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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멜카르트, 멜카스 (Melqart, Melkart, Melkarth) , 두로의 주신

by 은총가득 2020. 7. 31.

 

페니키아의 바알신 (멜카르트)

 

멜카르트 (멜카스, Melqart, Melkart, Melkarth)

 

1. 페니키아(베니게- 두로, 시돈)의 신.

1). 바다와 항해의 신- 가장 힘센 신이며 두로(티로)의 도시 신이기도 하다. 어린아이를 태워서 제물로 바쳤다.(몰렉신)

2). 티르(두로) 및 그 도시의 두 식민지 카르타고와 가디르(카디스)의 주신(主神)이었고, 티르(두로)의 바알이라고도 불렸다. '말쿠'라는 이름으로 바빌로니아의 지하세계와 죽음의 신 '네르갈'과 동일시되었고, 따라서 라스 샴라(고대 우가리트)의 신 '모트'와도 관련이 있었던 듯하다. 대개 턱수염을 기르고, 둥글고 높은 모자에 치마를 입고, 생명을 상징하는 이집트인들의 고리모양 십자가와 죽음을 상징하는 구멍이 난 도끼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

 

티르에 있는 그의 신전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그는 이것을 헤라클레스의 신전이라 했음)에 따르면 매년 겨울과 봄 축제가 열리는 장소였고, 예루살렘에 있던 솔로몬 성전은 이 신전을 본뜬 것으로 보인다. 멜카르트는 태양과 연관된 듯하며, 그 경우에는 '분향단(焚香檀)의 주'라는 뜻의 '바알 함몬'(바알 아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바알 함몬은 카르타고의 주신 이름이며 여신 '타니트'의 남편이기도 했다. (출처- daum 백과사전)

 

3). 에스겔 27:11 두로를 향한 심판 “네 견고한 석상을 땅에 엎드러뜨릴 것이며”

 

4). 레위기 20장 멜카르트(몰렉)

몰렉은 옛날의 가나안 우상이었으며 Melkarth, Baal-melech, Malcom 등과 같은 이름으로도 불렸고, Kronos와 Saturn처럼 어린 아이를 제물로 드려 예배하던 태양신 바알과 관련된 우상일 것이다. 몰렉은 황동으로 만들어졌고 머리는 수소의 모양이었고 팔은 제물로 드려질 어린아이를 받으려고 내민 모습이다. 몰렉의 속은 비어있어서 열을 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언제부터 몰렉을 숭배했는지는 모르지만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아내)을 위하여 예루살렘 앞산에 이방신들을 위한 산당을 지어 그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들이 숭배하는 신들에게 분향하고 제사하도록 했는데 그곳에 있는 우상들 가운데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렉도 있었다(왕상11:7). 특히 아하스시대부터 예루살렘의 힌놈의 골짜기에서 어린아이를 불태워 몰렉에게 제물로 드리는 일이 있었다(겔16:20,21,20:31,렘32:35,왕하23:10,16:3,17:17,21:6)

 

 

이스라엘이 몰렉에게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칠 때 사용한 언어들을 보면 ‘불에 살랐느니라(겔16:20)’ ‘불에 지나가게 하였느니라(렘32:35, 왕하16:3)’ 등과 같은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표현들은 두 가지 사실을 가능케 한다. 하나는 실제로 몰렉에게 어린아이를 불에 태워 제물로 드렸을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아이로 하여금 불을 통과해 가게 하는 일종의 정결 의식으로서 어린 아이를 몰렉에게 성별하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어린아이를 몰렉에게 제물로 드렸든지 하나님은 이것을 금하셨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행위였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가운데 이처럼 가증한 일을 하는 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셨고, 하나님께서도 그에게 진노하심으로 그를 백성 가운데 끊어버리실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 ‘끊으리라’는 ‘함께 하리라’라는 말과 대립적 개념을 갖는 말이다. 즉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축복하실 때 ‘함께 하리라’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에 반하여 그 백성을 징계하시거나 축복으로부터 제외시킬 때 ‘끊으리라’는 언어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몰렉을 음란하게 섬기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라”라는 말씀은 몰렉을 숭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모든 축복으로부터 제외시키시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몰렉을 숭배하는 것을 얼마나 가증스런 일로 보시는지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와 같이 가증한 일이 행해지는 것을 보고도 못 본체 하는 자들에게까지 진노하시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권속들에게 진노하실 것임을 말씀하셨다.

 

 

페니키아(베니게)

 

 

 

페니키아(베니게)

 

2. 페니키아(베니게- 두로, 시돈)의 역사와 종교

페니키아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자줏빛 염료, 알파벳, 항해술 등이다. 페니키아는 지중해 동쪽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로 보통 48.3km 이내의 지역에 속하며 저지대에서는 6.4km 이하로 좁혀진다. 남북의 길이는 최대 804.5km로 북쪽의 미리안드루스(Myriandrus)로부터 남쪽의 이집트 국경의 엘-아리쉬에 위치한 리노콜루라(Thinocolura)까지 전 지중해 동쪽 해안을 망라한다. 최소 범위는 고대의 비블로스(현재의 Jubeil, 성서의 Gebal, 시 83:7, 겔 27:9)를 중심으로 321.8km의 길이이며 현재 레바논의 영역과 비슷하다. 페니키아는 자줏빛을 뜻하는 용어로 그러한 색깔의 염료가 생산되는 지역과 사람들에게 사용되다가 나중에는 그런 종류의 상품에도 적용되었다.

 

1)페니키아의 역사

페니키아의 역사는 국사의 역사라기보다 해안도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까닭은 인구가 식량과 생활 여건으로 말미암아 강 하구나 만 들의 해안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도시로는 아르왓(Arvad), 시미라(Simyra), 트리폴리스(Tripolis), 그발(Gebal, 즉 비블로스), 브에롯(Beeroth, 즉 Beirut), 시돈(Sidon), 샤르밧(Zarephath), 두로(Tyre) 등이 있다. 페니키아는 기원전 3000년경부터 언급되지만 주변의 압박으로 일찍부터 바다를 활동 무대로 삼았다. 페니키아는 자줏빛을 뜻하는 용어로 그러한 색의 상품에도 적용되었다. 페니키아는 민족이나 국가의 이름이 아니며, 다만 도시국가들의 집합체를 의미하는 용어다. 페니키아는 그리스인들에 의해 불린 이름이며 그 거주자들에 의해서는 가나안으로 부렸으나 기원전 1200년부터 그 주민들을 페키니아인으로 말해졌다.

 

페니키아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명확한 지역 명칭이 아니어서, 성서에서는 페니키아인들을 그발 사람, 시돈사람, 두로의 왕(수 123:5, 왕상 5:6, 렘 25:22)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며, 심지어 가나안으로도 언급된다.(옵 20) 물론 페니키아는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 가나안과 같았고, 기원후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때까지도 두로의 식민도시인 카르타고 근처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나안인으로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서에는 페니키아의 도시들의 명칭과 상응하는 시돈, 알가(Arka), 아르왓, 스말(Zemar) 등의 사람들은 가나안의 자손으로 언급된다.(창 10:15-18) 성서의 계보에 따르면 가나안은 셈족이 아니라 함족에 속하지만, 그것은 일부 지도자들의 혈연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관계에 대한 언급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비를로스의 통치자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던 고왕국 시대에 태양신 레(라)의 아들로 언급되며, 18왕조의 투트모세 3세는 두로와 아르왓, 시미라 등에 수비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나 혈통적으로 본다면 페니키아 사람들의 대부분은 셈족이며 가나안족(또는 아모리족)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지중해 동쪽 해안의 거주민들과 내륙의 가나안 사람들을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며 사용한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이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자줏빛 민족이란 뜻의 포이니코 (Phoinikoi)라고 불렀다. 자줏빛 민족이란 이름은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기원전 1800년 이전에 지중해 연안의 남서쪽으로 이동하여 거주하면서 바다 달팽이에서 추출한 자줏빛 염료로 말미암아 붙여진 것이다. 포이니코이가 가나안을 번역한 것이라면 아카드어의 키나히(Kinahhi)에서나 후리어의 자줏빛 민족의 땅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한편에서는 히브리어의 ‘가라앉다, 낮아지다’라는 단어(kn')와 연관시키고 있으며, 그 의미는 “태양이 지는(곳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그런데 열묘의 한 종류를 뜻하는 키나후(kinahhu)가 누지 문서에서 발견됨에 따라 ‘낮다’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와 히브리어 낱말(kn')을 가나안의 용어와 연관시키던 종래의 견해가 수정되었다, 그 후로 이 낱말은 사라져 버린 고대 셈어에서 자줏빛 염료를 추출하는 뼈고등(murex)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 가나안이란 명칭은 본래 자줏빛 염료와 연관되는 지역이나 민족을 가리키는 용어임이 거의 확실해졌다. 한편 발음상으로는 자줏빛 염료를 추출하는 꼭두서니 식물(puwwa)와 연관 지을 수 있으며, 성서에서 잇사갈의 아들 부와(puvah)라는 이름도 참조해야 한다.(창 46:13) 부와에게서 난 부니(Puni)라는 명칭(민 26:23)은 페니키아의 그리스어(phoiniko)나 라틴어(poenus, puniceus)와 가장 가깝다.

 

 

또한 가나안은 그들의 산업적 특징을 나타내는 용어가 되어 구약성서에서 상고(kena;ani, 욥 42:6, 잠 31:24, 슥 14:21)로 나타난다. 이집트의 고왕국 시대부터 비블로스 항구를 통하여 이집트와 교역이 시작되었는데 목재(삼나무)가 많이 수출되었다. 목재는 메소포타미아의 국가들도 원하던 것이여서 그들은 유프라테스 강을 이용하여 하류로 뗏목을 만들어 수송하곤 하였다. 성서에도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서 목재를 바다로 통하여 공급받은 사실이 기록되었다.(왕상 5:9) 비블로스는 가장 많이 발굴된 도시에 속하지만 역사적 체계를 세우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곳은 청동기 시대부터 유물이 나오고 있으며 철기 시대인 성서 시기에 속하는 유물은 매우 적다. 그 밖에도 두로와 시돈, 베이루트 등이 발굴되었고, 예외적으로 오늘날 미네트 엘-베이다 항구에서 몇 Km 떨어진 우가리트에서 매우 많은 토판 문서들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2)언어와 문화

우가리트에서 많은 토판 문서들이 발견되었는데, 우가리트는 넓은 의미에서 페니키아로 간주될 수 있지만 통상적으로 범위 밖에 있다. 그곳에서 나타난 문자는 알파벳형 설형문자이지만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문자는 음절이 있는 상형문자여서 페니키아의 문자 형성에서 다양한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페니키아 문자는 시나이 반도에서 발견된 문자보다 오랜된 것이며, 점차 발전하면서 그리스에 전래되어 자음과 동등하게 모음이 부착된 언어가 되었다. 페니키아 언어는 기복적으로 레반트 지역의 셈어 사용 민족들과 같은 언어였기 때문에 지역적 차이가 있어도 적어도 기원전 9세기까지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왕상 17:8-24 참조) 페니키아인들은 그들이 발명한 문자를 여러 곳에 전파했지만, 막상 그들 자신의 글은 많이 남겨 놓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보다는 그들이 사용한 용지인 파피루스가 쉽게 부식되어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스인들이 그발을 비블로스라고 부른 까닭은 그곳에 파피루스가 많았기 때문이며 파피루스는 책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비록 오늘날 남아 있지는 않지만 페니키아의 여러 문학작품들에 대한 잔접적인 증거가 발견된다. 요세푸스는 두로의 공시적 기록 문서에 대해 말하고 있고(Ant. VII, ii8), 디우스(Dius)가 페니키아의 역사를 기록하였다고 전한다. 그 밖에도 기원전 11세기에 속하는 페니키아의 창조설화도 전해진다. 그 설화에서는 “어둡고 바람 부는 공기와 짙고 흐린 혼돈이 만물의 근원이었다. 그때 욕망이 솟아올랐고 거기에서 모트(Mot)가 태어났다. 모트는 진흙 또는 썩은 물 같은 채소 물질이다. 그 모트는 빛과 달, 별 , 성좌들로 발전했다.”라고 창조과정에 대해 말한다. 이스라엘 왕국 시절 히브리 역사가들은 페니키아인들의 문학작품을 많이 참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구약성서는 자주 그들과의 법률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호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3)페니키아의 종교

페니키아는 다신교를 믿었으며 가정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의 세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 것처럼 신들도 그런 체제를 가진 것 같다. 페니키아의 삼신 체계는 위계조직의 성격보다는 이미지의 강화로 보인다. 예를 들면 아스타르트 여신의 그림은 선정적인 세 명의 여신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또한 한 쌍으로 나오는 신들의 모습도 자주 나타나며, 세 신들의 묘사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비블로스의 엘리온(Elyon)과 바알라트(Baalat), 두로의 아스타르트(Astarte)와 멜카르트(Melqart), 카르타고의 바알 하몬(Baal Hammon)과 티니트(Tinnit)등은 한 쌍의 남녀 신들이다. 신들에게 드리는 제의는 희생제사와 헌물, 기도, 정결례 등으로 구분된다. 제물은 동물과 식물을 모두 드렸으며, 짐승으로는 소, 양, 염소, 사슴 종류 등을 바쳤다. 성서에 언급된 페니키아의 제의를 보면 거룩하게 여겨지는 갈멜 산에 모여 바알의 선지자들에 의해 제사가 집행되었다. 희생제물로 소를 잡아 각을 떠서 불로 태워 드리는 형식인데, 제물을 태울 불을 기도와 춤을 통하여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왕상 18:20-40)

 

또한 예후의 바알 제사장 숙청 이야기에서는 바알을 위한 큰 제사를 빙자하여 바알 제사장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예후가 왕의 신분으로 집례한 것으로 보인다. (왕하 10:18-27)헌물은 다른 셈족들의 습관과 다를 바 없었으나 특별히 페니키아에서는 농업이나 공업 제품도 드렸다. 예컨대 새긴 물품과 금속 제품, 조각품, 도자기, 테라코타 등이 바쳐졌고, 약탈품들도 드렸다. 기도는 서원을 하고 이를 실행하는 내용이며, 발견된 대부분의 서원기도 본문의 끝에는 그들의 신이 헌신자의 기도를 들었다는 정형적인 문구로 끝이 난다. 페니키아의 정결례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돼지 뼈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돼지고기를 금했던 것 같다. 카르타고에서 발견된 후대의 명문에 거룩한 날을 세 번 언급한 달력이 발견되었고, 정한 사람에게만 흐르는 거룩한 기름샘에 관한 전설도 나타난다. 페니키아인들은 미리 마련된 제사 장소나 신성하게 여기는 동굴이나 산봉우리, 돌출된 암석, 샘, 강, 호수 등지에서 제사를 드렸으며, 특히 자연적이나 인공적 숲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이 신녕과 춘분, 하지, 추분 등에 제사를 드린 것을 볼 때 종교의식이 농경과 신화적 기원과 결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제사장은 두 부류 가 있었으며 대제사장의 지도하에 일정한 교육을 받았다.

 

(출처- 한상인, 『이스라엘 왕국시대의 고고학』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2004.) (출처- http://sumboo88.blog.me/90145627882)

 

4). 페니키아의 종교 (출처- http://blog.daum.net/kjkjgong/7090734)

(1) 페니키아의 종교는 다른 나라의 여러 신들과 상당히 혼합되어 있었다. 신들은 애굽, 희랍 그리고 로마(칼타고)를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신들과 동화되어 왔다. 으뜸가는 여신은 아스다롯(왕상 11:5) 이었을 것이다. 두로에서는 엘과 멜카르트를 섬겼다. 성전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과 몹시 같았을 것이다. 성전을 지을 때 페니키아의 일꾼들이 상당히 많이 일을 했기 때문이다.

 

(2) 칼타고, 노라, 모티어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자녀의 희생이 몰록에게 바쳐진 신전의 형태가 있었다. 이 제의는 자녀를 불 사이로 지나서 몰록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그의 시돈 여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시돈의 여신인 아스다롯을 섬겼다. 죽은 후의 사람에게 인사하도록 되어 있는 상황이 당시 사용된 장례의식으로 나타나 있다. 가장 희망을 갖고 있는 곳은 유해를 위해서 남아있는 안전한 은신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훌륭한 무덤을 좋아했다.

(3)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석관의 비문들이다. 두로의 아히람 석관은 10세기에 아히람이 다시 사용한 13세기의 관으로 판명되어 왔다. 이 관들은 모양이 애굽식이다. 시돈의 남동쪽 약 3.2킬로미터 지점에 페니키아의 묘지가 있다. 그릇들은 애굽의 형태를 개작한 희랍의 예술로 이루어져 있다. 그 관들 중에서 몇 개의 관에는 제조업자의 상표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되어 온 페티키아의 글자가 들어 있다.

 

3. 페니키아의 주요 도시 (출처- http://blog.daum.net/kjkjgong/7090734)

1). 두 로

(1) 두로는 주전 1200년부터 그 도시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당했던 주전 574년까지 눈에 띄는 두드러진 도시였다. 그 후 시돈이 그곳을 지배하였다. 주전 741년에 두로와 시돈이 히람왕과 그의 후계자인 룰리(Luli)왕의 통치 아래서 연합했을 가능성이 있다. 히람은 두로의 왕들 중에 가장 유명한 왕이었다.(주전 981-947) 이토바알 즉 에드바알은(주전 879-867) 아스다롯의 제사장이었으며 오므리의 집과 두로 사이에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부인이 그의 딸 이세벨이었다.(왕상 16:31) 엘리야가 페니키아의 도시인 사르밧의 과부를 방문한 것이 바로 이 조약 기간 동안이었다.(왕상 17장)

(2) 그 후 이세벨의 딸인 아달리아가 유다의 요람 왕과 결혼했다. 칼타고의 엘리사가 이토바알의 증손녀였기 때문에 이세벨은 그녀의 왕 고모였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이때 해안 지방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2). 게 발(Gebar)

(1) 원래 이 도시는 쿠프나(Kupna)로 불려졌다. 페니키아인드은 그 이름을 “산”을 의미하는 게발로 바꾸었다. 필로는 게발이 페니키아 도시 중에서 가장 최초의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도시의 역사는 멀리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텔(Tell)의 밑바닥에 처녀지에서 물건들이 인간의 뼈와 함께 발견되어 나오고 있는 사실은 지중해의 인종이 신석기 시대에 게발에서 살고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2) 아마 애굽과 게발 사이에는 페니키아의 어떤 도시보다도 더욱 가까운 관계이었을 것이다. 애굽이 강했을 때에는 몹시 가까운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증거가 있다. 그러나 애굽이 약했을 때는 게발이 독립을 주장하였다.

3). 시 돈

페니키아의 다른 도시들과 같이 시돈은 아모리, 하피루, 그리고 히타이트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었다. 시돈의 시민들은 이 도시가 페니키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을 자랑하고 있다. 그 이름은 사냥꾼의 신인 시드(Sid)에서 유래하고 있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들이 최초로 북극성을 발견했으며 최초로 밤에 항해했다고 한다. 그 영향은 좀 심하게 완전히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페니키아어

 

 

4. 페니키아와 성서 (출처- http://blog.daum.net/kjkjgong/7090734)

1) 창세기에는 시돈인들의 기원이 가나안의 후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창 10:5) 그들은 지파동맹 동안에 이스라엘에 약간 위협을 주었음에 틀림없었다. 여호수아는 시돈 건너 기브온을 공격한 백성들의 동맹을 추적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들의 영토 밖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수 11:8) 두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 좀 더 두드러진 도시였던 것 같다. 그것은 요새화 된 도시로 언급되었다.

 

 

2) 이들의 건축술은 이스라엘보다 굉장히 선두에 있엇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추방 이전과 이후의 성전들을 위해서 자료를 공급했거나 건축하였기 때문이다. 솔로몬관 다윗은 외관상 두로의 왕 특히 히람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히람은 납달리 족속의 과부와 두로의 놋점장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암시하는 중요한 사실은 그 왕이 장인(匠人) 집 출신이었으나 성장하여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히람의 이스라엘과 혼합된 결혼을 통해서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3)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성서에 참고해 볼 때 분명히 드러나는 몹시 주목할만한 일은 선지자의 경고에 반영되어 있다. 히람 왕 이후 성장해 온 것 같으며 특히 추방 이후에 양자간에 상당한 증오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감정에 빠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어떤 조약이나 음모가 시편 83편 7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 23자은 두로와 시돈의 멸망을 슬퍼하고 있으나 빈정거리는 가시가 몇 개 들어있는 것 같다.

4) 신약성서에 두로와 시돈을 언급한 구절들은 지리적인 위치를 참고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도시들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 있는 것 같다.(가나안 여인 마 15:21이하, 수로보니게여인 막 7:24이하 ) 페니키아는 튼튼히 요새화 되어 있고 부유하고 무역에 분주한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안에 위치해 있었고 항상 신선한 사람들, 자연 자원, 그리고 현명한 상인들로 축복받은 나라이었기에, 그들은 사방의 이웃 나라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5. 자주물감의 기원(페니키아)

페니키아 민족은 바닷가에 치솟은 해발 3000m 높이의 레바논 산지 때문에 내륙과는 고립되어 일찍부터 바다로 진출했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국제적인 장사꾼으로 명성을 날렸다. 최상품 목재인 레바논 백향목과 함께 페니키아 최고의 특산품은 자주 물감이었다. 순금의 가격과 맞먹을 정도로 비싼 자주 물감으로 물들인 자색 옷은 부유층의 상징이었고 로마시대에는 ‘왕궁 자색(royal purple)’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구석기 시대 말기에 이르러 철이나 구리 등의 여러 금속들이 산화되어 다양한 색깔을 띤 녹을 채취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서기전 1만50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 벽화들은 모두 이러한 물감을 사용한 것들이다. 서기전 4000년경부터 도시와 왕국이 생겨나 왕이나 제사장 등 특권층의 고유 의상이 필요하게 되면서 천의 염색을 위한 물감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주로 식물의 꽃, 잎, 열매, 껍질, 뿌리 등에서 추출한 물감이 사용됐다.

 

 

하지만 햇빛이나 세탁으로 쉽게 색이 바랬기 때문에 좀더 질이 좋은 물감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자주 물감은 두로의 수호신 멜카르트가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그가 개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는데 소라를 깨물은 개의 입이 처음에는 붉게 물들었다가 차츰 자주빛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페니키아’의 어원이 되는 ‘페닉크’는 ‘붉은 자주’라는 뜻으로서 원래는 지중해에 서식하는 소라의 일종이다. 서기전 1500년경 기록된 누지 문서에는 자주 물감을 후리어로 ‘키나후’라고 표기했고 ‘가나안(크나안)’의 어원이라는 학설도 제기됐다. 자주색을 의미하는 영어의 ‘퍼플(purple)’은 원래 지중해에 서식하는 소라의 이름인 그리스어 ‘포르피라(porphyra)’와 라틴어 ‘푸르푸라(purpura)’에서 유래됐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남(藍)’이나 ‘쪽’이 원래 식물의 이름이지만 이로부터 추출된 색깔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배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