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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 1장

by 은총가득 2020. 5. 26.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갈라디아서는 로마서와 더불어 하나님의 복음을 가장 밝히 증거한 서신이다. 로마서가 복음에 대한 차분한 논리적 해설인 반면, 갈라디아서는 변증적이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들에는 율법주의 이단이 침투해 들어와 있었다. 그 이단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율법 곧 구약 율법을 다 지켜야 하며 특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울 사도는 이 이단에 대항하여 이 서신에서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며 변증하였다.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말할 수 있다. 1-4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본질에 대해, 5-6장은 자유자로서의 삶에 대해 가르친다. 율법주의 이단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서 이 자유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 서신에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려야 함과 그것이 곧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누리는 자유임을 밝히 증거하였다.

 

 

1장: 복음의 유일성

본장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과(1, 2절), 자기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복음이 유일한 것과(6-9절), 그가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로 된 것임을(11-20절) 증거하였다.

 

1-3절, 문안 인사

1-3절은 문안 인사의 내용이다. 이 문안 인사말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에 대해 언급하였다.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사도’는 주의 제자들 중에 특별한 사람들을 지칭한다. 누가복음 6:13에 보면, 예수께서는 공생애 초기에 열 두 제자들을 택하여 ‘사도’라고 칭하셨다. 마가복음 3:14, 15에 보면,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병들을 고치며--전통사본)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하였다. 사도들은 이와 같이 주의 직접적 선택을 받았고, 주님과 함께 있어서 그의 모든 말씀을 듣고 그의 행위들을 목격하였고,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받았던 자들이었다(고후 12:12).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말한다. 즉 그의 사도직은 인간적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사람이 세우고 사람이 보낸 사도가 아니었다. 그의 사도직은 사람이 부여한 사도직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의 제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행전 9장이 증거하는 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 그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오려고 멀리 다메섹에 가까이 가고 있었을 때 부활하신 예수께서 빛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를 변화시키셨고 그를 택하여 주의 이름을 전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사도행전 9:15에 보면, 주께서는 바울을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표현하였다.

 

또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은 복음진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믿을 만한 자가 되지 못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부활할 것을 3차례 이상이나 예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는 우리가 신뢰할 만한 선생과 구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의 처음 제자들은 다 그의 부활을 친히 본 목격자들이었다. 사도행전 1:3에 보면,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신 후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 또 주께서는 그들에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행 1:8).

 

사도행전 1:21, 22에 보면,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120명 가량의 제자들이 모였을 때, 베드로는 일어나 예수를 배반하고 판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의 사도를 보선하기를 제안하며 그 자격과 임무를 말하기를,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2:32에 보면, 베드로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의 제자들의 방언하는 소리를 듣고 모여든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고 하였다. 사도행전 3:15에 보면, 그가 요한과 더불어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한 후 그 일로 인해 모인 유대인들에게도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고 말하였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었다.

 

누가 그를 다시 살리셨는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살리셨다. 죽음이 끝이었다면 사랑의 아버지께서 외아들을 희생시키지 않으셨을 것이다. 사랑의 아버지치고 자기 아들을 죽고말게 할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얼마 동안의 고난을 당하게 하셨다. 또 예수님 자신도 자원함으로 죽음의 자리에로 나아가셨다. 요한복음 10:17, 18,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진실한 증언들에 근거하여 그의 부활을 확인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것을 확신하자.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요긴한 내용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거짓 중의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로 기독교는 확실한 구원의 도리, 영생의 도리임이 확증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영생의 소망을 확증하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 그 이전에는 그런 자가 없었다. 참된 의미에서 영광스런 부활로 부활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고전 15:2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들을 확신하자.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다. 그것은 바울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고 하셨다(요 16:15).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적 일치성을 잘 보인다. 바울의 사도직의 신적 기원은 그가 증거하는 말씀과 그가 하는 사역의 신적 보증이다. 그는 단순히 인간 바울이 아니고 주께서 세우시고 보내시는 주의 종이요 일군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증거하는 진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본절은 두어 가지 사실을 보인다. 우선, 본절은 하나님의 진리가 몇몇 개인들의 진리가 아니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공동적 진리요 주의 백성이 다함께 고백하고 증거하고 감사해야 할 진리임을 보인다. 디도서 1:4에 보면, ‘같은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원문에서 ‘공통적 믿음’(코이네 피스티스)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은 모든 성도의 공통적 믿음이다. 유다서 1:3에는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말도 원문에서 ‘공통적 구원’(코이네 소테리아)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모든 성도가 공통적으로 받은 구원이다. 에베소서 4:5에는 “믿음도 하나이요”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 믿음, 그 공통적 믿음의 내용을 규명하고 그 바른 내용과 다른 이단을 분별해야 한다.

또, 본절은 바울 사도의 겸손한 처신을 보인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과 일군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셨었다. 마태복음 12:50에 보면, 그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28:10에 보면, 부활하신 주께서는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호칭은 예수님을 본받은 바울의 겸손을 나타낸다. 그의 사도직은 권위 있는 직분이었지만 그는 높은 마음으로 성도들을 대하지 않았고 겸손히 처신하였다. 고린도후서 1:24에서, 그는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겸손한 처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르는 일이다. 주께서는 친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20:26, 27), 또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다( 마 23:11, 12).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참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온다. 무엇이 참된 은혜인가? 그것은 단순히 마음에 감동을 주거나 기쁨이나 눈물을 일으키는 어떤 감정이 아니다. 그런 감정은 소설이나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참된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죄사함의 은혜이다.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호의와 사랑, 그것이 진정한 은혜이다. 그 은혜로 죄인이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 그 죄사함의 사랑을 더욱 깨닫고 알고 믿고 누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제들, 싸움, 갈등, 불안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의 참 안정과 평안을 가리킨다. 이것은 죄문제의 해결을 통해 오는 평안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과 싸움, 갈등과 불안의 근본 원인은 사람의 죄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가지며 우리의 심령도 죄사함으로 말미암은 안정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의 평강은 마음의 평강뿐 아니라 건강과 환경의 평강을 대개 동반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구약 욥기가 그것에 대해 대답을 준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훈련의 의미를 가지는 고난을 때때로 허락하신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의로운 생활을 힘쓰는 성도들에게도 때때로 고난이 닥친다. 그러나 그 훈련을 통해 성도는 믿음과 거룩에 있어서 자란다. 다른 한 예로서, 주께서 바울에게 주셨던 육체의 가시도 그로 하여금 교만치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었다(고후 12:7).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성도의 심령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다.

 

4, 5절, 구원의 복음과 송영

원문엔 이 구절이 문안의 말에 연결되어 3절에 언급된 예수 그리스도를 수식하고 있다.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본절은 구원의 복음을 간략히 증거하고 있다.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며, 그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며, 그 근원 혹은 원천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이다.

첫째로,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라는 말씀에 ‘위하여’라는 원어(페리 혹은 휘페르)는 ‘관계하여’ 또는 ‘때문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는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와 관련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이것이 복음이며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디아,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고린도전서 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휘페르, ‘때문에, 대신하여’) 죽으시고.”

성경에 계시된 원리에 의하면, 인간의 죄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한 조처가 있을 뿐이다. 첫째는 죄를 범한 죄인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의 처벌을 받는 것이다. 그 경우엔 구원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둘째는 죄인을 대신하여 누가 형벌을 받아주는 것이다. 여기에 죄인의 구원의 여지가 있다. 죄의 형벌은 죽음인데, 그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아줄 속죄제물이 있을 때 그 형벌이 죄인에게서 면제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옛날부터 하나님께서 짐승제사의 제도를 통하여 보이신 대속의 이치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처분이 있다. 죄는 죄이기 때문에, 죄인에게 죄의 형벌을 내리지 않는 것은 불의한 일일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벌을 주지 않으신다면 그는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선택된 죄인들의 죄와 그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이로써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이 증거되었다.

로마서 3:25, 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이런 이치 때문에 예수께서는 잡히시기 전날밤 자신의 죽음을 예견(豫見)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리는 기도를 아버지께 올리셨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방법이셨다. 여기에 십자가의 필요성이 있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방법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의로운 방법을 통해 선택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뜻하셨다.

 

오늘 본문에서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말씀의 원문은 ‘자신을 드리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자신을 드리셨다는 것이 복음이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마태복음 20:28,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여기에 인생의 죄문제의 해결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하셨다는 것이 복음이다. 예수는 인류의 유일한 구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예수밖에 없고 예수로 충분하다. 예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치 않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만족이 되신다. 골로새서 3:11,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참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죄인들은 그 분만을 의지하고 붙잡아야 하며, 성도들은 그 분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었다. ‘이 악한 세상’--이것이 문제이다. 이 세상과 거기에 사는 인생들의 문제는 그 죄악된 신분, 그들이 가진 죄악성에 있다. 악의 정체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뜻, 곧 그의 선하고 의로운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극히 의로우시고 선하신 분이시다. 인류의 모든 도덕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왔다.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뜻을 거역하고 있다. 죄악은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에 배치되며 하나님의 창조물답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 ‘이 악한 세대로부터의 구원’의 긴급한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진노의 마지막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 있다. 사실, 죄는 인간의 죽음과 모든 불행의 근본적 원인이다. 그러나 현실의 불행 정도가 아니고 더 무서운 최종적 심판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다.

 

베드로후서 3:6, 7,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이 구원의 목적은 세상과 교회의 구별을 보인다. 세상은 불경건하고 죄악되며 장차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로 가득하지만, 교회는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은 자들이 모여 교제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다. 세상과 교회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려고 자신을 드리셨다.

 

우리 모두는 과연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는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불경건과 부도덕한 죄악들로부터 깨끗함을 얻었는가? 우리는 참으로 경건하고 선한 삶을 힘쓰는 구원받은 자들인가? 우리는 참으로 세상에서 구별된 교회가 되었는가?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려 우리를 구원하신 그 근원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뜻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뜻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에베소서 1:4,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인격적 신이시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시고 감정이 있으시고 어떤 일을 행하시는 인격적 신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온 세상을 창조하실 것을 계획하셨고 우리의 구원도 계획하셨다. 세상의 창조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된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도 그의 계획대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지 않다.

이사야 46:9-11,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 . .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

 

사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 모든 질문과 의문의 해답이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1의 말씀에 모든 철학적, 종교적, 도덕적 질문의 해답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실로 우주의 수수께끼와 신비, 아무도 풀지 못했고 또 앞으로도 풀지 못할 수수께끼와 신비의 해답이시다.

 

하나님께서는 그 신비의 단면을 욥기에서 이런 질문들로 표현하셨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38:4), “네가 바다 근원에 들어갔었느냐? . . .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느냐?”(38:16, 18), “네가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38:22),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 . . .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38:33, 36), “산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39:1).

 

우리는 신비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신비의 해답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나님이 그 해답이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선언하신 여호와 하나님, 자존(自存)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생과 우주의 모든 질문의 해답이시다. 그 분 안에서만 인생들에게 생각과 마음의 참된 안정과 안식이 있다. 그는 우리의 모든 질문과 문제의 대답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진 사건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 전부터 예비된 구주이셨다. 우리들의 이름은 창세 전부터 하나님의 생각 속에 들어 있었다. 우리들의 출생과 전생애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 우리의 구원이 그의 기쁘신 뜻 가운데 있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멸망케 되었던 자들이었으나, 하나님께서 크신 긍휼과 자비로 우리를 구원하기로 뜻하셨다. 그는 자기의 영광스런 형상을 상실했던 우리를 구원하여 다시금 지식 있고 거룩하고 의로운 자기의 형상으로 회복시키기를 기뻐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고 만세 전에 계획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된 일이었다.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저에게’라는 말(관계대명사 호)은 원문에서 바로 앞절 끝에 나오는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를 가리킨다고 본다.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짧은 한 구절로 언급했던 바울 사도는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성취하셨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께 영원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오늘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시대의 성도들도 다 바울과 함께 구원의 하나님께 영원한 영광을 돌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찬송의 동기요 찬송의 내용이다.

 

오늘 여러분은 다 이 구원의 복음을 깨닫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으셨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이 악한 세상에서 구원을 받으셨는가? 오늘 여러분 속에는 바울 사도의 속에 있었던 이 신앙고백과 찬송이 있으신가? 오늘 여러분은 인생과 우주의 해답이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게 되셨는가? 부디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나누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은혜를 허락하시기를 기원한다.

 

 

6-10절, 다른 복음은 없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셨다’는 말씀은 참 복음의 내용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다. 이미 앞에 4절에서 증거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우리 죄와 관련하여, 우리 죄 때문에] 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것이 복음이다.

 

‘속히 떠나’라는 말씀은 인간의 연약, 교회의 연약을 보인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모습과 비슷하다. 신명기 9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목이 곧고, 늘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을 속히 떠났었다(신 9:7, 12, 13, 16, 24). 이러한 인간의 부패성과 연약성은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도 있다(롬 7:18-25).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오늘 우리도 진리의 하나님을 속히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은혜의 하나님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다. ‘다른 복음’이라는 원어(헤테론 유앙겔리온)는 ‘내용이 다른 복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내용과 다른 무엇을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1장에서도 ‘다른 복음’에 대해 언급한다. 고린도후서 11: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갈라디아 교회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좇았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 주께서 피흘려 사신 교회이건만, 이 교회 속에 다른 복음이 용납된 것이다. 역사상 기독교회 안에는 이렇게 다른 복음들이 적지 않게 들어왔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오늘날 천주교회, 각종 이단 종파들,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 등은 다른 복음들이다. 그것들이 기독교회 속에 용납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오늘도 그것이 현실이다.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라는 원어(호 우크 에스틴 알로)는 직역하면 ‘그것은 다른 하나의 복음이 아니니’이다.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개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복음은 유일한 내용이다. 그것은 다른 내용이 될 수 없다. 아무도 복음의 내용을 바꾸거나 무엇을 더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복음으로 주신 내용은 고정되어 있고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라는 말씀은 다른 복음의 근원이 사람들임을 보인다. 사람들이 교회를 요란케 한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배면엔 사탄의 역사(役事)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어지럽히는 것은 사탄의 장난이다. 참된 교회를 부패시키는 것은 사탄의 짓이다. 그래서 요한일서 4:1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말씀했다.

 

어떤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다. 여기에 다른 복음의 목적이 있다. 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속죄의 복음, 은혜의 복음인데, 어떤 사람들이 그 복음을 변경시키려고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 복음의 변경은 복음의 변질과 왜곡이며 결국 참 복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는 복음의 유일성, 고정성(固定性)을 다시 강조한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도 바울이라도 변경할 수 없고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변경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하물며 오늘날 그 누가 감히 복음의 내용을 변경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럴 수 없다.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이라는 말씀에서 ‘전한’이라는 원어(유엥겔리사메다)는 과거 시제로서 복음이 단번에 전해졌음을 나타낸다. 참 복음은 사도들이 이미 전한 복음, 단번에 전해진 복음이다. 그 내용은 전파되었고 선언되었다. 그러므로 복음의 내용은 고정되고 확정되어 있다. 그것은 결코 시대마다 변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면 그 복음은 지금 어디에서 확인되며 확증될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 특히 신약 성경에서 확인되며 확증될 수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지금 신구약 성경에 계시되어 있고 제시되어 있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복음은 사도적 복음인 동시에 성경적 복음이다. 우리의 복음적 신앙은 사도적 신앙인 동시에 성경적 신앙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가!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요긴한 일인지 모른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는 말씀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종말을 증거한다. 다른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인위적으로 변경시키고 가감(加減)하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을 멸망시키는 일이요 그 근원은 사탄이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좌절시키고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사탄의 일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라는 표현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정죄가 새로운 것, 처음하는 것이 아님을 보인다. 이 정죄는 이전에 이미 했던 것이고 또다시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너희의 받은 것’이라는 말씀에서 ‘받은’이라는 원어(파렐라베테)도 과거 시제로서 참 복음이 단번에 주어졌음을 보인다. 참 복음은 초대 교회가 이미 받은 것이요 갈라디아 교회도 이미 받은 것이었다. 기독교 복음은 옛부터 전해온 것, 믿어온 것이다. 그것은 진정으로 전통적인 것, 옛 것이다. 참된 신앙은 옛부터 내려오는 옛 신앙이다. 복음 신앙은 새 것이 아니다. 이전에 없다가 누가 비로소 주창한 것이어서는 안된다.

 

물론 옛 것, 전통적인 것이 다 옳다는 말이 아니다. 잘못된 전통도 있고 순수하지 못하고 불순해진 옛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복음은 옛 것이다.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것, 섞인 것들을 제거, 제외시키고 남는 순수한 옛 것이다. 본래 사도들에게 계시되고 사도들이 전파하고 선언한 그 옛 복음은 고정되고 확정된 것이어서 아무도 거기에 무엇을 더하거나 거기에서 무엇을 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역사적 신앙, 역사적 기독교’라고 부르며 ‘전통적, 정통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 사도에게 받은 그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변질되고 있었다. 교인들은 지도자들, 인도자들, 전도자들, 목사들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양들은 순진하여 인도자들을 그냥 따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인도자들의 책임은 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지도자들의 잘못과 실수를 결코 묵과하지 않고 다 심판하실 것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본절은 하나님의 종들의 바른 태도를 보인다. 하나님의 종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종’이 무엇인가? 주인에게 복종하는 자가 아닌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은 마땅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감히 인간의 생각으로 변경해서도 안되고 그렇게 변경하는 자들을 용납해서도 안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들은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고 일해야 하고 사람 편에서 해서는 안된다.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참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으로서 사도들이 단번에 전했고 초대 교회들이 단번에 받았던 복음이다. 그것은 사도들이나 천사라도 변경할 수 없는 고정된 복음, 확정된 복음, 유일한 복음이다. 그것이 사도적 신앙, 옛 신앙이다. 그것이 오늘날 성경에 계시되고 확정되어 있는 복음이다.

 

그런데 교회들 안에는 역사상 많은 다른 복음들이 들어왔었다. 다른 복음들의 근원은 사람들이며 그 배면엔 사탄의 역사가 있다. 다른 복음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경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변경시키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러므로, 본문이 증거하고 강조하는 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형편은 인간의 연약성을 보인다. 어떻게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후에 그 하나님을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을 수 있는가?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역사상 그리고 오늘날도 기독교회들 속에 배교와 타협의 일들이 많은가? 인간은 참으로 약하며 교회도 그러하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고 현실적 교회들은 흠과 점이 많다.

그러나 이 서신이 증거하듯이 현실적 교회들 안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인식되고 지적되고 선언되어야 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필요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은 자들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자들이 교회 안에 공존(共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다. 성경은 형제간에 서로 사랑해야 함을 명하지만, 또한 범죄자들과 오류 가운데 있는 자들과 교제를 단절해야 할 것도 명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교회들 안에는 항상 세 가지 입장이 있어 왔다. 첫째는, 교회 안에 다른 복음들이 들어올 때 그것들을 따라가는 입장 곧 배교적 입장이 있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그런 자들이 있었다. 교회 역사상 천주교회라는 거대한 조직체는 이런 입장에서 오래토록 진행해오고 있다. 오늘날도 기독교의 이름을 가진 여러 가지 이단 종파들이 있고, 특히 장로교, 감리교 등 역사적 교파들 속에 들어온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 있다. 자유주의는 무서운 배교적 사상, 이단적 사상이다.

 

둘째는, 다른 복음을 따르지는 않아도 그것을 따라가는 자들을 날카롭게 지적하거나 책망하거나 그들과 분리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침묵하고 그것을 묵인하고 용납하는 입장, 곧 타협적 입장이 있다. 이런 입장을 가진 자들은 항상 진리 대신에 사랑을, 순수성 대신에 평화와 일치를 강조한다. 이런 자들은 진리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이며 영적으로 이미 병든 자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이런 타협적 입장이 가능한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목사들과 교회들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신복음주의’라고 부른다.

 

셋째는, 다른 복음들의 이단성과 그것들을 전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을 인식하고 그것들을 비판하고 배격하고 그들과 싸우고 그들과 교제치 않고 분리하는 입장, 곧 분리적 입장이 있다. 기독교회에 역사상 배교의 역사(役事)들도 많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신실한 자들도 있었다. 마치 엘리야 시대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의 성도들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악과 분리된 신실한 성도들을 남겨두셨다. 우리는 이런 입장을 ‘근본주의’라고 부른다.

 

물론 근본주의는 초교파적 운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리적으로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적 장로교 신앙이 성경에 계시된 유일한 복음에 대한 바른 해석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장로교적 근본주의’ 혹은 ‘근본주의적 장로교회’를 추구한다.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배교와 분리된 진실한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오늘날의 타협적인 입장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가르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믿고 그 복음과 배치되는 그 어떤 다른 복음도 정죄하고 그것과 싸워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하나님 앞에 성실하자!

 

 

11-24절, 바울의 복음의 유래

[11,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사람의 생각은 완전하지 못하고 사람의 권위는 절대적이지 못하다. 기독교가 불교나 유교 같은 다른 이방 종교들처럼 사람의 명상과 깨달음, 그리고 양심과 이성적, 도덕적 판단에서 나온 정도의 종교라면, 그것은 유일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가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 기독교라면, 그것은 다른 이방 종교들과 다르며 모든 사람들이 거기에 복종해야 할 절대적 도리가 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갈라디아 교회에게 그리고 다른 여러 교회들에게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며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증거하였다. 이 말씀에서 바울은 사람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신 것이 사실이지만, 그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그 이상이시다. 그는 사람이시지만, 또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지신 신적 존재이시다. 그는 요한복음이 증거하는 대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다(요 1:1).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셨다(요 8:58).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은, 그의 복음이 하나님의 권위와 보증을 가짐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사도직의 독립성, 정당성, 그리고 신적 권위성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이 복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되고 기록된 이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연구하고 믿고 전해야 할 것이다.

 

[13, 14]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간증한다. 그것은 무지한 열심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했던 과거이었다. 종교적 열심은 다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이 바른 지식에서 나오지 못할 때 그것은 오히려 유익보다 해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섬김에 있어서는 단순한 열심보다 바른 지식을 가진 열심이 필요하다.

 

예수 믿기 전에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다. 그가 간략히 증거한 바와 같이, 그는 이전에 유대교인으로서 그의 동년배들보다 더욱 열심으로 믿었다. 그는 교회의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그를 치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옷을 지키는 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스데반의 죽음 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사울은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며 교회를 파괴했던 인물이었다.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는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이웃 나라의 도시인 다메섹의 여러 회당들에 갈 공문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만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저를 둘러 비추었다. 그가 땅에 엎드러지자 이런 소리가 그에게 들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거기에서 그는 거꾸러졌고 마침내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주권자 하나님은 핍박자 사울을 불러 바울이 되게 하셨다. 이 부르심은 바울의 어떤 선행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의 은혜의 부르심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뿌리를 둔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셨다’고 증거하였다. 우리의 생명이 모태에서 시작되었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시려고 구별하셨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전이다. 에베소서 1:4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통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그를 일꾼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는 성도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도로 부르심을 입고 택함을 입은 것이었다. 그는 그가 받은 사명이 ‘이방인 선교’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구원받은 즉시 그의 열심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환되었다. 그의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기 원하는 마음의 열심이 끓어올랐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원하는 마음을 주시며 사용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소원을 갖게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그 때 그 일을 위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 ‘혈육’은 하나님과 대조하여 사람, 곧 제한성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또한 그는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도 가지 않았다. 인간적으로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는 그를 부르신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아라비아를 택하였을 것이다. 아라비아는 사막과 광야의 땅을 가리킨 것 같다. 그는 거기에서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의 진리들을 묵상하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조용한 기도의 시간을 자주 가지셨었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광야, 빈들]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마태복음 14: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조용한 시간은 가장 귀한 시간이다. 고요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주께 기도하는 시간이야말로 성도의 특권이다. 거기에 성도의 기쁨과 행복이 있다.

 

[18, 19] 그 후 삼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그로부터 삼년이 지난 후이었다. 그 사실은 그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이 사도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증거한다. 그가 삼년 만에 게바[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도 저와 함께 단지 15일간 머물었을 뿐이다. 게다가 거기서 그는 베드로 외에 단지 주의 형제[동생] 야고보만을 보았을 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었다. 여기 언급한 주의 동생은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최초의 총회를 사회했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이라는 표현은 야고보가 사도들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바울 사도는 자신의 말과 기록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님을 증거한다. 거짓 증거는 제9계명을 범하는 큰 죄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것은 생명과 같이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진실을 알아 주는 것도 중요하다. 성경은 진실한 증거의 책이다. 요한복음 끝에 보면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고 말씀했다(요 21:24). 사람의 진실한 증거를 믿을 수 없다면, 바울의 이 말도 성경도 믿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한 증거의 말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21, 22]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길리기아는 바울의 출생지인 다소가 있는 지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라는 표현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받아 그와 영적으로 연합되었음을 나타낸다. 바울이 회심한 지 3년이 지났고 또 예루살렘에 올라가 짧은 기간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나고 교제하였으나, 유대의 교회들은 아직도 그를 얼굴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바울의 사도로서의 소명과 그의 복음 사역은 이만큼 독립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23, 24]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하시는 기이한 일이 있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으며 그의 능력도 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교회를 핍박하던 인물을 불러 구원시켜 그가 핍박하던 그 이름 예수를 전파하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종으로 만드신 것이야말로 그의 놀라운 은혜를 증거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역사상 하나님은 종종 그런 비슷한 일들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형들이 팔아버린 요셉을 통하여 형들을 구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 하나님은 동족을 구원하려는 자기의 선한 뜻이 꺾이어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여 야망 없이 지내던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삼으셨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많은 고난을 받아 쫓겨다니던 다윗을 들어 약속대로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독생자 예수를 삼일 만에 부활케 하사 세상의 구주로 삼으셨다.

 

오늘 본문을 다시 정리해 보자. 오늘 본문의 요점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고 진실이요 사실이다. 그가 전한 복음의 직접 계시성은 그 복음의 신적 권위와 보증을 증거하며, 나아가서 바울의 사도직의 독립성과 정당성, 그리고 그것의 신적 권위와 보증을 증거한다.

 

바울의 전한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로 되었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나 배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본문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되었다.

첫째, 그는 회심 직후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고 사도들에게 올라가지도 않았다.

둘째,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

셋째, 그는 3년이 지난 후에야 베드로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넷째, 그는 그 때에도 단지 15일간 예루살렘에 머물었을 뿐이다.

다섯째, 그는 그 때에도 거기서 베드로와 주의 동생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다.

여섯째, 이 모든 말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다.

일곱째, 그의 회심 후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유대의 교회들은 그의 얼굴을 잘 알지도 못했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는 바울의 전한 복음이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복음이며 또 바울이 주의 참된 사도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 곧 오늘 신약성경에 기록된, 특히 바울의 서신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기록된 내용을 연구하고 배우고 깨닫고 받고 그것을 보수해야 한다.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이 없다.

 

이 복음과 배치되는 다른 복음들은 경계하고 멀리해야 한다. 바로 이 복음이 그리고 이 복음 만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과 영생을 줄 수 있는 복음이다.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구원과 영생이 있으나, 이 복음을 거절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형벌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바울의 복음, 이 속죄의 복음, 이 은혜의 복음을 감사히 받고 굳게 믿자.< 가져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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