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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마태복음에 나타난 교회연구

by 은총가득 2020. 8. 18.

마태복음에 나타난 교회연구

 

Ⅰ. 서 론

 

A. 연구목적과 중요성

본 연구의 목적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교회라는 용어 뒤에 숨겨져 있는 교회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밝히고 베드로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가 아닌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알아봄으로써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며 복음서 기자가 본문을 통해서 의도하는 신학적 메시지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전통적으로 "교회의 복음서"로 특징지어져 왔다. 이러한 명칭이 얼마나 적합한지는 "교회"(ecclesia)라는 용어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면 분명해진다.1) 특히 마태복음에는 교회(evkklhsi,a)라는 용어가 2회(16: 18; 18: 17) 직접적으로 언급되는데 그것은 이 복음서의 교회적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교회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그렇다면, 복음서 기자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당시에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또한, 마태복음의 기록이 베드로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A.D. 65년경)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면, 마태복음의 저술 연대는 65년 이후가 될 것이다. A.D. 70년에 예루살렘 멸망 후로 볼 때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생겨난 교회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마태복음 속에 함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의 주된 기록목적은 유대인 독자들에게 예수가 바로 메시야이며, 메시야 통치는 예수로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입증하려는데 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마태는 예수께서 그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구약의 예언을 성취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마태복음은 메시야 통치의 본질, 영역, 그리고 확장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신자들에게 예수를 믿는 신앙은 구약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1R. T. France,「마태신학」이한수 역 (서울: 도서출판 엠마오, 1995), 388.
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를 이루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9회 나오고,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도 9회 나온다. 즉 "예수는 메시야이시며 왕이시다". 그리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임을 입증한다. 마태복음이 복음서의 맨앞에 위치한 것도 그것이 다른 복음서들 보다 깊이 자리한 교회의 어떤 필요성들에 대해 좀더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수와 그의 교회의 "유대성"은 단지 역사적 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 해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는 실존적인 관심의 문제였으며, 마태복음은 바로 그러한 해답을 제공하려고 한것이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디디케 문서로서 복음서 기자가 속한 교회와 그 지도자들이 원하고 있는 것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2)
본 연구의 중요성은 교회가 왕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예수가 명령하신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사명을 확인하고 그것을 강화함으로 성서적 교회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 전승의 빛에서 현대교회를 새롭게 조명함으로 교회의 동질성을 찾고 전통을 이어가는데 있다.

B. 연구방법과 범위

본 연구는 마태복음서 안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에 대해 마태가 어떻게 인식했는가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교회에 대한 일반적 고찰을 함으로써 교회의 역사적 흐름을 살펴 볼 것이며, 더 나아가 마태가 이해하는 교회이해 속에서 마태는 예수를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았는가를 고찰 하고자 한다. 특히 마태는 교회가 "새 이스라엘"로써 예수로부터 권세를 부여 받은 공동체임을 규명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또한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가 진실로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제시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 연구는 혼탁해져 가는 사회 속에 교회가 이 시대를 향하여 선포해야 할 예언자적인 메시지와 선교적 사명을 인식하고 강조 하고자 하고자 하는

2R. T. France,「마태신학」19.
의도와 일치하고 있다.
본 논문의 연구 범위는 마태복음16:13-20과 18:18 본문을 중심으로 본문 주석을 하고 구약과 신약에 나타나는 교회와 관련된 공동체의 성격을 분석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Ⅱ장에서는 교회에 대한 일반적 고찰로서 구약성서와 70인역(LXX)에서의 의미, 신약속에 나타난 교회 개념을 분석하고자 한다.
Ⅲ장에서는 마태의 교회 이해로서 마태복음에 반영된 기독교 공동체를 살펴보고, 예수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 "인자"로 호칭하는 마태의 의도와 배경을 다룰 것이다. 더 나아가 마태복음16장과 18장에 나타난 교회의 삶의 자리를 분석 해 보고자 한다.
Ⅳ장에서는 마태가 이해하는 권세를 부여받은 베드로의 역할에서, 베드로의 긍정적인 모습과 비판적인 모습을 살펴 보고자 한다. 반석의 의미와 음부의 권세에 대해서 다루고, 매고 푸는 권세에서 천국열쇠의 의미와 매고푸는 권세의 참된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또한 교회에 부여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Ⅴ장에서는 교회 공동체의 참된 본질인데 마태의 "제자", "따르다"의 어원적인 분석을 하고, 교회가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왕권 통치의 중심지임을 알아 볼 것이다. 더 나아가서 교회의 사명인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 "말투리아"를 분석 하고자 한다.
Ⅵ장에서는 결론 부분으로 이제까지 마태가 말하고자 했던 베드로 고백 위에 세워진 마태 교회상을 제시하고 그러한 전망에서 오늘의 교회가 가야할 바른 모습을 전망하고자 한다.

 

C. 연구사

여기서는 마태복음서 연구의 여러 신학적 주제 가운데서 교회론을 중심으로한 학자들의 연구동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태는 복음서들 중에서 가장 "교회론적"인 것으로 오랫동안 인식되어 왔다.
보른캄(Bornkamm)은 논문 "마태의 종말 기대와 교회"(End-Expectation and Church in Matthew)에서 "어떤 다른 복음서도 마태복음 만큼 교회 사상에 의해 만들어 지고 교회에서의 사용을 위해 고안된 것은 없다"고 선언하면서도 "마태복음서는 경험적으로 제한된 독립적 실제로서의 교회에 집중된 진정한 교회론의 가장 빈약한 시초만을 발견할 수 있다"3)고 비평 하고 있다.
보른캄은 또 다른 그의 논문 "마태복음의 교회안에서 묶고 푸는 권세"(the Authority to bind and loose in the Church of Matthew's Gospel)에서도 교회의 제자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18장 전체를 하나의 "공동체의 규범"으로 말하고 있다. 교회와 묶고 푸는 권세에 대해 모두 말하고 있는 마태복음16: 17-19와 18: 15-18과의 관계성을 설명한다.4)
슈바이쳐(Schweizer)는 비록 18장이 공동체의 삶에 관한 규칙과 관련된다고 할지라도, "장로들" 혹은 "사제들" 같은 특수한 지도자들에 대한 반영이 없음을 지적 한다. 마태의 공동체는 오히려 "소자들", "선지자들", "서기관들", "의인"과 같은 같은 말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다. 즉 모든 제자들이 바로 선지자이며, 선생이며, 의인이다.5)
킹스베리(Kingsbury)는 마태의 베드로 상에 관한 좋은 연구를 제공했다. 그는 편집비평을 통해 마태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위치에 대한 연구 경향을 대조 시킨다. 즉, 홈멜, 보른캄, 그리고 켈러(K hler)는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열쇠의 사명" 혹은 "가르치는 권세"를 맡겼기에 예수 자신이 교회를 그 위에 세운 "대랍비"로 본다. 켈러는 심지어 마태복음서를 "베드로 복음서"로 지칭한다. 다른한편 쉬트렉커(Strecker)의 견해는 워커(Walker)에 의해 추종되어지고 발견되어지는 데 그는 베드로를 마태의
3G. Bornkamm, "End-Expectation and Church in Matthew," in Tradition and Interpretation in Matthew (London: SCM, 1963), 15-51.
4G. Bornkamm, "the Authority to bind and loose in the Church of Matthew's Gospel," in Tradition and Interpretation in Matthew (Philadelphia/London: Fortress/SPCK, 1983), 85-97.
5E. Schweizer, "Observance of the low and Charismatic Activity in Matthew," NTS 16(1969), 213-230, esr. 229.
교회 구성원 각자에게 기독교인의 모범을 제공하는 "대표적"제자로서 그 린다. 그는 예수가 "대랍비"라는 견해 혹은 마태가 "베드로의 복음서"라는 견해를 반대하지만 쉬트렉커와 워커는 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고, 베드로의 위치가 제자들이라는 범주 안에 있으나, 그는 "구원사적 우선성"을 갖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6)

 


6J. D. Kingsbury, "The Figure of Peter in Matthew's Gospel as a Thelogical Problem," JBL 98(1979): 67-83.
Ⅱ. 교회에 대한 역사적 고찰

교회(evkklhsi,a)라는 말은 언제부터 쓰이게 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벌코프(Berkhof)는 족장시대와 모세 시대에 이미 교회가 있었다고 말하며, 선택의 관점에서 "선택받은 공동체", 그리고 효과적 소명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선택된 자들의 무리", 세례와 고백이라는 관점에서 "참 믿음을 고백하는 공동체"로 정의 한다.7)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교회에 관해 오직 두 차례(마16: 18; 18: 17) 언급하고 있으며, 그 중 첫번째 언급에서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미래 시제로 말씀을 하신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예수께서 표현하고자 했던 "교회"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불리어졌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따라서 본 장에서는 교회의 역사적인 고찰을 함으로 "교회"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A. 구약에서의 의미

히브리 성경에 대한 헬라어 역본인 70인역(LXX)에서 교회(evkklhsi,,a)로 번역이 되는 히브리 단어는 카할(lhq)과 그 동의어인 에다(hd[)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의미를 알아 보고자 한다.
먼저 "lhq"이란 말의 본 뜻은 "부른다"라는 말에서 만들어진 말로서 "의논하기 위하여 소집된 공동체"라는 뜻이다.8) 시내산 기슭에서 모세가 전달해 준 하나님의 율법을 듣기 위하여 모인 그 모임이 "카할"이다.9)

7L. Berkhof,「조직신학 하」권수경, 이상원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8), 825.
8이종성,「교회론Ⅰ」(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9), 19.
9Ibid., 19.

즉 그것은 모임의 구성원들을 가리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이는 행위의 발생을 가리킨다. 한스 큉은"lhq"이 "70인역(LXX)에 약 백번 정도 사용되었다"고 말하면서 "세속적 의미를 지닌 소집된 모임"이라고 말한다.10) 래드마허(Radmacher)는 이 단어의 의미를 잘못된 증언에 의해(창49: 6), 전쟁이나 침략에 의해(민22: 4), 귀환하는 포로들의 무리에 의해(렘31: 8), 또는 종교적 목적에 의해(신5: 19), 예루살렘에 있는 회복된 공동체(스10: 12),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여 모인 무리들로 구성된 조직체로서 회중을 의미한다고 한다.11) 베이커는 "lhq"이 한정적으로는 어떤 특정한 장소에 있는 지역적인 모임을 의미한다12)고 말한다.
시내산 기슭에서 모세가 전달해 준 하나님의 율법을 듣기 위하여 모인
그 모임이 "lhq"이다. 구약 성경에서는 이를 "회중"이라고 번역을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며 그들은 거기에서 야훼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요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계약관계에 있음을 알게 된다.13) 이종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hd["는 처음에 "lhq"과 함께 하나님의 율법을 듣고 그를 예배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아 모인 무리들이었다. 언어학적으로는 "lhq"보다도 오래된 말로서 "택한다"라는 뜻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서 "택함을 받아 모인 집단"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70인역(LXX)에서 이 말은 더 제한적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그것은 이스라엘(유대)인이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모이는 장소나 건물을 의미하게 되었다.14) 더 나아가서 "lhq"과"hd["의 관계에 있어서 역사적 문화적 과정을 거쳐서 "hd["는 "쉬나고게"로 번역 되었고, 신약성경에 있어서 이 말은 전적으로 유대인이 모이는 회당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lhq"은 이스라엘의 모임(공동체)을,
10한스 큉,「교회란 무엇인가?」86.
11E. D. Radmacher, What the Church is All About (Chicago: Moody Press, 1978), 125.
12R. A. Baker,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Development of Ecclesiology," Doctor`s thesis, Southwestern Bapt. Theol. Sem. (1944): 25.
13이종성,「교회론Ⅰ」20.
14Ibid., 20-21.
쉬나고게"는 모이는 장소를 더 강하게 의미한다15)고 말한다. 이에 대해 배너만(Bannerman)은 "hd["는 sunagwgh와 일치하는데 sunagwgh는 "hd["처럼 특별한 구속력이 없이 모여졌지만, evkklhsi,,a는 "lhq" 처럼 법률이나 다른 구속력에 의해 결합된 하나의 다른 대중을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을 의미16)한다고 한다. 호트(Hort)는 "lhq"과"hd["의 관계에 있어서 이 두 단어는 모두 여러 종류의 모임에 사용되었으며, 이 두 단어는 서로가 구별이 없이 사용되었으나, 두 단어는 엄격하게 동의어는 아니었다고 말한다.17) 퀘넨(Coenen)은 이상의 두가지 히브리 용어의 차이점을 말하는데, 대체로 "hd["가 의식적인 공동체(ceremonial community)에 대한 용어로 항구적이고 덜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반면에 "lhq"은 언약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시내산 공동체에 대한 의식적 표현이며, 그것은 또한 세속적인 일(민10: 7; 왕상12: 3)이나 종교적인 일(시22: 26)로 모이는 백성들의 정례 뿐만 아니라 모인 무리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민14: 5; 17: 12)고 말한다.18)
벌콥(Berkhof)은 "hd["는 이스라엘에 적용될 때 이스라엘 민족이 모였든지 모이지 않았든지 간에 이스라엘의 자손들과 그들의 대표자들에 의해 조직된 사회자체를 의미하며, "lhq"은 그들의 실제적인 집회이다. 그 결과 종종 "lhq"과 "hd["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 단어는 "회중의 모임"(출12: 6; 18: 16)이라고 말한다.19)

B. 70인역(LXX)에서의 의미

70인역(LXX)에서는 "에클레시아"를 "lhq"에 대한 번역으로서 거의 일

15Ibid., 21.
16D. D. Bannerman, The Scripture Doctrine of the Church (Grand Rapids: Eerdmans, 1955), 92.
17F. J. A. Hort, The Christian Ecclesia, 5.
18L. Coenen, Church, in The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Theology, ed. Colin Brown (Grand Rapids: Zondervan, 1975) Vol. 1, 295.
19L. Berkhof,「조직신학 하」권수경, 이상원 역 (서울: 크리스챤, 1992), 811.
백번이나 사용하고 있다. 이 두 단어의 기초적인 의미는 "만남" 또는 "모임"이다. "lhq"의 의미는 모이는 사람들과 그 모이는 목적에 따라서 달라진다. "lhq"은 군복무를 위해서 불림받은 사람들의 모임일 수도 있고(창49: 6; 민22: 4; 겔16: 40) 또는 공동활동을 위해서 불림받은 사람들의 모임일 수 도 있다. 모인 사람들은 예언자들일 수도 있고(삼상19: 20) 왕자들일 수도 있으며(민16: 3; 대상28: 8) 또는 무질서한 대중일 수도 있다. 카할은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모인자들(대하30: 13)에게 사용되는 만큼이나 쉽사리 악한 일을 하려고 모인 자들(시16: 5)에게도 사용된다. "lhq"이라는 말은 70인역에서 곧잘 다른 희랍어로 번역된다. 그중에서 가장 특기 할 만한 것은 sunagwgh이다. sunagwgh는 히브리어로 "hd["를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는데, 이 "hd["라는 말은 "lhq"이라고 하는 단어가 가지지 않은 한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그 모인 회중의 행위의 구애됨이 없이 회중에 적용 될 수 있는 말이다.20)이러한 히브리 용어들을 번역하기 위해 70인역(the Septuagint)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인 evkklhsi,,a는 "lhq"을 대신하는 용어로는 자주 쓰였으나, "hd["를 대신해서는 결코 쓰이지 않았다. "hd["는 보통 sunagwgh라는 단어로 번역 되었는데 이 단어는 "lhq"를 번역 할때도 또한 사용되었다. 이중에서 우리가 신약 성경의 교회 개념을 이해하려고 할 때 주요한 자료가 되는 것은 바로 evkklhsi,,a이다.21)래드(Ladd)22와 데이빗슨(Davidson)23은 70인역(LXX)에서의 evkklhsi,,a의 의미가 신약에 그대로 적용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키텔(Kittel)은 evkklhsi,,a가 단순히 집회 나 회중을 의미하는 세속적인 의미로 쓰였다고 주장한다.24) 그러므로 이러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의 각별한 의미는 그리

20한영제 편, "교회,"「기독교백과 대사전 2권」19.
21M. J. Erickson.「교회론」29.
22G. E. Ladd,「신약신학」이창우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3), 763-764.
23R. Davidson, The Old Testament Preparation for the New Testament Doctrine of the Church. Review and Expositor 38, (Janury, 1941), 49-56.
24Kittel Gerhard(ed.),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Ⅲ, (Grand Rapids: Eerdmans, 1967), 513.
스도교 역사 속에서 발전되었으며 어원학적 기원이라기 보다는 종교적 역사적 의미에 의한 것이다.

 

C. 신약에서의 의미

1. 어원적인 의미

교회(church)라는 단어, 그리고 그것과 같은 어족에서 나온 다른 언어의 용어(예를 들면, 독일어Kirche)들은 "주님께 속한" 이라는 의미를 가진 큐리아코스(kuriavko.j)라는 헬라어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나 그 용어들은 에클레시아(evkklhsi,,a)라는 신약성경 헬라어의 배경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이것은 흔하게 사용되는 단어이기는 하지만 신약성경 전체에 골고루 나타나지 않는다. 복음서에는 마태복음16: 18과 18: 17에만 나타나고 있다.25)헬라의 고전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일찍이 헤로도투스(Herod
utus), 투키디데스(Thucydides), 크세노픈(Xenophon), 플라(Plato), 그리고 유리피데스(Euripides) 등 기원전 5세기의 저술에서 부터 발견되는데, 그것은 폴리스(Polis)의 시민들의 집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한 집회는 빈번히 사용되었는데 아테네(Athens)의 경우에는 일년에 30-40회 정도 소집되었다. 에클레시아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단순히 사람들의 모임 혹은 집회를 가리킨다. 우리는 그러한 의미의 용례를 사도행전(19: 32, 39, 41)에서 찾아 볼 수 있다.26)
그러므로 한스 큉은 에클레시아를 정의 하기를 "불려나온 사람들"이고 "불려나온 사람들의 모임이며 백성들의 집회"라고 말한다.27) 트랜취는(Trench)는 이 단어에 "구별의 개념"(the idea of separation)을 추가 시킨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전체 주민으로 부터 선택된 사람들이었으며 시민권을 박탈당한자, 이방인, 하층 서민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말한다.28)

25M. J. Erickson.「교회론」이은수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5), 26.
26Ibid., 27-28
27한스 큉,「교회란 무엇인가?」이홍근 역 (서울: 분도출판사, 1989), 85.
원래 에클레시아는 고대 도시에서 시민들 전체의 화합을 지칭 하거나 혹은 법률로 지정된 업무를 실행하기 위해서 공적으로 구성된 시민들의 화합을 지칭하는 말이었다.29) 따라서 이 단어는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가 아니라 이미 헬라 세계와 70인역의 규칙적인 번역으로 쓰였다.30) 그러므로 evkklhsia의 어원적 구조는 전치사 evk(밖에 ,밖으로)와 동사 k,alewv(부르다, 소환하다)로 부터 파생된 것으로 "∼로부터 불러내다"라는 어원상의 의미를 지닌다.31) evkklhsi,a가 처음에는 구별의 개념을 가진 단어였지만, 후대의 사용에서는 그러한 구별의 개념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evkklhsi,a는 회중 또는 부름받은 회중이란 뜻이었는데 후대로 가면서 단순한 회중이나 집회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헬라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evkklhsi,,a는 중성적이며 특색이 없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로서는 신학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32)

 

2. 함축적인 의미

evkklhsi,a는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불림받은 사람들의 집회였다. 이 모임은 세속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기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종종 기도나 가르침 또는 심의를 위하여 모인 특별한 회중을 가리키기도 했다. 베이커(Baker)는 트렌취가 말하는 "구별의 개념 보다는 소환의 개념이었다"고말한다.33)홀트(Hort)도 "evkklhsi,,a가 세상이나 인류로 부터 부름을 받은 무리나 개개의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널리 알려진 견해를 지지 할 수 있
28R. C. Trench, Synonyms of the New Testament, 9th ed. (Grand Rapids: Eerdmans, 1953), 1-2.
29E. G. Jay,「교회론의 역사」주재용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92), 85-86.
30R. T. France,「마태신학」331.
31한영제 편, "교회,"「기독교백과 대사전 2권」19.
32이병철 편저,「성서원어대전: 성서사전」(서울: 브니엘출판사, 1985), 272.
33R. A. Baker,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Development of Ecclesiology," Doctor`s thesis, Southwestern Bapt. Theol. Sem. (1944): 25.
는 근거가 없다"고 하면서 베이커의 견해와 동의한다.34)헬라의 고전에서 예외적인 경우가 나타나는데, 종교적인 교제 및 제의(cultic guild)에 관해 사용된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 있어서 그 단어가 원하는 바는 업무상의 모임이지 연합 그 자체는 아니다.35) 그러므로 헬라세계 에서는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한스 큉의 말대로 evkklhsi,,a라는 용어를 "초대교회가 이어 받음으로써 의식적으로 자기들이 참 하나님 의 집회요 참 하나님의 공동체이며 참 종말의 하나님 백성"36)이 된 것이다. 신약에서의 에클레시아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불림받은 사람들의 집회이다(행19: 32; 39-40; 고전11: 18). 둘째, 특정지역의 거주민들로부터 모여진 신도의 공동체이다(롬16: 5; 골4: 15).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모으신 공동체이다(행20: 28; 고전1: 2; 10: 32; 11: 16). 넷째, 종말론적 하나님의 백성들이다(엡1: 23-2: 10; 골1: 21- 27). 이토록 범위가 넓어진 것은 에클레시아에 다른 용어들이 주는 관념의 의미들을 흡수시켰기 때문이다.37)
결국 "교회"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evkklhsi,,a로 통상적으로 사람들의 모임, 집회를 뜻한다. 이 evkklhsi,,a는 모임의 성격이나 배경, 목적, 범위 등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어의적 분석은 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을 번역할 때 "lhq"과"hd["의 대응어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교회를 - 구약과 신약을 조화시키며 일관된 하나의 정의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 "택함받은 자들의 집단" 혹은"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 라고 정의한다.38) 이것은 교회를 가장 넓은 의미로 정의한 것이다.
필자가 살피려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그 전체중 한 부
34F. J. A. Hort, The Christian Ecclesia (London: MacMillan, 1914), 5.
35M. J. Erickson.「교회론」28.
36한스 큉,「교회란 무엇인가?」87.
37한영제 편, "교회,"「기독교백과 대사전 2권」19-20.
38벌코프, 박형룡 등의 조직신학자들의 정의이다; W. Huber,「교회」이신건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0), 16도 교회를 신도들의 모임, 성도들의 교제로 설명한다.
분으로 신약성경에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불리우지 않고 이스라엘, 그들이 모인 "집회", "회중" 혹은 "하나님의 총회"라 불리웠다. 또 그 구성원이라도 교회와는 달랐다. 이스라엘이란 혈연 공동체와 이 민족에 결부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택, 축복, 약속이 그 원리였다. 두 집단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무시할 수 없는 차이점도 가로 놓여 있다.
이러한 공동가 신약성경에서 evkklhsi,,a로 불리워 진다. 대부분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뜻한다. 신약성경의 용어로 교회란 예수님과의 새로운 관계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과 새로운 관계에 돌입한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교회(evkklhsi,,a)란 단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이는 예수님이다(마16: 18; 18: 17).39) 그러므로 교회를 "예수님을 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공동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공동체"40) 라고 부르는 것이다.

 

39이 표현의 진정성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지만 최근 추세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데 아무런 문제점이 없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이 문제에 관하여 S. J. Kistemaker, The Gospels in Curent Study「현대의 복음서 연구」신성종, 최갑종 역 (서울: 엠마오), 1985, 125-127를 보라; J. F. Balchin, Ibid., 19는 예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사실로부터 교회가 예수의 의도된 조직이라고 주장한다.
40E. G. Jay,「교회론의 역사」주재용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15.


Ⅲ. 마태의 교회이해

"마태교회" 또는 "마태공동체"로 대표되는 교회는 어떤 갈등과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했는가? 본장에서는 마16: 18과 18: 18에 나타난 교회 상황을 살피고, 복음서에 반영된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더 나아가 복음서 기자는 예수에 대한 칭호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를 접근하고자 한다.

 

A. 마태복음16: 18과 18: 17에 나타난 교회

복음서에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고, 둘다 마태의 기독론에 나오기 때문에(마16: 18, 18: 17), 자연히 이 구절들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마태복음 16장18절에 예수는 kavgw. de, soi le,gw( o[ti su. ei= pe,troj( kai. evpi.tau,th| th/| pe,tra|oivkodomh,sw mou th.n evkklhsi,an( kai. pu,lai a[|dou ouv katiscu,sousin auvth/j)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kai. dw,sw soi ta.j klei/j th/j basilei,aj tw/n ouvranw/nkai. o] eva.n dh,sh|j evpi. th/j gh/j( e;stai dedeme,non evn toi/j ouvranoi/jkai. o] eva.n lu,sh|j evpi.th/jgh/j( e;stai lelume,non evn toi/j ouvranoi/j)(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18장 17절에서도 "에클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말씀을 하신다. 이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의심하기도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다른 많은 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리고 있다. 70인역에 의하면41)"교회"라는 용어는 "카

41T.D.N.T, S.V evkklhsi,a
J. Y. Campbell, The Christian of the Word Ekklesia, in Three New Testament Studies (1965), 41-54(from JTS 49, 1948). 에클레시아란 단어는 교회가 하나님의 견해를 참 백성이라는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 70인역에서 빌어왔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단순한 집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어휘가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원되었을 가능성을 개의치 않는다.
할" 즉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드믈게 "에다"를 의미하기도 했는데 "에다"는 데부분 "쉬나고게"로 번역 되었으며(때때로 "카할"도 "쉬나고게"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카할"과 "에다" 모두 주후 1세기에 tM,EK 아람어 "케누"(kenishta)로 대치되었다. 슈미트(Schmidt)의 해석에 따르면 예수가 평상시에 희랍어를 사용한 기록이 없음을 보아 예수가 직접 "에클레시아"라는 낱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일상 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을 것이며, 그럴 경우 틀림없이 "케누슈타"(kenushta)라는 낱말을 썼을 것으로 추축한다. 그 말은 본래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무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예수는 옛 계약 밑에서 살던 이스라엘인들 중에서 예수 자신이 불러내어 만든 메시아적 공동체를 의미한 것이며 따라서 이들은 장차 나타날 신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42)


다른 견해에 의하면 "에클레시아"는 아람어 kenushta를 말하며 분리된 메시야의 회당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유대교에서 각 회당은 그 자체를 주체적인 단위로 여기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유대교의 한 축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을 예수가 사용한 "에클레시아" 에 대한 설명으로 인정하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곤란한다. 예수의 메시지와 사역은 유대교 회당의 개념으로 제한 되기에는 너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의 공동체를 이스라엘과 연관 시키는 것도 중요하긴 하지만 유일한 고찰은 아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야를 배척한 것은, 곧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와는 별개의 진영에 속할 뿐 만 아니라 적대적인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43)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한 에클레시아는 조직이나 기관 같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되는 백성들의 무리이며 같은 방법으로 표현되는 제자들의 무리라는 결론을 갖게 된다. 이것은 자연히 초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생겨난 개념보다 더 느슨한 개념임을 이해하게 된다. 예수께서 사용한 에클레시아가 사도행전이나 신약서신들 안에 있는 교회를 형성 시킨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에클레시아라는

42이종성,「교회론Ⅰ」39.
43D. Guthrie,「신약신학4」이중수 역 (서울: 성서유니온, 1993), 28.
용어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일반화된 형식으로 사용된 것과 같은 특별한 모임을 표현함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약 교회의 기초를 형성시킨 사도행전에 있는 주된 공동체를 위한 적절한 용어로서 일찍이 인정되어 왔음도 가리키고 있다.44)
예수는 이땅에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 오셨으며, 에클레시아를 통해서 구속사업을 하시려고 계획하셨다. 그것을 이룩하시기 위해서 12제자를 훈련 시키셨고, 교회 설립을 위해서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셨다.

 

B. 마태복음에 반영된 기독교 공동체

마태의 "내 교회"(16: 18)라는 명칭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야웨의 에클레시아" 또는 "총회"라고 말하는 신명기와 역대기에 그 근거와 기원이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언약에 성실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신실한 남은자의 공동체였다. 이에 반해 초대교회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불신하였던 그들의 조상처럼 예수를 거부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마27: 24-25).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와 깊게 결속된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새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21: 43). 이를 고펠트(Goppelt)는 두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예수의 사역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한정되었다고 한다. 마태복음15: 24에서 예수는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는 가나안 여인에게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의 지상 사역 동안에 그의 제자들을 파송한 것도 이스라엘에게 만이었다. 마태복음10: 5-6에 따르면 예수는 열 둘을 파송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방인과 사마리아인의 고을로도 가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먼저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거부하게
44D. Guthrie,「신약신학」정원태, 김근수 공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8), 806-807.
된다"(21: 33 - 22: 14)고 말하며, "마태의 편집에 의한 결정적인 진술(21: 43)이 옛 언약 백성이 새 언약 백성으로 대치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45)


특별히 중요한 것은 선지자들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대항하는 마태의 논쟁은 디다케와 헤르마스 목자서에 반영된 대로 당시의 교회를 괴롭혔던 문제의 발단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러한 선지자들을 공동체의 중요하고 만족스러운 요소로 등장한다. 카리스마적 선지자요 치유자로서 돌아다니며 활동했던 예수 자신의 기적 행위와 교훈 활동은 특별히 마태의 형식 인용문들 속에서 도출되고 있는데 예수를 좇는 순종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던 제자들의 모델이 되었다. 그리고 매고 푸는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할 수 있는 현자와 서기관들이 있지만 그들은 구별된 그룹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열 두 제자들의 역할과 특별히 베드로의 역할이 강조되기는 해도 그들의 특별한 위치는 원리상의 차이점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역사적 역할의 문제이다.


그들에게 교훈된 모든 것은 원칙적으로 모든 예수의 제자들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마태복음10: 41-42에서 선지자들과 함께 의인과 소자들이 나타나는데(25: 40, 45의 소자는 의인으로도 묘사된다) 그들은 다시 특별한 소집단들에 대한 술어들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 의한 일반적인 명칭이었다.46) 이에 대해 킹스베리(Kingsbury)는 슈바이쳐가 묘사한 어떤 측면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첫째로, 마태복음을 전체적으로 설명할 때 마태교회에 속한 대다수가 가정과 재산을 포기한 자들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둘째로, 그는 주장하기를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일차적으로 치유하고 기적을 행하는자들이었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고 오히려 교육과 설교를 그들의 일차적인 사명으로 삼은자들 이었음을 암시한다고 한다. 때문에 마태교회에 제시된 예수의 삶의 스타일과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동안 그 주변 사람들이 삶의 스타일은 모든 제자들을 위한 문자적인
45L. Goppet,「신약신학Ⅱ」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295-297.
46R. T. France,「마태신학」178.
청사진이 아니고 다민 패러다임적 기능을 했을 뿐이며 제자도의 특정한
요소들이 아니라 그 본질을 설명했다는 것이다.47)


아마도 슈바이쳐의 묘사는 너무 경직되게 그려진 듯하며, 마태의 교회에 비현실적인 것 같다. 물론 마태의 교회는 대부분의 교회들처럼 "부르조아적" 인 요소를 가졌다. 그들은 그들이 찬사를 보낸 급진적인 이상들을 사회 속에서의 삶을 실제적으로 적응시키는 법을 배웠으며, 그들이 사람들 가운데서 비춘 빛은 급진적인 삶의 방식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변화된 가치 척도의 의한 것이었다. 분명하게 말해서 슈바이쳐는 마태의 교회가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역을 평가절하 했음을 시사하려고 의도 했다면 그는 분명히 잘못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슈바이쳐의 묘사 가운데 중요한 것은 마태복음을 교회적 복음서로서 보려는 많은 해석자들을 경향을 암시적으로 탐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발전된 제도적 교회와 교회정치의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가 묘사하는 작은자들 교회의 비구조적이고 거의 평등주의적인 성격은 18장의 분위기를 훨씬 더 정당하게 다룬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마태교회는 그 교사들과 피교육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분명히 매고 푸는 것에 대한 책임은 흔히 그들의 어깨에 맞겨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섬기는 자들이였으며, 또는 적어도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원했으며 그들 가운데에서는 랍비, 아버지, 지도자와 같은 호칭들이(23: 8-10)쓰이지 않는 교회였으며 작은자들의 교회였다.48) 마태복음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늘나라"를 부여받은 자이며(21: 43),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에서 그 나라의 "죄사함"에 참여한 자들이며(1: 21; 26: 28; 27: 38-54), "그 나라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며(13: 19, 23),"그 나라의 비밀"을 알고 있으며(13: 11), "그 나라의 의"를 추구하고(6: 33), "그 나라의 열쇠"를 위임 받았고(16: 19), 그 나라가 오기를 열심히 기도하며(6: 10), "그 나라의 열매"를 맺고(13: 8, 23; 21: 43), 완성의 때에 "그 나라에 들어 갈"(25: 21, 23)자들이며, 그 나라를 "상속
47J. D. Kingsbury, "The Parables of Jesus in Matthew13," JBL 97 (1978): 62-73.
48R. T. France,「마태신학」180-181.
받을"자들(5: 3, 10; 25: 34)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특징은 예수를 거부한 이스라엘과 현격한 차이를 나타낸다.
마태복음의 이런 제사장은 단지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현재 마태 공동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49) 즉 마태는 과거의 제자상을 통하여 지금 그의 공동체가 어떤 모습을 갖추고 있는가를 보여 주려고 하였다. 그의 교회는 지금 대결하고 있는 유대교와는 달리 예수의 제자들처럼 교사와 심판자로서, 중재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마태는 교회가 이스라엘로 부터 하늘나라의 권위를 부여받은 선택받은 공동체로서 "땅"에서 그 나라의 권위를 갖고 실천해 나가는 공동체인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자 하였다. 이를 실천해 나가기 위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호칭이 등장한다.

 

C. 마태의 새로운 호칭

킹스베리에 의하면 "마태가 강조하는 것은 그의 복음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최종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신학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며, 마가는 십자가에 집중적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수난 설화를 다량 할애하는 반면, 마태는 선교적 이야기로서 전개해 나간다"50)고 말한다. 구조상 그의 중심 메시지는 1: 23과 28: 20에 의해,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거하신 하나님은 세상 종말까지 백성인 교회와 함께 하실 것과 종말적 구원시대를 시작함을 선포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마태에게 두 번의 질문을 하였다. 첫번째 질문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더냐"이고, 두번째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질문이었다. 이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 들이니이다"고 대답한다. 동일한 고백이 마가복음에서도 나오는데 마가는
49J. A. Overman, Matthew`s Gospel and Formative Judaism (Mineapolis: Fortress Press, 1990), 124-126.
50J. D. Kingsbury, Jesus Christ (Philadelphia: Fortress, 1975), 64.
"주는 그리스도 입니다"(막8: 29)고 기록한다. 마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첨가 되어 고백을 하는데 이는 역사중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해 할 수 있다. 예수에 대한 새로운 호칭은 무엇인가?

 

1. 그리스도 - 메시야

마태에 의한 예수는 다윗계통의 메시야이자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왕적인 아들이다. 마태가 다윗의 혈통이라는 주제와 "다윗의 자손"이라는 실제의 칭호는 마태복음에 적지 않게 강조된다. 첫절에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는 그리스도와 함께 놓여 있다. 그리고 다윗왕은 실제적이거나 추정적으로나 다윗 계통의 유대왕들의 계보를 추적하는 족보의 구조에서 중심 역할을 한다(1: 6, 17). 마태복음에서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가 복음서 전체에 아홉번 나오는데 그중에서 일곱 번은 마태복음서에만 나오는 것이 독특하다.51)
마태는 그의 복음서 1: 1에 "그리스도"라는 용어의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한다. 이 칭호가 소개하는 족보는 다윗의(따라서 메시야의)혈통을 따라가고 있고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1: 16)로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1: 18에서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리스도는 마태가 이해한 예수의 의미를 최초로 선포하기 위해 선택한 칭호임을 알 수 있다. 프란스(France)는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의 이야기에서 중심이 되는 세가지의 사건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첫번째 경우에 질문자는 "오실 그이"(11: 3)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나 마태는 질문을 야기 시킨 것을 그리스도의 행위라는 것을 도입부에서 분명히 하였다(11: 2). 그는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너무나 한정적이기 때문에 아직도 천국밖에 있는자로서 요한에 의해 사용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두번째 경우는 베드로가 이 칭호를 사용하고(16: 16) 마태는 그의 담화 속
51R. T. France,「마태신학」65.
에서 비록 그것을 깨닫지는 못했을 지라도(16: 21-23) 그것이 바르게 적용되었다고 확인한다(16: 20)는 것이다. 세번째 경우는,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 칭호를 붙이지만(26: 63) 그것은 대제사장이 그 칭호로 의미하고 했던 것 이상의 의미로 예수가 자기의 운명을 설명해 나가는 동안 신속히 스쳐 지나가 버린다. 그리고 그 후에는 단지 조롱이나 고소 거리로 만 나타난다(26: 68; 27: 17, 17, 22). 이 구절 중 어느 것에서도 마태는 예수 자신이 그 칭호를 말하게 하거나 또는 손수 그것을 주장하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태는 분명히 그것을 올바른 칭호라고 믿는다.52)
예수는 폭넓은 진술 속에서 "메시야"로 인정되었다(마1: 1, 16, 17). 그는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오실 자"(11: 2-6)였다. 그리하여 메시야 예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점에 가져온다(1: 1, 17).53)
그러면 예수가 자신이 메시야 임을 알고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이를 연구한 스튜어트(Stewart)는 "예수는 자기 자신이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고 또한 자신이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같은 지식이 있음으로 해서 예수는 광야에서의 큰 시험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이며, 이같은 지식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도 그에게 있었다"고 말하며, 더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자신의 공생애 기간 중 그가 자기 자신이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고 있었던 때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54) 그러나 가이사랴 사건 때 까지는 그 지식이
상당히 감추어져 있었다. 메시야에 관해 은폐하고 침묵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세상에 널리 선전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가 병을 고쳐준 사람에게 그 일을 알리지 말도록 당부했다. 그는 같은 목적을 염두에 두고 고의적으로 수수께끼 같은 "인자"란 명칭을 택해 사용하였다. 이 명칭은 영적인
52Ibid., 450.
53J. D. Kingsbury, Jesus Christ, 453.
54J. S. Stewart, The Life and Teaching of Jesus 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 김득중 역 (서울: 컨콜디아사, 1990), 144.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에게만 예수의 메시야적 위엄을 암시해 줄 수 있는 그런 명칭이었다(단7: 13). 그러나 그 명칭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오직 "들을 귀"를 가진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진리가 완전히 계시되었을 때에도 예수는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16: 20). 예수는 메시야 개념을 그 당시의 정치적인 이해로부터 해방시켜야 했으며, 고난 당하는 메시야 사상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첫 목적이 사람들을 영적으로 고무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일을 하기 전에는 메시야에 대한 선포가 오해만 일으킬 뿐이고 그가 전혀 동정하지 않았던 그런 종류의 세상적이고 열광적인 소망, 즉 결코 성취될 수 없는 소망만을 자극할 뿐이었다. 예수께서 침묵을 지키셨던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서 스튜어트는, "가장 위대한 진리들이 말과 선포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활과 사람에 의해서만 계시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고 말한다.55) 바클레이(Barclay)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분명히 자신을 메시야라고 주장하였으며, 과거와 현재의 어떠한 인물과도 비교될 수 없는 독특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마11: 27; 10: 37; 24: 35; 요10: 30; 14: 6). 우리는 이 점을 그가 사마리아성의 우물가에서 여인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그녀의 마음을 비수로 찔렀다.
본디오 빌라도와의 대화에서도 그 점을 찾아 볼 수 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했을 때, 쏜살같이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요18: 34)라고 도전하였다. 그는 간접적인 의견이나 대리적인 판단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가 원했던 것은 인간 자신의 경험에서 나오는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55Ibid., 141-142.

러한 질문 뒤에 나타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충격적인 감동으로 받아들인 예수의 언급은 중요하다.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여기서 예수는 수년 동안의 모든 인내에 대한 엄청난 보상이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결국 그의 심령의 노고에 대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이렇듯 메시야 의식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그 이유는 메시야란 기름부음자, 승리자, 구속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56)

 

2.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제시하는 것은 마태의 기독론에서 중심이 된다. 마태는 14: 33에 제자들의 고백인 "하나님의 아들" 이란 고백을 16: 14-23에서 재차 언급을 한다. 킹스베리(Kingsbury)는 마태의 신학적 위치는 마가와 같음을 주장한다. 그러기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 칭호가 마가와 마태에게서 여러번 나타나도 주요 강조점은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킹스베리는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마태의 기독론 칭호 중에 중심적인 것이라고 하였다.57)
마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참으로 중요하다. 프란스는 여기에 대한 견해를 두가지로 말하였다. 첫째는, 구약에서 가끔 왕(다윗 또는 그 계승자)을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한 경우들이 있다(삼하7: 14; 시2: 7; 89: 26-27). 이 구절들과 다윗 혈통의 메시야 대망의 발전이 명백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후기 유대 문헌들이 일반적으로 그 용어를 택하여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주목할만 하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잠정적으로 관련있는 유대 문헌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의 사용, 즉 의롭거나 거룩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
56W. Barclay, Jesus as they saw Him [예수의 칭호연구] (서울: 성광문화사, 1979), 62.
57J. D. Kingsbury, Jesus Christ, 64-70.

이라는 하는 사상은 구약시대 이후에 발전된 것이다.58)
결국 버스풋(Verseput)은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 칭호의 역할과 의미"라는 최근의 연구에서 마태의 이 칭호 사용은 현저하게 유대적 모범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과의 특유하고 친밀한 관계를 포함하는 것으로 기독교에서 그것을 채용한 환경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의 기능은 그것이 두드러진 다윗의 자손 칭호와 관련되기 때문에 예 수의 메시야 역할의 본질을 좀 더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탁월한 칭호라는 킹스베리의 주장에 대해 버스풋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알아보지 못한 유대 지도자들이 유죄임을 확증하려는 마태의 목적에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논증한다. 더 나아가 버스풋은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우발적이고 거의 의도적인 방법으로 마태복음서에 들어온 것으로 그 기능은 아들로서의 예수의 순종을 강조함으로써 메시야의 본질을 재정의 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대의 다윗 메시아 대망의 정치적이고 승리적인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는 온화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부르는 사명자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기 때문에 "비메시아적" 메시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메시야 모형을 인식하는데 실패함으로 예수를 죽인다. 따라서 예수가 죽어야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버스풋이 주목한 것처럼 마태에 의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명백한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눅1: 32, 35와 대조하라).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의 특유한 관계를 강조하고 싶어 하는자를 위해 그러한 기원이 얼마나 적절한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59) 마샬(Marshall)은 베드로가 "살아계신"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강조하고 있으며 생기없는 우상들과 대조시키고 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나, 그가 사용한 "아
58Ibid., 471-473. 이것에 대한 증거는 "기독교 이전 문헌들(벤 시라4: 10 ; 지혜서2: 16-18; 5: 5; 솔로몬의 시편13: 9)에서와 아마도 A.D.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랍비전승에서도 발견되는 좀 더 널리 퍼져있는 사상이다"고 프란스는 말한다.
59R. T. France,「마태신학」473-475.
바"와 "아들" 용어에서 하나님을 친근히 의식한 것을 알 수 있다.60) 특히 마태복음11: 27, 누가복음10: 22의 증거들은 예수께서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성에 대한 암시적 주장의 증거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성을 고려할 때, "아들"이라는 칭호가 당시에 메시야적 호칭인지 아닌지를 불문하고라도 예수께서는 이 칭호를 사용하셨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 칭호는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는 신앙 없이는 고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가에게 있어서 이 칭호의 의미는 수난과 부활을 거쳐서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수를 다시 만나기까지 비밀로 남아 있게 되었고, 그 후에 교회가 성립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지만, 마태에게는 예수께서 그의 생존시 교회를 설립하셨으며(16: 17-19), 또 제자들은 수난전에 이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경배한다(마14: 33; 16: 15-16).
그러므로 킹스베리에 의하면 아들되심의 비밀은 이스라엘과 세상에게는 감춰져 있으나 제자들에게는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61)

3. 인 자

마태복음16장에 "인자"라는 칭호는 3가지 모습으로 묘사된다. 즉 지상 사역하는 인자(13절), 비하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하는 인자(21절),62) 사람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키기 위해 묵시적 영광중에 오실 인자(28절)의 모습이다.
프란스는 이 칭호의 배경을 다니엘7: 13-14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의 환상에서 찾아야 하며, 마태가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은, 마태에 앞서 예수가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절들이 예수의 사명으로 성취해야 할
60I. H. Marshall,「신약성서 기독론의 기원」신성수 역 (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6), 59-60.
61J. D. Kingsbury, Jesus Christ, 71-72.
62G. E. Ladd,「신약신학」신성종, 이한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163-164.

모범을 제공한다는 신앙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63) 킹스베리는 "인자"가 다른 기독론적 칭호들과 같은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인자는 '신앙고백적'이 아니라 '공적인 칭호'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다른 칭호들이 예수가 누구인가를 인식하는데 기여하는 (따라서 '당신은---(You are---), '나는---(I am---)과 같은 구절들의 술어로서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인자"는 전혀 그렇게 사용되지 않 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킹스베리는 더 나아가서 그것은 항상 그의 추종자가 아닌 사람들과 관련해서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자기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그 칭호가 사용되나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는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말할 때에, 그리고 그가 머지 않아 그들에게 어떻게 증명 될 것인가를 말할 때에만 사용된다. 그리하여 예수가 이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항상 거리감이 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를 반대하고 거부하는 사람들로 부터 거리감을 두게 한다. 예수가 자신을 인자로 지칭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세상" 즉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특히 반대자들을 목적으로 한것이다.64)
결국 마태는 이 칭호에서 단순한 예수의 칭호가 아닌 그의 사명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암시를 보았던 것이다. 마태복음16: 13에 사용된 "인자"는 15절에서는 "나"로 질문 도중에 전환 되었고, 베드로의 답변에서는 "하나 님의 아들"로 귀착 되었다.
따라서 "나"라는 매개적인 용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적 칭호를 끌어 내기 위한 예수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63R. T. France,「마태신학」463.
64Ibid., 461-462.
Ⅳ. 마태가 바라본 베드로와 교회의 권세

마16: 13-20은 예수의 사역에 분기점이 되는 사건을 다룬다. 이 시점을
기해 자신의 운명과 성격, 십자가와 부활,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를 밝힌다. 13절에 "나" 대신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을 한다. 16절의 베드로의 대답을 들은 예수는 베드로에게 축복을 한다. "바요나(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예수께서 그를 축복한 것은 아버지께서 친히 그에게 메시야, 즉 아들에 관한 계시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면서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선언하고 "천국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축복을 선포한다. 이는 성자에 관한 성부의 계시를 고백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본 장에서는 베드로의 역할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와 권세를 밝혀 보고자 한다.

A. 베드로의 역할

마태의 "에클레시아"라는 단어 사용은 마태복음16: 19과 18: 17의 두 개의 구절에 언급되는데 여기에서의 초점은 이 에클레시아에(또는 좀 더 정확하게 16: 18-19에서 그 기초와 대표가 되는 베드로에게) 부여된 권위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 권위는 "매는 것" 과 "푸는 것"으로 정의 되고 있고 그것은 땅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에서도 적용된다. 두 구절에서 거의 같은 권위를 선언하고 있는 것은(16: 19; 18: 18) 확실히 마태가 교회의 역할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그에게 중요한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 틀림없다.
이 두 구절에서 두드러진 차이는 16: 19에서 단수 대명사와 동사들이 그 구절을 베드로 자신에 대한 선언으로 말하고 있는 반면에, 18: 18에서는 그것들이 복수로서 에클레시아의 공동책임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최근 양극단 경향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베드로의 독특한 역할이 강조되어 왔고, 그 입장을 나타내는 핵심 본문은 16: 17-19이다. 베드로는 그룹 지도자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릿돌이라는 특별하고도 반복될 수 없는 지위를 차지한 다른 제자들과 구별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베드로는 대표로서, 또는 동등자 중 제1인자로서 알려져 왔다. 그리고 그러한 지위는 또 하나의 에클레시아 구절에서 적절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베드로가 독점하고 있는 개인적 "열쇠의 권세"는 18: 18에서 결국 공동체 전체와 공유된 것으로 나타난다.65)
그러면 베드로 역할의 강조와 비판적인 태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베드로 역할의 강조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데 많은 자료의 내용이 마가복음과 밀접하게 병행되고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여러 진술들 특히, 15: 15과 8: 21에서 예수의 선언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을 포함 시킴으로써, 그리고 10: 2에서 열 두제자 중 첫 번째 기술을 통해 그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66)
쿠어트 알란트(Aland)는 베드로는 여러면에서 다른 제자들 보다 앞서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예수님이 열 두제자를 부를 때에 베드로의 이름이 먼저 불리워졌으며 둘째, 베드로는 세베데의 아들들인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으로 부터 특별히 심임을 받았다(야이로의 딸을 일으킨 사건, 예수의 변형되심, 겟세마네 동산 이야기). 셋째, 베드로는 제자들의 대변인이었다(빌립보에서의 신앙고백 등). 넷??, 베드로와 게바라는 이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두 이름 모두 반석(바위)이라는 뜻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영광은 마태복음16: 18-19에서 절정을 이룬다.67)

65R. T. France,「마태신학」391-392.
66Ibid.,
67K. Aland,「인물로 본 초대교회사」(서울: 엠마오출판사, 1992), 49.
2. 베드로의 비판적인 태도

마가복음에서와 같이 베드로의 과오를 부각시키는 것은 마태복음에도 나타난다. 14: 28-31에서 베드로가 물위를 걸으려고 한 이야기는 그의 주도적인 역할을 인정할 뿐 만 아니라 "믿음이 적은자"로서 그가 비참한 실패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마태복음16: 13-23에도 베드로는 위대한 메시야 고백을 함으로써 16: 17-19의 명예를 얻는 반면에, 마태는 그의 독특한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16: 22-23에서 베드로의 오해와 예수가 그를 책망한 전승을 보전할 뿐 만 아니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놀라운 표현을 함으로써 그것을 더욱 강화 시킨다. 교회가 세워질 똑같은 반석이 몇 구절 뒤에서는 거침돌로 나타날 수 있다는 역설이 베드로의 역할의 복잡성에 대한 독특한 마태적 초점을 제공한다. 천국열쇠의 소유자는 오히려 그 오류를 통해서 오류를 범하기 쉬운 다른 제자들에 대한 경고와 모범을 제공한다.
마태의 베드로 소개에서 나타나는 이같은 이중 때문에 단언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68) 킹스베리(Kingsbury)는 마태가 베드로에게 "구속사의 최고직"으로 묘사되는 특유한 지위를 부여하는 동시에 그를 대표적인 제자로 보고 그의 실패와 그의 지도적 역할에서 다른 제자들을 위한 모범을 제공해 주고 있다고 주장한다.69) 최초 제자 그룹의 지도자인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 이후에 예루살렘의 초기 예수 운동의 지도자로서 또한 공동체의 생활과 규율을 결정하는 일에 주도권을 가짐으로써"열쇠를 쥔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도록 요청받았다(예,행1: 15-23; 5: 1-11; 8: 14-25; 10: 1-11: 18). 그러나 이런 사건들에서 조차도 배드로는 혼자 활동을 하고 있지 않으며(행8: 14 이하에서 요한이 포함), 확실한 권위를 가진자로 활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의 역할은 한편으로는 머릿돌로서의 "구속사적 최고직",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서는 동등자 중 제1인자로서
68R. T. France,「마태신학」393.
69J. D. Kingsbury, "The Figure of Peter in Matthew's Gospel as a Thelogical Problem," JBL98. 1. (March. 1979), 67-83.
의 "구속사적 최고직"으로서 작용했던 지도력 사이의 긴장을 잘 반영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점에서 비취어 볼 때 16: 19의 단수에서 18: 18의 복수로의 발전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마태가 보는 베드로의 역할관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 운동의 초기 발전 과정에서 개인자격으로 행사하는 것이 타당했던 특별한 권위는 원칙적으로 그것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대표한 그에 의해서 행사된 것이었고, 동등하게 공동체가 공동으로 행사 할 수 있는 것이었다.70)

 

B.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

1. 반석의 의미

예수께서 베드로의 대답에 대하여 칭찬하면서 그에게 반석이라는 새 이름을 주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을 약속하였다. 이 축복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흔쾌히 받아 들였음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새 이름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예수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 18)라고 했으므로, 교회의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반석"의 의미를 밝히는 것이 필수적이다. 어떤이들은 헬라어의 어휘적 유희에 근거하여 "베드로"(petros)와 "반석"(petra)은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성(gender)의 변화는
강조점이 사람에서 내용으로 바뀌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태여 어휘적 유희에 호소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람어에서는 두 단어를 모두 kephas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 대한 셈계의 배경이 선명하다는 점에 비취어(바요나, 혈육) 아람어의 해석이 본문에 정확한 이해에 길잡이가 될 것이다.71) 불트만(Bultmann)은 이 말이 팔레스틴의 초기 기독교회에서 베드로를 교회의 설립자, 지도자로 추대하면서 부활하신
70R. T. France,「마태신학」394.
71D. Guthrie,「신약신학4」29.
자로 하여금 그에게 대한 축복을 말하게 한 것이라고 본다.72) 보른캄(Bornkamm)이나 콘첼만(Conzelmann), 그리고 슈바이쳐(Schweizer) 등은 이 구절들의 역사적 진정성을 부인하는데, 그들은 그 구절들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역할로 돌리고 있다.73) 굴더(Goulder)는 이러한 특성은 아람어에서 기인될 수도 있지만 마태의 셈어적 희랍어에 기인될 수도 있다고 보며, 이 구절들이 16절의 베드로의 고백 내용에 상응하는 체계적 답변으로서 마태가 창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74)이 견해의 모순점은 그 귀절들이 마태의 창작이라면 그는 평소와 같이 "바요나" 라는 아람어적인 표현을 피했을 것이며, 베드로라고 하는 이름을 4장 18절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14장 33절에 미리 앞세워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알란트(Aland)는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만일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 말씀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를 끌어 낸다면 그것은 성경의 기반에서 떠난 것이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그 위에 교회를 세우기 원했던 반석이 될 것이라는 말씀은 베드로를 향한 것이지 로마의 교황을 향해서 하신 말씀은 아니었다. 베드로가 매고 푸는 권세, 즉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마태복음18: 18은 그 동일한 권세를 사도들 전부에게,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인 교회의 성직자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전교회에 위임했다고 말씀하고 있다"고 말한다.75)
쿨만에 의하면, 반석은 고백자 베드로(즉 예수를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대표자) 라고 본다. 만일 카톨릭 전통이 이 구절을 예수께서 베드로와 같은 한 인물에게 오고 올 모든 시대에서 그의 교
회를 인도하게끔 하셨다는 이상한 의미로 해석하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이 구절이 지니고 있는 자연스런 이의를 달지 않았을 것이다. 즉, 예수
72R. Bultmann,「공관복음서 전승사」허혁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0), 32.
73H. Conzelmann,「신약성서신학」김철손외 공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49. 그는 이 구절이 특히 베드로의 권위에 의지한 시리아 교회에서 생겨난 것으로 결론짓는다.
74M. D. Goulder, Midrash and Lection in Matthew (London: SPCK, 1974), 386.
75K. Aland,「인물로 본 초대 교회사」50-51.
님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로서 기존의 성전대신(참조.마26: 60; 요2: 19) 성자에 관한 성부의 계시를 고백하는 베드로가 기초가 되는 자신의 교회를 세우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본 구절의 의미를 연장 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베드로가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의 적용을 정당하게 연장 시키려면 베드로는 그와 비슷한 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표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베드로의 후계자들은 교황청에 있는 자들에게만 국한 되지 않고 훨씬 더 넓게 적용되어야 한다. 사도들이 본문을 카톨릭 교회처럼 이해하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제자들은 예수가 베드로라는 인물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의도에서 본 말씀을 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는 점도 확실하다. 만약 베드로에게 어떤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면 그의 우월성은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서 종노릇을 했다는 데서 찾는 것이 낫다. 그는 예수를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로 먼저 고백한 자였고 유대인(행2장)과 이방인(행10장) 에게 부활신앙을 처음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증거를 내세울 수는 없다. 예수가 본절의 말씀에 기초해서 일종의 계급체제를 수립하려고 시도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76)
예수는 이 새 이스라엘 즉 교회를 pu,lai a[|dou(음부의 권세, 하데스의 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pu,lai a[|dou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음부의 권세

계시록에서는 항상 죽음(qana.toj)과 연결시켜 사용한다(계시록1: 18, 욥기38:17). 또한 구약에서는 스올(lAav)은 죽음 이외의 어떤 다른 의미를 포 함하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의 문이란 표현이 구약에서 자주 나타나며(사38: 10, 시편107: 18, 시편9: 13, 욥기38: 1, 7 등) 문은 힘 또는 군사적인
76D. Guthrie,「신약신학4」30.
힘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서 흔히 사용된다.77) 따라서 하데스의 문은 죽음의 세력을 의미하며 이 구절의 의미는 이제 죽음의 세력은 더 이상 죽은 자들을 사망에 붙들어 놓을 수 없으며 교회는 사람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뜻이 된다. 메시야가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였으므로 그의 공동체도 같은 승리를 하게 될 것이다. "음부의 권세"는 사실상 여기서 죽음을 뜻하는 하데스(Hades)와 동일어이다. 이 경우라면, 죽음이 그리스도에게 무력했으므로 그의 부활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가 함축되어 있을 수도 있다.78)

C. '매고' '푸는' 권세

마태복음16: 19을 보면 예수는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그 열쇠를 통해 이룰 직무를 19절 하반부에서 설명한다. 그 직무란 "매고 푸는 일"이다. 열쇠란 권위를 가리킬까? 아니면 단순히 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만 관련된 것일까? 그 해답은 열쇠에 대한 말을 그 다음에 나오는 메고 푼다는 구절에 얼마나 밀착시키느냐에 따라서 어느정도 결정 된다. 만약 이말이 치리에 대한 것이라면 권위의 개념이 지배적이고 입장 곧 천국으로 들어가는 개념이 우선적이라면 열쇠는 베드로가 예수의 대언자로서 유대인(행2장)과 이방인(행10장)에게 천국메시지를 먼저 선포했다는 우선 순위의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1. 천국열쇠의 의미

베드로에게 주어진 이 천국열쇠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천국의 열쇠란 말은 가르치는 직무를 상징할 수도 있다. 마태복음23: 13에서
77J. P. Meier, The Vision of Matthew: Christ, Church, and Morality in the First Gospel (New York: Paulist Press, 1979), 177.
78D. Guthrie,「신약신학4」31.
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사람들 앞에서 천국 문을 닫고 사람들이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것이었다. 만일,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가 이것이라면 매고 푸는 권세, 즉 들어갈 수 없다거나 들어가도록 허락되었다고 선언하는 권세는 이 가르치는 권한과 어울린다.79) 이는 예수가 하나님을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깨달음이 그를 하늘 왕국으로 들어가게 하는 열쇠로서 베드로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위임된 영적인 지식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침으로 하늘나라로 인도하며, 그들이 사역을 통하여 그 계시된 지식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옴이 허용될것이나 그렇지 않은 자는 금지되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의 질서이다.
그러면 이것이 왜 천국의 질서인가? 보른캄이 직역한데로 16: 18-19절 의 세 개의 미래동사 세우리라(oivkodomh,sw) 이기지 못하리라(ouv katiscu,so
usin) 주리라(dw,sw)는 지상적 미래로서 다가오는 왕국의 미래와 장래의 심판적 미래와는 구별되며 베드로는 부활이후 재림 이전의 기간동안 열쇠의 직무를 받는다고 보아야 한다.80) 이렇게 그의 직무는 지상적이고 천상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가 천국의 열쇠를 받은 것은 19절에서 설명된 것처럼 지상에서의 그의 사역은 오는 왕국에서 확증된 것이기 ??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주어진 이러한 열쇠의 직무는 유일회적인 것도 배타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모든 제자들에게 열려있는 것이다.81) 또한 열쇠는 천국의 열쇠라고 했지 교회의 열쇠라고 하지 않은 점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직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더욱이 누가복음11장 52절(비교.막23: 13)에 비취어서 열쇠를 해석 할 수도 있다. 거기서 예수는 율법사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져감으로서 다른 사람들도 못들어 가도록 길을 막는다고 비난하였다. 만일 마태복음16: 19을 같은 뜻으로 이해한다면 베
79L. Morris. 「신약신학」황영철, 김원주 공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2), 269.
80G. Bornkamm, G. Barth and H. J. Held, Tradition and Interpretationin in Matthew (London: SCM Press, 1963), 45.
81박종기,「베드로의 고백설화에 나타난 마태의 신학연구」 (석사학위 논문, 장로회 신학 대학원, 1985. 서울), 29.
드로는 천국 메시지를 선포하는 특별한 중계자가되는 셈이다.82)

 

2. 매고 푸는 권세

마태교회는 스스로 하나님의 새 백성(새 이스라엘)으로 인식하였고, 그들 공동체가 바리새적 유대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으며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성을 맺고 있는 공동체라고 인식하였다.
마태복음16: 19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권세를 주는 장면인데 베드로는 예수에게서 "하늘"과"땅"을 매고 푸는 권세를 받는다. 교회라는 말이 16: 18절과 18: 18절에 나타나며 문맥은 교회론적 상황에 있다. 본문의 구성, 어휘, 어순으로 보아 어느 것이 원문에 가까운 것인지는 구분이 어렵다. 그러나 하늘이라는 표현에서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16: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kai. dw,sw soi ta.j klei/j th/j basilei,aj tw/n ouvranw/nkai. o] eva.n dh,sh|j evpi. th/j gh/j( e;stai dedeme,non evn toi/j ouvranoi/jkai. o] eva.n lu,sh|j evpi. th/j gh/j( e;stai lelume,non evn toi/j ouvranoi/j), 마태복음18장: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VAmh.n le,gw u`mi/n( o[sa eva.n dh,shte evpi. th/j gh/j( e;stai dedeme,na evn tw/| ouvranw/|kai. o[sa eva.n lu,shte evpi. th/j gh/j( e;stai lelume,na evn tw/| ouvranw/|)
16: 19"하늘에서도"(evn toi/j ouvranoi/j) ----- 18: 18"하늘에"(evn ouvranw) 이는 단수형 "하늘에"(evn ouvranw)는 두 명사 "땅----하늘"(th/ gh/ ---------ouvranw)과 결합된 것보다 일관성이 있고 문장 연결인 "땅위에-----하늘에"(evpi. th/j gh/j ------- ouvranw)도 마태의 다른 부분(6: 10, 6: 19-20)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렇게 18장의 복수형이 16장의 단수형보다 전후 문맥과 조화를 이루어서 그 뜻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사고의

82D. Guthrie,「신약신학4」31.
흐름에 있어서는 16: 19이 보다 일관성 있게 보인다. 그것은 "그리고"(kai) 라는 연결사가 보다 부드러운 진행을 나타내 문맥을 이어주며 이인칭 단수형 "매고"----"푸는"(dh,shj ----lu,shj)것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부분 17절에 "네가 복이 있다---ㅡ그대에게"(Maka,rioj ei=------soi) 18절에 "----그대에게---그대는 베드로라"(----soi------su. ei= pe,troj)19절에 "----내가 그대에게 줄 것이다"(-----dw,sw soi)과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하늘에서 매이고 하늘에서 풀린다는 서로 반대되는 뜻을 가진 이 구절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분명한 열쇠"에 대해서 베드로에 게 주어진 말씀과 연결된다.83)
이런점에서 보면 16: 19보다는 18: 18의 뜻이 덜 분명해진다.
그 이유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Amh.n le,gw u`mi/n)라는 구절이 중간에 삽입되어 두번째 구성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고 2인칭 복수형"매고"(dh,shte)-----"풀고"(lu,shte)는 2인칭 단수형으로 언급된 앞부분(15-17절)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땅에서---하늘에서"라는 표현이 다음구절(19절)에 반복되나 죄진 형제와 화해하는 규율과 관계시켜 볼 때 뜻이 분명하지 않다. 일관성 있는 문맥을 가진 16: 19이 원래적인 것인지 후대의 것인지는 알기가 어렵지만 16: 19에서 주어진 권세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질 가능성이 열려 있었던 점은 16장에서 베드로 한 사람에게 주어진 권세가 18장에서는 교회 공동체 전체에게 주어진 것을 확실하게 뒷받침해 준다.84)
오버만(Overman)은 마태의 신학적 의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재 그의 공동체는 공동체가 행동과 결정을 내릴 때에 그것은 하늘의 능력과 권세를 가져온다. 마태 공동체는 하늘 나라의 질서와 가치를 그 자신이 구체화하여 나타내고 있다고 하였다. 그 공동체의 "매고" "푸는" 능력 가운데 그 공동체는 "하늘 나라의 능력과 권세"를 계속해서 실행할 수 있
83G. Bornkamm, The Authority to bind and loose in the Church in Matthew's Gospel, The Interpretation of Matthew, ed. (Philadelphia: Fortress, 1983), 88.
84W. G. Thompson, Matthew's Advice to Divided Community (Matthew17: 22-18: 35)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70), 194.
다고 보았다. 땅에서 하는 그들의 행동과 결정은 하늘에서도 매이거나 푼다. 즉, 마태교회는 비록 땅에 있지만 그들의 모든 기능과 능력은 하늘로부터 부여 받아 행사하고 있음을 마태는 말하고자 한 것이다. 마태는 그들의 공동체가 "하늘의 권세"와 함께 행동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 것이다.85)
보른캄(Bornkamm)도 "매고" "푸는" 권세가 마가복음과는 달리 다른 마태의 독특한 구성이며 베드로에게 주어진 권세가 지역 기독교회 공동 체로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전승의 가르침, 보호자 전달자로서 베드로가 가졌던 권위가 마태교회 구성원 전체에게 넘겨졌고 그 권위를 받은 마태교회는 자체의 질서유지를 위해 사용했다고 본다.86) 물론 18장에 나타난 교회 상황이 공식적이지 않고 구절의 초점이 주로 목회적 관심에 있다 하더라도 16: 19과 18: 18의 문구가 제자 공동체와 그 지도자이며 열쇠를 소유한 집사로서 베드로의 할라카적인 판결에 위엄있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 열쇠들은 지상조직이 아니라 천국의 것들이고 또 지상의 판결과 하늘의 판결사이에 단절되지 않는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위험스럽게도 백지 위임장 같이 보인다. 마태는 이 문구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제자공동체 회원들이 결정에 확실한 권위를 부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 무오류의 약속이 내포되어 있는가?
여기에서 두가지 고려점을 주의해야 한다.87)
첫째, 제자들 전체와 베드로 개인의 명백한 오류성이 있다. 마태는 마가전승의 두드러진 특징인 이 점을 얼버 무리지 않을 뿐 아니라 마태 특유의 "믿음이 적은자"와 "주저한다"와 "의심한다"와 같은 용어들을 제자 전체에게와 베드로에게 사용하고 있다. 또 이미 언급한 것처럼 베드로의
85J. A. Overman, Matthew's Gospel and Formative Judaism (Mineapolis: Fortress Press, 1990), 104.
86G. Bornkamm, The Authority to bind and loose in the Church in Matthew's Gospel, The Interpretation of Matthew, ed. 88.
87R. T. France,「마태신학」399.
머릿돌로써 특별한 역할과 거침돌로서의 실제 역할이라는 인상적인 평행구에서 그리고 18: 18에 선행하는 구절들에서 판결 내리는 교회를 구성한 바로 그 제자들 자신이 서로에게 거침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둘째, 16: 18-19에서 교회는 베드로의 교회가 아니라 예수에 의해 세워진 예수의 교회이다. 베드로에게 열쇠를 준 것은 바로 예수이다. 그리고 18: 18 뒤에는 그들의 연합된 요청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고 그들의 모임 중에는 예수 자신이 임재한다는 "매고" "푸는" 그들의 권위의 근거에 대한 설명이 바로 뒤따른다.
이 구절들의 어법은 그들이 원래 현재의 문맥과는 별도로 존재 해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88) 그러나 그것은 마태가 그 구절들을 18: 18다음에 놓음으로서 그의 독자들이 땅에서와 하늘에서 매고 푸는 것 사이의 연결을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 문맥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결코 축소 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지상의 독재자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예수의 아버지에게 탄원한 자들이다. 이러한 접근의 근거는 예수 자신이 그 이름으로 모인 제자들 그룹 중에 임재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미 1: 23(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에서 암시되고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한 복음의 마지막 말씀으로 승리의 명료성을 받게 된 기독론적 실질적 적용 가능성을 본다. 그렇다면 교회의 권위는 독립적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 가운데서 예수 자신이 계속 중심점이 되는 사람들에게 위임된 예수의 권위이다. 교회의 결정과 베드로의 결정은 이미 하늘에서 결정되어 지상에 있는 그의 대표들이 통로를 결정해서 선언된 예수의 결정이다.89)

88"풀다"와 "매다"라는 용어는 랍비들의 율법에서 따온 것이다. 이 용어들이 의미하는 첫번째는 "기존의 교리"를 옳다 그르다고 판정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두번째 의미는 누군가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 시키거나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권한이었다. 파문은 일시적인 징계 조치거나 번복할 수 없이 부과 될 수 있는 분명한 제거였다. 이상의 두가지 의미는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교리적인 문제나 법적인 문제가 있을 때 유권적으로 사용되던 성서에서 이 권한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한은 하늘에서 나아가는 길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활짝 열리거나 닫히게 되는 수단이었다.
89R. T. France,「마태신학」399-400.


D. 가르치는 권세(마16: 13-20)

예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마16: 20"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이는 마태교회가 가르치는 권세를 부여 받았음을 보여준다.
마16: 13-20은 막8: 27-30, 눅9: 18-21과 병행한다. 그러나 마16: 17-19은 마가나 누가의 본문에서 병행구절을 발견할 수 없다. 마16: 17-19의 내용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어 하늘과 땅을 매거 나, 푸는 권세를 위임했음을 보여준다.
마이니어(Minear)는 그의 연구를 "마태 : 교사의 복음서"(Matthew : the Teacher's Gospel)라고 제목을 붙였다. 왜냐하면 그는 "이 복음서의 기자가 기독교 회중의 교사들에게 최대한의 도움을 주기 위해 그의 책을 계획한 교사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자를 교회의 생활에서 일어난 특수한 문제들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적용하는 가르침의 특별 은사를 가진 교회 지도자로서 묘사하고 있다. 물론 예수의 사역을 이야기 할 때 동사 "가르치다"(didasvkw), 명사 "가르침"(didach), 그리고 "교사"(didaskaloj)와 같은 가르침에 관한 특수 어휘들을 마태가 마가보다 훨씬 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90)
정말로 마태는 제자들이 예수에 대해 좀더 높여진 "주"(kurij) 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되면서 교사(didaskaloj)라는 명칭을 사용을 신중하게 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를 단순히 선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외부인들과 적대자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didaskaloj가 예수에 대한 칭호로 부적합 할지라도, 마태에 따르면 가르침 그리고 (특히 율법 문제와 관련된 랍비로서의 가르침)은 그의 사역의 한 부분이었고 상대적으로
90예수와 관련된 통계: didasvkw(가르치다) - 막15, 마9, 눅15 ; didach(가르침) - 막5, 마2, 눅1 ; didaskaloj(교사) - 막12, 마9, 눅13. 복음서들 간의 길이의 차이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예수의 활동에 이러한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마태보다는 오히려 마가임을 보여준다. 상세한 연구는 R. T. France,「마태신학」이한수 역 (서울: 도서출판엠마오, 1995, 410-411를 보라.

특정 단어군을 현저하지 못한 사용은 이 복음서의 구조와 내용면에서 실제적인 가르침 자료의 현저함에 대비하여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마태복음은 마지막 부분에서 중요한 변화가 나타난다.
이제까지 교사로 묘사되어 왔던 분은 예수였지 그의 제자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28: 20에서 부활한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는" 책임을 그 제자들에게 위임한다.
궁극적으로 공동체는 오직 한 분 교사만(23: 8)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임된 권위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가르침의 내용을 형성한 한 분 교사의 명령이고 이 명령을 수행할 때 항상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약속한(28: 20) 분도 바로 그분이다. 마태의 그 자신의 작업과 교회에서의 가르침은 역할은 중요성에 대한 이해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이
위임된 가르침의 권위이다.91) 슈바이쳐(Schwweizer)는 16: 19의 "매고", "푸는" 권세를 랍비적 권세와 연결시켜 설명하는데, 그에 따르면, "매다"와 "푼다"는 계명을 구속력을 있게 하거나 또는 구속력이 없도록 해석하는 가르침의 권한을 의미한다. 마태는 본문(마16; 13-20)을 통해서 그의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율법 해석에 있어서 유대교의 랍비 보다도 더욱 우월하게 해서(13: 52)할 수 있는 군위를 부활 -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받았고, 자신의 공동체만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모든 것을 가르치고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92)

 

91R. T. France, 「마태신학」410-411.
92E. Schweizer,「마태오 복음」국제성서주석 Vol. 29.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2), 360.
Ⅴ. 공동체의 참된 본질

마태는 "내 교회"(16: 18)라는 명칭을 이스라엘을 가리켜 "야웨의 에클레시아" 또는 "총회"라고 말하는 신명기와 역대기로부터 착상하여 끌어왔다. 즉 "교회"는 언약에 성실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신실한 남은자가 되었다.
이에 반해 초대교회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불신하였던 그들의 조상처럼 예수를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마27: 24-25).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와 깊게 결속된 공동체로서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새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21: 43). 고펠트(Goppelt) 역시 이같은 주장에 동의 하면서 마태에 따르면, "예수의 부르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거부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게 되었다(마태복음15: 24; 10: 5-6)"고 말한다.93)
본 장에서는 새롭게 형성된 교회 공동체 속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제자는 누구이며, 이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의 장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가를 밝히며,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접근해 보고자 한다.

 

A. 마태의 제자도


마태가 예수를 좇는 사람들을 가리켜 사용하는 빈번하게 사용하는 용어가 있다. 그 용어는 어떤 것일까?

1. 제자(maqhth,j)

마태는 이 용어를 누구에게 적용하여 사용하였는가?

93L. Goppelt,「신약신학Ⅱ」박문재 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295-297.
스트레커(Strecker)는 "이 용어를 열 두 제자에 한해서만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명사의 의미를 제한하는 주장을 하려면 특별한 해명이 필요하다. 8: 21(8: 19의 서기관을 또 다른 제자라고 은연 중에 암시한다), 10: 24f; 10: 42 등의 몇 구절이 있다. 이러한 근거에서 프르치빌스키(Przybylski)는 스트레커의 주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더 나아가 마태의 동사 "제자가 되다"(maqhvteuw)94)(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오직 행14: 21에서만 사용된 동사)의 용례 세 가지가 그런 제한을 허용치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28: 19에서 예수 추종자들의 계속되는 사명을 설명하는 것이 이동사이다. 만일 마태의 명사와 동사의 사용 사이에 이상한 일관성이 있다면, "제자"(maqhth,j)는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 중에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28: 19)이 언급하는 열한 제자들을 포함하여)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계속되는 사명을 통해 그에게 나아가게 될 사람들까지도 가리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maqhth,j)는 과거, 현재, 미래에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 적합한 용어이다.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 중에 그와 함께 있었던 제자(maqhth,j)들은 원칙적으로 나중에 온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루츠(Luz)는 "제자(maqhth,j)는 마태의 시대에 후속되는 예수의 추종자들을 표시하기에 명쾌하다"(transparent) 라는 용어를 사용을 한다. 기자가 복음서를 기록하는데 우선적 관심사들 중 한 가지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잘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8: 19에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은 마태의 제자도의 의미 이해에 대한 유용한 개요를 제공해 준다. 여기서 명령법 "제자가 되다"(maqhvteuw)는 명백한 간접 목적어를 갖고 있지 않으나, 그것의 의미는 뒤이은 두 개의
94maqhvteuw: 이 단어는 자동사적으로 "학생이 되다를 의미한다." 마태복음25: 57의 한 독법은 아리마대 요셉에 대해 이 용어를 사용한다. 요셉은 예수의 제자라고 언급한다. 독특한 타동사 용법으로서(마13: 52; 28: 19; 행14: 21) 신약은 이 용어를 "제자로 만들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이러한 의미 배후에는 부르심이 예수의 제자직의 기초라는 신약의 믿음이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게르하르트 킷텔,「신약성서 신학사전」(서울: 요단출판사, 1996), 465를 보라.

분사절에 의해 드러난다. 즉, 제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며, "예수가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킬"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첫번째 절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충성의 관계이고, 두번째 절에서는 좀더 예수의 제한된 관계이다. 그러므로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예수의 약속으로 결론지어지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12 제자의 역할을 우선적으로 "예수와 함께 있는 것"(막3: 14)으로 규정한 것은 마태가 아닌 마가이지만, 마태 역시 분명히 이 점을 제자도의 본질로 여기고 있다.95) 킹스베리 또한 마태에서 반복되는 구절인 "나와 함께"(12: 30), "우리와 함께"(1: 23), "너희와 함께"(28: 20)에 관심을 갖는다.96) 즉 이 구절은 마태교회와 높임 받으신 예수그리스도의 결속을 표현하는 전문용어인 것이다. 마태는 예수와 함께 있음이라는 개념과 그 관련 관용구인 예수의 "너희와 함께" 있음이란 말을 사용할 때 예수와의 밀접한 관계를 오로지 그의 제자들에게만 제한하고 있다. 마태는 위의 전문 용어를 통해서 "교회"가 높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았다. 마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갖고 있는 대리자(16: 18-19)로서, 또한 모든 족속에게 선교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은 공동체(28: 18-20)로서 그의 교회를 인식하고 있었다.

2. 따르다(avkolou,qew)

마태복음4: 8-22에서 첫번째 제자들을 부를 때에 그들의 반응을 묘사한 것은 이 동사이다. 그리고 많은 곳에서 제자단에 소속되기 위한 특수한 용어인 것처럼 보인다(예: 8: 19; 9: 9; 19: 21, 27f). 두번의 "예수를 따름"은 제자도의 요구로 나타난 "십자가를 짐"과 쌍을 이룬다(10: 38; 16: 24, 그리고 이 두 경우에 있어서 그것은 4: 19f에서 처음부사 "뒤에"와 암시적으로 연결된다). 반면에 이 동사는 "앞에서 감"과 쌍을 이루는 21: 9

95R. T. France,「마태신학」417-418.
96J. D. Kingsbury,「설교자를 위한 선포주석: 마태복음」황성규 역 (서울: 컨콜디아사, 1983), 103-107.
이나 회당장의 딸에게 가기 위해 예수와 제자들이 회당장을 따르는 9: 19에서 처럼 순전히 문자적인 의미 사이에 분명히 제자단 밖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많은 흥미로운 구절들이 있다. 무리들은 4: 25; 8: 1; 12: 15; 14: 13; 19: 2; 20: 29에서 그를 따른다. 이 "무리들"은 "제자들"(5: 1; 14: 15)과 구별되는 한편, 예수에 대한 열광이나 그의 가르침에 대한 평가 또는 병고침의 희망으로 그곳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나서 고침받은 결과로 예수를 "따르는" 소경들이 있다(20: 34; 다른 사람들은 고침받기 위해서 그를 "따랐다". 9: 27),97) 이런 경우 이 동사의 사용이 그들이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정도가 다른 "따름"이 존재하는가?
킹스베리(Kingsbury)는 이 동사의 "특수한" 제자도의 의미와 좀더 문자적이거나 중립적인 용법들과의 구분은 예수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과 "대가"라는 두가지 모티프의 맥락 속에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98)이같은 근거에서 그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적어도 20: 34에서 그 의미로 받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무리와 고침받은 사람들과 관련된 이 동사의 사용이 제자도의 의미를 갖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같은 킹스베리의 은유적 의미를 구분하는 문맥적 기준이 너무나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 할지라도 문맥이 그것을 다르게 제시하지 않는 곳에서 동사 그 자체는 제자들의 특수한 용어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그의 신중론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은유적 의미가 분명히 의도된 곳에서 이 동사는 명사 "제자"(maqhth,j)처럼 우리로 하여금 제자도의 본질인 예수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99)"따르다"(avkolouqew)가 제자도를 의미하는 용어로 두 번이나 나타난 8: 18-22에서 두명의 잠재적인 "추종자들"과의 만남에 이어 곧바로 나온다. 그러므로 마태가 23절에서 이 용어를 소개한 것은 뒤이어 나오는 폭풍을 잔잔케 하신 이야기가 예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제자도에 대한 우화로서 포함되었음을 암시하기 위해 취해
97R. T. France,「마태신학」419.
98J. D. Kingsbury ; JBL 97 (1978): 58.
99R. T. France,「마태신학」420.
진 것이다. 헬드(Held)는 마태복음의 다른 이적 이야기들에서 이와같은 목적을 찾아 내었고, 게하르드슨(Gerhardsson)은 이것은 특히 자연적인 기적들에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제자 그리고 따르는 자로서 예수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그 관계로 인해 서로간에 한 공동체 속에 소속되어짐을 알게 된다. 그들은 형제들이 된다. 제자공동체 속에 상호 관계를 논할 때에 18: 15-17, 21, 35에서 관계의 본질은 "형제"라는 용어에 집중된다. 이는 단순한 형제가 아니라 예수의 형제들이라는 점이다. 25: 40에서 "형제들"을 "지극히 작은자들"로 지칭한 것은 또 하나 마태의 독특한 "작은자들"을 상기 시켜준다. 사실상 25: 45에서 "형제들"이 빠지고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는 용어로만 용어를 사용한다. 여기에 10: 40-42의 사상과 밀접한 병행이 있다. 이 구절에서 "너희"(제자들)를 영접하는 것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자 중 하나"에게 제자의 이름으로 제공된 친절행위는 상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은 자"(mikroi)를 "제자"(maqhth,j)의 동의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최우선적으로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연적인 가족 관계를 초월한 충성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예수에 속해 있다. 그들 서로간에 공동체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그들의 예수와의 관계이므로 이 공동체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형제로 인정할 수 있고 한 가족의 일원으로 서로를 돌볼 수 있다. 그들 중 누구도 공동체 내에서 지위에 따른 우월함을 주장할 수는 없으나, 모두가 그들 자신을 또 서로를 "작은 자들"로서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마태가 그리는 교회의 모습이다.100)

 

B. 교회와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종말론적인 견해와 비종말론적인 견해로 나누어진다.
오리겐(Origen)과 어거스틴(Agustine)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비종말
100Ibid., 421-424.

론적인 해석을 내린 학자들이다. 특히 어거스틴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동일시 하여 교회를 신의 도성(City of God)으로 여겼으며, "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세상에 들어왔으며 진행하고 있는 과정이므로 더 이상의 아무런 미래적 성취를 기대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101) 이와같은 어거스틴의 주장은 개혁주의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구속받은 성도들의 각자의 마음 속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역이었다.
근대의 비종말론적인 견해는 알버트 리츨(Ritschle)로 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리츨은 "하나님 나라는 구약에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창안한 사상으로 복음의 사랑의 법을 실행 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로 구성되는 윤리-종교적 공동체(Ethical- Religious)로 이해"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이미 세상 가운데 있으며 사람들의 상호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내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강한 힘에 의한 외부적인 도래가 아니며 이 세대의 종말도 아니며 이미 이 세상 가운데 온 것을 사람들의 사랑에 의하여 완성되는 것이다"라고 리츨은 말하고 있다.102)
이에 반하여 종말론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도 나타났다. 기독교 역사의 처음 2세기 동안 교부들 사이에서는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요하네스 바이스(Weiss)는 리츨이 주장하는 하나님 나라는 윤리-종교적 공동체 라는 사상을 반박 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창안한 사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유대의 묵시문학적 배경을 갖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해 할 수 없다"고 전제 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종말을 뜻하기에 이는 전적으로 미래적인 사건이

101G. Vos, The Teaching of Jesus Concerning the Kingdom of God and the Church (New York: American Tract Socity, 1903), 150.
102G. E. Ladd,「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신성종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2), 23.
요, 종말론적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아직까지 이 세상에 종말이 오지 않았으므로 아직 하나님의 나라는 현실 세계에 도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103) 종말론적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알버트 슈바이처(Schweitzer)는 바이스가 연구한 예수님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예수의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 하고자 하였다. 그는 "예수의 행동을 살펴보면 예수에게 항상 종말론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살아온 행동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104)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거대한 종말론적 파국의 발단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다드(Dodd)는 그의 저서 왕국의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세상에 도래하였다는 전제하에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을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인정 여부와는 상관없이 현재적 사실로 선포되어 졌음을 보게 되며, 그 종말은 미래에서 현실로, 대망에서 경험의 영역으로 옮겨 왔다"고 그는 주장한다.105) 그는 또한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현실의 세계로 들어옴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앞으로의 세대 속으로도 예수의 인격을 통하여 들어갈 것이라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를 주장한다.106)
브루스 M 메츠거 (Metzg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본질상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이 통치는 주권적인 하나님과 각 개인의

103G. E .Ladd,「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20.(이와같은 주장은 하르낙(Harnack)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르낙은 그의 저서 기독교는 무엇인가?(What is christianity )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며 모든 사람들이 형제가 되며 영혼의 무한한 가치를 인식 시키어 사랑의 윤리적 교훈을 인식하는 순수한 예언 신앙으로 이해 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하나님 나라는 인류의 모든 사람이 함께 알 수 있게 임하는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각 개인이 우선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 하였다.이에 대해 G. E. Ladd, A Theology of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ds Publishing Co., 1974, 60을 보라)
104H. Ridderbos, The Comming of the Kingdom, 14.
105G. E. Ladd,「하나님 나라에 관한 중요한 문제들」35.
106신성종,「신약신학」(서울: 예수교문서선교회, 1981), 113.
인격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이냐 ? 미래적이냐 ? 하는 질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이유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두 가지 모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인정하도록 촉구하시는 동시에 또한 사람의 강팍한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주권이 보편적이고도 완전한 수용이 더 이상 방해받지 않게 될 새 시대를 소망하도록 인도하신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었다"고 한다.107)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출현과 사역, 생애를 종말론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비록 시공간적 개념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 나라"라는 개념은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역사개입과 구속사역 왕으로서의 통치가 예수의 출현으로 "이미" 긴 여정을 시작했으며, 그 완전한 형태의 완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아 있기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그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신 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것이라고 선언하신 후 곧 바로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천국 하늘나라 열쇠를 네게 주리라"(마16: 18-19)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 동의어임을 추론 할 수 있다.

1. 하나님 나라의 용어로 정의해 보는 교회

죠지 래드는 게할더스 보스 주장인 "마태복음16: 18-19에 함축되어 있는 이미지는 교회가 반석의 기초위에 세워진 집이며(18절) 그 집을 여는 열쇠는 베드로에게 이양될 것"이라는 것을 래드는 보스의 주장이 은유적인 언어를 지나치게 억압하는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107B. M. Metzger,「신약성서개설」라채운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157. "콘첼만은 하나님 나라가 현실세계에 임한 것으로 완성이 되고 끝났다고 한다면 이미 회개의 기회도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임박 하였으나 표징들은 이미 현실세계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H.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김철손외2인 역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2), 134을 보라.
오히려 그는 주장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the reign of God)로서 간주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108)그리고 굳이 비교하여 말하자면 교회는 하나님의 영역 즉 그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며 교회는 그의 통치 아래있는 인간 공동체라는 것이다. 래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다섯가지 기본적인 요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① 교회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②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창조한다.
③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다. ④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도구이다. 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관리인이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사이에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 하지만 동일시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으로 부터 출발하고 교회는 사람으로 부터 출발한다. 하나님 나라는 그의 통치이며 그의 통치의 축복이 경험되는 영역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그 축복을 누리는 자들을 교제이다. 하나님 나라가 교회를 창조하고 교회를 통해서 일하며 교회에 의해서 세상에 전파된다.
교회없이(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자들) 하나님 나라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가 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다.109) 스토트(Stott)는 래드의 주장을 의존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같은 공동체의 다른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했다. 다스리는 왕과 그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백성은 실

108G. E. Ladd, Jesus and Kingdom (New York: Harper and Row, 1964), 259-273.(하나님 나라와 천국 이 두 어휘를 사용하고 있는 저자들에게 있어서는 두 어휘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분명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마태복음에 사용된 하나님 나라의 어휘가 하늘나라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23절,24절을 예로 살펴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 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천국과 하나님 나라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한다.)
109G. E. Ladd, The Presence of the Future: The Eschatology of the Biblical Realism (Grand Rapids: Eerdmans, 1974);「예수와 하나님의 나라」이태훈 역 (서울: 엠마오, 1985), 3-7.
제로 구분 할 수 있다는 것이다.110) 둘이 서로에게 분리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래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가 제시하는 천국과 교회는, ①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특징 즉, 징표이어야 한다. ② 교회는 천국의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③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선 경험"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교회를 "현재적이며, 부분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한 모습"의 천국이라고 불렀다.111)
교회는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 통치의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우리 시대에 지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형태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령을 다시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구체적 표현이다. 옛 언약 아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표현 형태는 이스라엘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곳이며 어디서든지 발견 될 수 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은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발견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인간 창조 이전부터 천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도 하나님 나라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도 결코 교회의 일원은 아니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 나라의 한가지 표현 형태일 뿐이다.

 

2. 교회는 왕권통치의 중심지

교회의 통치를 이종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언제든지 합동하여 동시적으로 사역하시는데 교회안에서와 교회 밖에서 언제든지 삼위일체가 역사하여 교회를 현재까지 보호 성장케 한다"고 말하며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장"112)이라고 한다.

110J. R. W. Stott, "하나님 나라와 공동체" in: 「하나님 나라의 신학」 : K. Runia & J. R. W. Stott, 정일웅 역 (서울: 한국로고스 연구원, 1990), 67.
111Ibid., 68-70.
112이종성,「교회론Ⅱ」(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9), 30.
오스카 쿨만(Cullman)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는 두 개의 동심원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설명하였다. 첫번?? 작은 원은 교회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을 둘러싸는 R1이라고 부를 수 있다. 두 번째 조금 큰 원인 R2는 에베소1장과 골로새서 1장에서 언급한, 보이는 세계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을 나타낸다. 그리고 세 번째 원인R3를, 쿨만의 설명에 첨가하여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을 포함한, 보이지 않는 모든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로 설명할 수 있다. 쿨만에 따르면 R1+R2=전적통치(그리스도)가 되고, 우리는 여기서 R1+R2+R3=전적 통치라고 생각 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원들을 모두 "R"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왕의 힘있는 통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각자가 조금씩 다르게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나타낸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핵심적으로 잘 설명한다면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113)루돌프 쉬나켄버그(Schnackenburg)가 지적한대로 하나님은 모든 충만으로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시고(골2: 9), 그리스도를 통과하여 성도들 안에 거하시고, 동시에 그리스도는 우주를 다스리시며, 교회를 하나님 사역의 직접 영역으로 택하시고, 그 안으로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이 흐르게 하신다. 그러므로 교회안에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아주 특별하게 나타나고 교회는 확실한 은혜의 실체가 된다114)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몸된 교회의 머리되신 그스리스도가 특별히 다스리는 선교하는 교회는 왕권통치의 중심지가 된다. 오직 교회만이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것보다 특별한 양태로 다스리신다. 선교하는 교회가 여기 저기서 생겨나면 R1의 경계선이 R2까지 커지게 된다. 복음을 선포하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개종하게 되면 전에 R2의 영역에 있던 사람이 R1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다. 로마서6: 15-22, 골 로새서1: 9-14 불순종 가운데서 살아가던 사람이
113G. E. Ladd, The Presence of thee Future: The Eschatology of Biblical Realism (Grand Rapids: Eerdmans, 1974), 122.는 이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114R. Schnackenburg, God's Rule and Kingdom, J. Murray, trance.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63), 313.
왕에게 순종하는 삶으로 바뀌거나 개종하는 일은 특별히 선교하는 교회내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렇게 개종 시키는 것이 왕의 언약 공동체인 지역 교회의 가장 중심되는 일이다. 더 나아가 교회가 새로운 장소나 새로운 문화 새로운 영역에 들어갈 때 교회는 세상 임금을 권세가 R2영역에 오래전부터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교회가 복음을 선포할 때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렇게 함으로 R1은 계속하여 R2안으로 까지 성장해 가며 심지어 "음부의 권세자가 이기지 못하리라"(그의 진행에 나아감을 막지 못하리라) (마16: 13-20, 28: 16-20) 그러므로 교회의 온전한 성장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신호가 된다.115) 교회는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지만 예견하는 신호로서, 성도들을 간절한 가다림과 소망으로 살아가게 한다. 한스 큉(K ng)은 이것을 아주 적절하게 언급하였다.
「하나님은 이 순례도상은 교회를 버리거나 잊지 않는다. 교회는 완전히 어둠속에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미래의) 하나님 나라는 아니나, 지금 이미 도립한 하나님 통치하에 있다. 물론 하나님 통치의 최후의 승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직 훗날에 일이지만 그러나 그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인 사실이 된 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다. 물론 교회는 아직 죽음의 그늘아래 헤메고 있지만, 그러나 비단 부활을 내다 보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이미 부활한 주님이신 예수안에서 결정적인 사실이 된 부활을 되돌아 보고 있다. 이 살아있는 주님은 교회와 함께 있다. 이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영광 중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 할 때까지 항상 교회에 머문다. 이때까지 교회는 이 주님을 통치 하에 있다. 하나님 통치를 완성이 도래하며 그 자체도 끝내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있다. 은연중에 온 세계도 통치하는 이 그리스도의 통치는 교회 안에서 지금 이미 효과를 내고 있다. 즉 지금 이미 말씀의 젼파로 죄가 사해지고 새로운 인간이 이루어지며 그리하여 만물을 완성이 예고 되고 있다. 지금 이미 세례의 집행으로 인간들이 가시적인 상징행위에 의하여 마지막 시대에
115C. H. Engend,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임윤택 역 (서울: 두란노출판사, 1997), 150.


공동체에 입회함으로 낡은 인간을 참회의 무덤에 묻고 신앙에 의하여 새인간으로 부활하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있다. 지금 이미 성찬의 잔치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 성부의 영광 중에 나타날 종말을 구원의 잔치를 주께서 오실 때 까지 선포하고 참회하고 있다. 교회에는 지금 이미 성령이(하의 보증에 불가하지만) 주어져 있으며, 교회 안에는 이미 영원한 머무를 사랑이 활동하고 있다. 이리하여 교회는 종말론적 구원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통치 하에 살고 기다리며 신뢰하고 있다. 이리하여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의 약속과 능력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교회 안에 실감나게 작용하고 있으며 은연중에 벌써 교회는 동터오는 하나님 통치에 참여하고 있다. 이리하여 교회는 가이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단계" 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이 났다. 교회로 부터 최종적인 하나님 통치에 이르는 단계적 진보라는 연속성을 존재하지 않으며, 교회에 속하는 것이 최후의 하나님 나라의 속하는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도(이 유혹과 실현의 시대에는) 없는 것이다.」116) 신학자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와 아직이라는 양면을 갖고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랍게도 합의 하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로마 카톨릭은 교회를 하나님 나라로 정의 하던 것을 철회하였다. 개신교 학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질문들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 관계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를 더 이상 교회와 동일시 하지 않았다. 1950년에 필립스케프가 이미 지적한 것처럼 잘못을 범하지 않고 우리는 많은 구절에서 이것을 저것으로 맞 바꾸어 넣을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는 범위, 시간, 상태에 있어서 교회보다 더욱 깊고 더 광범위 하고 더 순수하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미완성 상태인 이미 - 아직은 교회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허만 리더보스, 죠지 래드, 오스카 쿨만, 죤 브라이트 등이 주장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 하였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임하
116한스 큉,「교회란 무엇인가?」97-99.
였으며 또한 임하고 있다. 교회에 있어서도 이러한 종말론적 관점은 동일하게 적용된다.117)
챨스 벤은 리더보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바실레이아(천국)는 그리스도 안에서 통치되고 완성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르신 사람들로 바실레이아 천국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다. 그러므로 내용면에서 하나님 나라가 교회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개념을 나타내고 우주적 차원에서 시간과 영혼을 채우며 은혜와 심판을 함게 가져와 이루는 역사의 완성을 나타낸다. 에클레시아는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편에 서서 이 놀라운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바실레이아가 이미 현존하는 실체이듯 에클레시아도 바실레이아의 능력과 은사가 주어지고 받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바실레이아는 바실레이아의 도구로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로 모시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허는 선교 사역을 감당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 모든 면에서 교회는 바실레이아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와 언제든 동일시 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계시와 진행과정 미래성에 의해 둘러 쌓여 있으며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118) 이는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와 미래성 사이에 존재함을 말한다.그리스도인들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요구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관한 조건을 현재적 삶에서 충족시켜야 한다.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현재의 생활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3. 교회, 하나님 나라, 세상과의 관계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가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고 선언한 다음부
117C. H. Engend,「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144-145.
118Ibid., 145-146.
터는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전부 섬기는 내용이다. 즉 이때부터 소자 하나를 대접하는 것, 어떻게 크고자 하는자가 낮아져야만 하는가, 어떻게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가 섬겨야 하는가 하는 원리를 주된 내용으로 가 르치기 시작한다. 이는 교회로 부른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고 그 안에서 꼭 창조하시려고 하는 내용이 세상적인 질서가 아닌 하늘 나라의 질서 체계속에 들어온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 받은자가 이 세상의 질서속에 속하지 않은 것을 보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게 하며, 하나님의 제자인 것을 증언케 하는 것이다.119)
이는 교회가 세상을 변화 시키고 그 책임이 교회에 있음을 알게 함이다. 선교하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려고 할 때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적, 공간적, 영적 영향력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늘 세상과 마주치게 되어 있다. 교회가 선교적 본질을 발휘하여 밖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할 때 교회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로 보내졌음을 알게 된다.120) 교회는 교회 내부에(교회와 가정에) 공동체를 제공한다. 외부적으로도 이웃에 공동체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하이테크 세계에서 교회는 은혜를 힘입어 최선을 다하여 할수 있는 일, 즉 사람들이 믿음과 진리와 진실함으로 서로 정직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인간 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121)
교회, 하나님 나라, 세상과의 기본적인 관계는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지에서 열린 기독교 곧은 교육 기간에 제2차 국제회의 석상에서 발표된 리더보스(Ridderbos)의 발표문을 찰스 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122)
발표문에서 리더보스는 교회와 세상을 관계에 대하여 새롭게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첫째로, 교회는 기독교인의 자유를 위해
119박영선,「교회란 무엇인가?」 (서울: 엠마오출판사, 1994), 41.
120C. H. Engend,「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156.
121H. A. Snaider,「21세기 교회의 전망」박이경, 김기찬 옮김 (서울: 아가페출판사, 1993), 78.
122C. H. Engend,「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157.


부름 받았다 즉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요람" 이 되는 각 개인의 올바른 위치에 대해 열린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교회 모든 생활과 봉사는 곧 세상을 섬기는 것을의미한다. 로마서12-16장은 윤리적인 부분을 바울이 "영적예배"라는 개념으로 시작 했듯이, 예배란(롬12: 1) 세상에서 우리의 은사들을 사용함으로 우리의 몸을 선교화는 일에 드리는 것이다. 지역교회의 특수성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지역 교회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선교하는 교회가 교회로서 만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에 가깝게 변화시키는 교회의 영적 생활을 의미한다. 지역교회는 그가 처한 상황에 따라 제도화된 기관으로서의 책임이 있다. 제도적인 교회를 문화적인 혹은 정치적인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구분선을 지워 버리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교회는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사회적, 정치적 정의를 포함하는,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복음을 전파히기 위하여 확실한 부르심을 받았다. 이러한 부르심은 결코 개인적인 영적 범주에 제한되거나 경제-사회적인 자유의 범주에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모든 삶의 부분을 하나로 보고 예수그리스도로 주 되심 아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목적은 또한 임시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리더보스가 말한대로 지금은 세상에는 그리스도와 그 나라가 강하게 존재하며, 성령의 능력과 임재하심을 우리는 잊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하늘의 영광중에 있는 나라가 아니다. 성령은 아직도 기다리시며 교회와 함께 기도한다. "오소서, 주 예수여"123)


하나님 나라의 임시적인 임재로, 지역교회로 하여금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것과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여기는 것을 부정하도록 계속 자신의 돌아볼 것을 강권한다. 교회 모두는 왕이 되신 주님께서 세상 가운데로 교회를 보내셨기에 교회는 이 세상에 그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선교하는 교회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이 임시적인 것이라 할지
123Ibid., 158.
라도 강권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임재하심으로 성령은 그 능력을 바라신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비우는 것이 개인 적
인일 공동체인 교회 몸된 교회의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를 세상으로 인도한다. 이 점은 선교하는 교회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첫째로, 교회 - 하나님 나라 - 세상의 상관관계는 우리로 벤과 엔더슨(Venn-Anderson)의 "삼자 원칙"(three-self formula)124)이 갖는 한계를 보게 한다. 헨리 벤과 루퍼스 엔더슨은 본인들을 사상이 교회론에 대한 모든 면을 포용하는 신학이라고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역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이 원칙을 목표로 삼아 따르게 됨으로 타문화권 선교에, 제3세계 교회에, 북미 개척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삼자원칙은 이상이 되었다. 하지만 교회 - 하나님 나라 - 세상의 모델과 비교할 때 삼자원칙은 실패는 분명하다. 삼자의 관점은 좁고, 피상적이며, 자기중심이다. 왕이 언약백성이요 하나님 나라의 의지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지역 교회는 돈 이상이요 행정 이상이며 개종자들 이상이다. 하나님 나라의 일시적 상징인 지역 교회는 문화적 상황과 이상이요 복음의 토착화 이상이다. 이러한 이슈들이 주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모든 것과 하나님이 선교하는 지역 공동체를 통한 교회의 특별한 모든 것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일이다.


둘째로, 우리가 12장에서 함께 보게 되겠지만 교회 - 하나님 나라 - 세상의 관계는 우리가 새로운 선교적 행정구조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준다. 특별히 조직 이론적 접근에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잘 반영하는 선교하는 교회를 만들자고 하면 우리 교회 행정은 내향적이고 자기만을
12419세기 말경에 헨리 벤(Henry Venn)과 루푸스 엔더슨(Rufus Anderson)에 의해서 주장된 '삼자 원칙'은 선교단체가 제3세계에서 선교할 때에 원주민 교회들이 자급, 자전, 자치하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을 강조한다. 삼자가 이루어지면 선교단체의 사역은 끝나게 된다. 풍자적으로 이 원칙은 영국이나 북미의 모교회나 교단 조직에서 한 번도 적용된 적이 없다. 슬프게도 이 원칙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가 짧은 교회들을 자기 중심적이며 내향적인 교회가 되게 했다. 그들은 이제야 이런 잘못된 특성들을 떨쳐 버리려 하고 있다.
위한 캡술에 든 안건들만 따를 수 없다. 선교하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임하심을 기다리면서 세상안으로까지 들어가는 행정조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셋째로, 챨스 크라프트(Kraft)가 교회와 주변문화의 관계를 깨우쳐 준 것처럼 기독교는 문화 속에 있다. "새로운 세대와 문화가 자신의 문화쪽 형태 안에서 하나님의 의미를 전달할 적절한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책을 번역하되 그 사회에 맞는 문장을 쓰는것과 같이 다른 곳에서 수입하여 잘 맞지 않은 것 보다 교회는 현대 문화상황에 맞는 독창적인 원제품을 만들어 피동적 방관자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어야 한다. 우선순위는 원래 문화 속에서 의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수신자 문화(receptor culture)에서 담당하는 것이어야 한다. 번역에서와 같이 교회의 문화를 바꾸는 데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125) 이러한 접근 방법은 선교학적 관점으로 아주 중요하고 인류학적 면을 보여주며 교회, 하나님 나라, 세상의 역동적 관계를 보는 실제적인 적용이 된다. 교회는 어느 특정한 문화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표증이 되는 여러 개인적인 방법들을 그 의미를 분명히 한다. 세상은 타락했고 그 속에 완전한 문화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면을 강조 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요3: 16)"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가 목숨을 버리신 것은 교회가 아닌 세상을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희생제물 어린양으로 보내진 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이었다.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교회들과 교회를 둘러싼 수천의 다양한 문화들의 미래상을 그리면서 교회는 어느 곳에 있든지 그 문화상에 꼭 맞는 교회가 되고 왕의 언약 백성인 본연의 모습을 더 아름답게 드러낼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126)


125C.H. Kraft, Christianity in Culture: A Study in Dynamic Biblical Theologizing in Cross-Culture Perspective (Maryknoll, N. Y. : Orbis, 1979), 318-326.
126C.H. Engend,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160-161.

C. 교회의 사명

교회가 비록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해도 교회는 베드로의 교회가 아니요 어떤 인간이 만든 교회도 아니며 주님 자신이 세우신 교회이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교회 를 주권적으로 통치하신다. 예수님은 이 권위를 베드로에게 직접 주셨으며 베드로가 가진 권세는 "내가 너에게 주리니"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이다.127)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공동체로서, 교회의 본질에서 발전된 교회의 목표를 확실히 해야만 한다. 게할더의 보스의 말대로 "교회는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메시야권을 갖게 되는 새로운 단계의 결과로 생각되는 그 나라의 형태"128)인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교회는 이땅에서 교회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이념을 남겨주신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즉 "교회"를 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써 그의 구원을 완성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실 그 때까지 "교회"에 그의 사명의 계속적 실행을 위탁하신 것이다.129)


그러므로 교회의 위탁된 사명은 항상 그 시대의 문화와 삶의 관련 속에서 수행되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대에 위탁된 교회의 사명은 어디에서 그 원형을 찾을 것인가? 우리는 그 원형을 초대교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수행한 사명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는데,예를 들면 다드(Dodd)와 스마트(Smart)는 케리그마(kh,rugma: 말씀의 선포)와 디다케(diaqh,kh: 교육)로 보았고, 쿨만(Cullmann)과 언더힐(Underhill)은 카리스마(ca,risma: 기도,찬양,예언)와 유카리스트(euv,car

127G. Vos,「하나님의 나라」정종숙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1), 97.
128Ibid., 105.
129박봉랑,「기독교의 비교종교학」(서울: 법문사, 1980), 81.
ist: 신앙고백, 축복기도,세례,성례전)로 보았으며, 콕스(Cox)는 케리그마(kh,rugma)와 디아코니아(diakoni,a: 세상을 섬기는 봉사)와 코이노니아(koinwni,a: 성도의 교제)의 세 가지로 보았다.130)여기에서는 콕스(Cox)의 분류에 따라 우리시대에 위탁된 교회의 사명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케리그마(kh,rugma)

말씀의 선포를 의미하는 케리그마(kh,rugma)는 케뤼세인(khru,ssein)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전령관이 자기에게 위탁된 메세지를 권위를 가지고 선포한다는 뜻이다.131) 신약성서 대부분의 경우 이 말은 선포의 내용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따라서 복음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통하기도 한다. 교회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며, 하나님이 세상 가운데서 교회를 불러내신 것은 그 자신의 이름을 위하고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첫째 의무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132) 교역자나 평신도를 막론하고 전 교회는 이러한 선포적 사명을 수행할 의무가 있다.이 점에 있어서 크래머(Craemer)는 "교회는 선교다"라는 명제 아래 교회는 마땅히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하며 결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이를 교회의 기본 존재 법칙으로 내세우고 있다.133) 오순절에 성령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은 벅찬 감격을 견딜 수 없어 즉시 밖으로 뛰쳐 나가 그들의 삶을 변화 시킨 진리를 선포하였다. 사귐의 공동체는 나사렛 예수의 주 되심을 선포하는 무리들이 되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신앙고백을 했는데 이것을 교회는 선포하였다.

130은준관. "사회변화에 대처하는 교회의 재구조화," 제5회 연신원 목회자 신학세미나강의집,「현대사회와 목회설계」1985, 119.
131조선출(편),「그리스도교대사전」(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2), 1024.
132옥한흠,「평신도를 깨운다」(서울: 두란노서원, 1987), 56.
133Ibid., 58.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교회로 하여금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도록 하신다. 이 신앙고백은 넓은 의미와 예리한 함축성들(lmplications)을 내포한다. 헤리 보어(Boer)는 신약이 가르치는 예수님의 주 되심을 하나님의 우주적인 뜻과 연결시켜 설명하였다.그는 로마서11: 25-26,16:25 에베소서1: 9-10, 3; 3-11, 5: 32,골로새서1: 26-27,디모데전서3: 16 등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교회안에서만 주가 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와 우주적 권세자들에게까지 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134)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케리그마(kh,rugma)적 신앙고백은 필연적으로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밖으로 나아가는 운동을 포함한다. 교회는 화목케 하고, 구속하고, 새롭게 하는 주님의 나라를 곧 모든 민족을 포함하는 우주적인 나라라고 인정한다."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것은 "주님은 온 세상의 주님이시다"라는 뜻이다.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확실히 교회를 온 민족들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선교적이며 보편적인 사명을 갖게 한다. 이 사실은 마태복음28: 18-20에서 선명하게 보여진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라고, 모든 사람들과 모든 만물의 주, 교회의 주라고 입술로 고백하고 마음에 믿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루어진다(골1: 15-20 참조).이 신앙 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본연의 모습,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인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어진다.135)
이처럼 교회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공동체인 동시에 또한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공동체로서 그 선포적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

 

2.디아코니아(diakoni,a)

세상을 섬기는 봉사를 의미하는 디아코니아(diakoni,a)는 본래 누구나

134C. H. Engend,「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123-124.
135Ibid., 125-126.
복종을 연상하게 마련인 식사시중 행위를 뜻한다.136) 왜냐하면 식사 때만큼 주인과 종의 구별이 뚜렷이 드러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관심사는 단순히 식사중이나 부양과 생계를 돌보는 자선행위에 그치지 않았으며, 그의 근본 관심사는 남을 위한 존재에 있었다."인자의 온것은 섬기려는 것"(마20: 28)이라는 예수의 말씀대로 봉사 그 자체는 그리스도의 큰 사명이었으며, 따라서 교회의 봉사 또한 참으로 큰 사명인 것이다. 세상을 섬길 때 교회는 예수께서 위탁하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봉사적 사명은 흩어지는 교회로서 다양한 사회봉사137)를 실천할 때 이루어지는데,이를 통하여 교회는 인간이 세상 가운데서 상실한 자아를 회복하고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랑의 공동체를 제공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이땅에 건설하는 것이다.챨스 벤 엔겐은 도날드 맥가브란의 지적인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사랑의 사귐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공동체"를 인용함으로써 종(dou/loj)은 그의 주인보다 높지 않음을 강조한다(마태복음10: 24, 요한복음13: 16; 15: 20).그의 실제적인 증거를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일을 하는일인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써(요한복음13; 16) 주인보다 높은 종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음을 강조한다.138)
이렇듯 겸손하게 섬기는 태도를 제자들은 본 받아야 한다. 종이 된다는 참된 의미를 보여 주는 제자도의 세가지 면을 살펴 보면 증거,서로 돕는 봉사,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은 섬기는 사역은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말한다. 디아코니아(diakoni,a)는 예수님의 주권 하에서 평화, 정의, 자비 등 새로운 세계질서를 형성하는데 교회가 참여하고 공헌하라는 부르심이다. 디아코니아는 무슨 간단한 선행 정도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돕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 누구나를 섬겨야 하는 교회의 핵심적 본질이다. 선교하는 교회에 이런 섬김이 없다면 그
136조선출(편),「그리스도교대사전」419.
137고영복,「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서울: 한명문화사, 1972), 44-45.
138C. H. Engend,「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127.
교회는 교회가 가져야 할 선교적 본질을 상실하는 교회가 된다.

 

3.코이노니아(koinwni,a)

코이노니아(koinwni,a)란 말은 일반적으로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상호간에 열린 마음과 정직한 마음을 체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친교, 우정, 참여, 공동체, 등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그 의미가 계속 추구되고 있다. 코이노니아(koinwni,a)의 명확한 정의를 발견하기 위하여 용어적인 의미를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코이노니아(koinwni,a)의 핵심적인 의미는 기본 단어인 코이노스(koinos: 공동)에 있으며, 명사 코이노니아(koinwni,a: 교제)와 코이노노스(koinwno.j: 동료), 그리고 동사 코이노네오(koinwne,w: 나눈다)는 모두 우리가 공통으로 소유하는 것을 가리킨다.139)일찌기 교회의 모임에서는 사도들의 교훈과 기도에 병행하여 코이노니아의 행위가 있었다(행2: 42에는 "교제"라고 표현됨). 코이노니아는 본래 물건을 함께 쓴다는 말이었으나(행2: 44, 4:32), 후에는 봉사의 교제(고후8: 4) 혹은 신앙에 의해서 고취된 그리스도인의 자선행위를 의미 하기도 했다(히13: 16).140)특히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성도의 교제로 시작된 교회를 잘 묘사해 주고 있는데, 그들은 모이기를 힘쓰며 떡을 떼기를 좋아했고 힘써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들 사이에는 내 것이라는 소유개념이 초월되어 있었으며, 서로 신분을 따지거나 자기 소유를 밝히지 아니하고 교제하였다. 그들이야말로 복음 안에서 인간적인 조건을 넘어선 세계 시민이었던 것이다. 아울러서 이 코이노니아는 초대교회의 성만찬에서 가장 성스럽게 표현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요, 그 열매로서 참여자 자신들 사이의 영혼과 마음의 교제를 이

139R. W. John Stott,「현대교회와 평신도 훈련」김기영 역 (서울: 엠마오 출판사, 1987), 81.
140민영진 (편).「성서대백과사전」(서울: 성서교재간행사, 1981), 643.

루는 것으로서,141)나아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었다.엄격하게 볼 때 교회는 밈음의 코이노니아이지 조직체는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건물이나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므로 교제하는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며,142) 더 나아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를 연장 혹은 모방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코이노니아를 유지시키는 그리스도의 신비체라 할 수 있다.143) 신약성서는 이러한 코이노니아의 종적인 관계와 횡적인 관계를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사람이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바 그 무엇을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며 또한 그것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이 코이노니아는 하나님과 인간이 교제를 나누고, 그것에 동참하는 모든 사람이 또다시 서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신앙의 바른 증거는 참된 사랑의 생활에서 나타나며, 먼저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에 이른 사람은 자연히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연장되어 그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144)그러므로 교회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가장 깊이 그리고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은 코이노니아(koinwni,a)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실질적인 관계를 의미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사귐의 장으로서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인간들은 하나님과 일치하고 또한 인간들 사이에서 코이노니아를 맺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를 향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예수님의 명령은 사랑이다. 제자들은 아가패 사랑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삶의 최고의 덕목으로 이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로부터 이 사랑은 교회의 의무로 여겨져 왔다.

141Ibid.,
142D. Miller,「교회의 본질과 사명」박상증 역 (서울: 대한기독회,1980), 23.
143정하권,「교회론 제2편」(경북: 분도출판사, 1980), 10.
144정하권,「교회론 제1편」(경북: 분도출판사, 1980), 82.
이웃에 대한 사랑은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레19: 18; 잠20: 22; 24: 29)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외에 더 큰 계명은 없다. 막12:29-30 하지만 예수님은 이 구약의 가르침에 놀랐고 새로운 면을 첨가 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 34) 이 말씀에서 계명은 어느 부분이 새로운가? 챨스 바렛(Barrett)은 이 계명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드러내는 계명임으로 새로운 계명이며 서로 사랑하는 제자들은 서로를 세울 뿐 만 아니라 그 사랑으로 성부와 성자를 드러내게 된다"145)고 말한다.


여기서 예수님은 혁명적인 요소를 주입시킨다. 물론 구약에서 부터 계속 된 것이지만 이러한 사랑은 새로운 종류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삶의 질이 변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밖으로 나가는 질적인 면에서 자기를 희생하여 내어주는 면이 새롭다. 다드(Dodd)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성자를 보내신 사랑 성자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 까지 보여주신 사랑 서로 사랑 안에서 제자삼는 재생산 사역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사랑은 감정적인 것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께서 세상을 위하여 용단을 내리신 어떤 형태로 나타낸 행동이다. 이러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랑을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이다. 새계명은 성육신적이다. 나를 사랑하면 내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이다. 이 성부와 성자가 와서 함께 거하신다는 말씀에 대해 바렛은 "요한이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예수님의 재림은 묵시적 기독교가 알지 못하던 부분인데 요한은 부활과 온전한 구속이 이루어지는 마지막 순간이 사이에 있는 것으로 설명하려 하였다"고 주석을 달았다.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하신 약속은 사랑으로 성취되고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존재하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한다. 언제나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하심은 하나님 나라를 이미와 아직 사이를 잇는 교량 역활을 한다.

145C. K. Barrett, The Gospel According to Saint John: An Introduction with Commentary and Notes on the Greek Text (Philadelphia : Westminster, 1978), 451.
제자들이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함께 사귐을 가질 때 초림 후 재림 전일지라도 그리스도가 그곳을 찾아오신다. 제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런 새로운 그리스도의 인자하심으로서 눈으로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생생한 주님을 숨결을 느끼게 되며 그들이 사랑하는 코이노니아로 모인 그곳에 그리스도가 임재하는 것이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계시면 바로 그곳에 교회가 이루어진다. 제자들이 사랑하는 사귐 가9운데 새롭게 임재하시며 예수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신다. 그리하여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역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바로 코이노니아의 회복이며, 이는 교회의 근본적인 의미를 깨닫게 하고 교회의 목적을 더욱 뚜렷이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이처럼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공동체로서, 그리고 세상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교회는 그 원동력을 코이노니아의 증진에서 얻어야 할 것이다.146)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34-35)

 

4. 말투리아(marturi,a)

승천하시기 직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avlla. lh,yesqe du,namin evpelqo,ntoj tou/ ~Agi,ou Pneu,matoj evfV u`ma/jkai. e;sesqe, moi ma,rturej e;n te VIerousalh.m( kai. evn pa,sh| th/| VIoudai,a| kai. Samarei,a| kai. e[wj evsca,tou th/j gh/j)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u`ma/jkai. e;sesqe, moi ma,rturej)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에서(VIerousalh.m) 부터 시작하여 "땅끝까지"(e[wj evsca,tou th/j gh/j)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퍼져 나가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엔겐(Engend)은 케인(Kane)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세상 가운데
146C. H. Engend,「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120-121.
있는 교회의 본질은 선교외 교회 존재의 부분들로서 진리와 능력을 선포하고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147) 성경에서 "마르투스"(ma,rtuj)는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 ⓛ 법적으로 사실을 증거 하는 것, ② 신앙고백으로 사실을 증거하는 것, ③ 사건의 목격자로 사실을 선포하는 것, ④ 그리스도의 본성과 중요성을 전도하는 복음 증거, ⑤ 순교148) 이런 의미들이 가진 의미상의 범주 안에서 교회의 목적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실제로 보여지고 만져지는 역사적 사실로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임재, 선포, 강권하는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께 살아 계시고 몸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사실들을, 사랑의 사귐, 예수님은 주님이라는 신앙고백, 섬기는 봉사 사역들을 통해서 증거한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5: 18-21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화목케 하며 섬기는 직책을 통하여 대사들(ambassadors)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선교하는 교회는 스스로 화해하는 직책을 잘 감당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된다.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심을 세상에 전하는 일은 교회가 하는 복음 증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복음과 섬김을 믿는 믿음의 표현인 "사랑의 사귐"을 통해서 교회는 세상에 이렇게 증거한다. "하나님과 화목하라"149)
지역교회 차원에서 선교하는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사랑의 사귐을 이룰 때, 말과 행동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온 세대 최고의 사건을 증거할 때, 비로서 세상에 존재 목적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147Ibid., 131-132.
148Kittel and Friedrich, "Theological Dictionary": s.v., "ma,rtuj..." (ma,rtuj는 신약에
34회 나오는데, 그 중 13회는 사도행전에, 9회는 바울서신에 나온다. 일반적 용법으로 사실에 대한 증인으로 마가복음14: 63에 나타나는데 거기서 대 사장은 예수의 고백 후에 더 이상 다른 증인들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외친다. 사도행전6: 13과 7: 58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두 명 이상의 증인을 요구하는 신명기19: 15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10: 28과 마태복음 18: 16을 참조)
149C. H. Engend,「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133-134.
정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증인 공동체로 남아야 한다.


Ⅵ. 결 론

지금까지 본 논문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마태의 교회를 살펴 보았다. 특히 본 논문은 마태교회의 목회적 관심에 중점을 두고 진행 되었으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권세를 부여하신다는 사건내용으로 전개해 나갔다.


이상의 연구에 대한 요약과 결론은 다음과 같다.
본 논문의 Ⅱ장에서는 교회에 대한 일반적 고찰로서, 교회가 구약에서와 70인역(LXX) 그리고 신약에서 어떤 변화와 발전을 이루어 왔는가를 살펴 보았다. 특히 어원학적인 의미에서 에클레시아는 기독교회가 처음으로 사용한 단어가 아니라 70인역(LXX)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단어였음을 보았으며 함축적인 의미에서 에클레시아란 단어는 회중 또는 부름을 받은 회중이란 의미로 사용되다가 후대에 가면서 회중이나 집회를 표현하는데 사용되었음 보았다.
Ⅲ장에서는 마태의 교회이해로서 마태복음에 반영된 기독교 공동체를 "새 이스라엘"로서 이해함을 보았다. 예수의 사역은 이스라엘게만 한정되었지만 그들이 거절하게 됨으로 마태의 편집에 의해 옛언약 백성이 새 언약 백성으로 대치 되었음을 말하였다. 마태의 부름받은 제자들은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이며 그 나라를 상속받는 선택받은 공동체로서 그 권위를 땅에서 실천해가는 공동체이다. 마태는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 속에서 새로운 칭호를 발견한다. 예수는 다윗계통의 메시야로서 표현하며 처음에는 메시야성을 숨기었으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인식하에서 사역하였음을 보았다. 킹스베리는 "아들 되심의 비밀은 이스라엘과 세상에는 숨겨졌으나 제자들에게는 주어졌다"고 말하고, 그 이유는 보냄을 받은자이기 때문임을 보았다.


결국 마태는 마태복음16: 13에 "인자"를 15절에서는 "나"로 귀착되었음으로 "나"라는 매개적인 용어를 사용함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적인 칭호를 끌어내기 위한 예수님의 시도이었음을 보았다.
Ⅳ장에서는 마태가 바라본 교회의 권세로서 베드로의 역할은 그룹 지도자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릿돌이라는 지위를 차지한 다른 제자들과는 구별되는 대표로서 강조한 반면에 그의 비판적이며 부정적인 시각까지 말하였다. 반석 위에 세우신 주님의 교회는 베드로와 같이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짐을 살펴 보았다.
신앙고백으로 이루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며 이 교회는 천국열쇠를 갖고 있으며 "매고" "푸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 권세는 마18장에서는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주셨음을 밝혔다. 교회 공동체는 가르치는 권세도 부여받았는데 마16: 20에서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말씀은 가르치는 권세를 부여하심이다. 마28: 20"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더욱 확실시 된다.


Ⅴ장에서는 공동체의 참된 본질인데 마태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용어는 "제자"와 "따르다"임을 보았다. 이는 교회 공동체의 새로운 구성원이 된다. 새로운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의 나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비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여 보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인정함을 알아 보았다.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 통치의 실현이며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한가지 표현 형태임을 보았다. 이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것이다.
마태 교회는 하늘나라가 땅에서 실현되어야 할 장이기도 하다.
마태 교회는 지금 하늘나라 가운데 있으며, 이미, 하늘 나라가 그 공동체 안에 있음이 그의 공동체의 권위를 통해서 드러났다. 즉 하늘 나라가 마태 교회에 이미 현재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영역은 "선교"를 통해서 더욱 구체화 되어가는 것이다. 더우기 신앙 고백위에 세워진 교회는 구속받은 공동체로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즉, 코이노니아,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말투리아를 잘 감당해 나갈 때 사도성을 가진 신앙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해 퍼져 나가는 것임을 보았다. 마태 교회는 하늘 나라의 통치와 능력이 실현되는 장이므로 공동체의 구성원은 사명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결국 마태복음서 기자는 당시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의 임재 속에서 그를 기다리며 살았던 마태교회가 내부적으로 분열된 상태에서 불일치가 계속될 때 예수를 향한 베드로의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결속 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는 복음서를 기록할 때 일관된 계획을 가지고 기록했으며, 전승에 충실 했을 뿐 아니라 마태교회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해하여 통일되고 일고 일관성 있는 기록을 남긴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면, 마태교회가 겪었던 혼란, 불안정, 갈등 등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한국교회도 마태교회가 의미하는 바를 잘 깨달아 교회의 중요성을 재인식 하고 복음의 전령자가 되려고 하는 재인식이 필요하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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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Church in the Gosoel of Matthew
by
Jang Youn Lee

Major in New Testament
Department of Theology, The Graduate School
Hoseo University
Asan, Korea

(Supervised by Professor Yong Won Suh. Ph. D.)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a Study on The Church in the Gosoel of Matthew. Jesus went to the territory near the town of Caesarea Philppi, where he asked his discipless, Simon Peter answered Jesus, "You are the Messiah, the Son of the living God." Then Jesus said to Simon Peter.
And so I tell you: you are a fock, Peter, and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Not even death will ever be able to overcome it. I will give you the keys of the Kingdom of heaven: what you prophit on earth will be prohibit: what you permit on earth will be permited in heaven."

In order to Peter's Declaration about Jesus, God will build church, Jesus Will give the Authority to binding and loosing and teaching in the Church.
The World "Church" comes from the Greek word "Eccelesia" meaning "to call out from" Christians are calld out from the world system to be "in Christ". Israel became so proud and blind that sshe did not recognize her Messiah when He came. So God turned from Israel to the church which is seen as the new Israel or the new people of God.

Community in the Gosoel of Matthew, The kingdom of God is the predominant theme of the Synoptic Gospels. The kingdom was the heart of Jesus' preaching God, through His gracious aand mighty action in Jesus Christ, had brought in the new age. The Kingdom of God was at hand.
The Kingdom in three tenses: The Kingdom has come(Lk.17: 21), The Kingdom is coming(Mk.4: 26-29), The Kingdom will come(Mt.13: 47-50).

Why Matthew introduces in order to Peter's Declaration about Jesus, "I will build my church"? This is due to the situation of a life of the Matthew's community. That is, The Church belonged, the new people of God. Matthew introduces in order to the purpose of the church: To worship God and to glorify Him on theearth(Eph. 1: 4-6), To evangelize the world with the Gospel(Mt. 28: 19-20), To teach and instruct Christians(Eph. 4: 11-15), To witness constantly(Acts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