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적 관점으로 본 예수님의 탄생(마1:18-25을 중심으로)
1. 도입
마태는 그의 복음서 1장에서 예수님의 족보 기술을 통해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곧 바로 지목합니다. 이는 예수님이야말로 다름 아닌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언약의 궁극적 성취자로 오신 분임을 강력히 시사하는 내용입니다.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런 사실을 언급한 후에 이내 예수님의 탄생기사로 방향을 급선회시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사실을 단도직입적으로 증거하려고 하는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기사에서 마태는 특별히 세 가지 측면에서 그 구속사적 중요성을 성경독자들에게 부각시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탄생은 자연출생이 아닌 동정녀 수태로 말미암은 기적적(奇蹟的) 탄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탄생은 단순히 한 인간의 출생이 아닌 성삼위(聖三位)의 하나님 중 제 이 위(位)이신 예수님 곧 구속주의 탄생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분’의 자격으로 말입니다. 셋째는 이런 사실로 인해 예수님의 탄생은 철저히 신적 기원에 의한 구약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그의 오심이 우연의 산물이 아닌 하나님의 주도적인 작정과 계획으로 이루어진 구속경륜의 핵심 내용임을 증거합니다.
2.전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예수님의 탄생은 일반인의 출생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사건입니다. 남녀의 결혼으로 말미암는 자연출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는 이를 설명하면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짤막하게 기록합니다(18, 20절). 이는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에 의한 신(神)기원적이고 초자연적인 출생임을 가리킵니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잉태되고 급기야 출생을 보게 됐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기사와 배경을 비교적 짧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표적을 구하기를 좋아하고 이미 그런 사건에 익숙해 있었던 유대인들에게(고전1:22, 요4:48) 동정녀 탄생은 결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누가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기사를 상대적으로 세밀하게 소개합니다. 이는 누가복음의 기록의도가 하나님과 구약적 배경에 대해 선(先)지식이 부족한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구약에 예언된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사실을 증거하려는 또 다른 의도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거슬려 올라가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결국 예수님의 기원을 아담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시키는 것을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만인의 메시아이며 세상의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알리고자 의도했던 것입니다(눅3:23-38, 행4:12).
그래서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인 사실과 그가 구약의 다윗 언약에 약속된 참 다윗 왕으로 오신 분임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눅1:31-33). 아울러 누가도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탄생사건과 관련해 마태의 설명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눅1:35)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하심으로 인해 처음부터 특별한 목적과 사명을 띠고 탄생하신 사실을 시사합니다. 마태는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로 부각시킵니다.
다시 말해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의 자격으로 오시기 위해 동정녀 탄생의 방식을 빌려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초두에서 예수님을 선재(先在)하신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요1:1-5).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 곧 장막(tabernacle)을 치신 분으로 설명합니다(14절). 이는 달리 구약의 성막의 실체로 오신 분임과(요2:20-21) 성막이 담고 있는 계시적 표상인 임마누엘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출25:8). 마태가 아기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에 근거합니다(마1:22-23).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계시돼 사람들 가운데 임재 하게 된 사건이 곧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사건 속에 담긴 구속사의 비밀이란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의 총화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실존과 인격과 사역에 접촉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예수님이라는 인격 속에서 육체로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 속에 성령님을 통해 삼위 일체적 개념으로 내주 해 계십니다(요14:23). 여전히 우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보호하시고 통치하시고 인도하십니다(마28:20).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동정녀 탄생의 방식을 통해서만 오셔야 됐을까요. 이는 다름 아닌 인류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물의 자격으로 오시기 위함입니다. 마가는 이를 설명하면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기록합니다(막10:45). 이제 예수께서 죄를 위한 대속물로 오셔야만 했었던 구속사적 당위(當爲)와 필연(必然)에 대해 살펴봅니다.
죄는 법정적 특성상 대가를 요구합니다. 죄인에게 재판에 의해 합당한 형벌이 주어지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이런 죄와 형벌과의 관계를 선악과 금령법의 언약을 계시적 사건사례로 주시는 것을 통해 이 사실을 인간의 삶 속에 근본원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순종하고 의존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누릴 뿐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영생의 삶의 실질로 나아가야 했습니다(창2:16-17).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인간역사 속에서 정당하게 시행되는 것을 통해 당초 품으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세상 가운데 온전히 드러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창1:28). 그러나 최초의 인간은 이 일에 실패합니다(창3:1-6). 그래서 그의 범죄로 인한 죄과는 그의 허리에 있었던 모든 인류에게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생득적으로 전가되고 말았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죄의 대가와 구체적 형벌로 온 인류에게 선고된 것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롬5:12, 6:23). 그래서 창세 이후로 죄는 그에 보응(報應)하는 합당한 형벌로 다스려지게 된 것입니다.
다른 한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됐다는 사실은 이제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전무(全無)함을 시사합니다. 정당한 여호와 신앙의 제 일 단계는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구원의 감격과 기쁨과 감사의 반응이 다름 아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출발입니다. 따라서 죄의 문제를 해결함이 없이 어떤 신앙적 선행과 공적도 결코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죄로부터 나온 것은 결국 죄의 열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성경은 이를 증거하면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고 반문합니다(마7:18).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하나님 면전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함이 없이는 어떤 인간의 선행도 상대적 선행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의 절대선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의 시각입니다. 이로 인해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한 일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이 보는 인간에 대한 관점입니다(롬3;10-12). 그래서 결국은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정죄 돼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히9:27).
따라서 절대 타자로서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자력구원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 인간의 영적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실상이 이렇습니다. 역사적 개혁주의자들은 이런 인간의 비참한 영적 상태를 성경적으로 바르게 규명하는 가운데 인간의 ‘전적타락과 무능’교리를 발전시켰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죄 값을 지불해 줄 대속주가 필요하게 된 사연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바로 이런 대속자로서의 자격을 위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제일 요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죄자가 아니고서는 인류의 대속자가 될 수 없는 구속의 원리에 의해서 말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렇게 인간에 의해 자연 수태된 것이 아닙니다. 위로부터 성령과 지극히 크신 분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단지 여인의 태만 빌리는 형식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 분의 출생의 비밀은 본질에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신 것입니다. 보냄을 받으신 것입니다. 선재(先在)하신 예수님께서 세상 가운데로 들어오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적인 죄성이 예수님에게 전가되는 것을 처음부터 차단하셨습니다. 죄가 예수님을 결코 오염시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비밀이 이런 사실에 있습니다. 무죄자로서 죄의 대속물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본체로 증거합니다(빌2:6). 절대 의로운 자로서 외부적 타자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분으로 성경은 증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신학적으로 성육신(incarnation)사건으로 부르는 의미가 이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신 불가사의한 분인 셈입니다. 이를 신(神)-인(人)으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표현과 설명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표현과 함께 지극히 성경적이면서도 인간의 지혜로는 그 전모를 온전히 인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창조주 하나님을 인간의 이성과 논리를 통한 증명의 대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저자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의 형식이 아닌 선포의 형식으로 계시합니다(창1:1). 이는 하나님의 실존과 사역을 창조자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해 믿음과 신앙의 대상으로 수납해야 함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인간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인간의 모양과 성정을 가지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성을 동시적으로 소유하고 계신 분으로 인해 죄인은 아닙니다. 성경은 이런 예수님을 표현하기를 죄를 모르는 분(고후5:21), 죄가 없는 분(요일3:5), 죄를 지을 수 없는 분으로 설명합니다(벧전2:22). 이는 예수님의 본질이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거 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상이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며 구속사적인 관점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인간에게 베풀어주시기 위해 스스로 속죄 제물로 오신 한 마리 어린양이란 지적입니다(요1:29, 고전5:7).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구속사적 의미가 이렇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통한 성육신 사건 속에는 대속물로서의 필요충분 조건인 하나님과 인간이 한 몸 안에서 신비적으로 연합된 하나님의 비밀이 간직돼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통해 주신 제사제도는 바로 이런 대속물을 통해 죄 사함을 받게되는 하나님의 구속의 도리를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대속물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해 주시는 것을 통해 이제 어린양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의 죄를 대속적으로 사면해 주실 것을 구속사의 점진적 계시를 통해 미리 예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모형으로서의 속죄 제물이 실체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성취된 것입니다.
구주가 되신 예수님
이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인 구속의 도리를 세상 가운데 펼쳐 보이기 위해 구속사적 사명을 띠고 세상 가운데 오신 각별한 분입니다. 구세주로써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시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의 희랍어식 표현으로서 곧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위해 따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일컫습니다. 구약적 배경에서는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 자신들의 업무를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는 이 삼직(三職)을 수행함에 있어서 특별히 하나님의 신성한 사역을 선택적으로 담당하는 자들로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으로서의 삼직을 온전히 수행하신 분입니다. 아니 구약의 삼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온전한 실체로 성취된 것입니다. 이 사실들에 대해 살펴봅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그의 사역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왕적 권세는 마귀의 시험을 이기시고, 죄를 사하시며, 온갖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시는 사역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예수님을 통해 권세 있게 시행되는 것으로 인해 불가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활동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소위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 말입니다. 마태는 이런 사실을 확증하는 가운데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주님의 말씀을 인용해 설명합니다(마12:28). 누가도 이 일에 같은 생각을 피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갖고 오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이미’ 현존하는 것을 통해 역사 속에서 그 나라를 확장시켜 가고 있습니다(마13:31-32). 당신의 백성들 속에 영으로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유기적인 사역과 능력을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지속적으로 운반하고 확장하는 가운데 그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일환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천국백성의 삶의 목적과 방향성을 지적하는 가운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것’(마6:33)으로 나타나야 됨을 강력히 시사하는 이유가 이에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란 세상 가운데 침노해 들어온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적극 받아 누리는 천상적 신분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특별한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함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법을 생명과 신앙과 삶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일에 총력을 경주하게 될 줄로 압니다. 선(先) 은혜가 후(後) 일치하는 실천적 삶을 강력히 요구하는 원리에 따라서 말입니다(약2:17, 22, 26, 롬16:16). 이런 거듭난 생명적 활동이야말로 태초 아담과 하와에게 복의 언약으로 부여하셨던 하나님의 문화명령(창1:28)을 복음 안에서 성실하게 수행하는 삶으로서 곧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삶에 상응(相應, correspondence)한다 하겠습니다. 이로 인해 문화명령의 현재적 수행에는 한시적으로 세상에서 왕노릇 하고 있는 사단과의 지속적인 영적 전쟁이 불가피합니다. 지상의 교회의 특징이 전투하는 교회요 성도의 또 다른 신분적 성격이 하나님의 군사로 불리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단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에베소서 기자의 설명이 이를 뒷받침합니다(엡6:12).
다음으로 예수님은 선지자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구약적 배경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하나님의 대변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하나님의 대사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로 오신 분으로 모든 구약의 선지자들의 사역을 자신 안에 총 망라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으로 천국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런 사실은 특별히 산상수훈에서 구약의 율법을 재해석하는 가운데서 절정을 이룹니다.
마5장에서 저자는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가운데 “옛 사람에게 말한 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방식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임을 단도직입적으로 증거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되심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사실을 주님의 대제사장적 기도의 내용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요17:21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이 뿐만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상의 사역기간 동안 적잖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기도 하셨습니다.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부인(否認)과 죽음, 부활후의 사역, 보혜사 성령의 강림과 제자들의 복음사역, 그리고 종말론적 말세의 징조 등 다양한 내용을 예언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예언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제반 가르침 등은 바로 예수님의 선지자적 사역을 구체적으로 실증하는 내용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도래시킨 분으로 친히 하나님의 왕적 권세를 발휘하는 가운데 참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능력 있게 담당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죄인과 동일시함으로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기꺼이 한 마리 어린 양으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되심으로 대제사장적 직분을 온전히 감당해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원수 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과 화해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창세 이후로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역은 제사장적 중보사역인 동시에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한 대속적 사역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 속에 나와 우리 모두의 죽음이 포함된 대속적 죽음 말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를 “예수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해 내어 줌이 되고”라고 설명합니다(롬4:25). 고린도서 기자는 해석하기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기록합니다(고후5:14).
갈라디아 저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설명함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자신의 죽음을 동일시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모두의 죽음을 대표해서 죽으신 대속적 죽음임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갈2:20). 이사야 선지자는 그의 고난의 종에 대한 묘사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예언적으로 선포합니다. 이상의 설명은 한결 같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성격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한 대속적 죽음과 중보적 사역임을 증거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을 통해 우리가 사죄의 은총과 새사람으로써 거듭난 새 생명을 얻게 됐음을 성경은 강력히 증거합니다(갈2:20, 고후5:17, 롬8:1-2).
그러나 이런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은 지상의 사역으로 아주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실현될 그날까지 여전히 지속됩니다. 지상의 성도는 이런 주님의 한결같은 대제사장적 중보사역에 힘입어 오늘도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원으로써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으며 모든 일에 주님의 인도와 보호와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서 말입니다. 빌1:6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빌2:13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 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확증적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롬8:34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7:25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존귀로 관쓰시고 여전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대제사장으로써 중보사역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실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마음속에 내주케 하시는 방식을 통해 여전히 지상사역의 연장선상에서 동일하게 임마누엘하고 계심을 의미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 모든 예수님의 전(全)구속사역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에베소서 기자가 밝히 드러내고 있듯이 창세 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작정에 근거해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전모입니다(엡1:3-6).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세상 가운데서 실제로 실현시키는 것을 통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에로 인도하기 위해 구원자로 오신 분입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 2 위의 하나님의 성육신(聖肉身)사건 말입니다.
구약언약의 성취자
우리는 마태의 예수님의 탄생기사와 관련해서 그 분의 ‘동정녀 탄생’과 ‘구속주’로 오신 사실의 당위와 필연을 살펴봤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무죄자만이 속죄(贖罪)의 자격자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구원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계속해서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로 오심은 바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된 사건임을 증거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구약언약의 최종적 성취자로 오신 분이란 사실을 선지자들의 예언을 인용해서 증명합니다. 이런 그의 시도는 다분히 의도적인 기술로써 구약성경을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으로 믿고 섬기는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저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하신 메시아인 사실을 확증시키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이 구약언약의 성취라고 천명하면서 이사야의 글을 증거 본문으로 제시합니다(마1:22-23). 이는 다름 아닌 사7:14의 인용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당시 이사야를 통해 하신 본문의 말씀은 유다 아하스 왕에게 주신 내용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상당히 불경건한 자로 소개됩니다. 당시 아하스 왕은 이스라엘과 앗수르의 연합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된 상태에서 큰 위기를 맞게된 상황에서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됩니다. 다름 아닌 예루살렘을 저들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히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도움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먼저 아하스에게 어떤 징조를 먼저 구할 것을 이사야를 통해 요구하십니다(10-11절). 왕은 이를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아하스의 불신과 거절이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윗의 위를 통해 주시기로 약속하신 후손을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성 안에서 반드시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7:14의 말씀은 아하스의 징조 거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실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예언인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윗의 왕통을 이을 후손이 처녀의 몸을 통해 다윗의 자손으로 유다 나라에 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보존으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이렇게 그 이름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내용의 당사자인 예수라는 분의 도래로 말미암아 비로소 온전히 성취를 보게 됐다는 것이 마태가 본문을 예수님의 탄생과 연결해서 해석한 관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신 당사자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런 사실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居)하시매(즉 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설명합니다. 이는 다분히 구약적인 배경 하에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해명함에 다름 아닙니다. 지금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셔서 저들과 동행하시고 교제하시는 모습을 구약의 성막제도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동일한 방식으로 임재하시고 동행하셔서 교제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의 성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과 예표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 바로 임마누엘의 의미(출25:8)와 임마누엘의 실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요1:14, 사7:14).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성막계시의 실체로 오신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성막을 통해 임재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해 육신을 입고 현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의 온전한 성취자로, 다윗 언약에 약속된 참 다윗 왕으로 영원히 쇠하지 아니할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가지고 마침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셔서 당신의 영원한 백성을 삼고자 언약의 당사자로 오신 분입니다. 마태가 지금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의 말씀을 인용해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함입니다(마1:22, 2:23).
이 뿐만이 아닙니다. 임마누엘로 오실 분은 처녀에게서 나실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마1:23상).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창3:15의 여자의 후손의 결정적인 성취자로 오실 분임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이란 먼 훗날 바로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뱀의 후손의 우두머리인 사단의 머리를 결정적으로 상케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인해 지금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기 예수는 다름 아닌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 오신 분임을 동시에 증거합니다. 바로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을 여자의 후손 한 사람의 순종함을 통해 많은 사람을 의인되게 할 당사자(롬5:19)가 동정녀 잉태방식을 통해 오신다는 사실의 지적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사실에 동의하면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갈4:4)라고 설명합니다.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구약언약의 최종적인 성취자와 언약의 머리로 오신 분임에 의심의 여자가 없습니다. 마태의 복음서 기록의 핵심적 의도가 바로 이 사실을 전하려는 데 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란 구속사 경륜의 대 주제 말입니다.
3.결론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로 인해 새로운 계시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합니다. 상징과 예표론적인 구약의 계시역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안에서 그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은 마침내 구속계시의 절정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태는 이렇게 구약계시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정통성과 진정성을 성경 독자들 특별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확고부동하게 확증시키기 위해 저들이 즐겨 기준 삼는 족보와 선지자들의 말씀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명실공히 유대인의 메시아일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유일한 메시아로써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구속자의 신분으로 마침내 역사의 전면에 그 영광의 자태를 드러내기에 이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런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경륜을 마태로 하여금 직시할 수 있도록 그의 전인격을 영감하심으로 이 신묘막측 하신 하나님의 일을 당시 유대인과 오늘날 성경 독자들에게 밝히 해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이 크신 일을 이루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립니다. 아멘.
마태 족보의 구속사적 의미
(마1:1-17)
1.들어가면서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도래된 특별한 세계라고 선포함으로써 구약의 성경역사를 신약의 성경역사와 연결시킵니다. 이는 달리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마침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 세 사람의 관계를 구속사 진행의 계시적 도구인 언약적 측면에서 살펴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은혜 가운데 선택적으로 부르시고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떠날 것을 명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일방적으로 언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은 그의 씨(후손)로 인해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땅의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해 복을 얻을 것이라는데 집중됩니다(창12:2-3, 22:18). 한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인해 은혜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 언약은 이후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그의 실수와 연약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위와 무관하게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호리의 오차도 없이 성취됩니다. 모세를 통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이 이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마침내 시내산에 이르러(출19장) 하나님과 새롭게 언약을 맺습니다(출24장). 이때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모세를 대표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민족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 이 언약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증합니다.
이때 출애굽기 저자는 이 언약식의 내용을 문서로 작성해 낭독한 사실을 소개함으로써 이제까지의 언약의 성격을 구두언약에서 진일보된 단계로 발전시킨 내용을 기록합니다(출24:7). 이는 시내산 언약의 중요성을 차별적으로 시사함과 동시에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는 것을 통해 시내산 언약의 구체적 내용인 일체의 율법의 구속력 하에 놓이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명실공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객관적이고 공적인 인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언약의 연대성 및 연속성으로 인해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갱신이며 발전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건 전개를 통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그의 후손인 이삭과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들을 족장으로 해서 생육하고 번성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현을 통해 성취된 사실을 간략히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 언약의 핵심사항으로 제기된 '그의 씨로 인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현이라는 사건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 언약은 이중 구조적인 성격을 따고 있는 바 실체를 향해 구속사를 지속적으로 운반해 가는 것을 통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본래적 성취가 실현됐음을 지금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시작하는 것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 언약에서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언급은 다름 아닌 '죄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예수라는 이름 속에 담겨진 구원자로서의 대속적 사역의 핵심내용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표현 속에 잘 설명돼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란 다름 아닌 '주의 구원의 은혜의 해'(눅4:19)를 전파하기 위해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해 세상 가운데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실을 구속사적인 안목으로 잘 파악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씨)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인 사실을 지적합니다(갈3:16). 마태는 이후 족보의 기술을 통해 성경 독자들에게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시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자손 뿐 아니라 다윗의 자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까요. 이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맺으신 다윗 언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요구됩니다. 삼하7:11-17의 말씀입니다. 이 중 특히 우리의 시선을 끄는 대목이 12-16절의 말씀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본 내용이 소위 다윗 언약의 핵심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언약 속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다윗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 자식으로 하여금 집(성전)을 건축케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셋째는 다윗의 위가 영원히 보전될 것에 대한 보증입니다. 이런 세 가지 약속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치하에서 성취를 봅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시내산 언약을 불순종하는 것을 통해 지속되지 못하고 마침내 남북으로 나뉘어 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BC722), 남 유다는 바벨론에(BC587) 각각 멸망당하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됩니다. 다윗 언약은 솔로몬 통치하에서 성취의 영화와 실패의 몰락을 동시에 유발시킵니다. 이런 사실은 다윗 언약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떤 이유로라도 실패나 파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민23:19).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하거나 후회하심이 없는 분입니다. 이는 결국 다윗 언약의 이중성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다시 말해 다윗과 솔로몬의 통일 이스라엘이라는 신정국가 통치체제 속에서 그 일차적 성취를 실현하게 되지만 이내 실패하는 것을 통해 영속적이고 본질적인 실체로서의 다윗의 아들로 말미암는 불멸의 나라를 세우실 것에 대한 암시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원한 다윗의 나라는 급기야 분열 왕국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적(代言的)으로 선포하는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서 이스라엘과 성전의 회복(사44:28) 및 새 언약(렘23:5-6, 31:34, 겔36:26-28, 사9:6-7, 11:1-2)의 선포라는 형식을 통해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에서만 발견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예수님의 첩경을 예비하기 위해 육 개월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의 아비 제사장 사가랴의 예언을 통해서 다윗의 위로 오실 구원의 뿔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기록합니다(눅1:69). 사가랴의 예언뿐만이 아닙니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려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가브리엘 천사의 고지(告知)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이런 사실이 확인됩니다. 눅1:31-33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位)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야 말로 다윗 언약에서 '아들'로 약속하신 언약의 당사자이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 분으로 인해 세워질 나라는 영원해서 그 위가 결코 무너지거나 다른 사람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을 것에 대해 천명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 약속된 아브라함의 '씨'이며 동시에 다윗의 참 '아들'이심을 선포하면서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도래한 신기원(新紀元)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서 기록한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족보의 기술은 구약적 배경을 갖는 히브리적 기록방식으로써 어떤 특정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특별히 종교적인 의미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종종 사용되곤 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시(開始)와 도래(到來)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창세기(창2:4, 5:1, 6:9, 10:1, 11:10, 11:27)나 대상(1-9장), 에스라, 느혜미야서 등등에서 접하게 됩니다. 신약에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3:23-38)에서 구약언약의 실체이며 성취자로 오신 예수님을 족보를 통해 그 진실성과 사실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주로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것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님의 족보를 기술합니다. 있을 수도 있는 예수님의 혈통의 순수성에 대한 유대인들의 시비를 사전에 일축(一蹴)하려는 의도에서 말입니다. 반면에 누가는 철저히 그의 복음서를 데오빌로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인해 예수님의 족보를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을 거쳐 아담과 하나님에게까지 소급시킴으로 예수님을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전 인류의 구세주로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천하 인간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구원받을 만한 이름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음을 적극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행4:12).
2.펼치면서
마태가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기원을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에 접속시키는 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로 인해 도래된 하나님 나라는 철저히 신적 기원에 기초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구약예언의 최종적 성취자이시며 동시에 진정한 다윗 왕의 실체로 오신 사실을 극명하게 밝히는 것을 통해 성경독자들을 포함 유대인들의 관심을 온전히 예수님의 탄생에 집중시키려는 고도의 계산된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이어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족보는 바로 이런 마태의 의도를 사실로 밝히려는 해설로서의 의미를 띱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시된 신정국가로서의 구약언약의 세 국면(局面) 말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예표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계시했던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 처음부터 모형적인 하나님 나라였기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분열 이스라엘 왕국의 통한의 역사, 그리고 결코 파기 될 수 없는 신실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이 나라의 실체인 메시아 왕국의 도래, 곧 진정한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정적 통치를 가리킵니다.
하나님 나라의 건설(2-6절상)
마태는 1절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구약역사에 계시된 언약의 최종적 성취자로서 혈통적으로나 법적으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온 이스라엘이 그토록 대망해 오던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인 사실을 단정(斷定)적으로 밝힘과 동시에 이를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족보를 제시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한 사람의 신분을 객관적이고 공적으로 증명하는 일에 족보를 중요한 근거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특별히 창세기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여자의 후손 계보가 족보를 통해 제시되고 있음이 이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합니다. 이토록 성경역사에 있어서 족보의 의미는 구속사적 특정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과 전환을 알리는 신호로도 사용되곤 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술하면서 이를 크게 세 등분으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습니다(17절). 이런 사실은 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구속사적 관점에서 꿰뚫어보는 마태의 계시적 직관(直觀)이 섬세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셈입니다. 이미 1절 서두에서의 설명을 통해서도 마태가 얼마나 구약계시에 정통했으며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온 유대인과 나아가 이방인의 메시아로서 증거하고 있는지를 거듭 확인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세 부분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이스라엘의 흥왕기(2-6절상),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이스라엘의 쇠퇴기(6절하-11절), 그리고 바벨론 포로 이후부터 예수님까지 이스라엘의 회복기(12-16절)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아브라함부터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를 삼등분으로 나누는 것을 통해 구속사의 절정인 하나님 나라의 계시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 '하나님 나라의 몰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드디어 세상역사 속에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의 중심사상은 가나안 땅에 그의 후손들로 형성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신정국가로써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계획의 구체적 일환으로 먼 훗날 하나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시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셔서 아브라함 언약을 갱신하는 의미에서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십니다(출19, 24정). 이때는 모세를 중심으로 전 이스라엘이 한 민족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언약의 당사자로 등장합니다. 이는 신약의 계시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주님의 몸을 표상하는 교회를 이루는 것을 통해 공동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예표적으로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 언약은 시내산 언약으로 갱신되고 시내산 언약은 다윗 왕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 소위 다윗 언약(삼하7:11-17)으로 보다 구체화되고 확장되는 것을 통해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 다윗과 솔로몬 통치하에서 명실상부한 신정적(神政的) 왕국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열왕기 저자는 이런 사실의 실상을 왕상4:20-25의 내용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25절을 보면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고 기술함으로써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이 다윗 언약을 통해 온전히 성취된 바, 신정왕국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그 영광스런 자태를 드러냈음을 확인시킵니다. 이런 사실은 후에 미가 선지자의 예언에 의해 다시 한번 재확인됩니다. 미가 선지자는 말일(末日)에 대한 그의 예언에서(미4:1) 시온과 예루살렘의 종말론적 회복을 설명하는 가운데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고 기록합니다(4절). 미가는 이런 내용을 통해 솔로몬 치하에서의 왕적 통치의 성격이 바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동일한 표현을 반복해 기록하는 것을 통해 성경 독자들에게 확인시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하에서 정치, 종교, 군사, 경제, 사회 등 제반 분야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와 공법이 하수같이 넘침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현존과 통치를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언약(창1:28, 2:16-17)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 나라 사상은 장구한 구속역사의 흐름 속에서 마침내 다윗 언약 안에서 구체적 성취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사 경륜에 있어서 계시의 도구로 사용됐기에 신정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지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구현시키지 못하고 급기야는 솔로몬 통치 후기에 이르러 시내산 언약을 불순종하는 것으로 인해 남북으로 분열되는 비극을 맛보게 됩니다(왕상11-12장). 이런 의미에서 솔로몬은 하나님 나라의 영화와 몰락을 동시에 경험한자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기록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몰락(6절하-11절)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이는 구약역사 속에서 계시된 구속언약의 총 주제인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진행돼 나왔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담겨진 기록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 첫 시기로서 아브라함 때부터 다윗까지의 이스라엘의 구속역사 진행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흥왕기'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세상역사를 섭리적으로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진행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로 택함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언약의 일차적 목적입니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형성시켜 모세를 지도자로 출애굽 사건을 전개시키는 것으로 인해 가시적 성취를 봅니다. 이후 아브라함 언약은 동일한 언약진행의 연장선상에서 시내산 언약으로 재 갱신되었고, 나아가 지금 다윗 언약으로 그 절정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 언약은 내용적 성격상 처음부터 이중 구조적으로 형성돼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그 왕권이 영원토록 지속될 것에 대한 약속(삼하7:12-13)은 이후 솔로몬 통치에 이르러 보다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듯 했습니다. 아니 솔로몬 통치 초기역사 속에서 신정왕국으로써 통일 이스라엘은 가장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하나님의 공의(公義)를 시행하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실현시켰습니다. 제사장 나라로서의 직분과 기능을 한껏 발휘했습니다. 열왕기서 저자는 이스라엘이 당시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사실과(왕상4:21), 대내외적인 평화정착 및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의 가시적 상징인 성전과 궁궐의 건축, 그리고 특별히 왕상10장에 소개된 스바 여왕의 내방과 그녀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영광과 송축 드림을 자세하게 소개하는 것을 통해 제사장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다윗 언약이 솔로몬 치하에서 완전히 실현됐음을 시사하는 것을 통해 신정국가의 모습을 완벽하게 성취하고 있음을 증거 함에 다름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다윗 언약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영화와 권세가 이후 솔로몬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계승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사실들이 다윗 언약의 실효성을 불신하거나 정당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작용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저자는 이런 사실들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언약의 이중성'이라는 독특한 구조에 기울이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의 언약은 구속사 진행의 도구로 사용되는 바 표면적인 세상역사와 이면적이고 본질적인 구속사적 성격을 동시에 띠고 나타나는 것으로 해서 항상 구조적으로 이중성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언약의 이중성을 모형과 실체의 상호관계성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여튼 다윗 언약은 솔로몬 대에 이르러 신정국가로써 하나님 나라 영화의 극치를 한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길지를 못합니다. 통치 후반에 이르러 그는 교만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많은 처첩과 각종 우상숭배를 용납함으로 시내산 언약을 정면으로 위배합니다. 이는 언약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불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언약적 심판을 내립니다. 여기서 '언약적 심판'이라 함은 아주 멸하는 심판이 아닌 책망과 교훈으로 주시는 징계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심판과 함께 항상 용서와 회복이 더불어 약속돼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의 성격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한 은혜적 성격을 처음부터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순종에 대한 징계와 심판은 교육적인 효과로 주어지는 바, 회개하고 돌이킬 때는 언제든지 용서를 통해 약속한 내용들을 궁극적으로 성취시키고야 마십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70년 후에 다시 고토(古土)로 귀환하는 은혜를 입게된 배경이 이렇게 언약적 심판의 일환으로 내려진 사실에 근거합니다.
이렇게 통일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범죄로 인해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뉩니다. 왕은 항상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머리로 존재합니다. 특별히 신정왕국을 표상하는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통해 항상 언약의 머리 역할을 감당하는 바, 왕의 불순종과 타락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불순종과 타락으로 연결됩니다. 아합왕 시대의 종교적 배경이 이를 전형적(典型的)으로 예시합니다. 따라서 왕에 대한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향하신 심판과 동일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왕과 연대해서 공동의 책임을 지게되는 셈이지요.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의 남북분열은 이렇게 왕을 머리로 해서 전 백성의 총체적인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결과가 빚어낸 비극적 사건인 셈입니다. 이후 분열왕국 시대에 두 나라 사이는 동족관계를 떠나 적대적 관계를 띠고 끊임없는 갈등과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는 비극적 사태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그러나 남북의 분열로 하나님의 심판이 종식된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남북분열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깊이 인식하고 회개와 통회 자복으로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우상숭배를 통해 불순종의 극한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핍박하고 정죄하며 심판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회개치 않는 저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강도를 더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이 곧은 저들을 심판하시는 일에 이방의 열국을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셨습니다. 마침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과 솔로몬 치하에서의 다윗 언약의 성취는 한시적인 표면적 언약성취로 일단락 됩니다. 지금 마태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삼등분으로 구분해서 두 번째 시기인 다윗부터 바벨론 이거(移去)까지를 나눈 배경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마태는 구약의 구속사에 아주 정통했습니다. 구약의 제반 언약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총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는지에 대해 예리한 통찰력을 갖고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성에 대해 밝히기를 원했습니다. 이후 이런 마태의 구속사적 안목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마1:22)라는 반복적인 표현 속에서 계속적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사실을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시된 족보를 통해 밝히는 것을 통해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예표적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가 이제 다윗 언약의 실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질로 실현된 사실을 강력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윗 언약의 또 다른 이면(裏面)이 여전히 미래지향적으로 남아 있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 신적 기원과 구속사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 인해 결코 중도에서 포기되거나 취소될 수 없음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에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분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를 시사하는 선지자들의 예언에로 독자들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합니다. 분열왕국 시대에 집중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문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들로써 왕에 대한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경호원들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자들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을 대신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저들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효력과 권위를 발휘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계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과 꿈과 선지자들의 대언을 통해 전달되곤 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예언 속에 다양한 모습과 표현으로 언급되고 있는 소위 메시아에 대한 대망사상의 고취는 이렇게 다윗 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라는 기대와 소망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언약의 발전과 확장의 산물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 언약은 분열 이스라엘의 아픔과 외세에 의한 멸망의 비극적 탄식 속에서 본질적인 성취의 실체를 향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쇠퇴와 몰락은 그 자체 속에 철저한 자기성찰과 진정한 회개를 강력히 유발시키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실질을 향한 회복과 소망을 지향하게 만듭니다. 이런 일련의 사태진전이 다윗 언약의 궁극적 성취를 보증하는 새 언약(렙31:31-34, 겔36:26-27)을 출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12-16절)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는 마태의 구속사적 관점은 하나님 나라의 흥왕과 쇠퇴에 이어 마지막 제 삼기로 접어듭니다.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재건기(再建期)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회복기 말입니다. 마태는 이 시기를 특별히 '바벨론으로 이거(移去)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라고 한정합니다. 그리고 이들 세 시기의 각각의 기간을 열 네 대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중간에 몇몇의 왕들이 임의적으로 생략되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8절에서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 두 왕 사이에 아하시야(왕하8:26), 요아스(왕하12;1) 그리고 아마샤(왕하14:1)등 세 왕의 이름이 생략되었습니다. 11절에서는 요시야와 여고냐(여호야긴) 사이에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 등 세 사람이 빠졌습니다. 이것도 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생략이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저자는 족보를 기술함에 있어서 의도적이고 목적론적 측면에서 임의로 취사선택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마태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함에 있어서 14대씩으로(제 삼기에서는 13대로 마감처리) 제한시켜서 다분히 의도성을 가지고 기록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는 다름 아닌 마태의 족보는 순전히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강조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실 이렇게 족보 가운데서 일부 사람들이 빠지기도 하고 몇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유대인 사회에서 일반적인 현상이기도 했습니다. 흔히 유대인들은 족보에서 중요치 않은 사람들은 기록에서 빠뜨렸으며 또한 기억하기 쉽도록 전체를 몇 부분으로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로 인해 마태의 족보기술의 주된 관심사는 역사적 사실성과 더불어 구속사적 목적성, 다시 말해 구약언약의 최종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정통성을 입증시키고자 하는데 집중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바벨론 포로기 직전과 직후의 기간에 문서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활발하게 전개시킵니다. 하나님의 전령사들로서 경계와 경고의 말씀을 담대히 운반합니다. 이스라엘의 위선과 거짓과 망령된 행실 등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회개를 촉구합니다. 필연적인 심판의 경고와 함께 회복의 소망의 메시지를 더불어 전합니다. 바로 이런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비록 남 유다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음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날을 소망하면서 주의 자비로운 손길이 구체적으로 임하기만을 고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렘25:8-14, 29:10, 단9:1-2). 마침내 그 날이 도래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때가 차면 반드시 성취됩니다. 아무도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의 주권적 손길을 막을 자는 없습니다. 만유 보다 크신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할 자는 없습니다. 성도의 소망과 위로가 바로 이런 사실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의 구원은 영원히 보장됩니다. 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기에 말입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이미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바사국의 고레스 왕을 통해 바벨론 제국을 정복하게 하시고 그를 통해 유다 자들을 예루살렘 본토로 귀환시킵니다(사44:28, 45:1-4, 에1:1-3). 이렇게 해서 스룹바벨과 에스라 및 느혜미야에 의해 세 차례의 유대인 포로귀환이 거족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을 가리켜 일찍이 야곱의 '남은 자'라는 구속사적 용어를 사용해 차별적으로 호칭합니다(사10:20-22, 46:3, 렘23:3).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 건 바로 이들 남은 자들을 선택적으로 은혜 가운데 부르셔서 당신의 구속사의 경륜을 이루시는 일에 언약의 당사자들로 삼으십니다. 이는 교회시대에도 동일한 원리로 작용합니다(롬11:4-5).
하나님의 손길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도 당신의 남은 자들을 언약에 근거해서 신실히 보존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후손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시는 가운데 마침내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혈통을 통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섭리적으로 주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 언약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통해 이면적이고 본래적인 성취를 보게 됩니다. 새로운 신기원(新紀元)적 계시시대인 하나님 나라가 마침내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 가운데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마태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지목하고, 예수님에게서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이 최종적으로 성취된 사실을 족보를 통해 의도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배경이 이렇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옛 이스라엘은 회복됐습니다. 다윗 언약에 약속된 진정한 아들로서 다윗 왕의 위(位)는 예수님에게서 마침내 현실로 성취됐습니다. 예수님은 참 다윗 왕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진정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새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저들의 영원하신 구원자로 마침내 성육화(聖肉化)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성육신(聖肉身)사건이라고 부릅니다.
3.맺으면서
성경의 역사는 구속사입니다. 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언약적 구속사입니다. 에덴에서의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방식으로 세상의 역사(인류역사)는 기원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역사의 성격을 세상역사와 구속사로 나누어 이중적으로 해석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방식으로 세상역사가 출발했기에 인류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언약적 구속사일 뿐입니다(창3:15-5:1-5, 눅2:1-7). 이런 의미에서 세상역사의 의미는 구속사의 진행과 성취와 종말론적 완성을 위한 현장과 무대의 역할을 담당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류의 통치역사가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계21:1, 단2:31-35).
마태는 이런 성경의 전(全)구속사적 안목과 통찰력을 가지고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언약의 총체적 성취로 해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부동의 증거로 예수님의 족보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족보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의 경륜이 역사 속에서 성취된 사실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마태복음 1장의 선택적 족보에 나타난 구조적 의미
1. 들어가기
마태복음 1장의 족보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다. 마1:8에는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라고 기록되어있는데, 그 사이에 "아하시야-요아스-아마샤"를 생략했다(대상3:11-14 등). 또한 마1:11-12에서는 요시야와 여고냐 사이에 여호야김을 생략했다(왕하23:43; 24:6 등). 그래서 어떤 이는 마태복음 1장의 족보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 가운데도 생략된 곳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기록 형식은 "누가 누구를 몇 세에 낳고"라는 통일된 형식을 가지고 시간을 전해주려는 의도가 있으며, 그 형식이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시간적으로 생략된 곳은 없다. 반면, 마태복음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의도적 생략을 통해 "열네 대, 열네 대, 열네 대"로 소개한다. 이는 시간을 알려주는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와는 기록형식 자체가 다르다.
또한 마태복음 1장은 이러한 생략뿐만 아니라 '다윗'은 두 번 중복하여 기록하고 둘로 계수한다. 마태복음 1장은 왜 이런 형태로 족보를 기록하고 있을까?
2. 마태복음 1장 족보의 시작
마1:1은 신약성경을 여는 말씀이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을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히.마쉬아흐, 헬.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면서 시작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1:1)로 시작하는 마1:2-16까지의 족보기록의 목적은 메시아예언의 성취를 증거하고 설명하는 것에 있다. 메시아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창22:18), 이삭에게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4), 야곱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8:14), 유다에게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49:10), 이사야를 통하여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사11:1-4), 나단을 통하여 다윗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고 알려주셨다.
신약을 여는 선포로서 마1:1은 이 가운데 특히 아브라함과 다윗을 메시아예언의 중심에 두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실 것으로 작정되신 것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지만(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예언으로 시작된 것은 선악과사건 이후 창3:15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예언으로 시작한다. 그 후 노아홍수사건을 거쳤으며, 바벨탑사건을 거쳐 언어는 혼란되었으며, 여러 언어들, 여러 민족들과 여러 나라들로 나뉘고, 여러 가지 종교들이 생겨나 혼잡해진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심을 통해 창3:15의 메시아예언의 성취가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예수님께서는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이심"을 혈통적으로 증명하는 데 중요하다.
'다윗'의 경우, 에스겔서는 다윗을 메시아의 예표로 기록했으며(겔34:23-24; 37:24-25), 마태복음 기록 당시에 메시아족보 예언 성취의 중심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의 족보예언은 이미 지났고, 이제 다윗의 후손 가운데 누가 메시아로 오신 분이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1:1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님의 메시아족보 예언의 성취를 선포한다.
3. 생략을 통한 "열네 대"씩 '3'개의 그룹핑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1:17)에서 생략되고 중복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그룹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는 1 아브라함 - 2 이삭- 3 야곱 - 4 유다 - 5 베레스 - 6 헤스론 - 7 람 - 8 아미나답 - 9 나손 - 10 살몬 - 11 보아스 - 12 오벳 - 13 이새 - 14 다윗이다.
제2그룹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는 1 다윗-2 솔로몬-3 르호보암-4 아비야-5 아사-6 여호사밧-7 요람-8 웃시야-9 요담-10 아하스-11 히스기야-12 므낫세-1 3아몬-14 요시야인데, 여기서 다윗은 중복으로 계수하였고, 요람과 웃시야 사이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는 생략하였다.
제3그룹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는 1 여고냐 - 2 스알디엘 - 3 스룹바벨 - 4 아비훗 - 5 엘리아김 - 6 아소르 - 7 사독 - 8 아킴 - 9 엘리웃 - 10 엘르아살 - 11 맛단 - 12 야곱 - 13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 14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님)인데, 여기에는 요시야와 여고냐 사이에 여호야김을 생략하였다.
왜 억지스럽게 보이도록 생략하고 중복하면서 "열네 대"씩 '3'개의 그룹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우선 "열네 대"에서 '14'라는 수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4일은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며(레23:5), 유월절 어린 양은 그리스도(고전5:7) 예수님을 의미한다. 14는 7의 배수이며, 구약성경에는 7의 배수를 사용하여 전체를 나타내는 족보기록방식이 있다. 창 10:2-5의 야벳의 자손들의 목록은 14명(7명의 아들, 7명의 손자)으로 선택적으로 소개되었다. 창10:1-11:9에서 노아의 아들들로부터 파생된 열방의 숫자는 70명이 소개되었다. 애굽으로 70명이 내려갔다고 말한다(창46:27; 출1:5). 여기에는 모두 생략된 부분이 있으며, 7의 배수로 전체를 대신했다. 따라서 마태복음 1장의 족보기록은 구약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다윗'이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알파벳 수 값도 달렛(4)+바브(6)+달렛(4)=14이다.
'3'개의 그룹에서 '3'에서도 의미를 찾는다면, '3'은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의 수이다.
4. "다윗"의 중복 기록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샤, 그리고 여호야김은 생략하면서도 "다윗"은 왜 두 번 중복하고 있을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시의 메시아족보 예언 성취의 중심에는 "다윗"이 있었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 놀라면서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한다(마12:22-23). 두 소경과 가나안 여자도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마9:37; 15:22).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막10:47, 눅18:38),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실 때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들이 소리 높여 무엇이라고 외치는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환호한다[호산나는 "야솨"(구원하소서)와 "나"(제발)의 히브리어 합성어에서 왔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21:7-9).
이와 같이, 당시에 메시아를 식별하는데 '다윗'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마태복음 1장의 족보를 14대, 14대, 14대로 기록하기 위하여 생략을 가하는 중에서도 오히려 '다윗'은 두 번 중복하여 포함시켰던 것 같다. 또한 공교롭게도 '다윗'이라는 이름의 히브리어 알파벳 수 값 '14'는 7의 중복 수이기도 하다.
또한 원어성경(헬라어) 마1:1은 "다윗의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순서적으로 본다면 다윗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킹제임스(KJV) 번역성경 마1:1은 다음과 같다. "The book of the generation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NIV 번역성경 마1:1은 다음과 같다. "A record of the genealogy of Jesus Christ the son of David, the son of Abraham:"
5. 마태복음 1장 족보와 누가복음 3장의 족보
눅3:23은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앞에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헬.호스 헤노미제토, as was supposed)"라고 단서를 붙인다. 사실은 마리아의 아들이고 마리아의 족보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장에서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로 시작하여 요셉의 족보를 기록하지만, 마지막에 예수님을 낳은 것은 요셉이 아니라고 말을 맺는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마1:2-16).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 나단을 따라 태어났으며(눅3:23-31), 요셉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따라서 왔다(마1:6-16). 그러므로 마리아나 요셉이나 모두 다윗의 자손이다.
그렇다면 눅3:23은 왜 "마리아의 위는"이라고 하지 않고 "요셉의 위는"이라고 했을까? 원어성경(헬라어)에는 그저 "그 위는"이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므로 필자의 사역으로 직역하자면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지만 (사실은 마리아의 아들이며,) 그 위는"으로 번역할 수 있겠으며, 정확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이탤릭체로 괄호 안의 내용을 추가하였다.
6. 결론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유대인 족보기록의 전통을 따라 통일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족보기록의 목적에 따라 생략과 중복을 사용하여 구조적으로 정교하게 기록되었다. 김홍석박사(한국창조과학회 성경위원장, 구약학)
마태가 기록한 예수님 족보
예수의 족보를 왜 14-14-14대로 표시해 주는 것일까?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 족보를 기록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17절에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가 14대, 그후 그리스도까지 14대로 기록되어 있다. 즉 아브라함 이후 그리스도는 14대-14대-14대(42대)에 탄생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의 기록된 역대 유대왕들의 족보를 보면 14-14-14대에서 빠진 자들이 있으며, 다윗은 두 번 들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가 잘못 알고 실수해서 그랬을까? 분명히 아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구약의 많은 예언들을 인용한 구약에 능통한 자였으며 세리 출신이다. 지금의 IRS의 직원이었으며 CPA 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숫자에 정확한 사람이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족보를 구약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번째 14대 -- (A1) 아브라함, (A2)이삭, (A3)야곱, (A4)유다, (A5)베레스, (A6)헤스론, (A7)람, (A8)아미나답, (A9)나손, (A10)살몬, (A11)보아스, (A12)오벳, (A13)이세, (A14)다윗
두번째 14대 -- (B1)다윗, (B2)솔모몬, (B3)르호보암, (B4)아비야, (B5)아사, (B6)여호사밧, (B7)요람=여호람, (B7.1)아하시야(왕하8:27), (B7.2)요아스(왕하11:21), (B7.3)아마샤(왕하14:1), (B8)웃시야=아사랴, (B9)요담, (B10)아하스, (B11)시스기아, (B12) 므낫세, (B13)아몬, (B14)요시야, (B14.1)여호와하스(왕하23:30), (B14.2)엘이야김=여호야김(왕하23:34),
세번째 14대 -- (C1) 여고냐=여호아긴, (C1.1)시드기아=맛다니야(왕하25:17), (C2)스알디엘, (C3)스룹바벨, (C4)아비훗, (C5)엘리아김, (C6)아소르, (C7)사독, (C8)아킴, (C9)엘리웃, (C10)엘르아살, (C11)맛단, (C12)야곱 (C13)요셉, (C14)예수 그리스도.이며,
위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왕들이 족보에서 빠져있고, 다윗은 족보에 두 번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를 14-14-14대로 기록해 주고 있는가?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족보를 구약 기록에 비추어보면 총 6명의 왕이 빠져있으며, 다윗이 두 번 들어가 있으므로 실제로 아브라함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는 총47대이다. 그럼에도 마태복음 1장은 왜 14-14-14대로 표시해 주는 것일까?
숫자 14는 7x2 이다. 7은 ‘영적완전’(Spritual Perfection)이며 2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신성과 인성)을 의미하며 ‘증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14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증거해 주는 영적완전수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참조: 확대경으로 본 바이블 스토리 14회)
또한 성경에 숫자 14가 나타나는 사건을 살펴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머슴으로 14년 동안 무보수(노예)로 일하게 되었다. 그후 7년 동안 보수를 받으며 일했다. 요셉이 바로왕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7년 풍년과 7년 흉년 총14년이었다(창41:29-30). 또한 정월 14일(원래 7월 14일)은 유월절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종 살이에서 구원을 받고 자유함을 얻게 되는 날이었다(출12:4), 사도 바울은 14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가는 환상을 보는 체험을 했고(고후12:2). 14년 후에 이방인의 할례의 교리적인 문제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방인의 할례의 굴례에서 해방시켰다(갈2:1).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어 가던 배가 풍랑에 시달리다 14일째 되던 날 풍랑에 침몰되었으나 모든 자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행27:27). 이와 같이 숫자 14는 구원, 해방, 자유의 의미를 갖고 있다.
또한 14는 7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인데 이 반복은 확실하고 분명함을 주지시키기 위함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마치고 헌당식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축하의 잔치를 했는데 7일, 7일 합 14일(왕상8:65)동안 기념했다.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면서 중요한 대목에서는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 하시면서 말씀해 주셨다.(요1:51, 3:3,5,11, 5:19,24,25 6:25,32,47,53, 8:34,51,58, 10:1,7, 12:24, 13:16,20,21,38, 14:12, 16:20,23, 21:18). 그 대부분이 에고 에미(I AM = 지존자)로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내용에 사용하셨던 것이다. 즉 ‘확실히 분명하게’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신 것이다. 또한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들 즉 우리들이 확실히 기억해야 할 사건들은 두 번에 걸쳐 일어났다. 즉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사건, 반석을 쳐서 물이 나게 했던 사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하신 사건,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 성령의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심 등등이 있다.
이와 같이 구세주의 탄생은 확실하고 분명함을 증거해 주기 위해 숫자 7(영적 완전수)를 두번 반복한 숫자 14를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 마태복음 1장에 6명의 왕들이 왜 족보에서 빠지게 되었나? .
14대의 두 번째에서 7번째의 유다왕 요람(여호람, B7) 이후 그 후손 왕들의 3대가 빠지게 되었다. 요람(B7)은 북왕조 아합 왕과 친북정책을 펼쳤던 자이며, 아합왕과 왕비 이세벨 사이에서 난 딸 아달랴를 아내로 삼았던 자이다. 그래서 요람왕과 아달랴 사이에서 아하시아(B7.1)가 다음의 왕이 되었으나 1년 다스린 후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아달랴는 다른 왕족의 씨를 멸절하고 자기가 유다를 6년동안 다스렸다. 그러나 아하시아의 다른 아들인 요아스(B7.2)가 7세의 나이에 등극하게 되면서 아달랴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요아스왕은 처음에는 선정을 하였으나 나중에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그 아들인 아마샤(B7.3)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던 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던 요람왕의 후손 3대가 빠져 있다.
또한 14대의 두 번째에서 14번째 유다왕 요시아(B14)는 애굽과 바벨론과의 갈그미스 전쟁에 끼어들어 전사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인 여호와하스(B14.1)는 왕위에 올랐지만 3개월 만에 퇴위되어 애굽에 포로로 잡혀가 죽게 되었다. 이 때 애굽 세력에 의해 요시아왕의 다른 아들인 여호야김(B14.2)이 왕이되어 11년 통치하였다. 하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며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왕국은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리게 되었는데 이는 저들의 선조인 므낫세가 지은 모든 죄의 결과였다(왕하24:3).
여호야김이 죽고 그 아들 여호야긴(C1)이 왕이 되었으나 예루살렘에서 3달을 통치했으나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리고 바벨론 세력에 의해 여호야긴의 삼촌이며 요시아의 형제 시드기야(C1.1)가 왕이 되었다. 시드기야왕은 그 후 바벨론을 배반하므로 두 눈이 빼임을 당하고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유대 땅은 바벨론의 속국으로 그달리야로 관할하게 하였고. 바벨론은 자기들이 잡아온 여호야긴(여고냐)을 포로생활 37년만에 옥에서 풀어주어 후히 대접을 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스알디엘을 통해 왕가를 이어가게 하였다. 스알디엘의 아들인 스룹바벨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제1차 귀환의 대표자로 예루살렘에 귀향하여 통치하게 되었다.
요시아왕 이후 족보에서 빠지게 된 3왕들은 요시야 왕의 두 아들과 그의 한 형제였다. 이는 요시아왕 이후 한 세대가 빠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윗이 두 번 들어 갔었으니 대신에 한 세대가 빠지게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출애굽 이후에 12지파에서 레위지파가 빠지고 요셉의 아들들 즉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지파가 들어가게 된 것처럼 그리고 계시록 12장에 14만 4천 중에서는 단지파가 빠지고 레위지파가 다시 들어가게 됨으로 12 지파의 숫자를 맞춘 것과 같다. 12라는 숫자는 통치완전(Governmental Perfection)수이다. 그리고 12제자의 이름에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 후에 가룟유다가 빠지게 되고 대신 맛디아가 들어가서 12를 채워 12제자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족보에도 14를 맞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그리스도의 탄생을 확실하게 예언에 따라 증거해 주기 위하여 14-14-14대로 성경은 기록해 주고 있다.
왜 다윗은 족보에서 두 번들어가게 되었는가?
다윗은 겸손한 자였다. 다윗은 간음죄와 살인 모사죄를 저질렀지만 하나님 앞에 진실되이 회개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다 이루게 하시는 자(행13:22)’였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에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 오실 메시야를 예언해 주었던 것이다. 다윗은 축복의 두 배를 받은 것이다. 성경은 고난 후에 두 배의 축복을 받은 자들을 기록하고 있다. 요셉은 12지파 속에 레위가 빠진 대신 두 아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욥은 고난을 통해 그 재물에서는 정확히 두 배를 받았고, 그 자녀들도 두 배가 되었으니 처음 자녀들 10명과 나중에 나은 자녀들 10을 합하게 되어 천국에서 정확히 두 배가 된다. 겸손하며 충성된 자들에게 하나님은 정확하게 두 배의 축복을 주시기도 하신다.
14-14-14대의 마지막 14대째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준다.
처음 시작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시작된다. 이 믿음은 칭의를 얻는 믿음이다(창15:6).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첫 번째의 14대의 마지막 14대는 다윗으로 끝이 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다윗은 겸손과 충성과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그 삶에서 간음과 살인 모사죄라는 큰 죄를 범하였다. 즉 믿음이 있으면서도 그 행위 즉 성화(Santification)라는 면에서 볼 때에 부족한 점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두 번째 14대의 마지막 14대째의 왕인 요시아 왕은 믿음의 사람이면서도 성화의 면에서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던 자이다. 사울왕은 전쟁에 나가서 상처를 당하자 자살했으며, 다윗왕은 부하들을 군대에 보내고 왕실에서 늦잠자고, 밧세바와 간음을 하는 죄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죽임을 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요시아왕은 선왕으로 갈그미스 전쟁에 본인이 친히 참전하여 전사하여 죽게 되었던 자이다. 성경은 요시야 왕은 그동안 전혀 지켜오지 않았던 유월절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으며, 산당의 제사장들을 불살라 죽이며, 성경에 기록된 대로 종교개혁을 하였던 왕이다. 성경은 그에 관해서 말하되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고 말해준다.
그후 세 번째 14대의 마지막 14대째는 유대인의 왕이요, 인류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참된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그러므로 14-14-14대의 마침은
첫 번째 다윗은 믿음은 좋았으나 그 삶의 행위에서 부족함이 보여졌으며,
두 번째 마지막 요시아는 믿음과 그 삶의 행위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준행하였으며,
세 번째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흠이 없는 ‘우리 믿음의 주시오, 우리를 온전케하시는 주(히12:2)’이시다.
오늘날에 타락되어 가는 교계를 보면서, 구약에 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에 풍전등하가 되어졌던 것을 방불케 하는 모습을 본다. 참으로 요시야와 같은 참된 지도자(들)이 있어야 하겠다. ‘성경을 온전히 믿고, 행하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자’는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하겠다. 그리고 성도들 한분 한분들이 모름지기 이러한 종교개혁이 매일 삶 속에서 일어나야 하겠다. 그리할 때 이제 머잖아 재림의 주로 오실 때 그러한 자들이 영광중에 재림의 주를 뵈옵고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쁨에 찬양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김근태 목사>
주님의 계보에 담긴 하나님의 뜻(마 1:1-17)
Ⅰ. 序(Attention, 관찰 및 연구과제)
- 계보= 헬라어,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로서 출생의 책 즉, 가문을 이어가는 혈통을 기록한 책을 말함.
- 과거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이 혈통을 지키기 위하여 대를 이어 싸우는 경우 도 있을 정도로 혈통을 중시했음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인 로미오와 줄리엣)
◇ 인간에게 이렇게 중요한 혈통과 계보가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는 어떠한 의미?
- 본문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주님까지 이르는 주님의 육신의 계보임.
-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으므로 육신의 계보를 가짐.
- 주님의 계보에는 인류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음.
- 주님의 계보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다음의 네 가지로 살펴봄.
Ⅱ. 本論(해석 및 적용)
1.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의미는?
- 개역 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라고 함으로 써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나타남.
- 그러나 원문을 직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인 바 그는 다윗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시다"라는 순서로
되어있음.
-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1) 예수의 뜻
- 예수는 원래 히브리어 여호수아, 히브리 발음은 '예호수아( )'임.
- '예호수아'는 여호와와 구원하다라는 '야솨( )'가 합성하여 이루어진 말,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 아람어 '예수아'로 사용, 헬라어에 유입되면서 '예수스( )'
◇ 아무튼 예수의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죄 가운
데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이 내포됨(마 1:21)
-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에서 자기 백성이란?
- 유대인들은 구약의 이름 여호수아를 기억하며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므로 자신들만이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못박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오히려 버림받은 자들이 되었음.
- 자기 백성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 을 가리킴.
- 하나님의 뜻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순종하는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 에서 구원하심.
◇ 이하에서 계속해서 살펴볼 다윗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이방의 네 여인들의 이름이 구세주의 계보에 올라간 뜻도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뜻 을 증명하는 것임.
2) 그리스도의 뜻
-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 히브리어 '마쉬아흐'를 헬라어로 번역.
- '마쉬아흐'는 보통 메시야(헬라어 므사이아)라고 발음하는 말임.
◇ 메시야의 개념은 점진적으로 발전함.
최초의 의미는 단순히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모든 자를 가리키는 말
= 기름부음 받고 성별된 모든 선지자들, 왕들, 심지어 이방의 왕 고레스(사 45:1)
후에 메시야의 뜻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왕으로 삼아 기름을 부어 주신 자'로 국한됨
=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를 자신들을 오랜 포로생활에서 구원하여 줄 실질적인 구원자
= 이스라엘에 있어서 메시야는 이스라엘의 민족 해방을 이루어줄 수 있는 다윗과 같은 강력한 왕으로 생각하여
메시야를 대망함.
그러나 메시야에 대한 계시는 신약에 와서야 완전히 드러남.
** 이는 계시의 점진성 즉, 계시는 처음부터 완전한 뜻이 모두 드러나지 않음.
- 신약에 와서 메시야 즉, 그리스도는 인류를 구원하시고 그 구원하신 모든 백성을 통치하실 영원하신 왕의 개념이 드러남
= 이는 세상의 통치자의 개념과 다른 신적 통치자의 개념.
3) 예수 그리스도의 뜻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 아들을 통하여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아들과 아버지를 믿는 구원받은 백성들을 아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다스리게 하셔서 아버지께 바치도록 하고자 하심.(고전 15:24)
(적용)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살면서 하나님과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된 것하나님의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뜻 가운데서 이루어짐을 깨닫고, 구원의 감격을 잊지 않고 사는 참다운 성도가 되어야 함.
2. 다윗의 자손의 의미는?
- 신약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음/ 마태복음= 유대인들을 향한 구원의 복음 을 전파 목적
- 유대인들이 구약에서 계속 예언되어져 온 메시야를 대망하는 이유
자신들을 속국의 포로생활에서 해방시키고 그 옛날 다윗 왕국의 영화를 다시 한 번 이룩하고자하는 열망에서임.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이 땅에서 강력한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시킬 수 있는 강력한 영도자였으므로
그들은 다윗과 같은 이를 기다림.
◇ 다윗( )이라는 히브리어 이름의 뜻은 '사랑하는 자'임.
- 구약의 예언의 다윗 왕국의 회복을 유대인들은 글자 그대로 즉, 문자적으로 믿었음.
- 암 9:11("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유대인들은 그 사건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함.
- 따라서 유대인들은 언젠가는 이 땅에 유대인들의 강력한 나라가 세워질 것 을 믿고 있음.
◇ but, 무너진 다윗 왕국이 다시 세워지리라는 구약의 예언은 신약에서 이미 이루어졌음.
(사도행전 15: 13-17에서 야고보는 분명히 말하였음)
- 야고보는 다윗의 무너진 장막의 회복이란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이방인들 중에서 주를 찾는 자들이 포함된 영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의 의미로 가르침.
- 즉, 다윗의 자손이란 유대인들에게는 다윗의 육적인 혈통의 계보를 따르는 것이지만,
영적 의미로는 구원받은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킴을 알아야 함.
◇ 땅위에 다윗 왕국과 같은 유대인의 나라가 다시 세워질 필요는 전혀 없음.
- 왜냐하면 구원받은 백성들 즉, 성도들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 가운데 존재하고 있으며
주님의 영원하신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임.
- 이스라엘이 망한 원인은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신정 대신에 왕정을 통한 인간의 강력한 나라를 원했기 때문임.
-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미 주님을 통하여 영원하고도 완전한 직접적인 통치를 하고 계시는데
또다시 땅위에 존재할 어떠한 나라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음. → 유대인들의 한풀이적인 기대에 불과함.
(적용)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면서/ 이미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의 통치를 즐거워하며/ 아버지의 뜻에 합한 위대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함.
3. 아브라함의 자손의 의미는 무엇인가?
- 아브라함의 원래의 이름은 아브람( )/ '높임을 받은 아비'라는 뜻/ 아브라 함은 '열국의 아비'라는 뜻임.
-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고 불리기 전에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사 하란을 경유하여 가나안으로 가게 하사 믿음의 조상을 삼으셨음.
◇ 아브라함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태어난 후 얼마까지도 노아가 생존해 있었음을 비롯하여
노아의 직계 자손들 중에 많이 자들이 아브라함과 동시대에 살았음.
- 이는 아브라함이 살았던 당시의 시대가 불신의 시대가 아니었음을 증명함.
- 즉, 아브라함은 직계 장손으로서 노아, 셈, 아르박삿을 비롯하여 당시까지 살아있던 장수하는 믿음의 할아버지들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배웠을 것임.
- but,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특수하게 믿음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짐.
◇ 아브람의 75세 때 살던 곳을 떠나도록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창 12:1-3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라고 하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음.
- 다시 99세 되던 때에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시면서 언약을 맺으시고/ 창 17:7에서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겠다"고 하심.
- 유대인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영원한 언약이라 는 말씀 에 근거함.
-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언젠가 유대민족의 회복이 실현될 것을 믿음.
◇ 그런데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의 개념을 오해하고 있는 것임.
- 이를 문자적으로 즉, 표면적인 유대인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임.
- 그러나 롬 4:13-18에서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후손은 혈통과 율법을 따라서 된 것이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이 된다'고 하였음 .
- 즉, 믿음의 씨라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영적인 가르침을 알아야 함.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또한 그의 후손과 사이에 맺은 영원한 언약은 하나님 의 신실하심으로 인하여 변할 수 없음,
- 그러나 그 언약은 육적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즉 하나님 나라의 존재들인 우리들 성도들을 통하여 신실하게 지켜진 것임.
(적용)
따라서 우리들은 언약을 배반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스라엘을 본받지 말고 오직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언약 백성이라는 의식을 확고하게 가지고 살아야만 됨.
4. 이방의 네 여인들의 이름이 올라간 뜻은?
- 구세주이신 주님의 육신의 계보에는 이방 여인의 이름이 네 명 있음.
- 그 들은 다말과 라합과 룻과 우리야의 아내의 네 사람임.
-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창부 행세를 하여 시부인 유다를 속이고 그의 아들을 낳은 여인임.
=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임.
-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살던 기생이었으나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고 여리고 함락시 살아남아
나중에 살몬의 아이를 낳아 계보에 올랐음.
-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남편이 죽고 나서 시어미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 땅에 들어왔다가
살몬의 아들 보아스와 재혼하여 다윗의 조부 오벳을 낳았음.
- 우리야의 아내는 밧세바로서 다윗이 그 여인을 탐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큰 징계를 받게된 장본인 임.
◇ 네 명의 이방 여인들은 룻을 제외하고는 별로 떳떳한 관계로 족보에 오른것은 아님.
- 혈통을 중시 여긴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직계 계보에 이름을 써넣기가 부끄러운 일임.
- 그러나 그들은 당당히 아브라함의 후손의 족보에 기록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을 따른 계보에 이름이 올랐음.
- 이는 롬 1:16의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고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심을 암시 받을 수 있음.
(적용)
한편 롬 11: 20-21에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라고 말씀/ 이방인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선민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므로 버림당했던 사실을 기억/ 자긍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과 주님을 섬겨야 함.
Ⅲ. 結(Action의 촉구)
- 주님의 계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았음.
- 주님의 이름 자체가 곧 주님을 통한 구원과 주님에 의한 통치의 선언임.
-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지 않고 온 인류를 그리스도 안에서 공평하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함.
-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자를 차별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은총을 온 세상이 알도록
끊임없이 복음을 전파해야 함. - cafe.daum.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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