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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 3장

by 은총가득 2020. 5. 26.

3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1-14절, 율법주의는 잘못이다

율법주의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법들을 행해야 의롭게 되고 완전케 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에서는 신앙 생활과 선행과 봉사의 동기와 목적이 완전케 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과 배치되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도인이 경건하고 도덕적 생활을 힘쓰고 거룩하고 선한 일을 행하지만 그 동기와 목적이 다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받았기 때문에 마땅히 의롭고 선한 삶을 힘쓰는 것이다(롬 12:1, 2).

바울 사도는 본서신 전체에서 율법주의적 오류에 반대하여 복음 진리를 증거하며 변호하는데, 특히 본문에서는 율법주의가 잘못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일곱 가지의 반론을 말씀한다.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밝히 보이거늘’이라는 원어는 ‘밝히 증거되었거늘’이라는 뜻이다. 전통사본에는 ‘누가 너희를 꾀더냐’는 구절 대신 ‘누가 너희를 꾀어 진리를 복종치 못하게 하더냐?’라고 되어 있다. ‘진리’는 은혜의 복음이다.

바울은 본절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리석도다’라고 책망하면서 율법주의에 대한 첫번째 반론을 말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미 앞 장 끝에서 언급한 바이기도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며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대속(代贖)의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법을 지킴으로 완전케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2]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믿음으로’라는 원어(엑스 아코에스 피스테오스)는 직역하면 ‘믿음의 들음으로’인데, 이것은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을 가지고 듣는 것이나 혹은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율법주의에 대한 두번째 반론은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이 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었고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예를 들면, 사도행전 10: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사도행전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마치겠느냐’는 원어(에피텔레이스데)는 영어 성경들처럼 ‘완전케 되느냐’(are made perfect) 혹은 ‘완전케 되고 있느냐’(are being perfected)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한 영어 성경은 의역하여,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한 후에 지금 육신적 노력으로 너희의 목표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느냐?”라고 번역하였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케 되려느냐?”는 본문의 말씀은 사람이 육신적 노력으로는 도덕적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법들을 지켜 완전케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하고 있다. 이것이 율법주의에 대한 세번째 반론이다. 성령으로 시작된 성도의 신앙 생활은 육신적 노력으로 완전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다른 곳에서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다(갈 5:16). 바울은 법들을 지켜 온전케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어리석다고 책망하고 있다.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은혜의 복음을 받은 후에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들이 이제 은혜의 복음을 포기하고 율법주의에로 나아간다면 그들이 당했던 그 많은 고난이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사실 받을 가치가 있는 고난을 받았지 헛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능력’이라는 원어(뒤나메이스)는 ‘기적들’을 가리킨다. 율법주의에 대한 네번째 반론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성령의 기적들을 행하신 것이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이었지 법을 행할 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들과 기적들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단지 예수를 믿을 때 주어졌었다. 그것들은 그들이 법을 지켰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행 3:12, 16 참조).

[6, 7]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정하셨다’는 원어는 ‘여기셨다, 간주하셨다’는 뜻이다. 율법주의에 대한 다섯번째 반론은 아브라함이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5:6에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라는 말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 곧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은 성경 원리에 맞다.

[8, 9]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의로 정하신다’는 원어(디카이오오)는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다. ‘너를 인하여’라는 원어(엔 소이)는 ‘네 안에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본절은 다섯번째 반론에 대한 보충적 설명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네 안에서]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3)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복이 이방인에게도 적용될 것을 암시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아브라함과 함께 의롭다 하심의 복을 받는 것이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주의에 대한 여섯번째 반론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 즉 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모든 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신 27:26). 이 세상에 하나님의 모든 법들을 항상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고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

[11, 12]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믿음으로’라는 말은 ‘행위로 혹은 법을 지킴으로’라는 말과 대조되는 말이다. ‘산다’는 말은 ‘영원한 삶, 영광스러운 삶’을 가리킨다. 율법주의에 대한 일곱번째 곧 마지막 반론은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합 2:4)고 성경이 말씀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복음의 원리에 맞는 말씀이고, 율법주의에는 맞지 않는 말씀이다. 바울은 위의 사실을 보충하여 법은 믿음과 근원이 다르다고 말한 후에, 법을 행하는 자가 그 법 가운데서, 그 법으로 인하여 살리라는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레 18:5).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본절은 이 부분의 핵심이며 결론적 요지이다. 한 마디로, 율법주의의 오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건져내셨다. 그리스도의 이 구속의 일은 역사적이며 객관적이며 대리적이며 완전한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는 완전한 의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의, 받은 의는 완전한 의, 곧 도덕적 완전이며 거기에 무엇이 더 첨가될 것이 없다. 그 의와 그 완전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누린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본절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결과를 말씀한다. 그것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첫째는 아브라함의 복이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특히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둘째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는 것이라고 표현된다. 이 두 가지는 다 믿음으로 오는 참으로 큰 복이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결과이다.

 

1-14절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본문은 율법주의 곧 법을 지켜야 완전케 된다는 생각에 대하여 적어도 일곱 가지의 반론을 제시한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우리가 행위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셋째는 사람이 육신의 노력으로, 즉 법을 지킴으로 완전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넷째는 하나님께서 초대 교회에 성령의 기적들을 베푸신 것도 그들이 법을 지킬 때가 아니고 단지 믿을 때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섯째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이다. 여섯째는 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자들이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을 항상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고 성경이 말씀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 곧 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생각은 명백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을 지켜 완전케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우리의 불완전한 행위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죄인의 유일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의, 완전한 의, 도덕적 완전 안에 거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그 의 안에서 자유와 기쁨과 평강을 누려야 한다. 우리는 그 의 안에서 날마다 기쁨의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15-22절,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율법이 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사람의 언약도 한 번 맺어지면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집이나 땅을 사기 위해 맺어지는 계약은 그대로 효력을 가지며, 아무나 그것을 폐하거나 더하지 못한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 얼마나 더 확실하게 시행될 것인가는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들은 그와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창세기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여기에 ‘네 씨(자손)’라는 말은 복수 명사인 ‘네 씨들(자손들)’이 아니고 단수 명사인 ‘네 씨(자손)’이다. 즉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켰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영감(靈感)이 글자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감된 성경은, 그 주된 내용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까지도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 속에 기록되었다. 본절이 증거하는 바와 같이, 성경 구절에서 어떤 단어가 복수 명사인가 단수 명사인가의 문제에도 중요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까지도 주의를 기울이면서 성경을 읽고 그 뜻을 묵상해야 한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언약’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정하신 언약’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메시야 약속 곧 그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약속이었다. 그 약속된 복은 의와 영생이다.

율법이 언약보다 430년 후에 세워졌다는 말씀은 야곱 때로부터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때까지 계산한 것일 것이다. 출애굽기 12:40, 4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430년이라. 430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아브라함 때로부터 계산하지 않고 야곱 때로부터 계산한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의 아들 이삭과 그의 손자 야곱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창세기 26:4,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28:13, 14, “(하나님께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사람의 계약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친히 열조들에게 세우신 언약을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이 폐하거나 헛되게 하지 못한다. 율법은 율법으로서 어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었지 430년 전에 세워진 언약을 폐지시킬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율법이 언약을 무효케 할 수 없는 이유를 보인다. 다시 번역하면, “왜냐하면 그 유업이 율법으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닐 것이나, 하나님이 그것을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셨기 때문이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은혜로 주신 ‘그 유업’이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맺으실 때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었다(창 12:7; 13:15; 15:18; 17:8).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얻은 것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은혜의 약속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 사실은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음을 증거한다.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율법은 사람들의 범죄 때문에 주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손을 빌어’ 주어졌다. 여기에서 ‘중보자’는 모세를 가리켰을 것이다. 신명기 5:5, “그 때에 너희가 불을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므로 내가 여호와와 너희 중간에 서서 여호와의 말씀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었다. 요한복음 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천사들로 말미암아’ 주셨다. 이것은 신명기 33:2의 말씀을 가리킨 것 같다. 거기에 보면,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일만 성도’는 천사들을 가리켰을 것이다. 신약 성경은 본절 외에도 몇 곳에서 율법이 천사들을 통해 주어졌음을 증거한다. 사도행전 7:53,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 2: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율법의 유효 기간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이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메시야 곧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율법은 구약 시대를 위한 것이었고 메시야가 오실 때 폐지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율법 제도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또한 율법의 정죄 아래 있지도 않다. 그 이유는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셨고 그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건져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20]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중보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고 양 편을 위해 중간 역할을 하는 자이다. 그 양 편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곧 사람들이다.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는 말씀은 약속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율법을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뜻인 것 같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할 수 없고 율법 제도가 일시적이라고 하여,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된 것은 아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럴 수 없다. 원문에는 ‘만일 능히’라는 말 앞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충돌할 수 없는 이유를 보인다. 만일 하나님께서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아 왔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이 서로 충돌한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다.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구약 성경 특히 율법의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다. 성경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 그 ‘모든 것’ 속에는 모든 인류가 포함된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특히 율법에 비추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하심이다. 그 약속이란 의와 영원한 생명이다.

 

15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과 430년 후에 주신 율법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목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와 영생의 복을 은혜로 주실 것을 보였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폐하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행하여 의와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율법은 그 목적과 의도가 각각 서로 달랐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주의에 서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신의 도덕적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사람의 율법적 행위는 항상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그것에 의지하는 자는 언제나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다. 우리의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으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약속하신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믿고 의지함으로써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우리 중 한 사람도 하나님의 이 은혜의 구원에 참여치 못하는 자가 없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가 다 겸손히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며 그 앞에 복종하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23-29절, 율법과 믿음

성경은 구약과 신약, 크게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은 한 마디로 ‘율법’이다. 율법이라는 말은 십계명에 나타나 있는 도덕법, 즉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무의 법들 뿐만 아니라, 또한 의식법, 즉 성막 제도와 제사, 절기 등의 법들을 포함한다.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율법은 한 마디로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요약할 수 있다면, 복음은 한 마디로 ‘믿으라, 그러면 영생을 얻으리라’고 요약할 수 있다. 율법은 행위를 강조하고, 복음은 믿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은 구약의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며 받아야 하는가? 신약 성도들은 물론 구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지 않는다. 오늘날엔 성막도 세우지 않으며 제사도 드리지 않으며 절기도 구약대로 지키지 않는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며 율법과 믿음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문제는 오늘 우리가 구약의 율법을 어떻게 해석하며 우리에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데 직접 관계되고, 또 믿음의 생활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오기 전에’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전파되기 전, 곧 신약 시대 이전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1:14, 15,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가 오심으로 그를 믿는 믿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본절에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어 구원 얻는 진리를 계시하셨음을 의미한다. 히브리서 1:1, 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요 절정적 계시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믿음을 구원 받는 각 사람에게 은혜로 주신다(고후 4:3-6).

본절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 . . 갇혔느니라’는 말씀은 율법 시대 곧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상태를 가리킨다. 바울은 율법을 감옥에 비교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율법 제도 아래, 율법 체계 아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백성들에게 도덕법 뿐만 아니라, 의식법을 주셔서 그들이 그 아래 있게 하셨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율법의 형식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사람들을 다루셨다. 물론, 율법 아래서도 의식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였다. 그러나 그가 오신 후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밝히 증거될 수는 없었다.

‘율법 아래 매여 있고 갇혀 있다’는 말은 또한 율법의 정죄 아래, 율법의 저주 아래 있다는 말이다.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신 27:26). 형을 선고 받은 죄수가 감옥에서 형 집행을 기다리듯이, 모든 사람들은 율법 아래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저주의 형벌을 기다리는 자들과 같았다. 물론 구약 백성도 의식법에 암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누렸다고 생각되지만, 여전히 율법의 엄격한 요구 조건 아래서 그들은 죄책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이 율법의 정죄와 공포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죄의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의는 아직 미래의 것이었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몽학선생’이라는 원어(파이다고고스)는 ‘주인의 어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주고 또 데려오는 종’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 말은 율법이 사람의 어린 시절에만 필요함을 암시한다. 바울은 이 비유에서 구약 백성을 어린 아이의 시절에 비유하고, 신약 백성을 몽학선생이 필요치 않은 성장한 나이에 비유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의 어린 아이 시절에 필요했던 제도이었다. 율법이 사람들을 인도한 곳은 그리스도이시다.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자이다.

어떻게 율법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는가? 그것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통해서이었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는 의가 없는 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와 거리가 먼 자이다, 나는 하나님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이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에 목마르고 배고픈 자가 되게 한다.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불완전한 행위로말고 ‘어떤 다른 방법으로’ 의를 얻어야 됨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속죄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일이다. 율법의 정죄와 저주를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없다.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본절에 말씀한 대로,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철저한 정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의에 이르는 길이다. 가상적으로는, 사람에게 두 가지의 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자기의 완전한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 곧 행위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길 곧 믿음의 길이다. 행위의 길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그리고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불가능한 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뿐이다.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몽학선생 아래 있었으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 ‘믿음이 온 후’라는 말은 시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즉 신약 시대를 말하며,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후를 말한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도, 우리는 시대적으로 이미 율법 시대가 지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은혜가 선포되는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고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최선의 삶을 추구했었다. 그러나 그 때의 우리의 삶은 범죄와 실수와 불완전한 행위로 인하여 죄책과 불안과 공포 아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었고 율법의 저주와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은 ‘율법 아래 즉 율법의 체계 아래, 율법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선 우리가 옛 언약(구약) 아래 있지 않고 구약 시대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더 이상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는 율법의 요구 조건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또한 성막 제도 아래 있지 않고 제사들이나 절기들을 지킬 의무 아래 있지도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가 의식법들의 그림자로 오셔서 대속 사역을 이루셨기 때문에, 그가 율법의 완전한 요구 조건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이제 새 언약(신약) 아래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께서 이루신 의 안에 있고 그의 대속 공로 안에 있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몽학선생[율법] 아래 있지 않은 이유를 보인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 앞에 두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읽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이니라”이다. 이것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요한복음 1:12, 13의 말씀과 같다. 그러므로 본절의 뜻은,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더 이상 율법이라는 몽학선생 아래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믿음이 온 후에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은 이유를 추가적으로 보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유를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와 합하여’라는 원어(에이스 크리스톤)는 영어 성경들의 번역대로 ‘그리스도 안으로’라는 말이다. 우리 말 성경은 이 말이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나타낸다고 해석하여 ‘그리스도와 합하여’라고 의역하였다.

세례(洗禮)는 그 말 그대로 씻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하는 예식이다. 무엇을 씻는 것인가? 죄를 씻는 것이다. 왜 죄를 씻어야 하는가? 사람이 죄를 씻지 않으면 죄인으로 남기 때문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죄인은 장차 온 세상에 임할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죄는 씻어야 한다. 어떻게 죄를 씻는가?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다.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히브리서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세례는 죄를 씻어 그리스도 안으로 연합됨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그것을 본절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다’고 표현하였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십자가 공로에 근거하여 죄씻음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부활이 된다. 그리스도의 의는 그의 의가 된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으로 연합되는 세례가 상징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으로 참으로 세례 받아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본절을 직역하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없도다.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임이니라”이다. 이것은, 구원의 복, 의의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림에 있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차별이 없고 종이나 자유자가 차별이 없고 남성이나 여성이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는 다 동등한 복을 받았고 다 동등한 영적 특권을 누린다.

이 말씀은 물론 교회 안에서의 직분들의 구별이나 가정이나 교회에서의 남녀의 역할의 구별을 부정하는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다른 곳에서 그러한 구별을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이다(고전 14:34-38; 딤전 2:11-15).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기업을 이을 자 곧 상속자이다.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손이 상속받을 기업은 가나안 땅이었으나, 그의 영적 자손인 우리가 상속받을 기업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이다. 베드로전서 1:3, 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결론적으로 23절부터 29절까지는 율법과 믿음의 관계를 잘 보인다. 여기에 믿음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한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여 있었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었다.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며 우리로 의를 갈망케 함으로써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이제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천국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항상 남아 있다.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가?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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