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
이동원 지음
차례
서문
제1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만큼 자라기 위해
1 전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땀방울
2 기도, 생명의 호흡
3 예배, 끊임없는 바라봄
4 함께하심, 경험해야 할 실체
5 말씀 암송, 강력한 무기 비축
6 단기 선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걸음
제2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7 섬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함
8 제자 삼기, 상처를 싸매는 능력
9 터치, 생명을 살리는 손길
10 경철, 마음의 눈과 귀
11 작은 자 사랑, 천국을 만드는 행복의 길
12 나라를 위한 기도, 무릎으로 하는 애국
제3부 가정과 교회를 세우는 삶
13 가족 돌봄, 사랑의 지경을 넓혀 가는 일
14 가정 모임, 천국 안식의 그림자
15 어린이 사랑, 보배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16 용서, 명령을 따르는 외로운 결단
17 교회사랑, 기도로 매고 푸는 일
제4부 내면의 실력으로 자리 잡아야 할 덕목들
18 순종, 시대를 거스르는 주님의 습관
19 감사, 은혜가 흐르는 통로
20 침묵, 삶을 지키는 큰 울림
21 안식, 새로운 창조를 위한 멈춤
22 질서, 형상을 회복하는 길
제1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만큼 자라기 위해
♣ 기도, 생명의 호흡 (눅 11:1, 22:39-46)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기도하고 살아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시고 기도를 가르치신 예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습관으로서의 기도
오늘날 습관이라는 말은 때로 부정적인 뉘양스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습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서양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는다.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하고, 성품은 운명을 결정짓는다.”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길러 준다면 자녀 교육의 90퍼센트는 이미 성공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기도하는 습관이었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22장에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감람산 겟세마네 정원에 기도하러 가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께서 다음날 십자가를 지게 되는 사건 때문에 그곳에 가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39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 갔더니.” 무엇을 따라 감람산에 가셔싸고 했습니까? ‘습관을 따라’였습니다. 감람산을 찾아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상 습관이었습니다.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 그러나 결코 형식적인 습관은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본문인 누가복음 11장 1절에 보면 어느 한 곳에서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이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의 기도가 형식적이었다면 주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 제자들은 그냥 ‘잘 끝내셨구나’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감동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의 기도가 제자들을 목마르게 했습니다. 그들도 주님처럼 기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기도는 일상적 습관이 아닌 거룩한 습관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때 달라지는 기도의 모습
기도는 호흡과 같은 것이어서 언제나 기도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특별한 위기를 만나면 더욱 특별하게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여기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의사 누가가 동원한 수식어들을 주목해 보십시오.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땀이 핏방울같이.” 이것은 곧 비상한 상황에는 비상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 아닙니까? 살다가 보면 잠잠히 기도할 때가 있는가 하면 부르짖으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 예배, 끊임없는 바라봄 (눅 2:46-49, 마 18:19-20)
요즈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유머 가운데 ‘웨이터의 만행’이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죄수가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너무 심심해서 감방에 돌아다니는 개미를 잡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차려 동작’을 가르친 것입니다. 드디어 3년 만에 개미는 이 사람이 ‘차려!’ 하면 아주 멋진 폼으로 차려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훈련된 개미를 가지고 추소했습니다. 애인을 만나자마자 그는 감옥에서 훈련시킨 개미의 묘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물론 개미의 차려 동작 이었습니다. 애인은 너무 재미있어 하며 정말 수고했다고 축하해 주었다고 합니다. 애인의 격려에 고무된 그는 애인과 함께 어느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다시 그 묘기를 식당 웨이터에게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개미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어이 웨이터, 이 개미 좀 봐!” 하는데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웨이터는 “손님, 죄송합니다” 하더니 잽싸게 엄지손가락으로 개미를 눌러 죽였다고 합니다. 이것이 웨이터의 만행 전모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웨이터의 만행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무슨 말인지 생각하고 대답해 보십시오. 군인들의 제식훈련에서 차려 자세는 모든 동작의 기본 동작, 기본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본 동작인 차려 자세가 흔들리면 다른 모든 자세가 흔들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기본 동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도의 기본 동작은 예배 자세입니다. 예배 자세가 흔들리고 예배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네 신앙생활 전번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을 닮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바라보는 대상을 본능적으로 닮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배가 우리의 거룩한 습관이 되어 인생의 아침에도 그분을 바라보고, 인생의 황혼에도 그분을 바라보고, 성공할 때도 그분을 바라보고, 실패할 때도 그분을 바라보고 산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닮아 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예배를 거룩한 습관으로 삼는 일생을 살아가기를 축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무소부재하시다 혹은 편재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특별히 어떤 장소를 구별하시어 그곳에 자신의 거룩한 영광을 집중적으로 계시하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서 성전이 갖는 중요성이고, 신약에서 예배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 함께 하심, 경험해야 할 실체 (눅 24:13-17, 30-35)
어느 부활절에 닭과 돼지가 교회 앞을 지나가다 보니까 “오늘 부활절 날 햄 앤드 에그 샌드위치 파티를 엽니다”라고 써 있었다고 합니다. 닭이 돼지보고 말하기를 “우리 이 파티에 온 사람들의 기쁨을 위해 함께 들어가서 산 제물이 되어 헌신하자”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돼지가 화를 내며 닭에게 “너는 부분적인 헌신만 하면 되지만 나는 전체적 헌신을 해야하지 않느냐”고 항변했고, 이에 대해 닭이 돼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돼지야, 네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너야 눈 딱 감고 한번만 헌신하면 되지만 나는 알을 낳을 때마다 계속적으로 헌신하지 않니? 중요한 것은 날마다의 헌신이란다.”
그렇습니다. 날마다의 헌신, 일상에서의 헌신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헌신을 하기 위해서는 살아 계신 주님을 일상에서 만나는 경이를 회복해야 합니다.
♣ 말씀 암송, 강력한 무기 비축 (마 4:3-11, 시 119:9-11)
인터넷에서 퍼올린 한 퀴즈의 물음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나는 언제나 당신 곁을 떠나지 않는 동반자입니다. 나는 당신의 가장 충실한 조언자일 수도 있고, 가장 무거운 짐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밀어 올릴 수도 있고, 아니면 실패의 나락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 가운데 절반을 나한테 떠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순식간에, 그리고 정확하게 해치웁니다. 나를 다루는 일은 쉽습니다. 나는 꽉 붙잡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일을 몇 번만 연습하면 나는 자동으로 해냅니다. 나는 모든 위인의 하인입니다. 하지만 실패자의 하인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사라이라면 나는 위인을 만들어 냅니다. 실패자라면 나는 실패자로 만들어 냅니다. 나는 기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기계는 아닙니다.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당신은 나를 움직여 이득을 불 수도 파멸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나를 꽉 붙잡고 훈련시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 이 세상을 드리겠습니다. 나를 편히 놓아 주시면 당신을 파멸로 인도할 것입니다.” ‘나’는 바로 습관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습관 가운데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장 중요한 습관이 말씀 암송의 습관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말씀 암송의 습관이 왜 중요할까요?
◎시험을 극복하는 무기
오래된 유머이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선교사님이 정글을 헤치며 나아가는데 갑자기 사자 한 마리가 숲속에서 뛰어나오더랍니다. 겁에 질린 선교사님이 얼결에 기도하길 “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 사자를 구원하사 크리스천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자가 갑자기 두 발을 공손히 모으고 기도하더랍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사자의 가도 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뜻을 이루기 위해
말씀 암송이 주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성경 말씀 그 자체가 곧 하나님 듯의 계시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면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에 근접하지 않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사 55:11)
제2부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
♣ 제자 삼기, 상처를 싸매는 능력 (마 9:35-10:1, 28:19-20)
◎상처받는 이웃들을 주목
미국의 유명한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베스트셀러 『인생 수업』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한번은 뉴욕에서 1,500여 관중 앞에서 강연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강연이 끝나자 수백 명이 사인을 받고자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서둘러 사인을 했지만 공항 갈 시간이 임박해 얼른 마무리를 하고 공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그가 헐떡이며 공항 청사에 들어가 잠시 화장실 변기에 들어가 앉아 있는데 갑자기 화장실 문틈으로 누군가가 자기가 쓴 책과 펜을 들이밀며 “박사님, 죄송하지만 사인을 좀…”하더랍니다.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겠습니까? 로스 박사는 서둘러 볼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이런 무례한 일을 하는 사람이 누군지 얼굴을 보고자 했는데, 그는 뜻밖에 수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했더니 갑자기 그 수녀가 말을 가로채며 “하나님의 은총입니다.”라고 하더랍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니요?”하고 약간 퉁명한 소리로 반문하자 수녀가 이렇게 말을 이이 갔다고 합니다. “사실은 박사님, 저의 동료 수녀가 병상에서 죽어 가고 있는데요 박사님을 너무 만나고 싶어 했고 박사님의 강연장에도 오고 싶었는데 몸이 너무 아파서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친구에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선물로 이 강연을 녹음해 들려주고 박사님이 친필 사인이 있는 책을 선물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박사님을 기다리는 줄이 너무 길어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사인을 받지 못하고 공항으로 왔는데, 박사님이 저와 같은 비행기 출구에 있는 같은 화장실에 들어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겠습니까?” 그때 로스 박사는 약간 화를 냈던 것을 후회하며 이웃을 치유하는 진정한 힘은 모든 상황을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임을 깨우쳤다고 고백합니다. 이웃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제자 삼기의 삶, 그것은 무엇보다 상처받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모습을 주목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상처받은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제자 훈련을 단지 성경을 좀 많이 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목자의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의 심정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여기 본문 마태복음 9장 36절에 “불쌍히 여기시니”에서 사용된 영어 단어 compassion은 com-함께 이란 말과 passion고통 이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불쌍히 여김은 함께 고통을 나누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고통을 나누려면 내 입장이 아닌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잭 하일스라는 전도 많이 하는 미국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가 한번은 이른 아침에 어떤 식당에 갔는데 얼마나 종업원이 불친절하던지 항의하고픈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잠시 기도하는데 갑자기 그녀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무슨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어,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평소 5불이면 될 팁을 10불을 놓고 나오셨다고 합니다. 막 식당에서 나오는데 그 종업원이 쫓아 나오며 “손님, 팁은 10불이 아닌데 잘못 놓고 나오신 것 아닙니까?”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니, 팁입니다. 당신 얼굴이 안되어 보여 용기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라고 하자 갑자기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 무례했지요.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제가 어제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습니다.” 그날 아침 잭 하일스는 그녀 곁에 앉아 기도하고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자 삼기의 마음 자리는 바로 불쌍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 터치, 생명을 살리는 손길 (마 8:14-17, 17:6-8)
2차대전 당신 이탈리아 작은 도시에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고아원이 있었는데, 한 고아원은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시설도 좋았고 영양도 충분하게 공급되었지만 강 건너편 다른 고아원은 시설도 열악하고 기본 영양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시설이 좋았던 고아원보다 오히려 시설이 열악한 고아원 아이들의 발병률이나 사망률이 크게 낮았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몇 학자들이 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시설이 안 좋은 고아원에 전쟁 중인 어느 날 자기 아이를 잃고 정신이 나간 엄마 하나가 들어와 아이드로가 함께 살았는데, 고아원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착각하여 날마다 아이들을 번갈아 가며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두 고아원의 결정적 차이를 낳았던 것입니다. 육체와 마음의 연약함에 시달리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주님의 터치입니다.
♣ 경청, 마음의 눈과 귀
한 보석상이 자신의 나쁜 습관 때문에 고민이 되어 『고정관념을 깨는 습관의 법칙』의 저자 브라운 랜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의 나쁜 습관을 잊고 살았는데 3년 전부터 그 습관이 다시 나타나 고민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습관을 괴지 못해 절망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랜던 박사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보석상이시니까 금고에 다이아몬드가 많이 있겠네요?” “예, 많이 있습니다. 약 30만 개는 될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면 여기 조약돌 3개가 마침 있는데 이제 눈을 감으시고 당신의 금고에 있는 다이아몬드 30만 개 옆에 제가 드린 이 조약돌 3개가 놓여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상상이 되십니까?” “예, 상상이 됩니다.” “그러면 혹시 이런 상상이 가능한지 계속 상상해 보십시오. 그 조약돌 3개가 자꾸 눈에 거슬리기 때문에 앞으로 당신은 보석상 사업이 불가능하고 인생의 보람도 의미도 누리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그러자 그는 “상상이 안 가네요. 어떻게 저 조약돌 3개 때문에 제가 가진 다이아몬드 30만 개 사업을 포기하고 인생도 포기하란 말입니까?”라고 했습니다.
다시 랜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 아닙니까? 당신은 당신의 못된 2-3개의 습관 때문에 인생이 절망이라고 지금 말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얼른 대답을 찾지 못하고 주저하는 그에게 랜던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하실 일은 못된 습관 몇 개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좋은 습관을 만들고 그런 새로운 습관에 집중하는 일입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우리 인간이 말하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2년이면 족하지만, 듣는 것을 배우기까지는 80년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경청의 습관은 평생의 학습을 필요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한 경청을 하는 순간 인생은 기적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경청하시자 일어난 기적을 보여 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 작은 자 사랑, 천국을 만드는 행복의 길 (요 9:1-7, 마 25:40)
◎시급한 편견 극복
장애인 하면선천적인 장애인을 연상하지만 장애인 중 선천적 장애인은 20퍼센트 미만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80퍼센트는 다 후천적 장애인들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산업화되면서 더욱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결과 (산업재해, 교통사고, 약물복용, 노인성 질환 등)이기도 합니다. 이제 어느 나라든 그 날 인구의 10퍼센트는 장애인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어떤 통계는 오늘날 인구 고령화 추세로 증가 일로에 있습니다. 어떤 통계에 따르면 앞으로 20년 후에는 다섯 사람 중 한 사람은 신체적 혹은 정신적 장애인으로 일생의 한 시기를 살다가 갈 것이라고 합니다. 예비 장애인의 범주에서 예외 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특별한 사람만이 장애인이 된다는 편견에서 이제는 모두 벗어나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도 예비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앞으로 당신 자신도 장애인이 되었을 때 사랑받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지금 무엇보다 먼저 당신 자신의 편견에서 해방되십시오.
◎작은 자 섬김은 우리의 사명
그래서 마태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심판하시는 그날 작은 자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심판의 준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날 그분 앞에서 우리가 받게 될 이런 질문들에 대답이 준비 되었나 자문해 보십시오. “내가 주리고 목마를 때에 너희는 내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 일이 있느냐?” “너희는 내가 앞을 보지 못하고 길을 헤맬 때 나를 도운 일이 있느냐?” “너희는 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 몸이 불편한 내가 먼저 타도록 배려한 일이 있느냐?” “너희는 몸이 불편한 내가 주차장에 먼저 차를 주차하도록 장애인 주차장 공간의 의미를 존중하고, 그 자리에 불법 주차하지 않도록 늘 질서를 지켰느냐?” 어떤 사람은 틀림없이 “주님, 주님이 언제 배고프셨고 언제 길을 헤매셨으며 언제 몸이 불편하신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따질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 25:40)
♣ 나나를 위한 기도, 무릎으로 하는 애국 (마 23:37-39, 롬 10:1-3)
6·25전쟁이 남긴 인류사적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교훈을 전파하고 있는 중심 장소가 6·25전쟁이 일어난 이 한반도가 아니라, 미합중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 기념공원을 해마다 평균 32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방문하는 미국인들과 세계의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곳에서 조각가 프랭크 게일로드 의 조각 작품인 판초 우의를 입고 행군하는 육, 해, 공군의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이곳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여기에 새겨진 문구입니다.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했던 나라의 자유를 위해 달려갔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딸과 아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 은색 글씨로 선명하게 새겨진 불멸의 메시지가 바로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입니다.
제3부 가정과 교회를 세우는 삶
♣ 가족 돌봄, 사랑의 지경을 넓혀 가는 일 (요 19:25-27, 딤전 5:8)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어떤 가족관의 변화를 겪게 될까요? 그것이 궁금합니다. 이 질문의 대답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으로 가족들 사이에서 인생을 사신 예수님의 가족관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
가족은 무엇보다 소중하지만 ‘협의의 가족’ 테두리에 갇혀 ‘광의의 가족’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가족주의는 인간의 이기심이 춤추는 장소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이웃의 가족에 해를 끼치게 된다면 그것은 결코 올바른 가족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족보다 좀 더 큰 개념인 만족을 또한 생각해 보십시오. 민족은 소중한 가치입니다. 그러나 협의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병든 애국심이요,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밝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내 민족의 이익을 위해 다른 민족의 권리를 박탈하고 침략하는 행위들 때문 아니었습니까? 따라서 크리스천의 가족 사랑이나 민족 사랑은 가족이나 민족보다 더 높고 더 넓은 가치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가족관을 반영하는 에피소드가 복음서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9-50절 말씀을 보십시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여기에서 저는 결코 혈연적 가족의 중요성을 예수께서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혈연적 가족의 범주를 초월하는 가족관을 예수께서 가지고 계셨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어머니 그리고 육신의 형제들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제자들 또한 바로 그분의 가족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중심의 가족관이었습니다.
♣ 용서, 명령을 따르는 외로운 결단 (눅 11:1-4, 23:34)
세상에 어떤 덕목들은 표현되지 않아도 전달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표현되지 않고는 결코 전달되지 않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용서이고 다른 하나가 사랑입니다. 용서와 사랑은 표현되지 않는 한, 상대방이 용서받는 것을 그리고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용서와 사랑은 결국 하나입니다. 용서의 열매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시인은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다. 노래는 불릴 때까지 노래가 아니다. 사랑은 표현될 때까지 사랑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인은 많은 문화적 유산을 지닌 민족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극복해야 할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표현력의 빈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잘못했습니다” 혹은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을 어색해 하는지요? 그러나 성경을 잘 관찰해 보십시오. 성경은 용서와 사랑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은 느낌이 들거든 용서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싶다 혹은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정서적 느낌을 넘어서서 용서가 주님의 명령이라면 용서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의지적 반응이 곧 순종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이런 순종의 가장 보편적인 출발점이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 교회 사랑, 기도로 매고 푸는 일 (마 16:18-19, 엡 5:25-27)
미국의 존경받는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출석하는 교회 사무실에 어느 날 전화가 울렸습니다. “이번 주일 대통령께서 교회에 출석하실 것으로 기대하십니까?”라는 전화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무원이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출석 여부는 불확실합니다. 확실한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예배에 출석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임재로 교회는 교회가 되는 것이며,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는 모두는 좌절을 딛고 일어나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셀 교회 (가정 교회)를 강조하는 어떤 교회를 방문하던 중에 이런 감동적인 간증을 접한 일이 있습니다. 한 여성도가 이혼을 결심하고 도장 찍기 전 허탈한 심정이 되어 마지막으로 새벽 예배를 나갔다고 합니다. 다른 성도들 만나는 것이 부담되어 새벽 예배가 끝나는 시각을 선택하여 조금 늦게 교회에 나갔는데, 한 분이 교회당 앞에서 두런두런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어 보니 자기를 위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같은 목장에 속한 목자가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벌서 여러 날 금식하고 이 부부를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이 부부를 이혼하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그 순간 이분의 가슴을 때린 생각이 이랬다고 합니다. “아니, 내가 누구이기에 이분이 우리 부부를 위해 금식까지 하고 기도한단 말인가? 그런데 나는 이렇게 쉽게 이혼을 결심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너무나 쉽게 이혼을 결심한 자신이 뉘우쳐지면서 그분은 통곡의 기도 끝에 결심하고 남편과 화해하여 이제는 잘살고 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이요, 목장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런 교회를, 이런 공동체를 어떻게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4부 내면의 실력으로 자리 잡아야 할 덕목들
♣ 순종, 시대를 거스르는 주님의 습관 (눅 2:50-52, 히 5:7-10)
예수님에게 배워야 할 ‘아름다움 반항’이 아닌 ‘아름다움 순종’의 습관은 어떤 것입니까?
◎어릴 적부터 익혀야 할 습관
모든 아름다운 습관들은 어릴 적에 익히지 아니하면, 성인이 되어 익힐 때 훨씬 더 값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온 우리 속담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아닙니까? 서구 속담에도 “요람에서 배운 것이 무덤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자녀들의 부당한 반항을 어려서부터 용납하면 그들은 평생을 반항의 자녀로 살아갈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반면 어려서부터 순종의 자녀로 키우면 평생을 순종의 자녀로 살아갈 것입니다.
♣ 침묵, 삶을 지키는 큰 울림 (사 53:7, 마27:12-14)
얼마나 많은 인간적인 실수들이 우리가 생각하지 않고 던진 말들 때문에 저질러졌습니까? 사도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약 3:2)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리스천들을 의미합니다. 크리스천들도 언어의 실수에 관한 한 예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니, 기독교가 말씀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은 지나치게 말씀을 강조하다가 말에 책임을 못 지는 실수의 굴레에 스스로 빠지는 일들이 너무나 비일비재합니다. 오직하면 이런 유머가 생겨났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자기 목사님을 찾아보았더니 목사님은 안 보이고 목사님 혀만 둥둥 떠 있고, 자기 동료 교인들을 찾았더니 친구 교인들은 안보이고 그들의 귀만 둥둥 떠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뒷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 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 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
예수님은 그렇게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연습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특별히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십자가를 지심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이를 침묵으로 수용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사실 많은 경우 우리가 구차한 변명과 방어를 포기하고 침묵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황을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맡기는 강력한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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