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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예수의 적대자들과 예수의 진정한 가족

by 은총가득 2020. 9. 4.

예수의 적대자들과 예수의 진정한 가족
- 샌드위치 구조에 비추어 본 마가복음 3:20-35 이해 -

 

양용의 교수

 

서론

 

마가복음 3:20-21, 31-35에는 예수를 찾아온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에 대한 예수의 반응이 기술되고 있다. 사람들의 소문에 그녀의 아들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녀의 남은 아들들과 더불어 아마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먼 길을 달려 왔던 것으로 보인다(21, 31절). 그런데 어머니와 형제들의 그처럼 안타까워하는 모습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예수는 그들의 그러한 태도에 아주 냉담하게 반응하고 있다(33절).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마리아의 행동에 있어서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예수는 마리아의 그러한 행동에 대해 그처럼 냉담한 반응을 보였어야만 하는가? 본문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라면 누구든지 이러한 질문들에 직면하여 당혹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마가복음의 처음 독자들에게도 이러한 당혹감은 결코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 자신 역시 그의 독자들이 이러한 당혹감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점은 당연히 예측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는 이처럼 예측되는 당혹감을 오히려 매우 근본적인 제자도의 진리를 소개하는 발판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진리를 소개하기 위해 사용하는 의사 전달 수단은 그가 그의 복음서에서 즐겨 사용하는 샌드위치 구조이다.

 

1. 샌드위치 구조 - 마가의 특징적 구조

 

샌드위치 구조란 한 사건에 대한 기술 사이에 언뜻 보기에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별개의 이야기를 삽입시켜 놓는 방식으로서,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비해 마가복음에서 특징적으로 자주 나타난다. 이 샌드위치 구조는 A1-B-A2 도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 구조 안에서 B-장면은 독립된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는데 반해, 양쪽을 감싸는 A-장면은 이야기의 완결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B-장면은 단일한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으며, 독자들이 A1과 A2 사이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장황하지 않다.
마가의 이러한 특징적 구조는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아마도 양식 비평의 영향 때문에) 별로 관심을 끌지 않다가, 편집 비평과 구조주의의 영향으로 비로소 주석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가 이러한 샌드위치 구조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마가가 이 구조를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안되어 왔다. 어떤 이들은 마가가 샌드위치 구조를 시간의 경과를 보다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용하였다고 제안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다른 이들은 이 구조가 두 이야기 사이의 모종의 관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문학적 도구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한편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후자의 입장을 원칙적으로 지지하면서, 문제의 두 이야기들 사이의 관계를 돋보이게 하려는 마가의 목적이 주로 신학적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은다. 특히 J.R. Edwards는 그 신학적 목적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안한다. 즉, 샌드위치 구조는 복음서의 주요 주제들을 강조해 주는데, 특히 믿음, 제자도, 증거, 배교의 위험 등의 의미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Edwards는 또한 가운데 삽입된 이야기(B)가 거의 언제나 샌드위치의 신학적 목적에 대한 열쇠를 제공해 준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삽입된 이야기(B)가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야기(A)의 신학적 의미를 돋보이게 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샌드위치 구조와 관련된 이러한 일반적인 제안이 과연 마가복음 3:20-35의 경우에는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 아래의 논의에서 살펴볼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마가복음 3:20-35의 샌드위치 구조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입: 20절 - A 장면과 B 장면의 배경
A1: 21절 - 예수의 가족이 그를 붙들러 나옴.
21a절: 예수의 가족의 출발.
21b절: 예수의 가족의 예수께 대한 이해: '그가 미쳤다'.
B: 22-30절 - 예수와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 사이의 대화.
22a절: 서기관들의 첫 번째 비난: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22b절: 서기관들의 두 번째 비난: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
23-27절: 두 번째 비난에 대한 예수의 답변.
28-30절: 첫 번째 비난에 대한 예수의 답변.
A2: 31-35절 -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요청과 예수의 답변 및 예수의 진정한 가족에 대한 가르침.

 

A1과 A2가 연결된 단락들이라는 사실은 다음 세 가지 점에 의해 특히 두드러진다. 첫째, A2의 처음 시작 구절인 kai; e[rcetai(31절)는 A1의 처음 시작 구절인 kai; e[rcetai(20절; 참조. 21a절: ejxh'lqon)를 회상시켜 준다. 둘째, A1과 A2에서 예수는 공히 '무리'에게 둘러 싸여 있다(20, 32절). 셋째, A1과 A2에서 예수의 친족들은 공히 예수를 제어하려 한다. 21절에서 마가는 명백히 말한다: '예수의 친족들이 ... 붙들러 나오니'. 한편 A2에서도 '부르다'(kalei'n, 31절)와 '찾다'(zhtei'n, 32절)라는 두 동사가 사용됨으로써 이와 유사한 상황이 암시되고 있다. 한편 본 단락의 이러한 샌드위치 구조는 다른 공관복음서들의 평행 단락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데(참조. 마 12:22-37, 46-50; 눅 11:14-23; 12:10; 8:19-21), 이는 마가가 이 구조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그렇다면 마가가 이 단락에서 샌드위치 구조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과연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학적 목적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었는가? 만일 그러했을 경우 그가 이 구조를 통해 강조하고자 한 신학적 주제는 무엇이었는가? 아래에서 본 단락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를 통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2. 예수의 진정한 가족(20-21, 31-35절)

 

2.1. A1(20-21절)

20-21절은 그렇게 조직적으로 구성되지 못한 단락으로서, 그 의미 또한 그렇게 명확하지 못하다. oiJ par! aujtou'는 누구를 의미하는가? 그들은 어디로부터 나왔는가? 21b절의 e[legon의 주어는 누구인가? 21b절의 ejxevsth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하지만 3:20-35의 샌드위치 구조에 의거한 문맥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상당히 개연성 높은 대답들을 제공해 준다.
21절의 oiJ par! aujtou'는 문자적으로 '그의 곁으로부터 온 자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희랍 고전들에서는 '그의 사절단/대사들'이라는 의미로(Thucydides 7.10), LXX에서는 '그의 추종자들'(마카베우스1서 9:44; 11:73; 마카베우스2서 11:20 등), '그의 부모/친척'(잠 31:21) 등을 지칭한다. 본 절에서 이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나누어져 있다. D.H. Wansbrough는 이 구절이 예수의 가족이라기보다는 그의 제자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구절이 예수의 직계 가족을 지칭한다는데 의견을 모은다. 이러한 제안의 타당성은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이 3:20-35의 샌드위치 구조에 비추어 볼 때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가족은 그에 관한 소문을 듣고 나사렛으로부터(참조. 1:9) 나와(ejxh'lqon) 가버나움으로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예수께서 미쳤다'(ejxevsth)고 생각하였으며, 따라서 예수를 붙들어(krath'sai) 자신들의 보호 하에 두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미친' 상태란 귀신 들린 상태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아마도 그의 가족은 예수를 귀신들린 것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3:20-35의 샌드위치 구조에 비추어 볼 때, 그의 가족의 예수께 대한 이해는 22절에 나오는 서기관들의 이해(참조. 30절)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릇된 것으로 드러난다.


과연 이보다 더 큰 오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오해가 육신적으로 그와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생겨났다는데 있다. 이는 예수의 사역의 비밀한 모습, 즉, 감추어진 모습을 시사해 준다. 예수의 사역은 그것을 깨닫도록 허락된 자들에 한해서 그 진정한 의미가 이해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는 비록 그들이 예수와 세상적인 관계에 있어서 아무리 가까운 관계에 있을지라도 그 진정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참조. 4:10-12).
마가는 여기서 예수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서기관들의 이야기와 샌드위치 시킴으로써, 육신적으로 가까운 관계가 예수께 대한 진정한 이해를 보장해 주지 못하며, 그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결여한 자는 비록 그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내부인이 아니라 외부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밝히 드러내 보여 주고자 한 것 같다(참조. 31-35절). 또한 예수를 제어하여 그의 선교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그의 선교 방향을 바꾸려 하는 시도는, 비록 그것이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인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사단과 혼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심각한 실책이며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한 것 같다. 사실 이러한 실책은 그의 가장 두드러진 제자들 중 하나였던 베드로에 의해서도 저질러지게 된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가로막고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려고 할 때, 예수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꾸짖음을 발하신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8:33).


그들의 예수께 대한 이해가 이처럼 잘못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위해' 행하려던 그들의 조치(즉, 그들 붙들려 하는 시도)는 진정으로 예수를 위한 행동이 될 수 없었으며, 마치 베드로의 조치가 그러했던 것처럼(참조. 8:33),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보다는 사단의 뜻을 이루는 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예수의 가족이 그에게 행하려는 행동에 사용된 krath'sai('붙든다')라는 동사는 마가복음에서 '체포하다'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과격한 의미의 동사인데(예. 6:17; 12:12; 14:1, 44, 46, 49, 51), 이로 미루어 마가는 예수의 가족의 행동을 예수를 죽이려는 세력의 행동과 같은 부류로 간주하는 듯 하다.

 

2.2. A2(31-35절)

마가는 21절에서(특히 22절 및 30절과의 관계 속에서) 시사한 예수의 가족의 문제점을 31절 이하에서 보다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 있다'(e[xw sthvkonte")고 하는 31절의 표현은 물론 역사적 현장에 대한 묘사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마가에게 있어서 이는 보다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4:10-12에서 '밖에 있는 자들'(ejkeivnoi" ... toi'" e[xw)이란 예수의 제자 집단, 즉 진정한 가족에 들지 못한 자들을 지칭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마가의 이러한 언급은 예수의 육신적 가족이 그 당시 예수의 진정한 가족에 들지 못한 자들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그의 가족들이 밖에 서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무리는 예수를 둘러앉아 있다는 사실(32절, ejkavqhto peri; aujto;n o[clo"), 그리고 그 둘러앉은 무리를 둘러보시며 '내 모친이요 내 형제들'이라고 지칭하신 사실(34절)은 이러한 신학적 암시를 더욱 분명히 해 준다.


그렇다면 예수의 [진정한] 가족은 누구인가(33절)? 예수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에 있어서 전혀 불분명하지 않다. 먼저 예수는 밖에 서 있는 그의 육신적 가족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 둘러앉아 있는 자들'(34절, tou;" peri; aujto;n kuvklw/ kaqhmevnou"; 참조. 32절의 ejkavqhto peri; aujto;n o[clo")을 가리켜 그의 [새로운/진정한] 어머니요 형제들이라고 선언한다. 그런데 마가는 이 표현 역시, 31절의 '밖에 서 있다'는 표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4:10-12에 비추어 이해할 것을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10에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주어지고 있는 대상은 '열 두 제자와 함께 그의 주변에 있는 자들'(oiJ peri; aujto;n su;n toi'" dwvdeka)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그의 주변에 있는 자들'(oiJ peri; aujto;n)이라는 표현은 공관복음서 평행 구절들 중 마가복음에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마가가 4:10에서 '그의 주변에 있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그 구체적인 대상으로 32절과 34절에서 그의 진정한 가족들로 간주되고 있는 '그의 주변에 둘러앉아 있는 자들'을 주목할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예수의 진정한 가족에 관한 예수의 이러한 선언은 마가의 게 매우 충격적이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마가는 이처럼 충격적이고 엄청난 선언의 타당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샌드위치 구조를 도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2.1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샌드위치 구조는 21절에 나타난 예수의 가족들의 예수께 대한 이해 및 태도가 22-30절 나타난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들의 예수께 대한 이해 및 태도와 마찬가지로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음을 인상적으로 증거해 주며, 바로 이러한 사실은 그 충격적인 선언의 근거를 제시해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는 그의 이러한 상식 밖의 선언의 이유를 35절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명백히 밝히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께서 밝히신 바 그의 진정한 가족의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 즉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는 심지어 그의 육신적 가족 관계까지도 그의 진정한 가족의 근거로부터 배제시킴으로써, 그 밖의 어떤 관련성도 진정한 가족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밝히신다.


한편 본 단락은 그 샌드위치 구조를 통해 '제자도'의 대가(1:16-20; 3:14; 8:34-38; 10:29-30)에 대해서도 암시적으로나마 강조해 준다. 예수의 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데, 그의 이러한 길은 그의 가족들로부터의 배척을 초래하였다(참조. 6:1-6a).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경험은 제자들에게도 하나의 모본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예수는 누구든지 그의 제자가 되려면 그의 가족 관계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하신다(참조. 1:20; 10:29). 특히 예수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열두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3:13-19)에 바로 뒤이어 나오고 있다는 점은 이 이야기가 제자도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 준다.

 

3.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들(22-30절)

 

3.1. 예수의 사역에 대한 서기관들의 적대적 반응(22절; 참조. 21절)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 온 서기관들은 두 가지 연결된 주장으로 예수를 비난한다: 즉, 1) 예수는 바알세불에 들렸다; 2) 그의 귀신 좇는 일은 귀신들의 왕의 힘을 빌려 한 것이다. '바알세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제안들이 있어 왔지만, 이는 아마도 '거처들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lbz l[b, 바알 제불)를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참조. 마 10:25). 이러한 제안은 3:25, 27의 oijkiva에 대한 언급들에 의해서도 지지를 얻는다.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왔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마가는 아마도 그들이 예수께서 장차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는데 공모할 자들임을(참조. 10:32-33) 은연중에 암시하고자 한 것 같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권위가 예수의 능력 있는 가르침과 기적들에 의해 위협을 당하게 되자(참조. 1:22, 27) 예수의 그러한 활동을 어떻게든 제어해 보고자 했을 것이며, 그 결과 예수의 사역을 귀신의 왕의 권위로 하는 것으로 몰아 부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답변에 의해 그러한 주장의 허구성이 드러나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시도가 무위로 돌아가게 되자, 그들은 이제 예수 자체를 제거하고자 했을 것이며, 예수는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시게 된다(10:32-33).

 

3.2. 서기관들에 대한 예수의 반응 (23-30절)

서기관들의 두 가지 그릇된 주장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역시 두 가지로 나타난다.

 

3.2.1. 더 강한 자 (23-27절)
먼저 예수는 서기관들의 두 번째 주장(즉, 예수께서 귀신들의 왕의 힘을 빌어 귀신들을 좇아 내신다는 주장)에 대해 하나의 비유를 들어 반박하신다. 예수의 비유의 초점은 명백하다. 귀신들의 통치자 사단은 '강한 자'이다. 하지만 사단보다 더 강한 자가 있는데, 그는 곧 예수 자신이시다. 그러기에 그는 강한 자 사단을 결박하고서 그의 집에 들어가 그의 세간(ta; skeuvh)을 늑탈하고 있는 것이다(27절). 그의 이러한 힘은 성령으로부터 기인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이는 28-30절의 내용에 의해 강력히 시사되고 있다(참조. 마 12:28). 하지만 예수의 비유에는 27절과 23-26절 사이에 긴장이 현존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23-26절은 사단의 나라가 아직도 막강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함으로써만 그 논지가 유지될 수 있는데 반해, 27절은 예수께서 이미 그 나라의 왕 사단을 결박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긴장 관계를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의 긴장 관계를 통해 적절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수는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사단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셨으며, 따라서 사단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었다(3: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비록 이전과 같지는 않더라도, 아직도 대단한 힘을 발휘하고 있으며(3:23-26), 이러한 상태는 파루시아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다른 복음서들에서도 감지될 수 있다(예를 들어, 마 12:28 vs. 마 6:10).

 

3.2.2.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 (28-30절)

이제 예수는 서기관들의 첫 번째 그릇된 주장(즉, 예수께서 바알세불에 들렸다는 주장)의 심각성을 지적하신다. 예수의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 인간이 지은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toi'" uiJoi'" tw'n ajnqrwvpwn은 단순히 '인간'을 의미한다. aJmarthvmata는 사람들에 대한 범죄 행위를 의미하고, blasfhmiva는 하나님께 대한 모독적인 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ajfeqhvsetai는 미래형('용서를 받을 것이다') 보다는 가능성('용서를 받을 수 있다')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모든 죄와 모독이 용서받게 될 것임을 예측하였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 동사의 미래형은 아마도 갈릴리 아람어의 미완료 시제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용서에 유일한 예외가 있다. 즉, 성령을 모독한 죄는 영원히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문맥상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예수의 종말론적 구속적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활동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참조. 마 12:28; 눅 11:20; [도마복음] 44). 예수의 종말론적 사역을 받아들이기를 이처럼 거부한 서기관들은 당연히 그 종말론적 사역의 기본적 요소인 '사죄의 은혜'도 누릴 수 없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22, 30절). 한편 예수는 이러한 죄를 범한 자들은 '영원한 죄에 처한다'(e[nocov" ejstin aijwnivou aJmarthvmato")고 선언하신다. 그런데 e[noco" + 속격은 세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1) '~의 영향력 하에'
2) '~의 과실이 있는'
3) '~가 부과되는'
만일 aJmavrthma가 '죄'를 의미한다면 1)과 2)의 가능성이 타당하며, 그 중에서는 2)의 의미가 문맥에 보다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즉, '영원한 죄의 과실이 있다'. 만일 e[noco"가 3)의 의미를 가질 경우 aJmavrthma는 '죄' 보다는 '유죄 판결', '형벌'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즉, '영원한 형벌이 부과된다'(참조. 14:64). 어느 가능성을 택하든지 그 의미는 명백하다. 이러한 죄를 범한 자들은 그 마음의 태도가 확정되어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제거할 수 없는 영원한 장애물을 고정시켜 놓은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진리와 율법의 정통성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자처하던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이 실상은 진리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상태에 놓여 있는 역설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한 그들의 열심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예수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종말론적 활동을 인지하고 인정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인지할 수도,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을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육체적 가족이 그의 진정한 가족으로부터 배제되고 있는 역설과 함께, 예수께 대한 바른 이해와 반응이 인간의 운명에 얼마나 결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매우 인상적으로 드러내 보여 준다.


끝으로 28-29절에서 언급된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이 받을 정죄 대상 가운데 22절의 서기관들과 더불어 21절의 예수의 가족도 포함되는지에 대해 적지 않은 논의가 있어 왔다. 예를 들어, Trocm 은 예수의 가족의 예수 이해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들의 예수 이해가 거의 동일하다는 점에 근거하여 예수의 가족도 그 대상에 포함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J. Gnilka는 28-29절의 정죄가 서기관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S.C. Barton은 양측의 입장을 적절히 검토한 후 제한적인 의미에서 예수의 가족도 그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즉, 서기관들에게 돌려진 [성령] 모독의 정죄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예수의 가족에게도 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족의 경우 서기관들의 경우와는 달리 예수께 대한 그들의 비난이 명시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예수의 정죄 선언도 직접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께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그들의 운명도 서기관들의 운명과 같아질 수밖에 없다는 매우 긴장감 도는 경고가 28-30절의 예수의 선언 가운데서 감지될 수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마가복음 3:20-35에 나타난 예수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와 바알세불 논쟁 이야기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리고 그러한 연관성 속에서 예수의 육체적 가족에 대한 예수의 의외적 태도의 타당성과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우선적으로, 3:20-35의 적절한 이해를 위해서는 마가가 그의 복음서를 통해 즐겨 사용하는 샌드위치 구조를 주목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살펴보았다. 특히 Edwards가 제안한 바와 같이, 우리는 본 단락의 경우에도 가운데 삽입된 이야기(B - 서기관들에 관한 이야기)가 양쪽으로 나누어져 있는 이야기(A - 예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의 신학적 의미를 돋보이게 해 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샌드위치 구조를 통해 확인하게 되는 예수의 가족 이야기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예수의 육체적 가족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아주 명확히 확인하게 된다. 본 단락의 샌드위치 구조는 그들의 문제점이 다름 아닌 예수께 대한 그릇된 이해에 있다는 점을 인상적으로 확인해 준다. 그들의 예수 이해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 온 서기관들의 예수 이해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귀신들렸다는 것이다(21, 22, 30절). 이보다 더 큰 오해가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육체적 가족 관계까지도 예수께 대한 바른 이해에 아무런 보증이 될 수 없음을 보게 된다. 어쩌면 그 육체적 가족 관계는 예수께 대한 이해에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시사해 주는 지도 모른다.
둘째, 예수께 대한 그릇된 이해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를 매우 인상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심각성은 우선적으로 예수의 가족이 밖에 서 있다는 표현에 의해 시사되고 있다. 예수께 대한 그들의 오해는 그들을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것처럼 예수와 관련해서 내부인이 아니라 외부인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상태의 심각성은 28-30절의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예수의 선언에서 더욱 고조된다. 이 선언은 우선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서기관들의 예수께 대한 오해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보여 준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의 육체적 가족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 또한 시사해 준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셋째, 우리는 예수의 진정한 가족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확인하게 된다. 그 기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다(35절). 예수의 육체적 가족의 경우에도 이 기준에 있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이 기준이 얼마나 확고하고 유일한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만일 세상적으로 예수와 가장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 있는 육체적 관계까지도 예수의 진정한 가족이 되는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 어떤 다른 밀접한 관계라도 예수의 진정한 가족이 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부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즉, 제자의 길은 예수께 대한 바른 이해와 더불어, 그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21절, 참조. 8:32-33), 그의 곁에서 그를 따르는 것이다(참조. 3:13-19; 8:34). 예수의 길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인데, 그의 이러한 길은 그의 가족들로부터서도 배척을 가져왔던 것이다(참조. 6:1-6a). 그런데 예수의 이러한 경험은 제자들에게도 하나의 모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누구든지 그의 제자가 되려면 그의 육체적 가족 관계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요구하시는 것이다(참조. 1:20; 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