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제국 로마
(가) 공화정치의 붕괴
● 사회 변동
로마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지중해에 진출해서 많은 속주를 차지하게 된 일은 주로 중소토지 소유농민으로 이루어진 중장 보병 시민단의 공적이었다. 그런데 한니발 전쟁으로 인한 이탈리아의 황폐, 전후에 속주 시칠리아 및 기타 속주에서 흘러 들어오는 값싼 곡물, 노예를 부리는 대농장의 발달 등은 이탈리아의 농민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일반 평민들이 오랜 세월 동안 병사로서 전쟁에 종사하는 동안에 농지는 황폐해지고, 귀국한 병사는 토지를 잃어 무산시민(프롤레타리아)이 되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로마에 몰려들어 ‘빵과 구경거리’를 요구하는 부랑자가 되고 말았다. 일찍이 공화정의 기반이었고 로마 군대의 주력을 이루었던 자유농민의 몰락은 당연히 로마의 정치와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공화정의 위기를 초래했다. 따라서 토지제도의 개혁에 의한 자작농민의 부흥과 군대의 재건은 공화정 말기의 큰 정치적 과제가 되었다.
로마가 이탈리아 정복에 즈음하여 차지한 토지는 그 일부는 소시민에게 할당되어 식민시가 건설되었으나, 다른 공유지는 일부 유력한 시민에 의해 점유되어 실질적으로는 사유지와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지배층은 이 공유지와 몰수한 중소농민의 토지를 병합하여 대농장을 발달시켰다. 해외에서 수입한 노예를 대량으로 사역하여 노예제 농장을 경영했지만 농토가 곡물의 대량 지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과수재배와 목축을 했다.
로마의 노예제도는 BC 2세기쯤부터 라티푼디움의 발전과 더불어 급속하게 발달했다. 노예의 주요 공급원은 정복전쟁의 포로와 약탈에 의한 것으로서, 포에니 전쟁에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까지 수백만 명에 달하는 노예가 수입되었다. BC 2~1세기의 노예제도 전성기에는 그 수가 이탈리아 인구 400만 가운데 100만 내지 150만을 차지했다. 일반적으로 로마의 노예는 상품으로 매매되는 구입 노예였다는 점에서 아테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고전적 노예의 전형이었다.
로마의 사유노예 중에는 소유자의 요리사, 이발사, 가정교사 등에 종사하는 노예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농업노예, 광산노예, 검투사였다. 그 외에 비교적 자유를 누리며 상업과 의류 또는 귀금속 등의 공업생산에 종사하는 해방노예도 있었다. 노예가 해방되는 일도 있었으나, 그것은 주인의 유언에 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 노예가 해방자금을 적금하여 자유 신분을 사는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라티푼디움의 발달은 로마에 중대한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노예제 농업은 중소농민의 생활을 압박하여 그 몰락을 재촉했고, 토지가 노빌레스와 기사계층에게 독점되면서 빈부의 차가 더욱더 크게 벌어졌다. 거기에 가혹한 노예 사역은 자주 대규모적인 노예반란을 야기시켜 걷잡을 수 없는 사회불안을 초래했다.
BC 135~132년의 시칠리아의 반란에는 20만 명에 이르는 농노가 참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에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시칠리아의 반란은 BC 104~100년에도 다시 발발하여 델로스,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광산노예들 사이로 확산되었고, 또한 이탈리아에까지 파급되었다. 그후에도 노예반란은 꼬리를 물고 일어나 BC 90년에는 이탈리아에서, BC 81년에는 히스파니아에서, BC 73~71년에는 이탈리아에서 검투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검투사의 난이 바로 스파르타쿠스의 난인데, 최성기에 병력 12만으로 남이탈리아를 석권한 로마 역사상 최대규모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가 정복에 의하여 차지한 해외의 속주는 말 그대로 로마 시민에게 소속되어 전적으로 그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속주 착취의 선봉에서 활약한 것은 기사계층이었다. 그들은 로마의 확대에 편승하여 국영사업과 징세청부업 그리고 고리대금업과 지중해 무역에 진출하여 돈을 모았고, 그 재력을 가지고 노빌레스에 대항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한편 로마의 제국주의 정책은 주로 그들의 이익에 기초하여 추진되었다.
초기의 개혁에 의해 로마 시민의 정치상의 평등권이 확립되었으나, 그후 로마의 발전에 따라서 시민권자의 범위가 현저하게 확산된 결과 직접 전체 시민에 의해 구성되는 평민회는 점차 본래의 정치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정치는 원로원이 지배하는 바가 되고 말았다. 동시에 원로원 의원의 지위는 극소수의 노빌레스의 족벌에 의해 독점되었고, 공화정치는 사실상 그들의 과두정치가 되었다. 이들 족벌은 기사계급과 정권의 헤게모니 문제로 날카롭게 대립했으나, 또한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서로 손잡고 국가의 정책을 주무르면서 국민을 희생시키며 돌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화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문화면에서 로마인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라틴 문화를 낳았고, 역내에 보급하여 유럽 문화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헬레니즘의 개인주의적 풍조가 즉시 로마 사회에 침투하여 예로부터 전해오는 씨족적 공동정신을 손상시켰다. 또한 로마인이 그리스의 풍속과 생활양식을 모방했기 때문에 생활정도가 높아지게 되었고, 그 때문에 로마인의 특징이었던 검소하고 강건한 기풍은 사라진 채 향락적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노동을 싫어하고, 병역을 기피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위에 언급한 정치·사회상의 결합과 아울러 공화정 말기의 사회적 변동을 촉진하게 되었다.
● 공화정치의 붕괴
지중해 정복 후의 로마는 이미 도시국가 시대의 로마와는 성질이 다른 세계국가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시민 공동체를 기초로 하여 발달한 로마 공화정의 조직은 이 전환기에 직면하여 내외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결국 세계국가 위에 선 제국적 조직으로의 전환은 필연이었다. 공화정 말기의 ‘혁명의 1세기’(BC 133~31)는 실로 이와 같은 전환을 위한 과도기였다.
당시 로마의 정계는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여 현재의 사회질서를 유지하려 하는 벌족파와 평민회를 기반으로 하여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평민파 등 2개 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이 무렵인 BC 133년에 티베리우스 그라쿠스(BC 163~133)가 호민관에 선출되어 1인당 500유게라 이상의 토지소유를 금지하고, 잉여지를 무산자에게 재분배하는 리키니우스 법의 부활안을 평민회에서 성립시켰다. 이 법률의 실행을 위하여 그는 전례를 깨뜨리고 호민관직에 재임하려 했으나, 원로원 등 반대파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BC 123년 티베리우스의 아우인 가이우스 그라쿠스(BC 153~121)가 호민관이 되었고, 그때부터는 호민관의 중임도 인정되었다. 그는 형의 뜻을 이어 대규모의 토지 재분배안을 제출하고, 평민회의 힘으로 원로원의 세력에 대항, 시민과 기사의 기대를 모으게 되었다. 그러나 ‘저주받은 장소’ 카르타고의 옛터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아프리카에 건너가 있는 동안에 원로원의 책략에 의해 그의 인망은 땅에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에 대해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하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실패에 이어 로마의 앞날의 운명과 관련을 가지는 세 차례의 전쟁이 발발했다. 그 전쟁들에 수반하여 정치개혁과 국방문제 및 시민권 문제 등이 야기되면서 개혁의 전기가 마련된다.
첫째, 유구르타 전쟁(BC 111~105) ― 로마의 보호령인 아프리카의 누미디아 왕국의 왕위를 빼앗은 유구르타(BC ?~104)를 토벌한 전쟁이다. 그는 로마의 원로원과 토벌군의 사령관을 매수했고, 이로써 원로원의 부패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토벌군은 연전연패하여 군의 소질이 악화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되면서 정치상의 개혁과 군의 재건이 절박한 문제가 되었다.
둘째, 킴브리-테우토니 전쟁(BC 113~101) ― 북방 게르만 민족인 킴브리, 테우토니 두 민족이 이탈리아에 침입했다. 로마는 힘겹게 이를 격퇴하기는 했으나, 훗날 로마 멸망의 원인이 되는 게르만 침입에 대한 대책이 이때부터 로마의 최대문제가 되었다.
셋째, 동맹시 전쟁(BC 91~88) ― 로마는 지중해를 통일한 후에도 시민권(공직을 맡아 국정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로마 시민만 독점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로마의 발전에 협력해온 이탈리아의 동맹시들은 로마와 동등한 시민권을 요구하며 단결하여 싸웠다. 그 결과 로마 시민권은 동맹시의 시민에게도 주어지게 되었고, 우선 전체 이탈리아인의 법적 평등권이 확립되었다.
이 세 차례의 전쟁을 겪는 동안에 로마의 군제도에 변혁이 생겨나 그후의 정치에 중대한 전기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로마 군대는 중장 보병 시민단을 중심으로 하는 의용병으로 편성되었으나, 자작농민의 몰락 때문에 군대는 거의 전원이 무산시민인 용병에 의해 조직되었다. 이들 병사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유력한 군인으로 양성되었고, 그 지휘자는 이런 사병의 무력과 투표권을 배경으로 하여 정계에 진출했다. 그 결과 독재권을 장악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위의 전쟁에서 군단을 지휘한 마리우스, 술라 두 장군이 그 예로서, 그들은 각각 평민파, 벌족파를 이끌고 정권을 다투었다. 이리하여 로마는 원로원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점차 군인독재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BC 88년 이후 반세기 동안은 군벌의 세력다툼과 노예 반란, 보호령·속주의 무력반항(소아시아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의 반란, BC 88~63) 등이 뒤이어 발생하면서 옛 정치체제가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 독재정치에서 제정(帝政)으로―3두정치
벌족파를 이끌고 정권을 장악했던 술라(BC 137~78)가 죽게 되자, 그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BC 106~48)가 벌족파의 수령이 되었다. 그는 속주 히스파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스파르타쿠스의 잔당을 소탕했으며, 동지중해의 해적과 시리아 왕국을 토벌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BC 64년 시리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그러나 원로원은 그의 독재정치의 야심을 경계하여 폼페이우스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이 정세를 알게 된 평민파 수령 카이사르(BC 100~44)는 폼페이우스와, 기사 출신으로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에 공이 컸던 부호 크라수스(BC 114~53)와 동맹하여 BC 60년에 제 1차 3두정치를 수립함으로써 원로원의 세력을 눌렀다.
이어 카이사르는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에서 벨기에에 이르는 지방) 원정을 행하여, 8년에 걸친 전쟁 결과 이 지방을 평정했다. 갈리아 지사가 된 그는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라틴 문화를 보급했다. 그 때문에 갈리아를 중심으로 라틴 문화권이 서구 일대에 확산되었고, 중세에 서구세계가 성립되는 기반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재임중(BC 58~50) 라인 강까지의 갈리아 전역을 정복하여 속주로 편입시켰다. 이로써 그는 로마 시민의 인기를 차지함과 아울러 여기서 강대한 군단을 양성했다. 또한 게르마니아(독일), 브리타니아(영국)에도 원정했고, <갈리아 전기>를 저술했다.
한편 크라수스가 시라이에서 메소포타미아로의 원정 중에 파르티아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기 때문에 3두정치의 한 모퉁이가 무너지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갈리아에서 축적한 무력과 재력을 두려워하여, 원로원과 결탁해서 스스로 단독 집정관이 되어 카이사르에게 도전했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루비콘 강을 도강, 로마로 진군한 카이사르에게 패하여 이집트로 도주했다가 그곳에서 암살당했다.
한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죽은 후 이집트의 내란을 틈타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원조하여 승리를 차지하고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어 그는 서아시아에도 세력을 확장하여 명성을 높였다. 로마는 헬레니즘을 병합하여 대제국을 형성하는 도중에 있ᄋᅠᆻ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동방적인 전제지배의 수립을 목표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와 같은 통치형태는 훗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 등에 의해 비로소 실현되게 된다.
BC 46년에 카이사르는 임기 10년의 딕타토르(독재관)로 임명되었고, BC 44년에는 종신 딕타토르와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가 권력 전체를 장악하여 원로원이 그의 뜻대로 움직여지게 됨에 따라서, 로마는 비록 공화정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으나 사실상 제정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오늘의 태양력인 그레고리력의 기초가 된 율리우스력을 제정했고, 속주의 징세청부 제도를 폐지했으며, 무산시민을 위한 식민지 건설 등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BC 44년, 공화정을 수호하려는 브루투스(BC 85~42) 등 원로원 일파에 의해 암살당했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BC 43년에 그의 조카 옥타비아누스(BC 63~AD 14), 부하 장군 안토니우스(BC 82~30), 장군 레피두스(BC 90?~13) 등이 제2차 3두정치를 수립했다. 3인 중 우선 레피두스가 실각했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BC 69~30)와 손잡았으나, 그것이 로마의 이익을 무시하는 짓이라 하여 시민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 인심은 자연히 옥타비아누스에게 쏠리게 되었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동방 헬레니즘 세계를 등에 업고 서방 라틴 세계의 전통에 따르는 옥타비아누스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 두 장군은 BC 31년 악티움 해전을 벌였고, 그 해전에서 패한 안토니우스는 다음해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자살했다. 이로써 이집트 왕국은 멸망했고 BC 30년, 지중해 세계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제 BC 133년 이래로 1세기에 걸친 로마의 내란이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고, 그후의 로마, 나아가 지중해 세계에 오랜 ‘로마의 평화’가 계속되었다. 그것을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 한다.
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라는 말처럼
로마제국은 탄생에서 몰락까지 천여년의 긴 여정을 지나왔다.
볼래 이탈리아의 한도시 국가에 불과했지만
점차 세력이 강해지면서 전쟁을 이르켜 이탈리아, 카르타고,
북아프리카, 스페인, 그리스의 마케도니아왕국, 셀레우코스왕국
그리고 이집트의 톨레미왕국 등을 점령하였다.
그 결과, 과거 도시 국가의 틀을 벗고 지중해 대국으로 로마가 탄생한다.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먼저 삼두정치(Triumviri)를 시작하여 로마의 정권을 장악했다.
카이사르가 차츰 두각을 드러내면서 로마 종신 집정관의 권좌에 올랐다
카이사르가 활약한 시대에 로마는 대전환기를 맞이하며공화정치로는 이미 통치 계급의욕구를 만족 시킬수 없었다.
결국, 독재 정치에 가장 걸맞는 인물 카이사르가 모든 권력을 잡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시했다.
골 지방의 베르킨게토릭스장군이 카이사르에게 투항하는 장면
정복 전쟁에 열을 올린 카이사르는 방대한 로마 제국을 건립했다
[카이사르의 3대 명언]
1.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2. 주사위는 던져 졌다.
[로마의 국법을 어기며 이말을 사용했다한다.]
3.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승전보에 섰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으로 로마는 번영을 누리게 되
카이사르가 암살 된후 다시 분열되었다.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는 30년경에 정복전쟁을 이르켜 로마를 통일했다.
그는 독재 대신 공화제를 부활시키고 원로의 신임을 획득하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얻었고, 그와함께 로마의 군사, 행정, 종교를 장악했다.
사회분야에 교통, 오락 및 공공시설을 대폭 증축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를 거두워 사회질서는 차츰안정을 되찾았고 그의 위상과 명망은 갈수록
높아졌으며, 사회와 경제가 발전되며 그야 말로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284년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역사 무대에 등장하면서 전환국면을 맞이 했다.
디아클레티아누스는 공화제의 잔여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원로원의 실권을 박탈했다. 그 결과 국가 권력은 황제와 그 직속 기구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는 행정 구역을 네 곳으로 나누고 사두 정치를 출범시켰다.
제국을 동서로 양분하고 두 명의 정제와 두 명의 부제를 두어 관리하게 한 것이다.
또 군주제를 확릭하고 대관식을 거행해 제위에 오르는 등
명실상부한 로마의 제1대황제가 되었다.
당분간 안정적인 정국을 유지 할수 있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 로마는 다시 무질서 상태에 빠진다.
324년에 콘스탄티누스가 로마를 다시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로마의 운명을 되돌릴수 없었다.
395년에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고 내부 봉기와
외적의 침입까지 맞물려 서로마제국이 먼저 멸망했다.
서로마의 멸망과 함께 수세기 동안 로마에서 지속되었던
노예제 사회가 막을 내리며 로마의 몰락 점차 되어진다.
로마제국 몰락: https://juny0811.tistory.com/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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