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해진 로마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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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복지들로부터 유입된 각종 생산물은 로마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쌓여만 가는 막대한 부는 로마 시민들의 생활조건, 기호품, 풍속 등을 근본적으로 변모시켰다. 로마 시민들은 여가를 식탁에서 즐기거나, 원형 경기장에서 피비린내 나는 경기에 열광하기도 했다. 이렇게 로마 시민들에게 여유로운 생활을 가져다 준 것은 결국 이민족들에 대한 정복의 결과였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로마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패전국은 로마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했다. 마그네시아(Magnesia )전투의 패배 이후에 안티오코스 3세는 12년 동안에 약 9천만 데나리우스를 전쟁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고, 그들의 국가는 로마의 속주가 되어 로마에게 현물세를 지불해야만 했다. 시칠리아의 10분의 1세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또한 장군들과 병사들은 정복한 영토를 착취했다. 즉 집정관 역임자(Proconsul)들이나 법무관 역임자(Propraetor)들은 속주 전역을 지배하는 속주 총독이 되면서 갑자기 부유해지는 사례들이 많이 나타났다. 이들은 일 년 동안 속주에서 전권을 행사하면서 속주민들을 착취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키케로(Cicero)는 속주민들의 강탈죄로 시칠리아 총독인 베레스(Verres)를 기소하고, 연설을 통해 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기도 하였다.
한편 속주로부터 납부된 세금은 징세청부업자인 푸블리카니의 중재를 통해 징수되었다. 그들은 국고에 금전을 선불하고, 그것보다 많은 금액을 속주민들에게 징수토록 하여 막대한 이익을 획득했다. 또 토지, 광산, 삼림 등을 몰수함으로써 공유지(ager publicus)를 점점 증대시켜 나갔다. 원로원이 이러한 공유지들을 관할함으로써 국가에게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결국 로마는 이민족들을 정복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막대한 부를 얻게 되었다. 이제는 평민들도 값싸고 손쉽게 귀금속과 예술품들을 구할 수 있게 되고, 무상으로 배급해주는 곡물들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다. 또 노예로 전락한 전쟁포로의 수가 급증하면서 이제까지의 생활양식도 바뀌었다. 이 결과로 로마인들의 사회와 풍속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근간이었던 소농민들이 흔들리다
로마 공화정 체제는 대부분 소농민 계급을 토대로 유지되어 왔다. 특히 로마 군단은 용병으로 편성되던 외국 군대와 달리 소농민들이 주요한 군사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수많은 정복전쟁의 결과로 인해 소농민들은 소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라티푼디움의 일상
로마의 유물에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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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소농민들은 전쟁을 수행하던 중에 전사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아 귀환한 이들은 그들의 토지들이 황무지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아야 했으며, 이전의 상태로 복구시키기 위해서 많은 돈을 부자들에게 빌려야 했다. 그러나 결국 속주로부터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곡물과 대토지 소유자들과의 경쟁 등으로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대토지 소유자들은 값싼 노동력인 노예노동력을 자유로이 이용하여 그들의 소유지를 가축 사육지, 포도와 올리브 등을 재배하는 과수원으로 변모시켜 많은 수익을 올렸다. 따라서 소농민들에게는 이제 토지를 대토지 소유자들에게 매각하고 촌락을 떠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지배계층들은 더욱 부강해졌다
이와는 반대로 지배 계층은 정복 전쟁의 결과로 커다란 혜택들을 입었다. 정국 상황에 대체로 소극적이었던 원로원 의원들은 태도를 달리하여 공직, 군대 지휘권, 속주 총독 등을 독점했다. 그들은 공유지를 저렴한 비용으로 빌리고, 몰락한 소농민들의 토지를 사들여 대토지 소유령인 라티푼디움을 형성시켰다.
와인을 관리하는 노예의 모습
오랫동안 전쟁에 참전한 농민들은 결국 자신의 황폐한 토지를 넘기고 부자들의 농장에 고용되어 일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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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지중해 지역에서는 이탈리아산 올리브유와 포도주가 인기가 매우 높아서 고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작물들을 재배한 라티푼디움은 막대한 수입의 원천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새로운 지배 계층들로서 기사 계급이 출현했다. 이러한 계층들은 대개 상업과 푸불카니라 불리는 세금 징수 및 속주민들에게 높은 이율로 현금을 대부해주는 은행업을 통해 부유해진 실업가들이었다.
노예 부부의 부조
자유민의 지위를 획득한 해방 노예들은 합법적으로 결혼해서 부부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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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시민 정신이 사라졌다
평민들은 예전부터 노예노동과 경쟁한 수공업자들과 로마로 쇄도해 온 몰락농민, 해방노예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직업도, 돈도 없이 국가에서 제공한 곡물배급으로 살아가거나 부자들의 보호하에 들어갔다.
그들은 부자들의 피보호인단을 형성하고, 부자들은 그들에게 매일 어느 정도의 식료와 금전같은 시혜물들을 제공해주었다. 그들은 비위생적인 고층의 인술라(insula)에서 생활했고, 원형 경기장에서 개최되는 경기각주1) 나 이륜 전차경주, 극장의 구경거리 등에 열중했다.
이 시기의 도시평민들은 공화정 전 기간동안 로마인들의 고유한 특징이었던 건전한 시민정신을 상실한 상태에 있었다. 이것은 후에 로마 공화정을 사라지게 한 불씨로 작용하였다.
로마에서 노예의 역할은 다양했다
로마 사회에서는 때로 한 민족 전체가 전쟁 포로로 포획되어 노예가 되기도 했다. 그들은 주로 라티푼디움의 농사일에 종사했다. 도시에서 이들은 각양각색의 직업에 종사했고 때로는 비서나 관리직 등 신용할 수 있는 직책들까지 승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들의 주인은 그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노예들은 대체로 채찍질, 개목걸이형, 십자가형 등과 같은 형벌로 가혹하게 취급받았다. 따라서 이탈리아는 여러 차례 노예 반란을 겪어야 했다.
물질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로마
이 시기에 로마의 귀족들 사이에 사치풍조가 나타났다. 부자들은 그리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로 장식된 화려한 가옥들을 건축했다. 의복 또한 값비싼 직물로 직조되었고 여기에 귀중한 보석들을 장식하였다. 사치풍조가 점점 심해져 가면서 침대 위에 가로놓인 기다란 다식과 함께 식탁에서도 이러한 사치풍조가 나타났다. 다종다양한 요리가 연구되어 식탁을 풍성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요리들을 담을 그릇으로 은제 식기가 사용되었다.
이집트 여신 이시스
아내와 어머니의 본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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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사회에 사치풍조가 만연해감에 따라 로마인들의 유구한 미덕이었던 가족 관계, 시민정신, 임무충실 등과 같은 건전한 정신이 점점 사라져갔다. 또한 전통적인 신앙들이 쇠퇴해 간 반면에 그리스와 오리엔트 기원의 새로운 신앙들이 도입되었다. 로마인들은 프리기아(Prigia)의 여신 키벨레(Cybele)와 이집트의 여신인 이시스(Isis)를 숭배했고, 엘레우시스(Eleusis)와 디오니소스(Dionysos)의 비의를 숭배했다.
이에 '사치에 관한 법령'을 선포했으며, 카토의 항의연설도 있었지만, 이미 극에 달한 사치풍조들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교육 역시 그리스식 교육이 로마의 부유계층에게로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건축에서는 그리스식의 신전과 헬레니즘으로부터 도입된 바실리카(Basilica)들로 조영되었다.
그러나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인 문학 분야에서는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이 시대에 창작된 플라우투스(Plautus)와 테렌티우스(Terentius)의 희극,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시, 키케로의 웅변, 살루스티우스(Salustius)와 카이사르의 역사 등은 라틴문학에서도 제1급에 해당하는 걸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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