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자유자의 삶-사랑
1-12절,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는 자유의 대 선언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곧 율법의 정죄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것은 이미 로마서에서 살펴본 진리이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 8:32). 죄로부터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핵심이요 목표이다. 이것이 의요 구원이요 생명이다. 이 의, 이 구원, 이 생명을 받은 자는 율법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이 복음의 은혜와 자유 안에 굳게 서라고 강조한다. 본절을 전통 사본대로 다시 번역하면,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 그 자유 안에 굳게 서며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종의 멍에란 율법의 종으로서 짊어졌던 멍에를 가리킨다. 구약 시대 곧 율법 제도와 율법 체계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의 공포, 율법의 정죄, 율법의 형벌이라는 무거운 멍에 아래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그 멍에를 제거해주셨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 복음의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는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오늘도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 자인가? 여러분은 어디에 속한 자로서 지난 한 해를 사셨는가? 여러분은 생의 의미와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 살려고 하는가?
[2-4]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 교회는 지금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할례를 받게 함으로 율법 아래 머물게 하려는 잘못된 생각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할례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로 만족할 것인가? 율법 아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은혜 안에 거할 것인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인가? 육체를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성령을 따라 살 것인가? 바울은 이 둘 갈래 길에 서서 혼란스러워 하는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지 말고, 육체의 행위를 따라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지 말고, 오직 복음의 은혜 안에 거하며 성령을 따라 믿음으로 진행하라고 말씀한다.
‘율법 안에서’라는 원어는 ‘율법으로’라는 뜻이다. 할례를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는 같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할례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할례가 옛 언약의 표이기 때문이다. 옛 언약은 율법을 통해 맺어졌다. 율법의 요구 조건은 ‘하나님의 모든 법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영원한 죽음과 저주 아래 있음을 의미한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아래 속하여 율법을 다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얻겠다는 결심과 같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상관 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가 될 것이다.
[5, 6]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원문에는 5절과 6절 초두에 각각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보인다. ‘성령으로’라는 말은 ‘육체로’라는 말과 대조되고, ‘믿음을 좇아’라는 말은 ‘행위를 따라’라는 말과 대조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본다. ‘의의 소망’이란 ‘의에 근거한 소망’이라는 뜻일 것이다. 죄는 죽음과 지옥 형벌을 가져왔지만, 의는 영생과 천국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이 의의 소망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도 무할례도 중요치 않고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중요하다. ‘사랑으로써’라는 원어는 ‘사랑을 통해’ 혹은 ‘사랑으로’라는 뜻이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은 결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고,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복음 신앙이다. 이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7-9] 너희가 달음질을 잘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은 이후 신앙 생활을 잘했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잘하다가도 잘못된 생각에 미혹을 받을 수 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거짓 선생들 때문에 복음 진리를 순종하던 자리에서 순종치 않는 자리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 권면, 그 설득은 잘못된 것이었다. 세상에는 좋은 권면, 좋은 설득도 있지만, 이렇게 나쁜 권면, 나쁜 설득도 있다.
복음 진리와 반대되는 권면과 설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이단 사설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탄에게서 나온다. 하나님이 주시는 권면은 항상 성경적이다. 그것은 항상 복음 진리에 맞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권면과 설득을 성경 말씀으로 분별해야 한다.
잘못된 교훈은 ‘누룩’과 같다. 비록 그 오류가 작게 보일지라도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잘못된 교훈, 잘못된 말과 권면은 온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킨다. 말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누룩처럼 퍼진다. 그리하여 작은 오류가 점차 큰 오류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 사상을, 비록 그것이 작은 오류일지라도, 작게 여기지 말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비록 심각한 오류가 갈라디아 교회 안에 들어왔고 심각한 탈선이 시작되었지만, 바울은 사랑하는 교인들이 다른 마음, 다른 생각을 품지 아니할 줄 확신하고 있다. ‘다른 마음’은 복음 진리와 배치되는 생각, 즉 다른 교리적 사상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0:27). 갈라디아 교인들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라면, 즉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고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라면, 그들은 바울이 다시 강조하는 바른 복음 진리의 교훈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요동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11, 12]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할례를 전하지 않고 오직 바른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했더라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핍박 때문에 진리를 변질시키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진리에 관한 한, 바울은 비타협적이었다. 이만큼 이 문제는 중요했다. 율법 아래서의 할례와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은 함께 있을 수 없다. 복음의 은혜를 참으로 깨닫는 자라면 또한 할례의 무익함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과 마귀의 종들, 곡식과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는 분명히 구별된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 복음 신앙을 혼잡게 만들고 있었던 거짓 교사들은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끊어져야 할 자들이다.
결론적으로, 2절로 12절의 요점은, 할례를 받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할례는 사람을 율법 지킬 의무 아래 두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으려 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복음 진리에 반대된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하여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 의에 근거하여 우리는 영광스런 영생과 영광스런 천국을 소망한다. 그러므로 복음 진리에 반대되는 권면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할례냐, 그리스도냐? 율법이냐, 은혜냐? 행위로냐, 믿음으로냐? 육체를 따라서냐, 성령으로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오늘날도 우리는 바른 교훈만을 붙들고 바른 행위로 진행해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권면이 아닌 인간적 권면, 세상적 생각을 다 버려야 한다.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 해도 진리를 변질시키거나 오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바른 생각, 곧 성경적 교훈만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사상이다. 이것을 본문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표현했고 그 믿음을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했다. 여기에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다. 이 믿음에 굳게 서고, 이 소망을 굳게 가지고, 이 사랑으로 힘차게 진행하자.
13-15절, 자유의 선용(善用)
[13, 14]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 그것이 복음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을 말한다. 율법으로부터의 이 자유가 갈라디아서의 중심 진리이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자유자의 삶에 대하여 교훈한다. 그는 먼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교훈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유인으로서 주의해야 할 바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받아 누려야 하지만, 그 자유를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 복음 안에서 우리가 얻은 이 자유는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라고 주신 자유이다. 그것은 죄에 노예가 되었던 우리들, 참된 의와 선을 행하기에 무력하였던 우리들에게 이제 새 힘을 내라고 주신 자유이다. 그것은 일곱 번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나 새롭게 출발하라고 주신 자유이다. 그것은 연약성을 가진 우리가 낙심치 말고 불안해 하지 말고 요동치 말고 담대함과 평안 가운데 행하라고 주신 자유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결코 육체의 기회를 삼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하고 복된 자유를 죄 짓는 자유, 불순종하는 자유, 자기 뜻대로 맘대로 사는 자유로 오용해서는 안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도 말하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했다(롬 6:12, 13).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교훈한다. 이것이 자유자의 삶이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상대방이 주인이요 자기는 종인 것처럼 서로 섬기라는 뜻이다. 원문에는 14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요약하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22:37-40). 예수님의 새 계명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요 13:34). 바울은 이미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인 것을 언급하였다(갈 5:6).
본문은 사랑이 이웃을 섬기는 행위로 나타남을 증거한다. 주님의 비유에서, 이웃을 사랑했던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게 되었던 사람을 도왔고 섬겼다(눅 10:33-35). 예수께서도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0:28).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며(고전 13:5),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것이다(요 15:13).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바울 사도는 사랑의 섬김에 대해 교훈한 후에 그와 반대로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 것이다”는 경고의 말씀을 첨가한다. ‘서로 물고 먹는다’는 것은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온다. 미움은 마음의 살인과 같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서로를 죽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피차 멸망하는 길이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면 피차 멸망한다는 것은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국가에서도, 그리고 온 세계에서도 진리이다. 예수께서도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2:25). 또 그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52).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국가에서나 온 세계에서나 우리의 원수가 있다면 그것은 죄악의 세력과 그 배후의 악령이다. 우리는 죄악을 미워해야 하지만, 사람을 미워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어떤 악인이라도 불쌍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우리가 서로 헐뜯고 비난한다면 그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로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남용하는 것이다. 성도에게도 죄악성이 남아 있다. 성도도 때때로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이다. 성도가 그런 죄 가운데 머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고 그것을 역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므로 구원받은 우리가 죄 가운데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가 남을 계속 헐뜯고 비난한다면 그런 자는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말하기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했다(요일 3:6).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 곧 예수 믿는 자는 계속 범죄하고 있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음을 뜻하는 줄 안다.
또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했다(요일 3:9, 10).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 곧 중생한 자는 계속 죄를 짓고 있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의를 행하고 그 형제를 사랑하지만, 중생치 않은 자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바꾸어 말하면, 계속 죄를 짓고 있거나 죄 가운데 머물러 있고 의를 행치 않고 그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중생한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죄에 대한 형벌과 댓가는 반드시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고 했다(롬 2:6-8). 또 그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도 썼다(롬 8:13).
본문의 교훈은 명료하다. 갈라디아서는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율법과 그 저주와 형벌로부터의 자유를 밝히 증거하며 강조하였다. 그러나 본문이 증거하는 대로, 그 자유는 죄를 지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니다. 자유자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아서는 안된다. 이 자유는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라고 주신 자유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누가 서로 물고 먹으면, 만일 서로 헐뜯고 비난하면 피차 멸망할 것이다.
오늘 본문의 교훈은 가정에서, 교회에서, 국가에서, 그리고 온 세계에서 적용될 수 있는 진리이다. 자유자로 부름을 받은 우리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자.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실천하자. 부부의 관계가 참된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자. 서로 헐뜯고 비난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섬기자. 우리 교회는 이런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어려움을 당한 우리 국가도 이런 정신으로 나간다면 잘 될 것이다. 온 세계가 이런 정신이라면 세계는 평화로운 세계가 될 것이다. 악한 자들은 악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 참 정신을 알아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자.
16-18절, 성령을 좇아 행하라
사람이 죄에서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거듭나는 것도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요, 그 결과 죄인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도 하나님의 영께서 그 사람 속에 들어오셔서 행하시는 일이다. 성경은 이것을 성령의 인치심이라고 표현한다(엡 1:13). 뿐만 아니라, 사람이 죄에서 구원을 받은 후 죄를 이기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삶 곧 성화(聖化)의 과정도 성령께서 도우시며 인도하시는 일이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성화의 과정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첫째로,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좇아’라는 원어(프뉴마티)는 단순히 ‘성령으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에 의해’라는 말인데, 그것은 ‘성령을 좇아, 성령을 따라, 성령에 이끌리어, 성령의 도우심으로’라는 뜻일 것이다. ‘행하다’는 원어(페리파테오)는 ‘걷다(walk), 행동하다, 살다’는 뜻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화의 방법이다. 그리스도인의 성화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성실한 노력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할 수 있고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화는 나의 힘, 나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성화는 성도가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에서도 밝히 증거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6장 이하에서 성화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8장에서 성화가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이루어짐을 밝히 증거하였다. (한글 개역 성경은 거기에서 성령을 단순히 ‘영’이라고 번역함으로써 그 본문이 마치 인간의 영을 의미하는 것처럼 잘못되었다.) 로마서 8:4에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또 13, 14절에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사는 자, 곧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의를 행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구약 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구약 역사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성과 무능력을 증거하였다(렘 17:9; 13:23). 그러나 에스겔 36:24-28은, 하나님께서 장차 당신의 영을 인생들에게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당신의 법을 지키게 하시겠다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故土)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영=성령]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둘째로, 성도가 성령으로 행해야 할 이유는, 자신 속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립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구원받은 성도 속에도 이런 대립과 싸움이 있기 때문에, 만일 그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실패할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만일 성도가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행한다면, 그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다.
성도의 싸움은 단순히 영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성도의 싸움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과 성령의 싸움이다. 본문에 ‘육체’라는 원어(사르크스)는 단순히 ‘몸’(소마)을 가리키지 않는다. 로마서에서 ‘육신’이라고 번역된 이 말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 부패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의 영이나 육의 어느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육의 통일체로서의 인간 본성의 죄악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성도에게도 남아 있는 ‘옛사람’의 속성이다.
본문의 ‘성령’이라는 말이 원문에서 단순히 ‘영’(프뉴마)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이는 그것이 혹시 인간의 영을 가리키지 않는가 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런 생각은 명백히 잘못이다. 성경 그리스어 사전에 보면, 신약 성경에서 ‘영’이라는 말(프뉴마)은 111회나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고, 단지 49회만 인간의 영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갈라디아서에서도 여러 구절들에 성령이라는 말이 원문에서 단순히 ‘영’이라고만 나온다(3:2, 3, 5, 14; 4:29; 5:5, 16, 17, 18, 22, 25; 6:8). 두 구절만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3:3은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말씀했고, 또 4:29은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라고 말씀했다.
물론 인간의 본성 속에도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가 있다. 로마서 7장은 그것에 대해 잘 증거한다. 거기에 보면, 사람이 중생한 후에도 그 속에 죄의 원리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받은 진정한 ‘내’[자아]가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했다(17절). 진정한 나는 구원받은 후 성향이 새로워졌다. 전에는 무지와 부도덕 속에서 살았지만, 이제 오직 하나님 안에서 의롭고 선하게 살고자 한다.
성도 속에 남아 있는 죄악성을 바울은 ‘육신’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여전히 죄악되고 연약하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고 했다(롬 7:18). 그러나 성도 속에는 선을 행하기 원하는 또 한 원리가 있다. 그것을 바울은 ‘속 사람,’ ‘마음의 법,’ 혹은 ‘마음’(누스, 생각, mind)이라고 표현하였다(22, 23, 25절).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 속에도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 즉 육신과 마음이 있으나, 그것은 성화에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 사실일 뿐이다. 중생한 자의 새 마음, 새 성향만으로는 성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였다(24절).
그러나 로마서 8장에 넘어가 바울 사도는 구원받은 성도 속에는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계시며(9절), 성도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의와 선을 이룰 수 있음을 증거하였다(4, 13절).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이다(14절). 이러한 진리들은 오늘 갈라디아서 본문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스도인의 내적 싸움은 단순히 영과 육의 싸움이 아니고, 인간 본성의 타고난 부패성과 성령의 싸움이다. 그러나 그 싸움에서 성도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육신의 부패성을 극복해 나간다.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셋째로, 성도가 구원받은 자로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산다면, 그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것은 구원받은 후의 성도의 죄 문제에 대하여 말한다. ‘너희가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이라는 말씀은 구원받은 자를 표현한다. 로마서 8:14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구원받은 성도는 성령을 받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고 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씀은 구약의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구약의 제도 아래서는,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다. 율법의 요구는 한마디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것이었다. 구약 아래서 사람들은 율법의 그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죄책과 정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 줄 뿐, 죄 문제에 대한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율법에 암시된 메시야께서 오셔서 친히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죄인들을 위한 의(義)가 되셨다. 그것이 신약의 복음이다. 이제 성령께서 오셔서 죄인들로 하여금 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인도하신 바가 되면 그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이 의 안에 있는 것이다. 이 의가 갈라디아서가 강조하는 자유의 근거이다. 로마서 8:1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와 이 의에 근거한 성도의 자유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죄를 맘대로 지어도 된다는 뜻의 자유가 아니라고 갈라디아서 5:13에서도 말씀했다. 그러나 이 자유야말로 성도의 기쁨과 평강의 근거요 보장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후 때때로 실수하여 범죄한다 하여도 다시 진심으로 뉘우치며 씻음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의와 이 자유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율법 아래 있지 않은 것이다. 성도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므로, 성화의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과 같다.
본문을 다시 정리해 보면, 첫째로, 성도의 성화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이루어진다.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성화의 방법이다. 둘째로, 성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 속에 내적 싸움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영과 육의 싸움 정도가 아니고, 인간 본성의 타고난 부패성과 성령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성도는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육신의 부패성과 연약성을 극복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이를 위해 우리 속에 계신다.
셋째로, 성도가 진정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구원받은 자라면, 그는 율법 아래 있지 않다. 비록 때때로 실패와 실수가 있을지라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더 이상 그를 정죄(定罪)하거나 두렵게 하지 못한다. 성도는 연약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강을 잃지 않으며 새 힘을 얻어 점점 더 거룩하여진다.
여러분은 참으로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었는가? 여러분은 이제 성령으로, 성령을 좇아,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고 있는가?
19-21절, 육체의 일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구원받은 성도 속에 있는 두 가지 대립되는 소원은 ‘육체의 소원’과 ‘성령의 소원’이다. 하나는 죄를 향한 소원이고, 다른 하나는 의를 향한 소원이다. 성도는 구원받은 후에도 이 두 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다. 이 둘은 서로 구별하거나 분별하기 어렵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을 잘 알지 못했을 때는 더러 그 둘을 혼동할 수도 있었지만, 진리의 지식, 성경 지식이 더할수록, 그 둘은 명백히 구별된다. 사람의 타고난 죄악된 본성에서 나오는 행위들은 ‘현저하다.’ 그 행위들이 본성의 죄악성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너무 명백하고 분명하다.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육체의 일의 첫번째 부류는 음란이다. 전통 사본에는 ‘음행’ 앞에 ‘간음’이라는 말이 하나 더 있다. “간음과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 모두 다 성적으로 범하는 죄악들이다. 인간 세상의 많은 죄악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고 두드러진 죄악은 바로 이 음란이다. 음란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모든 종류의 육체적 관계를 가리킨다. 인간의 성(性)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은 부부관계에서만 사용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 규칙을 깨뜨리고 육신의 욕망이 이끄는대로 악을 범하고 있다. 그것이 음란의 악이다.
모든 죄가 다 그러하지만, 음란의 죄악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죄악이다. 특히,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을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매우 음란했었다. 그들의 음란은 동성애라는 변태적 행위로 나타났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에 그곳의 원주민들은 매우 음란했었다. 그들에게는 부모와 자식과 형제를 범하는 근친상간적인 음행이 있었고, 동성 간의 음행이 있었고, 심지어 짐승과의 음행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가증한 행위들을 인하여 그 땅의 사람들을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그들을 진멸하셨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매우 음란한 시대이다. 젊은 여자들이 자기 몸을 파는 매춘 행위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 오늘날 매스컴이 보도하는대로, 심지어 주부들이나 대학생들, 그리고 중고등학생들까지 아르바이트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그런 곳들이 없던 시대는 아마 없었겠지만, 고급 요정들이나 호텔이나 여관들은 음란한 일을 중계하고 그것들로 돈을 버는 재미를 보고 있다. 독한 술과 마약, 음란한 춤과 록 음악, 텔레비젼이나 음란 비디오, 음란 잡지, 음란 만화, 컴퓨터 통신을 통해 받아보는 음란 그림들, 음란한 컴퓨터 게임들이 이 시대의 음란한 풍조를 부추기고 있다.
성경은 이런 모든 음란 행위와 풍조를 정죄한다. 이런 죄 가운데 있는 자는 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멸망치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육신의 죄악성은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남아 있다. 성도도 이런 욕구와 충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행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거룩해야 한다.
음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한 이들은 부부의 관계를 귀히 여기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잠언 5:18, 19은 말하기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고 했다.
또 고린도전서 7장에는 이렇게 교훈했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2-5절).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음란에 빠지지 않는 최선의 길은 피하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은 남녀는 단 둘이 은밀히 있는 것을 피해야 한다. 성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그림이나 글을 피해야 한다. 성적 자극을 줄 수 있는 노출이 심한 옷 입는 것을 피해야 한다. 술 마시는 것을 피해야 한다. 춤이나 록 음악을 피해야 한다. 음란의 충동은 강한 것이기 때문에 피하지 않고 이긴다는 것은 어렵다.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20, 21] 우상 숭배와 술수와.
육체의 일의 두번째 부류는 우상숭배이다. 사실 이것이 더 근원적인 죄악이지만, 음란보다 더 드러나는 것 같지는 않다. ‘우상’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불교나 유교 문화의 전통에는 우상숭배의 요소들이 있다. 불교의 본래의 정신은 그렇지 않았지만, 오늘날 불교는 다분히 부처의 상 앞에서 피곤하게 엎드려 절하며 소원을 아뢰고 복을 빈다. 그러나 그들이 비는 대상이 복을 줄 수 있는 참 신이 아니므로 그 행위는 우상숭배이다.
유교에서 유래되었을 제사와 차례의 조상숭배 행위는 부모 공경과는 실제로 관계가 없다. 그 행위를 통해 부모님이 공경함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부모님은 이미 세상에 계시지 않다. 효도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해야 하는 것이지 돌아가신 후에는 할 수 없다. 장례식 때 고인의 사진이나 시신 앞에 절하는 것도 비슷하다. 절은 인격자 앞에 하는 것이 옳다.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죽은 자 앞에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욱이 제사와 절에 어떤 종교적 의미가 가미되어 있다면 그것은 명백히 우상숭배적이다. 제사와 절에 종교적 의미가 없는가? 만일 거기에 종교적 의미가 없다면, 왜 그렇게 무의미한 행위에 중요성을 두는가? 왜 정한 날에 정한 방식으로 제사나 차례를 드리려 하는 것인가? 부모님이나 죽은 분이 실제로 받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을 쏟아 제삿상을 차리고 절하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날 것처럼 생각하는가? 그것은 제사와 절이 조상숭배의 정신을 가진 것임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조상에게 하는 제사의 전통은 후손들이 조상신에게 화를 받지 않고 복을 받고자 하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우리 나라의 미신 혹은 샤머니즘도 잡신 숭배이므로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우리 나라의 전통 문화나 민속 문화 속에는 이런 요소들이 많다. 결혼이나 취직이나 승진을 앞둔 사람들은 점이나 궁합 혹은 사주팔자를 본다. 어떤 사람들은 장난 삼아 그런 일을 해 보기도 한다. 심지어 교인들, 집사들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행한다. 이런 것들은 다 미신적 행위들이며 우상숭배적이다.
기독교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천주교는 이방 종교의 우상숭배적 요소들을 들여와 교묘하게 기독교화하였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중보자’니 ‘보혜사’니 ‘하늘의 여왕’이니 하는 호칭을 돌리고 그에게 기도하며 그를 경모하며 의지하는 것에서 우리는 천주교가 분명히 우상숭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이었던 한 여인에 불과하고 그 이상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오늘날 은사주의 교인들 가운데는 기독교를 미신화하는 일들도 없지 않다. 기도 권사니, 기도 장로니 하여 사람의 마음을 꿰뚤어 본다 하며 그의 미래의 일을 예언한다고 한다. 이것은 무당에게 가서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성경에 명백히 기록하셨으므로 오늘 우리는 그런 신비주의자들에게 가서 물을 것이 아니고 성경을 읽고 묵상해야 한다.
오늘날의 우상들은 이런 것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가치 있게 여기고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모든 종류의 것들이 다 우상이다.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인간을 숭배하며 인간 승리를 찬양한다. 사람들은 과학을 하나님 대신 믿고 숭배한다.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쾌락을 삶의 목표로 두고 산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상숭배이다.
사람들은 참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식하고 하나님 아닌 헛된 것에 대해서는 유식하다. 성도들 속에도, 참으로 삶의 목표가 되기에 합당하신 하나님보다 헛된 세상의 것들을 좋아하고 거기에서 위로를 찾으려 하는 죄악성, 연약성이 남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든 종류의 헛된 우상숭배를 청산하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한 분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고 그를 섬기며 그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자신만이 우리의 유일한 기쁨과 위로와 소망이 되기를 원하신다.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육체의 일의 세번째 부류는 싸움이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열 다섯 가지 죄악들 가운데 여덟 가지나 거기에 속하는 중요한 악이다. 전통 사본에는 이 부류의 마지막 악인 ‘투기와’라는 말 다음에 ‘살인과’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이 악들은 서로 통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다 이웃을 미워하는 데서 나오는 것들이다. 주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이 여러 가지의 악들에 반대되는 덕이다.
물론 이 싸움은 정당한 싸움, 선한 싸움, 진리의 싸움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었다. 미가야 선지자는 400여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야 했었다. 신약 시대에 바울 사도는 많은 사람들의 버림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해 싸워야 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한다. 의와 진리를 위한 싸움은 우리가 치루어야 할 정당하고 선한 싸움이다.
그러나 그런 싸움이 아니고 육신의 죄악성에서 나오는 싸움이 있다.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에 생긴 싸움이 있다. 자기가 잘못해 놓고도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하는 싸움이 있다. 자기 명예를 위한 싸움, 세상 권세를 위한 싸움, 이권(利權)을 위한 싸움이 있다. 이것들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적 싸움들이다. 이런 자들은 이웃을 향해 악한 분노를 품고 그를 해하기 위해 파당을 만든다. 파당과 참된 교제는 다르다. 우리는 성도들 간의 참된 교제는 나누어야 하지만, 육신의 죄악성에서 나오는 파당은 피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모든 싸움을 다 내어버려야 한다.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육체의 일의 마지막 부류는 술취함이다. 술취함이 육신의 죄악으로 정죄된 것은 사람을 방탕에 빠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술과 마약은 한가지이다. 그것은 사람에게서 바른 정신, 건전한 정신을 빼앗아 간다. 술취함이나 마약 복용은 사람을 비현실적인 환각 상태에 빠뜨린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책임 있는 인격자가 되지 못하게 한다.
성경 시대에 술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고 생각되지만, 술에 대한 몇 가지의 점들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완전 금주(禁酒)가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첫째로, 성경 시대의 술은 알코올 농도가 매우 낮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알코올 농도가 매우 높은 술들이 많이 개발되어 있다. 그러므로 술을 조금만 마셔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아졌다.
둘째로, 술취함은 죄로 명백히 정죄되어 있다. 술을 즐기는 사람이 과연 술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셋째로, 술이 가져오는 폐해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술은 몸에 해롭다. 술은 위와 내장과 혈액순환기에 크게 해롭다고 한다. 또 심장병, 간경화, 중추신경마비 등 여러 가지 질병을 일으키는 주요 요인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몸을 해롭게 해서는 안된다.
또한 술로 인한 경제적 낭비가 크다. 술과 담배 값을 절약한다면 어려운 가정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될 집안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국가적으로도 그러하다. 1986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이 1년간 마신 술값은 1조 3천 7백억원이 넘었다. 10년이 넘은 오늘날에는 얼마나 더 늘어났겠는가? 국가적으로도 금주 운동이 필요하다.
더욱이, 술은 여러 가지 사고의 원인이 된다. 살인과 강간 등의 범죄들은 술과 더불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음주 운전으로 인한 교통 사고도 현대의 골치 아픈 사회악의 하나이다. 그것은 자기 목숨만 앗아갈 뿐만 아니라, 무고한 이웃들을 큰 불행에 빠뜨리는 무서운 죄악이다. 또 술취하여 아내를 구타하고 자녀를 구타함으로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고 파탄케 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이, 술의 폐해가 크므로, 잠언 23:31은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고 교훈하였다. 술취함은 방탕한 것이므로, 우리는 술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의롭고 선한 삶을 힘있게 살아가자.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천국에 못들어가면 지옥밖에 갈 곳이 어디인가? 그러므로 이런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은 다 회개해야 한다. 그래야 구원을 받는다. 이런 죄를 회개치 않으면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구원받은 신자는 이런 일을 행하고 있을 수 없다. 일곱 번 넘어졌을지라도 또 다시 일어나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성도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이런 육신의 죄악된 일들로부터 떠나야만 한다.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을지라도, 진리를 안 후부터는 새 삶을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천국 백성처럼 살다가 가자.
22-26절, 성령의 열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의 행위가 있다. 하나는 타고난 본성의 죄악성을 따라 행하는 행위요, 다른 하나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행위이다. 전자를 ‘육체의 일’이라고 부르고(19절), 후자를 ‘성령의 열매’라고 부른다. 이 둘은 명확히 구별된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열매’라는 원어(호 카르포스)는 복수명사로 ‘열매들’이 아니고 단수명사로 ‘열매’이다. 이것은 본문에 언급된 아홉 가지의 열매가 연합된 한 열매의 여러 면인 것을 암시한다. 이 아홉 가지 열매들은 분리된 것들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바른 신앙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한 열매의 요소들이다.
성령의 열매는 무엇보다 ‘사랑’이다. 사랑을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그것이 율법의 완성으로서 최고의 덕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아름다운 덕이다. 사랑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이며, 사랑의 세계는 가장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세계이다. 미래의 천국은 한마디로 사랑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사랑만 충만할 것이다. 거기에는 불신과 미움이 전혀 없을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다 포함한다. 성령께서는 먼저 우리로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감동하시고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시는 첫번째 명령, 첫번째 요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라’는 것이다(신 6:5).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의무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 명령을 실행하고 이 요구를 충족시키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감동하시고 도우신다. 사람 사랑은 먼저 가족 사랑으로 나타난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사랑한다. 가족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다. 사람 사랑은 또한 믿는 교우들 간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요 13:34). 우리는 참된 사랑을 교회 안에서부터 실천해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사랑을 실천하게 하신다. 사람 사랑은 또한 이웃 사랑과,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일, 곧 성령의 열매이다.
성령의 열매는 또한 ‘희락’ 곧 기쁨이다. 이것은 사랑과 더불어 참으로 좋은 복이다. 세상에는 언제나 근심거리들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뻐하기보다는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근심, 걱정을 가지고 짜증스러워하는 일이 많다. 그것은 인간의 본래의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은 기쁨이 있는 상태다. 인간의 본래의 상태는 그러했음에 틀림 없다. 슬픔과 걱정은 저주 받은 세상의 모습이다. 천국은 기쁨이 있는 세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 . .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롬 14:1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는 생활을 원하신다(살전 5:16)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기쁨을 주신다.
성령의 열매는 또한 ‘화평’ 혹은 평화이다. 평화는 개인적으로 불안과 근심이 없는 평안한 상태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된 평안을 누린다. 평화는 또한 인간 관계에서의 화평, 화목을 포함한다. 서로 다투고 원수를 맺는 것은 육신의 죄악된 일이다(20절).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면 싸울 것이 없고 원수를 맺을 것이 없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 속에 참된 평안을 주시고 다른 이들과 화평하게 하신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성령의 열매는 또한 ‘오래 참음’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미래의 천국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상 소망과 더불어 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소망한다면 오래 참아야 한다. 무슨 일이나 조급해서는 안된다. 쉽게 분노하거나 쉽게 낙망해서는 안된다. 모든 일이 때가 있다. 사람의 마음의 변화는 시간이 필요하다. 환경의 변화도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의 실현도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 특히, 고난 중에서 낙망치 말고 하나님을 믿고 바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결함이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오래 참는 자가 되게 하신다.
성령의 열매는 또한 ‘자비’이다. ‘자비’라는 원어(크레스토테스)는 ‘선함, 인자함, 친절함’ 등의 뜻을 가진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하여 선하시고 인자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자주 사용되었다(롬 2:4; 11:22; 엡 2:7). 하나님과 같이, 우리도 다른 이들 곧 연약한 이들, 죄인들, 악한 자들을 향해 선하고 인자한 마음, 오래 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이 이런 마음이다.
성령의 열매는 또한 ‘양선(良善)’이다. 양선이란 선한 마음을 가리킨다. 악은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에게 물질적 손해를 끼치거나 정신적 피해를 주는 것이다. 남을 그릇되이 비난하는 말, 그래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은 악한 말이다. 그러나 양선은 그와 정반대이다. 그것은 남을 위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마음이다. 선한 자의 말은 건설적이고 덕을 세우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이다.
성령의 열매는 또한 ‘충성’ 혹은 믿음이다. ‘충성’이라는 원어(피스티스)는 ‘믿음’이라는 바로 그 말이다. 믿음은 사실상 성령의 열매이다. 믿음 충만은 성령의 열매이다. 신실함, 충성됨이나 믿을 만함도 그러하다. 성령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요 믿음 충만한 사람이다. 그는 신실하고 충성되며 믿을 만하다. 사람에게 있어서 ‘신임성’(credit)은 매우 중요한 재산이다.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은 인격의 큰 결함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믿을 만하지 못한 자는 쓸모 없는 인격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감동하시고 우리를 도우셔서 믿음의 인격, 충성된 인격, 믿을 만한 인격을 만드신다.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열매는 또한 ‘온유’이다. ‘온유’라는 원어(프라오테스)는 ‘부드러움, 겸비함’ 등의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품성이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시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이나 거친 마음은 그것과 반대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부드럽게 하셔서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와 같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8:3).
성령의 열매는 또한 ‘절제’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술에 적용된다. 술에 관하여는, 완전 금주(禁酒)가 좋다. 기타 육신적 쾌락의 절제도 필요하다. 정당한 욕구나 즐거움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정당한 것이라도 과도한 쾌락 추구 혹은 쾌락 탐닉은 나쁘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군인이 적의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잠 16:32).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원어는 직역하면 “이같은 것을 율법이 거스리지 못하느니라”이다. 성령의 열매는 율법에 의지하여 행하는 율법적 행위가 아니고 성령에 의지하여 행하는 복음적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율법과 거스리는 무엇이 아니고, 율법에 일치되고 조화되는 무엇이다. 성령의 열매는 실상 율법의 성취이다. 우리는 율법적 행위에 의해 율법을 성취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함으로 율법을 이룬다. 그러므로 로마서 8:4에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곧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구원받은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받은 자들이며 그와 연합된 자들이며 그에게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육체’는 타고난 죄악된 본성을 가리킨다. ‘정과 욕심’은 죄악된 감정과 욕심을 말한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죄악성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 곧 우리의 옛 사람이 그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또한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代贖)을 믿었을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체험하였다.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하여 새 생명을 얻었다는 뜻일 것이다. ‘성령으로 행할지니’라는 말씀은 ‘성령으로 행하자’라고 번역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행하다’는 원어(스토이케오)는 ‘줄 서서 나아가다, (어떤 규칙에 의해) 행동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슨 규칙으로 행하는 것인가? ‘성령으로’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곧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말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 곧 성령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었을진대, 이제 성령으로, 성경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 죄악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헛된 영광은 세상 영광이다. 그것은 세상의 부귀, 권세, 명예, 쾌락 등의 것들이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다. 단지 얼마 동안만 누리는 헛된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들 때문에 음란하고 서로 싸우고 술취한다. 또 우상숭배도 그런 헛된 것들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사람이 참으로 헛된 것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추구한다면 우상숭배의 헛됨도 벌써 알았을 것이다.
세상의 헛된 영광, 돈, 권세, 명예, 육신의 쾌락 등은 영원하신 영광의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소유하자.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는 여유를 가지자. 무엇이든지 죄 되는 것이 아닌 일은 열심히 하지만, 그것을 의지하거나 그것에서 기쁨과 위로를 찾지 말자. 오직 하나님께 구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으로 만족하자.
육신의 일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데서 생긴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 성령으로 산 자의 삶의 방식은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길이다. 그것은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인자함, 선함, 믿음과 충성, 온유, 절제의 아름답고 존귀한 열매를 맺는 길이다. 성도의 가치는 많은 지식이나 사회적 신분이나 물질의 풍요 등에 있지 않고 바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격과 삶에 있다. 우리는 헛된 세상 영광을 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성령으로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참된 성도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