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복음서 연구

신약성경에 나타난 '복있는 사람들'

by 은총가득 2020. 8. 18.

신약성경에 나타난 '복있는 사람들'/정훈택 교수

 

1. 시작하는 말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개인 중심의 현세적, 물질적 축복관에 시달려왔다. 현세적 물질적 축복관이란 삶의 모든 해악적 요소 즉 허약, 병, 가난, 사고, 재난, 실패, 단명 등을 복이 아닌 상태 혹은 저주나 하나님의 벌을 받은 상태로, 이것을 극복하거나 없애는 것 혹은 그 반대개념들 즉 능력, 건강, 부, 성공, 명예, 장수 등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취급하는 것을 말한다.
이 축복관은 한 편으로는 한국교회의 부흥을 가져왔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교회의 타락을 가져왔다.

힘없고, 병들고, 가난하고, 크고 작은 사고로 고통을 당하고, 최선을 다해도 계속 실패와 좌절, 이런 저런 인생의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찌들린 삶에서의 해방이란 희망을 품고 교회를 찾았다. 교회는 예수님만 믿으면 삶의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다 물리칠 수 있다고 설교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복음의 능력과 병행하여 현실적, 물질적 축복관으로 괄목할 만한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현세적, 물질적 축복관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첫째, 사람들이 현실적, 물질적 복을 염원하고 교회가 이에 발맞추어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려 애쓰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기독교의 지복은 점점 그 위력이 약화되었다. 등한시되고 무시되었다. 성도들의 삶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둘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려 하는 교회의 모습은 한국의 전래 종교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현세적, 물질적 축복관에 도취되어 교회를 찾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목표를 절을 찾고 굿을 하는 사람들의 종교적 목표와 구별하는 것은 점점 어렵게 되었다. 행복이란 목표에 도달할 수만 있다면 교회도 좋고 절이나 무당, 복술도 좋다는 식의 사고가 어느 틈에 교회를 파고 들어와 있다.

신약성경으로 돌아가 보면, 복음의 능력에는 기독교 본연의 축복관이 결합되어 있다. 이 축복관은 기복적인 신앙과는 별 관계가 없다. 복음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돈도 재산도 약속하지 않는다. 강함이나 건강, 성공, 장수 등이 복음의 필수요건이 아니다. 온갖 종류의 인생의 고비와 고통은 삶의 법칙과 질서 속에 사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나타난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건강하고, 오래 살며, 살아가기에 충족한 돈과 부를 소유하고, 원하고 기도하는 대로 발전과 성공, 출세의 길을 걸으며, 어떤 병이나 사고 혹은 재난을 피해갈 수 있다면, 누가 교회로 오지 않겠는가? 성경이 말하는 복은 다 같이 걸어가는 인생살이 속에, 혹은 그 위에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세적, 물질적 축복관으로는 복음과 이에 얽혀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결코 바로 설명하지 못한다.

신약성경의 축복관은 인간의 삶의 질서와 자연의 법칙을 하나님께서 주셨고 지금도 보존하고 계신 것으로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부나 행복과 함께 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적 행복의 소유 유무는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과 별 관계가 없다. 신약성경의 축복관은 이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계에 복음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복음과 함께 누구나 이 복을 소유할 수 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신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모든 영적 복들을 의미한다.


2. 용어들

‘복’이라는 중국어에서 온 용어는 주로 삶의 현세적, 물질적, 신체적 조건들이 결핍되거나 부족하지 않음을 지시하는데 주로 사용되어왔다. 이 조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에 대한 설명은 시대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다소 다르지만 대개 의식주 생활과 관계되어 있다. 일생동안 걱정없이 먹고 입고 살 수 있으면 복받은 삶이다. 사고와 재난을 피하고 평온하고 안정되고 건강하게 온 가족이 화목하여 살아가면 다복한 삶이다. 장수도 복에 속한다. 경제적으로 사용되는 복개념은 충분한 것을 뜻하기보다는 차고 넘치는 것 즉 많을수록 좋음을 뜻한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우리는 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러워한다.

한국어의 ‘복’에 이런 어감이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 용어로 신약성경의 ‘복’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국어 자체가 이미 오해의 소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 의미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복’이란 단어보다는 차라리 ‘지극히 ’귀한 복’ 혹은 ‘최고의 복’을 뜻하는 ‘지복’(至福)이란 단어가 더 적당하다.

복이란 단어를 사용하되 이 용어를 지복으로 이해하여 성경적인 내용을 그 어감 혹은 그 의미로 채우지 않으면 신약성경의 축복관을 설명하거나 수용하기 어렵다. 성경의 축복관으로 그 내용을 채운다 하더라도 ‘복’이란 단어는 항상 현세적, 물질적, 신체적 양호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에서 ‘복’을 나타내는 단어는 주로 makari- 어군이다. 모두 55번 사용되었는데 명사 makarismo,j(복, 축복)가 세 번, 동사 makari,zw(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다)가 두 번, 형용사 maka,rioj(복받은, 복된)가 쉰 번 사용되었다. 물론 성경본문에는 기본형이 아니라 인칭과 수, 성 등에 따라 변화한 파생형이 나온다.

이 헬라어 단어는 한국어의 ‘복’처럼 현세적, 물질적, 신체적 행복을 표현하던 단어이다. 또 도덕적 결함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지시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헬라 철학자들은 그들의 사유의 결과 최상의 것으로 판단되었던 삶의 최고 요소를 이 단어를 사용하여 ‘복’이라고 불렀다. 사람은 누구나 또 언제라도 무언가 부족하거나 빠진 것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복된’ 상태는 신(神)의 고유성 내지 전유물이라고 보았다. 그런 신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지혜로운 사람, 건강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들을 ‘복된 사람’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위에 말한 헬라어의 일반적 용법을 따라 신약성경에 사용된 예는 하나도 없다. 신약성경은 헬라어 makari- 어군을 채용하기는 했지만 그 의미는 구약적 용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과 은총 아래 사는 것, 즉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유대인들은 복이라고 불렀다. 복에 대한 문자적 의미는 D. E. Garland, "Blessing and Woe", in: Dictionary of Jesus and the Gospels, J. B. Green etc.(ed.), IVP 1992, pp. 77-78과 G. Strecker, "Maka,rioj“, in: Exegetisches Wörterbuch zum Neuen Testament, Hrsg. H. Balz & G. Schneider, Stuttgart, Berlin, Köln and Meinz: Verlag W. Kohlhammer GmbH 1981, Band II. S. 925-932를 참고하라.

이 용어는 사람의 현세적, 물질적,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였다. 구약성경에 표현된 많은 현실적 행복의 요소들은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하나님 자신처럼 아니 그 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은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서 ‘복’(makarismo,j)은 구약성경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으면서도 신약시대의 특징인 복음 즉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생애와 사역, 그리고 그 결과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적 축복들 등의 요소들이 첨가된 것이다.

‘축복하다’, ‘복을 빌다’, ‘복을 받으라고 말하다’로 번역되는 단어 euvloge,w의 수동태 (분사)가 maka,rioj와 같은 ‘복받은’ 혹은 ‘복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원래 동사 ‘euvloge,w’(복을 빌다)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도록 말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러한 말이 이루어진 것을 표현하는 수동태는 단순히 그런 ‘축복의 말을 들은 사람’이라는 의미보다 더 깊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런 말이 이루어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 축복의 말을 하더라도 그렇게 되도록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축복관을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위의 두 종류의 단어가 사람에게 혹은 사람과 관련된 무엇에 사용된 경우만을 취급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하나님께 사용된 경우나 특정인에게 특정한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았다. 신약성경의 축복관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일반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3. 신약적 ‘복’인 하나님의 나라/하늘 나라

신약성경의 축복관이 한국교회에서 오래 강조해 온 현세, 물질적 축복관이나 기복적 신앙과 다르다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말씀하신 산상설교의 구복(마 5:3-12)과 평지설교의 사복(눅 6:20-22)만 읽어봐도 확연해진다. 산상설교의 구복에는 그런 현세, 물질적 조건들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평지설교의 사복에는 오히려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것이 ‘복’과 연결되어 있다.
산상설교의 팔복에서 - 마지막 복은 나중에 취급할 것이다 -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 “애통하는 자들”, “온유한 자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긍휼히 여기는 자들”, “마음이 청결한 자들”, “화평케 하는 자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들”을 복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평지설교의 사복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 “주린 자들”, 그리고 “우는 자들”을 복받은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초대교회 시절부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이러한 사람들의 조건, 내지 상태를 신약시대에 선포된 진정한 복으로 이해했고, 이것이 과연 인간의 어떤 것 혹은 어떤 상태를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인지를 밝히기 위하여 노력했다. 즉 심적 가난, 애통, 온유, 의에 주리고 목마름, 긍휼히 여김, 마음의 청결, 화평케 함,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 가난, 굶주림, 울음 자체를 복으로 보고 그 성격을 규명하는 것을 주석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질문을 낳는다. 첫째,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복들’을 유대교 내지 - 최근에 부상한 주제로는 - 불교의 가르침과 본질적으로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물론 이런 비교 연구는 팔복의 한 두 개와 유대교의 가르침 몇 가지, 혹은 불교의 교리 몇 가지 사이의 유사성에 근거한 것이다. 친기독교적 결론을 내리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 즉 ‘팔복’과 ‘사복’이 유대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좋은 상태’보다 질적으로 훨씬 높다는 점을 강조한다. 반기독교적인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유대교나 불교의 가르침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둘째, 산상설교의 구복과 평지설교의 사복 사이에 설명하기 어려운 공관복음서 문제가 발생한다. 산상설교에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복되다고 선언된 것에 비해 평지설교에는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린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이 복되다고 말해졌기 때문이다. 심령의 가난과 경제적 가난, 의에 굶주림과 육체적 굶주림 중 어느 것이 진정한 복이며 왜 이렇게 상이한 복이 선언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두 종류의 복을 종합하거나 서로 조화시켜 설명하거나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학자들은 이 문제를 설명하려 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은 아니었다. 최근의 유행은 산상설교의 영적인 복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형으로, 평지설교의 경제적, 사회적 복을 누가복음의 변형으로, 아니면 반대로 평지설교의 표현을 원형으로 산상설교의 표현을 마태복음의 변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어려운 질문은 사실은 엉뚱하게 작성된 것이다. 즉 팔복이나 사복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은 결과로 부상한 질문들이다. 예수님의 선언을 정확히 관찰하면 우리는 팔복과 사복의 강조점이 전혀 다른 곳에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복으로 규정하셨는지를 정확하게 지적할 수 있다.

팔복과 사복은 복되다고 선언된 사람들의 조건 내지 상태를 제시하는 문장과 그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 결합되어 있는 복합문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수님의 말씀의 강조점은 사람들의 어떤 조건 내지 상태를 나타내는 각 복의 첫 문장이 아니라, 복된 이유를 설명하는 각 복의 두 번째 문장에 놓여있다. 이 두 번째 문장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왜냐하면 ... 때문이다”(o[ti)로 앞문장과 결합되어 있다. 팔복 혹은 사복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런 형식이 된다: “... 사람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 때문이다.”

앞에서 복된 상태를 열거했던 것처럼 그렇게 선언된 이유를 열거해 본다;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마 5:3),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4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5절), “저희가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6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7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8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9절),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10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눅 6:20),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21절 상), “너희가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21절 하).

복된 이유를 설명하는 이 뒷 문장이 없다면 앞 문장의 복되다는 선언은 별 의미가 없다. 즉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을(마태복음) 복되다고 선언하신 이유는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을(누가복음) 복되다고 선언하신 이유도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복이 이런 형식으로 조건/상태와 그 이유의 형태로 선포되었다. 산상설교의 팔복과 평지설교의 사복의 강조점은 이렇게 각 복에 언급된 조건이나 상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 현재형 또는 미래형으로 표현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거나 일어날 것이라는데 있다.

우리의 분석이 옳다면 심령의 가난이 복이거나 복된 상태가 아니라,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복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위로를 받음”, “땅을 기업으로 받음”, “배부르게 됨”, “긍휼히 여김을 받음”,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아들로 불림”, “웃게 됨”,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임”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팔복과 평지설교의 사복에서 선언하신 신약시대의 진정한 복이다.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니면 언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가? 이런 일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 이런 일들이 지적된 사람들 각자에게 발생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복되다는 선언은 - 이런 결합 구조에서는 - 아무런 효력이 없다. 먼 미래에 즉 이 세상의 끝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예수님은 그 미래에 주어질 복 때문에 그들을 미리 복되다고 선언하신 셈이다.

언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은 초대교회 시절부터 거의 일치된 해석을 내놓았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일들은 모두 ‘하늘 나라’ 내지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팔복 중 첫 복과 마지막 복 그리고 사복의 첫 복 즉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가 그 힌트가 된다. 다른 모든 복도 천국이 그런 사람들에게 가져오는 결과들이라는 설명이다. 다른 힌트는 산상설교의 아홉 번째 복과 평지설교의 네 번째 복에서 얻을 수 있다. 이 복은 조건에서부터 예수님과 사람들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신약시대의 복은 예수님의 오심에 따라 사람들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들어가고 그 관계의 결과가 무엇인가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즉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는 그런 일은 예수님의 오심, 사역, 생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복들은 죽어서 저 하늘나라에서 얻게 되는 그런 복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문을 여신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시작되는 그런 복이었다.

특정한 자세 및 태도를 가졌거나 특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복되다고 하셨던 배후에는 이 복을 선포하신 설교자, 예수님에게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전제가 놓여 있다. 예수님의 복의 선포에서 우리는 천국 즉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신 천국의 왕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천국을 주시려고 계획하셨음을 알 수 있다. 왕이 그렇게 선언하셨다면 그것은 곧 왕의 의도가 그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왕이 그렇게 선언하셨다면 현실은 그렇게 진행될 것이 틀림없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이 설명은 팔복 내지 사복이 처음 선포되었던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분석해 본 것이다.

예수님의 눈에 복된 사람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것이 이유가 되어 예수님을 찾아왔고 천국의 왕으로 오신 바로 그 예수님 앞에서 위엄찬 설교를 듣고 있었던 그런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었다. 예수님은 자신 앞에 모여서 말씀을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조건/상태에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복된 사람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신약시대의 복이다. 천국이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일 수 밖에 없다. 천국의 왕이 이렇게 선언하셨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복을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라고, - 지금 우리의 시점에서는 -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통해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복의 선언은 누가 천국의 백성인지를 규정하신 천국의 복음인 것이다. 이 복을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왕 예수님을 함께 연상하는 것이 복된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이 복인지를 규명하는 열쇠가 된다.

애통하는 자는 누구나 자동적으로 복된 사람들로 취급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는 사람은 그저 불쌍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나 슬픔이 원인이 되어 예수님을 따랐고 산 위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던 그런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을 위로하실 천국의 왕 예수님께서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팔복을 말씀하시는 동안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에서 이미 그 위로를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위로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셈이다. 복은 울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질 천국의 위로이다.

팔복의 첫 두 복을 설명한 것처럼, 팔복과 사복에서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복은 천국의 시작과 함께 이 세상에서 죄인된 사람들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에 의해 배부름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고,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며 하나님에 의해 웃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산상설교와 평지설교는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천국의 복음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특수한 태도나 상태 즉 인간적 조건들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소유하게 될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와 그 결과들을 복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건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이미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 모든 복들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천국은 그 때 예수님에게서 시작하여 복음을 따라 지금까지 그 영토를 사람들에게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국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현세적, 물질적 복을 더 그리고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진정한 복의 의미를 놓치거나 그 가치를 등한시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을 보던 시선을 돌려 현실과 물질에 고정시키고 그것들을 더 귀중히 여기게 될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점을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관계되어 선포된 복을 통하여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4. 예수님을 만남

천국과 예수님의 관련성으로부터 우리는 천국이 신약적 ‘복’이라는 위의 결론을 예수님 혹은 예수님을 만남이 신약적 복이라는 다른 결론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천국 즉 하나님의 영적 통치는 예수님의 인간되심, 사역을 통하여 이 땅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가능한 추론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몇 구절에서 명백하게 선언된 복이다.

예수님은 천국의 왕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피조물인 사람 누구에게나 최고의 복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고 그렇게 하나님 자신을 만나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육체로 오신 성자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그의 음성을 귀로 듣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무한한 영광이요 복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의 탄생 전 사람들은 누구도 이 복을 경험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승천 후 사람들도 이 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이 복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은 예수님의 탄생으로부터 승천까지의 짧은 기간뿐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이 이 특별한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난 모두가 복받은 사람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예수님을 만났으나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은 사람들은 - 그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아들과 접촉했지만 - 그냥 한 사람 인간을 만난 것 이상의 다른 어떤 의미도 없었다. 반면에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주님으로 믿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만난 것 자체부터 예수님과 함께 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아들을 만난 축복으로 계산된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제자들의 눈과 귀를 복되다고 선언하신 적이 있었다: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눅 10:23). 눈과 귀를 복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제자들의 눈이 예수님과 그 하시는 일들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의 귀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은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 천국의 왕으로서 행하시고 말씀하시는 천국의 비밀이었다. 제자들의 눈과 귀가 복되다는 사실은 전 시대의 선지자와 의인들이 예언하며 보고 듣기를 원했지만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었다는 사실과 비교되며(마 13:17) 더욱 강조되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 전체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출현을 예고했고 예수님에게 세례를 줌으로 예수님의 희생적 삶을 준비한 세례 요한이 감옥에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정말 오신다고 한 바로 그 메시야인지를 여쭈었을 때,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세상의 구속주이심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확인해 주시면서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이다”고 선언하셨다(마 11:6//눅 7:23).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들이 기대한 메시야의 사역과는 다소 다르게 보인다 하더라도 계속 예수님을 그 메시야로 믿어야 한다는 충고였다. 동시에 예수님이 하시는 일, 하시는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혼란을 일으키거나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말씀이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자체가 복이었다. 그것은 세상의 역사 한 중간에 하나님의 아들이 잠시 오셔서 친히 행하시고 친히 말씀하신 것이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셨던 하나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 동안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에게 국한된 것이다.


5. 예수님을 앎/믿음/그 결과

신약성경의 축복관이 예수님의 출현, 사역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이 세상에 시작되는 하나님의 영적 통치(= 천국)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동안 이 복을 사람들에게 실어나르는 도구로서의 믿음이 이미 신약적 복의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었다. 이제 예수님을 앎/믿음/ 그리고 그 결과가 복으로 선언되는 구절들을 통해 이 점을 좀 더 확실하게 관찰해 보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베드로가 복받은 사람이라고 선언하신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다”(마 16:18). 예수님께서 그를 복받은 사람이라고 선언하신 이유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베드로가 알도록 하나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면 베드로는 자신의 지혜나 지식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고 믿음을 고백하게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을 베드로에게 심어 주셨다. 이것이 베드로가 하나님께 받은 복이었다.

이 구절을 근거로 그리고 앞 항목에서 다룬 말씀들을 근거로 삼아 우리는 베드로에게 하신 선언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믿었던 모든 제자들에게 확대, 적용할 수 있다. 즉 당시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모두 복받은 사람들이다. 그런 지식과 믿음을 심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심어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들이 소원하는 현세적, 물질적, 경제적 행복과는 먼 거리에 놓여 있다.

믿음을 복이라고 부르시고, 믿는 사람을 복받은 사람이라고 규정하신 것은 베드로나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보고 들었던 제자들에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도마가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도록 허락하신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축복의 말씀을 덧붙이셨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요 20:30). 이것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시지 않을 미래의 상황을 미리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들도 복받은 사람이지만 보지 못하고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모두 복받은 사람들이다!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복받은 사람이라고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베드로의 경우, 그리고 위에서 관찰한 말씀들, 신약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근거로 삼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을 사람들 혹은 - 지금의 시점에서는 - 예수님을 만나거나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보다 더 튼 축복이 어디 있는가? 무엇을 더 원하며 무엇을 더 찾으려 하는가?

예수님과의 관계, 예수님을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복받은 사람이라고 선언하신 말씀이 있다. 산상설교의 팔복에 이어 나오는 아홉 번째 복과 평지설교의 네 번째 복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삯이 크기 때문이다”(마 5:11);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삯이 크기 때문이다”(눅 6:22). 복되다고 선언하신 이유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큰 삯(misqo,j)을 받을 것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고난받는 사람들의 복이다.

비슷한 말씀이 베드로전서 4장 14절에도 나온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시기 때문이다.” 복되다고 선언된 이유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욕을 먹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함께 하시는 것에 있다. 즉 성령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 그들의 복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음의 결과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인이라고 선언하심’ 혹은 ‘의인으로 인정하심’ 곧 ‘칭의’를 하나님의 복으로 말하는 구절이 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바울 사도의 이 글은 독특하게 복된 이유를 설명하는 부문장이 없다. 따라서 왜 믿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선언했는지 그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일한 것이 없이 의로 여기심을 받는 것, 불법을 용서받는 것, 죄를 가려 주시고 죄를 인정치 않으시는 것 자체를 믿는 자들이 받는 복으로 지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이어지는 9절 이하에서 이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말하기 위하여 할례, 무할례를 따지며 믿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 따라서 한국인들도 모두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임을 증명하고 있다. 죄를 용서받고 의인으로 인정되는 것이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는 축복이다. 이 축복을 사람들에게 실어 나르는 믿음도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축복, 믿음의 귀중함을 알았기 때문에 이 믿음을 굳게 지킬 것을 권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하나님의 축복인 믿음, 그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인 용서와 칭의를 계시록 22장 14절은 비유적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으로 확인해 준다: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은 사람들이 영생과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다.

이상의 관찰에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축복관은 현세적, 물질적,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영적인 것임을 배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사역, 하나님의 영적 통치의 시작, 믿음, 믿음의 결과들 즉 하늘의 상, 죄용서, 의롭다고 하심 등이 신약성경이 복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 모두는 복음이라는 단어 안에 포함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즉 교회가 받는 하나님의 축복을 이런 의미에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불렀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셨다”(엡 1:3).


6.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지킬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늘의 복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들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을 ‘복받은 사람들’로 선언하는 성경구절도 있다.

누가복음 11장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지혜와 가르침에 감동을 받고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습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28절)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의 눈에는 예수님을 이 세상에 나게 한 마리아보다도 그 예수님의 입을 통해 나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듣는 사람들 그리고 그 뜻을 지키는 사람들이 더 복된 사람들이다! 신약시대의 신자들의 믿음과 순종의 삶 전체가 복된 것으로 규정되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제자들이 서로 발을 씻겨주는 봉사의 삶을 살아갈 것을 당부하시면서,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너희가 복이 있다”(요 13:17)고 선언하셨다. 서로 섬기고 위해 주는 삶은 주인이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이다. 권세를 쥐고 명예와 능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과 같이 낮아져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복받은 사람인 것이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복이다.

사도 요한에게 계시록을 기록하도록 하시며 주님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 그리고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하셨다(계 1:3). 비슷한 말씀을 계시가 마칠 때 한 번 더 하셨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22:7). 복된 이유는 계시된 말씀들이 이루어질 때가 가깝기 때문이다. 혹은 계시를 주신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 배후에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승리가 있음을 알려주신 것, 그리고 그런 일이 가까운 시기 안에 실제로 일어날 것을 알려주신 것이 하나님의 복이다. 따라서 읽고 듣는 사람들, 특히 어떠한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모든 희망을 하나님에게 두는 사람들이 복받은 사람들이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15).

야고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곧 잊어버리는 사람을 비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약 1:25). 야고보의 표현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자체를 혹은 지키는 것 안에 하나님의 복이 있다는 것이다. 즉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복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복받은 사람들이다.

야고보는 믿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시험과 관계하여 복을 선언한 적도 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약 1:12). 시험을 견디는 사람이 복된 이유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됨에 있다. 그들이 받는 복이란 하나님의 인정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이다.

신자들의 삶에 자주 등장하는 고난과 복을 연결해 놓은 구절이 베드로전서에 들어 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벧전 3:14). 실수를 하고 죄를 지음으로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잘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이 닥쳐 온다면 그런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 왜 복되다고 선언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앞구절을 참고하면 주님의 눈이 의인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의로 인한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복이다.

다른 한 종류의 복의 선언이 삶과 관계하여 아직 남아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때 벗이나 부자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과 소경을 청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런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하셨다(눅 14:14). 복되다고 하신 이유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것을 사람에게 주었는데 하나님의 것으로 되갚음을 받는 것이 이런 사람들의 복이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이 사도행전에 하나 포함되어 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여러 가지를 당부하는 가운데 열심히 일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도록 권하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행 20:35). 예수님의 눈에 비친 복받은 사람들은 받아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일하여 벌어들인 것을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다. 나누어 주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복인 것이다.

이상의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신약성경이 말하는 복이란 현세에 물질적, 육체적, 세상적 행복을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삶 자체이다.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사람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충성스럽게 자신의 명령을 따라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며 믿는 사람들을 돌볼 것을 부탁하시면서 복을 선언하신 적이 있다.
마지막 날에 관한 설교에서 예수님은 충성된 종의 비유를 들어 자신이 다시 오기까지 자신의 제자들이 바르게 깨어 예비할 것을 명령하셨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되어 주인의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에 비유하셨다. 주님이 올 때에 그렇게 하고 있는 종을 발견하면 “그 종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같은 비유가 누가복음 12장 38절에도 나온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비유 속의 “종이 복이 있다”고 세 번 선언하셨다(37, 38, 43절).
이 말씀에서도 충성스러운 종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제자들이 받은 복으로 계산된다. 아니면 종의 충성스러운 행동에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는 것”이 복에 대한 비유어이다.


7. 종말론적인 복

신약성경에는 믿는 사람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복으로 말해지는가 하면, 성도들의 죽음, 죽음 이후의 영원한 복에 관한 말씀도 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함께 음식을 잡수신 적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식사 중에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자 음식을 먹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다”고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눅 14:15). 이 의견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잔치에 참예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복받은 사람들임을 확인해 준다.

계시록 19장 9절에 비슷한 말씀이 들어 있다. 천사가 요한 사도에게 말했다: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 뿐만 아니라 “주안에서 죽는 자들도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계 14:13). 그들이 복된 이유는 믿음을 지킴으로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쉬며, 그들이 행한 일대로 하나님께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믿는 사람들은 죽음도 그 이후의 영광스러운 영생도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 복된 소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 소망이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는 것이다(딛 2;13). 신자들은 축복의 소망을 안고 이 세상을 살며 충성을 다한다. 죽음 이후에 첫째 부활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복있고 거룩하다”(계 20:6)고 선언하셨다.


7. 요약

신약성경이 말하는 축복은 현세적, 물질적, 경제적인 성격의 복이 아니라 영적인 성질의 것이다. 이 복은 예수님의 오심과 사역으로 이 세상에 나타났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들을 부르셔서 믿음을 주시고 믿는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신 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복이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생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복된 삶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늘의 모든 영적 복들을 누리는 것이 신자들의 삶이다. 뿐만 아니라 죽음과 영생도 모두 하나님의 복이다.

예수님의 탄생, 사역과 함께 이 신약적 의미의 복,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이미 시작되었다. 복음을 듣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복이다. 복음을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복이다. 믿는 사람들은 이미 신약적 복을 모두 소유한 복된 사람들이며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복을 계속 누리는 사람들이며 죽어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될 복된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이 복은 사람들이 좋아하며 행복이라고 부른 그 모든 복보다 더 귀하고 거룩한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곧 복된 사람들의 모임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내어 보일 수 있는 진정한 복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다스리심을 경험하고 하늘의 복을 누리는 바로 이런 복이어야 한다.

[출처] 목회와 신학 126(1999년 12월), 92-104


'4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방박사(마2:1-12)에 대한 성경적 재조명  (0) 2020.09.02
무화과 나무의 비유  (0) 2020.08.24
마태복음과 구약  (0) 2020.08.18
도표로 본 예수님의 생애  (0) 2020.08.18
마태복음의 제자도  (0) 2020.0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