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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 / 동영상 모음

by 은총가득 2020. 6. 9.

 

 

 

BBC 다큐멘터리
Ancient Rome The Rise And Fall of An Empire








BBC가 2006년에 120여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해 완성한 이 6부작 시리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이었던 로마의 탄생에서부터 지상의 1/4을 점령했던 전성기를 거쳐 쇠퇴 멸망에 이르기까지 극적인 리얼리티로 로마의 역사를 손에 잡힐 듯이 보여준다. 사건위주로 사실에 가깝게 사건별로 편집 제작한 6편의 비디오이다.



 


제1편 : 카이사르의 선택 고대 로마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을 꼽는다면 단연 카이사르일 것이다. 그는 부패한 귀족들의 손에 놀아나던 공화정부를 뒤엎고 스스로 종신 독재관에 취임, 사실상 제정 로마의 첫 황제가 되는 위업을 이룬 위인이다. 힙겹게 갈리아 정벌을 마친 카이사르는 공화정부 원로원과 대립하다가 결국 원로원의 명령에 불복하기로 결정하고 “주사위는 던져졌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 마침내 정적을 휩쓸고 로마를 차지하게 된다. 한때 막역한 정치적 동지였던 폼페이우스 장군과 맞서게 되면서 겪는 고뇌, 오른팔이었던 부관 라비에누스의 배신, 병력의 열세로 결국 패할 수밖에 없었던 디라키움 전투, 그 고난을 넘어 결국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 군을 물리치고 로마에 재입성하는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BBC 로마제국의 탄생과 멸망 1부]- 카이사르의 선택


제2편 : 네로 황제의 최후 네로는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잔혹하고 엽기적인 행각도 서슴치 않는 폭군중의 폭군이었다. 그는 특히 로마 대화재 이후 원대한 도시 재건 계획을 세운 뒤 그에 소요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몸부림쳤는데, 그 뒤에는 예술과 아름다움을 지상 최대의 가치로 삼는 그의 심미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로서의 체면도 내팽개친 채 백성들 앞에서 노래하고 시를 읊는 공연을 펼쳤고, 심지어는 반란사태에 직면하자 노래로 적을 감동시키고 굴복하겠다며 창녀를 구성원으로 하는 군대를 편성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살아서 신이 되고자 한 그의 야망은 기아와 굶주림에 지친 로마 백성들의 원성 앞에 물거품처럼 녹아버리고 결국 원로원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규정되어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다. 한때 황제로 제국을 호령했던 그는 숨을 곳을 찾아 헤매다가 한낱 불쌍하고 가련한 한 인간으로 일생을 마감한다.


[BBC 로마제국의 탄생과 멸망 2부]- 네로황제의 최후


제3편 : 유대인의 반란 서기 66년 유대 지구에서 로마 통치에 항거하는 대규모 반란이 벌어진다. 네로 황제의 눈 밖에 났던 장군 베스파시아누스와 그 아들 티투스는 반란 진압의 책임을 맡지만 갈수록 거세지는 유대인의 저항을 제압하지 못한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반란 세력 안에서도 내분이 일기 시작한다. 제사장이자 혁명 정부의 지도자인 하난은 독립 보장을 조건으로 로마와 협상을 시도하려 하지만, 과격한 반군 지도자인 요한은 결사항전을 외치며 막아선다. 이 와중에 베스피아누스가 네로에 이어 황제로 즉위하면서, 아들 티투스가 반란 진압을 총지휘하게 된다. 티투스는 갈릴리 전투에서 포로로 잡아온 유대인 지휘관 요세푸스를 내세워, 유대인 최후의 보루 예수살렘 공세에 나선다.

[BBC 로마제국의 탄생과 멸망 3부]- 유대인의 반란


제4편 : 그라쿠스의 군중 혁명 이야기는 카이사르의 시대를 넘어 로마 공화정 시대 말엽으로 돌아간다. 일반 선거로 국정을 운영하는 로마의 민주 공화정 시대는 5백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바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라는 청년 정치가의 개혁 시도 때문이었다. 로마의 오랜 숙적이던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라쿠스는 전쟁 이후 소작농의 몰락을 지켜보면서, 평민들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호민관으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귀족들이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농부들에게 재분배하는 법안을 제안해 통과시키지만, 이로써 부패한 원로원 사이에 공공의 적이 되어 버린다. 원로원은 그라쿠스가 공화정을 와해시켜 독재 군주가 되려 한다고 음해하고, 그라쿠스는 원로원의 계략과 민중의 오해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BBC 로마제국의 탄생과 멸망 4부]- 그라쿠스의 민중혁명


제5편 : 콘스탄티누스 대체 4세기 초반, 로마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위기 가운데 하나에 직면했다. 제국 서방에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 동방에 리키니우스와 다이아 등 네 명의 황제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기 때문이다. 제국을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던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뒤 동방의 황제,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처음으로 공인한 밀라노 칙령을 공표한다. 하지만 리키니우스가 다이아를 무너뜨린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마저 쓰러뜨리고 제국의 유일한 황제 자리에 오른다. 로마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이, 로마 황제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널리,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은 그 덕분에 기독교가 오늘날 서구세계의 주요한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BBC 로마제국의 탄생과 멸망 5부]- 콘스탄티누 대제


제6편 : 몰락의 시작 5세기 초반, 로마 제국은 로마인들이 야만족이라고 부르는 북방 부족들의 침입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사납기로 유명한 훈족이나 반달족은 같은 야만족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작은 부족인 고트족은 이들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나 결국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어 서쪽으로 계속 도망쳐왔다. 이들의 지도자인 알라리크는 로마 국경 내에 부족을 위해 새로운 터전을 찾고자 노력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트족에게 땅을 주겠다고 약속했던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이를 지키지 않자 알라리크의 군대는 로마 외곽에 진을 치고 로마를 포위 공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2년 후인 410년, 결국 알라리크와 고트족 군대는 로마를 약탈하게 된다. 알라리크의 로마 약탈은 로마제국의 종말은 아니었지만 몰락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로부터 백년도 채 안 돼, 서기 476년 마지막 황제가 퇴위당하면서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BBC 로마제국의 탄생과 멸망 6부]- 몰락의 시

 

 

빵으로 흥하고

빵으로 망한

로마제국의

역사

PANIS QUADRATUS

글. 윤덕노(음식평론가)

 

 

 

 

 

로마제국이 위대한 나라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로마는 어떻게 그렇게 부강해질 수 있었을까? 로마인이 먹었던 음식, 빵을 통해서 흥망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정치, 경제, 군사를 놔두고 왜 하필 빵으로 로마사를 알아야 하나 싶겠지만 나름 이유가 있다. 음식 속에 로마인의 생활이 녹아 있고 그래서 로마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진솔하게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현대인이 되새겨 볼 부분 또한 적지 않다.

 

 

죽 먹는 것들에서

빵 먹는 분들

 

고대 로마는 별 볼일 없는 나라였다. 전설로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양치기 소년이 세운 나라, 즉 목동들이 모여 만든 부족국가였다. 초기 로마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기에 당시 시민들은 양젖과 보리나 귀리로 만든 죽을 먹고 살았다. 기원전 3세기까지만 해도 당시 문명국이었던 그리스에서는 그런 로마인을 보고 ‘죽 먹는 것들(Porridge-eaters)’이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이렇게 놀림을 당하던 로마인들이 기원전 2세기 무렵에는 카르타고인을 보고 ‘죽 먹는 것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 100년 사이에 로마인의 주식이 죽에서 빵으로 바뀌면서 여전히 죽을 먹는 카르타고 사람들을 야만스러운 족속이라고 조롱한 것이다.

 

그까짓 빵이 뭐라고 그 야단일까 싶지만 기원전 2세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죽은 귀리나 보리로 끓이고 빵은 밀가루로 만든다. 우리나라에 비유하면 조선시대 흰 쌀밥과 꽁보리밥 정도의 차이다. 게다가 1세기 무렵에는 로마의 평민들도 빵을 먹었는데 비슷한 시기 한나라였던 중국에서는 황제도 아직 밀가루 음식을 먹지 못하던 때다. 서양의 빵과 비슷한 동양의 만두가 처음 만들어진 것이 3세기 무렵이다. 제갈공명이 만두를 발명했다고 하는 바로 그 시기다. 이때의 만두는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쓰는 음식이었고 만두 같은 밀가루 음식은 부자와 상류층 아니면 감히 먹지 못했다.

 

그러니 기원전 2세기부터 빵을 먹었던 로마인, 그리고 1세기에는 평민들까지도 빵을 먹었던 로마인의 식사 수준, 

경제 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빵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빵과 만두로 대표되는 동·서양 밀가루 음식이 퍼진 시기에 차이가 났던 이유는 밀의 원산지가 메소포타미아 지방이었기에 지중해와는 지리적으로 가까웠고 중국에는 서역의 사막을 건너 뒤늦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1세기 무렵 로마인들은 옛날 ‘죽 먹던 것들’이라고 놀림받던 입장에서 ‘빵 먹는 분들’로 대접받을 정도로 식사 수준, 바꿔 말해 경제 수준이 높아졌으니 ‘위대한 나라’라는 소리를 들을 만했다.

 

 

로마제국의 빵 Panis Quadratus

 

 

로마제국은

아프리카와 이집트가 먹여 살렸다

 

로마인은 어떻게 귀족과 평민, 부자와 서민 가리지 않고 밀가루 빵을 먹을 수 있었을까? 결정적 계기가 있었다. 당시 서양인 지중해 세계의 지배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벌인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덕분이다. 기원전 264년에서 241년까지 제1차 포에니 전쟁 승리로 로마는 시칠리아 섬을 얻었다. 비옥한 농토로 지중해의 곡식창고로 불렸던 섬이다. 풍요로운 밀밭의 확보로 로마인은 죽 대신 빵을 먹게 됐다. 이어 기원전 219년에서 201년까지 한니발 전쟁으로 알려진 2차 포에니 전쟁 승리로 스페인과 북아프리카 등 지중해 서부를 차지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광활한 밀밭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146년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카르타고를 최종 멸망시키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덕분에 지중해 구석구석의 곡물을 자유롭게 로마로 실어왔다. 로마가 제국이 된 계기, 로마인이 빵을 주식으로 먹게 된 일차적 배경이다.

 

이어 로마제국은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여왕과의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 최대 밀밭인 이집트를 합병한다.

이후의 상황을 서기 70년 로마에서 활동한 유대인 출신의 정치가이자 역사가였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유대 전쟁사(The Jewish War)>에서 유명한 말로 남겼다.

 

“로마는 아프리카가 8개월을 먹여 살리고, 나머지 4개월은 이집트가 먹여 살린다”

 

 

 

빵이 만들어 낸

로마 제조업의 부흥

 

로마가 강대국이 된 배경은 전쟁 승리로 영토를 확장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로마는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비롯해 갈리아 전쟁, 브리타니아 정복, 마케도니아 전쟁, 이집트와의 악티움 해전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전쟁을 겪었다. 도전과 대결을 회피하지 않았고 적국에 맞서 당당히 승리한 덕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제국주의적 확장과 자원 확보가 강대국이 된 비결라고 할 수 있을까?

 

빵을 통해 로마 역사를 보면 그건 절대 아니다. 전쟁 승리로 자원을 쉽게 구했지만 로마는 그 자원을 바탕으로 제조업을 비롯한 다양한 산업을 발전시켰다. 로마인이 먹었던 빵을 봐도 알 수 있다. 로마의 빵은 현대와 비교해도 별 손색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케이크를 비롯해 크루아상과 베이글, 건빵까지도 그 뿌리를 로마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로마인은 다양한 빵을 먹었는데 최고의 빵으로는 ‘파니스 실리기우스’를 꼽는다. 밀가루 빵이라는 뜻이다. 로마 군의관이었던 디오스코리데스가 당시 사람들이 먹던 빵 중에서 으뜸이라고 했다는 빵으로 부드럽고 가벼우면서 탄력 있는 빵이라고 묘사했다. 로마에서는 사회계층에 따라 각각 다른 색깔의 빵을 먹었다. 물론 봉건시대처럼 계층에 따라 먹을 수 있는 빵을 강제로 제한했던 것은 아니고 경제력에 따라 먹는 빵이 달라졌다.

이를테면 부자가 먹는 ‘파니스 실리기네스’를 비롯해 평민이 먹는 빵이라는 뜻의 ‘파니스 플레베이우스(Plebeius)’,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지저분한 빵이라는 ‘파니스 소르디두스(Sordidus)’, 시골 농민들이 먹는 시골 빵인 ‘파니스 루스티쿠스(Rusticus)’ 등이 있었다. 또 군인의 식량인 ‘파니스 밀리타리스(Militaris)’, 선원들이 먹는 ‘파니스 나우티쿠스(Nauticus)’ 등이 있었다.

 

빵은 가정에서 주부가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밀을 빻아 가루로 만들고 오븐에서 구워야 했다.

때문에 로마에서는 대형 제분소에서 밀을 빻아 빵 공장에서 피스토르(Pistor)라는 전문 제빵사가 빵을 구웠다. 1세기 당시 인구 25만 명이 살았던 폼페이에만 1만 명 분의 빵을 만드는 제빵소가 최소 30곳이 있었을 것으로 추산되니 인구 100만의 로마에서는 최소 120개 이상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구운 빵은 전문 빵집에서 팔았는데 판매는 주로 여성의 몫이었다.

 

정리하면 로마인들이 빵을 먹으면서 대형 방앗간이 발달했고, 제빵 공장이 들어섰으며 거리에는 제과점이 즐비하게 늘었다. 동시에 패스트푸드를 비롯한 거리음식이 발달했다. 빵 만드는 공정이 대형화하고 산업화되면서 자금이 필요했기에 금융업이 발달했고 주부가 직접 빵을 구울 필요가 없으니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상당 부분 해방됐다. 빵이 만들어 낸 로마제국의 변화가 한두 가지가 아닌데 시민들에게 공짜로 빵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한 로마제국의 무료 사회복지제도도 빵에서 비롯됐다.

 

 

로마시대 제빵사의 무덤 유적 ‘Tomb of Eurysaces the Baker’

 

 

헤르쿨라네움 유적에 있는 고대의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로마제국 흥망을 부른

빵과 무상복지

 

로마제국이 위대했던 이유 중 하나는 2,000년 전에 벌써 서민층을 절대 빈곤에서 구제하기 위한 복지제도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가난한 시민에게 무료로 빵을 나누어 준 무상복지제도다.

‘큐라 아노나(Cura Annona)’, 줄여서 ‘아노나’라고 한다. 라틴어로 ‘큐라’는 관심, 배려(Care), ‘아노나’는 농산물, 식량이라는 뜻이지만 원래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곡물의 여신이다. 곡물의 여신이 베푸는 배려, 관심이라는 의미다.

로마제국은 시민들에게 왜 공짜로 빵을 나누어 주었을까? 단순히 표를 얻고 환심을 사기 위해서가 전부는 아니었다. 당시에 상당한 이유가 있었는데 로마제국에서는 식량수급이 안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식량창고인 시칠리아에 흉년이 들거나 이집트에서 오는 곡식 수송선단이 폭풍우로 바다에 가라앉았다는 소식이 돌면 시민들은 공황에 빠졌다. 곡물 사재기가 시작됐고 빵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때문에 물가 안정, 사회 안정을 위해 도입한 것이 빈곤층에 빵을 공짜로 주는 무상복지, ‘아노나’였다. 해외의 풍부한 식량자원과 제빵산업이 발달했기에 가능한 제도였는데 이 제도가 정치와 맞물리며 공짜 퍼주기로 변질됐다. 그 결과 한때 로마시민 절반이 공짜 빵을 먹었고 나중에는 와인과 올리브기름, 돼지고기와 소금까지 공짜로 제공했다.

그러나 무상 복지, ‘아노나’로 인한 재정파탄 때문에 로마제국이 쇠퇴의 길을 걸은 것은 아니다. 재정에 부담은 됐지만 더 심각했던 것은 무상복지를 빌미로 한 부정과 부패였다.

 

‘아노나’를 핑계로 권력자들이 이탈리아 속주에서 농민을 내쫓고 토지를 사유화했으며 재물을 착복했다. 포퓰리즘적 무상복지가 부정부패를 낳았고 사회불안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로마제국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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