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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빛과 소금에 대한 연구

by 은총가득 2020. 8. 16.

빛과 소금에 대한 연구

 

본문선택의 이유

 

'빛과 소금'이라는 말은 오늘날 기독인의 대명사로 취급된다. 기독인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빛과 소금'에 관한 설교와 주석서를 접했을 것이다. 평신도들이 일반적으로 '빛과 소금'에 관한 이해는 기독인들이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을 향해 자기의 몸을 태우는 희생의 개념으로 빛을, 그리고 세상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는 개념으로 소금을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전적인 오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성서를 바탕으로 이해하지 않는 '논리적 비약'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빛과 소금'에 대한 논리적 비약은 평신도들에게 두가지 정도의 큰 문제점을 안겨준다.첫째, 그것은 구체적으로 세상을 향해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해야하는 지에 대해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즉 도대체 자기의 몸을 태워 빛을 비춘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며 또한 세상의 부패를 막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지에 대해 기존의 '빛과 소금'에 대한 이해는 성서에서 말하는 진실한 답을 해주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성서를 해석할 때 낱말적인 표상을 현대의 눈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금과 빛'이라는 낱말을 현재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 표상만으로 이해하는 것만큼 성서를 잘못 해석하는 길은 없는 것이다. 성서의 이해는 낱말의 표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서기자의 전체적인 문맥의 의도에 달려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기존의 빛과 소금에서의 세상에 관한 이해는 세상을 죄악으로 어두운 곳, 그냥 두면 썪어질 곳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지닌다. 이러한 이해는 기독인들로 하여금 세상을 부정한 곳으로 이해시킨다. 물론 성서는 세상을 부정한 곳으로 이해하는 이원론적인 사고를 지닌다. 그러나 성서는 세상을 부정한 곳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의 내용이 세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구원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상의 내용에서 기존의 '빛과 소금'에 대한 이해는 평신도들로 하여금 교회와 동등한 입장으로 세상에 나아가 구체적인 그리스도인의 사명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본인은 본 주석을 통해 기존의 '빛과 소금'에 대한 이해를 지양하고 더욱더 올바른 '빛과 소금' 이해를 해보고자 본문을 선택했다.

 

연구의 목적, 범위 그리고 방법론

본인의 연구의 목적은 마태가 말하는 '빛과 소금'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있다. 이러한 목적아래 본인이 사용하는 연구범위는 '빛과 소금'의 본문이 형성되기 까지의 과정을 살피는 것과 마태복음안에서 마태기자가 본문을 구성한 방법, 그리고 그 본문구성에 나타나는 마태의 신학적 의도를 밝히는 데 본인의 연구 범위는 제한될 것이다.본인이 사용하는 연구방법은 본문의 형성을 밝히기 위해 역사비평적 방법을 사용할 것이며 마태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본문의 문학,구성,구조비평을 사용할 것이며 아울러 사회학적 성서해석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번 역

너희들은 땅의 소금이다.
그런데 만약 소금이 어리석어지면 그것이 무엇에게 쳐지게 될 것인가?
후에 그것은 아무것을 할 힘이 없기때문에 다만 밖에 던지워 진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짓밟힌다.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져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등불을 말 아래 두려고 켜지 않고 다만 등경위에 두기 위해서 그것을 켠다.
그리고 그것은 집안에 모두를 비춘다.


그러므로 너희들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그리하여서 그들이 너희들의 좋은 행실을 보고,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들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말씀의 원형추적
본문 '가' 의 형성
'가'는 공관복음에서 병행구를 이룬다. 그것은 곧 마가복음 9장 50절과 누가복음 14장 34절-35절이다. 이 복음서들은 다소의 차이를 보이지만 공통적인 유사성을 갖는 부분이 있다.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마5:13f s
직역: 만약 소금이 어리석어지면 그것이 무엇에게 쳐지게 될 것인가?
의역: 만약 소금이 어리석어지면 그것이 어디에 사용될 수 있을까?

막9:50f s
직역: 만약 소금이 소금기가 없어졌다면 너희들은 그것을 무엇에게 양념할 것인가?
의역: 만약 소금이 소금기가 없어졌다면 너희들은 그것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눅14:34f s
직역: 만약 소금이 어리석어지면 그것이 무엇으로 양념이 될 것인가?
의역: 만약 소금이 어리석어지면 그것이 어떻게 맛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마태는 마가를 전혀 따르고 있지 않다. - 동사의 쓰임이 전혀 다르다( - / - )- 이것은 마태와 마가가 서로 다른 전승자료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반면 누가는 마가와 마태의 전승자료를 따르는 듯하다. 누가는 마태와 마가의 동사를 번갈아 사용하는 데- / - 이것은 누가가 마태의 자료와 마가의 자료를 공유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복음 14장 34절-35절 전체를 살펴볼 때 누가가 마태와 마가의 각각의 다른 자료를 가지고 있었음이 증명된다.
먼저 누가는 14장 34절 첫 문장이 마가복음 9장 50절 첫 문장과 서로 일치하는 데 이것으로 보아서 누가는 마가의 전승자료를 알고 있었던 것이 확실한 것 같다. 누가와 마가는 s (소금은 좋은 것이다)라는 문장을 공유한다. 그리고 누가는 마태의 자료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4장 35절과 마태복음 5장 13절 이하 부분이 서로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누가복음에서 와 마태복음에서 는 내용과 동사의 활용이 일치하기 때문에 누가는 마태의 전승자료를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가는 마태와 마가의 각각의 전승자료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합당한 추론일 것이다.
마태와 마가의 자료의 불일치성과 마태와 누가의 자료의 일치성에 때문에 Q자료를 생각할 수 있다. Q의 내용은 '소금이 어리석어지면 소금이 어디에 사용되어질까?( 혹은 소금이 어떻게 그 맛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만 밖에 던지워진다.'일 것이다. Q의 내용을 기초로 볼 때 동사 는 예수 말씀의 초기 전승의 단어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물질을 의인화하여 표현하는 것은 예수 말씀의 원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와 누가가 일치되게 사용한 단어 즉, '밖에 던지워진다.'- \ - 는 예수의 초기 전승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Q를 통해서 예수의 초기 전승 원형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소금이 어리석어지면 밖에 던지워진다.' 이다.
예수말씀의 초기 전승원형을 찾는 또 한 가지의 시도로 마가가 사용한 전승자료를 가지고 말씀의 원형을 추적할 수도 있다. 마가는 이미 구전으로 굳어진 전승자료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마가는 9장 50절에서 s 를 어원으로 가진 단어를 사용하며- s, - 또한 이와 첫 모음이 같은 단어- , -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이 전승될 때 언어적 유희를 가지고 쉽게 암기할 수 있도로 사용된 구전 전승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예는 마태복음의 8복에서 드러난다. 5장 3절-6절에서는 복받는 대상자들의 단어가 모두 π로 시작되는 단어다.- , s, s, s- 8복은 그 특성이 시적인 요소가 강해 이미 굳어진 구전전승을 마태가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게 보이는 부분이다. 이러한 예를 종합해 볼 때 마가는 구전으로 굳어진 전승을 수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가 수용한 전승자료의 내용은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만약 소금이 소금기가 없어졌다면 너희들은 그것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이다.- 9장 49절은 소금의 어원을 갖는 동사를 사용한다( ). 그러나 이것은 불( )과 연결된다. 이것은 언어유희적 연관성보다는 언어상징적 연관성이 보인다. 즉 불과 소금은 정화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것은 마가의 이미 굳어진 초기의 구전전승자료로 볼 수 없다. 또한 50절 이하에 나타나는 소금( )과 화목( )의 연결도 언어의 상징적인 신학적 색채가 있기 때문에 초기전승에서 제외된다.
그러므로 Q의 전승과 마가의 전승은 각기 서로 다른 전승을 사용했다. 이것은 예수의 말씀의 원형이 각기 다른 전승을 형성해 Q와 마가에게 수용된것이라고 볼 수 있다.
Q의 전승과 마가의 전승중 어느 것이 예수의 말씀으로 소급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본인은 Q의 동사 즉 가 마가의 보다 더 예수의 말씀과 가깝다고 본다. 왜냐하면 구전전승의 언어적 유희는 사람들이 쉽게 연상암기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단어의 변화를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Q와 마가의 각기 다른 전승들의 모태가 되는 전승의 원형은 즉 예수말씀의 원형에 가장 근접한 전승은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어리석어지면 너희들은 그것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다만 그것은 밖에 던지워진다.'

이 말씀이 예수의 말씀으로 소급되지만 예수께서 어느 때에 이러한 말씀을 하였는지 추적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자료는 공관복음 밖에 없으므로 공관복음에서 이 말씀이 사용된 상황을 밝혀 냄으로써 이 말씀의 원초적인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에 본인은 Q자료와 마가복음에 있어서 이 말씀이 사용된 상황을 추적하고 그것이 누가와 마태에게 어떤 변화를 주고 있는지 밝혀 냄으로써 이 말씀의 원초적인 상황을 찾아 볼 것이다.
Q자료를 근거로 볼 때- 누가복음 14:26-27,34-35; 16:13과 마태복음 10:37-38; 5:13; 6:24-소금에 관한 말씀은 Q에서 다음과 같은 위치를 갖는다.

A.눅14:26-27 / 마10:37-38 (제자가 못되는 자 / 합당치 못한 자)
B.눅14:34-35 / 마5:13 (어리석어진 소금의 버려짐)
C.눅16:13 / 마6:24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지 못함)

Q는 A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자격을 이야기한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자기의 친적과 목숨까자도 미워해야한다(혹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해야한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께 합당한 자들이 아니다. Q의 B는 예수께 합당치 못한자(제자가 못되는 자)의 결과를 소금으로 비유해 보여준다. 어리석어진 소금(합당치 못한 자)은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진다. Q의 C는 결단을 촉구한다. 예수의 제자는 하나님을 섬기든지 아니면 그를 섬기지 않던지 결단을 내려야한다. 제자는 그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Q에서 소금은 예수께 합당한 자(혹은 제자)로 비유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Q에서 소금에 관한 말씀은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Q와 마찮가지로 마가도 소금에 관한 말씀의 정황이 제자를 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마가복음 9장 38절-50절은 제자 요한의 물음에 대해 예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이다. 마가에서 소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위치를 갖는다.

A.막 9:38-41 (예수이름으로 귀신을 축출하는 자에 대한 고발과 예수의 대답)
B.막 9:42-49 (걸려 너머지게 하지 마라)
C.막 9:50 (소금을 지니고 화목해라)

마가에서 A는 요한이 예수에게 자신들의 공동체를 따르지 않는 무리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는다고 고발하는 것에 대해 예수께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막지말라고 한다. B에서는 예수를 믿는 작은 자들을 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말라고 한다. 이를 위해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제거하기를 바라신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제자들은 심판을 받는다. 예수는 누구든 불로서 소금치듯함을 받듯이 -정화되듯이- 제자들은 자신의 이기심을 버릴 것을 촉구하신다. C에서 예수는 이기심을 버린 정결한 모습으로 서로 화목할 것을 권고하신다. 이것은 이미 제자들 사이에서의 분쟁(눅9:33-37)과 예수를 믿는 타인들-예수를 직접따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요한의 시기성의 고발에 대한 예수님의 훈계적인말씀으로 해석이 가능해 진다. 그러므로 여기서 소금은 이기심을 제거하는 정화의 상징으로 더 나아가 화목의 상징으로 연결되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Q와 마가가 소금을 제자에 관한 말씀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소금에 관한 예수의 말씀의 확실한 원초적인 정황은 제자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었다고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쓰임은 제자의 온전한 모습 혹은 자격을 나타낼 때 쓰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소금에 관한 예수 말씀의 원초적인 상황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누가는 소금에 관한 말씀을 예수를 따라온 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한다(눅14:25-35). 그들에게 예수는 제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준다. 그 가르침은 희생과 전적인 헌신을 요구한다(14:26-27). 예수는 두 개의 비유를 통해 무슨 일이든지 그것에 선행하는 요건(자격)이 갖추어 져야 됨을 말한다(눅14:28-32). 이와 마찮가지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도 선행하는 요건(자격)이 있게 된다. 그것은 곧 누구든지 자기의 소유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눅14:33). 예수는 이제 소금의 비유를 통해 소금이 소금되기 위한 온전한 요건을 갖추지 않았을 경우-소금이 어리석어질 경우-에는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어서 밖에 버려지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도 온전한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심판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누가는 예수의 소금에 관한 말씀을 예수의 제자되기 위한 제자들의 선행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가가 소금을 정화와 화목의 의미로 사용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소금으로 정화된 제자(이기심을 버린 자)들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제자들이 갖추어야할 자격(요건)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마태는 소금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자신의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한다(마5:1-2). 소금에 관한 말씀을 듣는 무리들은 이미 그들에게 해당하는 복이 주어진다(마5:3-12). 이들의 복은 박해를 전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때문에 당하는 박해는 이미 복의 상징이다. 그것은 하늘나라를 보장하기 때문이다(마5:10-12).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은 이미 천국의 복이 주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예수는 선언을 하신다. 그것은 곧 '너희들은 땅의 소금이다(마5:13)'라는 예수의 말씀이다. 이것은 이미 천국의 복을 지닌 인간들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다. 여기서 소금은 14절의 '빛'과 연결되며 그것은 또한 16절에 '좋은 행실'과 연관이 되며 이것은 20절에 '의로운 행실'과 연결이 된다.-차후에 자세한 주석을 하겠다- 그러므로 마태에게 있어서 소금은 이미 천국의 복을 소유한 예수의 제자들(따르는 무리들)이 행해야할 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예수의 제자들이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사명(제자들이 지켜야할 의무)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이것은 제자들의 온전한 모습(자격)으로 설명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소금에 관한 예수 말씀의 원초적인 정황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금의 말씀의 쓰임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할 그들의 '온전한 모습'을 설명하기 위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말씀의 원초적인 정황은 복음서 기자들에게 큰 변화없이 수용되어진 것으로 보인다. 약간의 차이-누가복음은 예수의 제자됨의 선행적 조건을 나타냄,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이미 제자된 자들에게 있어야할 덕목을 말함-는 있지만 그것은 예수의 제자직에 관한 의미로 볼때 큰 차이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금에 관한 예수의 말씀의 본문 형성의 과정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 [ ] 는 복음서 기자들의 첨가부분이다.
* J 는 예수의 말씀으로 소급되는 초기전승의 원형이다.
* Q 는 Q를 형성시킨 전승이다.
* MkOt는 마가의 본문-소금에 관한 말-을 형성한 전승으로 이 전승은 이미 굳어진 구전의 전승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Q는 그 종말론적(묵시적)인 성격으로 J를 수용한다. 즉 제자직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Q는 예수의 제자로서 합당치 못한 자의 결과(심판)을 나타낸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합당한 자-자신의 철저한 헌신, 모든 것과의 단절(가족,재물)-가 되라는 긴급한 촉구(결단)를 제자들에게 한다. 이것은 Q의 종말론적(묵시적) 성격을 반영한다.
MkOt는 마가에게 수용된다. 마가는 소금을 정화와 화목의 상징으로 수용한다. 이것은 마가 공동체 안의 분열을 시사한다. 공동체안의 분열 원인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귀신축출에 관한 것이다. 요한은 예수를 따르지 않는 다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쫒는 다고 시기성의 고발을 한다. 이에 예수는 그것을 허용한다. 타인들이 귀신을 축출하는 데 대한 제자(요한)의 반응은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귀신의 축출은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으신 목적이기 때문이며(막2:13-15) 이들이 예수께 받은 권능이었기 때문이다(막6:8). 다시말해 귀신축출은 예수의 직계 제자들만이-12제자-행사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것이다. 이 특권은 마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귀신 축출은 예수님의 사역속에 매우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며 (1:21-28,32-34,39;3:11,22;5:1-20;7:3; 9:14-28),그 구조적인 위치도 예수의 첫사역(1:21-28), 변화산상에서 변화 후에 첫사역(9:14-27)이 모두 귀신축출이라는 것은 마가에게 있어서 귀신의 축출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당시의 귀신축출은 예수의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했으며(막1:27),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은 자로서 가르침을 전할 때 예수의 제자임이 증명되는 증표로 귀신축출이 이해된 듯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해를 종합해 볼 때 마가 공동체는 예수의 직계제자들-꼭 12사도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12사도와 같은 권위를 가진 무리들-과 그렇지 않은 무리들 사이에서 마찰이 있었으며 그 마찰의 원인은 말씀의 선포(가르침)의 제한적 한정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마가는 이러한 말씀선포의 제한적인 한정을 부정하고 그것이 12제자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믿음(기도)에 있음을 예수의 질책을 통해 나타낸다(막9:19). 그리고 더나아가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확대 해석함으로서 말씀의 선포의 특권은 모든 사람에게로 부여된다(막9:39-40).
마가는 또한 예수를 믿는 미미한 자들을 보호하는 데, 이들은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 아니다. 이들은 예수를 반대하지 않는 자들이다. 마가는 공동체(직계제자들)가 이들을 탄압한다면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막9:42). 그리고 공동체가 이기심을 버릴 것을 강조한다(막43-47). 그렇지 못할 경우에 그들은 심판을 받는다(막9:48). 마가는 이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로 소금치듯이(절여지듯이) 정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똑같이 정화된 모습을 말한다. 마가는 끝으로 소금을 화목과 연결시키고 자신의 공동체들에게 이기심을 버리고 화목할 것을 권고하면서 소금을 상징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마가는 소금의 말씀전승을 자신의 공동체의 말씀선포의 제한적인 한정으로 인한 공동체의 분열을 해결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마가 공동체안에 지도층의 갈등이다. 마가의 저작 연대를 예루살렘멸망직전인 65년-70년 으로 볼 때 마가 공동체의 지도층은 2가지의 부류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예루살렘 전쟁 이전에 마가 공동체를 형성했던 지도층들과 예루살렘의 전쟁중에 마가의 공동체로 피신해온 예루살렘 공동체의 지도자-이들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세력일 것이다-들이다.
이들 사이의 분쟁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말씀선포(가르침)의 권한의 분쟁일 것이다. 더나아가 이것의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인 '누가 더 큰 자인가?'하는 문제일 것이다(막9:33-34). 또한 그 원인은 '누가 예수의 영광 때 그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까?' 하는 즉 다스림의 권한 문제이다(막9:37-38). 이러한 갈등에 대해 마가는 지도자가 되기 위한 사람은 모든 사람의 꼴찌가 되어야 하며 그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한다(막9:35). 그리고 가장 미미한, 연약한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를 영접한 것이며 이들이 지도자의 자격이 있음을 마가는 주장한다(막9:36-37). 마가는 공동체안에 지도자들은 세상의 지도자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막10:42). 오직 위대한 지도자들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함을 마가는 말한다(막10:44-45).
마가는 이러한 분쟁을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소금의 말씀으로 해결한다(막9:49-50). 즉 마가는 소금의 말씀을 통해서 공동체 자신들의 이기심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을 섬기는 화목의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원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가에게 있어서 소금의 관한 말씀-제자직에 관한 말씀-의 수용은 자신의 공동체의 당면한 문제 즉 공동체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수용되었음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Lk의 소금에 관한 말씀의 예수의 제자의 본질적인 필요충분 조건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누가는 자신들의 공동체가 유대교로 부터 분리된 후 자신들의 공동체의 단호한 정체성을 확립해야만 했다. 누가의 공동체 구성원들은 유대교가 되든지 아니면 기독교인이 되든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것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려면 한 종은 한 분의 주인만을 섬겨야 한다는 누가의 주장에 잘 나타난다(눅16:13). 이러한 상황속에서 마가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며, 그것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지 설명해 준다. 그것은 곧 전적인 헌신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됨으로 그들은 유대교를 숭상하는 부모와 친척과 완전한 단절을 각오해야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포기를 해야한다(눅14:26). 또한 그들은 예수가 지셨던 십자가를 똑 같이 질 각오도 해야한다(눅14:27).-유대교(로마)가 예수를 탄압했듯이 제자들도 탄압을 각오해야 한다.- 이들의 전적인 헌신은 한마디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하는 것이다(눅14:33). 제자가 되기 위한 이러한 헌신의 조건은 본질적이고 선행적인 요소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그에 선행하는 어떤 필수적인 조건이 있는 것과 같다(눅14:28-32). 만약 제자로서 선행되는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그는 본질적으로 어리석어진(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 그 어디에도 사용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소금은 밖에 버려 지듯이 이러한 기독인들은 심판을 받는다(눅14:34-35).
결국 누가는 Q에서 제자들의 전적인 헌신(합당한 자)의 개념과 그렇지 못한 자의 심판을 수용한다. 그러나 Q자료가 그 성격이 종말적이고 묵시적인 긴박성임에 반하여 누가는 자신의 공동체를 유대교로 부터 보호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다시말해 누가에게 있어서 소금에 관한 말씀은 유대교와의 분리를 경험한 누가 공동체가 자신들의 구성원들에게 유대교의 탄압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헌신의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누가가 적극 수용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이다.
Mt는 소금에 관한 말씀을 이미 천국의 복을 받은 제자들이 행해야할 사명(임무)으로 수용한다. 예수의 복의 선언 중에는 마태 공동체가 핍박을 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마5:10-12). 이것은 마태 공동체의 경험이 유대교로 부터의 분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태는 산상보훈을 유대교로 부터 분리된 자신의 공동체에게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시켜 주기 위해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마태는 산상보훈을 율법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지만 유대교의 율법보다는 더 높은 율법 즉 율법의 완성으로 본 것이다(마5:17-18). 이러한 높은 경지의 율법으로 유대교 보다 더 고차원적인 종교가 기독교임을 마태는 자신들의 공동체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에게 있어서 유대교로 부터 분리된 마태 공동체의 정체성의 확립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은 의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마9:20).
마태는 이러한 의도를 자신의 공동체에게 철저히 적용시킨다. 그리하여 자신의 공동체가 핍박을 받았지만 이미 이들에게는 축복의 보장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이들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며, 예수를 위해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마5:10-12). 핍박은 이들에게 두려운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두려운 것은 박해를 통해서 자신이 실천해야할 '의'를 실천하지 못하여-숨겨두어-하나님께 심판을 받는 일이다(마10:26-31). 그러므로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가 이미 천국의 복을 받은 자들로 박해를 두려워 하지 않고 반드시 행해야할 '의'가 있는 데 그것은 산상보훈에서 나타난 가르침, 즉 '의로운 행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기독인들이 지녀야할 의무인 것이다. 이 의무를 설명하기 위해서 마태는 소금의 말씀을 수용한다. 기독인이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소금으로서 가치를 상실할 때는 그것은 버려지고 사람들에 의해 짓밟힌다는 것이다(마5:13).
마태는 짓밟힌다는 내용을 본문에 첨가함으로서 만약 유대교보다 높은 의를 지니지 아니한다면 즉 정체성을 잃은 공동체가 된다면 그 공동체는 생존할 수 없음을 소금의 비유를 통해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는 Q에서 나타나는 전적인 헌신의 개념을 핍박을 두려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실천할 수 있는 '행위의 의'의 개념으로 그리고 Q에서 나타나는 심판의 개념을 유대교로 부터 분리된 마태 공동체의 '정체성 상실'의 결과로 수용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금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그 의미가 분명 제자직에 관한 것이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자신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성도들의 임무를 설명하기 위해 소금의 말씀이 사용되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문 '나'의 형성

본문 '나'는 공관복음에서 유사한 병행구를 갖는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5:15f s

막4:21 s,
해석: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말 아래나 침상 밑에 두라고 등불이 오겠느냐? 등경 위에 둘 것이 아니냐?"

눅8:16 s s s s s

눅11:33 s s s s

마태의 본문의 형성을 밝히는 주요 열쇠는 타문서에 나타난 비유에 관한 이중 단어다. 마가와 누가는 등불에 관한 이중 단어를 사용한다. 마가는 말( )과 침상( )이고 누가는 그릇( )과 침대( s)이며 또한 움속과 말( )이다. 이 이중 단어가 마가와 누가가 한 가지의 전승을 공유하고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 이중단어의 전승이 도마복음서에서도 등장한다. 도마복음에는 '말'과 '숨겨진 곳'이 나온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움속'과'말'의 이중단어와 일치한다. 이 일치성을 통해서 등불에 관한 전승은 이중단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마태가 등불에 관해 이중단어를 사용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본인은 마태가 이중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마태는 그의 본문에서 '산'은 '등경'으로 '등불'은 '도시'로 하나의 상징이 서로 연결되게 자신의 본문을 구성했는 데-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에 자세한 주석을 하겠다.- 이 때 산은 '숨기움의 동사'를 등불은 '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것은 마태가 등불에 관한 이중단어 전승을 수용하고 있는 강력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등불에 관한 이중 단어의 전승은 공관복음과 도마복음서에서도 수용되는 것으로 보아서 예수의 초기 전승으로 보여진다.
등불에 관한 전승을 누가와 마태가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Q자료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Q의 전승도 이중단어의 전승을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Q의 전승에 없는 도시와 등불에 관한 비유-도시와 등불이 연결되는 것-는 마태가 다른 전승을 수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5장 14절 이하에 '산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져 있을 수 없다.'라는 구절이 Q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도마복음서와 Oxyrhynchus papyrus 발견된다. 도마복음서는 산위에 도시와 등불에 관한 내용이 독립된 문장으로 분리되어 있으나 연속적으로 나온다. Oxy.P는 도시의 관한 말이 도마복음서와 병행을 이룬다.
도마복음서에서 등장하는 '지붕'의 비유는 Q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지는 데(마10:27,눅12:10-12), 이것은 아마도 도마가 도시와 등불의 비유사이에 지붕의 비유를 삽입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본문은 공관복음의 본문보다 비유들이 세련되게 결합되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또 하나의 가정을 유도한다. 즉 도마가 수용한 전승이 세련되지 않은 비유들의 결합 -'산위에 도시'와 '등불'-으로 이루어 져 있었다는 가정을 가능케한다. 이러한 가정은 '산위에 도시'와 '등불'의 비유에 관한 초기의 전승,더 나아가서는 예수의 말씀으로 소급되어질 수 있는 전승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등불의 말씀에 관한 공관복음의 관계에서 마태는 마가의 전승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가는 문장이 의문문으로 시작되고 연결되기 때문이다.- Μητι는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는 의문 불변사이다(이것이 가능한가? Can this be?) - 반면에 누가는 마가의 전승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첫째, 마태복음에는 없는 구절이 마가와 누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마가복음) / s (누가복음)이 그것이다. 그리고 둘째, 누가복음 8장 17절과 마가복음 4장 22절이 서로 유사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째, 마가나 누가 모두가 등불에 관한 말씀을 '씨뿌리는 자의 비유' 해석뒤에 놓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누가는 마가의 전승을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누가는 또한 마태의 전승과 그 일치성이 보여진다. - (마태복음) / s (누가복음), 동사 의 쓰임이 마태와 누가가 거의 일치한다(본문을 비교).- 그러므로 누가는 마태와 공통적인 전승(Q)을 소유하고 있으며 마가의 전승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의 가정을 세울 수 있다.

약어: * J 는 예수님 말씀에 소급되어지는 초기전승이다.
* PLt는 도시와 등불이 연결된 전승이다.
* Dwt는 등불에 관한 이중단어 비유 전승이다.
* Mkt 는 마가의 본문을 형성시킨 전승자료이다.
* Th 는 도마복음서이다.


이러한 가정에서 우리는 예수말씀 원형에 가까운 전승은 산위에 도시와 이중단어를 지닌 등불의 비유가 서로 결합되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 원형에 가까운 본문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J를 추측하건대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누구든지 도시는 산밑에 세우지 않는다.
왜냐하면 높은 산 위에 도시는 요새화되어서 무너질 수 없고 숨겨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말아래나 숨겨진 곳에 놓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등경위에 등불은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볼 수 있게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등불에 관한 전승의 수용은 각 복음서마다 다르다. 마가복음은 등불의 말씀을 '씨부리는 자' 비유해석 뒤에 그리고 두 개의 천국비유 앞에 놓고 있으며 청중을 제자로 한다. 이 등불이 비유가 마가복음4:22절의 말씀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자명하다.
'숨겨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라는 구절은 등불의 말씀을 통해서 더욱 강조된다. 이 말씀은 도마복음서(말씀5)와 Oxy.P에서 나타나며 심판사상과 연관이 된다. 의도적으로 숨겨져 있는 것은 복음서의 메시아 비밀사상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여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비밀과 연결된다.
이 비밀은 비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남을 마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가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이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로 들어날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밝히 들어날 것임을 독자에게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가는 잇따르는 천국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를 본문을 통해 암시하려 했던 것이다.
이 비유는 천국의 도래가 인간이 생각지도 못하는 어느 순간에 이미 도래 했음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인간이 상상할 수도 없는 작은 부분에서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마가 공동체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큰 충격의 체험속에서 하나님 나래의 도래를 열광적으로 열망하는 데에 대한 마가의 답변으로 이해된다. 즉 마가는 "과거에는 하나님의 통치(심판)는 비밀로 덮혀 있었지만 이제 그것은-천국의 도래-예수로 말미암아 분명 밝혀 졌다. 이것은 언젠가는 올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생각을 넘어선다. 마치 이것은 숨겨진 것이 당연히 드러나는 등불과 같지만 그러나 이것은 자라나는 식물과 같이 그 과정이 보이질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겨자씨와 같이 작은 데로 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묵묵히 이것을 기다려야 한다." 마가는 자신의 공동체에게 말하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가는 등불의 말씀-'등불이 오겠느냐?'라는 인격적인 표현이 그리스도와 부합된다.-을 통해 그리스도의 완전한 계시(하나님의 통치)가 곧 밝혀짐을 자신의 공동체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누가복음은 8장 17절의 시제가 미래를 나타내는 데, 이것은 지금까지 하나님에 의해서 감추어졌던 것이 장차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과 혹은 제자들이 예수로 부터 은밀히 받은 바를 널리 전파시킬 것임을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15절에서 언급한 열매맺는 데 대한 강조와 잘 부합이 된다. 이것은 또한 베일에 가리워진 계시와 장차 공개될 계시와 연결이 된다. 즉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예수는 비밀의 메시야로 남는다. 그러나 부활이후에 예수는 제자들에 의해서 메시야(그리스도)로 밝히 선포된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서 등불에 관한 말씀은 예수가 잠시동안 군중들에게 숨겨진 비유로 가르치지만 언젠가 그는 그들에게 부활을 통해서, 그리고 제자들의 선포활동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선포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암시는 누가문서가 복음의 흐름(선교)을 밝히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과 잘 부합한다.
마가복음이 등불의 비유를 하나님의 통치(심판)와 연관시키고 누가복음이 등불의 비유를 선교(메시야 선포)와 연관시키는 데 반하여 마태는 등불을 제자직과 연관시킨다. 이것은 소금의 말씀과 등불이 연결되기 때문이다.즉 소금은 빛에 빛은 도시에 도시는 등불에 연결이 되고 이것은 '좋은 행실'과 연결이 된다. 그러므로 마태는 등불의 비유가 마가나 누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 '다'의 형성

'다'는 마태의 편집적인 첨가다. 마태는 원래 본문 '가' 와 '나'에 대한 전승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양식에 맞게 편집을 했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마태의 편집이다.- 사실 마태는 '다'의 본문을 첨가하여 편집함으로서 소금과 빛에 의미를 밝히려 했음이 분명하다. 특히 '좋은 행실'에 관한 마태의 강조는 공동체의 정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로 인식했음이 분명하다. 더우기 이 좋은 행실이 외부로 급히 알려지기를 바라는-동사가 과거명령이다. 이것은 시급히 해야할 것을 나타낸다-마태의 의도가 이것을 더욱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본문 '다'는 본문'가'와 '나'를 분명히 해석해 주는 마태의 편집적 첨가부분으로 마태기자 자신의 것이다.


본문의 주석

본문의 구조
마태복음 5장 13절-16절은 두 개의 병행구(같은 양식)를 가지고 있다. 즉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s s s s)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s s )가 그것이다. 이 두개의 병행구로 우리는 2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이 병행구들은 마태복음 내에서 양식상 제자를 언급하는 양식과 일치한다. 이것은 이 양식이 제자에 관한 말씀임을 추론할 수 있게 한다. 즉 이 양식은 마태복음 16장 17절-18절에 나오는 데, 이것은 그 정황이 제자에 관한 사항이다. 16장 17-18절에는 본문과 같이 예수의 축복선언과 인간을 사물에 빗대는 은유적인 표현이 잇따라 나온다.- s (17절)/ s(18절)- 이러한 표현은 본문과 일치한다. 본문도 축복의 선언이 나오고 이어서 은유적인 표현이 나온다. 그러므로 본문의 은유적인 표현의 병행구는 마태가 제자를 향해 사용한 양식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이 병행구는 본문을 하나의 Text로 결집해 준다. 복의 선언(5:3-12)의 문장과는 다르게 본문은 인간을 물질에 비유하는 은유법을 사용한다. 이것은 본문이 복의 선언과 구별되는 분기점을 마련해 준다. 특별히 은유법의 병행과 병행구절의 문법적 일치성은 본문 13절과 14절이하가 서로 긴밀히 결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14절과 15절은 하나의 전승임을 이미 밝혔다. 16절에서 종속접속사가 사용되어( s) 결론을 이끌고, '빛 s'라는 단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16절은14,15절과 연결이 된다. 그리고 또한 16절은 인칭이 2인칭 복수 인데 반하여 17절 이하는 인칭의 시작이 1인칭이므로 16절은 17절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본문에 대한 양식과 결집성은 두개의 은유적인 병행구가 그 역활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 두개의 병행구가 서로 다른 전승을 하나의 Text로 묶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소금에 관한 전승과 등불(도시)에 관한 서로 다른 전승을 마태는 두개의 병행구를 사용하여 하나의 의미로 묶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가 자신의 본문을 형성할 때 서로 다른 전승을 '제자직'이라는 큰 틀에 맞추기 위해 은유적인 병행구를 사용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본문이 마태의 의도에 따라 결집성을 갖는다고 전제할 경우 우리는 본문에서 마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본문의 구조를 밝힐 수 있다. 이 구조를 밝히는 열쇠는 본문에서 사용되는 전치사들과 소유격들이다.
본문 14절과 15절은 같은 의미의 전치사를 사용한다.14절에서는 ' (on, 에서 유래)'를 사용한다. 그리고 15절에서는 ' '를 사용한다. 둘다 영어 전치사'on'의 의미이다. 이에 반하여 반대 의미의 전치사도 사용된다. 13절에 ' '와 15절의 ' '가 그것이다. 이 둘은 모두 영어 전치사 'under'의 의미이다.-영어 전치사 'in' 의 의미를 가진 ' ' 도 15절, 16절에서 같은 의미로 등장한다-이들 전치사를 포함하는 구절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s
( )

s
s s

이상에서 우리는 본문에서 사용된 전치사들이 어떤 명사와 동사들을 같은 의미로 결합하 있음을 쉽게 발견한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다.

사람들 발밑 소금 짓밟힌다.
말밑 등불 놓인다(꺼진다).

산위 도시 숨기지 못한다(무너지지 않는다)
등경위 등불 놓인다(비춘다).

집안에 모든 사람들 비춘다.
하늘에 아버지 찬양한다.

여기서 우리는 '소금=등불=도시'와 '발밑=말밑', '산=등경', '집=하늘', '모든 사람들=아버지', '짓밟힌다=꺼진다','숨기지 못한다=비춘다', '비친다=찬양한다'라고하는 단어들의 연결성을 찾을 수 있다. 특별히 전치사의 대조적인 사용은 본문을 대조적인 의미로 교차시킨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3절 사람들 발밑의 소금 짓밟힌다./부정
14절 산위의 도시 숨기지 못한다(무너지지 않는다)./긍정
15절 말밑에 등불 꺼진다./부정
15절 등경위에 등불 비춘다./긍정

15절이 같은 단어(등불)를 향해 전치사를 대조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구절들이 같은 단어를 향해 대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다른 구절들도 같은 단어를 향해 대조의 의미를 나타낼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물론 외관상으로는 같은 단어를 향한 대조의 의미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대조의 의미를 이끌어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이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본문의 구조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13절 사람들 발밑에 있지 않은 소금 사용되어진다(-할 힘이 있다).
13절 사람들 발밑에 있는 소금 짓밟힌다.
14절 산밑에 있는 도시 무너진다(침략당한다).
14절 산위에 있는 도시 숨기지 않는다(침략당하지 않는다).
15절 말밑에 놓인 등불 꺼진다.
15절 등경위에 놓인 등불 비춘다.

이러한 구조의 의미는 독자들로 하여금 극과 극(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어느것이 더 좋은 지를 선택케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구성의 목적은 결국에는 긍정의 의미를 독자에게 강조하는 데에 있다.
마태의 본문 구조를 보는 또 하나의 열쇠는 소유격의 사용이다. 마태가 소유격을 사용한 구절은 아래와 같다.

s s s
s
s



여기서 '소금=빛', '땅=세상' 그리고 '너희들의 빛=너희들의 좋은 행실=너희들의 아버지'라고 하는 의미의 연결성이 도출될 수 있다. 또 하나 본문에서 중요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는 데 그것은 의 반복적 사용이다. 즉 이것은 다음과 같이 사용된다.

(소금=너희)사람들에게 짓밟힌다.
(중략) 사람들 앞에(너희 빛을) 비춘다.

이것은 본문의 주제를 나타내는 두개의 골격이다. 즉 그것은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것에 대한 경고와 제자들이 자신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야 한다는 의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가 본문을 이끌어 가는 큰 기둥이 된다.
이상의 내용을 살핀다면, 결국 마태는 본문을 형성함에 있어서 서로 다른 두 전승을 은유적 병행구와 구절의 대조의미라는 구조를 사용하여 연결시켰으며, 이러한 연결은 경고와 의무(해야할 일)라는 주제를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이러한 구조가 단지 우연으로 생각하기에는 본문의 연결성이 너무나 빈틈이 없다. 그러므로 본문의 구조는 마태의 어떤 계획적이고도 치밀한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일 것이다. 이에 본인은 마태의 의도를 밝혀냄으로 본문에 대한 자세한 해석을 시도하려 한다.

본문 해석
땅의 소금(13절)
'너희들은 땅의 소금이다' 에서 s 는 앞절(5:11-12)에서 언급한 자들을 지칭할 것이다. 이들은 이미 예수때문에 박해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복을 받은 자들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들이 경험한 박해는 유대교로 부터의 분리이며 그들로 부터의 핍박일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소유한 공동체 구성원들은 2가지의 경향을 갖게 된다. 그것은 곧 '신앙을 포기하는 자'들과 '유대교(민족)도들과의 사회적인 완전한 단절을 하고 있는 자'들이다. 누가의 공동체가 전자의 경향을 띠어 누가가 소금의 비유를 통해 '제자의 전적인 헌신'을 강조했다면 마태의 공동체는 후자의 경향을 띠어 공동체는 사회와 단절이 된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 해야할 일이 있음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태의 이러한 의도는 '땅의 소금'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는 흙을 의미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 즉 동네를 의미할 수 있다. 그렇기에 '땅의 소금'이라는 것은 동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소금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본문(5:13-15)의 배경은 서민적인 생활을 전제하고 있음을 볼 때 이러한 본인의 해석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땅의 소금이다'라는 말은 기독인들은 사회와 단절된 존재가 아니라 사회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는 존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해석은 결국 마태가 유대교 사회와 단절을 하려는 공동체에게 올바른 기독인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땅의 소금'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소금이 어리석어지면 그것이 무엇에게 쳐지게 될 것인가?
후에 그것은 아무것을 할 힘이 없기때문에 다만 밖에 던지워 진다.'

동네 사람들에게 소금은 양념으로 긴요하다. 조미료로 사용되는 소금은 분명 깨끗하고 질 좋은 소금이다. 그러나 이 소금이 어리석어지면(짠기운을 잃으면) 동네 사람들이 이것을 밖에 던지고 발로 짓밟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기서 '어리석다'라는 말은 본문이 물질을 의인화시키고 있는 내용과 잘 부합된다.
'소금이 어리석게 된다'는 말은 분명 기독인들의 바보같은 행동을 지적하는 말일 것이다. 기독인들은 예수의 제자로서 핍박에 대해서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전해야 한다(마10:16). 핍박을 받는다고 핍박자를 미워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다(마6:38-42절). 오히려 이것은 유대교의 가르침이다.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보다 더 의로운 행실을 해야한다(마5:20). 더 의로운 행실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마6:43-48). 이럴때 제자들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고(마5:9)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는 복을 받는다(마5:9,6:45). 그러므로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가 유대교의 핍박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사랑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이고 제자들의 슬기로움이며 순전함이다. 이것이 제자들의 본질이다.
마태는 제자 공동체들이 자신의 본질을 지킬 것을 강조한다. 만약 이들이 이것을 잃으면 즉 어리석어지면 이들은 분명히 심판(던지워 지고,짓밟힌다)을 받을 것을 것이라고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의 심판의 경고는 마태가 사용하는 동사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마태는 '던지워 진다 '는 마태복음에서 심판과 연관되어서 사용되는 동사이다(3:10,5:29,30,7:19,13:42,18:8,9,21:21). 이 심판은 좋은 열매와 연관을 맺는다(3:10,7:19). 좋은 열매 는 심판의 기준(3:10)이며 인간을 판단하는 기준이다(7:20). 즉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는 사용되어진다(보존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나무는 불속에 던지어 진다(7:20). 인간의 심판(버려짐)의 기준은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쓰임'에 있다.
소금이 버려짐을 당하는 것은 동네 사람들에게 더이상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마찮가지로 기독인들도 사회에서 그 용도가 쓰임이 없으면 버려진다. 즉 열매 다시말해서 좋은 행실이 없으면 기독인들은 사회로 부터 소외를 당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 심판의 동사로 마태는 '짓밟힌다 '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 2번 나온다. 한번은 본문이며 또 한번은 마태복음 7장 6절이다. 여기서 마태는 '짓밟다'라는 동사를 개와 돼지를 연결시켜 사용한다-개와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다. 이것은 이방인을 지칭할 때도 쓰인다.- 이러한 용례로 보아서 '짓밟히다'라는 말은 매우 모욕적인 상황을 말할 때 사용된 것 같다. 즉 '소금이 사람들에게 짓밟힌다'라는 말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와 모욕의 상황 더 나아가서는 완전한 파멸을 독자들에게 연상시킨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행위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때 마태는 분명 심판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의 공동체를 소금에 비유하여 경고의 소리를 울린 것이다. 그 경고의 소리는 다름이 아닌 공동체의 슬기로움이다. 그 슬기로움은 '사랑'이다. 이 사랑은 마태에게 있어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공동체가 유대교의 현실적인 핍박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 강령으로서의 사랑이다. 즉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가 유대교로 부터 핍박을 받는 것에 대한 행동 강령으로 '사랑'을 선포했던 것이다. 마태가 산상수훈에서 '행위'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공동체의 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분명 산상수훈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이다(마5:38-48). 산상수훈은 청중들로 하여금 '완전'을 요구한다(마5:48). 그 완전의 표본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완전하신 이유는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때문이다(5:45-48). 이 사랑의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알았던 하나님을 뛰어 넘는다(마5:43-44). 그리고 이것은 마태에게 있어서 유대인들 보다 더 나은 '의'로 표현된다.
마태는 바로 이 '의'를 자신의 공동체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즉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들이 핍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핍박자들을 끝까지 사랑하는 '의'를 가지고 사회속에서 높은 차원의 율법을 소유한 공동체로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
박해의 사회속에서 남아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마태에게 있어서 '의'의 실천으로 인한 박해는 하나님의 축복을 전제로한다.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의 당연한 행위이다. 마태는 핍박은 축복이며 이것을 견디는 자들에게 이미 구원은 보장 되어졌다고 말한다(마10:22). 마태는 이러한 구원의 전제가 자신의 공동체들이 사회속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공동체의 사랑의 지속적인 행위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이며 더나아가 공동체가 유대인들의 박해의 사회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마태는 믿었던 것이다.
결론으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할 때, '땅의 소금'에 관한 말씀은 사회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소금에 관한 말씀은 만약 공동체가 소금의 본 모습을 잃을 때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공동체가 파멸될 것이라는 강력한 경고의 소리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빛(14절-15절)
'세상의 빛'에서 s는 와 연결이 되므로 우주의 의미보다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의 의미가 더 합리적인 해석이다. 여기서 빛 s의 의미는 매우 특별하다. 마태복음 안에서 빛은 예수와 연관되서 사용된다(마4:16,17:2). 그리고 누가복음은 시므온의 찬양을 통해 예수를 이방 사람들에게 계시하는 '빛'으로 묘사한다(눅2:32). 또한 요한복음은 예수를 빛으로 본다(1:4,5,7,8,9;3:19,20,21;8:12;9:5;12:35,36,46).이러한 용례를 볼때 초대교회는 빛이라는 단어를 예수와 동의어로 본것 같다. 이때 빛의 의미는 이방사람들의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지며 이것은 이사야의 메시아 사상과 연결이 되며(사9:1-7), 또 세말에 예루살렘사상(시온사상)과 연결이 된다(사25:6;60:1-7). 그러므로 본문(5:14-15)은 메시아 사상과 시온사상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을 음미해 볼 때, 이 말의 의미는 '너희들은 메시야의 빛이며, 시온의 빛이다'일 것이다. 이것은 마태의 큰 신학적 의도가 있는 것이다. 마태는 이미 예수를 메시아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마2:4) 예수의 탄생하심을 세말에 시온이 받는 영광(시온의 회복)과 같은 것으로 복음서 안에서 암시하였다(마2:10-12).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탄생으로 시온의 회복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예수의 탄생으로 시온의 회복은 시작되었고 예수의 사역으로 시온의 영광-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음-은 구체화 된다(마4:15-16,10:11). 마태는 이러한 시온사상의 토대위에 자신의 복음서를 저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산상수훈도 시온사상의 토대위에 선다. 산상수훈에서 사방의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산으로 모여들고(마4:25;5:1,사2:2;9:1,2;60:4) 그들은 주로 부터 가르침을 받게 되며(마5:2;7:28,사2:3). 또한 이들에게는 주로 부터 행복과 함께 기쁨과 즐거움이 주어진다(마5:3-12,사9:3)
그러므로 '세상의 빛'에 관한 본문의 의미는 마태가 이미 시작된 시온의 영광의 시대속에서 제자들의 위치(임무)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마태는 예수로 말미암은 시온의 영광이 이제 제자들에 의해서 계속 연결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가르칠 것에 대한 권한을 산에서 준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마28:16-20).

산위에 있는 동네는 숨겨져 있을 수 없다.
그들은 등불을 말 아래 두려고 켜지 않고 다만 등경위에 두기 위해서 그것을 켠다.
그리고 그것은 집안에 모두를 비춘다.

시온의 영광이 시작된 시대에서 분명 예수의 제자들은 '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받는다. 이 빛은 등불과 연결이 되며 등불은 도시와 연결이 된다. 그러므로 동네와 등불은 빛의 표상을 갖는다.
'산위에 있는 동네'에서 우리는 산상수훈의 배경이 '산'이라고 볼 때 이 구절은 특별한 의미를 띤다. 마태복음에 있어서 산은 특별한 신학적 의도를 갖는다. 마귀의 시험도 산의 배경을 갖고(마4:8-9) 산상수훈(마5:2)과 사천명을 먹이신 일(마15:29-39), 예수의 변화 사건(마17:1),말세에 관한 말씀(마24:3-14), 말세의 피할 장소(마24:17), 예수의 잡히심의 밤(마26:30-35),제자들의 사명 부여(마28:16-20)도 모두 산을 배경으로 한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마태에게 있어서 산은 분명 가르침의 장소요, 예수의 영광이 드러나는 장소요,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는 장소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할 때 산위에 있는 동네는 예수의 가르침과 그 분의 영광과 제자들의 사명이 있는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시온의 영광을 이어받은 공동체이며, 이 공동체는 바로 '빛'으로 즉 예수 자체로서 산위에 높이 위치한 공동체인 것이다. 이 공동체는 바로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킨 시온의 영광 즉 새 예루살렘인 것이다.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를 시온의 영광으로 보았다. 이 공동체는 시온의 빛으로 만인에게 빛을 비춘다. 빛을 소유한 공동체는 숨길 수 없는-무너지지 않는- 존재이다. 모든 민족이 시온의 빛을 향해 모여드는 일은 예수의 빛으로 이미 시작되었다(마2:2;4:15,23-25). 이제 공동체들의 사명은 빛을 비추는 것이다. 즉 직접 가서 모든 민족을 예수의 제자로 삼는 것이다(마28:19-20). 이것은 마치 등불이 등경위에서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비추듯이 공동체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자신의 공동체의 '빛'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로써 온전한 시온의 영광이 즉 모든 민족의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본문(마5:14-15)은 마태 공동체의 사명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태가 공동체의 사명(임무)을 강조하는 이유는 공동체의 사명을 자각시킴으로서 자신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이다. 유대교로 부터 분리되어 이제 새로운 종교 공동체로 인식되어진 자신의 공동체를 향해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가 나가야할 방향을 본문(5:14-15)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마태가 제시하고자 하는 그 방향은 바로 모든 민족을 향해 '빛'의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이다. 즉 시온의 온전한 영광 다시말해서 모든 민족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는 날, 이날을 위해서 공동체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마태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시온의 영광의 시작은 분명 유대교와 다른 사고이다. 마태는 바로 이점을 이용하여 자신의 공동체가 유대교보다 더 우월하고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인 공동체임을 강조하여 자신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13절이 공동체의 정체성 상실에 대한 경고의 메세지로 정체성의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면 '세상의 빛'에 관한 본문은 정체성을 회복한 공동체가 이제 해야할 일(의무)을 촉구함으로써 자신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좋은 행실(16절)
그러므로 너희들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
그리하여서 그들이 너희들의 좋은 행실을 보고,
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들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

접속사 '그러므로 s'본문이 앞의 내용을 종결짓고 있음을 보여준다. '너희들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어라'에서 빛은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전해주어야 할 복음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비추어라'라고 하는 동사의 쓰임에 주의를 기우려야 한다. 여기서 동사 는 과거 명령법이다. 이것은 현재 명령과는 다르게 '긴박한 목소리로 권면을 강조'할 때 사용된다. 그러므로 '비추어라'라는 말은 지금 시급히 복음을 전해야 하는 강력한 권면의 명령이다.
이와 함께 우리는 본문에서 사용되는 주요동사 즉 '보다 '와 '찬양한다 '의 쓰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 동사는 모두 단순과거 가정법의 시제를 갖는다. 단순과거 가정법은 당장에 어떤 일을 하도록 명령할 때, 혹은 시간적인 요소와 상관없이 즉시 어떤 일을 하도록 단호하게 명령할 때 사용된다. 그러므로 본문(마5:16)에서 의미는 좋은 행실을 지금 당장 하라는 뜻이며,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당장 하나님꼐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마태에게 있어서 공동체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긴급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가 유대교 보다 월등한 공동체로서 역사속에 존재하기를 바랬다. 이런 이유에서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를 시온의 영광을 이루는 역사의 공동체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의 공동체가 시온의 영광을 이루기 위해 무엇 보다도 복음(좋은 일)을 전하는 것은 마태에게 있어서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매우 시급하고도 중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마태가 복음 선포를 공동체의 사명으로 본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가 말하는 복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그것은 본문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들이 너희들의 좋은 행실을 보고' 에서 좋은 행실은 복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소유격의 사용으로 빛과 좋은 행실은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 좋은 행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마태는 한마디로 '아버지'라고 말한다.
마태에게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은 '의' 그자체이다. 그 의는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사랑'이다. 기독인들은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핍박하는 이웃을 용서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마5:44,6:12-13). 이것은 바로 아버지가 완전하기 때문에 기독인들도 완전해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과 일치한다(마5:48).
그러므로 마태는 선한 행실을 '아버지'로 보았으며 그것은 곧 사랑의 행위였던 것이다. 마태는 이 사랑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 베풀것을 강조한다. 마태는 이를 위해서 예수께서 몸소 사람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보이셨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찬양)돌린 사실을 자신의 글에서 보여준다. 마태복음 9장 1절-8절은 사람의 죄를 사해주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찬양)을 돌린다. 또 가장 연약한 인간들의 병을 고치신 예수님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이것은 예수가 좋은 행실을 사람들에게 몸소 보였음을 나타낸다.
마태는 예수의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좋은 행실 즉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로 보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찬양을 돌리는 것, 그것은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환히 비추는 행위와 같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집안에 사는 사람들 즉 보통 사람들과 같다. 이것은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를 가리킬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하는 것이 예수 곧 하나님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마25:31-46). 그러므로 마태는 사랑이라는 것은 사회라는 곳에서 구체적인 방법으로 예수님과 같이 행위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며, 이것은 용서와 연약한자를 돕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본문(마5:13-16)은 그 주제가 사랑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핍박이라는 사회적 상황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서로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독인으로서 구체적으로 남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사랑, 즉 용서와 연약한 자를 돕는 구체적인 행위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마태는 바로 이 사랑의 실천을 '율법의 완성'으로 그리고 '의'로 더 나아가서는 '복음'으로 여겼던 것이다.
마태는 이 복음을 자신의 공동체가 핍박이라는 상황 속에서 세상에 전하는 데 있어서 주역이 되길 원했다. 이것은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던 것처럼 제자들도 복음을 위해서 고난의 길을 걸을 것을 마태는 자신의 공동체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모든 민족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그 날-을 이 세상에 속히 오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마태는 바로 이 시온의 영광을 이루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무라고 보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태는 본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사회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해야할 사랑의 행위를 소금과 빛이라는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하였다. 마태는 이 비유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사랑의 실천을 해야하며 이것으로 인해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케 해야하는 데 그 임무가 주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또한 동시에 그 임무를 실행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독인들에게 있게됨을 마태는 공동체에게 강력히 알리고자 했다. 그러므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할 때 본문은 마태가 핍박과 단절이라는 사회적 상황속에서 자신의 공동체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강력한 경고와 권고의 메세지로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적 용

마태는 교회가 사회의 핍박이라는 상황속에서도 그 사회를 떠나지 않고 그 속에서 예수의 계명을 실천하기를 원했다. 마태가 주장하는 교회의 계명 실천은 추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은 핍박이라는 상황에 현실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였다. 마태는 교회가 핍박자를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라고 보았다. 또한 마태는 이 모든 사랑의 행위는 하나님께 하는 행위와 동일시 했으며 더 나아가 이러한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것이라는 확신위에 서있었다.
마태의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사랑의 행위를 전제한다. 마태는 그리스도인이 사회를 향해 교회가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전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며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마태가 바라던 교회의 상은 일반 사람들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소금과 등불같이 친밀한 존재로 사회에 있는 것이며 더나아가 세상에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만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토록 하는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마태의 외침을 들으면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의 대교회주의는 사회를 향해 스스로 담을 쌓고 있으며 스스로 사회와의 단절을 자처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사람들이 평상복의 차람으로 교회에 들어서기에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대교회 교인들의 문턱이 너무 높으며 보통사람들이 걸어서 교회에 발을 들여 놓기에는 교회 신자들의 고급 승용차의 담이 너무 높기때문이다. 교회는 형식적으로 사회를 향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물질적 도움을 주지만 그들을 초대해 자신의 공동체안에서 동등한 신자로 맞기를 꺼린다. 왜냐하면 교회는 가난한자들과 어울리기에는 사회의 엘리트들이 한국교회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어느 교회든지 '사랑'이라는 말을 외친다. 그러나 그 말은 강단의 외침뿐이며 나를 구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강조뿐이다. 말뿐인 사랑이나 감정적인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요구에 대한 응답이어야한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가 교회를 위해 요구하것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을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사회라는 곳에 존재하며 귀를 열고 눈을 뜨고 사회에 사는 일반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야한다. 그리고 이들의 요구에 구체적인 응답을 해주어야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행위인것이다.
한국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세워진 공동체다. 교회는 그분의 온전한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제로 세워진 존재들이므로 그들은 마땅히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 사명은 다름아닌 '빛과 소금'의 사명이다. 이 사명은 간단히 요약된다. 사회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케 하라는 것이다. 이 사명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속에서 감당할 때, 우리의 천국의 복은 획득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마태가 자신의 교회를 향해서 했던 경고처럼 한국교회는 어쩌면 사람들의 발밑에 짓밟히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 사회와 단절이 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지양해야 한다.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사회의 요구에 응답하는 사랑의 행위를 가져야 한다. 이럴때 만이 우리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서 세상을 향해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주석을 마치며

졸업을 앞두고 나는 한가지의 생각을 하게된다. 그것은 대학생활 대부분을 시위와 고민으로 보내면서, 또한 4년동안 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얻은 것이 과연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시위속에서 발견한 인간의 진실된 모습과 고민속에서 드러난 인생의 알팍한 해답일 수 도 있으며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가 4년동안 가장 크게 얻은 것은 '성서에 대한 신뢰'이다.
나는 과거에는 성서에 대한 흥미보다는 기독교 사상에 대해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사상을 안다는 것은 본인의 수준에서 남의 이야기를 되풀이한다는 것밖에 되지 않으며 이것으로 성도들에게 강한 메세지를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발견했다.
나는 새로운 창창력을 가지고 성도들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메세지를 만들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이 나를 붙들고 있을 때, 나는 성서신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으며 특별히 주석에 관한 수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수업시간을 통해 기존에 우리가 표상적으로 알고 있는 성서의 이해가 아닌 합리적인 성서의 이해를 배웠다. 나는 교수님들의 열띤 강연에 매료되었으며 마치 한편의 은혜 넘치는 설교를 듣는듯 했다.-실로 나는 수업시간에 예언서 주석 강의를 듣고 눈물을 흘린적도 있었다.
이러한 성서신학 수업시간을 통해 나는 여러 편의 주석을 써보는 행운을 가져보았다. 나의 작품들은 모두 초보적이고 졸작이었지만 본인 나름대로의 성서해석을 통해 성서가 얼마나 오묘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성서를 주석할 때마다 성서는 마치 나에게 보물이 뭍힌 밭과 같았다. 나는 보물을 찾는 여행자가 되어그 밭을 여러 도구를 가지고 파헤쳤다. 그때 마다 나는 새롭고 진귀한 진리의 보물이 내 앞에 나타는 경험을 했다. 그 보물을 발견한 나는 너무나 큰 기쁨을 누렸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곤 했다.
성서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신뢰가 이번에 또 하나의 작품을 내놓게 되었다. 이 주석이 잘된것인지 혹은 잘못된 것인지 나는 그것이 중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만약 이것이 중요했다면 아마 나는 성경을 나름대로 해석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개연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주의깊게 성경을 읽어 성경의 새로운 이해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정직하게 성경말씀을 오늘의 말씀으로 메세지화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주석의 기본원칙이다.
나는 이 원칙에 따라 이번 주석을 쓰는 데 최선을 다했다. 원하기는 나의 이 주석이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는 데 미력하나마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끝으로 나의 주석이 있기까지 수업시간을 통해 도움을 주신 모교의 성서신학 교수님들과 친구,선배님들-자신의 시간을 아끼지 않고 나의 자료를 찾아준 인규와 해박한 성서신학에 대한 지식으로 나에게 조언해준 승용이, 그리고 기독교 사상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던 민석이, 또한 신앙이 흔들릴 때 나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상철이 마지막으로 주석을 작상하도록 컴퓨터를 서슴없이 빌려준 낙현이와 윤지원 선배님-모두에게 감사를 드린다.
특별히 지금에 내가 있기까지 나의 존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부모님께 무한한 영광과 감사를 돌린다.

 

참고 문헌

성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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