 11:28-30).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왕이 거절을 당한 마당에 왕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곧 마태복음 13장인 것이다. 이 장에서 그리스도는 “그 나라의 비밀”을 요약하며 이 시대 동안의 천국(Kingdom of Heaven)이 어떠할 것임을 설명하신다.

 

1. 비유를 사용하신 배경

 

1) 집에서 나가사-

여기서 집이란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시던 문자적인 집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스라엘 집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10:6). 그 집을 떠남으로써 예수께서는 그 민족을 떠나 이제는 이방인을 향하리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2) 바닷가에-

성경에 나오는 바다는 세상의 이방 나라들을 상징한다(계 17:15/사 60:5).

그리스도는 이제 이방인에게 가셔서 그의 사역의 새로운 국면을 맞으신다(10:5-6/12:17-21/12:39-42 참조).

 

2.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

 

1) 인간적인 이유(13:10-17)-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그리스도로 하여금 비유를 사용할 필요를 느끼게 하였다(비유란 “이 땅의 일들을 사용하여 하늘의 의미”를 전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리스도는 이사야 6장 9-10절을 인용하여 왜 비유를 사용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신다. 사람들의 마음, 귀, 그리고 눈이 어두워지고, 굳어지며, 멀게 되었던 것이다.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관계자들, 다시 말하자면 진리를 참으로 알기 원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일으키시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반역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숨기는 방편이었다. 그는 이 진리의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려 하지 않으시는 것이다(7:6).

 

비유를 사용했다고 해서 사람들이 진리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흥미를 자아내어 배우려는 마음을 일으키게 했다. 이 일은 11장 25절이 성취된 것이다. 교만한 자들은 보지 못할 것이요, 젖먹이들은 진리를 알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2) 신적인 이유(13:34-35)-

그리스도는 시편 78편 2절의 예언을 성취하셨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진리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여진 때로부터 비밀로 숨겨져 왔던 일임에 유의하자. 이 진리들은 사람들이 모르도록 숨겨져 온 “비밀”이었는데 이제 계시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약에서는 이러한 진리들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성경에서 “비밀”이라 하면 과거 시대에는 숨겨져 왔으나, 이제 하나님의 종으로 말미암아 계시된 진리를 뜻한다. 구약에서는 “비밀”이 발견되지 않으며 다만 상징과 모형이 있을 뿐이다.

 

3. 천국에 관한 비밀

 

1) 용어-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천국”(Kingdom of Heaven)이 “비밀”의 형식을 취하고 있음에 유의하기 바란다. 즉, 이것은 지상적인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왕(그리스도)의 부재 기간 중의 이 땅에서의 왕국을 가리킨다. 이 천국(Kingdom of Heaven)에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섞여 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천국 안에 있으나 천국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천국”(Kingdom of Heaven)은 “기독교세계”(Christendom)라는 용어에 해당된다. 이 나라는 진실이건 거짓이건 왕이신 그리스도께 충성을 고백한 모든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2) 시기-

마태복음 13장을 다른 면으로 분석해 보면 그리스도의 날에 말씀을 심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 시대의 종말까지 지속됨을 주목하게 된다. 이 비유는 이 시대 동안에 있을 하나님의 계획과 사단의 반대를 요약해 준다.

 

▣ 사단의 반대

개인에의 적용

(씨뿌리는 비유)

공격의 요지

세상에의 적용

(가라지, 겨자씨, 누룩의 비유)

씨를 빼앗김

파종

모조품을 심음 : 가라지

식물이 쇠약해짐-성장하지 못함

성장

헤아릴 수 없게 성장함 : 겨자씨

열매가 질식함-결실이 없음

결실

거짓 교리를 주입함 : 누룩

-씨로 만든 가루 안에 섞임

 

 

▣ 하나님의 계획

 

 

서 론(1~2절)

 

개인에의 적용

“보라 씨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그 나라의

시작

씨뿌리는 비유(3~9절)

설명(10~17절) : 비유 사용의 이유

-인간적인 이유

설명(18~23절) : 씨뿌리는 비유

공적 강론

“바닷가에서”

 

인간의 견해

: 실패

세상에의 적용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

 

“밭은

세상이니...”

반대

가라지의 비유(24~30절)

-거짓 그리스도

겨자씨의 비유(31~34절)

-거짓 성장

누룩의 비유(33절)

-거짓 교리

설명(34~35절) : 비유 사용의 이유

-신적인 이유

설명(36~43절) : 누룩의 비유

사적 강론

“집에서”

 

하나님의 견해

: 성공

결과

보화의 비유(4절)

-이스라엘

진주의 비유(45~46절)

-교회

그물의 비유(47~50절)

-이방 민족

 

 

결론(51~52절)

 

 

 

이 비유의 상세한 연구를 위해서는 스코필드 해설(Scofield notes)이나, 아더핑크의 탁월한 저서인 「마태복음 13장의 비유」(Arther Pink 「The Parables of-Matthew 13」)를 참조하기 바란다.

 

마태복음 13장 24-30, 36-43절 / 가라지의 비유

 

이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 천국(the Kingdom of Heaven)에 대해 의미하시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1. 사용된 상징들

 

상징에 대한 설명-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상징들을 설명하신다.

-사람은 그리스도이시다(37절)

-그가 뿌린 씨는 신자들이며 천국의 자녀들이다(38절)

-밭은 세상이다(38절)

-원수는 사단이다(39절)

-가라지는 마귀의 자녀들이다(38절)

-추수꾼들은 천사들이다(39절)

-추수란 그 시대의 종말이다(39절).

 

씨뿌리는 비유에서 사용된 상징들과 혼동하지 말자.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고, 땅은 각기 다른 여러 종류의 마음을 상징한다.

 

주된 교훈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맺기 위하여 참된 신자들을 “심는” 곳에는 사단이 그 일을 반대하여, 참된 씨의 성장을 방해하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심는다는 뜻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씨이며, 다른 사람들을 인도함으로써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천국”에는 참된 씨(그리스도인들)와 모조 그리스도인들(마귀의 자녀들)이 섞여 있다.

 

2.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 씨

 

1) 창세기 3장 15절-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두 가지 씨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하나님은 여자가 한 씨를 가질 것이며(그리스도-갈 4:4/갈 3:16) 뱀(사탄)도 역시 한 씨를 가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뱀의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지속적인 적대 행위가 있을 것 또한 언급하셨다.

 

2) 가인과 아벨-

가인이 아벨을 살해했을 때(창 4:1-15) 두 씨 사이의 적개심이 시작되었다. 요한일서 3장 12절은 가인이 “악한 씨”, 곧 마귀의 자녀였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이 대결은 구약 전체를 통하여 지속된다.

 

3) 바리새인들과 예수 그리스도-

사단의 씨(마귀의 자녀들)는 세례(침례)요한을 반대하였고(마 3:7) 헤롯에게 죽임을 당할 때 그대로 버려두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반대하였으며(마 12:34/마 23:33/요 8:44), 마침내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십자가의 일로써 사단은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여 영원히 멸망시키셨다.

 

4) 사도 바울-

사단의 씨는 바울이 처음으로 선교 사역을 시작했을 때에 바울을 반대하였고(행 13:10) 그의 생애를 내내 따라다녔다. 사단은 오늘날 우리에게 하듯이 거짓 복음(갈 1:6-9)과 거짓 사역자들(고후 11:13-26) 거짓된 의(롬 10:3), 거짓 형제들(고후 11:26)과 심지어 거짓 기적들로도(행 19:11-16) 바울을 반대하였다.

 

5) 최종적인 결과-

두 씨들 사이의 이러한 적개심은 거짓 그리스도(살후 2:1-12)/ “멸망의 아들”대 “하나님의 아들”, “사악함의 비밀”대 “거룩함의 비밀”)와, 참된 신부로서의 교회에 반대되는 음녀 교회(계 17:1-)와, 거짓 삼위 일체(사단, 짐승, 거짓 선지자(계 19:20/계 20:1-3)에서 그 극에 달한다. 종말에 그리스도는 모든 사단의 세력을 무찌르실 것이며 적개심은 그칠 것이다.

 

3.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들

 

사단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반대한다.

(1)사단은 마음들로부터 말씀을 낚아채며, 세상적인 일들로 말씀이 숨을 쉬지 못하게 하며, 박해로 말씀을 시들게 한다.

(2)사단은 말씀을 이길 수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반대할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심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도박을 하거나 술 취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동떨어진 채 “종교적인 의”를 지니기 때문에 지옥으로 가고 있다.

(3)사단은 “기독교 세계”의 조직체 각 지점에 앉아서 진행되는 일들을 감독하고 있다.

(4)사단은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교리를 심는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단의 주된 방법은 흉내 내는 것이다. 사단은 모조복음을 전파하며 모조 교회를 세우고 모조 그리스도인을 심는다.

 

참과 거짓은 종말에 이를 때까지 함께 자라다가 하나님께서 나누실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세상을 “깨끗하게” 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말씀을 심는 것이며, “재생산”할 수 있는 곳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곳에 자신을 “심는” 일이다. 기독교 세계를 '깨끗하게” 하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여기에 주의할 점이 있다. 이 말은 지교회에서 징계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할 것과 불경건한 생활을 통하여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징계할 것을 명령하신다(고전 5:1-/마 18:15-18).

 

“가라지”는 시대의 종말이 이르기까지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처럼 잘 “연합하는” 때가 있었던가! 세계 교회 기구들, 세계 은행들, 세계 노동 운동들, 세계 무역 기구들 등이 조직되어 있다. 종교계에서는 교파들이 서로 연합하며, 기구들이 상호 보호를 위하여 합병한다. 가라지들이 불에 태워지기 위해 다발로 묶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는 동안 사단은 일한다. 교회가 잘 때는 사단이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심을 기회이다(잠 24:30-34 참조). 깨어 있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롬 13:11-14).

 

우리는 사단이 일하는 때를 간파하기 위하여 “영들을 시험”하여야 한다(요일 4:1-6). 이것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마 7:1-5), 사람들이 진실로 그리스도께 속했는지의 여부를 알아보는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행사하는 것이다(히 5:14).

 

▣ 성경에 나오는 네 가지의 자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마귀의 자녀이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①진노의 자녀(엡 2:3)-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로 태어났다. 아담으로부터 죄의 본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②불순종의 자녀(엡 2:2)-

죄가 무엇인지 알 만큼 충분히 나이가 들어서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불순종의 자녀들이 된다.

 

③마귀의 자녀-

인간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거절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진리를 알고 성령의 깨우쳐 주심을 느끼고도 그리스도를 거절하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히 6:4-8), 그리고 행위를 내세워 “스스로 의롭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마귀의 자녀가 되며, 모조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④하나님의 자녀(요 1:10-13)-

바리새인들은 신앙적인 사람들이었으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마태복음 14장 / 오천 명을 먹이심

 

우리는 이제 마태복음에서 왕의 은신(14-20장)이라는 새롭고 중요한 국면에 들어선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무리들로부터 물러나 계시며 제자들과만 많은 시간을 보내시면서 다가오는 예루살렘에서의 위기(십자가에 달리심)를 준비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조차 지상의 정치적인 왕국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기억하자. 십자가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는 무관한 것 같았다. 믿음을 시험하는 이같은 경험을 잘 감당하도록 이들을 준비시키는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14장은 세 가지 중요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세례(침례)요한의 죽음에 대한 것이며(1-12절)

두번째는 5,000명을 먹이심에 대하여(13-21절),

세번째는 폭풍의 기적(22-36절)에 대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사건들에서 우리는 현 시대의 과정을 보게 되는데, 이제 왕은 채이며, 거절당한다. 이를 하나님의 종들과 연관지어 볼 때 현 시대의 세 가지 특징을 볼 수 있다.

 

-핍박(1-12절): 그리스도의 종들이 그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며 죽는다.

-양식(13-21절): 그리스도의 종들이 사람들에게 줄 생명의 떡을 관리한다.

-보호(22-36절):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며. 그들을 구하실 것이다.

 

1. 핍박 (마 14:1-12)

 

요한이 여러 달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고(4:12 참조), 여기 기록된 사건이 있기 몇 주 전에 목베임을 당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3-12절은 이미 발생한 사건을 묘사하는 “과거 회상”이다).

 

마태는 요한의 죽음을 이 지점에서 삽입하고 있는데 그것은 왕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왕의 사자를 죽임으로써 왕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라고 10장 40절에서 말씀하셨다. 그 반대도 사실이다. 사자를 거절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요한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예고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 은거의 시기에 제자들과 논의하신 일의 주제이기도 했다.

 

이제 요한의 사역은 완성되었다. 그는 왕의 오심을 전하였고 하나님의 진리를 충성스럽게 설교하였다.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고 그는 쇠해야만 했다(요 3:30). 요한이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핍박을 받을 것이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왕을 거절하였고, 그들의 대부분이 주님의 사자들을 거절한다.

 

2. 양식 (마 14:13-21)

 

1) 예수 그리스도의 철수(13절)-

이제 예수께서는 철수하신다.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요한의 죽음에 대한 보고

-점증하는 헤롯의 적의

-설교 여행 이후 제자들이 쉬어야 할 필요성(막 6:31)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자들과만 같이 있어야 할 필요성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자신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소성케 하기 위해 혼자 있는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떨어져서 쉬지 않으면 우리는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반스 하브너)

 

2) 5,000명을 먹이심-

요한복음 6장은 이 기적이 행동으로 설교하신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시는 생명의 떡이다. 이 떡을 굶주린 군중들에게 주어 먹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지니는 특권이며 책임이다. 그의 종들은 그리스도로부터 개인적으로 떡을 받아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건네 주는 것이다.

 

3) 이 기적의 교훈-

여기에는 몇 가지의 교훈들이 있다.

(1)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적은 것을 취하셔서 그것을 많게 하신다.

(2)주님은 축복하시는 것을 또한 쪼개신다. 쪼개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3)오늘날 사람들은 죄의 광야에 있어(15절),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4)그리스도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시고 군중들을 먹이신다. 제자들은 충분한 돈이 없고, 장소로나 시간적으로나 나쁘다는 등의 많은 핑계를 대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서 취하신 것으로 필요를 만족시키셨다. 그리스도는 오늘날도 이같이 하신다.

 

3. 보호 (마 14:22-36)

 

요한복음 6장 15절은 그리스도께서 무리들을 떠나시는 것에 그처럼 마음을 쓰셨던 이유를 우리에게 밝혀 준다. 그들은 떡으로 배불렀고 주님을 왕으로 세우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생의 물질적인 것들을 약속하는 사람을 따를 것이지만, 예수께서는 “빵과 버터“만의 제자들을 가지려 하지는 않으신다.

 

이 부분에는 오늘날의 교회에 대한 아름다운 모형이 나온다. 제자들이 호수에서 폭풍과 더불어 싸우고 있을 동안 그리스도는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오늘날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죄의 폭풍과 싸우고 있을 동안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고 계신다. 주님의 재림은 아직 먼 것 같아 보이지만, 가장 어두운 시간에(네번째 파수꾼이 서는 오전 3-6시) 주님은 돌아오셔서 폭풍을 잔잔케 하시며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예정된 곳으로 데리고 가신다(요 6:21 은 그리스도께서 한 걸음 들여 놓으시자 배가 기적적으로 해변에 닿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베드로의 경험은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된다. 베드로는 “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었으므로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베드로가 말씀을 잊었을 때, 예수님을 쳐다보기를 멈추었을 때(히 12:1-2), 그는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폭풍우를 극복하고 불가능한 일을 행하는 비결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아들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할 때조차도 예수께서는 은혜롭게 도와주신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5장 7절을 기록하기에 적절하도록 훈련을 받은 셈이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돌보심)이라!”

 

오늘날의 시대는 교회에게 있어서 폭풍의 시대일 것이다. 제자들도 폭풍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것은 그들이 요나처럼 그리스도께 불순종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면 고난과 핍박이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며, 어느 날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오실 것이다. 비결은 믿음에 있다. 의심과 두려움은 반드시 함께 다니며 평화와 믿음도 함께 다닌다. “믿음이 적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지 않기를 빈다.

 

다음으로, 본 장 전체는 이 시대가 겪어 나아가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왕은 철수하였고 그의 종들에게는 박해가 있다. 그의 종들을 통하여 주님은 굶주린 세상에 귀중한 생명의 떡을 나누어 주신다. 주님의 종들은 폭풍우와 시련들을 통과하지만 그리스도는 다시 오셔서 그들에게 평화를 주시며 원수들에게서 구하실 것이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구세주이신가!

 

▣ 헤롯:

“헤롯”이란 이름은 일가족의 “성”(性)으로서, 신약에서의 서로 다른 헤롯들은 혼동을 일으키게 되기 쉽다.

“헤롯 대왕”은 아이들을 살육한 사람이며, “헤롯 안디바스”는 헤롯 대왕의 차자이다. 그는 실제로 왕이 아니었고, 단지 왕국의 4분의 1을 통치하는 영주에 불과했다. 그가 요한을 죽인 헤롯이며, 예수께서는 그의 앞에서 잠잠히 침묵을 지키신 일이 있다(눅 23:5-12).

“헤롯 아그립바”는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감옥에 가둔 왕으로서(행 12장), 헤롯 대왕의 손자이다.

마지막으로, “헤롯 아그립바 2세”는 헤롯 대왕의 증손자였으며, 사도 바울을 재판하였다(행 25:13-).

 

이 모든 헤롯들은 에돔인의 혈통으로서, 유대인들을 증오하였다. 그들은 배반을 일삼는 통치자들로서 성경에서는 “이 시대의 신”과 “적그리스도의 영”의 모형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요 살인자들이었다(요 8:44 참조).

 

마태복음 15장 /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정죄

 

우리는 계속해서 왕의 은신(14-20장)을 다루고 있다. 본 장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로부터 철수하셔서(21절)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가셨고 거기서 갈릴리로(29절), 마침내 갈릴리에서 마가단 해변으로 가셨음을 본다(39절). 이 기간 동안에 주님은 유대 지도자들과의 공개적인 마찰을 피하셨으며,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을 준비시키고 계셨다.

 

본 장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 지도자들(진리 대 전통)/ 1-20절

-예수 그리스도와 이방인들/ 21-33절

 

1. 예수 그리스도와 유대 지도자들-진리 대 전통 (마 15:1-20)

 

1) 그들의 비난(1-2절)-

이 종교적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에게 불리한 어떤 허물을 찾고 있었다. 아마도 예루살렘 공회에서 공식적인 위원회가 이루어졌던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먹을 때에 씻는 예식을 행하지 않음이 유대 장로들의 전통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사건과 몇 주 전의 5,000명을 먹이신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듯하다.

 

유대인들은 전통을 더 존중하였다. 미슈나(유대인의 전통 모음집)에는 “랍비들의 교훈과 모순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성경에 모순되는 것보다도 더 큰 범죄이다”라고 되어 있다. 랍비 엘르아셀은 “전통과 반대되게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에게는 장차 올 세상에서 받을 분깃이 없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23장 25-26절에서 그들의 씻는 전통을 정죄하셨다.

 

2) 그리스도의 응답(3-9절)-

그리스도는 언제나 고발자들을 침묵시키는 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셨음을 명심하자. 주님은 그들 자신의 불순종을 출애굽기 20장 12절과 21장 17절에서 지적하신다.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 “헌납”함으로써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부모를 돌보아야 할 의무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이 전통을 주의깊게 지키면서도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가! 그리스도는 이사야 29장 13절을 들어 그들의 종교가 마음에 있지 않고 다만 외적인 행위일 뿐임을 나타내신다. 그들은 “참된 의는 안으로부터 온다“는 산상 수훈의 교훈을 놓친 것이다.

 

3) 그리스도의 공지 사항(10-11절)-

그리스도는 전체 대중에게 연설하시며 바리새인의 전통이 무익하고 공허한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앞서 그는 성경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그들의 과오를 나타내기 위하여 명백한 논리를 사용하신다. 음식은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므로 인간을 더럽힐 수가 없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전쟁의 선포로 보았다.

 

4) 그리스도의 설명(12-20절)-

제자들까지도 대경실색하였다! 베드로조차 그의 명백한 가르침을 “비유”라고 불렀다. 인간의 전통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단순한 진리를 믿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그리스도는 거룩함이란 마음에서 나오는 문제라고 설명하신다. 사람들은 흔히 여기 열거된 죄들에 대해 마귀를 탓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간의 마음의 사악함을 탓하신다. 이는 곧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야 하며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다.

 

오늘날 세계는 종교적인 전통들에 묶여 있으며 도전을 받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 곧 영감받은 진리를 공표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전통 사이의 모순을 눈여겨보자.

 

인간의 전통 하나님의 진리

멍에를 씌우는 외적인 형식 자유를 가져오는 내적인 믿음

율법의 문자에 구속받은 하찮은 규율 율법의 정신인 기본적인 원리

인간을 높이는 인간이 만든 율법 인간을 겸손케하는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

“종교적인 경건“을 산출함-사망 참된 거룩함을 가져옴-생명

인간을 통하여 왔으나 비인격적임 인격적임-하나님과의 교제

 

우리는 참된 종교가 마음에서 온다는 사실을 계속적으로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믿으며(롬 10:9-10) 마음으로 사랑하고(마 22:37), 마음에서 찬송하고(골 3:16),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롬 6:17), 마음으로부터 드리며(고후 9:7), 마음으로부터 기도한다(시 51:10/시 51:17).

 

2. 예수 그리스도와 이방인 (마 15:21-39)

 

예수께서 이제 이방인의 지역을 향하여 출발하시려고 하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 여인의 영적인 상태는 에베소 2장 11-12절에 묘사되어 있다.

 

이방인을 고치신 두 경우에 있어서 모두 먼 거리에서 고치셨음은 주목할 일이다(본문/ 마 8:5-13). 영적으로 말할 때 이방인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 사람들에게 가시게 되는 일은 비밀이 아니었다(마 12:17-21).

 

그리스도는 이 여인의 간청을 네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응수하셨다. 첫째는 침묵을 지키셨고 다음으로는 거절하셨고, 그 다음에는 그 여자를 책망하시는 듯했으며, 마침내는 그녀의 믿음을 상으로 갚아 주셨다.

 

주님께서 그녀의 간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는 이방인인 그녀가 유대인의 용어인 “다윗의 아들”이란 말로 접근해왔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이 먼저 유대인이 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주님”이라고 부르자 주님은 그녀의 간청에 응답하셨다(롬 10:12-13 참조).

 

물론 주님의 지체하심은 그녀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방인들은 유대 민족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기꺼이 취하려 했었다. 주께서 큰 믿음을 지녔다고 추천하신 두 사람이 모두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유대인에 대한 기소장이 아닐 수 없었다(마 8:10/마 15:28).

 

32-39절에 나오는 군중은 주로 이방인들이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이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4000명을 먹이신 사건을 앞서 행하신 5,000명을 먹이신 사건과 혼동하지 말자.

 

다음의 도표는 두 사건의 대표적인 면을 보여 준다.

 

오천명을 먹이심(마 14:15-21) 대조점 사천명을 먹이심(마 15:32-39)

유대인 주요대상 이방인

갈릴리 벳새다 장 소 데가볼리(막 8:31- 이하)

떡 다섯개, 물고기 두마리 사용된 것 떡 일곱개, 작은 생선 두어마리

열 두 바구니 남은 양 일곱 바구니

봄 시기 여름

하루 모인 기간 사흘

 

제자들이 주님의 능력을 깨닫는 데에 참으로 느리다. 33절에 나오는 그들의 불신앙은 5,000명을 먹이신 이전의 기적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주님이 이방인들을 먹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변화가 있음을 제자들이 배워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이기도 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을 구원하고 만족시켜 줄 것을 원하셨을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구원하시며 만족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 기적에 내포된 영적인 교훈들에 대하여 마태복음 14장에 나온 대목을 점검해 보자.

 

▣ 실천적인 교훈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전통보다 중요하다. 바울이 그의 서신서에서 “전통”이란 말을 썼을 때는 인간의 전통이 아니라 사도들이 말로 전한 교훈을 가리킨다(살후 2:15/살후 3:16/고전 11:2). 그 교훈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첨가하거나 전통으로 인하여 말씀에 힘을 잃게하는 것은 위험하다. 누군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당신의 성경을 단단히 제본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하나님 말씀에 전통을 첨부한다는 것은 당신의 영혼에 진노를 첨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전통을 깨는 데에는 참으로 느리다. 사실상, 다른 사람들의 말은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심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과 교회를 축복해 주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어떤 값을 치를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순종해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 위대한 고백

 

본 장에서의 가장 핵심이 되는 교훈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지만, 그래도 배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장 전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은 “은신” 중에 있으며, 주님은 다가오는 죽음과 고난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계심을 기억하자. 이 지점에서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은신 기간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 순간으로부터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게 될 것을 공개적으로 가르치셨으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들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본 장에는 대립(Conflict/ 1-5절), 혼란(Confusion/ 6-12절), 고백(Confession/ 13-20절), 바로잡음(Correction/ 21-28절)의 네 가지 뚜렷한 움직임이 보인다.

 

1. 대립-대적들에게 시험 당하시는 그리스도 (마 16:1-5)

 

서로 원수 관계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리스도를 시험하기 위하여 서로 연합한 것을 주목하자! 이와 같은 이유로 빌라도와 헤롯은 “친구가 되었다”(눅 23:6-12),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이 땅에 속한 표적들로 여겨 신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쩌면 이들은 과거에 엘리야가 했던 대로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거나, 또는 모세가 했듯이 하늘로부터 떡이 내려오기를 원하였는지도 모른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신다.

-이들은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일들은 해석할 수가 있으나 영적인 일들을 해석할 수가 없다.

-그들은 사악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였다.

-그들의 공허한 종교를 위하여 참되신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의 종교적인 사람들과 얼마나 유사한가!

 

주님은 다시금 그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을 지적하셨고, 선지자 요나를 언급하심으로써 그의 사역이 이방인을 위한 것이 될 것을 나타내셨다(본 서의 12장 해설 참조).

 

2. 혼란-제자들의 불신앙 (마 16:6-12)

 

제자들은 영적인 일보다 육신적인 일들에 관하여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통탄할 상태에 관하여 유감으로 생각하고 계신 동안에, 제자들은 떡을 가져오는 것을 잊은 일로 안달하고 있었다.

 

4,000명을 먹이고 남은 일곱 광주리는(마 15:37)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영적인 일들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으로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오직 육신적인 떡만을 생각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마태복음 13장 22절의 예증이 되는 일들이었다. 즉, 세상의 염려로 말씀이 막히는 것이다. 그들은 믿음이 없음을 인하여 책망을 들었다. 떡이 필요하다면 주님이 그것을 공급하실 것을 의지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예수께서는 떡 몇 조각과 생선 몇 마리로 4,000명을 먹이지 않으셨던가!

 

누가복음 12장 1절은 누룩을 외식이라고 명명하는데, 왜냐하면 외식(거짓된 삶)이라는 누룩과 거짓 교리들이 신자들의 마음에, 그리고 교회에 들어가게 되면 은밀하게 자라나 전체를 부패시키기 때문이다(고전 5:6).

 

3. 고백-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 (마 16:13-20)

 

민중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얼마나 혼돈을 일으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주님을 높이 존중해야 할 사람으로 여겼으며 위대한 선지자의 위치에 그를 두었으나, 그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을 볼 수 있는 인식력은 결여되어 있었다.

 

민중은 주님을 세례(침례)요한과도 비교하였으나 이들 두 사람의 사역은 비슷하지 않았다(마 11:18-19). 아버지 하나님의 계시와(마 11:27-) 성령의 증거가 없이는(고전 12:3) 아무도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고백은 구원을 받는 데 중요한 일이다(요일 5:10/요일 2:22-23/요 20:31).

 

18-19절은 수십 세기를 내려오며 논란이 되고 있다. 가톨릭교도들은 이 구절들로부터 교황의 직무와 인간의 삶을 다스릴 교회의 권한을 주장하지만, 복음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완전히 다르게 보고 있다. 이 구절의 상징들을 살펴봄으로써, 성경이 있는 그대로를 스스로 말하게 하자.

 

1) 반석-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이사야 28장 16절을 인용하시면서 이를 언급하셨으며(마 21:42) 베드로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벧전 2:4-8/행 4:11-12/시 118:22).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지칭했으며, 반복해서 말하기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였다(엡 1:20-23/엡 4:8-16/엡 5:23/골 1:18 참조). 구약전체를 통하여 반석은 인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신 32:45/단 2:45/시 18:2).

 

예수께서는 “너는 베드로(페트로스-작은 바위)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기초가 되는 거대한 암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고전 3:11 참조).

 

2) 열쇠-

이것은 왕국에서의 베드로의 청지기 직분을 가리킨다. 이 열쇠들은 교회의 열쇠가 아니라 왕국의 열쇠이며, 죽게 하거나 영원히 살게 하는 열쇠가 아니다. 그러한 열쇠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다(계 1:18).

 

성경에서 열쇠는 권한과 청지기 직분을 상징한다(사 22:22/눅 11:52). 베드로는 이 열쇠를 유대인들과(행 2장), 사마리아인들(행 8장), 이방인들에게(행 10:1-), “믿음의 문을 열어 줄” 때(행 14:27) 사용하였다. 이것은 청지기직분으로서, 주인 노릇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3) 매고 푼다는 의미-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뜻한다. 18장 18절에서 이 말은 교회에서의 징계에 사용되었으며, 그 권한은 베드로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그 시대에는 랍비가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금하거나 허락할 때에 “매고 푼다”는 말을 사용하였다. 윌리암의 신약 성경을 보면 더욱 상세하게 번역이 되어 있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네가 금하는 것은 천국에서는 이미 금지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네가 땅에서 허락하는 것은 천국에서는 이미 허락된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므로 교회는 천국이 무엇을 하는 곳인가를 말하지 않으며 천국이 교회에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을 이 땅 위에서 순종한다.(Amplified NT와-Expanded NT 참조)

 

베드로는 교황이 되겠다고 주장한 일은 결코 없다(벧전 5:1-4). 베드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에 유의하자. 이 구절은 신약에서 “교회”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이 단어야말로 바울의 사역에 보다 큰 의미를 가져다 준 것이다.

 

4. 바로잡음-거치는 돌이 된 베드로 (마 16:21-28)

 

그리스도는 그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죽음을 공개적으로 알리신다. 주님은 이미 여러 가지 상징들로 자신의 죽음을 알리셨으나(요 2:19/요 3:14/요 6:15/마 9:15/마 12:40-41), 이제는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막 8:32).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특히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는 대신 우회해 가실 것을 권함으로써 마태복음 4장 8-10절에 나오는 사단의 시험을 반복하였다. 사단은 베드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의 좁은 길에 거치는 돌이 되게 한 것이 분명하다. 사단은 다시 베드로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방해하였다(눅 22:31- 이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꾸짖으셨고 신자의 삶에 놓여 있는 십자가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아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치욕을 짊어지고 순종하며 주님을 따름에 있어 세상과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뜻한다. 베드로는 고난과 영광이 언제나 함께 다닌다는 것을 배워야 했다(벧전 4:12-19/벧전 5:1/벧전 5:10).

 

▣ 반석에 대한 부가적 연구

에베소서 2장 20절은 가끔 베드로가 교회의 기초석이었음을 “입증”하는 데에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만일 그러하다면 다른 사도들과 신약 예언자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기초석”이란 사도들과 선지자들로 구성된 기초란 뜻이 아니라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놓여진 기초,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고전 3:11).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는 거침이 되는 돌이었다(롬 9:32). 이방 민족들에게는 다니엘 2장 34절에 나오는 쳐부수는 돌일 것이며,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마태복음 21장 44절에 나오는 가루로 만드는 돌이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기초석이며 으뜸되는 모퉁이 돌이시다(고전 3:11/엡 2:20). 그는 어느 날 이스라엘 지상 왕국의 택함받은 돌이 되실 것이다(사 28:16).

 

 

마태복음 17장 / 변화산 상의 그리스도

 

1. 영광의 왕 (마 17:1-13)

 

그리스도의 변화는 그의 지상 사역 중 핵심적인 사건의 하나로서, 인간의 육신에 가리워진 그의 영광이 빛을 발한 유일한 경우이다(요 1:14 참조).

 

“변화하다”라는 단어는 우리가 보통 변형이라고 쓰는 말과 같은 뜻으로, “내면세계의 변화”를 말한다. 이 영광은 외부에서 온 빛의 반사가 아니라, 내적인 거룩함이 나타난 것이다. 같은 단어가 로마서 12장 2절(transformed)과 고린도후서 3장 18절(Changed)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성장을 가리킨다.

 

1) 동참자들-

그리스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모세, 엘리야, 그리고 성부 하나님으로서, 모두 일곱이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세가지 특별한 경험을 한다. 곧 변화산에서, 야이로의 집에서(막 5:37-) 겟세마네 동산에서(마 26:36-46)이다. 각 경우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새로운 교훈을 주셨다.

 

2) 목적-

무엇보다도 변화는 다가오는 왕국의 상징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 중 더러는 왕국에 계신 주님의 모습을 볼 때까지 죽음을 보지 않을 사람도 있다고 말씀하셨었다(마 16:28). 베드로후서 1장 16-20절을 주의깊게 읽으면 이 구절이 약속된 왕국과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었고(16:16)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실이라는 것을 배웠다(16:21-23). 그와 다른 제자들은 아마도 이렇게 묻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는다면 왕국에 대한 모든 약속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약속들이 성취될 것인가?” 그리스도는 그의 변화를 통하여 말씀이 굳게 설 것이며 왕국이 임할 것임을 확신시키셨다.

 

이 장면은 실제로 왕국의 모형이다.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셨다. 세 사도들은 구속받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며, 모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성도들을 대표한다. 엘리야는 휴거된 성도들을 대표하고(엘리야는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기슭에 있는 군중들은 다른 민족들을 대표하고 있다.

 

또 다른 목적은 주께서 받을 고난을 위하여 힘을 북돋아 주는 데에 있었다. 모세와 엘리야는 다가오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문자적으로 말한다면 “탈출”)에 대하여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아버지의 음성이 아들을 격려하였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에게도 격려가 되었는데, 주님이 고난과 죽음을 경험할 때에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만일 이들이 이 장면을 기억했다면 주님을 저버리거나 주께서 죽으셨을 때 희망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험-베드로는 다시 육적인 관점으로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못하게 하려고 부추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꾸짖으신다.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이 말은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기 때문이다(히 1:1-3).

 

구약을 대표하는 율법(모세)과 선지자(엘리야)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눅 24:27/눅 24:44). 그런데 그리스도는 모세와 엘리야보다 우월하시다(롬 10:4/행 10:43). “오직 예수”(8절)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오직 한 가지 안전한 마음가짐이다.

 

당황-산을 내려오며 제자들은 말라기 4장 5-6절과 3장 1절에 나오는 약속을 가리키며 엘리야에 대하여 주님께 물었다. 그리스도는 세례(침례)요한이 영적으로 이 약속들을 성취한 것이라고 언급하신다(눅 1:17). 그런데 엘리야 자신도 왔었다(마 11 장 / 본 서의 “말라기” 참조).

 

2. 능력의 왕 (마 17:14-21)

 

우리는 왕과 더불어 영광의 산에 언제까지나 머무를 수는 없다. 우리는 사단이 역사하고 있어 도움이 필요한 골짜기로 주님과 더불어 내려가야만 한다. “휘장 안”과 “영문 밖”은 승리를 위한 필수적인 두 가지 요소이다(히 10:19-22/히 13:13).

 

산기슭에 남아 있던 아홉 제자들은 실패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귀신을 극복하는 능력을 잃었던 것이다(10:8). 원인은 그들의 불신앙과 헌신의 결여에 있었다. 여기 상징적인 모습이 나온다. 왕이 다시 오실 때 그가 사단을 결박하실 것이며 마귀의 능력으로부터 세상을 자유롭게 하실 것이다(계 19:11-/계 20:1-3).

 

3. 겸손의 왕 (마 17:22-27)

 

얼마나 역설적인가! 왕은 그의 성전세를 지불하지 못할 만큼 빈곤에 처해 있다! 진실로 주님이 가난해지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고후 8:9). 이 기적에는 주목해야 할 네 가지 특징적인 성격이 있다.

 

주님이 자신의 필요를 위하여 행하신 유일한 기적이다. 반 세겔의 성전세금은 모든 유대 남자들이 내는 것이었다(출 30:11-). 예수께서는 너무나 가난해서 이 정도의 금전도 없으셨다. 예수께서는 얼마나 겸손하신가(빌 2:5-8).

 

마태만이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왕의 복음이다. 이 기적도 그리스도의 왕권과 관련이 있음이 틀림없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가 “왕의 자녀”이므로 세금을 낼 필요가 없음을 확실히 하신다.

 

그리스도는 복잡한 기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의 왕권을 입증하셨다. 동전이 바다에서 분실되었고, 물고기가 그것을 입 속에 넣었으며, 다음으로 그 물고기가 베드로의 낚시를 물어야 했다! 그리스도는 “바다의 물고기들”을 다스리신다(시 8:6-8/히 2:6-).

 

돈을 사용하신 유일한 기적이다. 이 세금은 유대인들이 애굽의 노예에서 구속받은 일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았으며, 은이나 금으로 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은 한 세겔은 그러한 구속의 상징이었다. 베드로는 이 교훈을 알게 되었다(벧전 1:18-19).

 

이 기적은 베드로를 위해서도 행해졌다. 예수께서는 특히 베드로를 위하여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그의 장모를 고치셨고 바다 위를 걷도록 도우셨으며, 가라앉을 때 구해 주셨고 물고기가 많이 잡히게 하셨다. 사도행전에서도 그리스도는 여러 번 베드로를 구해 주셨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나와 너를 위하여,” 즉 베드로에게 유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하여(벧전 5:7)라고 말씀하셨다.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리스도는 그것을 해결하실 수 있다.

 

마태복음 18장 / 교회와 천국에 대한 가르침

 

1. 큰 자에 대한 교훈 (마 18:1-14)

 

1) 제자들의 질문(1절)-

이 질문은 최근에 있었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변화산 상의 경험이나 성전 세금과 관련된 베드로의 경험에 자극을 받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편애”를 하며 자기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들은 제자들에게 왕국이 임할 것이며 그들도 왕국에 있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으라고 권하고 싶다. 하지만 높은 지위와 위대해질 것을 추구하는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다(롬 12:10/롬 12:16).

 

2) 실물 교습(2-6절)-

그리스도는 어린 아이를 위대함의 예증으로 삼으신다. 명예는 겸손에서 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올리시기 전에 우리는 낮아져야 한다(벧전 5:5-6). 위대한 성도들은 모두 겸손한 성도들이었다. 어린 아이가 죄가 없거나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특성들을 보여 준다.

 

즉, 어린 아이는 잘 배우며 요구하는 것이 단순하다. 또한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며, 그는 자기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버지를 의존한다. 물론, 우리가 어린 아이들이 되는 유일한 길은 거듭나는 것이다(요 3장).

 

3) 경고(7-10절)-

“이 소자 중의 하나”라고 하실 때 어린 아이들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뜻하는 것이다. 다른 신자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롬 14:1-23/고전 8:1-13). 몸의 지체들이 죄를 짓게 할 때는 “잘라 버리라”고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문자 그대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는 손이나 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잘라 버리라”는 명령에서 주님은 죄를 철저하고 완전하게, 무자비하게 다루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우리는 “죄를 가지고 놀아서는 안 된다.” 또는 오랜 시간을 두고 제거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직면하고 고백하고 버려야 한다.

 

4) 비유(11-14절)-

11절을 누가복음 19장 10절과 비교한다면 “구한다”(to seek)는 말이 빠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린 아이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시며 어린 아이들은 책임 있는 나이가 된 후 잃어진 영혼이 되기는 하지만, 어른들처럼 멀리 방황하는 경향이 있지는 않다. 이들 역시 선한 목자에게 구원을 받아야만 한다.

 

이 전체 구절은 어린 아이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 것(6절), 업신여기지 말 것(10절), 그리스도 밖에서 멸망 받지 않게 할 것(14절)을 경고한다.

 

주님은 어린 아이들이 왜 중요한지 몇 가지 이유들을 말씀하신다. 이들은 참된 위대함의 본보기이며(4절), 그리스도를 대리한다(5절). 천사들이 아버지 하나님 앞에 그들을 대신한다(10절). 그리스도는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며(11절),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다(14절).

 

부모들이(또는 다른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거침이 되어 구원의 길을 잃게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가정에서 좋은 본보기가 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타락하는 부모들이나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어른들이 심판 때에 많은 것으로 책임추궁을 받을 것이다.

 

2. 용서에 대한 교훈 (마 18:15-35)

 

그리스도는 “가족의 문제”를 다루시며 이제 어린 아이로부터 형제 사이의 관계로 옮겨 가신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하다면 이러한 교훈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실패하며 죄를 짓기 때문에 교회라는 가정을 행복하고 거룩하게 유지해 나갈 방법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1) 교회의 징계(15-20절)-

권징의 형식이 명백하게 나와 있다. 먼저 개인적으로 면담을 하고, 다음으로 두 세 증인을 데리고 가며, 다음으로 그 문제를 교회에 상정한다.

 

“네 형제를 얻는다”는 목적에 유의하자. 교회의 징계의 동기는 사랑이다. 우리는 죄를 범하는 형제를 도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20절) 교회가 순종적이고 순전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의 태도는 체포하려고 나온 경찰의 태도와는 달라야 한다. 의사가 그리스도의 몸의 상처를 치료하려는 것 같아야 하며, 이 상처를 그냥 두면 병과 죽음을 퍼지게 될 것이다.

 

18절은 “매고 푸는 일”이 이 징계의 문제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일과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고린도의 범죄한 형제를 “매고”, 고린도후서 2장에서 그가 자신의 태도를 표명한 후에 “푼다‘ 이것은 영혼의 영원한 운명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19절은 기도가 교회의 징계의 중요한 요소임을 암시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위반자와 우리 자신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영적으로 그를 지원하기를 원한다(갈 6:1). 교회의 징계에 대한 다른 구절들을 위해서는 로마서 16장 17절과데살로니가후서 3장 14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5장을 보자.

 

2) 마음으로부터의 용서(21-35절)-

베드로는 일곱 번 용서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영적으로 특출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유대의 랍비들은 세 번으로 충분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용서에 제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참 용서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며, 사랑은 잘못한 일들을 기록해 두지 않기 때문이다(고전 13장).

 

비유가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왕이 그 종의 천 이백만 달러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면 그 종은 친구의 15달러 정도는 탕감해 줄 수 있어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다(엡 4:32/골 3:13).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 중의 하나는 그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요일 3:10-17).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들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교회는 조용히 자라나 전체의 친교를 타락시키는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삼가해야 한다.

 

▣ 부가적 연구

18장 3절의 “돌이켜”라는 말은 회심한다(converted, to turn)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조차 돌이켜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을 따르는 데서 돌이켜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눅 22:32). 죄인들이 죄로부터 돌이켜 그리스도께 합할 때 그는 회심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성도들을 위하여 특별한 사역을 한다(마 18:10/히 1:4/시 34:7/시 91:11 참조). 죄인들이 구원받으면 천사들이 기뻐한다(눅 15:7-10). 사도행전 12장 15절과 더불어 마태복음 18장 10절은 “보호하는 천사들”(수호 천사)이라는 개념의 기초가 되어 왔다. 천사들이 신자들을 보호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jo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