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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시대의 유물

로마사 (history of Rome)

by 은총가득 2020. 6. 9.

로마사

요약 로마시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고대 제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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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마 이전의 에트루리아족
  2. 고대 로마
  3. 로마 초기
    1. 개요
    2. 로마 공화정 초기(BC 6세기~BC 264)
    3.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
  4. 로마 공화정 중기
    1. 제1·2차 포에니 전쟁
    2. 헬레니즘 세계 제패
  5. 로마 공화정 후기
    1. 승리의 결과
    2.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BC 133~121)
    3. 공화정(BC 121경~91)
    4. 전쟁과 독재(BC 91경~80)
    5. 술라 이후 20년 동안의 로마(BC 79~60)
    6. 로마 공화정의 몰락(BC 59~44)
    7. 삼두정과 옥타비아누스의 권력독점
  6. 로마 제정 초기
    1. 제정 수립
    2. 제국의 성장
    3. 2세기의 제국
  7. 로마 제정 말기
    1. 세베루스 왕조(193~235)
    2. 3세기의 종교와 문화
    3. 군사적 혼란과 제국의 해체(235~270)
    4. 제국의 회복과 전제정의 성립(270~337)
    5. 콘스탄티누스 이후 4세기의 로마 제국
    6. 서로마 제국의 몰락(395경~500)과 게르만족의 이동

로마사

ⓒ Catarina Belova/Shutterstock.com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로마는 원래 이탈리아 반도 중부 테베레 강 연안의 라틴인이 건설한 도시국가였다. 그러나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 세계 전체에 로마 시민권을 보급시킬 만큼 고대 세계 최대의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로마는 최초에는 왕정으로 출발했으나 BC 509년경 공화정이 되었다. 그러나 BC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이른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되어 원수정 시대를 열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에는 전제군주정이 자리잡았다.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뒤 제국은 동서로 나뉘어 서로마 제국은 476년에 멸망했으나 동로마 제국은 1453년까지 계속되었다.

아우구스투스 BC 27~AD 14
티베리우스 14~37
칼리굴라 37~41
클라우디우스 41~54
네로 54~68
갈바 68~69
오토 69
비텔리우스 69
베스파시아누스 69~79
티투스 79~81
도미티아누스 81~96
네르바 96~98
트라야누스 98~117
하드리아누스 117~138
안토니누스 피우스 138~16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180
루키우스 베루스 161~169
콤모두스 176~192
페르티낙스 193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193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193~211
카라칼라 198~217
게타 209~212
마크리누스 217~218
엘라가발루스 218~222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222~235
막시미누스 235~238
고르디아누스 1세 238
고르디아누스 2세 238
막시무스 238
발비누스 238
고르디아누스 3세 238~244
필리푸스 244~249
데키우스 249~251
호스틸리아누스 251
갈루스 251~253
아이밀리아누스 253
발레리아누스 253~260
갈리에누스 253~268
클라우디우스 2세 268~269
퀸틸루스 269~270
아우렐리아누스 269/270~275
타키투스 275~276
플로리아누스 276
프로부스 276~282
카루스 282~283
카리누스 283~285
누메리아누스 283~284
디오클레티아누스(동부) 284~305
막시미아누스(서부) 286~305 306~308
갈레리우스(동부) 305~311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서부) 305~306
세베루스(서부) 306~307
막센티우스(서부) 306~312
리키니우스(동부) 308~324
콘스탄티누스 1세 312~337
콘스탄티누스 2세 337~340
콘스탄스 1세 337~350
콘스탄티우스 2세 337~361
마그넨티우스 350~351
율리아누스 360~363
요비아누스 363~364
발렌티니아누스 1세(서부) 364~375
발렌스(동부) 364~378
프로코피우스(동부) 365~366
그라티아누스(서부) 375~383
발렌티니아누스 2세(서부) 375~392
테오도시우스 1세 379~395
아르카디우스(동부) 395~408
호노리우스(서부) 395~423
테오도시우스 2세(동부) 408~450
콘스탄티우스 3세(서부) 421~423
발렌티니아누스 3세(서부) 423~455
마르키아누스(동부) 450~457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서부) 455
아비투스(서부) 455~456
레오 1세(동부) 457~474
마요리아누스(서부) 457~461
리비우스 세베루스(서부) 461~467
안테미우스(서부) 467~472
올리브리우스(서부) 472~473
율리우스 네포스(서부) 474~475
레오 2세(동부) 474
제노(동부) 474~491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서부) 475~476

역대 로마 황제

로마 이전의 에트루리아족

에트루리아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그들이 리디아나 에게 해 방면의 동쪽지방에서 이탈리아로 옮겨왔다는 설과 북방에서 내려왔다는 설, 토착민이었다는 설 등 여러 학설이 제기되어왔으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이들 에트루리아족이 BC 10세기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들의 언어는 일찍 사멸했으나 문자가 쓰인 유물이 남아 전하기도 한다.

문자는 알파벳으로 되어 쉽게 읽을 수는 있지만 뜻과 문법이 어려워 아직도 해독할 수 없으며, 다만 인도유럽어와 아주 다르다는 것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그들의 정치 형태는 도시국가에 바탕을 두고 각기 독립되어 있었으나 일종의 종교·경제 연맹을 맺고 있었다. 원래는 왕정 체제로 군사적·종교적 권력을 가진 군주가 다스렸으나, 뒤에는 왕 대신 행정관을 선출했는데 이때부터 강력한 명문 가문과 성직자들이 지배하는 과두(寡頭) 공화정이 세워졌다. 에트루리아 문명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종교와 장례(葬禮)이다. 에트루리아족은 다신교를 믿었으며 모든 중요한 행위를 하기에 앞서 신의 뜻을 물었고, 죽은 사람은 묻힌 곳에서 계속 살아간다고 여겼기 때문에 집 모양의 무덤을 만들고 여러 껴묻거리[副葬品]를 함께 묻었다. 그러나 북중부에서는 화장하는 풍습이 계속 남아 있었다.

로마가 세력을 얻기 전에는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여러 그리스 식민지 외에 에트루리아가 정치·경제·문화 면에서 이탈리아의 중심지였다. 에트루리아족은 티레니아 해에서 해상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벌이면서 영역을 넓혔고 페니키아인·그리스인과 경쟁했는데 BC 7세기말~BC 6세기초에 가장 번영했으며 영토 역시 같은 때 가장 팽창했다.

그러나 그뒤 카르타고인과 그리스인에게 지중해의 주도권을 넘겨주었으며, 그와 더불어 라티움 지방 지배권을 잃은데다가 시칠리아에서 시라쿠사가 패권을 잡은 뒤부터는 세력이 더욱 줄어들었다. 이로써 해안도시가 경제 위기를 맞자 에트루리아족은 육로와 아드리아 해를 통한 교역에 눈을 돌렸고, 북부 내륙도시가 급속히 발전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도 곧 켈트족이 침략해옴으로써 한풀 꺾였고, BC 5세기에는 삼니움족에게 캄파니아까지 빼앗겼다. 그뒤 세력이 약해진 에트루리아족은 BC 3세기 중엽 로마에 거의 귀속되어 독립 도시국가로서의 형식적인 자치권만 유지하다가 BC 90년 로마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고대 로마

BC 8세기 티베리스 강(지금의 테베레 강)을 굽어보는 몇 개의 언덕 위에 작은 무리의 사람들이 자리잡은 데서 출발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지중해를 석권했으며, 더 나아가 유럽 대륙에까지 팽창해갔다. 이러한 팽창과 더불어 로마는 미개 상태에 머물러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문명을 전파했다. 로마인은 예술·과학·철학은 크게 발전시키지 못했으나 정치와 행정면에는 뛰어나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로마 초기 개요

로마의 탄생과 공화정 초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으나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전하는데, 그 가운데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 숨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BC 12세기에 트로이 장군 아이네아스가 로마 주변 라티움에 자리잡았고, 500년 뒤에는 라틴족인 로물루스가 로마 시를 세웠다고 한다(로물루스와 레무스).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청동기시대 말기에 동방에서 항해자가 찾아온 사실(史實)을 에트루리아족이 아이네아스라는 인물과 접합시켜 만든 듯하고, 로물루스 이야기 또한 BC 8세기 팔라티누스 언덕에 라틴계 유목민이 모여 살게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뒤 로마는 서서히 도시의 틀을 잡아가다가 BC 7세기에 에트루리아족의 세력 아래로 들어갔고, BC 550년경에는 에트루리아족에게 직접 통치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로마는 빠르게 성장하여 라티움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시로 발돋움했다. 로마인은 종교와 문화에서 에트루리아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그들에게서 알파벳을 배웠다.

로마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씨족(gens)이었는데, 씨족 아래에는 강력한 가부장이 거느리는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혈연관계없이 부조(扶助)와 지원을 받기도 하고 보호자에게 매인 예속자들도 있었다. 왕정시대에 파트리키우스(귀족)와 플레브스(평민)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로마의 종교적 구조는 일찍부터 확립되었으며 왕정시대에는 왕에게 종교적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시대에는 그 권력이 종신 사제 1명에게 넘어가 사실상의 종교적 권위는 제의를 행하는 사제, 점을 치는 아우구르[卜占官], 성스러운 지식을 지키고 알리는 신관(神官)들이 가지고 있었다.

왕정시대에는 왕이 정치적·군사적 권력을 갖고 있었다.

임페리움(imperium)이라고 하는 이 권력은 원래 군대지휘권에서 나왔지만, 종교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로마 왕정은 세습제가 아니었다. 왕은 로마 시민을 세 트리부스(부족)로 나누었는데, 1개의 트리부스에는 10개의 쿠리아가 있었다. 모두 합쳐 30개가 되는 쿠리아는 코미티아 쿠리아타(쿠리아회)를 구성했는데, 이 회의체는 왕을 뽑고 여러 가지 입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통치구조는 안정된 동시에 융통성도 갖추고 있어 로마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로마 공화정 초기(BC 6세기~BC 264)

에트루리아 왕조가 BC 509년에 로마에게 무너진 뒤 공화정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공화정의 성립은 일정한 수의 가계가 왕의 군사 지휘권, 왕의 사법적 권한, 왕의 제사적(祭司的) 기능을 이어받은 것을 뜻한다. 원래 왕이 가졌던 권력은 프라이토르 막시무스(praetor maximus)라는 행정관에게 넘어간 듯 하지만 그뒤 2명이 임기가 1년인 콘술(집정관)로서 권력을 갖게 되었다. 원래는 평민도 콘술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으나, 귀족이 곧 콘술직을 독점했으며 4세기 중엽에야 콘술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평민 출신이어야 한다는 법 규정이 나왔다.

국가가 비상사태인 때에는 2명의 콘술 중 1명에게 딕타토르(독재관)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이 딕타토르는 최고 6개월 동안 임페리움(국가의 최고권력자)이 되었는데 실제로 딕타토르가 임명된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처음에는 콘술만이 임페리움을 행사했으나 BC 386년경에 콘술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나 역시 임페리움을 지닌 프라이토르(법무관, 뒤에는 집정관)직이 창설되었다.

프라이토르는 원래 로마 시에서 사법행정을 맡았는데, 뒤에 로마가 팽창해 속주(屬州)들이 생겨남에 따라 점점 그 수가 늘어났다. 또한 켄소르(감찰관)는 5년마다 2명이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고, 도덕이 문란해지지 않도록 감찰하는 일을 맡았다.

행정이 차츰 복잡해지자 재정을 담당하는 콰이스토르(재무관)와 공공건물을 관리하고 축제행사를 책임지는 아이딜리스[造營官] 등 더 많은 관리직이 신설되었다.

로마인은 아주 일찍부터 법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BC 8세기 무렵 이미 전쟁에 관한 법이 있었다고 하며, BC 5세기 중엽에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成文法)인 이른바 12표법(十二表法)이 제정되어 12개의 청동판에 새겨졌는데, 이것은 모든 법의 원천으로 간주되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이 법은 그때까지 법이 구전되어오던 것을 행정관들이 멋대로 적용한다고 비난해온 평민의 요구에 따라 콘술 대신에 BC 451년과 BC 450년 두 차례에 걸쳐 뽑힌 데켐비리(10인 위원회)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공화정에서 드높은 권세를 누린 원로원(세나투스)은 왕정시대의 원로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콘술이 소집하고 또한 콘술의 협의에 따르는 기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공화정에서 가장 안정된 최고권력기관이었다.

원로원은 원래 유력한 씨족들의 우두머리로 구성되었으나 곧 모든 전임 행정관들도 원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로원 의원은 처음에는 콘술이, 뒤에는 5년마다 1번씩 켄소르가 임명했다. 임기는 종신이었고 의원들의 서열은 그들이 지냈던 직책의 등급에 따라 정해졌다. 원로원은 민회에서 이미 표결된 법률들을 비준할 뿐이었으나, BC 4세기 후반부터는 민회에 법률을 제안하는 권한까지 가졌다. 또한 원로원은 행정관에게 조언을 했는데, 행정관들은 대체로 그 조언을 따라야만 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법 효력을 갖게 되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속주를 다스릴 행정관을 배치하는 중요한 기능도 맡았다. 원로원에게는 그밖에는 외국으로 보낼 사절을 뽑는 권한도 있었다. 원로원은 종교문제에도 관여해 인습적인 의식과 제식을 유지시켰으며, 국고(國庫)를 도맡아 공공재정을 운영했고, 지출과 과세를 최종 결정했다. 이처럼 원로원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로마 공화정은 사실상 과두정부였다. 대토지를 소유한 원로원 의원들은 유능한 행정가들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어려움은 이민족을 정복한 이후 넓은 제국을 통치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된 데 있었다.

이러한 체제 아래서 플레브스(평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공화정의 첫 2세기 동안 그들은 참정권을 얻어내 파트리키우스(귀족)만의 특권을 하나씩 잠식했다. 싸움은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플레브스들은 정복으로 늘어나는 국유지를 자신들도 점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공화정 초기의 BC 493~492년 전쟁에서 돌아오다가 무장한 채로 성산(聖山)으로 몰려가 플레브스의 권리를 보호해줄 정부관직을 창설하라고 원로원에 요구했다(성산사건). 그결과 만들어진 신성불가침의 트리부누스(호민관)는 행정력의 남용으로 피해를 입는 플레브스를 도울 수 있었으며 콘술이나 원로원·민회의 결정을 거부할 권한도 가졌다.

플레브스 계급의 조직은 코미티아 켄투리아타[兵士會]처럼 재산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거지에 따라 조직된 평민회(Concilium Plebis)가 생겨남으로써 마무리되었다.

로마의 이탈리아 통일

그러는 가운데 로마는 대외적으로 팽창해갔다.

에트루리아족이 라티움에서 밀려났으나, 아직 힘이 약했던 로마는 라틴 동맹에 가입해 동맹이 결정한 정책을 따라야 했다. 그러나 로마는 로마 특유의 문제 때문에 동맹과 별개로 행동했다. BC 5세기에 로마는 아펜니노 산맥 중부에 살던 여러 종족의 침략을 물리쳤고 동시에 에트루리아인의 도시 베이를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뒤 로마는 켈트족의 침입을 받아 로마 시가 함락당하는 재난을 입었다. 다행히 얼마 안 되어 켈트족은 북쪽으로 물러갔고 로마가 함락당할 때 전혀 도와주지 않았던 라틴 동맹이 내분을 겪자, 로마는 이를 틈타 라티움의 이웃 도시들을 제압했다.

그다음 로마가 삼니움족과 전쟁을 하자(제1차 삼니움 전쟁) 라틴 동맹은 로마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그들을 물리친 로마는 동맹을 해체하고 라티움을 지배했다. 삼니움족이 계속 욕심 내던 캄파니아에 로마가 세력을 뻗치게 되어 제2차 삼니움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번에도 승리를 거둔 로마는 중부 에트루리아로 진격했다. 에트루리아족·켈트족·삼니움족이 연합해 로마와 맞섰지만(제3차 삼니움 전쟁) 또 로마가 이겨 BC 263년 에트루리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로마가 남쪽으로 팽창하자 마그나그라이키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타렌툼은 자극을 받아 에페이로스(에피루스)에 원조를 요청했다.

에페이로스는 로마군을 오래지 않아 패배시키고 당시 로마에 우호적이었던 카르타고에게서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를 빼앗았지만 얼마 안 가 퇴각해야만 했으며, 타렌툼은 마침내 로마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로마는 지중해의 큰 세력으로 급속히 발돋움했고,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기 바로 전까지 헬레니즘 세계의 광범위한 경제 유통망에서 큰몫을 차지해 그리스 세계로부터 경계심을 살 만큼 중요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로마 공화정 중기 제1·2차 포에니 전쟁

포에니 전쟁(Punic Wars)

포에니 전쟁 모습을 표현한 그림

ⓒ wikipedia | Public Domain

시칠리아는 이제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와 카르타고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 되었다.

외부 세력이 이탈리아 반도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방어하기 위해서 로마는 이웃한 시칠리아 섬이 강력한 나라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카르타고 역시 서부 지중해를 지배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거점인 시칠리아를 정복해야 했다.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이의 해협을 장악하고 있던 메사나(메시나) 시에서 로마와 카르타고는 처음으로 맞섰다. 캄파니아 용병대는 무력으로 메사나를 장악했는데, 그뒤 이웃한 시라쿠사에게서 압박을 받자 BC 264년 로마와 카르타고 양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카르타고가 먼저 메사나를 점령하고 시라쿠사와 협약을 맺었으나 로마군은 강제로 카르타고군을 철수시켰다. 그결과 로마는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으나, 메사나를 공격한 연합군을 물리친 뒤 시라쿠사로 진격하여 시라쿠사와 협약을 맺고 동맹을 이루었다. BC 260년에 처음으로 대함대를 건설한 로마는 코르시카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BC 259) 여러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쳐부순 뒤 아프리카에 상륙했다(BC 259). 카르타고는 휴전을 요청했으나 로마가 내건 조건이 너무 가혹하자 새로이 군대를 소집해 마지막 결전을 감행해 카르타고가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뒤 시칠리아에만 힘을 쏟았던 로마는 야전(野戰)에서는 크게 이겼으나 해전에 패한데다가 폭풍으로 해군이 큰 손실을 입자 시칠리아 공격을 미루게 되었다. 한편 카르타고도 전쟁으로 궁핍해져 병력을 줄여야 했으므로 반격을 하지 못해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동안 해군을 강화한 로마는 BC 242년 시칠리아의 릴리바이움을 봉쇄하고, 카르타고의 지원군을 무찔러(BC 241. 3. 10) 시칠리아를 장악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와 리파리 제도를 로마에 넘겨주고 전쟁배상금 3,200탈렌트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었으며 이로써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끝났다.

카르타고는 제해권(制海權)을 빼앗김으로써 서부 지중해에 대한 패권을 잃었다.

게다가 로마가 공격을 재개할 경우 카르타고의 해상제국은 괴멸될 것이므로 카르타고는 로마를 분쇄해야만 했다. 이에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바르카 장군의 주도 아래 시칠리아·사르데냐·코르시카를 잃은 보상을 얻기 위해 히스파니아(스페인)에 신제국을 수립하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BC 237년 조국 카르타고에서 히스파니아로 건너왔는데, 당시 9세이던 그의 아들 한니발이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이를 경계한 로마는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와 분쟁을 일으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로마 영토의 중심부를 공략해 이탈리아 동맹을 분열시키려 했다. 로마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히스파니아에서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는 매우 힘겨운 육로를 통해 이탈리아로 침입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이 북이탈리아로의 침략을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BC 218년 한니발은 로마군을 연파하고 북이탈리아를 점령했다.

BC 217년에는 에트루리아에서도 로마에게 대승을 거두어 로마 시를 위협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병력을 더 강화한 다음에 로마 시를 공격하기로 하고 남부로 진출했기 때문에 로마는 반격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뒤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가 로마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로마의 힘은 완전히 꺾이지 않았고, 더구나 로마 내부에서 플레브스와 파트리키 사이에 갈등이 있어왔는데 이것이 해소되어 단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뒤로도 로마는 카르타고군에게 정면으로 대응할 힘이 없었고, 한니발은 새로운 동맹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로마 공격에 투입할 병력이 없었다.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BC 214년 카르타고 주력부대는 풀리아에서 타렌툼으로 옮겨가 남부 해안지대를 공략했다. 그러나 BC 212년 로마군은 카푸아를 봉쇄하고 이듬해 함락시켰다. BC 209년 타렌툼을 되찾은 로마는 한니발을 서서히 반도 남쪽 끝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BC 207년에는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의 지원군이 침입해 이탈리아 중부에서 한니발 군과 로마 시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메타우루스에서 카르타고 지원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이탈리아에서 사실상 전쟁이 끝나 BC 203년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고 한니발은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이탈리아 국외에서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14~205)이 있었다.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는 패배했지만 마케도니아와 카르타고의 동맹을 막을 수 있었다. 로마는 식량공급원인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쳤다. 한편 카르타고의 보급창인 히스파니아에서는 로마가 졌으나 카푸아를 장악해 이탈리아에서 히스파니아로 병력을 옮겼다. BC 210년에는 당시 로마에서 가장 훌륭한 장군인 대(大)스키피오가 사령탑을 맡으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의 이탈리아 진출을 막지는 못했지만 히스파니아에 남아 있던 적군을 분쇄해 BC 206년말 히스파니아를 완전 정복했다. BC 205년 콘술이 된 스키피오는 여세를 몰아 카르타고의 본거지를 공격하고 크게 승리했다. 한편 카르타고는 다시 한니발을 기용해 전투를 벌였으나 마지막 결전지인 자마 전투에서 로마군 기병의 활약으로 스키피오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의 조건을 받아들여 전함뿐 아니라 지중해의 여러 섬을 로마에 양도했고 전쟁배상금으로 1만 탈렌트를 지불했으며, 전쟁과 외교에 관한 자주권을 포기했다.

헬레니즘 세계 제패

서부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는 이제 헬레니즘 세계로 눈을 돌렸다.

BC 205년 마케도니아와 화약을 맺은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그리스 해방을 위해 BC 200년 마케도니아에 전쟁(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선포했다.

마케도니아 전쟁(Macedonian Wars)

마케도니아 전쟁 당시 주변 지도, BC 200년경

ⓒ Icesea / wikipedia | Public Domain

로마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카이아 동맹을 확보하고, 소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 때문에 자극받고 있던 페르가몬·로도스를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인 뒤 마케도니아로 쳐들어가 BC 197년에 승리를 거두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유럽 쪽에 영토를 갖고 있던 시리아가 소아시아 서부로 진격해 들어오고 로마에 반기를 든 아이톨리아 동맹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리스까지 건너오자, 로마는 다시 그리스로 군대를 투입해 시리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BC 190년 평화협정을 맺고, 시리아가 아시아의 타우루스 강 서쪽과 유럽에 갖고 있던 영토를 넘겨받았다. BC 189년에는 아이톨리아 동맹도 로마에 항복해 예속된 동맹자가 되었다. 같은 해 로마는 소아시아의 갈라티아도 정복했다.

한편 로마와 아카이아 동맹 사이에 스파르타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있었으나, 뒤에 아카이아가 로마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표시해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킨 책임은 상당 부분 로마에 있었다. 시리아와의 전쟁 때 마케도니아는 로마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나 로마는 그에 걸맞는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마케도니아의 왕·세자(世子)와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던 왕자 사이를 이간질해서 마케도니아 왕가를 분열시키려 하여 마케도니아의 분노를 샀다.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북방 팽창을 이탈리아 침략에 대한 준비로 보고 경계하는 한편, 마케도니아가 북방 팽창 정책에서 그리스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자 의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BC 171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다. BC 168년 마침내 로마는 이 전쟁에서 이겨 마케도니아를 4개의 독립공화국으로, 그리고 마케도니아를 편든 일리리아를 3국으로 나누었다.

또 로마는 페르가몬과 아카이아 동맹, 로도스 등을 마케도니아의 동조국으로 의심해 인질을 요구했는데, 특히 로도스의 경우에는 협박을 해서 영토를 빼앗았다. 로마는 이전에도 시리아를 무찔러 시리아 해군세력을 약화시킨바 있는데, 이번에는 로도스 세력을 위축시켜 해상 질서를 바로잡던 세력들을 없애버림으로써 지중해는 해적의 천국이 되었다.

그결과 다음 세기에 로마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로마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BC 168년 시리아의 이집트 침략을 막았고, BC 151~146년에는 카르타고·마케도니아·아카이아 동맹과 맞서 싸워 그들을 복속시킴으로써 아프리카와 발칸 반도까지 영토를 넓혔다. 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가 그들 영토에 침략해오고 로마군이 잇달아 도발해 왔음에도 로마와 맺었던 조약을 충실하게 지켜 군사적 대응을 삼갔으며, BC 2세기경에는 그들의 상업 활동이 매우 빠르게 회복되었다.

로마인들은 그에 경계심을 품어 이제는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앞세웠다. BC 150년 카르타고가 누미디아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자 로마는 조약을 위반했다는 구실로 카르타고를 공격해 BC 147년에 마침내 함락했다. 로마는 포로를 노예로 팔아넘기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한 뒤 BC 146년에 카르타고 영토를 아프리카 속주로 만들었다.

마케도니아는 BC 149년에 일어난 반란을 계기로 BC 146년 속주로 개편되었고, 같은 해 코린트를 중심으로 한 아카이아 동맹은 스파르타 독립 문제로 로마와 싸웠으나 패하여 로마에 병합되었다. 한편 독립왕국이었던 페르가몬은 BC 133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마지막 왕이 죽으면서 나라를 로마에게 기증함으로써 7번째 속주인 아시아 속주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이처럼 속주를 점점 넓혀가면서 발전해갔다.

각 속주에는 그 속주를 정복한 장군이 10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이루어진 위원회와 협의해 제정한 헌법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각 도시의 지위와 세금에 대한 규정이 들어 있었다. 속주를 다스리는 총독은 명칭을 프라이토르라고 했는데, 로마의 프라이토르(법무관)와 비슷한 기능을 맡았다. 따라서 속주가 늘어남에 따라 프라이토르의 수도 증가했으나, 전쟁 때문에 군대를 지휘할 더 많은 프라이토르가 필요해지자 총독인 프라이토르의 임기를 늘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경우 총독은 1년 동안 프라이토르를 지낸 뒤 임페리움을 그대로 지닌 채 칭호만 프로프라이토르 또는 프로콘술로 바뀌었다.

콘술(집정관)은 속주에서 큰 전쟁이 벌어질 때에만 그 속주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제국에 대한 통치권은 원로원에게 있었으나 아직은 명목상일 뿐이어서 속주에서 실정과 부패가 생겼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속주 통치에 개입했다. 로마의 경제는 로마가 전쟁에서 이겨 새로운 속주들을 획득한 결과 빠르게 팽창했으나, 속주에서 무더기로 흘러들어온 값싼 곡물은 이탈리아 농업에 타격을 입혔다.

BC 167년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 시민에 대한 재산세가 철폐되어 시민 모두에게 얼마간 혜택이 돌아갔다. 속주들 가운데 섬 지방은 로마 정부를 거의 괴롭히지 않았으나, 히스파니아에서는 BC 154년부터 줄곧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밖에도 오랫동안 갈리아인과 싸워 이탈리아 북부를 평정하는 가운데, 라틴인들을 요충지에 이주시키고 군사 목적으로 커다란 도로를 건설했으며,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해안 방어를 위해 주요지점에 로마인을 정착시켜 소규모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로마 자체에서도 통치체제에 틀이 잡혀갔다.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로마가 성공한 요인으로 로마인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전통 존중, 그리고 로마군의 두드러진 효율성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군주정(콘술)과 귀족정(원로원)·민주정(코미티아)의 3가지 요소가 안정된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에 크게 감탄했으나 콘술의 지위를 너무 과장해 쓰기도 했다. 실제 주권은 원로원과 로마 인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에게 있었는데, 원로원 의원은 5년마다 뽑히는 켄소르(감찰관)가 전임 행정관들과 기존 의원들 가운데서 지명했고, 그 명단에서 가장 앞머리에 나오는 의원을 제1원로(프린켑스 세나투스)라 했다.

BC 2세기초에는 공직 승진규칙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르면 프라이토르를 거쳐야 콘술이 될 수 있었고, 각급 행정관이 될 수 있는 연령의 하한선이 규정되었으며, 콰이스토르가 되려면 반드시 일정 기간 군대에 복무해야 했다. 콘술 2명이 모두 로마에 있을 때는 그들이 달마다 번갈아 원로원을 관리했으나, 큰 전쟁으로 2명의 콘술이 다 외지에 나가 있을 때는 프라이토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콘술은 매해말에 실시되는 선거를 관리했는데, 그들이 자리를 비워 로마로 돌아올 수 없는 경우에는 딕타토르(독재관)를 임명했다. 콘술과 프라이토르는 점점 더 많은 군지휘관과 총독이 필요해지면서 1년 임기를 채운 뒤에도 임페리움을 그대로 지니는 경우가 많았다.

민회가 있기는 했지만 주된 정치 문제는 원로원에서 논의되었다.

원로원은 일정한 유력가문이 지배했는데, 이들은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병사회)에 영향을 미쳐 자기 가문 출신이 콘술과 프라이토르로 뽑히게 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했다. 원로원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전케 함으로써 더욱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조약을 맺는 것은 명목상 인민의 권한이었으나 평화조약이 맺어진 뒤에 따르는 업무는 원로원이 맡았다.

민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는 민주적인 회의체는 못 되었다.

재산에 따라 나누어진 5개 계급에서 가장 높은 계급과 귀족에게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를 이루는 193개의 투표권 가운데 88개나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코미티아 트리부타(트리부스회)는 좀더 민주적인 기구였지만, 농촌 트리부스(부족)에 속한 사람들은 부자를 빼고는 대개 투표를 하기 위해 로마까지 오기가 힘들었으므로 투표 결과는 부자와 귀족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BC 2세기에는 몰락한 농민이 로마로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원래의 트리부스에 그대로 속한 상태여서 코미티아 트리부타는 평민회와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들의 회의체나 다름없었다.

코미티아 켄투리아타와 코미티아 트리부타는 원로원이 이미 승인한 법안만을 표결할 수 있었으나, 평민회는 BC 287년 호민관들의 권한 아래 독자적으로 입법할 권리가 주어졌다. 하지만 제각기 거부권을 지닌 10명의 호민관 가운데 상층계급이 1~2명을 회유하기란 쉬운 일이었고, 투표가 공개로 이루어지는 한 유권자들을 협박해 투표를 통제할 수도 있었다. 매우 일찍부터 로마 시민은 인민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뒤에야 처형당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왔으므로, 코미티아는 로마의 최고 형사법정 기능을 갖고 있었지만 후에는 프라이토르가 관장하는 상설 형사법정에 그 임무가 넘어갔다.

BC 218년에는 원로원 의원과 그 아들들이 필요 이상의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원로원 자체는 제국의 상업 팽창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뒷날 에퀴테스(기사계급)로 발전한 계층은 국가의 하청을 받아 도로를 닦고 광산을 경영하며 군대에 납품을 하는 등 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나타난 가장 큰 경제적 변화는 대농장인 라티푼디움의 발전이었다. 부자들은 국유지를 점유하는 한편 몰락해가는 소농의 땅을 싸게 사들여 대농장을 만든 뒤 곡물을 재배하는 대신 값싼 노예로 대규모 목축을 경영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로마로 몰려들었다.

한편 동부 지중해에서 사치품과 노예가 많이 수입됨에 따라 로마인은 동부로 많이 이주해갔고, 서부 속주에는 주로 군인을 중심으로 한 많은 로마인이 정착했다.

로마는 일찍부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동부 지중해를 손에 넣은 후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그리스 철학). 상류층은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작가들은 그리스 문학을 수용·모방했다. 한편 로마 종교와 달리 인간을 닮은 신을 섬기는 그리스 종교와 당시 그리스에 널리 퍼져 있던 회의주의(懷疑主義)는 로마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그리스의 영향이 로마의 전통을 파괴한다고 걱정했고 젊은이들은 그리스 문화에 매료되었으나, 뒷날 로마가 쇠락해갈 때에는 모든 로마인이 그리스를 정복함으로써 로마의 건전한 기풍이 약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스가 로마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 영역은 법률뿐으로, 로마 법은 12표법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로마 공화정 후기 승리의 결과

BC 146년에 있었던 카르타고와 코린트의 함락은 로마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써 높은 문명을 지닌 세력에 맞선 대규모 전쟁이 끝을 맺었던 것이다(히스피니아에서 계속되었던 전쟁은 BC 133년에 일단 끝을 맺었음). 그에 따른 결과는 제국의 행정 부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속주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통치되었기 때문에 총독은 속주에서 절대적인 임페리움을 지닌 군사령관이었다. 이러한 절대적 권력이 종종 남용됨에 따라 원로원의 속주 통제가 요구되었고, 이에 원로원은 로마 시를 넘어 제국 전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대규모 전쟁이 끝나고 다량의 전리품이 더이상 들어오지 않게 되자 사회 기강이 흐트러졌고 이제껏 잠복해 있던 사회적·경제적 문제들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대농장 경영이 급속히 늘어났고, 로마 부근에서는 속주에서 들어온 값싼 곡물 때문에 곡물경작이 쇠퇴·붕괴되었다. 심지어는 그러한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던 북부에서도 농민들의 장기간 종군으로 땅을 제대로 경작하지 못하게 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므로 수많은 농민이 땅을 잃고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부자들은 몰락한 농민의 땅을 사들여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확보했다. 게다가 땅을 잃고 유랑하는 농민을 병사로 징집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군대는 약화되었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BC 133~121)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BC 133년에 호민관으로 뽑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공유지 면적을 500유게라(약 1,214㎡)로 제한하는 법안을 내놓아 나머지 국유지를 땅이 없는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려 했다. 대토지 소유자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이 이에 반대하자 그는 평민회에 법안을 직접 제출했다. 그러나 귀족 편으로 기울어진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평민회는 그라쿠스의 주도 아래 옥타비우스의 호민관직을 박탈했는데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뒤 더욱 강경한 내용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원로원파는 평민회의 개표 장소로 몰려가 티베리우스를 살해했고 피비린내나는 탄압이 뒤따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가 시작한 개혁은 계속되었고, 시민들이 갖고 있던 초과 공유지가 더이상 남지 않게 되자 시민이 아닌 이탈리아인들이 점유한 공유지까지 분배 대상이 될 위험에 처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에 항의했고 개혁파는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좌절당했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BC 123년 호민관이 된 뒤 전반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공공수입을 늘려 그 혜택을 인민에게 돌리려 했고, 한편 에퀴테스에게 아시아 속주의 주요세금을 거두는 책임과 행정관의 부패를 다루는 특별법정을 맡겨 원로원을 견제하려 했다. 그는 2번째로 호민관직에 오른 뒤 더 많은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이듬해에는 호민관 선거에서 졌다. 그는 BC 121년 무력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준비하던 도중에 폭동으로 목숨을 잃었고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그뒤 10년 동안 인민을 위한 많은 법안들은 대부분 철폐되었으나 에퀴테스를 위한 규정들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공화정(BC 121경~91)

BC 120년에는 로마의 속국 누미디아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로마는 누미디아와 전쟁에 들어갔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부 호민관들은 귀족들이 적에게서 뇌물을 받았다고 소문을 냈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틈에 부상할 기회를 잡았다. 에퀴테스 출신인 마리우스는 프라이토르를 거쳐, BC 107년 귀족과 맞선 호민관과 에퀴테스의 도움을 받아 콘술이 되어 누미디아와의 전쟁 지휘권을 받았다. 그는 전쟁을 잘 이끌어 가지 못했지만 휘하에 있었던 루키우스 술라의 활약으로 BC 105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에 앞서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남부 프랑스로 쳐들어와 로마군을 잇달아 격파해 로마를 두려움 속에 몰아넣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마리우스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알려졌고, 그는 법의 제한을 뛰어넘어 BC 104년 또다시 콘술이 되었다. 게르만족이 이탈리아 공격을 늦추고 있는 동안 그는 콘술로 재선되었고, BC 102~101년에는 마침내 게르만군을 쳐부쉈다.

한편 전통적인 징병제로는 병력을 충원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깨달은 마리우스는 재산이 있어야만 병사가 될 수 있다는 자격을 무시하고 빈민들 사이에서 많은 의용군을 모집해 병적(兵籍)에 넣었다.

동시에 그는 호민관 루키우스 사투르니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퇴역 군인들에게 주둔 지역의 토지를 나눠주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인기를 얻은 사투르니누스는 BC 99년에 다시 집정관직에 올라 온갖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다. 마리우스는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사투르니누스를 편든다면 계속 플레브스와 에퀴테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마리우스는 제1시민(프린켑스)이 되어 한때 그를 경시했던 사람들에게서 높이 떠받들어지길 원했다.

그때문에 원로원파가 그에게 이제까지 그의 편이었던 혁명파에게서 나라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자 마리우스는 거절하지 못하고 혁명파를 적으로 돌렸다. 그러나 대가는 보잘 것 없어서 그는 플레브스의 지지를 잃었고 위기에서 벗어난 과두정에게도 외면당했으며 위신을 크게 잃었다. 한편 옛 부하 술라는 더 많은 지지자를 모아 마리우스를 공격했다.

전쟁과 독재(BC 91경~80)

대외적으로 BC 90년대에는 아시아가 문제였다.

아시아에서 폰투스가 흑해 주변에 제국을 세워 로마와 맞섰으며, 더구나 아시아 속주에서는 이탈리아인 사업가와 로마의 징세관들이 부정·부패를 저질러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원로원은 이를 척결하려 했으나,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후 법정을 장악하고 있던 에퀴테스에게 오히려 역공(逆攻)을 당해 실패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도 불만이 점점 고조되어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민권을 확대하려 했던 시도는 좌절되었고 마리우스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결과 이탈리아인 사이에서는 불만이 더욱 커져갔는데, BC 91년에 호민관이 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농업과 관계있는 입법으로 빈민의 지지를 얻어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줄 것과, 법정을 원로원의 주도하에 두는 대신 원로원에 에퀴테스 300명을 새로 들여보내는 타협안을 내놓아 사법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BC 90년 이탈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동맹시 전쟁), 로마는 재빨리 정책을 바꾸어 모든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개방하는 법을 통과시켜 반란을 누그러뜨렸다.

이처럼 로마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틈을 타 폰투스는 강력한 공세를 취해 로마 영토로 쳐들어왔다.

로마에서는 여러 장군이 그 전쟁의 지휘권을 두고 겨룬 끝에 BC 88년 콘술이 된 술라가 지휘권을 따냈다. 그러나 당시 호민관이었던 푸블리키우스 술피키우스는 새로 시민이 된 이탈리아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리우스는 그를 지지하는 대가로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술라는 예상을 뒤엎고 군대를 통솔하여 로마로 쳐들어와 술피키우스를 처형했으며, 마리우스는 도망쳤다.

마리우스의 군사개혁은 장군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私兵)부대를 만들어냈는데, 이들 사병부대가 이제 처음으로 로마를 점령했던 것이다. 공화정의 종말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로마를 점령하고 몇 가지 법을 통과시킨 술라가 동방에 가 있는 동안 마리우스는 다시 로마를 점령했으나 얼마 뒤 죽었다. 한편 술라는 폰투스와 싸워 이겨 화약을 맺고는 BC 82년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딕타토르(독재관)로 뽑힌 술라는 공포정치를 시작해 수많은 사람을 재판 없이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포괄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그는 호민관, 켄소르, 속주 총독, 에퀴테스의 권한을 줄이고 원로원의 권위를 드높였다. 그러나 그 목적은 단순한 반동이 아니라 정부에 다시 안정을 가져오는 데 있었다. BC 80년초 술라는 딕타토르를 그만두고 콘술이 되었으며 그해말에는 콘술직도 사퇴했다. BC 78년 술라가 죽자 그의 체제는 곧 공격을 받았지만 젊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공격은 곧 격퇴되었다.

술라 이후 20년 동안의 로마(BC 79~60)

폼페이우스는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원래 술라의 반대파였다가 전향해 출세를 했으나 다시 술라를 배반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술라 체제에 커다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그 체제가 무너지도록 방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프라이토르(법무관)를 지냈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정부를 세웠다. BC 77년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겼고, 그는 오랜 싸움 끝에 BC 72년 승리를 거두었다.

BC 74년에는 폰투스가 다시 로마에 도전했는데, 그 전쟁의 지휘권은 온갖 잡음 끝에 술라의 친척인 루키우스 루쿨루스에게 넘어갔다. 동시에 동부 지중해에서 해적들을 소탕할 책임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넘어갔고,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노예반란(BC 73) 진압은 마르쿠스 크라수스가 자원했다.

그러나 크라수스가 반란 노예들을 거의 격퇴했을때(BC 71)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와 남아 있는 노예군을 궤멸시킨 뒤 반란진압 공로를 가로채려 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이제 제각기 콘술직을 요구하며(BC 70) 맞섰으나 결국 힘을 합치기로 하고 둘 다 콘술이 되었다. 그들이 콘술로 있는 동안에는 술라 체제의 정치적 결정이 철회되었고, 호민관의 권한이 완전히 되살아났으며 술라 집권 이후 켄소르가 처음 선출되었다.

이로써 술라가 로마 공화정에 마련해놓으려 했던 법과 탄탄했던 권력의 기반들이 무너졌다. 선동정치가가 다시 등장했고 장군들은 개인적인 야심을 위해 무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합법정부를 지킬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이미 예전에 술라에게 제거되었기 때문에 술라가 고치려고 애썼던 상황은 오히려 더욱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뇌물과 무질서가 난무했으며 속주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원로원은 원래 외국 땅을 로마에 병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반대해왔으나 이 관례마저도 개인적인 야심 때문에 사그러들었다.

정치적으로 BC 60년대는 폼페이우스의 시대였다.

그는 BC 69년 관례에 어긋나게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기를 거부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그는 BC 67년 해적 소탕의 책임을 맡아 매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루쿨루스는 폰투스와 싸워 승리했으나 자신의 부하들에게 인기를 잃어 정치적으로는 몰락했다. BC 66년에 동방 군대 총지휘권을 넘겨받은 폼페이우스는 폰투스에게 대승해 동방을 석권했다. 동방은 대부분 그에게 돈을 바치게 되었고, 그는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로마에서는 정권을 장악하려는 크라수스가 주도한 음모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또한 빈곤과 부채가 심각해져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졌는데, 이는 민중파였던 포풀라레스(populares)에게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실제로 BC 63년말 카틸리나라는 정치가가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콘술이었던 키케로에게 진압당했다. 그러나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의 이익을 대변했던 키케로는 그에 대한 보상을 받기는커녕 폼페이우스와 귀족들 모두에게 냉대를 받았다.

동부에서 평화롭게 되돌아온 폼페이우스는 독재가 아니라 명예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군대를 해산하고 권력을 내놓았으나, 자신이 거느린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동방에서 그가 이루어놓은 일들을 비준해 달라는 주요요구들을 모두 거절당했다. 바로 이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돌아왔다.

젊은 시절에 이미 뛰어난 재능과 드높은 야심을 드러냈던 그는 어느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으려 했고, BC 63년에는 프라이토르도 지내지 않은 몸으로 폰티펙스 막시무스[大神官]로 뽑히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카이사르는 BC 62년에 프라이토르가 된 뒤 총독으로서 히스파니아를 잘 다스렸고, 로마로 돌아와 BC 59년에는 콘술이 되었다.

로마 공화정의 몰락(BC 59~44)

카이사르는 콘술직에 있는 동안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모두에게 신뢰를 얻어 정권을 장악했다.

3명 모두 그들이 바라던 것을 얻었는데, 특히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의 지휘권을 5년 기한으로 얻어 갈리아로 떠났으나 로마는 이제 옛 공화정 체제로 돌아갈 수 없었다(3두정). 키케로는 3명 사이의 연합을 깨뜨리려고 애썼지만 BC 56년 그들은 밀약을 맺었고, 로마는 또다시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군 지휘권을 5년 더 연장할 수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전역에 대한 특별 지휘권을 얻었으며, 크라수스는 돈과 명예를 얻고 싶었으므로 파르티아를 공격했다.

키케로는 마침내 권력 앞에 고개를 숙여 그들의 충실한 대변자가 되었다.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BC 54년 죽고 이듬해 크라수스까지 세상을 떠나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으로 폼페이우스에 못지 않은 위신과 부를 쌓아 많은 지지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당시 과두정부는 서로의 이익 때문에 결탁하게 되었고 이로써 카이사르는 고립되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로마로 소환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자 그를 범법자로 탄핵했다(BC 49). 이에 대항해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와 갈리아의 국경선이었던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에 침입해 내란에 뛰어들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신속한 행동으로 2개월 내에 이탈리아를 넘겨주고 그리스로 퇴각했다. 그는 히스파니아에도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그리스로 건너가 폼페이우스를 패배시켰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갔으나 그곳에서 암살당했고, 카이사르는 남아 있는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아프리카에서 궤멸시킨 뒤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이 일으킨 봉기도 진압했다. 그는 권력을 독점했으나 적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빈곤과 부채를 다소 경감시켰지만 전반적인 부채 말소나 재산의 재분배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또 개혁하려는 계획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명예와 권력을 장악하고 1인 독재를 행사해나갔다. 그결과 그에게 반감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원로원에서 암살당했다(BC 44. 3. 15).

삼두정과 옥타비아누스의 권력독점

암살의 주역인 브루투스카시우스는 로마인이 자유를 되찾아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상 자유를 찾게 된 것은 지배계급이었고 인민들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반면에 군대는 카이사르에게 충성했고 원로원도 카이사르를 따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점차 로마 시 전체를 장악해갔고 암살자들은 동부로 도망쳤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곧 카이사르의 양자(養子) 옥타비아누스의 도전을 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직 20세도 안 되었지만 키케로가 주도하는 원로원과 협력해 안토니우스에 대항했고, BC 43년에는 안토니우스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 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끌어들여 5년 기한의 3두정(三頭政)체제를 이루었다.

그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퇴한 뒤 로마 세계를 분할 통치했다. 이탈리아를 맡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누이인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켜 동맹을 맺은 뒤 이탈리아 부근의 섬들을 폼페이우스의 아들에게서 빼앗고, 세력을 키우려던 레피두스를 제거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안토니우스는 동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영역에서 원정에 나서 더욱 영토를 넓혔는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 이집트를 그의 군사적·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세계를 이집트에 넘겨주려 한다고 선전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안토니우스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마침내 BC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콘술이 되어 그리스를 건너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파멸시켰다.

로마 제정 초기 제정 수립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로마의 초대황제, 동상,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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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지배권을 쥐고 로마의 첫 황제가 되었다.

이집트를 합병해 재정이 넉넉해졌으므로 그는 마음대로 재건사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가 계획한 정치체제는 군사독재가 아니라 자신의 지휘가 보편적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 문제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는 많은 군대를 해산하고 콘술을 정기적으로 뽑게 했다. 그는 자기가 콘술로 선출되자 사퇴하려고 했지만 원로원은 오히려 그의 사퇴를 거절하고 10년 동안의 히스파니아(스페인)·갈리아·시리아 통치를 위임했으며, 아우구스투스(Augustus:존엄한 사람)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군사력을 독점한 데 이어 콘술이 됨으로써 군사(軍事)와 민사(民事)를 모두 손에 넣었다. 그러나 콘술직을 계속 맡는 것은 원로원의 반발을 살 염려가 있어 그는 BC 23년 콘술직을 사퇴하고 호민관의 권한(tribunicia potestas)을 비롯해 원로원과 민회를 소집·주재할 권한도 얻었다. 호민관직은 전통적으로 시민을 보호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반감을 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임기가 1년이긴 하나 계속 중임할 수 있었다. 한편 그가 다스리는 속주와 군대 통수권도 법률적으로 뒷받침되었다.

원로원이 프로콘술의 임페리움을 그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이는 시한적이었지만 그 기간이 자동으로 갱신되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와 로마 안에서도 유효했고 다른 어떤 임페리움보다 우월한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지위를 확고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임페리움이었다. 따라서 그뒤로는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 시대에 가질 수 있었던 예외적 권력의 직책들(딕타토르, 종신 켄소르, 콘술)을 차지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는 명예로운 제의를 받아들여 콘술이 지닌 몇몇 권한을 획득하고(BC 19),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었으며(BC 12), 1년중 8번째 달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도록 하고(BC 2),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아들였다.

그의 이름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는 뒷날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가 되었으나, 그와 그의 뒤를 이은 4황제에게는 칭호가 아닌 이름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지닌 칭호 가운데 하나인 프린켑스(제1시민)는 비공식적인 것이었는데, 그가 만들어낸 통치체제는 이 이름을 따서 프린키파투스[元首政]라 부른다.

원로원은 전과 다름없는 위엄과 권한을 지닌 듯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 군사와 재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원로원 의원직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을 전통과 여론을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높이 평가했고, 원로원에 정책 자문을 구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행정관을 임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원로원을 존중해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로 이루어진 특별위원회가 프라이토르와 콘술을 뽑게 했고, 코미티아 켄투리아타[兵增]는 자동적으로 그것을 승인하도록 했다.

또한 콘술의 임기는 6개월로 줄었는데, 이는 더 많은 원로원 의원이 고위직에 오를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콘술의 책무가 대체로 의례적인 것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를 받는 직책들은 대부분 에퀴테스에게 돌아갔고 그들은 제국 안에서 강력한 계급을 이루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은 원로원 의원이 되기도 했는데, 에퀴테스는 로마나 이탈리아에만 한정되지 않고 제국 전역에 걸쳐 퍼져 있었으므로 원로원은 점차 로마와 이탈리아의 틀을 벗어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일반적인 로마 시민에게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인민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오락거리를 제공했지만 실제 권력은 허용하지 않았다. 민회는 이따금 회의를 열어 이미 결정된 사항을 형식적으로 승인할 뿐이었다. 이때문에 이탈리아의 로마 시민과 속주민 사이의 구별은 불분명해졌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의 우위를 강조해 곡물공급을 보장하고 도로건설을 비롯한 공공사업을 벌이며 재정과 통화를 안정시켜 이탈리아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가 이룬 더 큰 업적은 로마의 기풍을 되살리고 나라를 통합시킨 것이었다. 그는 공화정 말기의 반목과 타락을 뿌리뽑고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가치와 종교를 부활시켰으며, 이탈리아를 로마와 완전히 하나가 되게 했다.

오래전부터 있던 속주들은 공공(公共) 속주라 하여 원로원이 통제했으나, 편입한 지 얼마 안 되는 그밖의 속주들은 황제가 통제했다.

황제는 그가 통제하는 속주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속주 총독직에는 원로원 의원뿐만 아니라 에퀴테스도 임명했다. 속주는 직접세와 간접세를 로마에 바쳤으나 기본적으로는 각각 자체의 민회와 참사회, 관리를 거느린 키비타스(civitats)를 단위로 자치가 이루어졌다. 속주의 상황은 제정 때 속주에 파견된 관리의 수준이 높아졌고 감독이 강화되었으며 평화가 정착되어 더 나아졌고 로마 시민권을 받으면서 무니키피움으로 승격되었다(무니키피움).

이러한 평화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문을 숭배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인 권력기반은 바로 그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서약한 군대였다. 군대는 레기온(군단)·변경주둔군·황실근위대·제국함대로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황실근위대의 병사는 대개 이탈리아인이었으나, 많은 레기온과 거의 모든 변경주둔군의 병사는 주로 황제가 다스리는 서부 속주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점점 더 증가했다. 그러나 레기온은 입대하는 날로, 변경주둔군은 제대하는 날로 시민권을 얻었고, 더구나 변경주둔군에서 제대한 병사들은 종종 그들이 주둔했던 속주에 정착했으므로 이는 제국 전역을 로마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뒤 평화정책을 펴는 듯했으나 오래지 않아 자연적인 국경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 전쟁을 벌였다.

그는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로마화가 비교적 쉬운 지역만을 속주로 병합해 도로를 건설하고 역참(驛站)제도를 시행한 반면, 로마화가 어려운 지역은 위성국가로 만들어서 방어에 따르는 비용을 줄였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하는 더 쉬운 방법으로 전쟁보다는 위성국가를 만든 뒤 속주로 병합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라비아 사막, 사하라 사막, 아틀라스 산맥을 남쪽 경계로, 대서양을 서쪽 경계로, 유프라테스 강과 아라비아 사막의 북쪽을 동쪽 경계로, 도나우 강과 엘베 강을 북쪽 경계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유프라테스 강 북쪽으로는 자연 경계가 없었고 특히 아르메니아를 확보하지 못했으므로 동쪽 경계는 매듭 짓지 못했으며, 북쪽 경계도 도나우 강은 겨우 유지되었으나 엘베 강은 아주 불안정해 라인 강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변경 지역 이외에는 평화가 유지되어 해적이 진압되고 도로가 놓였으며 통화가 안정되어 교역이 크게 발달했다. 이에 따라 지중해 세계는 전에 없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때 로마는 매우 선명하게 이탈리아적인 성격을 띠었고 이는 문학과 예술에도 나타났다.

로마의 문학과 예술은 그리스를 모방했으나 내용은 이탈리아적인 것이었다. 그 시대의 문화수준은 높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소박한 덕목들을 강조해 지적인 창조성과 도덕적 정열은 얼마간 사라졌다.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때도 있었던 직책들을 오랫동안 겸임하며 사실상 황제가 되었으나 군사독재를 시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원로원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대체로 온건하고 효율적인 통치를 했다. 더구나 그는 56년 동안 통치하며 그동안에 이후 200년 가까이 존속할 입헌정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제위계승의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일찍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군대는 부자상속에 정통성을 두었으므로 그는 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가까운 친척들도 그보다 먼저 죽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고 호민관의 권한을 주었다.

AD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가 자동적으로 제위에 올랐다.

티베리우스(14~37 재위)는 대체로 유능한 황제였지만 인간적인 신뢰는 얻지 못했다. 그가 죽자 친척인 가이우스, 즉 칼리굴라(37~41 재위)가 뒤를 이었다. 칼리굴라는 동양적 전제 원로원을 모욕하며 낭비를 일삼는 등 과대망상적인 폭군이 되어 결국은 암살당했다.

칼리굴라의 숙부로 그다음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1세(41~54 재위)는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진척시켰고 대외팽창에 많은 관심을 보여 브리튼을 합병했으며 서부 속주들의 로마화를 촉진시켰다. 그는 전제정치를 해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재무관리를 강화하고 재판제도를 개혁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16세밖에 안된 의붓아들 네로(54~68 재위)였다. 네로는 가족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살해하고 그리스도교를 최초로 박해했지만 반란이 일어나자 자살했다.

제국의 성장

네로가 죽은 뒤 내란이 벌어졌고, 이 내란의 마지막 승리자인 베스파시아누스(69~79 재위)와 두 아들이 플라비우스 왕조(69~96)를 이루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으로 약해진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재정을 튼튼하게 했으며 원로원에 대해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원로원을 행정관 배출 기구로만 취급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79~81 재위)는 많은 인기를 누렸으나 얼마 안 가 죽었고, 뒤이어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81~96 재위)가 제위에 올랐다.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

로마의 황제, BC 6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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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유능하지만 고압적(高壓的)인 인물로서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고 제국의 복지를 증진시켰다. 그러나 그의 전제로 말미암은 불만 때문에 96년 암살당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변경주둔군을 그들의 출신 속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배치했고, 레기온을 일정한 장소에 주둔시켜 변경주둔군과 비슷한 성격을 부여했다. 이 군대로 그들은 브리튼에서 지배 영역을 넓히고 라인 강 유역을 되찾았으며, 실패로 끝났으나 도나우 강 지역도 회복하려 시도했고 동쪽 변방도 강화했다.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은 군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96~98 재위)를 황제로 추대했다.

네르바의 가장 중요한 시책의 하나는 구빈계획(救貧計劃 alimenta)으로서 이는 이탈리아의 소농민을 돕고, 가난으로부터 구제해 출생률을 높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2가지 약점이 있었다. 즉 아들이 없었고, 군대의 인망을 얻을 만한 군사적 경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군인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98~117 재위)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웠다.

속주 출신의 첫 황제인 트라야누스는 법규를 준수하고 겸손해 인민과 군대 모두에게서 인기를 얻었으며, 제국 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원로원까지도 거리낌없이 무시하면서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지방자치 쇠퇴와 비대한 관료체제를 낳게 되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도나우 강 지역과 동쪽 변경을 평정하는 업적을 남겼으나 중동에서 반란을 진압하다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117~138 재위)였다.

그는 다재다능했으며 영토 팽창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해 변경수비 강화에 치중했다. 그는 속주를 지킬 주둔군을 그 속주 자체에서 충원했고 레기온과 주둔군의 차이를 없앴으며, 군대를 감독하기 위해 자주 몸소 시찰을 다녔다. 한편 레기온이 이처럼 주둔군과 다름없어지자 기동작전을 위해 새로운 부대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부대는 많은 경우 제국 주변의 이민족으로 충원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민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치세 때 관료제가 정착되었는데, 그의 법률적 업적 특히 영구고시록(永久告示錄 edictum perpetuum:법무관의 고시에 따라 해석되는 법)의 법전화는 현저한 것이었다. 또 새로운 형식의 라틴 시민권을 창설해 이 권리를 얻은 도시의 모든 지방 원로원 의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로마 원로원의 많은 성원이 속주의 귀족으로 보충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그는 AD 136년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이 양자로 삼았다.

안토니누스 또한 처의 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삼았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안토니누스(138~161 재위) 때 로마 제국은 세계주의의 성격을 뚜렷하게 띠면서 조용한 번영을 누렸으나 동시에 변경지역이 침략을 당하고 반란이 일어나 위험스러운 징조를 보였다. 그의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 재위)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해 하드리아누스의 뜻에 충실히 따랐으나 이는 제국의 동서 분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치세에는 이민족이 강력하게 침략해왔다. 동쪽 변경에 밀어닥친 위험은 무마시켰으나 게르만족의 도나우 강 지역 침입은 동부에서 벌어진 반란과 함께 오랫 동안 아우렐리우스를 괴롭혔다. 그는 게르만족을 진압하는 도중에 죽었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의 아들 콤모두스(180~192 재위)는 무능하고 변덕스러우며 쾌락만 추구하다가 암살당했다.

2세기의 제국

2세기의 원수정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고, 사람들은 이제 황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편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동시에 옛 공화정 시대의 귀족가문은 사라져갔고, 따라서 출신 성분이 황제가 될 자격을 좌우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들은 자기 가문을 신격화함으로써 권력을 정당화하려 했는데, 이는 곧 절대군주정에 이르는 길이었다. 황제들은 처음에는 원로원을 통해 법을 정했으나 2세기에는 원로원과 민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직접 법을 제정했으며 점차 입법권을 독점해갔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본질이 아니라 정도의 문제였을 뿐이다.

한편 공화정의 제도는 쇠퇴했고 제국 관리의 중요성은 더 커진 반면 도시의 행정관이 지닌 권위는 쇠락했다. 원로원의 지위가 낮아지는 동시에 더 많은 속주 출신이 원로원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관료층을 이룬 에퀴테스는 점점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에는 제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빈민이었으며 사회 이동이 무척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로마의 상업은 발달했지만 산업이 보잘 것없어 일자리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빈민문제가 심각했다. 이 문제는 대규모 건설공사가 전개되어 얼마간 누그러졌다. 이탈리아는 특권적 지위를 잃었고 경제적 중요성도 낮아져갔다. 반면 속주의 상황은 평화가 유지되는 가운데 점점 더 나아졌다. 제국 내의 수많은 여러 종족은 제각기 제나름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허용받았고, 도시 단위로 지방자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2세기의 황제들은 제국 전체에 걸쳐 정의를 실현한다는 의무를 스스로 떠맡아 가부장의 입장에서 지방자치에 간섭한 결과 도시의 유력자들이 도시의 공직을 맡지 않으려는 경향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강제로 공직을 맡겨야만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편 속주의 사회구조 역시 로마에서처럼 사회이동이 상당히 활발하긴 했지만 빈부격차에 의해 뚜렷하게 계층화된 사회구조를 이루었다. 속주들은 특히 하드리아누스 때부터 빠르게 로마화했다. 로마 시민은 군대에 들어가기를 꺼려했으므로 속주민에게는 입대하는 대가로 시민권이 부여되었는데, 이는 로마화를 촉진하는 동시에 군대 충원의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고 결국 군대가 제국 바깥에서 충원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낳았다.

극단적인 빈부격차는 물질주의를 낳는 동시에 내세를 지향하는 풍조를 널리 퍼뜨려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켰다. 서부에서는 주로 주둔 군대로 인해 도시화와 라틴화가 크게 이루어졌으나, 하드리아누스 때부터는 속주 주둔군이 자체 속주에서 충원되었기 때문에 군대가 라틴화에 기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졌다. 반면에 동부에서는 그리스어가 공식어였고 종교에도 로마가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차이는 뒷날 동·서 로마 분열의 전조가 되었다.

제국 정부는 교역 활성화를 지향하지는 않았으나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교역 발달이 촉진되었다. 경제는 전반적으로 발전했지만 사치와 심각한 빈부격차, 노예제의 모순, 기술 정체, 전쟁에 따른 인구감소 때문에 압박을 받고 있었다. 문화는 창조력을 잃어갔다. 속주의 로마화로 속주 출신 작가가 많이 나왔고, 동부에서는 그리스 문학이 부흥했으나 독창성이 없었고 말재주에 지나지 않는 인위적인 수사학과 냉소적인 풍자가 인기를 끌었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동부는 서부와는 달리 라틴화에 저항해 분열을 예고했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독서인구 자체가 줄어든 것이었다. 철학 부문에서는 스토아 철학이 가장 번창했는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자신도 스토아 철학자였다. 예술에서는 로마인의 기풍에 알맞는 건실한 사실주의적 표현이 강조되었으나, 하드리아누스 때부터는 이탈리아가 특권적인 지위를 잃음에 따라 이탈리아적인 기풍이 사라져갔고 이는 고전예술의 종말을 예고했다.

로마는 예술에서도 동부보다 서부에 훨씬 크게 영향을 미쳤지만 건축에서만은 동부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동부는 콘크리트와 아치를 사용한 로마의 거대하고 육중한 건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로마 제정 말기 세베루스 왕조(193~235)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벌어진 내란에서 도나우 주둔군이 193년에 추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197). 트리폴리 출신인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한 반면 이탈리아인과 원로원을 무시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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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병사의 봉급을 인상하며 상여금을 많이 주어 군대를 특권계급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관료제를 강화해 중앙권력을 강화함으로써 관료층인 에퀴테스를 우대하는 동시에 지방자치를 더욱 압박했다. 이러한 조치로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물렸다. 그의 황제권은 사실상 군대에 의존해 있었으며, 세습에서 황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한 그는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211년 그가 죽자 뒤를 이은 큰아들 카라칼라(211~217 재위)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으나 재정이 계속 궁핍해져 악성 인플레를 낳았다.

그는 또한 제국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해 제국의 통합을 강화했으나, 동시에 시민권의 가치를 줄이고 군대 충원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정복을 꿈꾸고 원정을 나갔다가 부하인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지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올랐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곧 세베루스 가문의 반란으로 218년 살해당했다.

그뒤 황제가 된 세베루스 가문의 바시아누스는 그가 모시던 신(神)의 이름을 딴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4세였던 그는 로마인에게 낯선 신을 광적으로 숭배하고 지나친 낭비를 했기 때문에 결국 미움을 사 222년에 살해당했고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는 끊어졌다.

3세기의 종교와 문화

로마의 전통 종교는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거의 변하지 않았으나 활력을 잃어갔다(로마 종교). 하층민들 사이에서는 너무 '정치적'이고 거대한 신보다 유용하고 지역적인 군소 신들에 대한 믿음이 존속·강화되었고, 황제 숭배가 전통 종교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3세기의 가장 독특한 현상은 당시 음울한 분위기에 걸맞게 내세를 지향하는 동방 종교들이 세력을 넓히고, 모든 신을 하나의 절대신으로 통합하는 경향이 종교적 열정과 더불어 나타난 것이었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1~2세기에 주로 유대인 사이에서 서서히 확산되어갔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가 신비에 싸여 있고 하층 계급들이 주로 믿으며 특정한 종족과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를 이해할 수 없고 비천하며 위험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1세기말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에도 상당히 널리 퍼졌고, 2세기에는 지식인들 사이에도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국 정부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네로 이후 플라비우스 왕조 치세 때는 그리스도교를 범죄로 보는 관념이 자리잡았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최초로 체계적인 박해를 시작했다. 한편 문학은 쇠퇴기로 접어들었고, 2세기에 부활한 그리스 문학과 학문이 법률 분야를 제외한 모든 영역을 지배했다. 철학은 종교적 신비주의에 크게 기울어 신(新)플라톤 철학이 등장했고 그리스도교 신학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군사적 혼란과 제국의 해체(235~270)

세베루스 알렉산드르가 죽은 뒤부터 클라우디우스 2세에 이르는 기간은 제위 찬탈과 이민족(barbariano) 침입으로 점철되었다.

최초의 본격적인 군인황제 막시미누스(235~238 재위) 때부터 이른바 군인황제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에는 원로원이 푸피에누스와 발비누스를 함께, 그리고 다음에는 13세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황제에 지명했으며 고르디아누스가 살해당한 뒤에는 군인 2명이 차례로 제위에 올랐다. 그뒤 253~268년에는 원로원 의원인 발레리아누스와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260~268 재위)가 통치했다.

갈리에누스는 재위 기간 내내 야만족의 침입을 막아야만 했으나 몇 가지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는 원로원 의원들을 군대에서 배제했고, 에퀴테스에게 군지휘권과 속주 총독직의 대부분을 맡겼으며,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강력한 새 기병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막기 위해 그리스의 종교와 신플라톤 철학을 적극 후원한 탓에 많은 반감을 사 268년 암살당했다. 그를 죽이고 새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2세(268~270 재위)는 이민족을 2차례 격파했으나 270년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 시대에는 제국이 지닌 주된 결함 가운데 하나인 제위계승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가 정계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이다. 본질적인 개혁이 필요했고 갈리에누스는 그 점을 알았으나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너무 힘이 약했다.

한편 이 시대에는 이민족의 대규모 침략이 행해졌다. 게르만족은 본거지였던 스웨덴에서 남동쪽으로 이동해 로마로 쳐들어왔으며 특히 서부에서는 히스파니아(스페인)까지 침범했다. 그 틈을 타서 마르쿠스 카시아니우스 포스투무스는 갈리아를 장악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했다.

동부에서는 사산 왕조가 흥기해 로마는 카라칼라 때 얻었던 메소포타미아를 잃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물러서야 했다. 이때 팔미라 군주였던 오다이나투스는 저항 세력을 조직해 사산조를 이란으로 다시 몰아내고 페르시아를 상대로 계속 싸우면서 팔미라 왕국을 세웠다. 그가 267년 살해당하자 아들인 바발라투스가 어머니 제노비아를 섭정으로 하여 뒤를 이었는데, 그녀는 갈리에누스와 클라우디우스 2세가 죽은 틈을 타 270년 이집트와 소아시아 일부를 침략했고 이듬해에는 아들을 황제로 선포했다.

272년 아우렐리아누스가 동부 속주들을 다시 제국에 통합했으나 메소포타미아를 되찾지는 못했다. 이러한 외침과 내란은 경제와 사회를 위기에 빠뜨렸다. 많은 지역이 황폐화했고 강도와 해적이 들끓었으며 전염병으로 인구가 줄어들었다. 제국은 빈곤에 빠졌다. 그와 함께 자치시도 어려움에 부딪혀 영역이 축소되었고 상업이 쇠퇴했으며 농업과 수공업도 사회의 혼란과 세금부담의 증대로 피해를 입었다. 황제들은 어려운 상황을 알고 있었으나 당장 물적·인적 자원을 끌어대기 위해 강력한 강제수단을 동원해 후기 제정을 군사독재정으로 만들었다.

한편 도시 중산층은 몰락해갔고 얼마 안 가 도시 관리(官吏)의 도주(逃走)를 강제로 막아야 할 필요까지 생겼다. 원로원 의원들은 정치적 권력을 잃었으나 사회적 위신은 유지했고 그들이 지닌 대농장을 더욱 넓혀갔으며 도시를 떠나 농촌에 있는 별장으로 옮겨갔다. 에퀴테스는 이제 관료층으로서 지배적인 지위에 올랐다. 하층계급은 공식적으로는 국가의 보호를 받았으나, 사회가 전반적으로 가난해짐에 따른 영향을 피할 수는 없었다.

국가는 재정적인 필요에 따라 농민을 토지에, 수공업자를 작업장에, 상인을 장사에 묶어두려 했으므로 사회 전체가 화석화(化石化)되었다.

제국의 회복과 전제정의 성립(270~337)

클라우디우스 2세가 죽은 뒤 270~284년에는 일리리아 출신의 황제들이 제국을 다스렸는데, 그들은 훌륭한 장군으로서 제국의 균형을 되살리려 애썼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한 이민족을 격퇴시키고 팔미라 왕국을 점령하는 한편,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고 갈리아 제국을 패퇴시킴으로써 제국을 다시 통일시켰다. 그는 또한 제국 안에서도 질서를 회복시키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 애썼다. 그는 이따금 공식적으로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으로 불렸는데, 원수정은 이제 완전히 전제정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는 275년에 살해당했고 뒤를 이은 원로원 의원 타키투스는 불과 2~3개월 제위에 있었다. 그뒤에는 역시 일리리아 출신인 프로부스가 제위에 올라 갈리아에서 침입자를 물리치고 경제회복에 힘썼지만 282년 암살당했다. 다음에 황제가 된 카루스는 페르시아와의 전투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 카리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패해 죽음을 당했다.

284년에 동부 주둔군이 황제로 선포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개혁을 통해 후기 제정을 확립했다.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황제(Augustus)로,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를 부황제(Caesar)로 지명했다. 이들 황제는 제각기 군대를 이끌고 할당된 지역을 방어하게 되어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와 브리튼을, 갈레리우스는 도나우 지역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부를 책임졌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모든 결정권은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있었다. 그는 황제들을 신격화함으로써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으며 황제 4명으로 이루어진 체제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보장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그는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했고 바로 그날 두 부황제가 제위에 오르는 동시에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새로운 부황제로 지명되었다. 세습 원칙을 무시한 점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커다란 모험을 한 셈이었다.

그 자신이 확립한 황제 신격화의 절대군주정은 권력세습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고, 곧 드러나게 되었듯이 군대와 대중들도 세습 원칙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보다 효율적인 속주 행정을 위해 속주의 수를 크게 늘려 그 대부분을 민사권만을 행사하는 에퀴테스 출신의 총독에게 맡겼다. 심지어는 이탈리아도 속주와 비슷한 여러 단위로 나누었고, 4 황제가 각기 자기 지역에서 집무함에 따라 로마는 실질적인 수도에서 격하되어 이탈리아가 누려온 여러 특권을 모조리 박탈당했다.

도시는 자치권을 잃었으며 세금은 정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징수되었다. 속주는 여러 개씩 묶여 관구(diocese)를 이루었다. 중앙정부에서는 관리들이 많이 늘어 관료제가 더욱 깊이 뿌리내렸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또한 변경 강화에 노력을 기울여 병력을 늘리고 황제 직속군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기동타격군을 창설했다.

그 부대는 대부분 총독이 아니라 군사권을 가진 지휘관에게 맡겨졌으며, 주로 군인 자제와 이민족으로 군사를 충원했다. 이와 같은 군대의 강화는 여러 차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해주었다. 그러나 전쟁과 개혁 및 관료제의 팽창은 재정을 압박했으며 인플레이션은 재정 위기를 더 심각하게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와 재산 상태를 상세하게 조사하고 세제를 개혁해 공평한 과세와 징세로 국가수입을 늘릴 수 있었다. 또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양화(良貨)를 주조하고 가격제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정부는 국민을 출생지에 묶어놓아 사회이동을 금했다. 반면에 원로원 의원들은 대토지 소유자로서, 그리고 기사계급은 관료로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한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치세의 말기에 그리스도교를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그리스도교는 그전에도 몇 차례 박해를 받았지만 일시적으로 움츠러들었을 뿐 계속 발전해왔다. 그러나 4두제정(四頭帝政)의 종교적 기반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가 확산되는 것은 마침내 갈레리우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갈레리우스는 다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마음을 움직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유례없는 박해를 자행했다.

그 박해는 동부에서 더 강력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제국의 백성이 더이상 그리스도교를 맹목적으로 증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말살하지는 못했다.

305년에 끝난 첫번째 4두제정에 이어 들어선 2번째 4두제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306년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갈리아와 브리튼의 군대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선포했다.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는 즉각 로마에서 스스로를 황제로 선포하고 아버지를 다시 황제로 복귀시켰으며 세베루스를 제거했다.

이에 로마는 308년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에 맞세워 황제로 선포한 리키니우스와 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일으킨 도미티우스 알렉산드르를 포함해 7명의 황제를 갖게 되었다. 뒤이어 복잡한 내란이 벌어졌으나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동맹을 맺은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였다. 이 둘은 316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죽자 세습 원칙을 되살려 각기 아들을 부황제로 임명했지만 세습제는 하나의 황제만을 요구했다.

대립이 불가피해 324년 둘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모두 장악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싸울 때 십자가가 하늘에서 빛나는 환시(幻視)를 보고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우대정책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세력은 급속히 팽창해갔다. 교회는 이제 수많은 특혜를 부여받은 반면 이교는 냉대와 억압을 당했다.

그러나 교회는 곧 황제의 세속권력에게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특히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을 의문시하는 아리우스파 이단 문제에 적극 개입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고, 공의회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탄핵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정통과 아리우스파 사이에서 여러 차례 마음을 바꾸었으므로 아리우스파 이단은 사라지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노선을 따라 개혁을 계속했으며 행정수도이자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했다.

337년 5월 22일에 죽었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4세기의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그의 3아들이 제국을 분할해 다스렸으나 그 가운데 2명이 차례로 세상을 떠난 뒤 353년에는 콘스탄티우스가 제국을 통합했다.

그의 치세에 로마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대항했으나 페르시아를 격퇴시키지 못했다. 또한 황제의 사촌 율리아누스의 활약으로 갈리아는 방어했으나 도나우 지역을 평정하지는 못했다. 콘스탄티우스는 주로 종교문제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의 간섭은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를 낳았다. 하지만 그는 아리우스파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는 교회에 불리한 것이었다. 361년 그가 죽자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마지막 황제로서 뒤를 이었다.

이교(異敎)를 믿은 율리아누스는 이교신앙을 되살리고 그리스도교를 약화시키려 했으며, 자유로운 원수정을 복귀시키려고 애썼으나 페르시아를 공격하다가 패해 전사했다. 그의 뒤를 이은 요비아누스는 그리스도교도로서 페르시아와 화약을 맺고 종교에 대해 관용정책을 폈다. 그러나 364년 갑자기 죽었다.

새로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는 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해 제국을 서부와 동부로 분리했는데, 제국이 실제로 분리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서부를 맡은 발렌티니아누스는 이민족을 물리치고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외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고 하층계급 보호정책을 폈다. 그러나 국가의 필요 때문에 사회의 화석화 추세를 가속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동부를 다스린 발렌스는 무능했고, 광신적인 아리우스파로서 이교도와 정통 그리스도교를 탄압해 반발을 샀으며, 도나우 지역으로 침입해온 서고트족과 동고트족과의 전투에서 378년 죽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375년 갑자기 죽자 그의 아들인 16세의 그라티아누스가 뒤를 이었다. 그는 379년에 발렌스의 후임으로 테오도시우스를 동부 황제로 선포하고 고트족과 프랑크족을 제국 안의 영토 안에서 살도록 허용했다.

테오도시우스는 곧 그라티아누스를 압도해 주도권을 잡고서 아리우스파와 이교도를 척결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다. 이단과 이교에 대한 이러한 탄압은 서부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틈타 갈리아와 브리튼의 군대는 383년 지휘관인 막시무스를 황제로 선포한 뒤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를 황제로 인정했으나 388년 막시무스가 테오도시우스를 공격하다 죽었으므로 제국 모두를 테오도시우스가 지배하게 되었다.

몇 년 뒤 이교 세력이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다 실패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가 갑자기 죽은 뒤 그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물려받았다. 이로써 동·서 로마의 분리는 결정적인 사실이 되었다. 테오도시우스는 대외적으로는 로마에 안정을 가져다 주었으나 대내적으로는 별로 개혁을 단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국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세금 부담이 더욱 늘고 경제는 줄곧 쇠퇴해갔으며 전제정이 더 강화되었다. 심지어 군대는 지휘관들까지도 주로 이민족으로 구성되었다.

4세기 동안에 황제가 지닌 권력은 이론상 절대적이었고 황제에 대한 신격화가 그것을 뒷받침했지만, 사실은 군사적 승리만이 황제의 지위를 정당화할 수 있었고 관료제가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고 있었다. 전쟁과 관료제가 민생을 압박하고 경제가 쇠퇴한 데다 세금 부담이 무거워지자 하층계급 사이에서는 불만이 팽배해져 유력한 자의 보호를 구하는 성향이 나타났다.

이러한 성향은 중세의 봉건제를 예견케 하는 사적인 의존관계를 확산시켰다. 한편 주교들은 그리스도교 세력이 강화되면서 점점 더 큰 권력을 소유하게 되어, 약자에 대한 보호를 둘러싸고 계속 유력자들과 경쟁을 벌여 5세기에는 세속적인 통치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농촌에서는 독립적인 중소 농민이 무거운 세금 부담과 대토지 소유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몰락해갔다. 그들은 자기 땅을 팔아넘기거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유력자에게 땅을 넘긴 뒤 소작인으로 전락해 땅에 매임으로써 자유를 구속당했다.

농촌의 상황은 중세 농노제를 지향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동·서 로마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민족의 침략에 큰 영향을 받은 서로마에서는 도시가 쇠퇴하고 사회가 농촌화하는 성향이 분명했던 반면, 침략의 영향을 덜 받은 동로마에서는 도시가 보존되고 농민들도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확산이 이교문학의 번창을 가로막지는 못했으나 이교문학은 대부분 과거에 매달려 고전작가나 옛 의식(儀式)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데 그쳤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제국의 행정단위를 바탕으로 조직을 갖추었는데 각 도시에는 주교가, 각 속주의 수도에는 대주교가, 그리고 아주 큰 도시에는 총주교가 자리잡았다. 한편 교회는 엄청나게 부유해졌고 세속 당국의 사법권에서 제외되는 불입권(不入權)을 획득했다. 황제는 종교문제에 간섭할 권리를 주장했으나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서로마 교회는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이 분리되어야 하며 교권이 더 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보여준 황제교황주의가 우세했다. 이교는 탄압을 받았지만 주로 농촌지역에서 5세기까지도 존속했다. 정통 그리스도교는 강력한 이단에 대해 승리했으나 다른 이단들이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한편 고트족은 아리우스파로 개종함으로써 침략 이후에 다가올 갈등을 예고했다. 이집트에서는 3세기말에 수도원이 탄생했는데, 수도원은 금욕적 성격이 누그러지면서 다른 곳으로 퍼져나갔다.

교회 문학은 4세기에 뚜렷한 발전을 보였다. 특히 서로마 교회에서는 교부(敎父)라 부르던 성 암브로시오와 성 예로니모, 성 아우구스티노가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서로마 제국의 몰락(395경~500)과 게르만족의 이동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를 통치했다.

그는 반달족의 피가 섞인 유능한 장군 스틸리코에게 자신을 도와 서로마를 통치하게 하고 아르카디우스가 맡은 동로마와 서로마의 통합을 떠맡겼다. 스틸리코는 그의 개입을 거부하는 동로마에 여러 차례 간섭하려 했으나 그때마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동·서로마 제국의 분리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게르만족이 물밀듯이 제국으로 침략해 들어왔다.

402년 스틸리코에게 저지당했던 서고트족의 알라리크는 곧 다시 침략해 410년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자행한 뒤 남쪽으로 진격했으며, 그뒤를 이어 아타울프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쳐들어갔다. 한편 406년 12월 31일에는 게르만의 여러 부족이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침입했고 409~415년에는 그들 대부분이 히스파니아로 건너갔다. 이무렵 갈리아로 들어간 서고트족은 호노리우스의 요청으로 반달족을 공격하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건너갔다.

그동안 로마 장군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를 어느 정도 평정한 뒤 421년에 공동황제로 선포되었다. 얼마 뒤 그가 죽고 나서 423년에 그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호노리우스의 뒤를 이어 455년까지 통치했다.

5세기 초반에는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소규모 군대를 지휘하여 이민족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러 속주에 자리잡은 이민족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브리튼은 앵글족·색슨족·주트족에게 넘어갔고, 히스파니아는 수에비족·서고트족이 왕국을 건설했다.

반달족은 428년 히스파니아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로마, 시칠리아, 동로마 제국의 서로마를 위협했다. 450년에는 훈족이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침략했으나 이미 서부에 자리잡은 이민족의 도움을 받은 아이티우스에게 격퇴당했다.

454년과 455년에 아이티우스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차례로 죽은 뒤에는 게르만족 출신 장군이 정권을 장악했고 황제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476년 게르만 출신인 오도아케르 장군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다.

한편 그러는 사이 아프리카에는 반달족 왕국이, 히스파니아·갈리아·루아르 지역에는 서고트족 왕국이, 그 북쪽으로는 살리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 왕국이 자리를 잡았으며 5세기말에는 강력한 두 왕국이 새롭게 들어섰다.

갈리아에서는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주교의 지지를 얻어 활발한 정복에 나서 큰 영토를 차지하고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다. 한편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테오도리쿠스)는 동로마 황제 제노의 요청에 의해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에서 쫓아낸 뒤 494년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고트족이 차지한 북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옛 제국의 제도를 유지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프랑크 왕국이 지중해까지 팽창하는 것을 막고 동고트 왕국을 론 강 유역까지 팽창시켰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동고트 왕국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이탈리아 재정복으로 멸망했다.

로마 제국의 몰락은 일반 국민의 낮은 생산 및 생활수준에 비해 고대 세계로서는 너무나 무거운 상부구조와 세금을 들 수 있다. 군대는 많은 유지비가 필요한 반면 규모는 충분하지 못했고 심지어 인구도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이민족의 대규모 침략이었다.

여기서 서로마는 몰락한 반면 동로마는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동로마는 부유하고 인구도 조밀했으며 국가구조도 서로마보다 건전했다. 서로마는 소작인을 착취하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고, 국민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이 무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로마는 또한 외부로부터 별로 위협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방어하기도 쉬웠다. 반면 서로마는 국경을 가지고 있어서 엄청난 비용이 드는 대규모 군대의 유지와 수많은 요새가 필요했고, 일단 변경이 침략당하자 핵심지역인 갈리아와 이탈리아는 걷잡을 수 없는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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