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복음서 연구

마태공동체의 갈등 및 삶의 자리

by 은총가득 2020. 9. 4.

마태공동체의 내부갈등과 소외그룹지원

 

-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 하현혜

 

목 차

Ⅰ. 서 언
Ⅱ. 마태공동체 내부 갈등 그룹 규명
Ⅲ. 마태공동체 내의 소외그룹 지원
Ⅳ. 결 어


초 록

산상수훈내에는 상호비판금지, 용서의 강조, 형제에 대한 분노의 금지, 화목의 강조 등 마태공동체 내부의 갈등 정황을 추정케 하는 교훈들이 많이 나온다. 본 소론은 5: 46, 47, 6: 7, 32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지만, 다른 구절에서 호의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세리와 이방인에 대한 상충되는 평가를 근거로 해서 공동체 내부의 갈등이 세리와 이방인같은 소외그룹과 이들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일부 극단적인 유대 기독교인그룹 사이의 갈등 정황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마태기자가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소외그룹을 간접적,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추정했다. 간접적인 지원은 마태기자가 4: 14-16, 5:14-16, 5 : 25, 10:27에서 언급하고 있는 빛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누구에게나 공평한 복음의 보편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며, 23: 8,9에서는 한 하늘 아버지와 한 선생을 모시는 사랑의 공동체상을 확립하고 있다. 그리고 직접적인 지원으로는 겸손의 강조, 작은 자에 대한 관심 강조,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역전의 개념, 소외그룹에 대한 예수의 관심등을 제시하였다.


Ⅰ. 서언

산상수훈에 관한 기존의 연구들은 내용에 대한 윤리적,신학적 해석에 집중하거나, 유대교적인 전망, 유대교와의 대립관계의 전망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는 산상수훈내에서 표출되고 있는 내부 갈등의 정황을 간과하고 있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것에 대한 심판의 구절(5:22), 형제와 화목하라는 구절(5;24), 형제를 용서할 것을 강조하는 구절(6:14-15), 상호비판을 금지하는 구절(7:1-4)등은 공동체 내부에 서로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심각한 갈등의 정황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본 소론은 이러한 갈등이 율법규정의 준수를 내세우는 일부 유대 기독교인 그룹과 소위 (세리, 창기로 대변되는) 죄인출신의 유대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소외그룹간의 갈등이라는 것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 마태가 약자인 소외그룹을 어떻게 지원하는지를 마태복음내의 구절을 통하여 찾을 것이다.


Ⅱ. 마태공동체 내부 갈등의 정황과 그룹 규명

1) 마태공동체 내부 갈등의 정황
5:22의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에 대한 심판은 실제로 마태공동체 안에서 상대 그룹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정황이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헤그너는 이 구절의 대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여기서 사용된 '형제'라는 말은, 일견 예수의 이와 같은 말씀이 오로지 믿음의 공동체-그리스도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내용의 마지막 반론(44절)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이 '형제'라는 말을 그토록 제한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형제'에게 성내지 말라는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씀이기는 하되,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헤그너의 견해는 대상의 범위를 공동체 외부까지 개방함으로써 마태공동체의 내부 갈등의 정황을 약화시키고 있다. 그는 5:44의 너희들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에서 원수를 공동체 외부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서중석 교수는 원수를 공동체의 내부 대상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여기서 "원수들"은 정치적 혹은 대외적 대적자들을 뜻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라기보다는 마태공동체 내부의 특정한 그룹들끼리 서로를 격렬히 비판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 "네 원수(esthron sou)를 미워하라"는 말을 극복하기 위해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단수 형태가 아니라, "너희들의 원수들(exthrous hymon)을 사랑하라"는 복수 형태가 도입되고 있는 것도 이 권고가 마태공동체의 내부 그룹들에게 공동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추정의 가능성을 높여준다. 마태공동체 멤버들간의 극단적인 상호 대립의 상황에서 이 권고는 그 대립의 완화에 대한 마태의 희망을 반영한다.

이러한 서중석교수의 견해는 원수를 공동체 외부의 대상으로 보는 견해보다 더 설득력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마태공동체 내부의 정황이 서로를 원수로 부를 만큼 심각한 갈등 가운데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마태기자는 10:36에서 직접적으로 "사람의 원수는 자기 집안 식구리라"는 언급을 통해 이러한 추정을 입증시켜 준다. 마태는 12:49의"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는 구절을 통해 믿는 자들, 즉 마태공동체가 집안식구라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리고 6:14-15의 용서의 중요성에 대한 구절은 그룹간의 화해를 위한 용서가 시급했음을 보여 준다. 이 구절에서는 형제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지만, 18:35에서는 형제라는 용어가 사용됨으로 용서의 대상이 공동체 내부 그룹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또한 7:1-4의 비판금지에 대한 구절에서 상호비판을 하고 있는 그룹의 정황을 추정할 수 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그룹이 있다. 마태기자는 형제라는 용어의 사용을 통해서 비판하는 그룹이 마태공동체 내부에 존재하고 있음을 밝힌다.

 

2) 갈등 그룹의 규명
그렇다면 이러한 갈등의 정황은 어떤 그룹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를 살펴보자.
산상수훈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대상은 이방인과 세리, 그리고 외식하는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이다. 세리는 5:46에서, 이방인은 5:47, 6:7,32에서, 외식하는 자들은 6:2,5,16, 7:5,에서, 거짓선지자들은 7:15,16,22,23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산상수훈외의 18:17에서도에서 세리와 이방인은 부정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5:47의 이방인의 부정적 평가에 대해서 라흐는 이방인(ethnikoi)을 비유대인이 아니라 유대교 내의 한 그룹으로써, 구약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땅의 백성들"과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라흐의 견해는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10:5에서 이방인의 길은 사마리아의 길과 나란히 지역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5:46,47에 나오는 이방인과 세리는 병행구로 제시되면서 열등한 존재로 묘사된다. 이 구절에서 이방인과 세리는 마태공동체 내에서 같은 범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정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8:17에서도 죄를 범하였을 때 권면하여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내용에서 공동체안에 이방인과 세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0:2-4의 제자명단에는 가나안인 시몬과 세리 마태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복음서중에서 유일하게 마태 이름 앞에 '세리'라는 용어가 따라 나온다. 5:46,47에서 나란히 무시된 이방인(가나안인)과 세리가 제자명단에 나온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또한 9:10이하에서 마태가 본 예수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이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선포하신다. 또한 21장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도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한 둘째 아들은 세리들과 창기들로 묘사된다. 그래서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8:5-13에서 백부장은 예수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보지 못한 믿음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또한 15:21-28에서 가나안 여인은 처음에는 거절당하지만 결국에는 믿음이 크다는 칭찬을 받는다. 마태복음서에서 이방인인 이들 둘을 제외하고는 믿음으로 예수께 칭찬받은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산상수훈내의 본문에서 열등한 존재로 묘사되는 세리와 이방인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인 보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공동체 내에 이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그룹이 존재함을 시사한다. 그 그룹은 이방인과 세리들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비판하며 자신들의 의를 내세우는 그룹으로 상정할 수 있다. 마태기자는 7:5절을 통해서 공동체내의 비판하는 그룹을 외식하는 자(upokritai)라고 부른다. 같은 용어로 외식하는 자(upokritai)는 6:1-18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기 때문에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 비록 이들이 직접적으로 공동체 내부의 대상임을 밝히는 구절내의 지원은 없지만 마태기자가 그룹 내부의 비판하는 그룹에게 외식하는 자들의 모습을 투영시키고 있다는 설정은 가능하다. 마틴은 23장의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그 경고들(23장)은 유독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마태 교회내에 있는 그와 같은 생각들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서중석 교수는 그와 같은 생각들이 마태공동체내에 '기독교적 서기관들' 그룹이 다른 그룹들과 공존하면서 유대교적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소개했거나, 아니면 마태공동체내의 한 그룹의 멤버들이 율법 해석에 관한 한 유대교적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해석을 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다른 멤버들에게 설득하려 했던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마태공동체 내에 "외식하는 자들"이 없었다면, 그들의 영향이 없었다면 마가복음과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경고들은 불필요했을 것이다. 마태기자는 그 그룹을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마태공동체 내부에서 그들과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 그룹을 향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 그룹은 율법적인 규정의 준수를 내세워서, 세리로 대변되는 죄인출신과 이방인 출신 멤버들을 비판하였을 것이다.
마태공동체 내부의 거짓선지자들은 7:23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불려진다. 24;11에서는 거짓선지자들의 활동으로 많은 사람이 미혹되고,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라고 언급된다. 거짓선지자들의 활동으로 사랑이 식어진다고 하는 내용에서 거짓선지자들은 사랑이 없는 그룹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외식하는 자들과 거짓선지자들의 그룹은 사랑이 없고 남을 비판하는 일부 유대기독교인그룹이다.

 


Ⅲ. 마태공동체의 소외 그룹 지원

1) 간접적인 지원
마태기자는 소외그룹을 지원하기 위해 간접적으로 복음과 보편성과 새로운 고동체의 정체성을 제시한다. 우선 산상수훈에 나오는 빛의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존재한다. 웨첸은 5:14-16의 빛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세상의 빛"으로서 제자들은 "숨길 수 없도록 산 위에 세워진 도시"처럼 잘 보여져야 하고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집안을 비추도록 등경 위에 두는 것"처럼 잘 드러나야 한다. 이 은유는 그 자체가 아주 독특한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세상의 빛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사야 10장 17절과 60장 19절 이하에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빛"이라고 서술한다. 이런 유비를 여기서 적용하는 것은 주의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지정한 이사야 42장 6절과 49장 6절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웨첸의 해석은 빛이 모든 민족에게 공평하게 비치는 보편성을 구약에 근거해서 끌어내고 있다. 빛의 개념은 10: 27, 4:14-16, 5:25에서도 언급된다. 빛은 선인이나 악인을 구별하지 않고 소외된 자들에게도 평등하게 비추는 보편성을 가진다.
다음으로, 23: 8,9에서는 한 선생과 한 아버지를 둔 차별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의 모습을 지향하는 마태 기자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 8절은 모세 율법의 유일한 해석자를 한 사람 예수로 제한한다. 예수의 예수의 율법 해석의 새로움에 대해 슈바이처는 "사랑"으로 요약된다고 주장하고, 킹스베리는 그 내용이 '보다 위대한 의'로 집약된다고 주장한다. 서중석 교수는 이들의 주장이 각기 보충되어야 한다고 본다.

 

마태가 본 예수에게 있어서 의의 실천은 사랑의 실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가 요구하는 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는 다르다. 그들의 사랑과 분리된 의의 실천과는 달리 마태가 본 예수는 의 속에서 사랑을, 사랑 속에서 의를 실천할 것을 요구한다. 의와 사랑이 하나로 인식되어 실천되지 않는 한 서기관들이 바리새인들의 의를 넘어설 수 없다고 한다.

 

마태기자가 본 예수에게는 의와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며, 사랑이 없는 율법의 준수는 의로 인정받지 못 하며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5:3)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 마태기자는 한 선생에게서 의와 사랑을 배우며 실천하는 공동체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련의 관점에서 마태가 본 예수는 땅에 있는 사람을 아버지로 부르지 말라고 명한다. (23:9) 마태기자에게 땅의 출신은 중요한 것이다.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하는 평등한 멤버들의 새로운 공동체상을 제시한다.
마태기자는 복음의 보편성과 평등한 위치에서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가족적인 공동체상을 제시함으로써 소외그룹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2) 직접적인 지원
우선 마태기자는 소외그룹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하여 겸손을 강조한다. 팔복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함, 애통함은 무시당하는 소외그룹에게 유리한 항목이다. 이들은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다.
슈트렉커는 심령이 가난하다는 구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마태는 인간의 의지적인 영(정신)을 하나님에게 선사받은 거룩한 영과 동등하게 취급하기를 의도하지 않고, 곧바로 강조하기를 가난한 자들이 아니라 교만하지 않은 자들, 자신을 낮은 자들 편에 포함하는 사람들에게 그 약속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난'의 원래의 문자적 의미가 정신적으로 또 동시에 윤리적으로 해석되었다.……따라서 산상설교의 예수는 제 분수를 아는 사람들, 자신들의 한계를 알고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을 그에 일치하는 행실로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이러한 슈트렉커의 견해는 심령의 가난함을 겸손함과 연결시킨 것은 적절하지만, 산상설교의 대상이 제 분수를 알고 겸손한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써 마태공동체의 갈등 정황을 간과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한 것은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들, 즉 교만하고 남을 비판하는 그룹에 대한 권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연결되는 항목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항목은 소외그룹에 대한 긍휼을 권유한다. 이 항목은 9:12에서 예수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는 구절에서 더욱 보강된다. 또 11:29에서 마태기자가 본 예수는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한다. 역시 21:5에서도 마태기자는 예루살렘 입성시에 겸손하여 나귀의 새끼를 탄다는 스가랴 9:9을 인용함으로써 예수의 겸손을 다시 강조한다. 그리고 23: 12에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는 높아진다는 내용을 통해서 겸손을 강조한다.

 

둘째로 마태기자는 작은 자, 소자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면서 소외그룹을 지원한다. 10:42에서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중 하나를 대접하는 자는 상을 받는다.
라흐는 소자가 제자를 가르치는 일상적인 용어가 아니라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자를 암시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작은 자는 마태공동체내의 소외그룹을 가리키는 마태기자의 용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18:6-8에서는 소자를 실족케 하는 것에 대한 무서운 심판의 내용이 나온다. 이어서 13,14절에서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기쁨이 잃지 않은 아gms아홉마리양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크다는 내용을 통해서 마태기자는 작은 자에 대한 예수의 관심을 강화한다.
또 25:40,45에서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께 한 것이라는 구절을 통해서 공동체 내의 소외된 그룹에 대한 마태 기자의 관심을 볼 수 있다. 즉, 마태공동체 내의 소외된 작은 자들에게 대접하는 행위는 주를 대접하는 것이고 이들을 대접하지 않는 행위는 주를 외면하는 것이다. 마태기자는 비판하는 그룹에게 공동체 내의 작은 자들을 잘 대접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세 번째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앞뒤구의 순서만 바뀐 채 19:30과 20:16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 선포는 현재 마태공동체 내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소외그룹에게 언젠가는 지금의 위치가 역전될 것이라는 희망을 제공한다. 율법 규정의 준수를 내세우면서 소외그룹을 비판하는 우위적인 위치의 유대 기독교인 그룹이 지금은 먼저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두 그룹의 위치가 바뀌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21:31의 세리들과 창기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구절은 이러한 마태기자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마태기자는 이러한 역전의 개념을 이용해서 소외그룹을 지원한다.

 

마지막으로 11:29에서 예수는 사회적으로 무시받고 소외된 이들이라고 볼 수 있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다. 슈바이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6:24-31의 먹을 것 , 입을 것등에 대한 염려, 그리고 23:4의 바리새적 율법 규정과 관련시켜 해석한다. 바리새인들은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고 자신들은 거기에서 빠지고 있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세상 염려를 하는 이방인이나, 바리새적 율법규정의 무거운 짐을 멘 소외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9:12의 예수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절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마태기자는 예수를 소외 그룹을 위한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소외그룹을 지지한다.

 

Ⅳ. 결어

이방인과 세리는 5: 46, 47에서 나란히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세리는 창기와 함께 21장의 두 아들의 비유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둘째 아들로 묘사되며 이방인은 8:13, 15:28에서 예수로부터 믿음을 인정받는다. 이러한 상반된 보도는 공동체 내부에 이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무시하고, 비판하는 다른 그룹을 상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이 그룹은 율법의 준수를 내세우는 극단적인 일부 그룹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기자는 이방인, 세리와 같은 소외그룹을 간접적,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우선 보편적인 개념의 빛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평등을 강조하고, 또 23: 8,9의 한 선생, 한 아버지를 제시하여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가족적인 공동체상을 확립한다.
또 겸손의 강조, 작은 자에 대한 관심,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역전의 개념, 죄인과 짐진자를 위해 오신 예수상등을 통해 소외그룹을 직접적으로 지원한다.
마태기자는 약자인 소외그룹을 지원하므로 의와 사랑의 가족적인 공동체를 위한 발판을 마련한다.

 

 

마태공동체의 역사와 신학적 배경: U. Luz

 

시작하면서

 

먼저 번에는 마태복음에 대한 R. Hummel의 글을 (마태복음 내에서 교회와 유대교 간의 대립, 1963)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비교적 최근의 글인 U. Luz의 마태의 예수이야기 (Die Jesusgeschichte des Matthaeus 1993) 중 일부를 (1.3과 1.4, 21-31쪽) 소개하고자 한다. 이유는 이 부분이 나름대로 마태공동체의 성격을 요약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저자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는 1938년 스위스 Maennedorf에서 출생, 스위스 츄리히와 독일 괴팅겐에서 수학, 1967년 박사학위, 1968년 교수자격시험 통과, 1972-1980 괴팅겐대학 교수, 1980년 이래 스위스 베른대학 교수이다. EKK 주석시리즈로 마태복음을 저술하고 있다. (현재 1, 2권이 나와 있음)

 

내용

1.3 유대교와 대립하는 마태공동체

최근 마태공동체를 유대기독교적인 공동체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에 동의 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이견들이 있다. 즉, 마태공동체를 율법에 충실한 공동체로 보는 견해 (5,17-19), 혹은 보편주의적으로 개방된 헬레니즘적인 유대기독교로 보는 견해, 혹은 그들을 아직 유대회당 내에 살고 있었지만 이들로 부터 박해를 받는 (23,34-36) 공동체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혹은 그들을 이미 오래 전에, 혹은 직전에 회당과 결별한 유대기독교로, 그래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은 공동체로 보기도 한다. 이에 따라 그 공동체 내에는 이방선교를 지지하는 측과 이를 반대하는 측간의 긴장이 있는 공동체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을 유대인과 그 후손에 돌리는 구절 (27,25), 23장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강한 비판,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명제-반명제 등은 마태복음이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에서 유래되었음을 주장하는 강한 근거가 되고 있다

.

마태복음에는 서로 모순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1) 유대인들에게 만 제자를 파송하신 예수님 (10,5 이하) vs. 모든 족속을 제자삼으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 (28,19), (2)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일컫는 호칭의 주요 역할 vs. 이tm라엘을 강하게 부정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13,11-15; 21,41-43), (3) 율법을 옹호하는 말씀 (5,17-19) vs. 예수님의 반명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를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 5,21 이하), (4) 모세의 의자에 앉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하는 것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말씀 (23,2 이하) vs. 이어서 바로 나오는 그들에 대한 비판 (23,15-24), (5) 한편으로 마태복음은 독자들이 유대교를 (유대교의 여러 규정들을) 잘 알고 있음을 전제한다. 그래서 손 씻는 유대교의 규례를 독자들에게 따로 설명하지 않는다. vs.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그룹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한 데 묶어서 처리 (16,12).

 

이런한 모순들을 놓고 어떤 이들은 마태복음을 현대적인 논리로 이해해서는 않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는 이 모순을 마태의 편집과 기존의 전승 간의 차이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마태복음을 이방인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 보는 이들은 마태복음 내 친 유대교적인 부분을 기존의 전승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견해의 약점은 마태복음의 저자를 이방인으로 보기에는 너무 많은 친 유대적적인 부분을, 그리고 마태의 상황에 맞지 않은 부분을 이 복음서가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을 이스라엘에서 이방인 중심으로 방향수정 중인 복음서로 볼 수 있을까?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많이 설명해야 할 부분이 있다.

 

나는 다섯 가지 테제로 마태공동체의 성격을 나름대로 규정해 보고자 한다.

1. 마태는 유대기독교인이다. 그가 갖고 있는 많은 전승들은 유대기독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면 5,7-9; 12,5 이하; 12,11; 24,20; 많은 마태의 특별자료들) 마태는 '참 정결'에 대해 유대교인들과 논쟁하면서 (15,1-20) 마가처럼 과격하게 율법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5,17에서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는 말은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반명제을 반유대적인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뜻을 갖고 있다.

 

2. 마태공동체는 유대회당조직에 더 이상 속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회당을 "저희 회당"이라고 하며 (4,23; 7,29; 10,17; 13,54; 23,34), 마태의 공동체 내에 기독교서기관들이 있었으면 (13,52; 23,34), 마태복음 내에서 회당은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6,2.5; 10,17; 13,54; 23,6.34), 이에 반해 성전은 회당과 마태공동체 간의 결별 당시 파괴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에 뇌리에 긍정적으로 기억되어 있다. (5,23 이하; 17,24-27; 21,13)

 

3. 마태공동체는 율법을 지키며 살았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율법에 대한 최고의 선생이요 해석자이다. 그들은 유대의 안식일을 지켰을 것이다. (24,20) 마가에서 (7,1-23) 예수님은 정결법을 거부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에서는 (15,1-20) 그러지 않는다. 물론 마태도 외적인 정결보다 내적인 정결을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의 (15,11) 해석부분에서 입으로 들어가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아 (15,17), 마태공동체는 정결법을 지켰으리라 여겨진다.

 

4. 회당과의 분리는 그리 멀지 않은 이전 시기에 일어났으리라 추측된다. 저작시기는 대략 80-90 년으로 여겨진다. 이유는 디다케의 저자이며 아마 벧전의 저자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이그나티우스가 마태복음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필경 마태를 알지 못하리라 추측되는 누가복음에는 전승사적으로 볼 때 (마태보다) 후대의 어록자료의 발전 단계가 나타난다. 마태복음에서는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단지 성전 멸망 만이 확인된다. (22,7) 바리새주의적인 유대교와 격렬하게 대립되고 있는 마태복음 내의 정황들은 마태복음이 유대교로부터 분리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5. 마지막 테제는 이방인선교와 관련된 것인데 가장 불확실한 부분이다. 마태복음은 이방선교에 대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으로 끝을 맺는다. 이 명령은 미리 복선으로 깔려 준비되어있다. (2,1-12; 8,5-13; 15,21-28; 21,43; 22,8-10) 이전에 10,5 이하에서 이스라엘에게 만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 중 두 가지가 ("가라", "이방인") 마태복음의 마지막 선교명령에서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즉 마태는 10,5 이하의 말을 그대로 이용하고, 내용적으로 수정해서 28,16 이하에서 사용한다. 즉 마태는 부활절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보내신다고 말하고 있다. 이방인 선교는 마태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테마이다. 마태복음 전체는 이를 겨냥하고 있고 이를 계속 주지시킨다.

마지막 다섯 번째 테제와 관련해서 불명확한 것이 두 가지 있다.

 

첫 번 째로는 이방인 선교는 마태공동체에게 새로운 과제인가, 아니면 이미 이 공동체는 이방인 선교를 하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마태복음 자체로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을 거부하고 그를 죽이고 더 나가 부활의 복음을 수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해 이방인 선교가 제자들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이것이 마태공동체의 당시 상황인가? 그들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선교를 지금까지 하다가 회당과 그들의 공동체가 분리됨에 따라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희망이 깨어 지면서 이스라엘 선교를 포기한 결과일까? 실제로 성전멸망 이후에 이렇게 결정한 유대기독교 공동체가 있다. 이방인 선교를 시작한다는 것은 점점 이방기독교적인 대교회에 통합되어 감을 의미한다. 이미 마태복음 내에는 이방인 선교가 현재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24,9.14; 비교 13,38 이하) 마태공동체 내에서 혹은 그의 주위에 이방인 선교를 결정한 유대기독교적인 그룹이 있어 마태가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그들 편에 섰을 가능성도 있다.

 

두 번 째는 어떤 이방인 선교를 마태가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예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을 완전케 하고자 오셨고 마태 공동체가 율법을 지켰다면 마태가 생각하는 이방인 선교란 선교된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실제로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싸운 유대기독교인들이나 져스틴이 (Dial 47,2)에서 말하는 이들은 다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안식일을 지키게 하고 할례를 하도록 설득하고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거짓형제, 이단이라고 일컬어 지는 이들이 마태의 가까운 (신학적인) 친척이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은 할례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방인 선교의 실제는 마태의 예수전승에서는 명백히 아직 없다. 마태복음이 율법에 충실한 유대기독교적인 분파의 복음서였다면 마태복음이 그렇게 빨리 대교회에 통용되었을까는 숙고해 봐야 한다. '어떻게'는 모르지만 마태공동체는 대교회에 통합되었다.

 

1.4 마태공동체의 역사 - 개요

마태의 역사를 간단히 언급하려면 여러 가설과 전승사적인 재구성에 의존해야 한다. 이 개요는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 그것의 기능은 역사적인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른 개요를 유도해 내는 데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마태공동체는 역사적으로 어록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이들과 같이 속해 있었다. 어록자료 배후에는 한편으로 방랑하는 전도자, 예언자, 교사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선포로 인해 생겨난 정착적인 공동체들이 있었다. 아마 마태공동체는 그들의 선포로 인해 언젠가 생겨났다. 어록자료와 공통적으로 마태복음에서도 나타나는 유대기독교적인 환경, 둘 간의 신학적으로 밀접한 연관성 (특별히 인자-그리스도론과 교회론) 그리고 마태공동체에서도 확인되는 급진적인 방랑(전도)자들 등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마태복음이 저술될 당시 마태공동체는 이스라엘에 있지 않고 시리아에 있었다. 이 주장은 4,24에서 이 지명이 언급되는 점, 2,23의 '나사렛 사람'이라는 표현 (이는 시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나사렛인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15,22에서 두로와 시돈지방에서 만난 여인을 '가나안 여자'라고 부르는 사실 (추측컨대 그곳에 사는 페니키아 주민들이 스스로를 일컫는 말) 그리고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에 의해 마태복음이 시리아에 있다고 언명되고 있는 점 등에 의해 가능하다. 구체적으로 시리아의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왜, 언제 이 공동체가 이스라엘을 떠났는 지도 모른다. 성전멸망이 이스라엘을 떠나게 된 동기인지 아니면 복음서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5,11이하.44; 10,17-23; 23,34이하) 이스라엘 내에서의 (유대교와의) 긴장과 박해가 그 이유일까?

 

유대기독교적인 예수공동체는 유대전쟁 이후에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그들의 선교가 실패한 후 시리아에서 새롭게 방향설정을 한다. 그들은 자신을 기독교라고 하는 새로운 종교의 일부라고 여기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 - 더 나아가 12지파 백성의 핵심으로 - 생각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 중 이방인 선교를 하고 이스라엘에서,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마태의 특별자료 (5,19; 10,5이하)는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선교는 실패하고 원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당 밖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유대교로 부터) 적대감과 몇몇 경우에는 박해까지 받았다. 그들은 자신을 이스라엘의 핵심으로 여겼지만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니였고 (따라서) 자신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의 새로운 자기정립을 위해 일차적으로 쓰여졌다.

마가복음은 어록자료와 달리 공동체 내부의 고유한 전승들을 담지하지 않고 외부에서 들어왔다. 마가복음은 시리아의, 즉 그곳에 마태공동체가 있었던, (이방기독적) 시라아기독교 공동체의 성경이거나 서방에서, 로마에서 유래한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자신의 공동체의 고유한 전승을 가지고 자신의 고유한 상황에서 야기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 마가복음을 고쳐 새롭게 저술하였다. 이와 관련해 '이방인 선교'와 '율법준수' 두 문제가 중요하다. 마태공동체는 이스라엘선교가 실패한 후 이방인들로 방향을 바꾸었을까? 이 당시 시점에서 마태공동체 내부의 의견이 갈렸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승천한 예수께서 분명한 임무를 주신다: "모든 족속을 제자삼아" (28,19). 율법준수문제에 대한 마태복음의 입장은 이방인 선교 문제보다 덜 분명하다. 기본적으로는 율법준수을 옹호하는 입장이다. (5,17) 그러나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이방인이 볼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저자는 말하지 않는다. 이방인 선교를 결정한 것은 이 유대기독교적인 공동체가 당시 이미 이스라엘과 독립해 있었던 이방기독교적 대교회로 향한 커다란 걸음이라 할 수 있다.

 

길게 볼 때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던 팔레스티나와 시리아 지방의 유대기독교의 공동체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어떤 방식으로 든 이방인교회에 편입되어 종국에 그들에게로 흡수되는 길이다. 이것이 마태와 시리아에 있던 그의 공동체가, 그리고 더 예를 들자면 요한계시록의 저자와 소아시아에 있던 그의 예언자적인 동아리가 걷기 시작했던 길이다. 이방인 선교라는 임무는 마태와 그의 공동체가 그랬듯이, 이 방향으로 가는 첫 걸음이다. 또 다른 한 가능성은 이스라엘과 이방인교회 사이에서 독립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길을 시리아에 있었던 많은 유대기독교인들이 걸었다. 그들은 져스틴 (Dial 47,2-4) 이래 많은 교부들에 의해 알려졌고 점차 그들로부터 비판적으로 판정된다. 그들이 교부들과 다른 점은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준수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이 마태복음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사렛복음서, 에비온복음서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은 여기서 역사적으로 분수령에 서 있다. 그의 율법에 대한 긍정은 그를 유대교와 잇는 다리이다.

 

 

유대교와 대립하는 마태공동체: R.Hummel

 

 

서론

편집사비평을 본격적으로 마태복음에 적용한 글을 들라면 G. Bornkamm의 Die Sturmstillung im Matthäusevangelium (1948)이 꼽힌다.(주1) 이 글 이후 그의 제자들과 (G. Barth, Das Gesetzesverständnis des Evangelisten Matthäus, 1955, H.J. Held, Matthäus als Interpret der Wundergeschichten, 1957)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R. Hummel, 1960, G. Strecker, Der Weg der Gerechtigkeit, 1962) 편집사비평적인 시각으로 마태복음을 관찰하려는 시도가 활발히 이루어 졌다.(주2) 이번 기회에는 그 중에서 R. Hummel의 Die Auseinandersetzung zwischen Kirche und Judentum im Matthäusevangelium, 1963 (21966)을 소개(요약, 정리) 하고자 한다.(주3)

 

본론

A. 기본관점

R. Hummel이 마태복음을 보는 기본적인 관점은 그의 책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아래와 같다. 즉 "마태공동체는 바리새파주의적인 유대교와 누가 더 바른 토라이해를 갖고 있나 하는 문제를 가지고 유대교 내에서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태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구약성서에 대한 이해에 근거해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5,19ff) 자기들이 바리새주의적인 유대교보다 '더 낳은 의'를 (마 5,20) 가졌다고 자부하면서 유대교 내에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 있던 공동체라고 저자는 본다.

 

B. 저작 시기

우선 그는 마태복음의 저작시기를 70-85년 사이로 본다. (31쪽 이하) 그 이유로 다음를 든다.

1. 바리새인들의 역할이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두드러 진다: 예수님의 주요 정적이 이 복음서에서 -특별히 논쟁하는 부분에서 (12,24.38; 21,45; 22,34f.41)- 그들로 설정되어 있다. 이 복음서에 만 '바리새인 보다 더 낳은 의'에 대해 (5,20), 그들에 대한 심판선언 (15,12f), 그들에 대한 경고 (23장)가 있다. (13쪽) 그들은 예수님께서 재판받는 과정에 (다른 복음서보다) 깊히 관여한 것으로 묘사된다 (21,45; 27,62). (13쪽) 즉, 바리새인들이 유대교의 역사에서 볼 때 주도권을 잡는 때는 성전멸망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이후 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토라해석의 문제이다. 그들은 이제까지 유대교의 중심이였던 성전이 파괴됨에 따라 대신 토라해석을 근간으로 (Grundlage) 해서 유대교를 재건한다. (14쪽, 31쪽 이하) 그러므로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는 바리새인을 강조하는 경향은 성전멸망 이후 바리새인들의 주도권 하에 재편되어 지고 있는 유대교를 마태복음이 자신의 시대적, 환경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저희 회당'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4,23; 9,35; 10,17; 12,9; 13,54; 23,34). 이는 마가복음에도 있지만 (1,23. 39), 막 3,1; 6,2; 13,9에서 알 수 있듯이 그다지 마태처럼 강조되어 사용되지 않는다. (29 쪽) 즉 마태공동체에게 있어서 회당이란 자신들과 구분된 바리새이적인 유대교의 회당을 의미한다. (29 쪽) 이는 한편으로 마태공동체가 유대교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3. 그러나 다른 한편 유대교의 18기도서나 (대략 주후 85년), 반이단적인 Berekha나, 요한복음 (9,22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 12,42; 16,2),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6,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등에서는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구체적인 결별의 징후를 엿볼 수 있는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그러한 기미를 찾을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29 쪽 이하)

 

4. 마태복음 내에 있는 박해기사는 (10,23; 24,16) 주후 70년 성전멸망을 암시한다고 본다. (30쪽) 그리고 한편으로 그 기사는 (박해받고 있다는 그 사실로 인해) 아직 마태공동체가 유대교 회당 내에 있음을 증거한다. (31쪽) 예수께서 성전세를 내는 구절이나 (17,27) (32쪽), '모세의 자리'가 주요한 전거로 언급되는 점 (23,2) (31 쪽),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에 대해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 (비판을 가하면서도, 즉 예를 들면 23,3.15.16.24) 등은 아직 마태공동체가 유대교 내에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본다. (31 쪽 이하) 이상의 모든 점을 종합하여 저자는 마태복음이 70-85 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C. 내용

저자는 자신이 말한 테제를 위해 네 가지 관점에서 (율법 34-75쪽, 성전과 제의 76-108쪽, 메시아 109-142쪽, 이스라엘과 교회 143-161쪽) 마태복음을 살피고 있다.

 

1. 율법

토라는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마태공동체에서도 근간으로 여겨진다 (5,17ff). (55.69쪽) 유대인들과 논쟁하는 부분에서도 (12,7; 15,3) 토라의 권위는 당연시 되고 있다. (55쪽) 심지어 저자에 의하면 마태공동체는 내부의 반율법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도 경계하고 있다고 본다 (5,17ff; 7,12-27; 11,12f; 24,10-13). 즉 마태공동체는 두 가지 전선을 (바리새주의적으로 각인된 유대교와 내부의 반율법주의) 가지고 있다고 본다. (64ff)

마태공동체는 예수님의 토라해석에 근거한 (5,17....; 5,21ff...) 다른 토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그들은 원래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다 (19,8f). (75쪽)

 

2. 성전과 제사

마태복음은 이 부분에 대해 문제를 삼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인다 (5,23f; 8,4; 21,13; 참고 막 12,32f 여기서는 제사에 대해 비판적이다). (80ff. 95ff)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성전 파괴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함으로 야기된 형벌로 (21,41; 27,24f) (91쪽), 그들이 부활의 복음을 거부한 형벌로 (22,7) (85쪽),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12,6; 12,41) (91.100쪽) 본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성전파괴는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진다 (14,58). 이에 반해 마태복음은 (26,61) 이것이 예수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으로 본다. (93쪽) 이런 맥락에서 성전파괴를 유대교의 잘못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실행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유대묵시문학적 사고에 근거해) 이해한다. (94쪽)

12,7 (호 6,6 인용)에서 마태는 사랑의 계명을 통한 제사의 종말론적 극복을 염두에 두고 있다. (100쪽) 따라서 마태공동체는 (내적으로 구약성서에 의해 그 정당성이 인정된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해, 외적으로는 70년에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성전제의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103쪽) 이에 반해서 바리새이적인 유대교는 사랑의 계명을 단순히 임시적인 (제의를 대신하는) 대용물로 보았다. 그들은 종말에 성전제의가 다시 거행될 것이라고 믿었다. (100쪽)

 

3.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많은 칭호중에서 마태는 '다윗의 자손' (9회)을 선호한다. 이 칭호는 한편 유대교에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116쪽 이하) '다윗의 자손' 이라는 칭호는 기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9,27ff; 12,23; 15,22; 21,14f). (118 쪽 이하) 즉 기적, 병고침은 특별히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메시아됨을 증명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121 쪽 이하) 이를 통해 유대 측이 제기하는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한 반대가 반박되어 진다. (119 쪽 이하) 구체적인 예로 저자는 바알세불 논쟁기사를 (12,22f) 든다. 그는 이 기사를 마태의 기적을 높히 평가하지 않고 이에 따라 예수님의 기적을 사탄의 활동으로 보는 (V 24) 유대교에 대한 반박논증으로 본다. (123 쪽 이하) 결론적으로 여기서 마태는 그들을 악하다고 선언한다. (V 34) (126 쪽)

 

유대교처럼 (PsSal 17,21.32.40-43) 마태복음도 예수님을 오로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1,21; 2,6; 10,6; 15,24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 21,1-11) 이해한다. (136 쪽 이하) 그러나 마태복음은 독특하게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Barmherzigkeit) 죄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18,17; 비교 5,46f) 미침을 말하고 있다. (22. 140 쪽) 즉 마태에 따르면 이방인은 죄인들과 동일선 상에 있으며 (140 쪽) 따라서 예수님의 죄인들에 대한 자비하심은 이방인들에 대한 자비하심을 (이방인들을 고치심 8,13; 15,28) 의미한다고 본다. (140 쪽) 이 예수님이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기적행위는 "이방인 선교를 위한 내적인 전제"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본다. (140 쪽)

마태는 지상의 예수님과 (낮아지신 이스라엘의 왕)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분한다. (141 쪽)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결과 '이제부터' 예수가 더 이상 지상에 계시지 않게 되었다. (23,39; 26,64). (141 쪽) 지상의 예수님의 선교현장은 이스라엘에 국한된다. 그러나 승귀한 예수님은 이 단계를 끝내신다. (142 쪽) 승귀한 예수님은, 그에게 하늘과 땅의 권세가 주어진 바, 제자들을 이방인들에게 파송한다 (29,19). (141 쪽) 즉 그 분께서는 이방인 선교의 길을 여셨다 (142. 152 쪽).

 

4. 이스라엘과 교회

'하나님 나라' (Basileia)는 마태의 교회를 이해하는 데 핵심단어이다. (146 쪽) 유대교는 원래 하나님 나라의 자손이다. (13,38) 그들은 의로은 자로 여겨진다 (13,43). 즉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우선권을 갖고 있었다. (147 쪽) 그러나 유대인들의 불신앙 때문에 이스라엘과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 간의 연관성이 깨어지게 되었다 (8,12). (147 쪽 이하) 그 대신 교회가 이스라엘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149 쪽) 이제는 교회에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유보적으로, 즉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약속의 조건이다 (21,43). (149 쪽 이하) 종말의 심판과 관련해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이라는 의미가 그 가치를 잃게 된다 (3,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그대신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종말론적인 만찬에 참여하게 된다 (8,11f). (150 쪽) 이로써 이스라엘의 과거를 교회가 자신의 과거로 갖게 된다. (150 쪽)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이방인에게 구원의 기회가 열렸다. (종말의 하나님나라에서 이방인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는 약속과 유대인은 그 기회가 박탈됨 8,11f; 21,43) (146 쪽 이하) 이때 토라가 또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마태에게서는 가부의 기준이 된다. (151 쪽)

마태가 생각하는 교회는 종말론적인 제자공동체로써 이스라엘과 대비되는 새로운 공동체이다. (151 쪽) 마태가 유대인들에게 심판의 선포로 선언하는 내용은 자신의 교회에도 적용된다. 즉 공동체는 아직 심판을 앞두고 있으며, 공동체에 속했다고 해서 구원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며 (7,21ff; 13,24ff.36ff), 열매 (7,16ff; 21,43), 의 (5,20; 6,33), 완전함이 (5,48; 19,21) 요청되어 진다. 교회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전 단계이다. (156 쪽) 교회와 바리새이적 유대교의 차이는 마태의 교회가 더 낳은 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5,20) (156 쪽)

 

D. 마태공동체의 상태, 저자

저자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마태공동체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들은 유대교 내에서 강하게 각인된 자신의 고유한 삶을 형성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다. (33. 159쪽) 그들은 내적인 독립성과 (innere Selbständigkeit) 외적인 귀속성 (äußere Zugehörigkeit)을 갖고 있다. (159 쪽)

 

그들은 예수께서 토라의 메시아적인 완성자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자신의 고유한 율법이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유대적-바리새이적인 율법전통이 필요없었다. 예수께서 사랑의 계명을 제의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그리고 그분께서 심판자적인 전권으로 성전을 멸망케 하셨다고 보았기 때문에 마태공동체는 성전제의로 부터도 자유로웠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그 자신의 사고 구조 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바리새이적으로 각인된 서기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신앙상의 소속으로 볼 때 유대인도 바리새인도 아니다. 그는 아마 (이방인에서) 개종한 바리새이주의 풍의 유대적 서기관일 (ein konvertierter jüdischer Schriftgelehrter der pharisäischen Richtung) 것이다.

마태공동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많은 유대기독교적인 특성은 이 공동체가 외적으로 유대 회당조직에 속해 있음을 말해 준다. 유대교가 이들에 대해 아직 궁극적인 출교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이방인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들이 마태공동체를 주도한다) 아직 회당조직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 (159 쪽)
-----------
주1) 참고로 마가복음을 이 방식으로 본격적으로 살펴본 최초의 학자들을 들라면 W. Marxen, Der Evangelist Markus. Studien zur Redaktionsgeschichte des Evangeliums, 21959와 T.A. Burkill, Mysteiuos Revelation. An Examination of the Philosophy of St. Mark's Gospel, 1963, E trocme, La formation de l' evangile selon Marc, 1963. 누가복음은 H. Conzelmann Die Mitte der Zeit. Studien zur Theologie des Lukas, 61977, W.C. Robinson, Der Weg des Herrn. Studien zut Geschichte und Eschatologie im Lukasevangelium, 1964, H. Flender, Heil und Geschichte in der Theologie des Lukas, 1965.
주2) J. Lange, Einführung, in; ders. (Hg.), Das Matthäus-Evangelium, WdF 525, 1980, 12f.
주3)이글은 원래 1960년 Kiel대학에 제출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예수와 베드로의 물 위를 걸음 단락에 나타난 마태공동체의 정황

 

- 마 14:22-33을 중심으로 -

 

고 영 미

 

- 목 차 -

I. 서론
II. 예수의 물 위를 걸음 단락(마14:22-27)에 나타난 마태공동체의 정황
III. 베드로의 물 위를 걸음 단락(마14:28-33)에 나타난 마태공동체의 정황
IV. 결론


Abstract
-------------------------------------------------------------------------
예수의 물 위를 걸음 단락(마14:22-27)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은 문자 그대로 풍랑 속의 갈릴리 바다를 걸어오신 예수의 신적 권능으로만 보는 것이다. 물 위를 걷는 예수 단락은 환난 속에도 굴하지 않고 환난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예수의 권능을 나타내며, 예수가 환난에 처한 제자들과 함께 할 때 환난은 제거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본문은 마태공동체가 환난에 직면하여 고난 중에 있는 정황을 나타내며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예수와 하나가 될 때 환난은 더 이상 마태공동체에게 영향을 줄 수 없음을 나타낸다.


베드로의 물 위를 걸음 단락(마14:28-33)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마태는 베드로를 제자도의 전형적인 모델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지는 장면은 마태복음서만의 독특자료로 다음과 같은 마태공동체의 정황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마태공동체 안에는 바리새적 유대교로부터의 환난과 핍박의 어려움 속에 공동체를 이탈하려는 일단의 사도계열 크리스천 그룹이 있었다. 베드로의 물 위를 걷다가 빠짐 단락은 마태공동체와 마태공동체 내 공동체를 이탈하려는 일단의 사도계열 크리스천 그룹간의 갈등과 해소로 이해될 수 있다. 공동체 이탈 그룹은 예수가 공동체 안에 없다고 주장하며 공동체를 이탈하려 한다. 마태는 배에 있는 사람들의 예수 고백을 통해 마태공동체가 공동체 이탈 그룹 보다 우월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마태공동체 내의 공동체를 이탈하려는 그룹에게 그룹을 이탈하면 더 큰 환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마태공동체 이탈그룹이 공동체 안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권고하고 있다.

I. 서론

마태는 마가복음서와 Q자료를 자신의 복음서의 기초로 사용하였다. 마태는 마가복음서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된 베드로의 모습을 보다 긍정적으로 수정하였고, 마태복음서만의 특수자료를 삽입하여 베드로의 모습을 부각시켰다. 마태복음서만의 특수자료는 베드로가 예수처럼 물 위를 걷는 단락(마14:28-31)과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 천국의 열쇠, 즉 매고 푸는 권세를 부여받는 단락(마16:16b-19), 성전세문제 단락(마17:24-27)이다. 마태는 위 특수자료에서 베드로를 긍적적으로 묘사하는데 베드로가 예수처럼 물 위를 걷는 단락(마14:28-31)에서는 베드로의 물에 빠지는 부정적인 면도 강조되고 있다. 본 소론에서는 예수의 물 위를 걸음 단락(마14:22-27)과 베드로의 물 위를 걸음 단락(마14:28-33)에 나타난 마태공동체의 삶의 정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II. 예수의 물 위를 걸음 단락(마14:22-27, 32)에 나타난 마태공동체의 정황

바다 위를 걷는 예수의 기사(마14:22-27,32)는 마가복음서(막6:45-52)와 요한복음서(요6:16-21)에도 나타난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은 이 기사를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본문 속에 나타난 예수 당시의 정황을 파악해 보기로 하자. 이 기사는 마태, 마가, 요한복음서 모두 5천명의 급식기사 직후 나타난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마14:22)

어째서 예수는 제자들을 급히 보내고 따로 있었을까? 단지 홀로 기도할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을까? 요한복음서에는 5천명을 먹인 급식기사와 바다 위를 걸음 단락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요한복음서만의 특수성구가 있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4-15)

 

위 성구로 미루어 볼 때 예수는 무리와 마음이 맞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제자들과도 함께 가지 않았다는 것은 제자들과도 역시 마음이 맞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제자들은 영광의 자리에만 관심이 있고, 예수의 비유를 잘 깨닫지도 못한다. 예수와 헤어진 후 곧 이어 제자들이 풍랑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볼 때 제자들을 급히 따로 보냈다는 것은 제자들과 예수가 하나되지 못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유사단락인 (마8:23-27)의 예수가 풍랑을 잔잔케 한 기사에서 예수가 주무시는 상황과 비견될 수 있다. 주무신다는 것은 제자들과 예수가 일체되지 못한 상황을 나타낸다.

풍랑으로 인해 고난 받는 상황은 예수와 하나되지 못한 제자들이 외부의 핍박과 환난에 고난받는 상황을 상징한다. 바람은 외부의 핍박과 환난을 상징하며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고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마11:6-7) 세례요한이 시험, 환난으로 인해 실족하는 상황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로 비유한 예를 볼 때 바람은 시험과 환난으로 비유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마4:19) 성구와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마17:27) 성구를 연관하여 예수가 베드로와 안드레를 전도하면서 한 말과, 베드로에게 성전세를 얻게 하는 장면을 놓고 비교하여 볼 때, 예수가 베드로가 전도자가 될 것을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표현하였다면, 물고기는 전도된 사람을 의미하며 바다는 세상을 의미하게 된다.

풍랑으로 인해 고난받는 장면을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마태공동체의 정황에 적용시킬 수 있다. 마태가 마태복음서를 기록할 당시의 사회적 정황은 바리새적 유대교로부터의 종교적 핍박이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A. D. 70년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반란 사건 이후 랍비 요하난 벤 쟈카이(Johannan ben Zakkai)는 지중해 연안의 얌니아(Jamnia)에서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을 모아 산헤드린의 재건과 구전의 경전화 작업을 진행시켰다. 데이비스에 따르면 반란 이전에는 유대 기독교인들이 유대교의 광대한 영역 안에 남아 있었다. 랍비들에 의해서 다른 이단과 같이 취급된 유대 기독교인들은 회당으로부터 축출되었다. 이를 위한 계획 중 하나는 A.D. 85년경에 개정된 개정판 회당의 18개 기도문 중 12번째 기도문을 삽입시키는 것이었다. 12번째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도들과 이단자들(minim)이 순간에 멸망하게 하시고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시며 그들이 의인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 기도문을 읽거나 그것에 '아멘'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한다면 회당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에게 충성하려는 사람들은 결국 유대교 그룹으로부터 소외당하고 회당으로부터 파면을 당하여 종교적 근거와 민족적 결연을 박탈당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바리새적 유대교로부터의 핍박에 마태공동체는 고난을 당하고 있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를 '유령'이라 오해하고 두려워한 것은 핍박과 환난 속에 예수가 그들을 구원시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의심함을 나타낸다.

예수의 물 위를 걸으심에 대해 일반적인 해석은 문자 그대로 풍랑 속의 갈릴리 바다를 걸어오신 예수의 신적 권능으로만 보는 것이다.

 

해그너(D. A. Hagner)는 물 위를 걷는 예수 단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예수가 바다에 대해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시편 69:14-15)에서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듯이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바다를 악의 세력의 영역으로 본다면, 바다에서의 폭풍은 악의 경험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예수는 자연에 대한 힘 분만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주권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제자들은 자연 뿐만 아니라 악에 대해서도 다스리시는 예수를 제자들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즉시 고백한다

해그너의 해석은 일리가 있지만, 그 역시 예수의 물 위를 걷는 행위를 실제적인 이적으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자대로 실제로 물 위를 걷는 이적을 예수가 행한 것이라면 이 권위를 베드로에게 부여하여 베드로가 얼마간 물 위를 걸었으니 예수가 제자들에게 부여한 병자를 고치는 기적(마10:1)이 지금도 행해지고 있듯이 이 시대 또한 물 위를 걷는 일이 가능하여야 한다. 또한 헤그너는 바다의 폭풍을 악으로 상정할 뿐 마태공동체의 삶의 정황엔 적용시키지 못하고 있다.

 

물 위를 걷는 예수는 환난 속에도 굴하지 않고 환난을 주관하고 다스리는 예수를 의미하며, 예수가 환난에 처한 제자들과 함께 할 때 환난은 제거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본문은 마태공동체가 환난에 직면하여 고난 중에 있는 정황을 나타내며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예수와 하나가 되었을 때 환난은 더 이상 공동체에게 영향을 줄 수 없음을 나타낸다.

 

III. 베드로의 물 위를 걸음 단락(마14:28-33)에 나타난 마태공동체의 정황

본 단락은 일반적으로 베드로의 수위성 내지 베드로의 제자도의 원형을 나타내는 단락으로 이해되어져 왔다. 본 단락에 대한 기존 학자들의 주장을 먼저 살펴보자.

 

칼리슬(C. R. Carlisle)은 (마14:22~33)에서 마태가 베드로를 기독교 제자도의 원형적인 모델으로 묘사하였다고 보았다. 그는 그 근거를 마가복음서의 제자들과 마태복음서의 베드로를 대조 분석하여 들고 있다. 마태복음서의 베드로는 부름에 응하며 예수에 의해 구원을 받고 공통된 신앙고백을 이끌어 내나 마가복음서의 제자들은 두려움과 놀람 속에서 결국 이해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신앙고백을 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간과하였다는 점과, 베드로의 물위를 걷는 기사에만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베드로의 의심의 발언-"주여 만일 주시어든..."(마14:28)과 행동-"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마14:30)에 대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엘리스(P. F. Ellis)는 베드로의 연약함과 강함을 모두를 취하여 베드로의 수위성을 주장한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대로 따랐다가 잠시 신앙이 흔들리기는 하였으나 예수에 의해 다시 회복되어졌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비판될 수 있다. 베드로가 회복되었다고 하나 예수에 의해 다시 배 안으로 들어왔을 뿐 그가 계속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므로 베드로가 예수의 권능을 받는 수위성을 나타내려 했다고 볼 수 없다.

슈바이쩌(E. Schwizer)는 베드로 역할을 제자도의 원형으로 볼 뿐만 아니라 또한 뛰어난 믿음의 영웅으로 보지 않고 일반적으로 제자들을 대표하는 자로 본다.

 

필자는 베드로가 예수처럼 물위를 걷는 단락(마14:28-33)을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갔다가 물에 빠지게 되고, 다시 배 안으로 들어오게 된 점에 유의하여, 마태공동체의 삶의 자리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배는 교회의 상징이며, 또한 마태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14:26)라는 의심의 발언을 하며 예수와 같은 권능을 요구한다. 이것을 마태공동체의 삶의 정황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마태공동체 내에 베드로로 상징되는 일단의 사도계열 크리스천 그룹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의 권능이 자기들에게 주어졌고 예수는 마태공동체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공동체 밖으로 이탈하려고 한다.

 

베드로의 물 위를 걷다가 빠짐 단락은 마태공동체와 마태공동체 내 공동체를 이탈하려는 일단의 사도계열 크리스천 그룹의 갈등과 해소로 설명될 수 있다. 마태는 이 공동체 이탈그룹이 마태공동체 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환난으로 인해 더 큰 어려움(물에 빠지게 됨)에 봉착하게 됨을 경고하려 한다. 생명을 잃게 될 어려움에 봉착한 이탈그룹은 예수의 구원을 부르짖는데, 결국 예수가 마태공동체와 함께 함을 깨닫고 공동체 내에 들어올 때 환난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마태는 말하려 한다. 마태는 마태공동체 내에 이탈하려는 그룹에게 그룹을 이탈하면 더 큰 환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에게 예수가 마태공동체를 버린게 아니라 함께 하고 계시다는 것을 권고하고 있다.

 

또한 (마14:32)의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와 마태복음서의 마지막 성구 (마28:20)의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와 연결시키는 마태의 편집의도로 비추어 볼 때 마태공동체는 예수와 함께 하는 공동체, 곧 '임마누엘 공동체' 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 위를 걷는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에 있어서 마태복음서의 제자들의 이해와 마가복음서의 제자들의 이해가 뚜렷이 대비된다. (막6:52)에서는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고 하였고, 반면 (마14:33)에서는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라고 하여 제자들이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마14:33)에서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제대로 고백한 것이지 베드로가 고백한 것이 아닌 것을 볼 때, 또한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믿음보다 세상의 환난을 더 크게 생각하였기에(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예수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고 꾸증을 듣는 장면을 삽입한 것을 볼 때, 마태공동체의 예수에 대한 이해, 믿음이 공동체 이탈 그룹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우위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마태는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배에 오르게 되는 장면을 통해 마태공동체 이탈그룹이 공동체 안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권고하고 있다.

 

III. 결론

물 위를 걷는 예수 단락은 마태공동체가 바리새적 유대교로부터의 환난에 직면하여 고난 중에 있는 정황을 나타내며 부활하신 예수를 절대 믿고 예수와 하나가 될 때 환난은 더 이상 마태공동체에게 영향을 줄 수 없음을 나타낸다.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가 물 위를 걷다가 빠지는 단락은 다음과 같은 마태공동체의 정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마태공동체 안에는 바리새적 유대교로부터의 환난과 핍박의 어려움 속에 공동체를 이탈하려는 그룹이 있었다. 베드로는 이 공동체 이탈 그룹을 상징하는데, 이들은 예수가 공동체 안에 없다고 주장하며 마태공동체(배)를 이탈하려는 일단의 사도계열 크리스천들로 상정될 수 있다.

 

베드로의 물 위를 걷다가 빠짐 단락은 마태공동체와 마태공동체 내 공동체를 이탈하려는 일단의 사도계열 크리스천 그룹의 갈등과 해소로 설명될 수 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제대로 고백한 사람은 '배에 있는 사람들'이지 베드로가 아닌 것을 볼 때(마14:32), 또한 베드로가 예수에 대한 믿음보다 세상의 환난을 더 크게 생각하였기에(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예수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고 꾸증을 듣는 장면을 삽입한 것을 볼 때, 마태공동체의 예수에 대한 이해와 믿음이 마태공동체 이탈 그룹보다 더욱 뛰어나다는 우위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마태는 마태공동체가 예수와 함께 하는 공동체, 곧 '임마누엘 공동체' 임을 나타내고 있다. 마태는 마태공동체 내에 이탈하려는 그룹에게 그룹을 이탈하면 더 큰 환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으며, 또한 베드로가 예수와 함께 배에 오르게 되는 장면을 통해 마태공동체 이탈 그룹이 공동체 안으로 다시 돌아올 것을 권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