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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고린도전, 후서 연구

by 은총가득 2020. 5. 19.

      

          고린도전, 후서연구

 

  Ⅰ. 고린도전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고린도전서속에 나타나 있는 자료가 바울에게서 온 자료이건 아니건 간에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저자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널리 인정되어 왔다. 더욱이 본서는 고등비평학자들에게도 가장 논란이 적은 책중의 하나로 인정받을 만큼 확실한 정경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볼때 바울 저작설에 대해서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내적 증거로는 본서의 내용가운데 바울이 저자라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1:1-3,12-17; 3:4,6,22; 16:21) 그리고 본 서신의 문체와 언어,사상등이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일치한다. 또한 고린도 교회가 본 서신을 바울의 편지로 받아들여 본존해 온 사실도 바울 저작설에 대한 강한 입증이 된다. 그리고 본서에 언급된 사건들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고린도 전도 여행기가 일치한다.
 한편 외적증거로는 로마의 클레멘트는 고린도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본서를 축복받은 사도바울의 글이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폴리갑의 빌립보인엑 보내는 서신을 비롯해 이레니우스의 이단 반박론,터툴리안의 이단 반박론,익나티우스의 서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저서등에서도 본서의 저자가 사도바울임을 증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무라토리 단편과 마르시온경에서도 본서를 각각 바울 서신의 첫부분과 갈라디아서 뒤에 배치하여 바울이 그 저자임을 밝히고 있다.

 

 

   2) 수신자

 사도바울은 본 서신의 서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있기를 원하노라"(1:1-3)는 인사말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인사말을 볼때 본서의 수신자는 바울이 손수 개척했던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주축으로 하여 그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 들였던 모든 성도들임을 알수 있다. 뿐만 아니라 본 서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대상으로 그 당시의 성도에게만 한정된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성도들까지 그 수신자로 포함한다.

 

 

   3) 기록연대 및 장소
 우리는 이 서신의 기록연대를 이 서신의 내용과 관련하여 추정할수 있다. 이 서신은 바울이 오랫동안 에베소에 체류하던 마지막 무렵에 에베소에서 기록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마게도냐를 방문할 예정이며,그 후에 고린도에 갈 계획이지만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무를 것이라고 고린도교회에 말하고 있다(16:5-8) 이 점과 관련하여 행19:20; 20:1,2의 언급과 일치하는 16:19절을 보면 이 서신은 A.D56년 곧 바울이 고린도를 처음 방문한지 5년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 증거를 보면,먼저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에베소에서 썼다고 말하고 있다.(고전16:8,9,19) 둘째로 바울은 A.D51년 가을에 고린도를 처음 떠난후 몇년동안에 걸쳐서 이 편지를 썼다. 왜냐하면 이 편지는 아볼로가 고린도에 체류한후,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에베소에서 마게도냐로 보내고 디모데를 고린도로 보낸후에 씌여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진전되어가고 그들의 소식이 바울에게 전해지기 까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걸렸다.


 이 편지를 고린도교회로 전한 사람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고린도전서16:17에 의하면, 이 편지의 전달자들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인듯하다. 그들은 고린도에서부터 바울에게로 와서 바울과 함께 지내었다. 고린도전서 16:18절에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 세 사람에게 존경을 표하라고 말한점으로 볼때 그들이 고린도로 다시 돌아갔다고 결론짓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 세사람 편에 고린도전서를 고린도교회로 보냈다고 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4) 신학적의의 및 가치

 몇가지 점에 있어서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매우 특별한 관계를 띠고 있다.그는 이 교회를 세웠으며,동시에 이 교회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 하였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을 근심하게 했었다. 바울은 이교회를 매우 지혜롭게 처리해야 했으며, 따라서 바울은 이일을 위하여 오래 참고 견뎌야 했다. 그리고 고린도교회는 때때로 바울에게 깊은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교회가 날로 확장되며, 주위에 영향력을 미치기를 소망하였다. 따라서 이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은 특별히 강했다. 그래서 이 서신은 그의 개인적인 성품을 잘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이 서신의 특별한 관심은 분명하게 이교와 투쟁하는 기독교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방사회속에 설립된 교회의 실천적인 문제들과 기독교 사회속에 세워진 교회의 실천적인 문제들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고린도전후서응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고린도전서에는 몇가지 신학적인 사실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예배드리는 교회의 공통적 신앙규범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상 생활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확실한 이유를 제시해주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육체의 부활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시키고 있다. 또한 11장에서는 주의 만찬의 교리를 효과적인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으며,동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지한 마음으로 주의 만찬에 참여할라고 충고해 주고 있다.
 바울은 5장과 6장에서 그 교회내의 근친 상간 행위와 간음 행위를 엄한 말로 비난 하였고,모든 성적인 부도덕한 행위를 나무랐다. 그리스도인이 결혼을 해야 할것인지,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또한 그리스도인이 결혼한 상태에서나 결혼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실제적인 지침을 말하고 있다. 6장에서는 믿는 성도가 다른 성도를 세상법정에 송사하는 것과 같은 곤란한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그리스도인답게 중재할 것을 제안하였다. 8장과10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형제에게 행해야 하는 책임과 대조해가며,성도의 자유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교회론의 분야로서 교회에서의 바른 예배 행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은사와 교회를 위해 그러한 은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12장부터 14장까지 자세하게 상술해 주고 있다.

 

 

         2. 역사적 배경

 

    1) 일반 역사적 자료 및 고고학적 자료를 통한 배경
 고린도의 역사적 배경을 살피면서 먼저 일반적인 역사적 자료를 통한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것 같다. 먼저 고대의 고린도시는 북동쪽의 아티카와 남쪽의 헬라땅 펠로폰네소스 사이에 있는 지협에 위치해 있었다. 고린도시를 두고 동쪽으로 8Km정도 떨러져 에게해가 있으며,서쪽으로는 이오니아해가 있다. 고린도의 동편항구 겐그레아는 살로니카 만에 접해 있었고 서편은 고린도 만에 접한 레게온 항구가 있었다. 고린도는 이처럼 바다가 인접해 있었고, 북동쪽으로 72Km밖에 떨러지지 않는 가까운 지점에 아덴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전략적인 상업중심지와 군사 요충지로서의 역활을 담당했다. 고린도 시는 아프로디테 신전을 모시고 있는 높이 540m나 되는 높은 암석 요새인 아크로 고린도의 북쪽 가파른 경사지 아래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고린도는 소아시아,수리아 베니게,애굽에서, 온 배들을 비롯하여,이달리야,시실리,그리고 서버나에서 온 배까지도 드나 들었다. 고린도는 "바다의 교량"이라고 불리우기도 했고,또한 "펜로폰네스의 문"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고린도를 부유하고,모든 것이 풍부한 도시로 생각했었다.


 B.C 3000년 후반기경 청동기 시대에 고린도를 비롯한 전헬라 지역에 헬라인의 선조로 생각되어지는 이주민들이 칩입해왔다. 그때 부터 고린도에는 새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이후의 모습은 잘 알수 없으나,고린도는 트로이 전쟁시대 호머가 그 도시를 부유한 고린도 라고 묘사할 정도로 대단한 번영을 이루었던것 같다. 철기시대동안 고린도는 영토도 확장되고 부도 증가 되었다.B.C800년경 고린도는 경제적 중심지와 군사적 중심지로서 상당한 지위를 획득 하였다. 헬라도시 국가들 사이의 세력 다툼 속에서도 또한 마게도냐의 필립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하에 전헬라가 종속되는 와중에서도 고린도의 지역적 중요성은 더욱 빛났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후 헬라가 마게도냐의 지배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던 차에 로마가 개입하게 되었고, 고린도는 B.C146년에 루기오 무미오가 이끄는 로마인들에 의해 멸망 되었다. 그후 B.C46년에 쥴리어스 시이져에 의해 재건되어 콜로니아 라우스 줄리아 고린투스 라고 불리우게 되었다.시이져는 고린도에 퇴역한 로마 군인들과 자유민을 이주 시켰다. 아구스도 통치 이후 시대로 고린도는 로마식 건축 양식을 비롯한 로마식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되었으며,고린도는 로마가 통치하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정치적 중심지로서 역활을 담당하는 동안 고린도는 또다시 번영을 이루었다. 고린도는 해상 무역 및 발달된 예술과 산업을 통해서 거대한 수입을 얻었다. 고린도의 도기와 고린도산 놋쇄는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포세이돈 신전에서 열린 이스드미안 경기의식은 헬라식 생활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바울은 아마도 A.D50  가을 즉 지식이 고로로 발달한 아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직후에 중요하기는 하지만 도덕적으로 문ㄹ한한 이 고린도시를 방문했던것 같다.사도바울이 A.D 50년에 고린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로마총독 갈리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사도행전18:12절과 A.D52년 1월과 8월 사이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델피에 있는 글라우디오 황제의 비문에 새겨진 아가야 지방의 총독 갈리오에 대한 기록을 봄으로서 확증할수 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서 추측할수 있듯이 고린도 교회내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유하였다. 그런가 하면 상인방 벽돌이 읽을수 있을 정도로 히브리인의 회당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은 고린도에 회당이 있었다는 것을 증거한다. 시장의 한가운데는 심판대 즉 재판석이 있었다. 그리고 아폴로 신전을 포함하여 오늘날에도 그 유적지를 볼수 있는 많은 신전과 사당외에 시의 북쪽과 서쪽에 두개의 극장이 세워져 있었다. A.D10세기 경까지 베마의 페허 위에 한 교회가 존재했었으나,베마의 상부구조에는 그 당시 벌써 무너져 있었다. 그러나 시장 동편에 위치한 쥴리안 바실리카에서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이 명문에는 성바울의 교회 라는 문자가 새겨져 아마도 베마의 페허위에 세워졌던 교회에서 나온듯 하다.
  
   2) 신약시대의 고린도
 신약시대에 고린도는 아가야 라는 로마행정구역의 수도였으며,그 지역 총독의 거주지였다. 사실상 바울 시대에 고린도는 그리이스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이 도시는 B.C146년 뭄비우스 집정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소수의 신전들과 기둥들만이 남았다. 그때오 부터 1세기가 지난후에 항구와 군사기지로서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한 쥴이어스 시이져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이탈리아인들을 거주하게 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자유민 이었다. 이 도시는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리고 고린도시는 매우 자유 분방하고 복합적이며, 신분이나 형식같은 것을 그다지 중요시 하지 않는 비교적 민주주의적인 사회였을 것이다. 이런것은 본 서신에서도 볼수 있다. 즉 고린도 교회에 발생한 분파 및 분쟁, 부도덕한 범죄 행위,은사의 오용등은 바로 이러한 고린도인들의 성격이나 사회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린도는 무역항이었다.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고린도의 또 하나의 고유한 특성은 고린도의 귀족들,지배계급들은,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부유한 사람들, 즉 상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옛날의 명예로운 혈통이 가져다주는 권위의식이나 훈련된 지성, 혹은 예술적 재능 같은 것이 없었다.

 

무역은 아무런 창의력이나 도덕성을 키워주지 못한다.그것은 다만 물건들을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개 사물을 자신의 상업적 사고로 대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숭배하고,명예보다는 이윤을 더 추구하고,저울에 달면 무게가 나가지 않는 정신적 능력이나,도덕적 힘,영적 소망과 같은 것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 고린도의 상인들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사람들 이었다. 그런가 하면 퇴폐적인 모습도 나타나고 있었다. 방탕함이 만연했으며, 거리뿐 아니라 신전에도 창녀들로 들끓었으며,그 창녀들의 상당수는 아프로디테 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에서 일하는 여사제들이었다. 이도시는 자생적인 것이든, 이식된 것이든 간에 온갖 해로운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났고 사치와 방종이 조장되는 악의 온상이 되었으며,결국 타락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3) 고린도교회의 설립경위 및 상황
 고린도 교회의 설립겨우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역사적 사실들을 바탕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린도인들이 처음으로 복음을 대하게 된 시기는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도중인 A.D50년 경이다. 그 당시 아덴으로 부터 이곳으로 왔던 바울은 처음에는 타락하고,부패한 이 도시의 죄악상을 목격하고,심히 두려워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신것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결심후에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라는 훌륭한 동역자를 만나게 되었으며, 얼마 안되어 마게도냐로 파견 되었던 디모데와 실라가 돌아옴으로서 본격적으로 고린도의 복음 사역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규례대로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론 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유대인들로부터 격렬한 반대를 받아 급기야는 이방인에게로 돌아가리라고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바울은 회당 옆에 있는 "디도 유스도"라는 이방인의 집으로 옮겨 회당장 그리스보를 비롯해 많은 고린된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이러한 경위에 따라 설립된 고린도 교회는 좀차 여러가지 내외적인 문제와 신앙 윤리적인 논쟁으로 인해 일대 혼란을 겪게 되었는데 그 심각성은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이 도시의 주민들의 성격이나,환경에서 추측할수도 있지만 우리는 본서와 고린도 후서의 내용을 통하여 그 상황을 보다 확실하게 추측할수 있다. 이 도시의 주민은 어느 도시보다도 다양한 부류로 구성 되었다. 즉 쥴리어스 시이져에 의하여 이주한 식민 이민단들의 후손, 대도시 고린도에 매혹되어 몰려든 헬라인들,유대인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모든 지역으로 부터 이방인들이 이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고린도 주민들이 지닌 특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단연코 그리이스적인 특성이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아마도 유대인이 아닌 그리이스인 이었을 것이다. 오랜세월 동안 그리이스인들은 사색하기를 좋아했으며,상상력이 풍부했고,쾌락을 즐겼으며,파당성을 띠는 드으이 특징을 지녀왔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고린도 교회는 믾은 유대인 개종자들과 더불어 바로 위에서 언급한 특성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 되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세련된 이교적 교육을 받았으며,방탕으로 인도하는 온갖 유혹에 둘러싸여 있었으며,비록 최고선은 아닐지라도 선한 가치를 지닌 쾌락을 추구하도록 배웠으며,많은 철학자들과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따라서 본서에 묘사된 고린도 교회도 분명히 이러한 특성을 보여 준다. 그들은 바울파 아볼로파,게바파, 그리스파로 파당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고린도 교회의 또 다른 커다란 죄악은 여러가지 형태로 제7계명을 범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철학자들 까지도 이런 부분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종교의식과 축제에는 다양한 음행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고린도교회의 자유로운 경향은 이들이 이교의 희생제물을 드리는 일과 이교의 종교적인 축제에 참여하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도 거리낌없이 먹고, 신전에서 거행하는 축제에도 참석하는 일에 익숙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공중집회를 하는데 있어서도 각파마다 무질서하게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러가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 안에는 많은 순전하고 모범적인 교인들이 있었으며, 이교회를 무질서 하게 하는데 다소 책임이 있던 무리들 가운데도 굳은 믿음을 지니고,경건한 생활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다고 여김을 받는 이들에게 문안하며,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동시에 하나님이 이들을 주 예수의 날까지 흠이 없이 보전하시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언급하게 있다.

 

 

       3. 저술 목적

 

 바울이 본 서신을 기록한 목적은 1:11과 16:17절을 통해 나타나는 다음 두가지 사실에 있다.
 첫째로,바울은 글로에의 집 사람들의 보고를 통해서 제기된 고린도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주고자 본서를 기록하였다. 그 문제들이란 고린도 교회의 분열과 바울의 사역에 대한 오해(1-4장),근친상간과 간음죄를 비롯해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들(5장),법정에서 다른 성도들을 송사하는 비 그리스도적인 행위(6장)등이다.
 둘째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대표자들에게서 온 편지(7:1)를 받고 거기에 제기되어 있는 몇가지 질문에 답변을 주고자 본서를 기록하였다. 그 질문 사항들은 혼인에 관한 문제(7장),우상의 제물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함으로서 생기는 방종한 행위에 관한 문제(8-10장),공공 기도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일,무질서한 만찬, 성령의 은사의 활용등과 같은 예배에 관련된 여러가지 무질서한 행위들에 관한 문제,(11-14장),그리스도의 부활 및 육체의 부활에 대해 그릇되게 이해하는  문제(15장) 등이다.

 

 

 Ⅱ. 고린도후서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및 수신자
 본서의 저자는 바울이라는 견해가 정설로 되어 있다.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 학파의 기수로서 13권의 바울서신중 무려 9권을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인  바우르 조차도 본서를 고린도전서, 갈라디아서,ㄹㅎ마서와 함께 바울의 저작으로 인정했다. 본 서신이 바울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알려주는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내적 증거로는 본서의 내용에도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라고 두번 언급되어 있다(1:1; 10:1) 그리고 외적증거를 든다면,폴리갑, 이레니우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그리고 터툴리안과 같은 초대교회 교부들은 본서를 바울의 서신으로 인용했다. 또한 본 서신은 마르시온의 아포스톨리콘과 무라토리 단편에도 바울의 서신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본서의 수신자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었다(1:1).

 

 

    2) 기록연대 및 장소

 본 서신의 기록연대는 고린도전서의 기록연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여러가지 자료를 통하여 잠정적으로 결론에 도달할수 밖에 없다.
 첫째로,고린도 전서는 봄, 아마도 유월전 직전에 씌어져 고린도 교회로 보내졌을 것이다.(고전5:7-8, 15:20절 참고)
 둘째로 고린도후서는 아마 가을에 씌어졌을 것이다.(행20:6, 20:3, 고후12:14, 13:1을 참고하여 보면 암시한다)
 세째로 고린도 전서와 후서는 18개월 이상의 시간적인 간격을 사이에 두고 씌어졌을 것이다. 물론 같은 해로 추정할수 있겠지만 고전16:6절에 언급되어 있는 겨울이 행20:3절에 암시되어 있는 겨울로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후1:15,16절의 기록되어 있는 계획과 사실상 다를바 없는 잠정적인 계획을 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후8:10; 9:2절의 지난해가 6개월의 시간적인 간격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이상의 것들을 종합하여 보면, 고린도 전서는 A.D55년 봄에 보내졌을 것이고,고린도후서는 A.D56년 가을에 보내졌을 것이다. 반면에 고후10-13장이 고린도후서1-9장보다 더 이후에 씌여졌다고 한다면,이 마지막 네장은 A.D56년 가을부터 씌여졌을 것이고, 처음 아홉장은 A.D55년 가을과 A.D56년 초가을 어간에 보내졌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발생한 주요 사건들의 잠정적인 연대를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A.D 55년 봄
             가슴아픈 방문                 A.D 55년 여름 혹은 가을
               준엄한 편지                 A.D 56년 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남                 A.D 56년 봄
  바울이 바게도냐에 도착함                 A.D 56년 여름
  디도가 마게도냐에 도착함                 A.D 56년 여름
                고린도후서                 A.D 56년 가을


 그리고 바울이 이 서신을 쓴 장소를 보면 고린도후서 안에 언급되어 있는 몇 귀절들은 바울이 이 서신을 쓸때 마게도냐 지역에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7:5; 8:1; 9:2-4)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은 고린도후서가 "빌립보로부터" 씌어졌음을 명기해 놓은 이 서신의 필사본들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 또한 고린도후서의 "마게도냐"는 빌립보를 의미하고 있다(빌4:15절 참고)

 

    3) 통일성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고린도후서의 통일성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본 서신이 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초기 편지들의 단편을 하나로 묶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그들이 근거로 삼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고린도후서2:14-7:4절의 말씀이다.
 몇몇 학자들은 본서신의 6:14-7:1절을 제외한 2:14-7:4부분을 "준엄한 편지"이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써 보낸 독립된 편지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고린도후서6:14-7:1절의 말씀이다.
 이들이 문제를 삼는 이유는 이 귀절은 독립적인 단위를 형성하고 있으며,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 어떤 특별한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 귀절은 6:13로부터 7:2절에 이르는 사상의 흐름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 귀절은 자유의 사도인 바울과는 온당치 않게 바리세파 사람들의 배타주의를 밝혀 놓은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리고 이귀절은 쿰란 종파의 신학과 매우 흡사한 점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바울의 사상 전개 방식이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전혀 문제시 되지 않는다.
 세째는 고후 8-9장이다.
 어떤 학자들은 9장은 8장의 중복일뿐만 아니라,바울이 고린도가 아닌 아가야의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보낸 독립적인 서신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주장은 증거가 없으며, 그런 선입견을 버리고 8,9장을 대한다면, 단순한 반복이 아님을 알수 있을 것이다.
 네째는 고린도후서 10-13장의 말씀이다.
 여기에는 몇가지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고린도후서 10-13장이 고린도후서 1-9장보다 이전에 씌여졌다는 견해가 있으며, 고린도후서10-13장이 고린도후서 1-9장보다 이후에 씌여졌다는 견해가 있다. 이들의 주장은 공통적으로 본 서신10:1에서 어조가 전환되어 있다고 보고 본 서신이 1-9장과 10-13장의 독립된 부분이 결합된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본서의 전후 문맥과 내용을 볼때 이러한 견해들에 대한 뚜렸한 증거를 찾을수 없다.


 이상에서 볼때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본 서신이 단일 편지이기 때문에 어떤 불일치의 흔적이나 변동이 있을수 없다고 인정한 초대교부들이나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의 전통적 견해와 배치된다. 뿐만 아니라 본 서신의 일부가 고린도 교회의 실제 상황과 다르거나 모순이 있다는 그들의 견해는 바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 상황이나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지극히 단편적이고,적은 일부분의 자료만을 가지는 여건을 고려할때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고린도후서가 통일성을 지닌 한편의 서신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그 논증을 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고린도후서가 원래 두 서신이었다가 한 서신으로 나중에 합본되었다는 가정을 허용할 만한 사본상의 다양한 증거가 없다는 점, 둘째는 1-9장에 감사에 넘치는 어조가 나오지만 그러나 이 어조만이 이 부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1:23절참고) 또 10-13장에 과격한 어조가 나오지만 그러나 이 어조만이 이 부분에서 발견되는 것은 아니므로(12:20절참고) 이 두 부분이 양립할수 없다는 점을 거의 극소화 시킨다는 점. 세째는 10-13장이 1-9장보다 연대적으로 빠르다고 하며,과격한 편지의 일부가 바로 10-13장 이라고 보려는 시도는 본 서신의 통일성을 지지해 주는 사본의 증거로 미루어 보아 아직 확실한 견해가 되지 못했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과격한 편지의 일부가 현존한다고 시사하는 주장들의 불확실등이다.

 

 

   4) 특별한 문제들

    [1] 가슴아픈(혹은 중간) 방문
   

  ① 사실성 

고린도 후서의 몇몇 귀절들은 바울이 이미 고린도를 두번 방문했으며,그 두번째 방문이 가슴아픈 방문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고후12:14과 13:1,2절은 이전에 두번 방문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고후2:1과12:21은 이전에 있었던 두번의 방문중 한번은 근심스러웠다고 말한다.
   ② 방문시기
 가슴아픈 방문에 관해 고린도전서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나 고린도후서에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똑같은 결론, 즉 가슴아픈 방문이 고린도전서와 후서가 씌여진 어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바울은 디도로부터 준엄한 편지의 결과를 듣고서 고린도후서를 썼기 때문에 가슴아픈 방문은 고린도전서를 보낸후와 준엄한 편지를 보내기 전에 이루어졌다. 즉 바울이 준엄한 편지를 보낸후에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것은 아니다.
   ③ 방문의 동기와 목적 그리고 결과
 고린도교회가 고린도전서를 받고 어느정도 시간이 지난때에도 교회안의 상황은 좋아지지 않았다. 아마도 바울을 추종하는 자들은 바울의 적대자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로 부터 달갑지 않는 소식을 받고 고린도전서의 효과를 보완하는 편지를 서둘러 보내야 했고 유대주의적인 거짓사도들이 고린도에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더이상 손상시키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가슴아픈 방문기간에 일어났던 일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바울은 음란한 죄를 지은 사람들을 꾸짖으기는 하였겠지만 징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다시가면 용서치 않으리라(고후13:2)의 경고를 보면서 알수 있다. 그리고 바울은 아마도 외부에서 교회로 들어온 자나,혹은 고린도출신의 교인들에게서 모욕을 당한것 같다.  그래서 그는 가슴아픈 방문이라고 말한것 같다. 아무튼 짧은 방문을 통해서 그는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했다. 그리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일로 인하여 금심하였다.(고후2:5-11; 7:12)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상당히 설득한 다음(고후7:14) 자신의 개인적인 사절로서 준엄한 편지를 전달하고 연보를 모금하도록 고린도 교회로 보냈다.


   [2] 준엄한 편지
 "내가 큰 환란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 바울은 준엄한 편지 ,근심케 한 편지, 혹은 눈물의 편지로 알려져 왔던 것을 이와같이 묘사했다.


    ① 목적
 준엄한 편지를 쓴 일반적인 목적은 고린도 교회를 깨우쳐 불의를 행한자를 훈계하게 하려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고린도후서는 이 편지를 쓰는 4가지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로,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다시 가슴아픈 방문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1:2-2:4) 둘째,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서다. 세째로,바울은 그들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순종하는지 시험하려고 했다. 네째 바울은 영적 아버지인 바울을 위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참된 관심과 사랑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나타나게 하려고 했다.


    ② 결과
 이 편지의 결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행동에 관심을 가지고,뉘우치고,염려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다시 오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의분케 했던 수치스러운 일을 했던 자들을 처벌하기에 몰두했다. 바울은 불의를 행한 자들을 처벌하는 일을 멈추고 이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스스로의 죄를 뉘우친 불의한 자를 용서해 주기를 원했다(고후2:6-8)


   ③ 준엄한 편지란 무엇인가?
 준엄한 편지란 어떤 편지를 두고 하는 말인가에 대한 3가지 견해가 있다. 먼저 고린도전서라는 견해가 있으며, 또하나는 고린도후서10-13장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편지라는 견해와 마지막은 분실된 중간편지라는 견해이다. 이상과 같은 3가지의 견해 중에서 3번째 견해가 지배적임을 알수 있다.


   [3]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
 A.D 52년부터 A.D57년까지 예루살렘 성도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자신이 세운 이방교회들에서 연보를 모금하기에 자신의 상당한 시간과 정열을 쏟았다.
   ① 기부자들
 사도행전20:4절이 모금한 연보를 전달하기 위해 바울과 함께 마지막 방문지인 예루살렘에 동행했던 자들 즉 몇몇 니방교회가 임명한 대표자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② 수혜자들
 구제금은 가난한 자들로 지칭해온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었다.
   ③ 바울에게 있어서 연보모금이 주는 의미
 이것은 먼저 형제애를 들수 있겠다. 그리고 연보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임을 효과적으로 나타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이방전도를 미심쩍게 여기는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던것 같다. 또한 연보를 통해 동지중해 연안에서의 바울의 사역을 절정을 이루게 해주었으며,바울이 약속했던 것을 이행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었다.


   ④ 연보의 수락
 바울은 예루살렘 성도들이 구제 연보를 거절하지나 않을까 염려 하였지만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때 예루살렘 성도들은 그 구제 연보를 기쁨으로 받아드렸다.


  [4] 고린도 교회의 바울 적대자들
   ① 적대자들은 누구인가?
 몇몇 학자들은 고린도후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과 고린도 전서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적대자들이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구별되어야 한다. 바울의 적대자들이 유대인들이었다는 주장은 널리 인정되고 잇다. 그러나 그들이 유대주의자들 이었을까? 하례가 구원의 선행조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유대주의자라고 정의 한다면 바울 적대자들은 유대주의 자들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고린도후서는 할례에 대한 논쟁을 벌인 어떠한 흔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이나 그리스도안의 한형제됨의 기븜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의 관습을 강요하려는 사람을 유대인이라고 정의 한다면, 유대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일수 있다.


   ② 적대자들과 예루살렘과의 관계
 고린도 교회의 바울의 대적자들과 예루살렘교회, 특히 세 기둥 사도 혹은 열두 사도들과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여기에는 세 견해가 있음을 볼수 있다. (1) 예루살렘에서 공식적으로 파송된 자들 (2) 열두사도의 인지와 묵인으로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열두 사도의 뜻을 잘못 전했던 일부 공식적인 임무를 띠고 파송된 자들 (3) 유대주의의 강령을 지키기 위해 유대로 부터 스스로 들어와 열두 사도 특히 베드로의 권위에 호소했던 자들. 학자들은 각각의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세번째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본다 그 근거로서 몇가지를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들이 팔레스타인 출신이었다는 것을 추론해 볼수 있다(고후11:22과 빌3:15절을 비교) 둘째는 아마도 우리는 고후11:5과 12:11절의  지극히 큰 사도들과 11:13절의 거짓사도들을 구별할수 있다. 세째로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은 열두 사도의 인증없이 열두 사도들의 권위를 빙자하여 행사하기도 하고,다른 사람들은 특정한 위임장 없이 예루살렘을 떠났던 것이 분명하다. 끝으로 고린도 교회의 한 당파는 베드로의 이름을 빌어서 예루살렘에 호소한 선례를 이미 남겨 놓았다.


   ③ 적대자들의 가르침
 바울 적대자들의 첫째 목적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서서히 약화시켜 무너뜨리려는 것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바울의 추방,적어도 고린도교회 안에서 만은 추방시켜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종으로 신임을 얻으려는 의도로 교인들을 가르쳤다.

 

        2. 역사적 배경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의 자세한 내용 즉 고린도시와 교회에 대한것들은 고리도 전서의 역사적 배경을 참고 하기 바란다.
 여기에서는 다만 바울의 에베소 전도에 대한 언급을 잠깐 하기로 하겠다. 바울의 전도여행중에서 에베소와 그 인근지역에서 보냈던 30개월 내외의 기간만큼 정확히 재구성하기 힘든 기간은 없을 것이다. 이 기간은 소란스러웠던 기간이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기회를 많이 가졌으며,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기적을 베풀고,또한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 시켰다. 바울은 복음전도에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이에 병행하여 그를 시기하는 적대자들도 많았다. 더메드리오 소동이 실제로 바울로 하여금 에베소를 떠나게 한 원인이 되었든지 그렇지 않았든지 간에 바울은 에베소에서 유대인들의 반대에 직면했던 것은 말할것도 없고 아데미 신전의 신봉자들의 자신에 대한 적대감이 극도에 달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음에 틀림없다.

 

  3. 저술목적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데에는 몇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첫째 바울은 디도에 의해 전달 되었고 보완되었던 자신의 준엄한 편지에 대해 고린도교회 성도드르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자신에게 대단한 위로와 기쁨이 되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둘째는 자신의 다음 방문전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예루 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그들의 약속된 연보를 완수하도록 권면하고 싶었다. 세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반성하고 자신들을 시험해 봄으로서 곧 있을 바울의 방문을 준비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참사도와 거짓사도들을  구별하는 타당한 기준을 찾을수 있으며,바울도 훈련시켜야 할 수고를 덜수 있기 때문이다

.
 물론 다음과 같은 부수적인 목적들도 있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심한 환란을 알려서 앞으로의 전도여행을 위해 그들이 기도해 줄것을 청하고 싶었으며,바울은 그가 여행계획을 변경한 이유를 말하고 싶었고 잘못을 뉘우치는 불릐를 행한 자들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다시 사랑하도록 권면하고 싶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우상을 섬기는 어떤 자들과도 교제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싶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의 참 본질과 고귀한 소명을 기술하고 싶었다. 그런가 하면,자신의 사도직의 정당성을 변호하기 위함과 고린도 교인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본 서신을 쓰게 되었다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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