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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 4장

by 은총가득 2020. 5. 26.

4장: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

1-11절,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

바울 사도는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를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 받는 아들과 그의 후견인 혹은 재산 관리인과의 관계에 비교하여 설명한다.

 

[1, 2]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후견인’은 보호자를 그리고 ‘청지기’는 재산 관리인을 가리킨다. 유업을 이을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유산의 주인이지만, 어릴 때는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며 종처럼 그의 후견인이나 재산 관리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러나 그 나라의 법이 정한 나이가 되면 그는 자기의 권리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우리’는 일차적으로 유대인들을 가리킬 것이다. ‘어렸을 때’란 구약 시대를 가리킨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원어는 ‘이 세상의 초보적인 것들’이라는 말로서 율법을 가리킨다. 이것은 유업을 이을 아들에게 지정된 후견인과 재산 관리인에 해당한다. 바울 사도는 모세의 율법 중에도 특히 의식법을 염두에 둔 것 같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 아래 복종하였었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때가 찼다는 것은 2절의 ‘그 아버지의 정한 때’에 해당한다. 그 전에는 아들이 후견인이나 재산 관리인 아래 있어야 했던 어린 때이었고, 이제부터는 아들이 성장하여 스스로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때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표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 ‘그 아들을 보내사’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아무나 세상의 한 인간을 당신의 아들로 삼으신 것이 아니었음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 곧 그의 영원하신 아들이시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다. 이것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창세기 3:15에 보면, 하나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다.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셨음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독생자의 영광을 나타내신 예수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취하신 참 사람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보내신 그 아들께서는 또한 율법 아래 나셨다. 그는 특히 유대인으로 나셨다. 그는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다. 그것은 그가 언약의 백성이며 율법을 다 지킬 의무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그는 과연 율법을 다 지키셨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셨다.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율법 아래 나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기 위해서이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란 모든 사람들을 다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성문법 아래 있었지만, 모든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마음에 새겨주신 법 곧 양심의 법 아래 있었다. ‘속량(贖良)한다’는 말은 값을 주고 사셔서 건져내시며 자유하게 하신다는 뜻이다. 율법은 멍에와 같았다. 사도행전 15:10에 보면, 베드로는 그것을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라고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이 율법의 멍에에서 건져내어 자유케 하시려고 오셨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이제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셨다. ‘아들의 명분’이라는 원어(휘오데시아)는 ‘양자 됨 혹은 양자의 자격’을 뜻한다. 구약 시대는 율법의 시대이며 우리는 그 때에 율법 아래 있었다. 그것은 교회의 어린 시절과 같았다. 그러나 신약 시대는 이제 교회가 성장한 때이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속량되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장성하여 더 이상 후견인과 재산 관리인 아래 있지 않는 아들과 같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증거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그 아들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영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인성의 영은 우리에게 보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온 세상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아들의 영’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영을 가리킨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빌립보서 1: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보내주신 ‘그 아들의 영’은 곧 우리가 받은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영인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영이시다. 요한복음 14:16,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요한복음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16:7,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여기에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가 있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나오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아들에게서도 나오신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그 본체에 있어서,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신 하나님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신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사실이다. ‘아바’ 혹은 더 정확히 발음하여 ‘아빠’라는 말은 아람어로서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다. 로마서 8:15에는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는 영이라는 뜻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중생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그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네가 이 후로는’이라는 말은 신약 시대가 되어 예수를 믿은 후, 곧 성령을 받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이후를 가리킨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 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아들이 된 것이며 우리가 아들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을 자이다. 즉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자들은 아직 어려서 후견인이나 재산 관리인과 같은 율법 아래 있어야 할 자들이 아니고 이제는 장성하여 아들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8, 9]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신약 성도와 율법과의 관계가 이러하므로, 바울은 신약 성도가 또 다시 율법 아래 종노릇하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한다.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종노릇하였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데, 우리가 어떻게 무지하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그것에게 종노릇할 수 있겠는가?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은 율법을 가리켰다. 율법을 그렇게 부른 것은 사람이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의 본질을 바로 안다면, 우리는 신약 성도가 율법적 생활로 환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율법주의는 명백히 잘못이다. 신약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바울 사도는 율법주의의 예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을 들었다. 여기에 할례의 규례나 깨끗하고 부정한 음식에 대한 규례 등도 첨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구약에 규정된 이런 의식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는 것은 그것이 교회의 어린 아이 시절에 해당하는 것들이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건져내어 자유케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종이 아니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는 공포와 무거운 짐 진 마음으로 법에 복종하지 않고 자유함과 기쁨과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란 하나님의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 받게 한 일을 말한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완전한 의를 얻음이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음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율법주의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의 복음의 바른 사역이 헛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진리를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혹시 그 오류에 빠졌을지라도 거기에서 다시 헤어나오도록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로 11절의 내용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이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이다. 구약 시대는 교회의 어린 시절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한 때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 이것이 신약 시대이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십자가 구속 사역으로 예수 믿는 우리를 율법의 멍에와 정죄와 공포로부터 속량하셨고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 아들의 영, 곧 성령을 우리 마음 속에 보내어주심으로 우리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굳게 거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 우리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율법의 멍에 아래 종노릇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제 자유함과 기쁨과 자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참으로 놀랍고도 놀라운 은혜이다.

 

그러나 혹시 당신은 아직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마음에 영접한 적이 없는 분은 아닌가? 혹시 당신은 아직도 죄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죄의 낙을 누리며 살고 있지나 않는가? 당신은 여전히 다가오는 하나님의 두려운 공의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 예수 안으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초청을 거절하고 있지나 않는가? 시간이 늦기 전에 진심으로 죄를 청산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자.

 

12-20절, 바울의 염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믿음을 바르게 지키는 일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마귀는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변질시키려고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인류 초기로부터 사도 시대에까지도 그리고 지금도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

처음에는 바울을 극진히 영접했던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었다. 그것은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거짓 교사들, 곧 마귀의 종들의 활동 때문이었다. 바울은 그 교회에 대해 의심과 당황함을 가지면서 그들이 복음 진리에 바로 서기를 원했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는 말은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적 생활을 버리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처럼 되었다는 말이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는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도 바울처럼 율법에 대해 자유하라는 뜻이다. 물론 이 말씀이 도덕적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도덕적 율법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도덕적 존재로 지음을 받은 한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지켜야 한다. 율법에 대해 자유하라는 말씀은 율법의 체계, 율법의 제도로부터 자유하라는 뜻이며, 도덕법을 지킬 때에도 두렵고 짐진 마음으로가 아니고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에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해롭게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참으로 위하였지만,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바울이 전한 바른 복음의 진리에서 이탈함으로써 지금 바울의 심정은 매우 고통 가운데 있다.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은 바울 사도가 처음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 했을 때 여러 가지 육체적인 핍박과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이곳 저곳을 이동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든지(고후 11: 23-30), 아니면 그가 어떤 육체적 질병 때문에 갈라디아 지방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은 앞절에 말한 ‘육체의 약함’을 가리킨다. 그것은 핍박이나 혹은 질병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 일들이 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바울을 버리셨거나 그를 징벌하시는 표처럼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러한 바울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멸시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혹은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핍박하였지만,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고 영접하였던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은 증거이었다.

 

마태복음 10:40에 보면,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또 마태복음 25:31-46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그는 그의 제자들 중 보잘 것 없는 자 하나를 영접하고 돌아보는 것이 곧 그를 영접하고 돌아보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주의 종 바울에 대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그러한 태도는 복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복된 태도는 어디에 있는가? 지금 그들은 변하고 있다. 이전에는 그들이 바울을 사랑하여 할 수 있다면 그를 위해 자신들의 눈까지도 빼어주려 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간의 간격은 그가 그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겼다. 그가 그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감 없이 그대로 선포하고 가르쳤다는 사실이 그와 그들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진리의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 때문에 원수가 될 수 있는가?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말에 미혹되어 진리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들이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았더라면 서로 원수될 일이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바른 복음 진리 안에서 그러해야 한다. 교회의 참된 단합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7]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

‘저희’는 거짓 교사들, 거짓 목사들, 곧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 열심은 좋은 열심이 아니고 나쁜 열심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열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 자기 중심의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봉사자들의 열심은 인간 중심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진리 중심적이어야 한다.

 

본문에 ‘이간 붙인다’는 원어(엑클레이오)는 ‘제외시킨다, 분리시킨다’는 뜻이다. 거짓 교사들이 그들을 이간 붙인다는 말은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킨다, 바울을 따르는 자들로부터 제외시킨다는 뜻이다. 그들의 열심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키고 자기들에게 속하게 하기 위한 열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참된 종과 분리시키는 것은 마귀의 기뻐하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마귀의 일이었다.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성도들이 목회자의 기쁨이요 자랑임을 생각한다면, 목회자가 성도들을 사모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교회에서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거나 필요한 인물로 아껴주지 않는 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다른 이들에게 사랑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좋은 일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꼭 필요한 인물, 매우 요긴한 인물이 되고 모든 진실한 성도들이 아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나의 자녀들아’라는 원어(테크니아 무)는 매우 친근감 있는 호칭이

라고 한다. 보통 ‘자녀들’이라는 말(테크나)보다 이 말(테크니아)은 문자적으로는 ‘어린 자녀들’을 가리키며 ‘사랑하는 자녀들’이라는 뉘앙스를 가진다고 한다. 본서신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아’라고 불렀던(1:11; 3:15; 4:12, 28, 31; 5:11, 13; 6:1, 18) 바울은 오직 이 곳에서 그들을 ‘나의 어린 자녀들아[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의 진심의 사랑을 나타낼 것이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떠나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바른 복음 진리 위에 세우기 위해 해산의 수고와 같은 수고를 하고 있다. 사람을 구원하고 진리 위에 바로 세우는 일은 자녀를 낳아 잘 기르는 일보다 적지 않게 수고로운 일이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는 말은 직역하면 ‘너희 속에 그리스도가 만들어지기까지’라는 말이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그리스도가 만들어지도록 수고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신약 성도는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리스도로 영생을 얻었고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었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나의 생명이다. 예수 믿는 믿음이 없으면 나는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죄인, 아무 가치가 없는 죄인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굳게 거하며 그리스도만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살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음성을 변하려 한다’는 것은 사랑과 위로의 음성을 책망의 음성으로 변하려 한다는 뜻일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음성을 변하려 하는 까닭은 그들을 향해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심이 있다’는 원어(아포레오)는 ‘당황하다’는 뜻도 가진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진실히 믿었던 그들이 이토록 속히 변한 일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게 된 것처럼 느껴지는 일 때문에, 그리고 마치 마귀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보다 더 강하게 보이는 상황 때문에 그들을 향해 의심이 생겼고 당황케 되어 그의 음성을 변하려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12절로 20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과거에 바울의 육체적 연약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를 하나님의 천사나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하였었고 그를 위해서 할 수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그를 사랑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과 바울 사이에 간격이 생겼다. 그것은 거짓 교사들, 거짓 목사들 때문에 생긴 간격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왜곡시켰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비난하였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 대해 의심과 당황함을 가지고 그의 음성을 변하려 하고 있다.

 

바울의 교훈의 목표는 본문 12절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바울이 전한 복음대로, 바울과 같이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는 교훈이다. 그것을 19절에서는 “너희 속에 그리스도가 만들어지기까지”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만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인격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의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며 그리스도로 충만된 자들이 되어야 한다.

 

21-31절, 두 언약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는 두 부류가 있었다. 이것은 신약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해당하는 사실이다. 우리 교회에도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율법에 속한 교인들이고, 다른 하나는 복음에 속한 교인들이다. 율법에 속한 자들은 율법의 속박 아래 살며, 복음에 속한 자들은 복음의 자유를 누린다. 본문을 보자.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점은 에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믿은 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곧 사탄의 미혹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믿고 그 안에 굳게 서 있는가? 바울은 이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예를 들어 복음에 속한 자와 율법의 속한 자의 차이를 설명한다.

 

[22, 23]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라에게서 난 이삭이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내이었고, 하갈은 그의 여종이었다. 한 사람은 자유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종이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자손이 크게 번창할 것을 약속하셨었다. 그러나 그 후 10년이 지날 때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자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의 제안으로 그의 여종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하신 아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은 후 15년이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가 되었을 때,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이삭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었다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얻은 아들이었다.

 

[24, 25]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이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하갈과 사라를 비유적으로 적용한다. 그는 하갈[본문에선 하가]과 사라를 두 언약과 같다고 말씀한다.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 곧 지금의 예루살렘과 같다고 그는 말씀한다. 그것은 율법 아래, 즉 율법의 제도와 체계 아래 있었던 구약 교회에 해당한다.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다른 한편,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전통 사본)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은 신약 교회를 가리킨다. 신약 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복음 전파를 통해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또 구원 받은 영혼들이 교회에서 양육함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의 아들 이삭의 차이는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이다. 유대교는 육신적 아브라함의 자녀들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영적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요 복음의 자유를 가진 자유자들이다. 우리에게는 성령 안에서 받은 의와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가 있다.

 

[27, 28]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본절은 구약 교회와 대조하여 신약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통 해석된다. 구약 교회는 육신적 이스라엘을 교인들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신약 교회는 그런 육신적 자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교회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 교회는 복음 전도를 통하여 구원 받은 많은 자들, 곧 아브라함의 수많은 영적 자녀들, 약속의 자녀들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가 바로 그런 자들이다.

 

[29, 30]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과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은 14살 가량의 차이가 났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1:9). 그가 어린 이삭을 괴롭혔는지도 모른다. 자기 아들 이삭을 희롱하는 것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요구하였다. 창세기 21:11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스마엘로 인하여 그 일이 깊이 근심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이었고 이삭은 약속을 따라, 성령을 따라, 즉 성령의 능력으로 난 자이었다. 신약 교회 안에서도 두 부류가 있다.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고 단순히 어떤 육신적 관계 때문에 몸만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이 있다. 중생하지 못한 이러한 교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참된 성도들을 핍박하는 부류가 되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었던 율법주의 이단자들도 그런 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전파했던 바울과 성도들을 비난하고 핍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교회의 회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참 교회의 회중에서 제외되어야 할 자들이었다.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 곧 자유자들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며 이 서신이 증거하는 핵심적 진리이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 성경적 복음의 진수요 핵심이다. 복음은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소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의와 그 도덕적 완전이 죄인을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그에게 참된 평안과 기쁨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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