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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세겔 -동방박사 / 나사렛비문

by 은총가득 2020. 9. 8.

성경의 화폐(2)-세겔

예수님의 시대에 로마의 지배 아래에 살던 지역들에 부과된 세금이 절대로 가볍지는 않았습니다. 시대에 따라서 세금의 종류와 수가 다르기는 했지만, 로마가 정복한 땅에 부과하는 세금이 100가지가 넘었다고 하니, 정복 당한 민족이 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로마 제국의 주 수입원은 전쟁을 통한 약탈과 세금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날마다 하는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승리해서 얻게 되는 전리품은 승리하는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테니, 일정하고 안정된 수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금으로 유지되는 제국’이 로마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에게는 중요했지만, 납세자인 시민들에게는 무거웠던 세금들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로마는 군인들을 동원해서 세금을 징수하였습니다. 100가지가 넘는 세금에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이들의 부패까지 있었기 때문에 곳곳에서 세금을 피해서 도망치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 세금”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남자들은 20세부터 50세까지 의무적으로 내야했고, 여자들은 3세에서 62세까지 내야했습니다. 그냥 쉽게 말해서 태어나자마자 부터 죽는 날까지 세금을 내야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마태복음 5장 42절,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돌려 받을 가능성이 없는 이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말고 들어주라는 이 가르침이 바로 세금에 때문에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서 매정하게 등돌리지 말아야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로마 제국이 부여하는 세금과 함께 유다 땅에는 종교 세금도 있었습니다. 성전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전세는 지역과 관계없이 모든 유대인들이 성전에 내는 세금이었습니다. 지역과 관계가 없다는 말은 그가 사는 곳이 유다이든, 아니면 로마이든 유대교인이라면 의무적으로 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전세는 로마의 세금과는 달리 내야한다는 의무규정이 있을 뿐, 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강제징수 규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릇된 제의를 드리고 있다고 생각한 쿰란의 종파는 성전세를 내는 것을 공개적으로 거부하였고, 그 외에도 성전에 내는 세금을 내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성전세를 내셨을까요?

“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내시려던 세금이 로마에 내는 세금인지, 아니면 성전에 내는 성전세인지에 대해서는 본문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이야기에 많은 성경 책들은 표제어로 “성전세를 내시다”라고 표제어를 달아 놓았습니다. 마태복음의 이야기로 보건데, 당시 세금은 1인에 반세겔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갈릴리 호수에 낚시를 던져 고기를 잡으면 그 고기의 입 속에 한 세겔이 있을 것이라시며, 베드로와 예수님의 몫으로 그 한 세겔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물고기의 입에서 꺼낸 한 세겔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헤롯 이전 시대에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유다와 그 주변의 지역들에서 널리 통용되던 세겔은 “두로의 세겔”(Shekel of Tyre)입니다. 지중해 변의 두로 지역에서 주조된 화폐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 동편의 레반트 지역에서 통용될 화폐를 제조하는 지역으로 두로를 선정하였고, 그 지역에서 제조된 화폐에는 그 지역의 이름을 새겨 넣어서 일종의 화폐 실명제를 실시했습니다. 그래서 두로에서 제조된 화폐에는 ΤΥΡΟΥ ΙΕΡΑΣ ΚΑΙ ΑΣΥΛΟΥ (투로우 이에라스 카이 아술로우, “두로(에서 제작한) 거룩하고 신성한 (세겔)”)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헤롯의 시대에 와서는 성전건축(20/19BCE)과 동시에 예루살렘에서 화폐를 제작하게 됩니다. 일종의 “두로 조폐공사 예루살렘 지청”를 만든 셈입니다. 이것은 헤롯의 외교력의 승리였습니다. 화폐 제조를 통해서 벌어들일 수 있는 경제적인 이득이 막대했기 때문입니다. 두로 조폐공사의 지청이었기 때문에 두로에서 제작한 화폐의 모양을 그대로 차용해야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지청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표시해 두어야했으므로 헤롯은 ΚΑΡ(ΚΡΑΤΟΣ ΡΩΜΑΙΩΝ 크라토스 로마이온 “로마의 힘”)라는 글자의 머릿글자를 추가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두로의 세겔처럼 그리스-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를 새겨 넣었습니다.

 

두로에서 만든 세겔보다는 예루살렘에서 만든 세겔이 그 형태가 조금은 엉성하고 불순물도 조금더 많이 섞여 있어서 “조잡한 세겔”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19/18BCE부터 66CE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그리고 그 주변 지역에서 “헤롯의 세겔”(Herodian Shekel)이라고 불리는 이 화폐는 널리 사용되었고, 아마 베드로가 잡은 물고기의 입에서도 이런 모양의 세겔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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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화폐(2)-세겔

Home 새소식, 이스라엘 따라

 

동방 박사

베들레헴에 예수님 탄생교회에 가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에 손을 대어봅니다. 그리고, 그 분이 누우셨던 구유를 기념하는 작은 예배 처소에서 깊은 묵상에 잠기고는 하지요. 하지만, 예수님 탄생 동굴에 들어가기 전에 예수님의 할례를 기념하는 작은 제단이 있다는 것과, 탄생 동굴에서 나오자마자 동방에서 온 박사들을 기념하는 작은 제단이 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합니다.

<img class="size-full wp-image-1797 aligncenter" src="https://biblia.co.il/wp-content/uploads/2017/02/Church-of-Nativity.png" alt="" width="2130" height="2708" />

 

신약성경에서 동방에서 온 박사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성경 만으로는 그들의 이름도, 몇 명이 왔는지도 알수 없습니다. 기원후 2세기,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100여년 뒤에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이들은 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세 명이었다. 또는 네 명이었다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박사들이 가지고 온 예물의 수 (황금, 몰약, 유향) 때문에 세 명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로마의 카타콤 도미띨라 (Domitilla)에는 네 사람이 그려져있고, 로마의 또 다른 카타콤 프리실라 (Priscilla) 에는 세 사람이 그려있는 것으로 보아서, 처음에는 세 명이었는지 네 명이었는지 확실히 그 수의 일치를 보지 못하다가, 세 명이라는 전통이 확정된 듯합니다 (기원후 2세기). 그리고 5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들이 동방에서 온 왕들이며, 그 이름은 발다사르 (Balthassar-아라비아의 왕), 멜키오르 (Melchior-페르시아의 왕), 카스파르(Caspar-인도의 왕)라는 전통이 생겨납니다. 동방박사의 역사적인 진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동방에서 온 세 명의 사람들과 우리의 모습이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알되, 자기 생각에 견주어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무관하게 우리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보려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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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실라 (Priscilla) 카타콤의 동방 박사. 세 사람의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에게 찾 아와서 경배하고 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예수님께서 왕궁에서 태어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들의 문화에서 “왕”이라고 불릴 이가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상아 장식과 황금 장식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침대가 아닌 구유에 누워있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꼭 그들의 문화 (페르시아로 추정) 에서만 그렇게 오해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모르고 있다고 가정할 때에, 우리도 역시 이 땅에 “왕”으로 오실 이의 탄생의 소식을 접하며 그 분이 어디에서 태어나셨을 것같냐는 질문을 던진들, 대부분은 모두 예루살렘 왕궁을 상상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억지로 우리 예수님을 휘황찬란한 금색 궁전의 왕좌에 앉혀 놓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회 운동가 중의 하나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신 이가 편안한 삶을 살았을리 없고, 가난한 자의 편, 피지배층의 입장에 서있을 예수님을 상상하며, 부자들에게 손가락질하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이들을 향해, 그들이 얻은 부와 명예에 “불공정”이란 딱지를 붙이거나, 심지어는 어찌 그리스도를 따르는 기독교인이 부요로울 수 있는가? 라며 비난합니다. 그렇게 성경을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틀에서만 대입시켜 이해하려고한다면, 예수님이 스스로 노동하지 않고 한 둘도 아닌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 사역을 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왜 자기들은 쓰지 않는 아프디 아픈 가시면류관을 예수님께만 씌우려 할까요?

 

이스라엘에 와서 놀랐던 것 하나는, 많은 것들이 제가 생각해왔던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마를 것 같은 광야는 푸르렀고, 대단히 넓었을 것 같았던 요단강은 개울 같았고, 조그마한 호수 같을 것이라 생각했던 갈릴리는 엄청나게 넓었습니다. 사해바다는 가도 가도 끝이 없구요. 이스라엘 살면서 알게된 것은 내 생각에 견주어 성경이 증언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제한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나사렛 비문

나사렛 비문

프랑스 루브르 (Louvre) 박물관의 큐레이터였던 프뢰너 (Wilhelm Froehner)가 1878년에 그리스와 중동 지역의 유물들을 취급하는 고고학 유물상으로부터 대리석 돌판 하나를 사들였습니다. 자기의 개인 소장고에 보관하던 그 대리석판은 프뢰너가 죽고 난 다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데요. 발견될 당시 이 대리석 석판에는 “1878년에 나사렛에서 온”이라는 메모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돌판은 그 이후로 ‘나사렛 비문’ (Nazareth Inscription) 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대리석 돌판에는 22줄에 걸쳐 그리스어가 쓰여있는데, 로마 황제의 칙령이었습니다. 이 칙령은 무덤과 묘실에 대한 로마의 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글씨의 필체를 보아서 대략 기원전 1세기 또는 기원후 1세기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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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1878년에 나사렛에 온”이라는 메모가 쓰여 있기는 하였지만, 누구로부터 사들였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발굴이 되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기록들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이 석판의 존재에 대해서 고고학자들 사이에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는 이 대리석 석판에 프뢰너가 “나사렛에서 온”이라고 적어놓기는 하였지만, 정말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진 나사렛에서 왔다고 과학적으로 증명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돌에는 나름대로 돌들만의 지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돌을 분석해 보면, 이 돌이 어디에서 떠낸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돌판이나 토기가 발견된 경우, 그 돌과 토기의 성분이 그 지역이나 그 지역 주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 대리석 석판을 분석해 보았는데, 나사렛과는 너무나 떨어진 터키 지역의 코스(Kos) 섬에서 뜬 돌이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이 분석을 토대로 한 부류의 학자들이 주장하기는, 이 칙령이 로마 배경에서 로마 제국의 터키 지역에서 발효되었던 칙령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기원전 30년 대에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의 권력을 뒷배 삼아 코스 섬을 다스리던 통치자 니키아스(Nikias)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정치가 가혹하여 그의 학정에 치를 떨던 섬의 주민들이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사망한 후 (31BCE), 더 이상 정치적으로 뒤를 봐줄 사람이 없는 니키아스가 죽자 (20BCE), 그의 무덤을 훼손하고 니키아스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헤쳐 끌고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니키아스의 뼈들이 길거리에 내동댕이 쳐진 이야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당대의 로마 시인들이 이 사건을 노래했더랬습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신약성경의 아우구스도 황제)는 이런 야만적인 보복을 금지하는 칙령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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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로마의 매장 방식이 주로 화장이었고, 가족 묘의 형태는 로마의 무덤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칙령에서는 명시적으로 가족묘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나 소아시아의 매장 풍습과 맞지 않습니다. 또 무덤과 묘실을 막는 돌들을 두는 매장 방법은 전형적인 유대아(Judaea)식의 매장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부류의 학자들은 이 석비가 어디에서 발굴이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유대아식의 매장 방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둘째로는 로마에서는 극 소수의 매우 부유한 사람들 만이 호화로운 개인 무덤 건축물(Mausoleum style tomb)을 소유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화려한 건축물에 침입하여서 그 안에 있는 사치스러운 부장품을 약탈하려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칙령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호화로운 무덤 건축물 역시 가족이 아니라 개인을 위한 무덤이었으므로 이 칙령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합적으로 추측하기로는 아마도 이 칙령의 시작은 로마의 역사적인 정황과 연관이 되어 있었겠지만, 로마의 한 특정 지역을 위한 칙령이 아니라, 로마가 다스리는 전 영토에도 마찬가지로 같은 칙명이 내려 졌으며, 유대아 역시 이 칙령에서 예외가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아 지역에는 특별히 가족묘 형식의 동굴 매장 형태가 반영된 칙령이 대리석판에 기록되어 로마로부터 전해 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칙령은 예수님 시대는 물론, 그 이후 시대에도 여전히 로마 사회에서 유효한 법으로 지켜졌습니다. 이 칙령을 이해한다면, 마태복음 28장의 한바탕 소동을 한 걸음더 들어가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다음, 빈 무덤을 본 여인들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뒤늦게 무덤이 빈 것을 알게 된 경비병들이 성에 들어가서는 대제사장들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지요. 이 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도둑질 해갔노라고 거짓말 할 것을 종용합니다 (마 28:11-15). 그런데, 이 거짓말은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만들어 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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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는 예수님께서 그 예언대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아마 많은 유대인들이 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두번째로는 자신들에게 날아올 비난의 화살이 두려웠을 겁니다. 그의 부활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이 알려진다면, 정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하는 제사장들과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하다고 우쭐대던 장로들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앞장서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인 셈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유대아의 사람들도 가만 있을리 없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마지막으로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죽이려는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계략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사렛 비문의 칙령은 아우구스도 황제(아우구스투스 Augustus 황제)의 시대로부터 예수님의 시대, 그리고 그 이후까지도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칙령에 따르면, 무덤이나 묘실을 훼손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무덤의 돌을 옮기고 시신을 옮긴 사람들이라고 고발한다면, 황제의 칙령을 어긴 셈이 되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입장에서는 손 안대고 코 푸는 겪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유대아에서 없앨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거짓말 이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신약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꽤나 어려웠을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