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복음 안에 있는 자유
1-10절, 우리가 가진 자유
[1] 십사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십사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 일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사건을 가리킨 것 같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크게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였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이 변론한 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등의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일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고 또 디도를 데리고 갔다. 바나바는, 사도행전에 보면, 처음에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자요(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요(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요(11:25, 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자이었다(13:2, 3).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본문 3절)과 그레데에 남아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딛 1:5) 외에는 성경에서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사도행전 15장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논쟁 때문이었지만,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 때 그 논쟁의 와중에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직접 지시하셨다는 뜻일 것이다. 사도들은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받은 자들이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그가 그 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예루살렘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 특히 예수님의 본래의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같은지 다른지를 대조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울의 복음 전도의 일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만일 바울이 잘못된 내용을 전파하고 있었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복음, 우리가 전파하는 복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유일한 그 참된 복음임을 확인하고 확신해야 할 것이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올라간 것은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유대인들에게 주신 언약의 규례이었다. 그것은 양피 혹은 포피 즉 남자의 성기 끝을 덮은 겉가죽(foreskin)을 잘라내는 의식이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만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표시이었다. 만일 율법대로라면 디도도 당연히 할례를 받아야 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서, 신약 곧 새 언약 아래서 모든 사람은 할례와 관계없이 구주 예수를 믿음으로써 죄사함과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할례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가 쓸데없다는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려 했던 것 같다. 특히 문제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그 논쟁의 시점에 바울은 디도를 데려감으로써 행동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려 했던 것 같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바울은 이제 그가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던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다.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그들은 교회에 당당히, 공개적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 전법이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마치 비밀 첩보원들과 같이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킨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속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다. 그러나 진실한 자들은 그들을 분별할 것이다.
저희가 들어온 목적은 바울과 성도들의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함이었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바울의 표현은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드러낸다.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와 의무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 의식들, 제사 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율법의 완전한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그리고 죄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기 때문에 우리가 얻고 누리는 자유이다.
물론 우리가 가진 자유가 구약의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의를 행하게 하는 자유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 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도덕적 율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義) 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서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거짓 형제들은 가만히 들어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 거짓 형제들은 기독교회 속에 들어온 유대교인들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이었다. 그들은 주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었다.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그 거짓 형제들을 알아차렸고 그들에게 한 순간도 복종치 않았다. 잠언 25:26은 말씀하기를,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했다. 진리를 가진 자는 비진리를 가진 자 앞에 굴복할 필요도 없고 굴복해서도 안된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 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 뿐만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 있게 하기를 원하였다.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유명한 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비록 그들이 귀한 분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신앙은 오직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만 사람에게 신앙을 주실 수 있고 그 신앙을 자라게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보다도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다 형제들이며 한 식구들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저 유명한 자들은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로 주신 바울의 복음이 충족했음을 증거하는 말씀이다. 주께서는 본래의 사도들에게 깨닫게 하셨던 그 복음 진리, 그 동일한 진리를 바울에게 계시하여 주셨던 것이다. 바울의 복음과 열 한 사도들의 복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제출한 그 복음의 내용은 바로 열 한 사도들이 깨닫고 전파하였던 그 복음이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감으로써 바울의 복음에 어떤 수정이나 보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의 복음과 열 한 사도들의 복음이 동일하다는 것이 증거되었을 뿐이었다.
[7, 8]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8절은 문맥상 삽입적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어떤 영어 성경들은 8절을 괄호 안에 두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할례자들 곧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고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은 그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기둥들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 이 교제의 악수는 바울의 복음과 베드로의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다른 말로, 이 교제의 악수는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이 주신 참된 진리라는 사실이 증거된 것이었다. 이렇게 확인된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이 세상에 없으며, 오늘도 그 복음이 그리고 그 복음만이 모든 인생들에게 구원과 생명과 소망이 된다.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다면 단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1:29에 보면, 글라우디오 때에 큰 흉년이 들어 유대에 사는 성도들에게 구제 헌금을 보내는 일이 있었다. 사도행전 15장 때에도 유대에는 가난한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점에 대하여, 바울은 이전부터 자신도 구제의 일을 힘써 행하여 왔다고 증거한다.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실히 믿는 자들의 표이다(고후 9:13). 믿고 구원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구원받은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오늘 본문의 요점은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이 베드로가 증거한 복음의 내용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제의 악수’로 상징되었다. 오늘날 불신앙적 신학자들은 성경 안에 다양한 신학들이 있고 그 신학들 간에는 때때로 상호 갈등과 심지어 상호 모순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불신앙적인, 악한 생각이다. 바울의 신학은 결코 베드로의 신학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복음 진리, 그들이 전파하고 가르쳤던 복음 진리는 동일하였다.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 사도들이 동일하게 밝히 증거했고 성경에 명료하게 계시된 이 복음만이 오늘도 세상에서 모든 인생에게 구원과 생명과 소망이 된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굳게 붙잡았는가?
추가적으로, 오늘 본문은 그 복음이 자유의 복음임을 증거한다. 그것은 헬라인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한 바울의 행동에서 증거되었다.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또 그것을 ‘복음 진리’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본서신에서 밝히 증거되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주신 참된 자유, 곧 죄로부터의 자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참으로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가?
11-21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게바는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대표적 인물인 베드로를 가리킨다. 안디옥은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를 최초로 시작했던 교회가 있었던 수리아 지방의 도시를 가리킨 것 같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책망할 일이 있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의 삶의 한 목표는 책망 받을 일이 없는 인격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며 영적 성숙의 일이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단번에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인격적 성숙은 예수 믿기 전에 그가 살아온 상태와 관계가 많은 것 같고 매우 더디게 보인다. 그래서 예수는 진실히 믿는 것 같은데도 인격적 흠과 결함이 있는 자들이 많다. 대개의 경우는 자신이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알고 있지만, 종종 자기의 부족을 모르는 자들도 있다. 이것은 더 큰 인격적 문제이다. 자신의 부족을 모르는 자는 가장 불쌍한 인격자이다.
예를 들어, 인격적 결함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말의 실수이다. 말은 인격의 주요한 표현 수단이며 인격의 온전함은 말의 온전함으로 나타난다. 말을 안하면 실수도 없을텐데 괜히 말을 해서 실수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말에 대해 많이 가르쳤는데, 그것은 우리가 말의 온전함으로 인격의 성숙함을 나타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잠언 10:19, 20,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언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언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언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언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베드로의 실수는 물론 말의 실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행동의 실수이었다. 3년간이나 주께 직접 배웠고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복음 진리를 밝히 이해하고 고난을 무릅쓰고 증거했던 베드로는 인격적으로 상당히 성숙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실수가 있었다. 땅 위에 온전한 인격자는 없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부족이 있다. 지상에서 완전 성화란 없다. 성도의 온전한 성숙이 심히 더딘 것이 현실이다.
베드로에게 책망할 일이 있었을 때 바울은 그의 앞에서 그를 책망하였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 앞에서는 아부하고 그의 뒤에서는 그를 비난하는 나쁜 사람도 세상에는 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사람 앞에서는 바른 충고를 아끼지 않고 그의 뒤에서는 그를 존중하고 함부로 그를 비난치 않는 것이 좋은 태도이다. 책망, 그것도 그 사람 앞에서의 책망 곧 면책은 어려운 일이지만 참으로 귀한 행동이다. 잠언 27:5, 6,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은 구약 율법과 유대인의 관례법에 젖어 있었던 자들이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관례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사도행전 10:28에 보면,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을 때 말하기를,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말했다.
이것은 물론 구약 율법에 의거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이방인들과 함께 먹는 일이나 상거래를 하는 일을 금한 곳이 없다.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 유대인의 관례법은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규정한 구약 율법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근거한 것이었다. 신명기 7:3, 4, “또 그들[가나안 족속들, 이방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하튼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이 왔을 때 그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갔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베드로에게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공격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생각한다면 그의 두려워함을 이해할 만할 것이다. 베드로가 떠나 물러간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약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칭찬 받기는 좋아하지만 비난 받기는 싫어하고, 싸움과 갈등보다는 평안과 안정을 좋아한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의 행위는 외식의 잘못, 이중적 행동의 잘못이었다. 이방인들과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이 정당한 일이었다면, 그는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했어야 했다. 반대로, 만일 그것이 그 유대인들 앞에서 할 수 없을 정도로 옳지 않은 일이었다면, 그는 그들이 없었을 때에도 하지 않았어야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을 원하시지만, 연약한 인간은 때때로 이중적인 외식의 죄에 빠진다.
그런데 베드로의 연약함은 그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그가 물러가자 함께 먹던 유대인들도 같이 물러갔다. 거기에 함께 있었던 바나바까지도 그러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도자의 역할이 큼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만일 베드로가 그 때 외식하지 않고 담대히 처신하였었다면 다른 이들도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연약하여 외식하므로 다른 이들도 외식에 빠졌다. 신앙 생활에는 바른 지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처럼 기독교계가 혼란한 시대에는 바른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이와 같이, 지교회 안에서도 목사와 장로의 역할, 전도사의 역할, 교사와 권찰의 역할, 각 회 회장의 역할이 크고 중요하다. 그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바로 서면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도 하지만, 그들이 바로 서지 못하면 해를 끼친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교회를 건설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부덕(不德)한 것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말과 행동으로 남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시험을 주는 것을 말한다. 교회의 일꾼들은 믿음에 바로 서서 덕을 세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베드로의 외식은 복음 진리대로 바로 행하지 않은 실수이었다. 복음 진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이 있을 수 없고, 예수 믿는 자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이다.
사도행전 15:7-11,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이방 죄인’이라는 표현은 이방인들이 본래 죄인들이었음을 보인다. 이방인들은 본래 참 하나님 지식이 없이 우상들을 섬기며 살았고 도덕적으로도 여러 가지 더러운 죄악들 가운데 파묻혀 살았었다. 우리 나라만 보더라도 ‘탐관오리(貪官汚吏)’라는 말이 있다. 관리들은 탐욕적이고 부패하였고 그 가운데서 가난하고 비천한 상민들의 고통과 눈물과 서러움이 얼마나 컸었는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말은 어떠한가? 아내들은 구타와 학대를 당하여도 하소연 할 데가 없었고 며느리들은 종들처럼 가정 일을 돌보아야 하지 않았던가? 이방 사회에 참으로 진실과 공의와 정직, 그리고 사랑과 양선이 지배한 적이 있었던가? 오늘날 사회엔 더욱 불경건과 불의와 불법, 음탕과 거짓이 가득하지 않은가?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본절은 본서신에서 가장 중요하게 복음의 핵심을 말한다. 복음의 핵심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람의 모든 죄악된 처지 곧 죄인의 신분과 죄성이 제거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인간 본래의 영광스러운 의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거기에 대한 복음의 내용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서 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본절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 . .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 . .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을 말한다. 신명기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할지니라.” 그러나 세상에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는 자는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 참된 의인은 하나도 없다. 로마서 3:11,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본절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고 말씀한다. 그것은 요한복음 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의 원리와 같다.
로마서 3:21, 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 없이’라는 뜻이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과 다른 방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 곧 구약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에서 암시된 바이었다. 또한 이 방법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방법이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죄로부터의 구원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왜 예수님만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사람이 행위로 의인이 되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은혜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역사 초기로부터 우리의 죄짐을 담당할 속죄제물을 계시하셨다. 그 제물은 우리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함으로써 우리의 죄를 제거하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할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였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구원의 이치이다. 이것이 로마서 3:24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는 말씀의 뜻이다.
말씀을 정리하자. 여러분은 복음 진리를 바로 아는가? 그렇다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제 복음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고 남녀노소,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으며 모든 사람은 다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참으로 인정하며, 이중적 외식에 떨어지지 말자.
또한, 우리는 복음 진리를 바로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의 새로운 동기를 발견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수치와 참혹한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죽어주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구원 받은 우리는 이제 그의 공로에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는 양으로 악을 버리고 의와 선과 거룩과 진실의 삶을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 때문에 거룩하고 선한 삶, 주를 위한 헌신의 삶을 산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여러분 중에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거나 믿지 못한 분은 없는가? 복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어떤 죄인도 참으로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인의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는다. 그것은 곧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아직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지 못한 분이 있다면 이 시간 여러분의 죄를 고백하고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으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의(義)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행한 것,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킨 것, 하나님의 표준에 완전히 도달한 것,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완전히 만족한 것을 의미한다. 의는 무흠하고 무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순종, 완전한 충성, 곧 완전이다.
‘의롭게 한다’는 원어(디카이오오)는 ‘의롭게 만든다’는 말이 아니고 ‘의롭다고 여긴다,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구속(救贖) 안에서, 그가 이루신 의(義)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만 믿고 그리스도의 구속과 의만 믿고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줄 알고 얻은 줄 믿었다가,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면, 사람이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이라는 뜻이다.
‘죄를 짓게 하는 자’라는 원어(하말티아스 디카이오노스)는 직역하면 ‘죄의 일꾼’이라는 말인데 우리 말 성경은 그 뜻을 살려 잘 번역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오’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일꾼’ 곧 죄를 짓게 하는 자일 수 없다.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앞 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일 수 없다고 말한 이유를 보인다. 다시 말해,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내가 헐었던 것’이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 완전해진다는 생각을 가리킨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었다. 그것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시 세우면’이라는 말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하면’이라는 뜻이 된다. 만일 바울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는 죄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그는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고 그 주장이 틀린 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원문에는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또 나온다. 그것은 앞 절에서 자기가 범법한 자가 된다고 말한 이유를 보인다. 다시 번역하면, “이는 내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음이니라.” ‘하나님을 향해,’ ‘율법을 향해’라는 말은 원문에서 관계성을 나타낸다(데오, 노모--관계의 여격).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과의 관계에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라는 말씀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기 위하여’라는 뜻이 된다. 또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씀은 ‘율법의 정죄, 곧 율법의 계속된 정죄, 누적된 정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다’는 뜻이다. 언제,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죽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뭇박혔다’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죄짐을 짊어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셈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이며 곧 우리의 죽음이라는 말이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본래의 나, 자연인인 나, 율법 아래 속했던 나, 곧 옛 사람 나를 가리킨다. ‘산 것’이라는 말은 ‘사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한 그 나는 죄로 인하여 정죄되었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 그러므로 이로써 그 나는 이미 끝났다. 그것은 다시 살아날 수도 없고 다시 살아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정죄되었던 나, 곧 옛 사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말씀은 무엇인가? ‘사신 것’이라는 말도 ‘사시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하다. 어떤 이들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이 말씀을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했다. 1930년대에 한국의 불건전한 신비주의자 황국주씨는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 . . . 전부가 예수화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예수의 모습을 흉내낸다고 머리를 기르고 수염도 길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신비주의자로 판명되고 정죄되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씀을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도 개개인의 인격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자신의 인격과 그리스도의 인격을 혼동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씀은 그러므로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가 아니고 정신적으로,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옛 사람 나는 이미 죽었고 나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이것은 마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내 죽음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부활이 된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다른 말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물론, 믿음은 참된 회개를 동반한다.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함을 얻는다. 또한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고(요 1:12) 영생을 얻는다(요 3:16).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성도에게 예수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아무 것도 없으며 아무 것도 아니며 이미 성도가 아니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인을 구원하심을 가리킨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소식이다. 바울은 이 은혜의 복음을 전파했고 지금 그것을 다시 선언하고 변증하고 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원문에는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의롭게 되는 것’이라는 원어(디카이오쉬네)는 단순히 ‘의’라는 말이다. 바울이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기 때문이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고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폐하여질 것이라는 뜻이다.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게 혹은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나 주장을 분명하게 부정하였다. 그는 자기 자신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증거하였다. 또 그는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셨다고 말함으로써 의 혹은 도덕적 완전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올 수 없음을 명백히 하였다.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대속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의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는 의이다. 그것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이다. 믿음이 없다면 성도는 아무 것도 아니며 이미 성도도 아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 복음의 도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우리의 구원의 확신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과 내세와 천국을 확신케 하는 근거이며 우리의 담대함의 근거가 된다. 이것은 죄와 율법의 멍에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며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기쁨과 평강의 원천이다. 이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히 찬송하며 감사할 것이다. 여러분 개개인의 심령에 이런 확신과 담력, 이런 자유와 기쁨과 평강, 이런 찬송과 감사가 넘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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