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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가공동체의 위기와 극복

by 은총가득 2020. 9. 4.

마가공동체의 위기와 극복


- 막 13:1-13을 중심으로 -송정석

 

목 차

 

I. 서 론
II. 유대-로마 전쟁으로 인한 갈등
III. 공동체의 배교로 인한 위기
IV. 묵시적 권고로 인한 극복
V. 결 론

 

 

Abstract

 

로마 박해 시기에 유대 크리스천으로 추정되는 공동체 멤버들은 로마의 군대에게 동료들이 체포된 원인을 마가 공동체에게 돌리게 되었다. 그들은 박해의 원인이 공동체의 멤버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유대 권세자들에게 공동체의 이름을 밀고 함으로 공동체를 혼란속에 빠지게 하였다. 그 결과 '한 제자' 혹은 '너희'로 대변되는 마가 공동체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마가 공동체의 멤버들은 로마의 박해 상황에서 그들의 역할이 반영된 인물의 이야기가 긴박하게 필요하였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마가 복음이 기록되었다.
이와같은 정황속에서 마가의 이야기는 밀고로 말미암아 붕괴 위기에 놓였던 마가 공동체에게 새로운 소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는 사도계 크리스천으로 상정되는 4제자에 의한 배반의 희생물로써 '한 제자'와 '너희'에게 예수의 묵시적 메시지를 보냄으로, 유대 공회와 회당에 넘겨진(9) 형제 자매들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정신적인 위로인 박해의 필연성을 상술하여(12)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극복할 길을 제시함으로 새로운 소망을 제공한다.
그 소망은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이며(13), 마가공동체는 이러한 메시지를 받아들임으로 위기에서 새로운 극복의 국면으로 접어들어 공동체는 안정의 정황으로 접어든다.

 

I. 서론

일부 현대 신학자들에 의하여 마가복음은 "확대된 서론이 붙어 있는 수난 설화"로 해석되어 왔다. 이들은 "당시의 사회적인 불안과 국가적인 절망의 상황에서 산출된 마가복음서,"의 사회 정치적 영향을 반영하지 못하여 마가 13장이 기록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정황과 공동체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는 기여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13장에서 예수의 임박한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의식적으로 삭제되어 버리고, 오히려 공동체가 격게될 시련과 고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유, 13장에 나오는 묵시 문학의 형식이 다른 묵시문학과 다른 이유를 알 수 없다. 더우기 로마의 박해로 인하여 야기되는 예수의 제자들의 실패그로 인한 공동체의 갈등과 마가 공동체의 정황을 파악하기가 묘연해진다. 여기서 13장을 사회정황과 공동체의 정황에서 연구되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나마 마가 복음을 사회 정황과 공동체의 정황에서 연구한 몇 몇 학자들이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본 소론은 마가 13장을 로마 박해의 시기에 사도계 공동체와의 갈등으로 인한 공동체의 위기정황으로 보고, 사도계 크리스천들로 인해 마가 공동체는 어떤 정황에 처해있었으며, 마가 기자는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공동체 내에 어떠한 극복 조치를 취하였는가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알아본다.


II. 유대-로마전쟁으로 인한 갈등
마13:1-13에서 사도계 공동체로 상정되는 제자의 실패로 마가 공동체는 갈등의 국면으로 접어든다(9,12). 이처럼 갈등으로 빠지게 만든 사도계 공동체의 실패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 실패 원인은 로마의 박해로 본다. 즉 유대-로마 전쟁으로 인하여 유대교로 부터 크리스천들에게 핍박이 있자 대부분 유대인으로 구성된 사도계 공동체는 갈등 해소책으로 마가 공동체를 유대 법정에 밀고 한다.

 

헹겔(M.Hengel) 역시 13장을 "유다와 로마의 전쟁으로"(7절) 인한 박해후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고백하는 크리스천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정당하다면 마가의 기록의 배경은 유다-로마 전쟁과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 이전의 정황으로 상정할 수 있다. 반면 래디클리프(Radcliffe)는 캘버(W.H.Kelber)와 마찬가지로 마가 공동체의 정황이 64년의 로마 대화재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예루살렘 성전 멸망이후로 잡고 있다. 그도 역시 박해의 상황과 마가 공동체와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이들이 말하는 13장의 정황과 박해와의 관계 설정에는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성전 멸망 이후의 정황은 수용하기가 어렵다. 만약에 마가복음의 기록 시기를 성전 멸망 이후의 정황으로 본다면 전쟁의 상황을 배경으로(7-8) 일어나는 일들이 기록되어있는 본문과는 대립된다. 본문의 정황도 약간의 개연성의 소지는 있다. 서중석 교수에 따르면 "마가가 예루살렘 멸망이전에 멸망을 예견하면서 기록하였는지 아니면 멸망 이후에 그것을 회상하면서 기록했는지 따라 개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멸망이후라고 한다면 9b와 18절이 멸망 이후설을 불리하게 해 주기 때문에 멸망 이후설을 받아들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본 소론은 슈바이쩌(E.Schweizer), 키(H.C.Kee), 트로크메(E.Trocme),다가와(田川建三),로번슨(Robinson)의 박해 이후 성전멸망 이전설을 수용한다.

 

그렇다면 마가 13장이 박해로 인한 갈등의 정황속에서 기록하였다는 것은 가능한 이론일까? 래디클리프(Radcliffe)는 로마 박해 이후 마가 복음이 그리스도 공동체를 위하여 기록하였다는 증거로 타키투스의 Annals의 저서를 들수 있는데 이 저서에서 네로 박해 때 신앙을 고백하는 크리스챤들이 체포되었다는 것으로 그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는 또한 빌립보서를 증거로 삼는다. 빌 1:15-17은 네로 치하에서의 박해시 로마 공동체가 내적인 분열들이 있었다는 증거로써 시기(ftonos), 투쟁(eris) 협력(eriteia)라는 단어를 예로 들고 있다. 그는 클레멘트 1서 5:2-5의 예도 들고 있다. 그는 여기서 사용되는 질투(zelos) 투쟁(eris) 협력(eriteia)이라는 용어와 바울을 연결시킨다.


그에게 있어서 갈등정황에 대한 배경을 찾은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수용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로마 공동체의 내적인 분열'의 증거문제이다. 그가 빌립보서를 들어 논증하는 것은 마가의 갈등 정황이 로마에서라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가 공동체가 로마 박해 시기와는 일치의 가능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 공동체가 로마 공동체로 수용하기에는 지원 받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지리적 장소가 로마라는 명칭이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팔레스틴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가 증거하는 시대적 정황은 수용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막13장의 정황이 로마의 박해와 그로 인한 기독교 공동체 또는 동족간의 갈등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다-로마전쟁으로 인한 박해와 그로 인한 사도계 공동체의 동료를 고발하는 갈등 정황은 개연성이 있다.


III. 공동체의 배교로 인한 위기

마가 공동체의 위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마가 공동체와 사도계 공동체와의 갈등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마가 저자는 9절의 "조심하라"(blevete)는 말로 시작함으로 3-8절과 문맥의 단절을 나타낸다. 이처럼 문맥의 단절로 3-8장과 구조를 다르게 표현하는 것은 내용의 전환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면 이것을 통해 마가가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 내용의 전환은 3-8의 배교에 대한 위기 상황에서 극복을 위한 권고의 메시지를 주기 위한 마가의 전환적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내용의 전환과 관련하여 래리 헐태드(Larry W.Hurtado)는 문장을 나눌 때

"1-13절이 나누어진다." "예루살렘이 파괴될것이다"(1-2)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소개(1-4)한 후에, 제자들이 예수에게 개인적으로 질문하고(3-4절) 예수는 그들의 질문에 폭넓은 대답을 한다(5-37). 그 대답은 예수가 "멸망의 특별한 때에 대한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고 말함으로 제자들이 거부 당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의 견해 "1-13절이 나누어진다"는 것과 제자들이 예수에 의하여 거부당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는 1-4절의 장소가 성전(1-2절)에서 감람산(3-4절)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장소임을 전제로 한다. 또한 1-2절의 내용은 성전의 멸망(1)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멸망으로 의미를 확대 해석하였다. 3-4절의 제자들의 질문에서도 5-8절까지는 경고 또는 거부적인 답변으로, 9-13절에서는 조심하라는 경계의 메시지임에도 그들을 구분하지 않으므로, 그의 단락 구분은 의미를 약화시키는 오류가 있다.


라마르 윌리암손(Lamar Williamson)은 5b-23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5b-8은 마지막때에 전쟁과 기근의 나타남, 9-13절을 예수의 제자들의 박해, 14-23은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구분한다. 그는 5b-8과 9-13절이 분리 되었으며, 내부 공동체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것으로 상정한다. 그의 본문을 당시의 사회적 정황과 연결하려고 한 시도는 높이 평가하지만 공동체와 연결 시키지 못하므로 공동체의 정황을 설명할 길이 모호해 진다.
C.레스리 미톤(C.Leslie Mitton)은 5-8을 24-27절과 병행구절로 두면서 5-8을 예수의 두번째 오심을 예견하는 강화로, 9-13절을 박해에 대한 강화로 구분한다. 그 또한 5-8절과 9-13절의 구절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의 오류는 본문을 공동체의 정황에서 보지 않고 묵시적인 관점에서만 보게 됨으로 공동체의 정황을 간과해 버렸다.
로버트 군드리(Robert M.Gundry)는 3-8절을 예수의 명령으로 보고, 그 명령은 우주적 승화(7-8)가 아닌 기만((5b-6)에 대하여 경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9-13절을 사람들이 공회에 넘겨서 죽게 만들 때 주의하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본문이 예수의 제자의 질문에 대하여 경고로 시작하고(1-2),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질문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예수의 질문에 대한 무시 이유를 이미 앞에서 성전에 대해서 대답하였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그의 주장 9-13절에서 "그러나 너희들은"을 제시함으로 제자들의 관심을 우주적인곳에서 그들의 자신의 사람들에게로 돌린 것, 또한 9-13절을 연합시키는 주제로 12절의 "형제들이 형제들을 죽음으로 넘길것이며, 부모가 자식을 자식이 양친을 그리고 그들을 죽일 것이다."를 미가7:2,6, 단12:12-13절에 근거하여 12절을 7절의 이때와 연결시켜 연합을 인과 관계로 해석한점, 그리고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을 약속으로 이해한 것에 대해서는 상당한 설득력이 인정된다. 또한 3-8절과 9-13절을 각각 다른 대상을 전제하고 해석한 점과, 특히 9-13절을 연합의 차원으로 5-8절을 거부의 차원으로 이해하였던 점에서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의 질문에 대한 거부의 이유에 대하여 5-8절의 제자에 대한 거부를 앞서 언급하였기 때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관성이 결여된 해석이라 보인다. 왜냐하면 마가에서의 제자는 계속해서 실패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우만(John Bowman)은 4제자들이 질문한 것은 언제 이 일이 일어날 것이며, 이 일이 언제 성취될 것인가?를 2절의 성전 기사와 관련 시켜 말한다. 에드워드 슈바이쩌(Edward Schweizer)는 13장을 '파루시아'의 관점에서 1-3절을 소개로, 그리고 5-13절을 기사(Sign)로 나눈다. 특히 그는 바우만과 달리 4절의 모든일을 2절에서 관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5-27절과 관계하여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들은 종말적 가르침도 교회의 내부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이해하며 이러한 특별한 형태는 마가의 전형으로 이해한다. 이들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에 대하여 슈바이쩌가 2절과 4절을 다른 정황으로 본 것에 대하여 그리고 4절을 5-27과 연결시킨 것은 긍정적으로 수용된다. 그러나 5-13절의 기사만 다루고 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때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는것(32절)은 제자들의 거부에 대한 근거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처럼 문맥의 전환의 입장에서 3-8과 9-13의 단절은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러면 문맥의 전환을 통한 단절은 무엇이며, 저자의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군드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9절의 '넘겨주다'와 11절의 '넘겨주다'의 연결은 그 장면을 동일시 하려는 저자의 입장이요. 그 장면은 유대 법정과 회당 그리고 이방의 법정과 왕까지 아무도 제자들처럼 쉽게 위압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3-8절의 장면과 달리 이러한 '넘겨줌'이 있을 때 말하는 이가 성령이라고 하여 긍정적인 제자의 모습으로 비춤을 볼 때 3-8절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5절의 너희와 9,11,13절의 '너희'는 서로 다른 제자이며, 적어도 다른 정황속에 있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에 정당성을 확보한다.

10-11절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할 필연성에 대한 통찰은 마가 공동체로 하여금 박해받는 자신의 상황의 정당성을 인정받게 만든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증언 또한 이방인을 지칭하는 '만국에 전파되어야하는 것'은 마가 공동체를 겨냥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10절). 그러나 랄프 마르틴은 브란든이 말한 재판 장면등에 근거하여(9절) 저자의 의도가 십자가 책임을 유대인에게 넘기기 위한 목적(9절)으로 편집했음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유대인과의 관계 설정에서 이해하려고 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십자가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 까지는 비약이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가 저자가 9절의 "조심하라"(blevete)는 말로 시작함으로 문맥의 단절로 3-8절과 구조를 다르게 한 이유는 내용의 전환을 암시하는 것이며, 그 내용의 전환은 사도계 공동체의 배교(3-8)에 대한 위기 상황에서 마가 공동체로 상정되는 '너희'에게 위기 극복을 위한 권고의 메시지를 주기 위한 마가의 전환적 발상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본다.

마가의 이러한 전환적 발상이 정당하다면 1-2절의 '한 제자'는 어느 그룹에 속하는 인물일까? 이것은 사도계와의 차이에서 정당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차이는 1-8절에서 제자의 질문(3-4)에 대한 예수의 강화적 메시지에도 차이가 있다. 그것은 5b-8절까지는 부정적 명령 즉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절ME TIS) 두려워 말라(7절ME TROEISTE)로 답변한다. 그러나 9절은 부정이 아니라 명령인 조심하라(BLEPETE) 말하라(11절LALEITE) 구원받을 것이다(SOTESTAI)로 표현한다. 이것은 5b-8절은 거부구조로 사도계에 대한 비판, 9절은 이러한 사도계에 대한 경계와 극복을 위한 마가의 의도가 숨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면 1절의 '한 제자'는 무엇인가? 그것은 1절에 나오는 무명의 제자와 3절에 나오는 4제자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마가는 한 사람(eis)을 한 제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자를 마가 공동체를 대변하는 주체로 만들고 동일한 상황인 성전을 마무리 하여 4제자를 등장시킴으로(3) 상호 대립의 관계를 암시한다.
이것의 정당성은 1-2의 제자와 5-8의 제자가 대립관계에 있다는 것이 호칭문제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 제자는 예수를 선생님(1절)이라고 한다. 제자가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가에 있어서는 수용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마가에 있어서 예수의 칭호는 다윗의 아들 메시아로(막11:9;10:47), 수난 설화 가운데서는 유대인들의 왕(막15:2,9,12, 18,26), 그리고 주(Kyrios; 7:28;10:51)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것은 '한 제자'가 사도계 공동체로 상정되는 예수의 제자와는 다른 신분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한 제자와 4제자와의 차이에 대한 수용구조는 특정한 사람들의 이익에 기여한 성전에서도 지원을 받는다. 묵시문학자의 환상속에 옛 성전은 새로운 영광스런 성전에 자리를 내 주기 위하여 물러나야한다. 그 이유는 구약의 묵시문학에서는 성전파괴의 예언은 없고 성전 모독에 대한 언급만 나와 있기 때문이다(왕상9:7-8, 단9:26;9:2). 성전에 대한 마가의 부정적인 태도는 독자들에게 당시의 위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에게 있어서 성전은 옛 성전은 물러가고 새 성전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1절에서 성전에 대하여 묻는 한 제자에게 예수는 친절하게 대답을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은 무너질 것이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실이며, 예수가 성전을 청결하게 한다할지라도, 진실한 예배의 결핍과 파괴될 것이라는 대답이다(13:1-3).
아마도 마가의 성전에 대한 기록은 마가 공동체가 성전 파멸을 이런 표징으로 받아들여 줄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마가는 공동체의 이러한 정황 속에서 페쉬의 말대로 반-유대적 및 친-이방적 경향, 반-묵시사상적 및 친-종말론적 입장에 따라 마가 이전의 전승 전단을 재구성하고 재 해석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한 사람과 4제자의 관계는 무엇일까? 마가 기자는 성전 파괴와(1-2) 그 뒤의 네명의 제자들의 실패에 대한 내용과(3-8)연결 시킴으로 공동체의 분열의 원인이 사도계 공동체에 있음을 폭로한다. 5b-13절의 단락은 9절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로 다시 단락의 구분을 나타내며, 제자들을 예수에 대하여 거부당하는 자로 묘사된다. 그러면 그 거부내용은 무엇일까?


예수는 성전에서 나가실때 제자중 하나에게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만(1-2)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의 질문에는(3절) 오히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5절)고 하여 질문을 거부한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한 제자'는 마가 공동체의 분열원인을 사도 공동체에게서 찾으려는 마가의 의도속에 마가 공동체를 대표하는 '너희'(9-13)와 같은 긍정적인 모델로 제시된 것같다.

 

IV. 묵시적 권고로 인한 극복(9-13)

마가는 실패한 제자의 배교로 초래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반응으로 배교로 인한 위기의 정당성을 제시한다(8:31,13:10). 그 정당성은 '넘겨줌'의 정당성이다. 즉 마가 공동체로 상정되는 '한 사람'과 '너희'가 사도계 공동체로 상정되는 '배신한 형제'의 증거로 넘겨줌(9절)이 되었고, 그 넘겨 줌은 극심하여 그들의 육신적 자녀 뿐만 아니라 영적인 형제까지 넘겨준다(12). 이처럼 묵시적 표현을 사용하면서까지 넘겨준다는 메시지를 공동체에게 주는 효과는 무엇일까? 그것은 독자들에게 박해에 대한 보편적인 가치를 준다.


또 한가지 효과는 묵시적 종말사건으로 말미암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이다. 마가는 예수의 묵시적 종말적 강화인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권고를 통해 마가 공동체가 앞으로 당하게 될 시련을 사도계 공동체가 이해하기 어렵게 어떤 베일에 가려진 내용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묵시적 강화를 통하여 사도계 공동체의 배교의 위협을 극복하고 마가 공동체에게는 구원의 소망을 제공함으로 극복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마가의 의도가 담겨 있으리라 본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주는 상황'에서 마가가 공동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극복의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박해에 대한 보편성을 인식시키는 것일 것이다. 이것을 전달하기위하여 필요한 것이 묵시적인 방법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 증거로 마가는 13장의 시작을 공동체의 묵시적 종말론적 입장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1-2).
마가 13장이 묵시적인 요소가 있을까? 이것은 묵시 문학의 전형적인 것이 아니다. 묵시적 요소가 아니라는 것은 마가에서 보이는 묵시의 형태를 통해서도 증명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시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서 잉글리쉬(Donald English)는 "묵시의 전형적인 상징인 다니엘서의 예가 마가13장에서 3번 나온다(14,19,26). 그러나 이것은 전형적인 묵시 사상이 아니다."고 하여 그 정당성이 입증한다.


가스톤(L. Gaston)역시 "여기서 묵시는 묵시의 형태는 있을지라도 묵시의 특징이 많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현 상황에 대한 언급으로 교회에 대한 호소가 많이 나오고 있으므로 본문은 당시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직접적인 권면이지 묵시가 아니라"는 것에 견해를 같이 한다. 그렇다면 마가가 묵시적인 형태만을 취하여서 공동체에게 전하려는 의미는 무엇일까?
핸슨(Paul D. Hanson)이 말했듯이 "묵시 문학의 기능이 박해와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위로와 소망의 권면, 그리고 저자의 목적에 따라 자유롭게 다른 요소들을 묵시와 함께 사용해 왔던 점," 그리고 하워드 클락 키의 "묵시문학적 단락이 마가 복음서에 포함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마가가 예수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전개 과정에 있어 일대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묵시적 요소는 묵시적 종말론의 강조보다는 공동체를 극복하기 위한 위로의 의미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잉글리쉬(Donald English)와 가스톤(L. Gaston)의 말대로 전형적인 묵시 사상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묵시의 형태가 어느 정도 있으므로 묵시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당성이 있다. 다만 가스톤의 주장대로 묵시적 특징보다 현 상황에 대한 언급이 많으므로 마가 공동체에 대한 묵시 문학을 사용한 마가의 의도는 묵시를 통한 위로의 전달로 보는 것이 정당성을 확보한다.
또한 핸슨(Paul D. Hanson)이 말한 묵시 문학의 기능적인 면인 박해와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위로와 소망의 권면의 차원에서 볼 때도, 마가가 사용한 묵시적 표현이 마가 공동체에게 박해의 보편성을 전달하여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같다.

묵시적 사고에서 12절의 형제의 배교와 부모와 자식의 갈등 정황을 통해 마가가 전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묵시 문학적 표현 "반드시"(dei:13:10)는 신적인 필요성에 의하여(13:7;8:31) 먼저 모든 민족에게 그리고 전 세계 민족들에게(11:17;14:9) 전파되어야 할 것이다. "나를 인하여"(9절) "저희에게 증거"(9절)라는 말도 12절의 처절한 가정 불화와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대한 증거는 본문에도 있다. 그 증거로 13절 a는 9절 b와 11절 사이에 놓아도 될 정도롤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9a와 10절에서 자신의 해석을 첨가하였다. 즉 핍박을 받아도 전파되어야 한다. 12절이 '사람들'(11)과 '모든 사람들'(13)의 두 문장 사이에 끼어 넣음으로 그 구절은 다른 묵시적 구절에서 언급한 것과 현저하게 다르다. 그 이야기는 2 쌍의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예수에 의하여 이야기된(13:5) 4제자와 관계되며 그들을 통하여, 그의 모든 추종자들과 관계 된다. 그 관계는 9-11절의 의미에 의하여 마가공동체의 멤버들이 법정 앞에 넘겨진 상태를 만든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정황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인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일까?

 

마가는 9절에서 "조심하라"는 것으로 내용의 전환을 이룬다. 이것은 위기에 대한 반응으로 보여지며, 공동체 정황이 고난을 받고 있는 입장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너희'가 마가 공동체를 일컫는 것으로 볼때 조심하라는 것은 그의 공동체에게 박해아래서 사악한 사람들을 대비하여 정신을 차리라고 경고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조심하라는 경고는 13:9-12의 "넘어가다"(paradidonai:11)란 말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넘어가다" 역시 가해자의 입장에서 보다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이것은 넘겨주는 주체를 사도계 공동체로 보는 것에서도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넘어가다'는 법정 용어로서 누구를 재판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산헤드린, 지방도시의 법정들에 넘겨진다는 것을 의미할때(9), 이 공동체는 다수의 유대 출신들에 의하여 추적당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태형은(12:3-5)을 볼 때도 가능성을 인정받는다. 왜냐하면 태형은 회당에서 행해지는 것을 볼 때 지방 법정들의 권한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9) 그러므로 여기서 형제, 아버지 부모 자식을 넘겨주는 주체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되어 있지만 거부당한 그리스도인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정황속에서 마가에게 있어서 '극복의 소망'을 위한 조심하라의 촉구(9)는 정당성을 찾는다.

 

마가 공동체에게 극복의 소망은 무엇일까? "나중까지 견디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켈버(Wemer H.Kelber)와 브란돈(S.G.F.Brandon)은 예루살렘 함락후 크리스찬 삶의 중심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중심을 제공하며 현금의 정황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려는 것이 마가의 의도라는 견해를 갖고있다. 그러나 막센(Willi Marxen)은 유대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루살렘의 함락이 시작되기 전에 갈릴리로 피하여 주의 재림을 기다리라는 교회를 향한 명령으로 이해한다.
이들의 견해를 모두 수용할 수는 없지만 공통된 것은 당시의 정황이 종말과 거짓 예언자 문제로 인해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전쟁으로 인해 고통을 받던 때였다는 것은 일관된다. 또한 이러한 고통의 때에 저자가 주는 권고는 소망이라는 것에도 일치한다. 이러한 정황에서 그들에게 소망의 소식은 무엇일까? 그것은 가족의 회복의 문제일 것이다.

마가에 있어서 나중까지 견딤으로 얻는 유익은 가족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것은 13:12의 정황을 고려할 때 마가 공동체에게 있어서 고통은 형제와 부모와의 갈등임을 볼 때도 정당성을 찾는다. 그러므로 나중까지 견디라는 의미는 마가가 가족관계의 본성의 문제를 전하기위한 의미로 받아진다. 현재 독자들은 그 구절을 혈육에 의하여 죽음으로 이끌어 진 것을 말하므로 혈육에 의한 위기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마가가 말하는 가족은 누구일까? 그것은 마가 공동체의 정황과 마가의 묵시적인 표현을 고려할 때 믿음을 지키지 않는 비그리스도인을 가족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같다. 그렇다면 이들은 믿음을 지키는 멤버속에서 찾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이것은 3:31-35이후에 예수가 그의 제자인 사도계 공동체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그의 새롭고 진실한 가족인 마가 공동체를 하나님의 의지를 행하는 자들을 지명하는 것을 볼 때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므로 친척의 단어인 형제(adelfos), 아버지(pater), 그리고 아이(tekna)가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인 마가 공동체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기에 무리가 없을 것같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타당성은 10:29-31의 "전토의 보장과 영생의 보장"을 볼 때도 가능하다. 이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친척과 가정을 포기한 사람이 새로운 관계 즉 형제(adelfoi)와 자녀(tekna)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족의 관계는 박해도 뒤따르지만 마가에게 있어서 보다 중요한 것은 회복의 의미가 있다.
12절을 가족인 마가 공동체내의 관계에 대한 회복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그 묵시적 제안의 형태는 무엇일까? 그것은 12-13절의 "넘겨주다"의 동기를 찾을 때 더욱 확실해 진다. 제자들이 당할 환란에 처절한 가정 불화가 더해 진다. 즉 사도계 공동체의 배신으로 인하여 가정으로 상정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내부에 불화는 더해진다. 이것은 고대의 가정의 형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것은 고대에 가정은 신앙의 보루로 생각되었으므로 가정이 무너지면 신앙도 무너지는 것이다. 이 단락의 말미에서 시련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위로가 담긴 전망이 덧붙여진다.

 

마가는 이러한 정황속에서 마가 공동체에게 말하고 있으며, 그 표현은 네로의 박해와 그로인한 사도계 공동체의 배신으로 인하여 묵시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가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며 그 희망은 공동체의 회복의 소망인 연합이다. 그렇다면 박해의 정황에서 연합은 무엇으로 이루어 질까? 그것은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13,35-37) 그리고 그것은 종말보다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제공함으로 앞으로 당하게 될 시련을 제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어떤 베일에 가려진 내용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따라서 마가는 9절과 10절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동안 사람들이 겪게될 박해와 수난을 묵시적으로 표현한다.


마가는 위기에 대한 극복책으로 구원의 소망을 제시하여 미래는 밝다고 전망한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이 사방에 흩어진 그의 무리들을 모아 풍요한 시대를 이루게 될 것이다"(13절). 그러므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서 공동체를 이탈하지 말고 스스로 조심하라(5,9). 박해의 시대가 끝나고 주님의 승리가 오리라는 확고한 희망으로 "깨어있으라"(33-37절)고 선포한다. 즉 동료들을 밀고한 사도계 공동체에 말려들어 혼동속에 들어가는 것은 불확실한 역사속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조심하라(5,9) 그리고 조심하는 자는 나중까지 견디는(eis telos)자이며(5,13), 그는 구원을 얻으리라.


V. 결 론

앞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마가 복음 13장에 나온 묵시는 마가 공동체와 사도계 공동체와의 갈등의 정황을 반영한다. 크리스천 공동체의 세력인 사도계 크리스천의 적대 관계에서 시작된 마가 공동체의 갈등은 미혹에 의하여 유대 권세자에게 넘겨준 것으로 시작된다.
이에 대응하여 마가 기자는 사도계 공동체를 사회적 정황에서 묵시적 종말적으로 불신앙의 부정적인 모델로 예수에게 계속 거부당하는 제자로 묘사함으로 부당성을 폭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로기온을 통해 끝까지 견디는 자는 고난의 위로를 통해 마가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할 것이라고 소망을 제공한다.
마가 13장은 묵시 문학적 표현으로 박해의 보편성과 소망의 메시지인 끝까지 견디라는 것을 가족의 연합과 관련하여 정당화 하였다. 그 결과 공동체의 이탈을 방지하고 공동체의 갈등을 해소하여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13장의 묵시사상에 반영된 마가 공동체는 사도계 그리스도인들의 현재 활동의 의의를 대폭 축소시키고 이방인 크리스천인 마가 공동체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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