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 문명의 발견
잊혀진 에게 문명
에게 문명은 기원전 3000년 무렵부터 에게 해의 섬과 연안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에게 해 최대의 섬 크레타가 번영의 중심지였으며 크레타 문명, 또는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부른다. 그들은 금속과 돌 도구를 함께 사용했으며, 절정기는 기원전 1600~1400년 무렵이었다. 그 후 문명의 중심은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로 옮겨가고, 문명의 주역들도 바뀐다. 에게 문명의 후반을 미케네 문명이라 부르며, 그 전성기는 기원전 1400 ~1200년 무렵이었다.
뱀의 여신상
기원전 1200년 무렵 에게 문명은 사라지고, 그리스 세계는 혼란기에 빠진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다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앞서 훌륭한 에게 문명이 존재했던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 후 에게 문명은 3천여 년 동안 로마인에게도 유럽인에게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에게 문명의 존재는 고대 그리스인에게조차 잊혀지고 말았지만, 그들의 의식 속에 희미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신화와 전설을 노래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ia)》가 바로 그 흔적이다. 그것은 마치 찬란한 석양이 진 뒤 지평선 위에 어렴풋이 남은 노을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호머의 서사시가 역사적 사실과는 관계없는 그저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사실 서사시 속의 흐릿한 흔적들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트로이 유적
그리스의 미녀 헬렌의 납치와 트로이 전쟁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년)은 달랐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단순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믿었고, 발굴로 그런 생각을 입증하였다.
북부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인생역정이 파란만장했다. 소년 시절, 그는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애독하면서 언젠가 거기에 나오는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리라 결심했다. 궁핍한 청년 시절을 보냈지만, 타고난 사업 수완을 발휘해 이윽고 사업가로 성공한 슐리만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그토록 매혹시켰던 연구에 전념하기 위해 사업에서 은퇴했다.
그는 모아 놓은 전 재산을 쏟아 1871년부터 소아시아 북서부 연안(현재의 터키 영토)에 있는 히사르리크 언덕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발굴 결과, 그 언덕에 9개 층의 유적이 겹겹이 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약 2년 만에 그는 밑에서 2번째, 즉 제2기층에서 여러 개의 멋진 황금 제품을 발견했다. 슐리만은 이 보물이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것이며, 제2기층의 도시는 틀림없이 호메로스가 노래한 트로이 유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 후 아테네 주재 독일 연구소 소속으로 그의 발굴을 도와주던 고고학자 빌헬름 되르펠트(1853~1940년)는 밑에서 6번째 층이 트로이 시였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한편 1932년부터 트로이 지역을 재조사한 미국의 블레겐(1887~1971년)은 트로이 유적이 제7기층에 속한다는 또 다른 새로운 가설을 제기했다.
트로이 성을 함락한 목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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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발굴 성과에 고무된 나머지 슐리만은 호메로스 서사시가 신뢰할 만한 역사자료라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서사시 가운데 언급된 다른 성채들의 유적들로 여겨지는 곳들을 차례로 발굴해나갔다. 1876년에 미케네, 그로부터 4년 뒤에는 오르코메노스, 다시 4년 뒤에는 티린스에서 각각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미케네 유적의 무덤들에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만한 출토품들을 발굴했다.
호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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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최후로 발굴을 기획한 곳은 크레타 섬 북부 해안에 위치한 크노소스의 왕궁터였다. 그러나 발굴지의 땅 매입, 출토품의 소유권 등을 놓고 땅주인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그 계획을 단념하고 말았다. 훗날 그를 대신해 그곳을 발굴한 사람은 영국의 고고학자 아더 에번스(Arthur Evans, 1851~1941년)였다. 1900년부터 발굴 작업에 착수한 그는 장려한 왕궁터나 왕비를 위한 작은 별궁 등을 찾아냈다. 이탈리아 발굴단이 섬 남쪽의 파이스토스와 아기아·트리아다를 파헤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1922년부터는 프랑스가 북쪽 해안의 말리아를 발굴하기 시작해 크레타 각지와 그리스 본토에서 유럽 각국의 발굴이 본격화되었다.
그러한 발굴 결과 에게 해역에 한때 훌륭한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에 대한 연구는 한 해가 다르게 눈부신 진전을 이루었다. 특히 1939년에 착수한 그리스 본토 남단의 필로스, 즉 네스토르의 성채 발굴에 힘입어, 그 시대에 사용된 선문자 B가 1952년 해독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을 계기로 에게 문명에 대한 연구는 한층 활기를 띠었다.
크노소스 왕궁의 발굴
슐리만이 발굴을 단념했던 크노소스는 당시 케팔라로 불리우던 구릉 지대로 올리브가 자라고 있었다. 1878년, 땅 주인 미노스 칼로카이리노스는 밭을 갈던 중 아주 오래된 건물의 토대인 듯한 것, 사람 키만한 항아리, 소형 가옥 등을 발견했다.
슐리만이 발굴을 포기한 지 10여 년이 지난 1900년 3월, 영국의 고고학자 에번스가 100명 이상의 인부들을 동원해 그 유적을 대대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에번스는 슐리만과 달리, 스코틀랜드의 유복한 제지업자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한 뒤 독일에서 유학한 한편, 발칸 반도의 구석구석까지 유럽을 두루 여행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발굴을 시작한 지 채 몇 시간도 안 돼 건물의 잔해 일부를 찾아냈다. 발굴이 진전됨에 따라 웅장하고 복잡한 왕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 도굴된 흔적은 없었다. 밭갈이로 파헤쳐지지 않은데다가 무성한 식물로 뒤덮혀 유적이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번스는 "그리스 각지의 발굴 현장에서 지표에서 그 정도로 얕은 곳에 그만큼 많은 유물이 묻혀 있었던 예는 없었다."라는 말로 발굴 당시의 흥분을 전하고 있다. 그는 홀연 땅 속에서 드러난 왕궁터가 크레타를 지배했다는 전설의 왕 미노스의 왕궁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크노소스 왕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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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스 왕의 전설은 이렇다. 크레타 왕의 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벌어졌을 때, 미노스는 신들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바다 속에서 숫소 한 마리가 나타나게 해달라고 빌었다. 포세이돈은 그 청을 들어주었고, 덕분에 미노스는 왕이 될 수 있었다. 소원을 들어주면 그 소를 죽여 포세이돈에게 바칠 것을 약속했지만, 정작 눈부시게 희고 아름다운 소를 바치기가 아까웠던 그는 다른 소를 제물로 바쳤다. 포세이돈은 격노했고, 왕비 파시파에아에게 그 숫소를 뜨겁게 사랑하게 만들어 분풀이를 했다. 소에 넋을 뺏긴 왕비는 아테네에서 도망쳐 온 기술자 다이달로스에게 그 소와 사랑을 나눌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다이달로스는 한 가지 장치를 고안해냈고, 그것을 통해 왕비는 마침내 그 숫소와 관계를 가졌다. 그 결과 파시파에아는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 미노스 왕은 그 괴물을 가두기 위해 다이달로스에게 명해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복잡한 건물, 즉 미궁(labyrinthos)을 짓게 했다.
그 무렵, 어떤 이유에서인지 미노스는 아테네를 공격하고 있었다. 승패가 쉽게 판가름나지 않는 가운데 아테네의 갑작스런 전염병을 계기로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협정 조항들 중에는 아테네가 매년 소년·소녀 각각 7명씩을 미노타우로스에게 제물로 바친다는 약속도 들어 있었다. 해마다 제물로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자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이번에는 자신도 제물들 속에 섞여갈 것을 자청했다. 그런데 미노스 왕의 딸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의 모습에 반한 나머지, 다이달로스에게서 미궁 탈출법을 알아내어 그를 도왔다. 덕분에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이고 미궁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크노소스 미궁
에번스의 발굴은 믿기 어려운 전설 속에도 역사적 사실이라 할 만한 부분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발굴 결과 드러난 왕궁은 170~180평방미터의 면적 위에 평면적, 입체적으로 비교적 복잡하게 설계된 건축물이었다. 남북 방향으로 길고 널찍한 안뜰을 가진 이 건물은 한 층만 해도 방 수가 100개를 넘는 규모로, 어떤 곳은 3~4층으로 되어 있었다. 건물은 동쪽과 남쪽으로 기울어진 대지 위에 세워져 있어서, 동쪽의 3층은 서쪽의 제1층과 같은 높이에 해당한다. 내부에는 구불구불한 복도와 곳곳에 계단이 있었던 듯하다. 이런 복잡한 구조 때문에 미노스 왕에 대한 전설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미로'라는 말이 자연히 떠오를 정도였다. 그만큼 이 왕궁은 전설 속의 '미궁'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에번스는 곧 제우스의 아들이자 아리아드네와 페드라의 아버지이며, 미궁의 주인인 미노스 왕과 끔찍한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궁전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황소와 싸우는 투우사〉
크노소스 왕궁에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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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소스 왕궁이 복잡한 구조였던 이유는 이 왕궁의 기능이 여러 가지였기 때문이다. 왕궁은 왕과 그 가족의 거처이자 제사, 재판, 사절의 접견 등 왕의 온갖 업무와 공식 행사를 치르는 장소요, 돌이나 금속의 용기, 도구 등을 만드는 작업장이기도 했다. 또 보통 사람의 키보다 큰 항아리들이 늘어서 있는 창고도 있었다. 창고의 크기는 왕의 재력과 권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아니면 왕은 인민이 수확한 농산물을 일단 왕궁 내에 수납했다가 배급하는 역할을 했었는지도 모른다. 왕궁에는 또 수세식 변소가 있어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욕실 같은 공간이 왕궁의 도처에서 발견되었고, 에번스는 그곳이 정화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였다고 추측했지만 확실치는 않다. 다만 배수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욕실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왕궁은 방마다 아름다운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림에는 조공 행렬이나, 궁 안에서 노니는 궁녀들, 바다 생물, 원숭이, 들새 등이 등장한다. 또 남자, 여자가 거세게 날뛰는 소의 뿔을 쥐고, 소 등 위에서 곡예를 하는 진기한 놀이를 그린 것도 있다. 특히 출토품 중에는 소머리 모양의 제사용 그릇이 있어서, 소가 숭배의 대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전설도 소의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 제사 때 미노스 왕이 소머리를 뒤집어쓰고 우신(牛神)의 모습을 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기원전 460~400년경)는 미노스 왕이 "가장 일찍이 해군을 조직해, 오늘날 그리스인이 장악한 제해권의 기원을 이뤘다. 또 섬들에 식민하고, 해적들을 소탕하며, 상업에서 이익을 거두려고 애썼다."라고 적고 있다.
왕궁에는 특이하게도 방벽이 없었다. 이는 투키디데스가 말한 것처럼 미노스 왕이 에게 해를 지배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공격을 받는 쪽보다 공격하는 쪽이었다면, 방어시설을 갖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출토된 벽화나 도기에 그려진 돌고래나 문어 같은 어류, 해초, 조개, 게 등의 해양생물, 그리고 파도무늬같이 주로 바다와 연관 있는 소재들은 크레타 섬 주민이 바다를 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을 뚜렷이 반영하고 있다. 투키디데스의 추측에 근거해, 그들이 강력한 해양지배 세력이었다고 주장하는 시각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크레타인의 생활방식이나 문화가 바다와 관련이 깊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발견의 연속
크레타 섬에서는 크노소스의 것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설계로 만들어진 왕궁들이 지금까지 3개가 더 발견되었다.
하나는 크노소스의 남쪽에 있는 파이스토스에 있다. 이탈리아 학자들이 그곳의 발굴을 맡았으며, 크노소스에서와 같이 1900년부터 시작되었다. 전체적인 설계는 비슷하지만 벽화가 없는 점, 궁의 동쪽에서 용광로가 발견된 점이 크노소스 왕궁과는 다르다. 바로 서쪽 해안 가까이에는 여름 별궁으로 쓰였다고 짐작되는 아기아·트리아다의 작은 궁이 있는데, 그곳에는 크노소스와 마찬가지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또 하나는 동북쪽으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 말리아란 곳이다. 이 유적은 1922년부터 프랑스 발굴단이 작업하고 있다. 왕궁의 남서쪽에서는 8개의 원형건물이 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다른 왕궁들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것으로, 그 용도에 관해 논란이 있지만, 식량 창고였을 가능성이 높다. 왕궁 부근에 남아 있는 커다란 집이나 길의 흔적들은 꽤 큰 부락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의 석관
죽은 사람에 대한 헌주와 제물을 바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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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늦게 발견된 왕궁터는 섬의 동쪽 끝 해안의 자크로스에 위치했으며, 1962년 그리스 고고학자 플라톤에 의해 발굴됐다. 플라톤은 현지의 농민이 병을 고쳐준 사례로 의사에게 준 출토품을 본 것이 발굴의 계기였다고 쓰고 있다. 현재는 바다의 수위가 높아져 왕궁의 남동부는 상당 부분 물 속에 잠겨 있다.
크노소스를 포함한 이 4개의 왕궁터 외에, 섬의 서쪽 하니아에도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까지는 아무런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크노소스와 다른 왕궁들은 서로 도로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쩌면 크노소스 왕은 중앙집권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밖에도 1901~1904년에 말리아 남쪽에서 미국의 여류 고고학자가 발굴한 그루니아의 유적―그곳에는 처음에 왕궁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수공업자 부락으로 바뀐 듯하다―이나, 크노소스 서쪽 딜리소스에 있는 부농 혹은 귀족 소유였던 것으로 보이는 3칸의 집터 등, 흥미로운 유적들이 많다. 크레타 섬은 이처럼 구석구석에 크레타 문명 시대로 되돌아가는 시간 여행의 통로들을 간직하고 있다.
에번스의 업적과 과오
슐리만과 에번스의 발굴로 우리는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에게 문명의 존재를 다시 알게 되었다. 에번스는 이 문명을 크레타의 전설의 왕 미노스와 결부시켜 '미노스 문명'이라 명명했다. 그는 《크노소스의 미노스 왕궁》이란 제목으로 4권의 발굴보고서(1921 ~1936년)를 펴냈는데, 그는 미노스 문명을 초기(Early Minoan)·중기(Middle Minoan)·후기(Late Minoan)로 구분하고, 각각을 다시 3단계로 나누었다. 도기 양식에 따른 에번스의 이 편년법은 지금까지 에게 문명 연구의 기본적인 틀로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에게 문명 연구에서 그가 이룩한 공적은 지대하다.
하지만 그에겐 과오도 없지 않다. 그중 하나는 그가 발굴한 크노소스 왕궁을 복원한다는 구실로 손질을 가해 변형시킨 것이다. 그는 왕궁의 주요 부분을 제한된 비용으로 보존하기 위해서 원래 목재였던 왕궁의 기둥이나 대들보를 콘크리트로 복원했던 것이다. 재료가 목재였다는 것은 왕궁이 불길에 타 없어지던 최후의 날, 기둥이나 대들보가 탄화 퇴적물로 남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었다. 오늘날 크레타에는 그리스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거목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왕궁이 세워지던 무렵만 해도 키 큰 삼목 등이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왕궁의 기둥은 훗날 그리스의 전형적인 기둥, 즉 아래 부분이 약간 부풀어보이는 이른바 '엔타시스' 양식과는 달리, 위쪽이 굵직하고 아래쪽이 가느다란 것으로 적색과 흑색이 칠해져 있었다. 그 기둥과 대들보들을 에번스는 콘크리트를 써서 복원한 것이다. 또 옥좌가 있는 방, 왕비의 방 등 여러 곳에 벽화를 다시 그려놓았다.
〈무희〉
크노소스 왕궁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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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여성〉
크노소스 왕궁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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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원작업들이 잘못된 것이라는 비판은 에번스의 생전에서부터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그는 "예전의 크노소스 왕궁이 얼마나 화려하고 멋진 것이었는가를 현대인에게도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유적지를 찾아가서 콘크리트 기둥을 목재처럼 보이도록 칠한 물감이 빗물에 씻겨 내리는 것을 보게 되면 씁쓸함을 감추기 어렵다. 같은 무렵 이탈리아 발굴단이 찾아낸 파이스토스 궁전은 그리 복원의 손길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오늘날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의 층계 위에는 벽화 실물의 단편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에는 〈파리 여성(Parisienne)〉 혹은 〈무희〉같이 극히 작은 단편일망정, 그림의 일부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남아 있는 부분이 매우 적어서 상상으로 채워 넣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그림들도 있다. 일례로, 에번스가 〈사프란을 따는 소년〉이란 제목으로 복원한 그림은 후일 그리스 학자 플라톤에 의해 〈원숭이 그림〉으로 수정되어야 했다. 에번스의 벽화 복원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자연재해설에 대한 의문
에번스가 에게 문명을 생각한 방식에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크레타의 왕궁들은 기원전 1400년경에 모두 파괴되었다. 발굴 현지에서 직접 지진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 에번스는 크레타의 왕궁들이 지진으로 붕괴되었다는 이른바 자연재해설을 주창했다.
발굴 결과 크노소스 왕궁은 기원전 1700년 무렵 오래된 궁전(제1궁전) 위에 새 궁전(제2궁전)이 재건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많은 학자들은 제1궁전의 붕괴는 아마 지진으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1400년경의 파괴는 그리스 본토에서 침입한 그리스인에 의한 인위적인 것이라고 학자들은 가정한다. 에번스는 이 가정에 반대하며, 그리스인은 기원전 1200년 이후에야 비로소 이 땅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소의 머리 모양을 한 제사용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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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문명이 파괴되자,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가 문명의 중심이 된다. 미케네 문명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자세히 말하겠지만, 대략 그리스인이 크레타 문명을 정복하고, 그 문명을 모방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에번스는 거꾸로 크레타인이 그리스 본토에 진출해 만든 것이 미케네 문명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미노스 문명을 미케네 문명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해서 에게 문명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미노스 문명'이란 용어가 대체로 크레타 문명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후에 쏟아진 비난들
에번스는 1941년 7월 11일에 타계했다. 그에 대한 비난은 사후에 한층 더 신랄했다. 먼저 비판의 화살을 날린 사람은 옥스퍼드 대학의 언어학 교수 파머였다. 그는 에번스가 자기 학설을 고집하고 과오를 감추기 위해 발굴결과를 발표할 때, 자신의 주장에 불리한 출토품을 은닉하고 출토 장소를 바꿔 발표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파머는 그 증거로 옥스퍼드 대학의 애쉬몰레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에번스의 조수 매켄지의 《발굴일지》를 제시했다.
파머의 비난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60년이었다. 에번스가 죽은 지 근 20년이 지났지만, 영국 학계에서 아직 에번스의 명성이 확고했기에, 학계의 반응은 싸늘했고 오히려 파머가 집중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파머가 옳았음이 밝혀지게 되었고, 학계는 그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크노소스 왕궁에 그리스적 건축양식인 '메가론'이 있었다는 점이 일단 인정되면 그것은 에번스에게 불리한 증거가 된다. 왕궁은 붕괴 전에 이미 그리스인에게 점령당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아주 애매한 형태로 복원하였을 것이라는 게 오늘날의 일반적인 추측이다.
에게 문명에 3종의 문자가 있었다는 것은 에번스의 발굴 이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림 문자와 2종의 선(線)문자, 즉 A형과 B형이 그것이다. 에번스는 이것을 '미노스 문자'라고 명명하고, 그 문자의 일부를 일찍이 1909년에 책으로 발표했지만, 그 전모는 좀체로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제2부는 그가 사망한 뒤, 1952년에야 비로소 책으로 나왔다. 이것도 그가 이 문자 해독을 자신의 업적으로 만들기 위해 타인에게 보여주길 꺼렸기 때문이라는 빈축을 샀다. 파머의 에번스 비판은 그가 언어학자였던 만큼, 미노스 문자들 가운데 그리스어를 나타내는 선문자 B가 새겨진 점토판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파머는 에번스가 그 출토 위치를 실제보다도 오랜 아래층에서 나온 것처럼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에번스에 대한 비판이 그의 사후에 맹렬해짐에 따라, 한때 드높았던 그의 명성은 곧 빛바랜 것이 되었다.
슐리만과 에번스의 엇갈린 운명
슐리만과 에번스를 비교하면, 인간 운명의 뒤바뀜이 그저 무심히 보아 넘겨지지 않는다. 슐리만의 발굴 태도는 생전에는 꽤 비난거리였다. 그의 발굴은 황금 캐내기, 보물찾기에 지나지 않는 비학문적인 것이라 비웃음을 샀다. 그의 트로이 발굴은 오직 '트로이가 암반 위에 세워졌다.'라는 호메로스의 한 구절만 믿고서, 그 위층의 상태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무조건 아래쪽으로만 파내려 갔다고 비난받았다. 특히 그의 출신지인 독일의 학계에서는 그가 이렇다 할 학력이 없다는 이유로 그가 발굴한 곳이 트로이임을 인정하지 않거나, 아예 그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고고학의 발굴법이 아직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때 나름대로 양심껏 발굴했다고 슐리만의 태도와 방법을 변호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실제로 그는 히사르리크 언덕을 암반까지 파내려갔지만, 50여 군데에서 탑처럼 지표부분을 남겨두었다. 그 덕분에 훗날 블레겐은 그 언덕을 과학적으로 정밀하게 조사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에번스는 생전에는 눈부신 업적의 영광을 누렸지만, 사후에는 그의 발굴 방법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그 근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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