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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과 구약

by 은총가득 2020. 8. 18.

마태복음과 구약


마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들에 비해 구약성경에 대한 인용구들과 언급들을 두드러지게 많이 포함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이러한 특징은 그 독자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비추어 볼 때 그렇게 놀라운 것이 아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 주된 독자들로 추정되는 마태복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제시하는 데 있어 그 어떤 다른 복음서들보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구약과의 연관성 속에서 다루어야 할 필요에 직면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해석하는 데 있어 그의 구약 사용의 원리와 목적 그리고 그 내용에 대한 적절한 이해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마태의 구약 사용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상당수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2 본고에서는 마태의 구약 사용의 특징들을 개관하면서, 그와 관련해서 문제시되어 왔던 논점들을 제시하는 가운데 마태복음의 구약 사용의 신학적 의미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성취 형식 인용구
마태의 구약 사용에 대한 가장 특징적 형태는 아마도 복음서 전체를 통해 10회에 걸쳐 나타나는 ‘성취 형식 인용구들’일 것이다(1:22~23; 2:15; 2:17~18; 2:23; 4:14~16; 8:17; 12:17~21; 13:35; 21:4~5; 27:9~10; 참조. 2:5~6). 우선적으로 이 인용구들은 동일한 형식의 도입구를 갖는다는 점이 특이하다: ‘선지자 …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려 하심이라’.3 마태의 이 도입 형식구는 매우 독특하며, 따라서 마태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거의 분명하다.4 이와 동일한 도입구는 놀랍게도 당대의 유대교 및 기독교 문헌들 가운데서 거의 발견되지 않으며, 단지 요한복음에서만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가 발견될 뿐이다: ‘이는 성경이[또는 선지자 …의 말씀이] 성취되기 위함이다’(요 12:38; 13:18; 15:25; 17:12; 19:24, 36; 참조. 요 18:9, 32).

마태의 형식 도입구의 특징은 모든 경우들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 세 단어들에 의해 잘 드러난다. 첫째, 마태는 인용구의 내용을 지칭하는데 ‘토 레덴’(‘말씀되어진 것’)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수동형 분사 ‘레덴’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마태에 의해서만 사용되고 있는데(10개의 형식 인용구들과 3:3; 22:31; 24:15에서), 그 수동형에 내재된 주어는 하나님 자신인 것이 분명하다(참조. 1:22; 2:15).5 그렇다면 마태는 구약의 여러 저자들을 통해 기록된 다양한 인용구들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고 있는 ‘하나님 자신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모든 경우들에서 ‘선지자’가 인용된 하나님의 말씀의 매개자로서( ‘통하여’) 언급되고 있다. 마태에게 선지자는 인용된 말씀의 진정한 저자가 아니라 단지 매개자일 뿐이다(참조. 겔 38:17; 단 9:10; 눅 1:70 등). 그런데 특이하게도 마태는 13:35에서 시편을 인용하는 상황에서까지도 그 인용구를 ‘선지자’에게로 돌린다. 이는 마태가 하나님의 계획을 앞서 보여주는 예견자로서의 기능과 관련하여 ‘선지자’의 개념을 상당히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참조. 11:13).
셋째, ‘선지자’라는 명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단어는 ‘성취하다’라는 동사이다. 이 동사는 마태복음의 핵심 주제를 매우 간략하면서도 분명하게 드러낸다.6 사실 구약성경에 약속된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 주제는 신약성경 전체의 주제이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이 주제가 보다 더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경우들에서 이 세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는 형식 도입구는 마태가 구약의 인용구들을 활용한 목적이 예수의 생애를 다름 아닌 구약 예언의 성취로 드러내 보여주는 데 있었음을 너무도 확고하게 시사한다.

한편,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들과 관련하여 특이한 점은 21장 4~5절의 경우를 제외한7 모든 인용구들이 신약성경에서 인용된 적이 없는 독특한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형식 인용구들과 직접 연관된 이야기들 대부분(역시 21:4~5의 경우를 제외하고)은 마태복음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거나(1:18~25; 2:1~12, 13~15, 16~18, 19~23; 27:3~10), 마가복음의 장황한 이야기를 매우 간략하게 요약한 형태들로 나타나고 있다(4:13~16; 8:16~17; 12:15~21; 13:34~35).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들과 그 밖의 몇몇 요인들을 검토한 후 상당수의 학자들은 이 형식 인용구들이 마태 자신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8 그럴 경우 성취 형식 인용구들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은 마태의 신학적 강조점을 발견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마태의 형식 인용구들과 그와 연관된 이야기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먼저 1:18~2:23의 경우, 형식 인용구들을 삭제해 버린다 해도 이야기의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이는 이 형식 인용구들이 이야기들 중간 중간에 첨가된 마태 자신의 논평들임을 시사한다. 하지만 논평들이 그처럼 자주 삽입됨으로 말미암아 이야기의 흐름은 계속 단절되는 느낌이다. 마태가 이와 같은 이야기의 단절을 감수하면서까지 그의 논평들을 자주 삽입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마태의 주된 관심이 그 이야기들 자체보다 오히려 그와 관련해 삽입된 논평으로서의 인용구들에 있지 않았는지 추측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마태가 삽입하고 있는 형식 인용구들은 그의 신학적 관심을 드러내 보여주려는 목적을 가진 논평들인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우리의 제안은 1:18~2:23 이외의 경우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4:13~16; 8:16~17; 12:15~21; 13:34~35의 경우, 그 마가복음 평행구들에서는 이야기들 자체가 관심의 유일한 대상들인데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이야기들이 단지 인용된 구약의 내용들을 확증해 주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내용들만을 제공할 뿐이며, 따라서 마태의 관심의 초점은 이야기들 자체보다는 인용구들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그 신학적 목적이 분명한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들’의 구약 본문 형태는 마태의 다른 구약 인용들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특이하다. 10개의 형식 인용구들(그리고 이와 유사한 2:5~6)을 제외한 다른 구약 인용구들에서 마태는 일반적으로 70인역 본문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초대 교회 당시 70인역이 표준적인 헬라어역 구약성경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성취 형식 인용구들의 경우 그 본문 형태들은 (어쩌면 1:23의 경우를 제외하고) 70인역과 현저하게 다르다. 더욱 놀라운 점은 형식 인용구들의 본문 형태들 대부분이 70인역뿐 아니라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그때 당시 존재하던 어떤 다른 히브리어 본문이나 번역본들과도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9 실제로 각 인용구들은 단순한 인용이라기보다는, 생략, 삽입, 대체, 통합, 요약 등의 다양한 방법들을 활용한 지극히 창의적인 인용들로 드러난다. 그 구체적인 예들을 유형별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구약의 한 기본 구절에 다른 구절(들)이 연결되어 인용된다. 2:6의 경우, 미가 5:2에 사무엘하 5:2이 첨가되고 있다. 또한 21:5의 경우, 스가랴 9:9에 이사야 62:11의 몇몇 단어들이 첨가되고 있다.


2) 구약의 긴 구절의 주제와 내용이 다른 구절을 활용하여 요약적으로 인용된다. 27:9~10의 경우, 예레미야 19:1~15(및 18:1~12; 32:6~9)의 긴 내용이 스가랴 11:12~13을 변형시켜 인용하는 가운데 적절히 반영되고 있다.10
3)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마태의 인용구들은 마태의 이야기들의 내용과 상황에 적합하게 창의적으로 변형되거나 대체되거나 생략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2:6의 경우, ‘에브라다’ 대신 ‘유대 땅’이 대체되고 있으며, ‘결코’가 첨가되고 있다.
4) 때로는 그 출처가 불분명하다. 2:23의 경우, 그 인용구의 출처는 몇몇 제안들에도 불구하고(참조. 사 4:3; 11:1; 삿 13:5, 7) 결코 명백하지 않다.11그렇다면 마태가 형식 인용구들을 인용하는 데 있어 이와 같은 창의적 방법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가장 분명한 대답은 형식 인용구들이 인용된 문맥들과 관련하여 제시될 수 있다. 마태가 인용한 인용구들은 위에서 지적하였듯이 예수의 생애와 관련하여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던 구절들이 아니었으며, 그 결과 마태는 그의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 구절들을 예수에 관한 이야기 문맥들과 보다 의미 있게 연결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기존의 70인역 본문을 있는 그대로 (혹은 히브리어 본문을 문자적으로 번역하여) 사용하기보다는, 문제의 본문들을 문맥들에 맞는 형태들로 적응시켜 인용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2
그리고 마태는 아마도 이처럼 독특한 자신의 인용들에 대해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그 모든 경우들마다 그의 독특한 형식 도입구를 일관성 있게 사용했던 것 같다.13사실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들에 대한 논의는 그 구체적인 인용구들에 대한 해석적 작업 없이는, 특히 그 신학적 중요성 및 의미와 관련하여 그 진정한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다. 하지만 위의 개괄적인 논의들을 기초로 우리는 다음 몇 가지 잠정적인 결론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특히 그 도입구)는 구약성경이 당시 교회에게 진리를 가늠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 인용구들이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마태와 그의 교회가 추종하고 있는 종교가 과거 구약 종교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그 연속이자 그 완성이라는 점을 입증해 준다. 한편 마태는 구약을 인용하는 데 있어 딱딱한 정확성보다는 신학적 의미의 연결성에 더 무게를 두었으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잣대에는 무책임하고 부정확해 보일지 몰라도 당대의 잣대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탈굼적 변화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마태의 인용 방식 배후에는 어쩌면 예수의 생애가 구약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의 생애에 의해 구약성경의 그 궁극적이고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는 마태의 신념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른다.14

구약 성경 내용에 관한 다른 언급/인용들
마태는 성취 형식 인용구들을 제외하고서도 다른 복음서 저자들에 비해 구약성경과 관련된 자료들을 매우 많이 포함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2:1~8에서 발견된다. 마태복음의 본 단락을 그 평행 단락들인 마가복음 2:23~28 및 누가복음 6:1~5과 비교해 보면, 마태는 마가나 누가에서 발견되지 않는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는데(5~7절), 그 자료들은 모두 구약성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이다. 그런데 마태의 이러한 자료 삽입은 결코 무의미한 것들이 아니라 지극히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는 것들로 드러난다. 본 장에서는 그 삽입된 자료들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마태의 구약 사용의 특징들을 예시하도록 하겠다.

12:1~8은 안식일에 밀밭에서 이삭을 잘라먹는 예수의 제자들을 자신들의 전통적 규례에 의거해서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그들에게 답변하시는 예수 사이의 대화를 다룬다. 그 예수의 답변들 중 두 번째 답변인 5절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규례보다는 구약의 율법 자체에(‘율법에서’) 호소하신다. 즉 그는 구약 율법에서도 안식일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 성전 안에서는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신다(참조. 민 28:9~10). 그리고 6절에서 예수는 자기 자신이 성전보다 더 큰 자라고 선언하신다. 본 문맥에서 이 선언의 의미는 분명하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 임재의 중심으로써의 역할 때문에 안식일보다 더 큰 권위를 갖는다면, 성전의 역할을 성취하심으로써 성전 자체를 대체하시는 예수 자신은 안식일보다 훨씬 더 큰 권위를 가지신다.

한편, 예수의 세 번째 응답인 7절의 호세아 6:6을 인용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말씀은 요구하는 분이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자비로운 분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안식일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안식일 제도는 하나님께서 창조 후 일곱째 되는 날을 축복하신 가운데 암시적으로 나타난 그의 백성을 위한 ‘영원한 안식’의 계획을 반영하며(참조. 창 2:2~3; 출 20:8~11), 또한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구속적 구출’ 사역 역시 반영한다(참조. 신 5:12~15). 이처럼 안식일은 그 기원에 있어서 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마태복음 11:28~30은 안식일 제도 가운데 반영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취하신 예수의 ‘자비로운 성품’과 안식일의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신 예수의 ‘종말론적 안식’(즉 구속) 사이에 연관이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7절은 이미 구약을 통해 존재해 왔으며 이제 11:28~30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사상의 흐름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게다가 본 인용구가 예수 자신이 성전보다 크다고 선언한 성전 모형론에 바로 뒤이어 나온다는 점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모든 점들을 종합해 볼 때, 그들이 무죄한 것은 그들이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더 나아가서 ‘옛’(혹은 ‘성취되지 않은’) 의미에서의 안식일 율법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안식일을 성취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종말론적 안식’(즉 구속)을 제공해 주신 ‘자비로우신’ 예수의 권위 하에서 그렇게 하였기(즉 범하였기) 때문인 것이다.15
마태는 이처럼 5~6절을 삽입함으로써 구약에 익숙한 그의 독자들에게 예수의 권위가 성전의 권위보다 크시며, 따라서 안식일(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율법)의 권위를 능가한다는 기독론적 주장을 매우 대담하고 강력하게 펼치고 있고, 다른 한편 7절에서 호세아 6:6을 인용함으로써 안식일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어 제자들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입증한다. 이처럼 적어도 우리가 살펴본 12:5~7에 나타난 마태의 구약 사용은, 그의 독자들이 구약성경에 익숙할 뿐 아니라 그 권위를 인정하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가정할 때, 그 대담성과 적절성 그리고 유용성에 있어서 지극히 돋보인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밖의 다른 경우들은 다음 장들에서도 확인될 것이다.

모형론
우리가 이미 고찰한 성취 형식 인용구들에서 마태는 예수께서 구약의 성취이시라는 사실을 대개 명시적으로 입증한다. 하지만 마태의 성취에 대한 관심은 그러한 명시적 방법에 그치지 않는다. 마태는 자신의 그러한 관심을 그의 모형론적 구약 사용에서도 매우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마태는 이 모형론적 방법을 통해 예수를 구약의 몇몇 제한된 예언들만을 성취하신 분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성취하신 분으로 제시한다.

물론 ‘모형론’이라는 용어는 상당히 다양한 의미로 이해되어 왔으며, 따라서 그 정확한 의미를 정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복음서에서의 용례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모형이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원칙들의 성격은 시대에 따라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기초하여, 신약과 구약의 사건, 인물, 제도 사이에 서로 일치되는 점을 인식하고서, 신약의 사건, 인물, 제도를 구약의 모형의 견지에서 이해하고 묘사하는 것이다.16 이러한 모형론적 구약 사용은 모든 복음서들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이 모형론에 있어서도 다른 복음서들보다 훨씬 두드러진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1. 새로운 모세로서의 예수
마태복음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되는 모형론은 ‘모세­예수 모형론’이다. 이 주제와 관련된 추천할 만한 연구서는 앨리슨(D.C. Allison)의 The New Moses: A Matthean Typology이다.17 이 책의 가치는 마태의 모형론적 암시들을 확인하는 데 있어 마태복음 이전의 유대교 문서들 가운데서 모세가 모형론적 인물로 사용된 용례들을 균형 있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앨리슨은 먼저 모세가 다양한 기능적 측면에서 모형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밝힌다: 지도자(여호수아, 요시아), 구출자(기드온, 메시아), 선생(에스라, 에스겔, 힐렐), 중보자(예레미야, 제2­이사야의 종).18 앨리슨은 마태가 이러한 모형론적 전통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모세 모형론적 암시가 무엇인지를 탐구해 나간다. 앨리슨은 마태복음 거의 전체에서 모세 모형론의 암시들을 발견해 내려고 시도한다: 유아기 내러티브, 시험, 산상설교, 팔복, 예수와 율법, 8~9장의 기적, 제자 파송 설교, 표적 요청, 광야에서 먹이신 기적들, 변화산 사건, 예루살렘 입성, 23장, 종말 강화, 최후의 만찬, 예수의 죽음 등.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앨리슨의 연구 모두를 다룰 수는 없기 때문에, 유아기 내러티브를 하나의 예로 다루고자 한다.

앨리슨이 제안한 유아기 내러티브의 모세 모형론적 암시는 다음과 같다: 1. 명시적 인용: 마태복음 2:15에서 출애굽과 관련된 명시적 인용이 나타나는데(호 11:1),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모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2. 암시적 인용: 마태복음 2:19~21과 출애굽기 4:19~20 사이에는 상당한 유사성들이 존재한다. 특히 마태복음의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와 출애굽기의 “네 목숨을 찾던 자들이 다 죽었느니라”는 축어적 일치를 보여준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경우 예수의 목숨을 찾던 자로서 죽은 자는 문맥상 헤롯 대왕 한 사람인데도(19절), 마태가 ‘찾던 자들’이라는 복수 형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모세와 예수 사이의 모형론적 연관성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밖에도 앨리슨은 마태의 내러티브와 유대교 전통에 나타난 모세 이야기 사이의 상황적 유사성과 구조적 유사성 및 핵심 단어들과 어구들 사이의 유사성들을 주목함으로써 마태의 유아기 내러티브가 ‘모세­예수 모형론’을 얼마나 풍성하게 암시하고 있는지를 입증해 보이고 있다.19하지만 앨리슨은 모세 모형론이 유아기 내러티브뿐 아니라 거의 마태복음 전체에 걸쳐 암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형론은 대부분 감추어져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는 마태의 기독론에 어떤 시사점을 던져 주는가? 여기서 우리는 마태가 모세를 예수의 모형으로서뿐 아니라 경쟁자로서도 제시하려 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비록 마태는 모세가 예수의 선행자로서 모형적 기능을 한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러면서도 마태는 진정한 지도자, 선생, 권위자, 중보자, 구원자는 모세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를 가지신(28:18) 예수 한 분뿐이심을 드러내 보이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마태는 모세의 다양한 모형론적 기능은 암시적으로만 제시하면서, 정작 모세 자신의 모습은 감추고 오로지 예수만을 두드러지게 제시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태의 이러한 암시적 모세 모형론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예수는 모세의 모형들을 이어 받으셨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하신 분이시며, 따라서 그는 모세와 유사할 뿐 아니라 그를 초월하신 분이시다.20

2. ‘더 큰이’
마태복음의 모형론에 대해 고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12장에서 발견되는 3중적 모형론이다: 12:6 ­ 성전 모형론; 12:41 ­ 요나 모형론; 12:42 ­ 솔로몬 모형론. 그런데 여기서 발견되는 모형론들은 모세 모형론과 달리 ‘더 큰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명시적인 성격을 띤다.

먼저 12:6에서 예수는 그 자신이 ‘성전’보다 크신 분이심을 밝히신다. 그런데 예수는 이러한 선언을 위한 근거를 다른 곳에서 찾지 않으시며, 오로지 그 자신의 권위로서 선언하신다. 예수는 이 선언적 ‘성전 모형론’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의 초점으로서의 성전의 기능과 권위가 이제 자신에게 이전되었고 자신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밝히신다. 하나님의 임재가 예수에게 이전되었고 그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개념은 마태에게 특별히 의미심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지 이 성전 모형론에 의해 명시적으로 선언될 뿐 아니라 복음서 전체가 1:23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와 28:20의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느니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21 현 문맥에서 이 개념의 중요성은 명백하다. 만일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초점으로서의 그 기능 때문에 안식일보다 더 권위가 있다면, 성전의 그 기능을 대체하시고 성취하신 예수는 안식일보다 얼마나 더 권위가 있겠는가? 한편 성전보다 더 높으신, 따라서 안식일보다 더 높으신 예수의 권위 개념은 8절에서 제시될 예수의 결정적인 메시아적 선포에로의 길을 잘 예비해 준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이니라.”12:39~41은 ‘요나 모형론’을 제시해 준다. 이는 아마도 예수께 적용되고 있는 모형론의 가장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40~41절은 요나와 예수 사이의 두 가지 역사적 일치점들을 소개한다. 첫째, 40절은 두 사람 모두 속박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일치점을 말한다. 그들은 동일한 기간 동안(삼일 삼야), 자연적으로는 전혀 구출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에 의해 구출되었던 자들이라는 공통점들을 갖는다. 둘째, 41절은 그들 모두가 회개의 설교를 선포하였다는 일치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둘 사이에는 일치점들 뿐 아니라 상이점들 역시 발견된다. 요나의 속박 상태는 그의 사역 첫 단계에 속하는 데 비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의 사역의 절정부를 이루고 있다. 또한 보다 중요하게, 요나가 속박된 상태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의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었던 데 비해 예수께서 땅 속에 묻히신 것은 죽음까지도 감수한 그의 순종의 결과였다. 이처럼 모형론은 모든 점들의 일치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실 모형론의 진정한 의미는 일치의 기반 위에 드러나게 되는 상이점들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세 모형론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모형론의 진정한 목표는 예수께서 모형과 유사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데 있다기보다는 예수께서 모형을 훨씬 더 뛰어 넘으신 분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12:42은 ‘솔로몬 모형론’을 제시한다. 이는 요나 모형론의 형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솔로몬과 예수 사이의 일치점은 매우 분명하다. 솔로몬과 예수는 모두 다윗의 아들(자손)이다. 두 인물은 모두 지혜로 특징 지워 진다. 하지만 이들 사이의 상이점 역시 매우 분명하다. 솔로몬은 자신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년에 우상숭배에 빠졌던 것과 달리, 예수는 그의 전생애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하며 사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선언은 지극히 당연하다: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12장의 이 3중적 모형론을 통해 마태는 예수께서 성전, 위대한 왕 솔로몬, 선지자 요나, 즉 구약성경의 세 가지 중심적인 역할들보다 더 큰 분이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언은 예수께서 구약성경의 성취이시라는 사실을 인상적으로 증거해 준다(참조. 5:17).

이러한 모든 모형론들은22 예수께서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개념을 몇몇 제한된 명시적 예언들의 성취 범주를 뛰어넘어, 구약의 인물, 사건, 제도에 걸친 거의 전포괄적인 영역으로 확장시켜 준다. 또한 마태의 모형론들은 예수를 구약과 연속선상에 서 있는 분으로 제시해 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 구약을 초월하신 최종적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제시한다.

예수와 율법
마태의 구약 사용을 고찰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예수와 율법의 관계에 대한 마태의 제시 방식이다. 마태복음에 제시된 예수와 율법의 관계를 살피는 데 있어 마태복음 5:17~20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단락은 마태복음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석의적 문제들 중 몇 가지를 제기하며, 그래서 이 단락에 대한 수많은 제안들과 견해들이 상세하게 제시되어 왔다.23 하지만 지면의 한계 때문에 본고에서는 본 단락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필자는 우리의 연구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몇몇 핵심 문제들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다루고자 한다.

1. 5:17 ­ 구약성경의 성취자로서의 예수
‘율법과/이나 선지자들’은 구약성경 전체를 지칭하는 전통적인 유대교적 어구이다(참조. 마카베우스 2서 15:9; 행 24:14 등). 11:13에서 마태는 동일한 어구를 ‘예언하다’ 동사와 함께 사용한다. 이는 선지자들뿐 아니라 율법도 ‘예수께서 이제 이루어 가시려는 바’를 내다보는 예언적 기능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17절의 핵(核)은 의심할 여지없이 ‘플레로사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아마도 구약성경의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다’ 혹은 ‘성취하다’인 것으로 보인다.24 길리히(R.A. Guelich)가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예레미야 31:31~34에서는 ‘마음에 쓰여진 율법’(즉 ‘시온­토라’)을 동반한 새언약이 ‘돌 판들에 쓰여진 율법’(즉 ‘시내­토라’)을 동반한 옛언약에 대조하여 약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5:17은 ‘시내­토라’가 내다보았던 이 ‘시온­토라’에 대한 약속이 예수의 오심 가운데서 성취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25 마태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인의 관심과 헌신 그리고 순종의 구심점으로서 율법의 지위를 대신한다. 뱅크스(R. Banks)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마태가 기술하고자 하는 바는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율법이 예수와 연관하여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예수는 다름 아닌 그 율법을 성취하신 분이고, 따라서 이제 모든 관심이 그에게 돌려져야 하는 분인 것이다.”26 하지만 이는 율법의 규범적 성격이 본 단락 안에서 여전히 고려되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참조. 18, 19절). 그러나 그 규범적 성격마저도 예수의 종말론적 성취 사역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의 구도 안에 설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17절의 ‘플레로사이’라는 단어는 예수께서 (그리고 특히 율법을 성취한 그의 가르침이) 율법 자체가 내다보았던 바와 여전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연속성’의 요소를 포함하며, 동시에 예수께서 (그리고 율법을 성취한 그의 가르침이) 이제 율법을 초월한다는 점에 있어서 ‘불연속성’의 요소를 포함한다고 제안될 수 있을 것이다.27

2. 5:18 ­ 율법의 지속적인 유효성
마태의 관심은 이제 성경 전체로부터 율법에로 좁혀지고 있는데, 이 초점은 뒤따라오는 절들에서 지속된다. 18절의 구문은 특이한데, 문장 구조를 좀더 의미 있게 조정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일점 일획’이라는 표현은 가장 세부 사항에까지 미치는 율법의 양적 전체성을 강조해 준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부터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절 전체는 율법의 손상될 수 없는 전체적 유효성을 강조적으로 확증해 준다. 하지만 이 강조적 확증은 중앙 주절을 앞뒤로 감싸고 있는 두 헤오스 종속절들에 의해 한정되고 있다.

첫 번째 수식 종속절인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구절은 특정 시한(時限)을 지칭한다기보다는, ‘결코’라는 의미의 통속적 과장법으로 보인다.28두 번째 수식 종속절은 적어도 두 가지의 상호 연관된 문제를 제기한다: 1) ‘기네스다이’ 동사의 의미; 2) ‘모든 것들’의 지시 대상. 첫째, ‘기네스다이’ 동사는 마태복음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다’, ‘발생하다’의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러한 의미가 본 문맥에서도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모든 것들’의 지시 대상은 예수의 전생애(즉 그의 잉태로부터 그의 재림에 이르기까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종속절의 시한(時限)이 예수의 초림 가운데서 성취되었던 ‘이미’의 측면과 그의 재림시에 완성되어야 할 ‘아직’의 측면을 동시에 포함한다고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예수의 성취에 비추어 본 율법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긴장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

결론적으로 18절에 따르면, 마태에게 있어서 율법은 구속사의 제한된 기간 동안 그 유효성을 갖는데, 그 기간의 끝은 이미 예수의 첫 번째 종말론적 강림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그 최종적 완성은 아직 예수의 재림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3. 5:19 ­ 계명을 버림/행함
본 절의 해석에 대한 열쇠는 ‘이 계명들’이라는 구절에 놓여 있다. ‘이 계명들’이 18절의 ‘율법’를 지칭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 계명들’의 성격을 보다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만일 18절에 대한 필자의 해석이 옳다면, 구속사의 시간 선상에 있어서 19절의 계명들의 지시 대상은 ‘성취 이후’ 시기에 속하는 데 반해,29 17, 18절에서의 율법의 지시 대상은 명백히 ‘성취 이전’ 시기에 속한다. 여기서 17, 18절에서 ‘율법’이 19절에서는 ‘계명’으로 바뀐 어휘 변화를 주목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마태는 그러한 지시 대상의 변화를 시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어휘를 바꾸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단지 ‘있는 그대로의 율법’(즉 성취 이전의 율법)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성취된 율법’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 ‘성취된 율법’이란 옛 율법이 내다보았던 ‘새 율법’이고, 예수의 종말론적 생애와 사역에 의해 이미 성취된, 그리고 그의 재림에 의해 완성될 때까지 예수의 제자들에 의해 지켜질 것이 아직 기대되는 ‘메시아적 율법’이다. 바로 이 때문에 제자들이 토라의 모든 계율을 예수의 관점, 즉 예수의 초림에 비추어서뿐 아니라(참조. 5:21~48; 7:12; 11:28~30 ;15:19~ 20; 19:7~9; 22:36~40), 또한 그의 재림을 내다보면서(참조. 5:29~30; 18:4, 8~9; 28:20) 지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끝으로 19절에서 ‘하늘 나라’ 구절의 반복적 출현은 율법 문제와 관련하여 종말론에 대한 마태의 관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이어(J. P. Mei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마태복음에서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모두가 하늘 나라의 도래의 다양한 단계들에 연관된다.’30 하지만 5:19과 관련해 ‘클레데세타이’(‘불릴 것이다’) 동사의 미래 시제는 하늘 나라의 미래적 측면, 즉 예수의 재림시에 완성될 하늘 나라의 마지막 단계를 지시해 준다.

그렇다면 19절 전체의 사상과 기능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두 쌍의 조건절들과 귀결절들은 율법(즉 ‘메시아적 율법’)의 가장 사소하고 덜 중요한 사항들까지도 순종하느냐 아니면 제쳐놓느냐가 하나님께서 ‘하늘 나라의 마지막 단계에서의 지위’를 선언하게 될 근거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 준다. 이처럼 본 절은 18절에서 진술된 바, 예수의 성취에 비추어 이해된 ‘율법의 지속적인 유효성’을 제자들의 행함과 관련하여 잘 설명해 준다.

4. 5:20 ­ 더 큰 의
본 절에서 ‘하늘 나라’는 다시 한번 역사의 마지막에 완성될 나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제자들이 소유해야 할 ‘더 큰 의’는 이 완성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의가 없이는 누구도 그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는 것이다.

본 절의 핵심은 분명 ‘너희 의’구절이다. 여기서 ‘너희 의’(즉 제자들의 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비교되고 있는데, 문제는 그 비교가 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양적인 것인가이다. 21~48절의 대조법들은 양적 차이를 시사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제자들의 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질적인 차이를 갖는다는 점 역시 명백하다. 마이어가 신빙성 있게 주장한 바와 같이, 여기서 ‘제자들의 의’는 하나님과 맺게 된 인격적 관계에 기초한 그리고 그것에 의해 가능케 된 ‘도덕적 행동’을 의미하는데, 이 근본적인 관계는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즉 하나님의 통치)를 도래케 하신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가능하게 된다.31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를 결여하였던 것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새로운 종말론적 관계’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의의 시발점이자 기초이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관계를 결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마태가 율법경시론과 율법주의라는 이중적인 적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19절과 20절에서 마태가 문제를 다루는 바에 따르면, 20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율법주의에 대한 예수의 경고(즉 하늘 나라로부터 제외됨)는 19절에서 제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율법경시론에 대한 경고(즉 하늘 나라에서 가장 낮은 지위)보다 훨씬 더 신랄하다. 하지만 좋은 제자는 19절과 20절의 상호 보완적인 경고들에 대해 공히 충분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율법주의뿐 아니라 율법경시론에 대해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제자는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17, 18절)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우선적으로 갖추는 것이 필요하지만(20절) 그러나 메시아로 오신 예수에 의해 도래케 된 하나님의 통치의 필연적인 결과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도 결여해서는 안 된다(19절).

5:17~20에 나타난 마태의 예수와 율법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5:21~48에서 여섯 가지 대조법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예증되고 있으며, 12:1~14; 15:1~20; 23:1~36 등에서도 특히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태도와 대조적인 모습으로 일관성 있게 제시되고 있다. 마태는 이처럼 구약의 가장 핵심인 율법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구약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가장 명백하고 확고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입장은 앞의 경우들에서 살펴본 바와 전혀 다르지 않다. 즉 예수는 율법의 연속선상에 서 계시면서도 율법의 한계에 머물지 않으시고 율법의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심으로써 율법을 초월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결 론
마태복음의 구약 사용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상당히 다양한 그러면서도 일관성 있는 그림을 그려 준다. 첫째, 마태의 성취 형식 인용구들은 그 도입구와 그 인용구들의 본문 형태에 있어서 다른 복음서들뿐 아니라 마태복음 자체 안에서도 매우 독특하다. 그 독특한 도입구들은 인용구들과 더불어 구약이 당시 교회에게 진리를 가늠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 인용구들이 예수의 생애에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마태와 그의 교회가 추종하고 있는 종교가 과거 구약 종교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그 연속이자 그 완성이라는 점을 입증해 준다. 이는 아마도 유대인들이었을 마태의 독자들에게는 다른 어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보다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한편 마태가 구약을 인용하는 데 있어 상당한 유연성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예수의 생애가 구약성경의 문자적 의미에 의해 규정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의 생애에 의해 구약성경의 그 궁극적이고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는 신념을 반영해 주는지도 모른다.

둘째, 성취 형식 인용구들을 제외한 그 밖의 많은 구약 인용들과 구약에 대한 언급들 중 한 예로 택한 12:5~7에 대한 고찰은 매우 인상적인 결과를 제공해 준다. 비록 제한된 예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마태가 다른 복음서와 구별되게 구약을 인용하거나 그것에 대해 언급할 때 거기에는 상당히 대담하면서도 뜻깊은 신학적 의도가 있음이 확인되었다.32 마태의 구약 사용은 적어도 12:5~7의 경우에는 그의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매우 효과적이고 유용하며 강력한 논증 효과를 가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셋째, 마태는 모형론에 있어서도 매우 풍성한 자료들을 제공한다. 그는 모형론적 방법을 통해 예수께서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개념의 범주를 단지 몇몇 제한된 명시적 예언들의 범주를 뛰어넘어, 구약의 인물, 사건, 제도에 걸친 거의 전포괄적인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마태는 이 방법을 통해 예수를 구약과 연속선상에 서 있는 분으로 제시해 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하게 그 구약의 궁극적 목표를 성취하심으로써 구약을 초월하신 최종적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제시해 준다.

넷째, 5:17~20에서 마태는 구약성경의 가장 핵심인 율법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다른 경우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를 율법의 연속선상에 서 있는 분으로서뿐 아니라, 그 율법의 한계에 머물지 않으시고 그것을 성취하심으로써 결국은 그것을 초월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그는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의 율법 성취의 결과 율법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끝으로, 위의 모든 결론들을 종합해 볼 때, 마태의 구약 사용은 지극히 기독론적이다. 그는 구약을 사용한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문제의 구약 내용을 예수와 연결시켜 제시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는 예수와 구약의 관계를 연속성과 초월성의 양 측면에서 어느 정도 긴장을 유지하며 제시해 나간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5:18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성취 개념의 종말론적 긴장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마태는 이 긴장 관계를 적절히 유지함으로써, 그의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구약에 대한 관계를 단절도 아니고 예속도 아닌 예수의 성취 중심적 관계로 유지해 나가도록 인도하고 있다.



주(註)

1. 본 논문에서 필자는 본 주제에 대한 필자 자신의 신학적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필자의 은사인 R. T. France 교수의 가르침과 그의 저서들에 크게 빚지고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2. 예를 들어, G. Strecker, Der Weg Gerechtigkeit: Untersuchungen zur Theologie des Matth us (FRLANT, 82; G 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62); R.H. Gundry,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St. Matthew’s Gospel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Messianic Hope (NovTSup, 18; Leiden: Brill, 1967); K. Stendahl, The School of St Matthew, and its Use of the Old Testament (ASNU, 20; Lund: Gleerup, 2nd edn, 1968); R.S. McConnell, Law and Prophecy in Matthew’s Gospel (Basel: Friedrich Reinhardt Kommi- ssionsverlag, 1969); R.T. France, Matthew: Evangelist and Teacher (Exeter: Paternoster, 1989), chs 4, 5; et al.

3. 하지만 2:23의 경우는 그 도입구의 형식이 약간 다르다는 점을 주목하라(o{pw plhrwqh' to; rJhqe;n dia; tw'n profhtw'n o{ti). 사실 이러한 도입구의 차이는 그 인용구를 해석하는 데 열쇠를 제공해 준다. 참조. R.T. France, Matthew(TNTC, 1; Leicester: IVP, 1985), pp. 88~89.

4. 참조. G.M. Soares Prabhu, The Formula Quotations in the Infancy Narrative of Matthew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6), pp. 46~63; G.N. Stanton, ‘Matthew’s Use of the Old Testament’, in idem, A Gospel for a New People: Studies in Matthew (Edinburgh: T. & T. Clark, 1992), p. 359.

5. 참조. W.D. Davies and D.C. Allison,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Matthew I (3 vols; ICC; Edinburgh: T. & T. Clark, 1988, 1991, 1997), p. 212.

6. H. Frankem lle, Jahwe­Bund und Kirche Christi: Studien zur Form­ und Traditionsgeshichte des “Evangeliums” nach Matthaus (Munster: Aschendorff, 2nd edn, 1984), p. 388.

7. 21:4~5에서 인용된 슥 9:9은 요 11:14~15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인용구의 형태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주목하라. 참조. Stanton, ‘Use’, p. 363.

8. Soares Prabhu, Formula Quotations, pp. 83~84; France, Evangelist, pp. 179~81; Stanton, ‘Use’, pp. 360~61; Davies and Allison, Matthew III, pp. 575~77; pace Strecker, Weg, pp. 50, 82~85; U. Luz, Matthew 1~7 (trans. W.C. Linss; Edinburgh: T. & T. Clark, 1990), pp. 159~61.

9.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아마도 2:18일 것이다. 이 인용구는 히브리어 본문을 약간 줄여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10. 이와 관련된 다양한 설명들에 대해서는 Gundry, Use, pp. 125~26; D.P. Senior, The Passion Narrative according to Matthew: a Redactional Study (BETL, 39; Leuven: Leuven University Press, 1975), pp. 367~69; France, Matthew, pp. 386~87; D.A. Hagner, Matthew 14~28 (WBC, 33b; Dallas: Word Books, 1995), pp. 813~15; Davies and Allison, Matthew III, pp. 568~69 등을 보라.

11. 이러한 상황에 대한 France, Matthew, pp. 88~89의 해석은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다.

12. 마태의 이런 인용 방식은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의 탈굼 기법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참조. France, Evangelsit, pp. 180~81.

13. Davies and Allison, Matthew III, pp. 576~77.

14. ‘성취 형식 인용구들’의 보다 구체적인 신학적 의미들에 대해서는 「그말씀」 2001년 3월호에 게재될 필자의 “마태복음 1~2장에 대한 본문 주해와 적용”을 보라.

15. 본 구절들에 대한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필자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서울: 이레서원, 2000), 제4장을 보라.

16. France, Jesus and the Old Testament (London: Tyndale Press, 1971), p. 40; idem, Matthew, p. 40.

17. 이 책의 논점에 대한 유용한 요약이 리치스, 「마태복음」(신약성경 가이드 1; 양용의 역; 서울: 이레서원, 2000), pp. 144~54에서 발견된다.

18. Allison, New Moses, ch. 2.

19. Allison, New Moses, pp. 140~65.

20. 참조. France, Evangelist, p. 187; 리치스, 「마태복음」, pp. 152~54.

21. 예수께서 성전을 대체하시는 것과 관련한 이 말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B. Gartner, The Temple and the Community in Qumran and the New Testament: A Comparative Study in the Temple Symbolism of the Qumran Texts and the New Testament (SNTSMS, 1;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5), p. 114를 보라.

22. 지금까지 살펴본 모형론들 이외에도 마태복음 안에는 몇몇 다른 의미심장한 모형론들이 있다: 이스라엘­예수 모형론(2:15; 4:1~11 등); 이스라엘­교회 모형론(8:11~12; 19:28 등). 이 모형론들에 대해서는 France, Evangelsit, pp. 207~13을 보라.

23. 예. McConnell, Law, pp. 6~58; R. Banks, Jesus and the Law in the Synoptic Tradition (SNTSMS, 28;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pp. 204~26; J.P. Meier, Law and History in Matthew’s Gospel: A Redactional Study of Mt. 5:17~48 (AnBib, 71;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6), pp. 41~124.

24. Meier, Law, pp. 41~124, 160~61; Banks, Jesus, pp. 203~26, 229~35; France, Matthew, pp. 113~17; 참조. Hagner, Matthew 1~13, p. 105.

25. R. H. Guelich, Sermon on the Mount (Waco: Word Books, 1982), p. 140.

26. Banks, Jesus, p. 226.

27. France, Evangelist, p. 196는 율법의 ‘권위’와 ‘기능’ 사이의 구분을 제안한다; 그리고 비록 율법이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오신 후에도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그 ‘권위’는 계속 유지하지만, 그러나 그 ‘기능’은 예수의 성취로 말미암아 변화되었다고 제안한다.

28. 본 구절을 이러한 과장법적 의미로 이해하는 학자들의 목록에 대해서는 Meier, Law, pp. 49~50 n. 27을 보라; 보다 최근의 학자들로는 France, Matthew, p. 115; Luz, Matthew 1~7, pp. 265~66.

29. 18d절(즉, 두 번째 e{w" 종속절)의 사건은 19절의 시점에서 이미 일어났다는 점을 주목하라.

30. Meier, Law, p. 99.

31. Meier, Law, pp. 109~10.

32. 하지만 마태의 모든 구약 사용이 그렇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24:20의 ‘안식일에도’의 삽입은 신학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