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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그모스(Chemosh, 모압 여신)

by 은총가득 2020. 7. 31.

그모스(Chemosh, 모압 여신)

 

 

모압아, 너에게 재앙이 닥쳤다. 그모스 신을 믿는 백성은 망하니, 네 아들, 딸들이 포로로 사로잡혀 간다. (예례미아 48:46)

그모스 우상은 모압 민족의 여신이다. 구약 성서에 따르면 솔로몬은 정치적인 이유로 예루살렘 올리브 동산에 그모스 신당을 세웠고, (열왕기상 11:7) 후에 호시아 왕이 이 산당을 허물어 버린다. (열왕기하 23:13) 솔로몬에 의해 들어온 그모스 우상은 거의 400년 간 이스라엘 사람들 종교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다. 즉 유대 왕국이 바빌론에 망하기까지 이스라엘에 여러 우상들의 신당들이 있었다. 그모스는 셈족에게서 유래하는 아스닷신으로부터 나왔다. 그모스는 암몬족이 섬기는 몰록(Moloc)과 같은 신이라고도 한다. 모압과 암몬은 롯의 딸들로부터 나온 민족이므로 그모스와 몰록이 동일한 신에서 유래하며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모스

 

그모스와 몰렉은 다른 듯 같은 신이다. 성경에서 모압 족속이 섬기는 신이며 유아인신제사를 드린다. 모압사람을 '그모스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다른 신들이 음란하고 음탕했다면 그모스는 잔인하고 포악하다. 암몬 사람들은 몰렉을 섬겼고, 모압 사람들은 그모스를 섬겼다. 두 신은 똑같은 신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나라에 따라 조금 변했을 뿐이다. 유아신신제사를 드리는것도 동일한다. 몰렉은 암몬에서 밀곰(Milcom)으로 불리고, 히브리어로는 말콤, 밀콤이다. 인신제사는 페니키아 지방에서 가져온 것이다. 두로와 시돈이란 큰 도시가 자리한 페니키아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항구 도시다. 항구 도시는 점집, 여관, 술집과 창녀가 많다. 또한 인신공양을 드린다. 우리나라 심청전도 바다의 신을 달래기 위해 사람을 사서 바다에 던진 것이다. 인산 공양은 대체로 고대 항구 도시에 자주 행해지던 제사이다. 인신공양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을 달래기 위해서다. 또하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세번째는 첫번째와 통한다. 잘 먹고 살 살기 위해서다. 자신의 아이를 그모스의 내민손 위에 올려 놓는다. 불로 인해 뜨거워진 손은 아이를 태워 죽인다.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사 57:5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그모스 제단은 힌놈의 골짜기에 세워져 있었다. 모든 우상을 싫어하시지만 몰렉에 대한 인신제사는 극도로 혐오하고 계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이쉬타르(Ishtar

 

이쉬타르(Ishtar) (

 

이슈타르(이쉬타르)는 고대 바벨론의 사랑과 전쟁의 여신이다. 가나안에서는 아스다롯, 아세라 등으로 변촌 되었다. 아누의 딸이라고 하고 신(Sin)의 딸이라고도 한다. 이쉬타르는 스스로 ‘아침의 여신이면서 저녁의 여신’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앗시리아-바빌로니아의 수많은 신들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신이다. 이쉬타르는 금성을 신격화한 존재로서 후대 그리스 로마의 비너스, 아프로디테와도 무관하지 않은 여신이다. 이쉬타르는 상당히 복잡한 신이어서, 남녀양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바빌로니아-앗시리아 인들에게는 여신이지만 아랍 인들은 아타르라는 이름으로 남신으로 숭배하기도 한다. 또한 이쉬타르가 신(Sin)의 딸이라고 할 때는 전쟁의 여신이 되지만, 아누의 딸이라고 할 때는 사랑의 여신이 되기도 한다. 이쉬타르는 사랑의 욕망을 퍼트리는 신이기도 하다. 이런 연관성에서 고대의 이쉬타르 제사에는 이른바 "성스러운 매춘"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이쉬타르의 사랑에 관한 신화를 보면 이쉬타르 여신이 젊었을 때 수확의 신 탐무즈를 사랑했는데, 길가메쉬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사랑은 탐무즈의 죽음을 초래했다.

 

이쉬타르는 그것을 무척 슬퍼하고 애인에게 비탄의 눈물을 뿌렸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 신화의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의 사랑을 연상시킨다. 이쉬타르는 탐무즈를 찾기 위해, 그를 살려내 끔찍한 저승에서 데리고 나오기 위해, 지옥에 내려가서 ‘돌아오지 않는 땅에 일단 들어간 자는 다시 나올 수 없는 집’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이쉬타르는 지옥의 문을 열게 하고 하나씩 하나씩 몸에 지닌 장신구를 빼앗겨 가며 일곱 개의 성문을 의연히 뚫고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머리 위의 큰 관, 귀걸이, 목걸이, 가슴의 장식, 탄생석을 박은 허리띠, 손목과 발목의 장식, 끝으로 그녀가 입은 정결의 의상,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쉬타르는 지옥의 여왕 에레쉬키갈 앞에 다다라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에레쉬키갈은 자기 심부름꾼인 남타르에게 도움을 청하여 그로 하여금 이쉬타르를 궁정에 유폐시켜 60가지의 병에 걸리게 했다. 이렇게 해서 이쉬타르는 저승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 사실이 지상에서는 고뇌요, 하늘에서도 무한한 슬픔이 되었다. 이쉬타르의 아버지 신(Sin)은 에아에게 애원했다. 에아는 이쉬타르를 구하기 위해 아수슈나미르를 만들어 마술의 주문을 가르쳐 '돌아오지 않는 땅'으로 보냈다. 그 주문은 에레쉬키갈의 의지를 구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옥의 여왕은 이쉬타르를 석방해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슈타르

 


이슈타르, 주전 800년

 


이슈타르

아세라(아스다롯)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에셀을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주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21:33). <에셀>은 ‘살아있는 나무들로 조성된 작은 규모의 숲’을 의미한다. 에셀의 복수형은 아세라이다. 성경에서 최초로 바알, 아세라, 아스타롯 등 우상 숭배 사건이 재판관기 2:11,13; 3:7 등에 나타난다. 아세라는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는 ‘산당’같은 곳이다. 히브리어의 ‘아세라’가 영어에서는 ‘grove’라고 번역 되는데, 그것은 어떤 목상이나 형상이 아니라 우상이 안치되어 있는 장소를 말하기 때문이다(신16:21). 아세라로 조성된 나무들은 신성한 나무들로 여겨졌다. 배교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러한 아세라들은 ‘산당들’(왕상3:2) 및 아스타롯(판2:13)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었다(왕하17:16,17). 페니키아 사람들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신으로서 섬긴 여신이 있었는데, 이 여신상은 가지를 잘라낸 나무기둥(출34:13)으로서, 바알의 제단곁에 세워졌다(판3:7, 신16:21). ‘아세라’안에 놓여진 우상은 바빌론에서는 이쉬타르(Ishtar)로,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여신으로, 로마에서는 비너스여신으로 숭배되었는데, 오늘날 로마 카톨릭이 푸른 나무로 작은 숲과 같은 일종의 정원을 가꾸어 놓고 그 안에 마리아 상을 안치해 두는데, 이처럼 우상을 섬기기 위해 살아 있는 나무들로 조성된 것이 아세라이며, 이 아세라 역시 신성시하여 섬김의 대상이 되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와 특히 아합왕 시대에는 페니키아 출신 엣바알왕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이면서 바알을 섬기고 경배 하였으며,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에 바알을 위하여 한 제단을 쌓고, 또 아세라를 만들어서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켰다(왕상16:29-33; 18:19). 당시 선지자 엘리야는 바알 숭배자들과 아세라 숭배자 제사장들을 키손 시내에서 모두 죽여버렸다(왕상18:19-40). 이러한 극심한 바알 숭배와 아세라 숭배의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극심한 분노를 발하게 하였으며, 북왕국이 앗시리아에 멸망 당하여 포로가 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왕하17:7-23). 아브라함이 창세기 21:33에서 에셀을 심은 것을 잘못 이해하여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우상 숭배를 했다. 아브라함이 ‘에셀’을 심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셨으나, 이것이 훗날에 이스라엘이 배교하는 원인이 되었다. 노아는 ‘산당’을 지은 장본인 이었고, 그의 본을 아브라함도 따랐다(창8:20; 12:8). 이 두 가지 실행은 노아와 아브라함 당시에는 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당’과 ‘아세라’는 이스라엘을 배교로 이끈 결정적인 우상 숭배의 도구들이었다(왕상11:7; 12:31; 14:23, 왕하13:6). 이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섬김이 왜곡되면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에쉬문 (Eshmoun, 레바논 시돈)

시돈 지역의 풍요와 건강의 신이다. 에쉬문(Eshmoun)의 역사 유적지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청년 사냥꾼 에쉬문의 신화를 만나게 된다. 아스다롯(아스타르테여신, 페니키아인들이 숭배한 풍요와 생식의 여신)이 에쉬문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으나, 그는 여신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변신시키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이후, 그는 다시 환생하여 신으로 태어났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를 치유의 신이라 부르며, 매우 중요한 신으로 여긴다. 에쉬무나자르2세(Eshmounazar II)가 집권시에 에쉬문을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기원전 4세기 중반까지 존속되었으나, 결국 파괴되었다. 지금은 비록 파편 조각들과 부스러기들로 어지럽혀졌지만, 서기 3세기 말경까지는 명소로 꼽히는 지역이었다. (출처- blog.naver.com/antibg18)

<성경에 기록된 에쉬문>

 

사사기 10:6-9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죄- 일곱 나라의 이방신 섬김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여호와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삿10:6)" 했다.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와 아스다롯은 물론이고 아람의 아닷테슘 아린나, 시돈의 아스다롯 에쉬문,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블레셋의 다곤 등을 섬겼다.

(출처- cafe.daum.net/GodLoveU/2Dsl/33)

 

아스다롯(황금상, 주전 1600년경)

 

아스다롯은 가나안의 저녁별의 여신이다(렘44:19) 아세라, 이슈타르 등으로 불리운다. 가나안 선주민들은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자연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농경신들을 총칭해 바알 Baal(토지의 소유자)이라고 불렀다. 가나안 선주민들의 신 위계는, 상위의 지배자 El과 그 아래 하늘의 바알 Baal of Heaven, 그리고 엘의 배우자 아쉬라트 Ashirat(히브리인들은 아쉐라 Asherah라고 부름)였다. 이 바알신들은 농사의 주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농사의 각 단계는 바알의 출생, 성장, 죽음으로 묘사되고, 이 때마다 제의를 수행했다. 주요한 제의는 희생제의로, 증여의 희생제의 gift-sacrifice(수확 감사)와 친교의 희생제의 communion-sacrifice(신과 인간의 유대 강화)가 있었다. 중요한 축제는 봄, 초여름, 가을에 있었는데, 풍요의 여신 아스타르테 Astarte(히브리인은 아슈토레트, 바빌로니아인은 이쉬타르)가 중요한 역할을 했고, 아스타르테 숭배의식과 관련된 성창관습 temple-prostitution이 있었다. 소수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신앙과 관습에 빠져들었고, 엄격한 유일신론자들은 이를 배교로 간주했다. 야웨 신앙을 엄격히 지킨 자들은 산비탈에서 반유목생활을 하고 있어서, 농업을 주로 하는 사람들과 다른 상황에 있었다.

 

아스다롯

 

<에쉬문 신전- 레바논 시돈>

 

시돈 (Saydā. Saida, Sayida) 고시가 (출처- http://blog.daum.net/wonsunbe)

 

레바논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고대도시이다. 지금은 알자누브(남레바논) 주의 행정중심지이자 어업과 교역 및 주변 농촌지역을 위한 시장 중심지이며, 사우디아라비아에서부터 연결된 길이 1,720㎞의 트란스아라비아 송유관의 지중해 쪽 종점이자 대형 저유 탱크들의 저장소 구실을 하고 있다. 페니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 BC 3000년대에 건립되어 그후 1,000년 동안 번영했다.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과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한다.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로마 제국 등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으며 자주색 염료와 유리제품으로 유명했다. 헤로데 1세가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고 예수가 방문하기도 했다. 십자군시대에 지배세력이 여러 차례 바뀌면서 파괴되었다가 후에 다시 재건되었다.

 

오스만투르크 밑에서 1517년 이후 거의 400년 동안 번창했으며, 특히 17세기 준독립국인 드루즈의 수장(amῑr) 파흐르 앗 딘 2세의 지배 아래에서 가장 번영했다. 프랑스는 이곳을 다마스쿠스의 외항으로 발전시켰으나 1791년 오스만투르크의 레바논 총독 아흐마드 알 자자르가 프랑스 상인들을 성 밖으로 쫓아냄으로써 무역이 크게 쇠퇴했다. 183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다. 대규모의 공동묘지에서 수많은 석관이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현재 이스탄불에 보관되어 있는 페니키아 시대의 두 왕 에슈무나자르와 텐네스의 석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전투와 사냥 장면이 묘사된 유명한 석관들이 있다. 그밖의 유적으로는 십자군이 지은 성채와 페니키아 시대의 에슈문 사원이 손꼽힌다. 고속도로와 철도로 25㎞ 북쪽에 있는 베이루트와 연결된다. 시내에는 상당한 규모의 마론파 그리스도교도 공동체가 있다. 주민 가운데 상당수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다. 인구 100,000(1985). (출처- daum 백과사전)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사람의 아들아,시돈으로 얼굴을 돌리고 그곳을 거슬러 예언하여라. 너는 말하여라.'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시돈아,나 이제 너를 대적하여 네 가운데에서 내 영광을 드러내리라. 내가 그 성읍에 벌을 내려 내 거룩함을 드러내면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는 그 성읍으로 흑사병을 보내고 거리마다 피가 흥건하게 하리라 사방에서 일어난 칼로 살해된 자들이 그 성읍안에서 쓰러지리라.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이제 이스라엘 집안을 비웃는 사방 모든 민족들에게서,다시는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찔레나 그들을 아프게 하는 가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게될것이다.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내가 이스라엘 민족을 그들이 흩어져 사는 민족들에게서 모아 올때,나는 겨레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안에 내 거룩함을 드러내겠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집안은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에서 살게될 것이다. 그들은 집을 짓고 포도밭을 가꾸며 그 땅에서 평안히 살것이다.사방에서 그들을 비웃는 모든 민족들에게 내가 벌을 내리면,그들은 평안히 살 것이다. 그제야 그들은 내가 주 그들의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겔 28:20-26)

 

십자군 성채 (출처- http://oldtestament.maru.net/)

 

시돈은 해군력에서 비블로스와 두로에 맞서는 페니키아의 세 번째 도시 국가였다. 기원전 6세기말엽, 다리우스(Darius) 시대에는 5번째 페르시아 통치관구의 수도였고, 건물과 정원들의 전시장이었다. 이 도시는 47일간 지속되었던 유명한 포위공격 이후에 십자군에 의해 정복되었 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후에 살라딘(Saladin)에 의해 탈환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십자군 시대의 성채이다

 

시돈 십자가성채

 

시돈 십자가성채

 

시돈 십자가성채

 

에쉬문 신전 (이하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ju520207/11298868)

 

시돈 북동쪽 약 2km 에 위치한 신전이다. 신전이 세워진 연대는 대략 B. C 4-6 세기경 통치하던 에쉬무나자르2세(Eshmounazar II) 시대이다.

B. C 4세기경 대 지진으로 파괴된 후 1856년 왕의 석관이 발견 되었다.

 

에쉬문 신전

 

에쉬문 신전

 

에쉬문 신전

 

에쉬문 신전

 

에쉬문 신전

 

레바논

면적 10,452 ㎢, 인구 370 만명, 수도는 베이루트이다. 종교는 기독교이며, 언어는 아랍어, 영어, 불어를 통용한다. 통화는 리라, 전압은 220V를 사용한다. 기후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중 약 300일간 맑은 날씨를 보인다. 겨울에도 해안지역은 따뜻하고, 산간지역에만 눈이 내린다. 여름에는 해안지역은 덥고, 산간지역은 따뜻하다. 월 별 기 온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해 안 지 역 13 14 16 18 22 25 27 28 26 24 19 16 내 룩 지 역 7 9 10 13 20 24 24 25 23 19 11 8 9. 역사 레바논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20만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원전 2500년경, 페니키아(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지방에 있던 고대 왕국)인들이 이곳에 정착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아랍의 조상인 가나안 민족의 일파(一派)인 페니키아인들은 중동 지방의 해안 배후 지역과 지중해 연안 국가들 사이의 국제 무역에 종사하였던 상인들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또한, 화폐와 문자, 새로운 발명품들과 그 밖의 새로운 문명들을 전하는 문화의 전달자들이었다. 페니키아인들은 더 큰 왕국을 건설하는 대신, 도시국가로 남아 주변의 강대국들과 타협하면서 평화와 자유 무역을 보장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북아프리카 튀니지아 부근에 있던 고대 도시국가. 기원전 146년 로마군에 의해 멸망되었다.)와 유럽의 마르세이유 같은, 다른 성대한 치외법권적 도시국가들을건설하였다. 레바논은 1516년부터 1918년까지 오토만 제국의 통치하에 정치적, 행정적인 지배를 받았다. 1920년, 현재의 국경으로 경계 지어지는 영토가 레반트(동부 지중해와 그 섬의 연안 제국들)내 프랑스 군대의 지휘자였던 구로 장군(General Gourau)의 포고(布告)에 의해 그랑 리방(Grand-Liban: 대레바논)이라 불리는 국가가 되었다.

 

1926년 5월 23일, 의회제도를 갖춘 민주 공화국 헌법이 채택되었다. 공화국의 실제적인 정치적 독립은 1943년 11월 22일(독립 기념일)에 이루어졌다. 1945년, 아랍국가연맹(League of Arab States)과 유엔(United Nations)의 창단에 참여하였고, 1946년 12월 31일, 레바논에 주둔해 있던 외국 군대가 공화국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 이후 30년 동안, 레바논은 다양한 문화 유산을 가지고 커다란 변혁을 이루었다. 주변국들의 불안정한 정세로 인해, 이웃 국가들로부터 이민자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왔고, 결국 숙련된 노동자들과 기업인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대거(大擧) 레바논으로 몰려 들었다. 공화국의 경제력은 주로 기업인들에게 집중되어 왔으며, 민주주의 전통과 언론 및 표현의 자유, 그리고 높은 교육 수준으로 말미암아, 레바논 공화국은 곧 중동 지역에서 문화와 학문, 그리고 의학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주로, 이스라엘의 아랍국 점령과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공격-이 결합되어 1975년, 결국 내전이 일어났다. 이러한 중동 지역의 불안한 정세는 레바논의 정치와 경제 상황에 동요를 초래하였다.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되어 일어났고, 1978년과 1982년 두 번에 걸친 이스라엘군의 침공으로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내전 기간 중 정부의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고 실질적인 경제 기반인 기간 시설들이 유실되었으며, 숙련된 노동자들이 대거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989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체결된 타이프 화해 협정(Taif Agreement)의 결과로, 군대의 전쟁 행위는 1990년 10월에 실제적으로 끝이 났다. 당시 엘리아스 흐라위(Elias Hrawi)가 대통령직을 맡았고, 수상직은 살림 알 호스 박사(Dr. Salim Al Hoss)가 맡았다. 1992년에는 라휘크 하리리(Rafik Hariri)가 수상으로 임명되었고, 20년만에 처음으로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1995년에는 헌법 개정을 통해 흐라위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연장되었다. 1998년 10월, 에밀 라후드 장군(His Excellency General Emile Lahoud)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살림 알 호스 박사는 다시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라후드 대통령은 의장인 나비흐베리(His Excellency Mr. Nabih Berri)가 주관하는 국회에서의 취임 연설에서 탁월한 치안 유지, 정부 기구의 강화, 투명하고 책임있는 공무 수행의 당위성(當爲性)과 사회 정의와 평등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2000년 10월, 라피크 하리리(His Excellency Mr. Rafik Hariri)가 수상으로 재임명되었다. 2000년 5월 25일, 레바논의 지속적인 저항이 성공을 거두어, 22년간 국제 사회의 요구와 유엔의 결정에 불복하며 레바논의 영토를 점거하여 온 이스라엘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레바논 땅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철수와 관련하여, 몇 가지 문제들은 아직까지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이스라엘에 의해 점령되고 있는, '셰바 농장'으로 알려진 인접 마을들에 관한 문제, 국경 설정에 관한 문제, 계속되는 이스라엘군 침투에 관한 문제, 이스라엘에 아직까지 불법 수감되어 있는 레바논 국민들에 관한 문제 등).

 

1.바알벡(Baalbek) 은 평행으로 놓여있는 레바논 산맥과 안티레바논 산맥 중간의, 한 평야 지대에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가장 위대한 역사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서, 역사상 건설된 바 있는 로마 사원들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구조물이다. 기둥은 역사상 지어진 구조물들의 기둥들 중에서 높이가 가장 높고, 건축에 사용된 석재들 또한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크다. 바알베크 신전은 현재 남아있는 로마 건축물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본래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건축물로 꼽힌다. 주피터(로마신화의 최고의 신으로 하늘의 지배자)와 비너스(미의 여신), 바커스(술의 신)에게 바쳐졌던 바알베크 신전의 사원들은 기원 2,3세기에 건설되었으며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보다 규모가 크고, 그야말로 장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전의 입구로 들어가면 그 안에 두 채의 사원과 각각의 안뜰이 있고, 거대한 건축용 블록이 있는데, 특히 그 중 세 개는 높이가 19-20m에 달하고, 넓이는 4.5m, 깊이는 3.6m에 달한다. 또한, 경계벽에는 아랍 건축양식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 있고, 6개의 거대한 기둥들은 주피터 사원이 있었던 신성한 장소로부터 여전히 위쪽을 향해 치솟아 있다. 바알베크란 명칭은 바알-베크(Baal-Bek), 또는 바알(Baal - 옛 페니키아의 신)시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재까지도 이 지역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여러 해 동안 바알베크의 신전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극단, 오케스트라, 발레단 및 기타 예술인들이 참가하는 저명한 국제 행사들이 개최되었다.

 

2. 시돈-사이다(Sidon-Saida)은 “낚시”를 뜻하는 말이라고 전하여지며, 오늘날까지도 어부들은 자신들의 배를 이 그림같이 아름다운, 조그마한 항구에 정박시킨다. 시돈은 해군력에서 비블로스와 티르에 맞서는 페니키아의 세 번째 도시 국가였다. 기원전 6세기말엽, 다리우스(Darius) 시대에는 5번째 페르시아 통치관구의 수도였고, 건물과 정원들의 전시장이었다. 이 도시는 47일간 지속되었던 유명한 포위공격 이후에 십자군에 의해 정복되었고,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후에 살라딘(Saladin)에 의해 탈환되었다. 시돈은 남부의 수도로 알려져 있다. 이 도시는 아름다운 오렌지와 레몬, 바나나와 비파나무 과수원들로 둘러싸여 있다. 도시 북부의 항구는, 항구 입구의 작은 섬 위에 13세기초 예루살렘 병원 성(聖) 요한의 십자군 기사들이 세운 해성(Castle of Sea)이 있어 더욱 아름답다.

 

성 루이성(Castle of St. Louis)의 조개는 뮤렉스 언덕(Murex Hill) 부근 페니키아 성채의 정상에 있고, 이 때문에 뮤렉스 조개라 이름지어졌다. 유명한 페니키아의 자줏빛 염료는 바로 이 조개에서 추출한 것이다. 이 오래된 도시에서 볼 만한 최근 건물들로는 칸 아스-사분(Khan as-Sabun), 칸 엘-후란즈(Kahn el-Franz)와 성(聖) 요한 기사 수도회의 성채 벽이 아직까지 보존되어 있는 이집트 항구 위의 그레이트 모스크(the Great Mosque)가 있다. 1)에쉬문(Eshmoun) 에쉬문(Eshmoun)의 역사 유적지의 기원을 더듬어 올라가 보면, 청년 사냥꾼 에쉬문의 신화를 만나게 된다. 아스타르테여신(페니키아인들이 숭배한 풍요와 생식의 여신)이 그에게 반해 사랑에 빠졌으나, 그는 여신의 접근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여러 가지로 변신시키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이후, 그는 다시 환생하여 신으로 태어났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그를 치유의 신이라 부르며, 매우 중요한 신으로 여긴다. 에쉬무나자르2세(Eshmounazar II)가 집권시(時)에 에쉬문을 기념하는 사원을 건립하여 기원전 4세기 중반까지 존속되었으나, 결국 파괴되었다. 지금은 비록 파편 조각들과 부스러기들로 어지럽혀졌지만, 서기 3세기 말경까지는 명소로 꼽히는 지역이었다.

 

3.두로(Tyre)이 페니키아의 도시는 13년간에 걸친, 끊임없는 네부차드네자르(Nebuchadnezzar)왕조의 공격 속에서도 살아 남았으나, 섬과 육지 사이를 연결한 알렉산더 대왕의 군사전략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알렉산더 대왕은 둑길을 건설함으로써, 투석기들을 전진시킬 수 있게 하였고, 마침내 도시를 함락하였다. 고대에 두로(티르)는 자줏빛 염료로 염색한 직물로 유명하였으며, 이를 각지로 수출하였다. 그 염료는 뮤렉스란 조개껍질로부터 추출되었는데, 이는 바다 달팽이의 일종으로 지금도 티르의 아름다운 해안을 따라 서식하고 있으며, 당시에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더 값어치가 있었다. 헤이엘라멜(Hay El-Ramel)지역을 걸어가다 보면 역사를 다시 체험할 수가 있다. 이곳이 알렉산더가 만든 둑길로, 오늘날에는 흙과 모래에 의해 현대적인 건물들이 들어선 지협으로 확장되었다. 이 지역에는 관광객들의 눈길을 끄는 유적지가 세 군데 있다. 첫째는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인 섬에 위치하고 있는 유적들로서, 고대 기둥들과 모자이크거리, 로마식 욕탕, 그리고 사각형의 경기장 등이다.

 

두 번째는 십자군 시대의 교회 유적이고, 세 번째가 가장 광범위한 유적으로서 로마와 비잔틴 시대의 공동묘지와 이제껏 발견된 것 중 가장 큰 로마 경기장이 포함되어 있다. 이 경기장은 독특하게 벽돌이 아닌 돌로 만들어졌으며, 당시에는 전차 경기가 열렸던 곳이다. 기독교 지역의 좁고 색다른 길을 따라 걸으며, 주점과 생선 요리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조그마한 낚시 항구를 산책해 보라. 몸이 많이 피곤하지 않다면, 티르의 수우크스(시장)도 한 번 둘러 보고. 성서 시대에 예수가 결혼식 연회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는 가나(Qana)가 바로 이 티르 부근이었다. 1980년도에는 티르의 로마와 페니키아의 유적들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쟁동안 잦은 충돌이 있었던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79Km나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티르는 고층빌딩으로 유명한 부유한 도시가 되었으며 동시에 근면한 어민의 성격과 구식의 건물들을 보존하였다.

 

4.백향목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트리폴리 남부의 체카(Chekka)까지 간 다음, 아미운(Amioun) 방향으로 돈다. 이곳에서 카디샤 고르지(Kadisha Gorge) 언덕을 따라 가면 브샤리(Bsharri)에 이른다. 베이루트에서 차로 두 시간 반쯤 걸리는 거리이다. 알-아르쯔(AL-ARZ- The Cedars)란 명칭은 이 마을 중심부의 숲에 난, 매우 독특하고 오래된 나무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지난 30여년 동안 이 지역 주변에 수백 그루의 삼나무 묘목을 심었으나, 매년 1cm정도씩 밖에 자라지 않는 성장속도로 볼 때, 마을 중심부 숲의 삼나무만큼 인상적인 크기의 나무들로 자라려면 앞으로도 몇 세대는 더 지나야만 할 것 같다. 삼나무숲 이외에도 이 지역에는 흥미로운 볼 거리들이 많다. 브샤리 마을은 레바논의 가장 유명한 신화주의자이자, 시인이며, 화가이고, 소설가였던 칼릴 지브란의 출생지이자, 휴양지로서 잘 알려져 있다.

 

사원으로 개조된 지브란 박물관에는 그의 그림과 스케치들, 개인 소유물들과 손궤가 전시되어 있다. 이 마을에는 또한 교회가 셋 있고, 폭포도 하나 있다. 1953년, 정부는 삼나무촌 휴양지에 스키 리프트를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알아르쯔의 높은 고도 덕택으로, 이곳에서는 다른 휴양지에서보다 겨울철을 조금 더 즐길 수가 있다. (보통, 11월 초순부터 4월중?하순까지 이어진다.) 주말에 이곳으로 스키를 타러 오는 사람들의 수는 2천명에서 3천명에 이른다. 베이루트에서 이곳까지는 상당한 거리이기 때문에, 이곳에는 숙박 시설도 많다. 좋은 호텔도 많고, 사용 가능한 임대용 산장(별장)도 300채 가까이나 된다. 메인피스트(Main piste-스키활주로)마다 모두 네 대의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고, 야간에는 그 중 한 대가 가동된다. 횡단스키(cross-skiing)나 스노우보오드를 타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스키강좌 뿐 아니라, 탁아 시설도 마련되어 있으며, 이곳 키즈클럽에서는 5세에서 12세까지의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한다.

 

5. 베이루트(Beirut) 베이루트(Beirut)로 가는 길은 선박을 이용하든, 항공편을 이용하든 상관없이, 잊지 못할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약속한다. 도시 뒤 편에 이어져 있는 산들은 연중 300일 동안 내내 밝은 태양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겨울 동안에는 마치 눈으로 만든 담요를 덮은 놓은 것처럼 반짝인다. 파괴되었던 도심도 다시 활기를 띄고 있다. 세 대륙 사이의 교차로이자 동방으로의 관문이었던 예전의 명성을 다시 회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도 훨씬 더 현대화되었다. 컴퓨터로 완성된 새로운 도시개발계획에는 확장된 해안선과 새로운 주거 지역 및 중앙공원을 둘러싼 관광지역의 조성 등이 포함되어 있다. 베이루트의 역사는 5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스만제국, 맘루크, 십자군, 압바스, 우마야드, 비잔틴, 로마, 페르시아, 페니키아, 가나안 시대의 유물들이 베이루트 중심지에 남아 있다. 베이루트는 기원전 14세기경의 설형문자에 그 이름이 처음으로 나타나 있으며,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후 서기 551년에는 지진, 해일, 화재 등의 세 가지 대재앙이 겹쳐 일어나 도시 전체가 참혹히 손상되었다.

 

이후, 베이루트는 서기1110년 십자군원정이 있기 전까지, 아랍 세력이 지배하였고 십자군 이후에는 맘루크와 터어키의 지배하에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프랑스의 식민 통치 하에 있었으며, 마침내 1943년에 레바논이 독립을 차지하였다. 구(舊)시가의 유명한 관광지로는 오마리 모스크, 시청 건물, 아사프와 아미르 문지르 모스크, 화랑으로 이어진 마라드 거리, 국회 건물, 네즈메 광장의 로마식 기둥과 국회 맞은 편의 역사적인 그리스정교와 그리스 카톨릭 교회 등이 있다. 베이루트의 상업과 문화생활도 개선되고 있다. 베이루트에는 80개의 은행과 수 없이 많은 무역회사들, 항구와 공항, 그리고 자유무역시장이 있다. 베이루트를 관광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추천하는 것이 도보 여행이다. 휴식처로 좋은 장소는 라우쉬(Raouche) 지역인데, 이곳에는 베이루트에서 유명한 비둘기 바위(Pigeon Rocks)가 파도 치는 바다에 맞서 당당하게 우뚝 서있다. 이 지역의 식당들에서는 레바논 요리뿐 아니라, 각종 외국요리가 제공되고 절벽 쪽에 위치한 카페들에서는 다양하면서도 맛있는 스낵들이 제공된다. 일요일에는 경마를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제공된다. 베이루트 경마는 아라비아 순종의 말들로 운영되며, 관람객들의 베팅을 위해서 달러, 파운드 등 통화를 즉석에서 바꿀 수가 있다.

 

6. 트리폴리(Tripoli) 는 레바논 북부의 주요 도시이자 관광지이다. 기원전 800년 경,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으나, 당시 그들이 사용했던 도시명은 밝혀지지 않았다. 무역항인 도시의 특성은 이후 도시 지배자들에 의해 꾸준히 계승되어 왔으며, 오늘날 트리폴리는 레바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주요한 항만 도시이다. 레바논에는 전 지역에 많은 고대 유적들이 있지만 특히 트리폴리에는 십자군 시대부터 이슬람 시대에 이르는 역사적 유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십자군의 성(聖) 마리아 교회(Crusader Cathedral of St. Mary)였던 그레이트 모스크(the Great Mosque), 1336년에 건립된 테일란 모스크(the Teylan Mosque), 그리고 항만지역인 알-미나(Al-Mina)에 있는 사자의 탑(the tower of Lions)과 맘루크 군사문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보르즈 에스-스바(Borj Es-Sba) 등이 유명하다. 맘루크와 투르크에 의해 개조되고 확장된 십자군 성(聖) 자일즈 성(Crusader Castle of St. Gilles)이 도시 위에 우뚝 서있다. 이 성은 1100년에 건립된 후, 수 세기동안 일어난 변화를 반영하여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트리폴리의 전통적인 수우크스(souks-시장)는 아직까지도 트리폴리 주민들에게 매일 식품과 생활용품을 제공하고 있으며 맘루크시대의 터키식 욕탕도 여전히 성업중이다

 

7. 비블로스(Byblos)란 이름은 성서- ‘비블리온(Biblion)”에서 유래되었다. 성서라는 단어- ‘bible’은 ‘서책’을 뜻하는 그리이스어 ‘타 브 빌라(ta b bila)’에서 파생되었다. 비블로스는 지구상에서 인간이 지속적으로 거주한 가장 오래된 도시이다. 페니키아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비블로스는 자신의 도시를 온통 성벽으로 둘러쌌던 엘(El)이란 신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초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800년경)의 육중한 이곳 도시 성벽들은 그 시대 초기의 종교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심지어는 고대 페니키아인들까지도 비블로스를 아주 오래된 도시로 여겼었다. 그런데, 사실 비블로스에는 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았었다. 약 7000여년전, 소규모의 어부 집단이 이곳에 정착해 살았었는데, 석회암을 깨부숴 바닥에 붙인, 몇몇의 단칸 오두막들을 아직도 여기에서 볼 수가 있다.

 

그리이스와 로마 시대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이 고대 도시는 자신의 왕과 문화를 가진, 무역이 번성하였던, 강력한 독립 도시-국가였다. 비블로스의 왕들은 상형문자를 사용하면서도, 자신들의 이름과 직함에는 이집트식 카르투슈(고대 이집트의 기념비 따위에서 국왕의 이름을 둘러싼 원형의 장식 테두리)를 채택하여 사용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음표문자가 비블로스에서 개발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현재 베이루트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비블로스 아히람(King Ahiram- 1200-1000 B.C.)왕의 석관에 새겨져 있는 비문은 지금까지 발견된 페니키아 알파벳 가운데 가장 초기 유형이다. 도시 계획을 제일 처음 착상해낸 곳도 비블로스였다. 이 도시는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중앙부의 좁고 굽은 길을 따라, 2차선이 샛길로 갈라져서 가옥들 사이사이로 불규칙하게 뻗어 있다.

 

기원전 2800년, 이 도시의 여신인 ‘비블로스의 여인(Lady of Byblos)’-발라트 게발(Baalat Gebal)을 위해 거대한 사원이 하나 지어졌고, 이어 기원전 2700년에는 ‘Temple en L’이라 불리는 남신(男神)을 위한 사원이 세워졌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발라트 게발 사원을 마주보고 서 있다. 로마 시대 동안, 큰 사원들과 공공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거리에는 가로수들이 세워져 도시를 감싸게 되었다. 비잔틴과 아랍 제국시대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서기 1108년, 비블로스는 십자군에 패배하였고, 십자군들은 로마 사원과 공공 건물의 건축에 쓰인 거대한 석재와 화강암 기둥을 가져와 그들의 성과 호(壕)를 짓는데 사용하였다. 지난 50년간에 걸친 발굴 작업으로 비블로스는 7000년의 역사를 가진, 지구상에서 유례없는 고고학적 유적지가 되었다. 비블로스에서 들러 볼만한 흥미로운 장소 네 군데는: 12세기와 13세기에 십자군에 의해 지어진 성(城)과: 이집트의 사원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40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페니키아 왕족의 공동묘지: 로마식 원형 경기장이다.

 

8. 자흘리(Zahle) 베카(Beqaa)의 수도인 자흘리(Zahle)는 “아루스 엘 베카(Arouss El-Beqaa)-베카의 신부”로 알려져 있으며, 온화한 날씨와 맛있는 음식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베카 정부의 소재지이기도 하며, 훌륭한 호텔들과 기념품 가게들을 비롯하여 생활에 필요한 모든 편의 시설과 복지 시설들이 있다. 자흘리의 아름다운 옛 가옥들도 마을 주위를 한가롭게 거닐면서 감상할 수가 있다. 자흘리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는 사닌(Sannine)산으로부터 시작되어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끝나는, 삼림이 우거진 골짜기를 흐르는 바르다우니강(the Bardaouni river)이다. 리타니강(the Litani river)의 이 지류를 따라가면, 한 집 건너 하나씩 노천 식당들이 줄지어 서 있다.

 

개천과 분수, 수영장은 더운 공기를 식혀 주고, 차양과 나뭇잎들은 이 식당들을 태양빛으로부터 막아준다. 자흘리는 메제(mezze)의 도시이다. 이곳에서는 30여종이 넘는 메제를 만날 수가 있다. 또한, 아니스 열매로 만든 술, 아락(Arak)도 유명한데, 이렇듯 이곳에서는 전형적인 레바논의 여가를 즐길 수가 있다: 긴 시간 즐기는 한가로운 점심식사. 바르다우니(the Bardaouni)는 사람들의 기분이 고조되는 저녁 시간에 인기가 있다. 자흘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으로 산책을 가보라. 당신을 청동기, 철기시대의 무덤으로 안내할 것이다. 와디 엘 아레예쉬(Wadi El Arayesh)에는 비잔틴과 로마시대의 석관들이 있다. (출처- cafe.daum.net/picturelov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