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의 사회적 배경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에서는 이 배움 및 교육이 제자도의 특성으로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을까? 이 문제는 마태공동체의 사회적 상황(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태교회는 원래는 유대-헬라적 배경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즉 유대인이 중심이 되되 그 장소는 헬라 문화권 내의 한 도시로 추정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우선 마태복음에서 도덕적 율법의 열심있는 준수가 요구되고 있으며, 또한 구속사적 계획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부동(不動)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 교회 공동체 내에 이방인이 점증하게 되었으며 이로인해 보편적 세계관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두가지 위험이 발발될 가능성이 있다.
첫째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인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도덕적 율법의 요구를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거절하는 반율법주의(反律法主義; antinomianism)가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cf. 롬6.1이하; 롬3.8, 31). 이런 반율법주의가 마태공동체 내에 발생하였다는 증거는 마태가 특별히 다른 복음서기자들보다도 의(義)를 더욱 강조하고 있는데서 찾을 수 있겠다(5.20; 6.33; 13.43, 49; 25.31-46).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 우리는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배경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마태의 교회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로의 유입(流入)을 통하여 율법의 실천을 경시하는 도덕적 해이(解弛)가 들어서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바울의 교훈을 잘못 이해한 무리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시대에 더이상 율법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이와 함께 윤리적 무관심의 유혹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응하여 마태는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음을 지적하면서 엄격한 윤리의 준수를 강조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는 제자들의 목표는 온전(perfection; )에 이르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5.48).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에 있어서의 의는 바울신학적 의미, 즉 구원의 계획 속에서의 칭의적 개념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의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의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cf. 5.20; 23.3). 요컨대 이 의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신 윤리의 핵심적인 목적인 것이다.
둘째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점증하게 되면서, 이들은 아예 교회의 유대적 잔재를 제거코자 하였으며, 이와함께 또한 교회의 역사적 구속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마르시온 이단의 경우가 한 실례이다). 이는 바로 영지주의가 옹호한 정책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마태는 우선은 "구원은 유대인으로부터" 나옴을 분명히 못박으며 이와 관련된 특정적 경향, 즉 유대인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는 기사들을 소개하였다(10.5, 6, 23; 15.24). 그러나 동시에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 보이는 보편주의 역시 마태복음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8.11; 21.43; 24.14; 26.13; 28.18-20). 요컨대 이 대립적 강조점이 균형을 이루며 소개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태는 그 교회 내의 대립적인 두 부류의 구성원들, 즉 본래부터의 멤버들이었던 유대인들과 후에 교회로 유입된 이방인들 모두를 포용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균형있게 소개함으로써, 다른 복음서에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마태 공동체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하여, 우리는, 비록 유대인들이 숫적으로 우세하기는 하나, 이방인들 엮시 결코 무시될 수 없을만큼 존재하였던 곳이 바로 마태공동체였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상황 하에서 왜 마태는 배움을 제자들이 따라야 할 마땅한 도리로서 제시하려 하였을까? 이에 대한 답변으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첫 번째 이유는 정체성 확립의 이유이다.
먼저 유대인들에게는 오랫동안 유대교에 몸담고 있다가 새로운 종교인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회당으로부터 분리되었기에 아마도 이에 따른 정체성(신분) 문제가 상당히 큰 잇슈였을 것이다. 한편 이방인들에게도 오랫동안 이교도로 있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종교적, 문화적 변화에 따른 정체성 문제가 엮시 중요하게 간주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마태는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새로운 신분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배움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자신이 누구인지 바로 알 때에, 즉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되어있을 때, 외부로부터의 어떠한 공격과 도전에도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며, 그리하여 아마도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제자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우선적 요소로 제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째 이유는 도전에 대한 응전(應戰)의 이유에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이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회당으로부터 분리된 기독교인 마태의 공동체는 계속하여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았을 것으로 간주되는데, 이러한 외부의 핍박에 대한 응전을 위해서는 자신이 믿는 도리에 대한 배움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그 다음의 관심사는, 이상의 두 가지 이유에서 마태의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한다면, 무엇을 그리고 어떤 내용을 배워야 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의 구조 및 내용과 관련하여 이미 널리 알려진 바 다섯 개의 설교 묶음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천국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그에 합당한 윤리에 대해서는 [산상보훈](마5장부터 7장까지)이 제공된다. ② 전도(선교)할 때 기억해야 할 규례 및 태도에 대해서는 10장의 [파송설교]가 주어진다. ③ 천국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알아야 할 천국의 성격에 대하여는 13장의 [천국에 관한 비유설교]가 제공된다. ④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내에서 지켜야 할 규칙 및 질서, 그리고 이와 관련된 정신적 자세에 대한 가르침으로 18장의 [교회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⑤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들과 최후 심판에 대하여 24장과 25장의 [종말론 설교]가 소개되고 있다.
5. 맺는 말
마태공동체는 내외적(內外的)으로 상당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외적으로는 그로부터 분리해 나온 유대교로부터의 지속적인 박해와 공격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공동체가 속하여 있는 지역에서 교회 안으로 들어 온 이방인들에 의해 야기된 반율법주의 풍조가 상당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상황 하에서 이제 갓 태어난 마태의 기독교 공동체는 무엇보다 자신들의 새로운 신분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요청되었고, 이를 바탕으로하여 외적으로는 유대교에 대항하여 투쟁하며 내적으로는 도덕률 폐기론자들의 주의 및 주장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이제까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복음서보다도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도의 필수 요건으로서 배움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및 상황
AD 63년 유대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의인이라 불리었던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 야고보가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아나니아에 의해 순교를 당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하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당국의 대박해가 있었습니다. 3차 구금 이후 다시 풀려나 전도여행을 재개하고 있던 바울도 이 시기에 다시 로마감옥에 투옥되어 몇 년후 순교하게 됩니다.(AD 67년) 또 당시 로마를 방문한 베드로도 박해와 고난 가운데 있던 성도들에게 위로와 권면을 전하고, 베드로전후서를 남긴 직후 순교하게 됩니다.(AD 68년) 이처럼 야고보, 바울, 베드로의 잇따른 순교로 인해 지도자를 잃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지역교회(공동체)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믿음이 약화되고,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해지면서 유대교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곧 오시리라 예상했던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에피쿠로스 철학이나 영지주의 이단들이 활개를 치면서 믿음의 형제들을 미혹하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예수 공동체들의 믿음을 강화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의 제자들 및 그리스도인 몇몇 사람들이 복음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복음서들은 그 저자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믿음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쓰였으며 따라서 저자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저자 특유의 관점과 시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마가가 베드로의 육성 증언과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제일 먼저 마가복음을 썼고, 뒤이어 세리 마태와 의사 누가가 각각 자신의 관점과 경험에 의한 기록물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AD 1세기 말경에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됩니다. 마가복음은 성경공부를 위한 첫 책자로 채택하여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한 내용들을 이미 다루었습니다. 여기서는 이제 두 번째로 마태복음을 다루도록 합니다. 신약신학자 그래햄 스탠톤은 마태 공동체는 유대교의 한 종파이지만, 스스로 이들로부터 분리하였거나 아니면 추방당한 공동체라고 주장합니다. 의인 야고보의 순교이후 예루살렘 교회를 대상으로 한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해지자 예수를 추종하는 많은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마태 공동체도 이런 공동체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 교회에 남은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함께 유대교의 전통도 함께 병행하는,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유대 전통을 더 중요시하는 성격을 띠게 됩니다. AD 70년 예루살렘이 붕괴되고 난 후에 그들은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 그들만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게 됩니다. 그들은 유대교적 사고의 틀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을 지지한 ‘에비온파’ 혹은 ‘나사렛파’등으로 불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그들은 이단으로 정죄받고 역사 속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리고 먼 훗날 에비온파의 한 사제(무함마드 처의 오빠)가 무함마드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이로부터 이슬람교에 혼합된 유대적 배경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마태 공동체는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에 대해 유대종파들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모체인 유대교에 대해 아주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마태복음에는 유대교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나 유대교에 의한 잠재적인 박해에 관한 언급, 유대교에 대한 심판의 약속 등의 대립적인 부분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마태는 유대 전승이 예수의 삶과 사역에 의해 참되게 성취되었음을 주장하며, 마태 공동체가 공유하고 있는 조상들의 율법이 오직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 합법적으로 성취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는 구약의 인용과 함께 이에 대한 성취가 이루어졌다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마태는 공동체의 양육을 위해 이미 저술되어 사도적 전승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던 마가복음의 내용들을 상당부분 차용해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재편집,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후 초대교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복음서로 많은 지역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읽혀지고 감상되었습니다. 특히 마태에 의해 기록 편집된 산상수훈은 신약정경 중의 가장 귀중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 할 정도로 그 구성과 짜임새가 탁월합니다. 그리하여 비록 저작 시기는 마가보다 후에 나온 것이지만 신약정경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복음서가 되었습니다. |
마태복음의 종말론(24,25장)
1.연구의 목적
본 연구는 마태복음 24, 25장에 나타난 종말론을 신약신학적인 관점에서 탐색하고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독특성을 밝히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의 방법
성경의 각 책은 각각의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들과 관련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마태의 공동체가 직면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과 관련하여 저자가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핵심을 이해하려 하였다. 먼저는 본문연구를 통해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을 해석하고, 이 기록의 배경이 되는 23장을 살펴 본 후 다른 복음서 및 바울 서신과의 비교를 통하여 마태복음 종말론의 독특성을 알아 보고자 하였다.
3. 마태복음 24장의 구조
24장은 두가지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변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예루살렘이 언제 멸망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고 또 하나는 세상 마지막에 될 일들에 대한 답변이다. 이 둘은 서로 별개의 사건이긴 하지만 서로 긴밀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 마지막에 일어나는 종말적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장에서는 종말의 심판의 일부로 진행되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세상 마지막날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징조들을 잘 구별하여 읽되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비춰지는 종말에 대한 교훈을 서로 잘 연결하여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1)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파멸예고(1-2절)
2) 제자들의 질문(3절)
(1) 어느 때에 예루살렘이 파멸되겠습니까?
(2) 또 주의 재림과 세상 끝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3) 종말의 시작에 관한 말씀(4-8절)
(1) 적그리스도들이 나타날 것이다.(5절)
(2) 전쟁과 내란이 있을 것이다.(6-7절 상)
(3)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7절 하)
4) 예수의 제자들에 관한 말씀(9-28절)
(1) 제자들의 박해와 복음전파의 시작(9-14절)
(2) 예루살렘의 멸망과 제자들의 준비(15-28절)
5) 세상 마지막 날의 임박한 징조(29-36절)
(1) 우주적 변화(29절)
(2) 하늘에서 보이는 재림의 징조(30절 상)
(3)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30절 하-31절)
(4)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임(31절 하)
(5) 그 때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음(32-36절)
이후 25장 까지는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내 용이 이어지고 있다.
4. 예루살렘 성전 파멸의 의미
마태복음 23장은 24장에서 나오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종말론을 다루고 있는 24장과 25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문맥인 23장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이들은 23장에서 25장의 내용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23장은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즉 유대체제를 대표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의 선포인 반면 24, 25장은 제자들에 대한 사적인 가르침이라는 면에서 23-25장까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반면에 23장의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는 24장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23장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마태가 바라 본 예루살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유대체제를 상징한다. 23장은 당시 유대체제의 핵심부에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언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더 나아가 23장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자신을 거부한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 선언이 나타나고 있다. 37-39절을 보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고 기록되어 있다.
즉 마태가 바라 본 예루살렘은 유대체제의 지배계층들의 위선의 집합소요 부패의 온상이었으며 이스라엘을 왜곡된 길로 인도하는 세력이었다. 하나님을 알려주고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여야 했으나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선지자들을 죽였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자명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예수를 거부한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는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셀롯당원들이 제사장들을 학살함으로써 성전을 더럽혔고 그 결과 로마군과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을 피해 흩어지게 되었다. 초대 교회 역사가들은 그리스도인 선지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에게 이 때에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도록 경고했다고 한다. 성전은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멸망되었다. 로마군은 성전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군기를 세웠다. 이 군기에는 로마황제의 휘장이 새겨져 있었는데 당시 로마황제는 신으로 섬겨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정복 후 이 기장에 제물을 드렸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이 포위되자 상황이 너무 어려운 나머지 일부 여인들은 자식을 먹기 까지 했다고 한다. 겨울철은 더욱 어렵다. 겨울엔 계곡의 물줄기가 불어나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예루살렘을 빠져나간 피난민 중 일부는 실제로 겨울에 로마군의 공격을 피하려다 계곡의 물줄기에 막혔고 시간을 끌다가 살해를 당하기고 했다. 안식일은 통행수단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통행거리도 제한을 받았다. 그리고 셀롯당의 광적인 애국자들은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태가 그리고 있는 환난과 심판의 대상은 누구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 예루살렘이다. 즉 예루살렘 성전 멸망의 교훈은 비그리스도인에게는 회개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 전파의 시급성을 깨닫게 해준다. 마태복음 24장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 최후의 심판 날에 대한 무서운 결과 즉 예수님을 거절한 예루살렘이 당하게 될 재앙들을 보여줌으로써 마지막날에 예수그리스도를 거절한 사람들이 당하게될 무서운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마태의 공동체는 이 기록을 읽고 복음 전도의 시급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는 24장 이후 25장의 내용을 읽어 보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마태복음의 종말론에서 보여지는 환난과 재앙들의 1차적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환난의 때에 보호받는다. (22:24) 또한 복음은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세상에 전파된다.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 후 종말론의 맥락에서 이어지는 일련의 비유들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에 나타난 종말론의 핵심 메시지는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 가운데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첫 째 종말은 예루살렘의 파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의 파멸은 유대전통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음을 가진 공동체가 더 이상 유대체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며 새로운 시작이 전제 되어야 함을 말해준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기존의 유대체제와는 결별을 선언하여야 했다.
둘 째 복음은 전 세계를 향해 전파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체제와 결별을 선언한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체제 안에 더 이상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복음은 이제 유대를 넘어 온 세계로 전파되어야 한다.
셋 째 예루살렘의 파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부한 사람들이 겪게될 마지막 날 심판의 고통이다. 이는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전도의 사명을 일깨운다.
넷 째 심판의 대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 들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의 와중에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심판 가운데에서 두려워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보호하실 것이다.
5. 종말을 기다리는 제자의 삶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의 말씀은 하나의 독립된 수사단위이다. 이들은 종말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25장의 달란트 비유를 포함한 모든 말씀들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5장의 내용을 보면 마태의 공동체 안에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로 말미암은 여러 부류의 생활양식들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생활에 매여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4:37-51), 주님 오실 날이 언제 일지 자기 나름대로 확신을 갖고 재림이 지체될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5:1-13), 복음을 듣고 신앙 공동체로 나아왔으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25:14-30), 자신의 재산을 움켜쥐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있지 않는 사람들(25:31-46)이다.
노아 홍수 때의 비유(24:37-51)는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기록되었다.(36절) 홍수 때에 멸망당한 이들은 자신들에게 임박해있는 분명한 심판의 징조에도 불구하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에 매여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죽어 갔다. 마태복음은 일상을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사람은 구원을 얻고 다른 한 사람은 심판을 받는 장소가 똑 같이 일상적인 삶의 영역인 ‘밭’과 ‘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일상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왕국에서의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 제자의 삶을 엄중히 경계한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도 어떤이는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고 어떤 이는 일상의 노예로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의 비유로 이어지는데 여기에서는 자신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 종이 등장한다.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제자로서의 직무를 다하여야한다. 주인이 다시 와서 자신의 직무를 다하고 있는 지를 불시에 확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깨어있는 제자의 삶이란 ‘때를 따라 양식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 즉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 시와 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일상의 삶을 살며 그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직무 즉 사람을 섬기고 양육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한다.
열 처녀 비유 역시 강조점은 ‘그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이 비유를 해석하면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는 신랑이 그들의 예견대로 ‘속히’ 올 것이라고 예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들은 주님이 곧 오실 줄 알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았거나 직업을 때려 치운 사람들일 것이다. 기름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본문에서는 신랑이 더디 오더라도 맞이 할 수 있는 ‘준비되어 있는 삶’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즉 종말을 살아가는 제자의 삶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때와 시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달란트 비유는 앞의 두 비유와는 조금 다른 강조점을 가진다. 앞의 두 비유는 ‘시와 때’를 알 수 없다는데에 그 강조점이 있지만 달란트 비유는 ‘오랜 후에’(19절) 주인이 필연적으로 돌아와 결산한다는데 그 강조점이 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신이 받은 능력에 상관없이 결산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자신은 그 만한 능력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살 수 없었다거나 시간과 재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위해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핑계를 아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적게 받은 사람도 금 한 달란트 이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노동자가 일만일을 일하여 번 임금의 양이었다. 즉 아무리 적게 받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많은 이들이 복음과 기독교 공동체를 접하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하나님의 왕국 가까이에는 왔지만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들, 헌신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마태는 그들에게 그들의 삶은 반드시 주인 앞에서 결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양과 염소의 비유도 종말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시와 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인데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이들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종말을 기다리며 사는 제자는 이 땅의 약자들을 위해 삶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믿었다. 그런데 종말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오시지 않았다. 이에 따라 기독교 공동체안에는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들이 발생했다.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말씀들을 다시 정확하게 이해해야 했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의미하는 바를 그들의 공동체에 설명해야 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은 이러한 ‘지연된 종말’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의 가르침으로 이해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종말론에 관한 마태의 기록은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후대에 복음서 기자에 의해 창작된 것인가?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이었는데 마태의 시대에 가서야 보다 더 정확하게 이해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루살렘 파멸에 관한 예언 기사는 공관복음 모두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특히 마태복음의 기록은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볼 때 매우 조직적이며, 더욱 교훈적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마태복음의 기록연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성전 파괴 이 후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 듯 하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마태복음 25장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미 시작된 종말과 아직은 오지 않은 종말의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제시한다.
첫 째, 예수의 제자들은 일상의 노예가 되어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때를 따라 양식을 그 집 맡은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 준다“.
둘 째,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이 오시는 날을 속단해서는 안된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때에 오시지 않더라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계속’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셋 째,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의 능력, 재물, 시간의 부족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열매 맺는 삶을 살지 못했다고 핑계할 수 없다. 주인은 충분히 그 분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주신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우리가 받은 것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무엇을 했는 지 결산하게 될 것이다. 제자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기여한다.
넷 째, 예수의 제자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 까지 제자들은 가난한고 소외된 사람을 섬김으로 주님을 섬긴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섬기는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섬기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길 수 있으며, 그 분과 함께 있을 수 있다. 주님은 그들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6. 다른 복음서와의 비교
마태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마가의 기록과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을 비교해보자.
마가복음 13장 1-37절은 마태복음 24, 25장과 동일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도 비교적 마가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마가복음과의 비교를 통해 마태복음의 종말론의 독특성을 드러내 보이겠다.) 그러나 전 후 문맥과 그 강조점에서 볼 때 마태복음의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 차이점들은 마태복음의 종말론을 독특한 것으로 만들어 주고 있다.
첫 번 째 차이점은 마태복음에서는 예루살렘의 파멸이 부패한 유대전통과 예수님을 거부한 것에 대한 심판이라는 맥락에서 설명되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에서는 그러한 전 문맥의 설명적 진술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마태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부패한 유대전통, 유대지배 체제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두 번 째 차이점은 마가복음에서는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 이 후에 관련된 교훈적인 비유가 이어지지 않는다. 마가복음 13장 이 후 14장 1,2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계략을 꾸미는 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즉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으로 제시되고 있는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종말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이 강력하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7. 바울서신과의 비교
바울서신에서의 종말론은 주로 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다. 바울의 종말론은 고린도 전, 후서,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고린도 전, 후서에서의 종말과 관련된 진술들을 살펴보면 주로 죽은 자의 부활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5장은 신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어떤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신자의 부활을 증거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린도 후서에서도 바울은 후패한 몸을 벗고 새로운 생명의 몸을 덧입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고후 4:16-5:10) 바울에게 종말은 소망의 대상이며 기다림의 대상이다. 바울은 종말을 ‘기다리며’ 현재를 ‘산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종말을 ‘살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종말에 관한 데살로니가 전후서에서의 강조점은 신자들이 종말에 관한 거짓된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이다.(살후 2:1-12) 바울의 주된 관심은 성도들에게 종말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지게 하여 미혹되지 않게 하는데 있었다. 종말에 관해서 바울은 ‘바르게 아는 것’을 더욱 강조 하였다면 그에 비해 마태의 관심은 종말의 시대를 ‘바르게 사는 가’에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8. 결론
위의 연구를 토대로 마태복음 종말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마태복음 종말론은 특히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과 깊은 관계가 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죽인 전통적인 종교지배체제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의 파괴는 그러한 유대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태복음의 공동체였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유대체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심판받은 유대체제를 넘어서 복음을 들고 온 세계로 나아가는 선교적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선교적이다.
둘 째,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를 ‘오늘’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주요한 관심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주님은 다시 오시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것이다. 그 삶은 일상의 삶을 살되 일상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왕국의 일꾼으로서 열심히 말씀을 전파하고 맡은 사람들을 돌보는 삶이다. 또한 그 삶은 종말을 의식하며 살되 늘 준비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기꺼이 헌신의 대가를 지불하는 삶을 사는 것이며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며 사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태복음의 종말론적 삶은 철저하게 종말이 현재화된 삶인 것이다.
셋 째, 마태복음의 종말론은 제자로서의 ‘삶’에 강조점을 둔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행위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신앙을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종말론적 신앙를 가졌다면 그것은 오늘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종말을 믿으며, 그 종말을 의식하며 사는가?.
참고문헌
France, R. T. Tyndale new testament commentary: Matthew.: Grand Rapid: IVP,1987.
Keener, Craig s.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IVP. 1993. 「IVP성경배경주석 신약」. 정옥배외 역 서울: IVP.[소망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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