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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의 제자도

by 은총가득 2020. 8. 18.

 

 

마태복음의 제자도 / 김경진

 

1. 들어가는 말

제자들은 복음서에 있어서 예수님 다음 가는 인물들로서, 예수님 자신에 의해 선택되어 예수님의 사역의 보조자와 목격자이자 동시에 그 분의 사역을 계승하여 확장 및 발전시켜 나갔던 후계자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제자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 사역의 배경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 사역의 보조자이자 목격자로서 활동한 이 제자들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묘사는 각기 다르다.

물론 세 복음서 기자들의 제자들 묘사에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경우에 있어서 또한 다른 점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이 다른 점들 가운데 실제적으로 서로 조화시키기에 어려운 부분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각 복음서 기자들이, 스트레커(Georg Strecker)의 주장대로 단순히 제자들을 역사화시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자신의 공동체의 상황에 적합하게 제자들에 관한 전승 자료를 자신의 신학적 의도와 목적에 따라 각색하여 기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제자들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견해를 이해할 필요가 있을 줄로 생각된다.

제자들에 대한 이해는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스트레커가 주장하는대로 역사화(historicising)적 경향인데, 이 견해를 따르면 복음서 기자 마태는 예수님 이야기를 역사화하였으며, 따라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반복될 수 없는 거룩한 과거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운동은 역사적 유물로서, 마태 공동체의 지속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경향은 제자들이 마태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transparency). 즉 마태의 제자 묘사에서 우리는 마태 공동체의 생활, 상황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의 곤경(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제자는 교회론적 용어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마태 공동체의 예수님 추종자들을 위한 칭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두 견해 중 나는 후자의 견해에 동조한다. 즉 마태는 마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잇슈와 문제를 염두에 두고 기록한 까닭에, 마태의 제자 묘사에서 우리는 마태 공동체의 상황과 배경이 복음서의 내용과 구조에 반영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 전제를 갖고 나는 이 소논문에서 마태의 제자 묘사에서 발견되는 마태 제자도의 특징을 구명(究明)하고자 한다. 아울러 왜 마태가 이런 제자도의 특징을 강조하게 되었는지를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과 연결하여 그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2. 제자들에 대한 마태의 묘사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 볼 때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마가가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상대적인 견지에서 볼 때 다른 복음서에서보다는 보다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누가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신하여 도망한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은 이에 대한 가장 큰 증거 중 하나로 지적될 수 있겠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비교해 볼 때,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일방적으로 긍정적이지도 않고 또한 일방적으로 부정적이지도 않은, 양면적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마태복음의 제자상(弟子像)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마태가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에서의 부정적 제자상을 어떻게 완화 내지 약화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여전히 부정적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지를 또한 검토하겠으며, 마지막으로 그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지 않으면서 양면적 성격을 띠게 된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제자들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

마태는 일반적으로 부정적으로 표현된 마가의 제자도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아래에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이런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몇 가지 대표적 예를 들어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마가복음 8장 14절부터 21절까지에는 '바리새인의 누룩'에 대한 주님과 제자들간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특히 17절은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즉 세 번에 걸쳐 제자들의 몰이해를 나무라고 계신다. 그리고 막8.21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는 것을 보게 된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한 마디로 일방적인 부정적 묘사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병행되는 마태복음의 기사를 보게 되면, 먼저 막8.17에 해당되는 구절에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16.8-9a)라고 기록함으로써 상당히 그 비난의 정도를 약화시키고 있고, 또한 막8.21에 해당하는 마16.12에서는 마가복음에서와는 달리 제자들이 예수님의 교육을 통해 비로소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이러한 마태와 마가의 제자들 묘사의 차이를 감안(勘案)할 때 우리는 마가의 제자들 묘사가 얼마나 부정적인지 발견하게 되며, 동시에 마태가 이러한 마가의 부정적 이미지를 얼마나 완화시키고 있음을 아울러 발견하게 된다.

둘째, 마가복음 10.35-45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城)에 들어가시기 전 제자들 중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님께 나아와, (그들 생각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면 얻게 될 영광의 일부를 함께 나눠갖고 싶다는 그들의 세속적 소원을 아뢴 장면이 나온다.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른다면, 이제까지 예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예루살렘 입성 후 맞게 될 자신의 수난적 운명을 교육시켰건만, 제자들은 여전히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입성 바로 직전까지 여전히 그들의 몰이해(沒理解)와 세속적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마20.20-29) 이런 인간적 욕망을 요청하는 장본인이 제자들이 아니라 그들의 어미로 바뀌어지면서 아예 두 형제 제자들의 이름조차 생략되어 나타나고 있다(20절: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 따라서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님의 가르침을 몰이해한 부정적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 마태의 이런 변화는 제자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또 다른 증거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세째,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언과 관련하여, 막10.32에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놀라고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반해, 마20.17에서는 제자들의 그런 부정적 모습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음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네째, 막9.33-37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실례로 들면서 겸손의 교훈을 가르치시고 계시는데, 이는 이런 교훈이 있기 이전에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는 다툼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었다(33-34절). 그런데 문제는 이 다툼이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언 바로 다음에 나타나고 있는 데에 있다. 즉 예수님의 거듭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난당할 예수님의 운명이 곧 자신들의 운명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는 어리석고 욕심많은 모습으로 나쁘게 그려지고 있다. 이에 반하여, 마태에서는 겸손에 관한 예수님의 교훈이 소개되고는 있지만, 제자들 사이의 순위(順位) 다툼이 그 배경으로 소개되고 있지는 않다(마18.1-5). 즉 무지한 제자들을 교정(矯正)하는 차원에서 비롯된 말씀이 아닌 것이다. 이 역시 제자들에 대한 긍정적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2) 제자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그러면 이제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마가복음에서처럼 여전히 부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대목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마21.21은 예수님의 저주로 메말라버린 무화과 나무를 바라보면서 제자들이 주께 던진 질문에 대한 답변인데, 제자들의 믿음의 부족을 꾸짖는 것이 마가복음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막11.23).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열 한 제자들 다시 만나셨을 때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었다(마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이런 제자들의 부정적 이미지는 막16.14과 눅24.36-43에서도 역시 발견된다. 그리고 마가복음에서처럼 마태복음에서도 제자들은 로마 군병에게 무고(無辜)하게 체포되신 스승을 저버리고 모두 도망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막14.50//마26.56). 이와 함께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네 번에 걸쳐서 그들의 적은 믿음으로인해 주님으로부터 책망받고 있다(8.26; 14.31; 16.8; 17.20). 또한 주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굳어있었다(마13.2-3, 10-17, 34-36).

이런 일련의 구절들을 종합해 볼 때,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비록 마가복음에서보다는 나을는지 모르겠지만, 역시 그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3) 양면적 이미지의 제자상(弟子像)

이제까지 우리는 위에서 마태가 소개하고 있는 제자들에 대한 긍정적/부정적 이미지에 관한 내용들을 살펴보았다. 이런 검토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은, 상대적으로 볼 때 마태는 마가보다 제자들을 보다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아울러 부정적 이미지를 완전히 제거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즉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모습으로 제자들은 마태복음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양면적 성격이 마태의 제자 묘사의 특징이다.

(가) 마태의 제자 묘사의 특징인 이러한 양면적 성격에 대한 전형적인 경우를 우리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에서 발견하게 된다(마16.13-28).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대변자 역할을 하고 있는 베드로에 대하여 그가 한 신앙고백에 대하여는 전혀 칭찬이 없고, 오히려 장차 있을 수난을 예언하신 예수님을 책망한 까닭에 도리어 책망을 받는 장면만이 기록되어 있다(막8.27-38).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 대하여 칭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수난을 예언하신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책망도 없음으로하여, 베드로에 대한 비난도 역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에서 베드로에 대한 묘사는, 비록 구체적인 칭찬이 없기는 하지만, 그러나 책망을 받고 있지 않은 까닭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눅9.18-27).

이에 비해, 마태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예수께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하는 고백을 함으로써,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라고 하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각별한 칭찬을 듣게 됨을 보게 된다. 이런 칭찬만을 참작(參酌)하게 되면, 베드로가 대표하고 있는 제자들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베드로는 칭찬만을 듣고 있지 않다. 마16.21에서 예수께서 장차 다가올 메시야로서의 자신의 수난(受難)을 선포하자 마가복음에서처럼 베드로는 예수님을 책망하게 된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절). 베드로의 이 책망의 말은 오직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베드로는, 마가복음에서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하는 예수님의 준엄한 책망을 받게 된다(23절).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칭찬을 듣기도 하지만, 아울러, 베드로에 대한 책망이 생략되어 있는 누가복음과는 달리, 제자에 대해 부정적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마가복음에서처럼 책망도 역시 듣게 됨을 보게 된다. 결론적으로, 마태복음에서의 베드로에 대한 묘사는 마가복음에서처럼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누가복음에서처럼 긍정적이지도 않은, 즉 양면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의 베드로의 신앙고백 사건은 마태의 제자 묘사의 이런 양면적 성격을 가리키는 여러 특징 중 대표적 예인 것이다.

(나) 제자들에 대한 마태의 양면적 묘사에 대한 또다른 증거를 우리는 마태의 제자와 관련된 어휘 사용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마태가 제자들에 대하여 사용하고 있는 단어 중 독특한 것은 인데, 이는 우리말로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번역되어 있다(마6.30; 8.26; 14.31; 16.8).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주목을 끄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마태가 제자들을 결코 '불신자'()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마태는 그 복음서에서 (13.58: "믿지 않음")와 (17.17: "믿음 없음")를 각기 한 번씩 사용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한 번도 이 단어를 제자들에 대하여는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특징을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 마태복음 17장 14절 이하에서 소개되고 있는 [간질병들린 소년 치유 사건]이다. 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향하여는 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에, 20절에서 귀신을 좇아내지 못한 제자들을 나무라시면서는 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의 이런 단어 사용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마태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믿음이 전혀 없는 무리들과 구별되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부요하여 칭찬을 받은 백부장(마8.10)이나 가나안 여자(15.28)와도 구별되는 그런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태에게 있어서 제자들은 믿음이 아주 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전혀 없지도 않은, 그저 믿음이 적은 자들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이 양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인 것이다. 요컨대,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믿음이 부요하여 칭찬만을 받는 긍정적 모습으로만 그려지지도 않고, 아울러 믿음이 전혀 없음으로하여 책망만을 받는 부정적 모습으로만 그려지지도 않는 것이다. 때로는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책망을 받기도 하는, 보통의 성도들을 대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의 제자들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의 제자들은 [기피/억제 모델](a deterrent model)로 표현할 수 있겠고,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의 제자들은 [이상적 모델](a ideal model)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양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마태복음에서의 제자들은 [대표적 모델](a representative model)로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고 사는 보통의 평범한 성도들을 대변하는 본보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위의 사실에 보충하여, 마태가 소개하고 있는 대표적 모델로서의 제자상(像)을 지지하는 또다른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제자의 범위]에 관한 문제이다.

먼저 부정적 모델로서 소개되고 있는 마가복음의 제자들은 대체로 열두 사도와 거의 동일시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한 증거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열두 제자들에게는 주어졌으나, 외인(外人)에게는 비유로 주어졌다'고 하는 표현을 들 수 있다(막4.10-11). 즉 열두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제한적 그룹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밖에도 마가복음에는 제자들과 주님 간의 사적(私的)인 모임이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더욱 많이 기록되어 있다(4.10; 4.34; 7.17; 9.28; 10.10; 13.3). 이것 역시 제자들이 제한적 무리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가복음의 경우는, 그러나, 마가복음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일단 눅6.17에 의하면, 제자들은 허다한 무리로 소개되고 있다(). 이 허다한 제자들은 확실히 열두 사도들과는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는데(cf. 눅6.13), 이는 이 허다한 제자들로부터 사도들이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눅10.2에는 70인 제자들의 파송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들을 가리켜 제자란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에게 준 명령을(10.4) 예수님의 사역 말미에 사도들에게 하신 교훈과(22.35) 비교해 보게 되면, 이들 칠십 인 역시 제자라 부를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이유는 눅22.35의 말씀은 열두 사도에게 주신 말씀인데, 거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전대, 주머니, 신' 등은 열두 사도를 파송할 때 주신 명령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9.3; 지팡이, 주머니, 양식, 돈, 두 벌 옷) 바로 칠십 인들을 파송할 때 주신 명령 가운데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이제 제자들은 숫적으로 이미 칠십 인을 넘어서고 있다. 눅19.37에도 "제자들의 온 무리"()란 표현이 나오는데, 문맥상 역시 적지 않은 숫자임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의 세 대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누가에게 있어서 제자란 마가에서럼 제한된 소수의 무리(즉, 거의 열 두 사도)가 아니라, 공개적인 다수의 무리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유인즉, 사도행전에서는 이제 제자란 바로 '교회의 회중(會衆)'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행2.41; 6.1). 아울러 사도행전에서는 제자와 사도 사이의 구분이 이제 확립된 것처럼 보인다(2.41-42; 6.1-2). 이러한 사도행전에서의 '제자'란 단어의 사용 용례를 감안할 때, 누가-행전 두 권의 책의 저자인 누가가 전편과 후편에서 다른 의미로 '제자'란 단어를 사용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할 때 뒤이어 기록할 사도행전을 염두에 둔 채 이미 제자와 사도를 구분하여 사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제까지 드러난 증거에 따르면, 제자의 범위에 관한 한, 마가복음은 소수, 누가복음은 다수를 가리키고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마태복음은 또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중간적 위치에 놓여 있음을 보게 된다. 먼저 마태복음에는 누가복음에서처럼 "허다한 제자의 무리"란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울러 칠십 인 제자 파송 사건도 역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에서처럼 제자를 적은 무리로 간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듯하나, 이런 가능성은 마8.21과 27.57에서 깨어지게 된다. 마8.21에서 열두 제자의 그룹 밖의 사람에게도, 즉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여늬 추종자에게도 제자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고, 마27.57에서는, 비록 동사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에게도 제자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 두 경우를 참작할 때 얻어지는 결론은,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복음에서처럼 허다한 무리의 제자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열 두 사도에게만 제한되는 소수의 그룹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태복음의 제자상을 보통의 평범한 신자들, 즉 교회를 가리키는 대표적 모델로 간주함에 커다란 무리가 따르지 않는 것이다.


3. 마태복음의 제자도의 특징
마가복음의 제자도의 특징은 영웅적 도덕을 강조하는 위기(危機)의 제자도(discipleship of crisis; heroic discipliship)이다. 즉 핍박에 노출된 상황 아래에서 죽기까지 십자가를 지신 스승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십자가를 질 각오로 주님의 뒤를 좇아가는 모습이 바림직한 제자상으로 소개되고 있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 종말(終末)이 연기된 상황 아래에서 일상의 삶이 중요하게 부각됨으로하여 그리스도인의 윤리가 제자도의 특징으로 소개되고 있다(ethical discipleship). 이러한 누가복음의 사회적 상황은 가난한 자들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도우라는 구제에 대한 누가의 남다른 강조와 연결되면서 윤리적 제자도의 특징을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제자도의 특징으로 마태복음에서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 것은 [배움]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우리는 먼저 마태의 어휘 사용을 지적할 수 있겠다. 마태복음에서 우리는 '배우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자주 접하게 된다(마9.13; 11.29; 24.32). 물론 이 단어는 마가복음에서도 오직 한 번 사용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단어를 마태의 어휘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배운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제자삼으라'()를 오직 마태만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13.52; 27.57; 28.19).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스승이신 주님으로부터 거듭하여 배우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배우라는 명령만으로 끝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배우라는 명령에 부응하여, 마태복음에서는 주님이 가르치신 결과로 제자들이 '깨달았다'()는 반응이 또한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마13.51; 16.12; 17.13)

그런데 제자들이 주님의 교훈을 듣고 깨달았다는 이 대목은 다른 복음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은, 그야말로 마태만의 독점적 표현이다.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 교훈을 깨달았다는 이 부분에서 마태복음의 제자들은 마가복음의 부정적 이미지(몰이해)를 탈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주님의 교육을 받으면서 종종 이해에 실패하기도 하지만(15.16; 16.9), 마침내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와 관련하여 놓쳐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대목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파송 장면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제자들은 3장에서 선택되어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다가 6장에서 파송되어 나갔다가 전도 사역을 마친 후 다시 돌아와 사역보고를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도 제자들은 6장에서 선택되어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다가 9장에서 파송되어 나갔다가 전도 사역을 마친 후 다시 돌아와 사역보고를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10장 1-4절에서 선택되어, 바로 이어서 5절부터 파송을 위한 설교를 듣게 된다. 거의 한 장에 걸친 이 유명한 선교 파송 설교는 마가복음 13장에 나오는 종말론적 설교의 내용도 함께 담고 있다(마10.17-23; 막13.9-13). 결과적으로, 이 파송설교는 역사적 사실을 포함하기는 하되, 이미 마태 당대의 유랑 설교가들을 또한 염두에 둔 채 기록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1장 1절에 의하면 제자들의 전도 파송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이것은 마가, 누가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마태의 해석이다. 어찌하여 마태는 제자 파송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아마도 마28.19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즉 마태복음의 제자들은 28.19-20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파송 명령을 받을 때까지는 아직 파송되어서는 안 될, 그 때까지는 계속 배움으로 준비를 갖추어야 할 사람들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마태의 제자도의 특징이 나타난다; 제자란 파송받기 전까지 부단히 배워서 제대로 준비를 갖추어야 할 존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배움으로 준비하지 않은 이들은 자신의 주제를 넘어선 교만한 자들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주님의 사역에 적합치 못하므로 쓰임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마태의 교육적 제자도의 이런 특징을 돋보이게 하는 또다른 특징을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이 지리적으로 많이 제한되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길의 복음서라고 불리우는 마가복음과 비교해 볼 때,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곳 저곳을 순회하며 여행다니기 보다는 한 지역에 정착하여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특징의 중거 가운데 몇몇을 살펴보면, 마4.25에서 예수님은, 막7.31과는 달리, 데가볼리 지역을 통과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고, 데가볼리 지경으로부터 나아온 허다한 무리들을 만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시돈과 두로 쪽으로 올라가셨을 때, 단순히 그 경계를 통과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 이유는 가나안 여자가 "그 지경에서 나왔다"고 마태가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마15.22). 또한 마태복음에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하여 많은 사건들이 전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까닭에(4.13; 8.5; 11.23; 17.24) 일부 학자들은 마4.13과 9.1을 근거로하여 예수님이 이 가버나움에 자신의 집을 가졌던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킹스베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의 이런 특징을 고려하여 마태는 "인자가 머리둘 곳이 없도다"는 말씀의 의미를 상당히 무력화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마태복음의 제자들은 순회하는 전도자의 모습보다는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교육받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이 가르침과 교육이 마태복음의 제자 사역의 주요한 내용이 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대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비롯하여 다섯 편의 설교를 베푸시면서 무지한 제자들을 이해에 이르도록 만드시는 권위있고 효과적인 교사로서 묘사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바로 이런 예수님으로부터 교육받아 그들 엮시 권위있는 교사가 되도록 부름받고 있는 것이다(28.19-20). 이런 맥락에서 루츠는, 마태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생전에 가르치신 모든 것을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 즉 ear-witness라고 명명하였는데, 이것은 배움을 강조하는 마태의 제자도의 특징을 요약적으로 기술한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제자의 가르침의 사역은 예수님의 가르침 사역을 계승하며 영속화하는 것이다.


4. 마태복음의 사회적 배경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에서는 이 배움 및 교육이 제자도의 특성으로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을까? 이 문제는 마태공동체의 사회적 상황(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태교회는 원래는 유대-헬라적 배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즉 유대인이 중심이 되되 그 장소는 헬라 문화권 내의 한 도시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우선 마태복음에서 도덕적 율법의 열심있는 준수가 요구되고 있으며, 또한 구속사적 계획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부동(不動)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교회 공동체 내에 이방인이 점증하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보편적 세계관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두가지 위험이 발발될 가능성이 있다.

첫째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인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도덕적 율법의 요구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거절하는 반율법주의(反律法主義; antinomianism)가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cf. 롬6.1이하; 롬3.8, 31). 이런 반율법주의가 마태공동체 내에 발생하였다는 증거는 마태가 특별히 다른 복음서기자들보다도 의(義)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서 찾을 수 있겠다(5.20; 6.33; 13.43, 49; 25.31-46).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 우리는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배경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마태의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로의 유입(流入)을 통하여 율법의 실천을 경시하는 도덕적 해이(解弛)가 들어서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바울의 교훈을 잘못 이해한 무리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시대에 더이상 율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이와 함께 윤리적 무관심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응하여 마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음을 지적하면서 엄격한 윤리의 준수를 강조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제자들의 목표는 온전(perfection; )에 이르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5.48).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에 있어서의 의는 바울신학적 의미, 즉 구원의 계획 속에서의 칭의적 개념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의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의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cf. 5.20; 23.3). 요컨대 이 의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신 윤리의 핵심적인 목적인 것이다.

둘째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점증하게 되면서, 이들은 아예 교회의 유대적 잔재를 제거코자 하였으며, 이와함께 또한 교회의 역사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마르시온 이단의 경우가 한 실례이다). 이는 바로 영지주의가 옹호한 정책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마태는 우선은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옴을 분명히 못박으며 이와 관련된 특정적 경향, 즉 유대인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는 기사들을 소개하였다(10.5, 6, 23; 15.24). 그러나 동시에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 보이는 보편주의 역시 마태복음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8.11; 21.43; 24.14; 26.13; 28.18-20). 요컨대 이 대립적 강조점이 균형을 이루며 소개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태는 그 교회 내의 대립적인 두 부류의 구성원들, 즉 본래부터의 멤버들이었던 유대인들과 후에 교회로 유입된 이방인들 모두를 포용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균형있게 소개함으로써, 다른 복음서에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는, 비록 유대인들이 숫적으로 우세하기는 하나, 이방인들 엮시 결코 무시될 수 없을만큼 존재하였던 곳이 바로 마태공동체였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상황 하에서 왜 마태는 배움을 제자들이 따라야 할 마땅한 도리로서 제시하려 하였을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이유는 정체성 확립의 이유이다.

먼저 유대인들에게는 오랫동안 유대교에 몸담고 있다가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회당으로부터 분리되었기에 아마도 이에 따른 정체성(신분) 문제가 상당히 큰 잇슈였을 것이다. 한편 이방인들에게도 오랫동안 이교도로 있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종교적, 문화적 변화에 따른 정체성 문제가 엮시 중요하게 간주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마태는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새로운 신분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배움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 때에, 즉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되어있을 때,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공격과 도전에도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며, 그리하여 아마도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제자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우선적 요소로 제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이유는 도전에 대한 응전(應戰)의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이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회당으로부터 분리된 기독교인 마태의 공동체는 계속하여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았을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러한 외부의 핍박에 대한 응전을 위해서는 자신이 믿는 도리에 대한 배움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그 다음의 관심사는, 이상의 두 가지 이유에서 마태의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한다면, 무엇을 그리고 어떤 내용을 배워야 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의 구조 및 내용과 관련하여 이미 널리 알려진 바 다섯 개의 설교 묶음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천국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그에 합당한 윤리에 대해서는 [산상보훈](마5장부터 7장까지)이 제공된다. ② 전도(선교)할 때 기억해야 할 규례 및 태도에 대해서는 10장의 [파송설교]가 주어진다. ③ 천국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알아야 할 천국의 성격에 대하여는 13장의 [천국에 관한 비유설교]가 제공된다. ④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내에서 지켜야 할 규칙 및 질서, 그리고 이와 관련된 정신적 자세에 대한 가르침으로 18장의 [교회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⑤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들과 최후 심판에 대하여 24장과 25장의 [종말론 설교]가 소개되고 있다.


5. 맺는 말
마태공동체는 내외적(內外的)으로 상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외적으로는 그로부터 분리해 나온 유대교로부터의 지속적인 박해와 공격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공동체가 속하여 있는 지역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 온 이방인들에 의해 야기된 반율법주의 풍조가 상당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 하에서 이제 갓 태어난 마태의 기독교 공동체는 무엇보다 자신들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요청되었고, 이를 바탕으로하여 외적으로는 유대교에 대항하여 투쟁하며 내적으로는 도덕률 폐기론자들의 주의 및 주장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제까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복음서보다도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도의 필수 요건으로서 배움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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