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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 더 내려놓음 』 이용규 지음

by 은총가득 2020. 4. 28.

 

             더 내려놓음

 

                                      이용규 지음 

차례

프롤로그

들어가면서

1부 자기애 내려놓기

1장 하나님만을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가

2장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3장 나보다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4장 오직 아버지의 사랑으로 만족한다

5장 내 노력으로 내려놓을 수 없다

2부 자기의 내려놓기

6장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화낼 수도 원망할 수도 없다

7장 나는 판단할 권리가 없다

8장 고통당한다고 하나님을 헤아리겠는가

9장 하나님은 일의 성과가 아니라 마음을 원하신다

3부 더 더 내려놓기

10장 인생 계획의 모든 결정을 맡기는 더 내려놓음

11장 전적 의존자의 삶을 향한 더 내려놓음

12장 아버지의 사랑을 만끽하는 더 내려놓음

13장 더 내려놓기 위한 온전한 내려놓음

에필로그


 

들어가면서 - 아버지를 누리는 삶으로의 초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들들의 이야기는 우리 신앙인들의 삶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흔히 이 비유를 가리켜 ‘탕자의 비유’라고 한다. 한편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죄를 회개한 후 하나님께 돌아오는 과정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선입견을 버리고 이 비유를 자세히 읽으면 이미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삶에 적용되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비유에는 두 명의 아들이 나오는데 이 두 아들 모두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비유에 등장하는 두 아들은 모두 탕자였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두 아들의 모습이 공존한다. 나는 이 책에서 둘째 아들의 자기애와 첫째 아들의 자기의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두 아들이 가지고 있던 자기애와 자기의가 어떤 것인지, 과연 자기애와 자기의가 어떻게 아버지를 잃어버리도록 만드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기애와 자기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다룰 것이다. 자기애(自己愛)와 자기의(自己義)를 버린다는 것을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한 표현으로 정리해보면 나의 ‘자아 내려놓기’ 내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1부에서는 자기애와 관련한 우리의 문제를 작은아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통해 확인하고 정리하려 한다. 2부에서는 자기의가 갖는 문제점을 큰 아들의 모습과 상태에 견주어 다루어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더 사랑하고 더 깊이 만날 수 있는가는 자신의 자아 문제를 성찰하는 깊이와 맞물려 있다. 자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여전히 아버지 근처에 있지만 아버지를 누리지 못하는 상태의 삶을 지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1부 자기애(自己愛) 내려놓기

1장 하나님만을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가

 

♣바나나가 잡은 원숭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원하시는 이유가 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다. 남미의 인디언 부족들 중에 항아리를 이요해서 원숭이를 잡는 부족이 있다. 원숭이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에 목이 좁은 항아리를 놓고 그 안에 바나나를 넣어둔다. 그러면 호기심 많은 원숭이들이 다가와 항아리를 살핀다. 그러다가 그 안에 바나나가 들어 있는 것을 알고 손을 집어넣어 바나나를 잡는다. 그런데 항아리의 목이 좁아서 원숭이가 주먹을 쥔 상태에서는 손이 빠지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원숭이는 바나나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대로 눈만 말똥거릴 뿐이다. 원숭이를 잡으러 인디언들이 가다오는데도 말이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나에게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원숭이가 바나나를 잡은 것일까, 아니면 바나나가 원숭이를 잡은 것일까?’ 원숭이의 수준에서 보면 자신이 바나나를 잡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원숭이를 잡은 인디언의 눈에는 바나나가 원숭이를 잡은 셈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항아리 속 바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나나를 손에서 놓는 것이 우리를 자유하게 만드는 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붙잡혀 있다. 특별히 우리를 가장 집요하게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에 대한 집착이다.

 

2장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죄가 되나요

이 시대는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집중하라고 말한다. 교회에 다니지만 교회 신앙생활의 목표가 ‘자아실현’이 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게 된다. 세상의 영향을 받아 어느새 자기가치의 구현이 교회생활의 핵심 목표로 자리 잡는 경향이 강해졌다. 근간에 영향력을 끼치는 뉴에이지 운동이 추구하는 것은 우주에 산재한 힘을 빌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몽골의 샤머니즘이나 라마 불교가 추구하는 것도 결국 우주에 존재하는 신의 힘을 빌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데 있다. 비록 추구하는 것이 거룩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자기실현의 노력이 핵심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원한다면 다른 종교나 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면 아버지를 잃어버리고 돼지우리에서 배를 움켜쥐게 된 탕자 비유의 둘째 아들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세례를 받는다는 진정한 의미에 대해 알고 있는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만 알았다면 세례에 대해 반쪽만 아는 것이다. 현대의 크리스천들이 세례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세례의 진정하고 온전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 자아가 죽는 것이다. 세례가 이를 상징한다.

 

내 자아가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자아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세례이다. 예수님이 주인 되는 자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는 받았지만 여전히 두 손에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느 목사님께서 몽골국제대학교 목요 사역자 예배에서 말씀을 전하시다가 이런 질문을 하셨다. “지렁이를 밟으면 왜 꿈틀하는지 아세요?” 목사님이 주신 정답이 바로 십자가 복음과 관련한 우리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 “제대로 꽉 밟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아파하고 상처입고 그 상처를 곱씹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로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관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이다. 문제는 우리 힘으로는 그것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물이 바로 성령님이다.

 

 

3장 나보다 앞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이 기대하는 것으로 사역하다보면 사람의 일만 보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기대를 버리고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 아무리 전공 분야별로 철저히 준비했더라도 그것만 의지하고 나아가면 결국 사람의 일만 하다가 사람이 할 수 있는 정도의 봉사에 만족하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나의 약함 가운데 일하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바라고 나아가면 전혀 새로운 것을 보고 누리게 된다.

 

 

4장 오직 아버지의 사랑으로 만족한다

자신의 죄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예수님과 함께 나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 어쩌면 주변을 향해 쌓고 있는 방어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더 적극적이고 근원적인 상처 해결책이 된다. 나는 선교지에서 다양한 상처에 직면했고 또 치유를 돕는 과정을 통해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상처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배웠다. 첫째,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과 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내 안의 어떤 문제가 상처로 아프게 반응하는지 볼 수 있는 눈을 달라고 성령님께 구한다. 셋째,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또 상처를 치유해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넷째, 자기연민의 감정과 자기자아에 대한 집착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기를 간구한다. 다섯째, 이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된 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달라고 구한다. 성경은 적극적인 용서가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고 가르친다.

 

 

5장 내 노력으로는 내려놓을 수 없다

죄와 상처가 있으면 우리는 관계를 회피한다. 죄를 지은 다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아담과 하와처럼 말이다. 우리의 자존심은 우리의 죄를 인정하려 하지도 않고 또 그것을 해결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아들이 믿어야 할 것이 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애쓰다가 지칠 때가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사실이다. 회개도 내가 하는 회개는 나를 변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회개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진정한 변화를 통과할 수 있다. 이 변화의 시작은 우리가 우리 힘으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왜 당신의 삶이 그렇게 힘든가? 왜 그렇게 자기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가?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말하면서 어느새 다른 것을 우리 삶 가운데 올려놓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막는 영역들이 무엇인지 헤아려보자. 예수님의 발치에까지 가지고 나갔지만 더는 깨뜨리지 못한 채 여전히 두 손에 꽉 틀어쥐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저는 깨어지기 싫습니다. 상처받기 싫습니다. 내 체면도 좀 생각해주세요. 나도 영광을 같이 받고 싶습니다.s k도 적당히 같이 누리면 안 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네 안에 네가 너무 크면 내가 들어갈 수 없단다. 나는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구나.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나 네 안에 네가 너무 커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네 것을 달라는 이유는 네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너를 온전케 하려면 네가 잡고 있는 그것을 깨뜨려야 한단다. 네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네가 그것을 끝까지 잡고 있느니 줄 수 없는 거란다.”

 

 

2부 자기의(自己義) 내려놓기

 

6장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화낼 수도 원망할 수도 없다.

잃어버린 탕자들 중 큰아들은 계속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잃어버린 존재였다는 사실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비유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 또한 잃어버린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큰 아들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간 이유는 그의 인생에 아버지의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아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비록 그가 아버지의 집에 남아 있었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이 과정에 나의 분노나 원한의 감정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의 분노나 원한은 실제로 내가 하나님을 전혀 의지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될 뿐이다. 인정받고 싶은데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무시당한다고 생각 될 때 우리는 분노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른 사람이 감추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건드릴 때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분노하고 좌절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누군가와 자신을 비교하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비교 대상보다 자신이 못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분노한다. 또 비교 대상보다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지 못하거나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원망하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우리 주변에 우리의 특정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들을 붙여주신다. 만일 우리가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찾는다면 우리는 핵심을 놓치게 된다.

 

 

7장 나는 판단할 권리가 없다.

일단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마태복음 7장 2절 말씀으로 설명된다. 즉, 비판을 하는 사람이 그 비판을 받기 때문이다. 판단을 하면 판단하는 사람의 영이 즉시 묶여버린다. 그 사람이 학교의 선배든, 선생님이든, 회사 상사든, 평소 싫어하는 정치인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묶고 있는 그것들을 풀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묶고 있는 한 당신도 묶이기 때문이다. (마 18:18). 우리가 남을 판단하게 된 근원에는 선악과가 있다. 선아고가를 따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나와 내 주변을 보기보다 나의 의를 기준으로 판단하겠다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어린 눈으로 형제자매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 이것이 판단이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판단의 이유가 자신에게 동일하게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7장 3,4절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기에 앞서서 내 안에 있는 들보부터 제거하라고 명하신다. 그 들보야말로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어떤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다면 그 현상이면에 우리 안에 동일한 문제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C.S. 루이스가 말한 것처럼 교만한 사람이 교만한 사람을 가장 잘 알아본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한 몸이다. 몸의 한 부분이 아플 때 손이 해야 할 일은 아픈 부분을 끌어안는 것이다. 병들고 아픈 이유가 입이 음식을 먹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손이 비판할 수 있는가? 몸이 아픈 데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다. 음식을 먹지 않은 것은 손과 발에게도 책임이 있다. 상호의존 관계가 파괴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내 생각만 남게 된다. 결국 내가 공동체에 유익을 끼칠 수 있는 기회마저 잃게 된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비판으로는 그 사람이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해를 입을 수 있느니 비판을 삼가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 6절 말씀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의 판단에 대한 가르침에 주목해야 한다. 진주는 바로 진리를 담은 말, 다시 말해서 판단하는 말이다. 우리가 비판할 때 그것은 일견 진리의 말이다. 그런데 상대가 돼지의 상태일 경우, 진리를 담은 말의 가치를 모르고 그 말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그 a라로 상처를 받아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원한을 갖거나 해치려 한다. 우리가 지적을 받고 변화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모두 매우 훌륭한 사람들로 바뀌었을 것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격려와 사랑의 표현 그리고 눈물의 중보기도이다. 우리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내 의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판단과 달리 분별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둘째 아들을 대하는 것이 분별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하는 사람에게는 긍휼의 마음이 있다.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할 네 번째 이유는 마태복음 7장 9절부터 11절의 판단하는 사람이 자기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스스로 판단하는 의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희소하다. 내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해결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결단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8장 고통당한다고 하나님을 헤아리겠는가

하나님께서 어려움이나 문제를 허락하시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성장하도록 축복하시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대로 순종했지만 일이 잘못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또는 가족이 중병에 걸리거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랑하는 이에게 이토록 무의미해 보이는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섭섭하고 그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다. 내 삶의 목표가 평안과 행복이라면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에 절망하여 하나님이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만 하면 모든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잘 풀릴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이후 연단의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만난 것은 기근이었다.

 

이삭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머물면서 흉년을 만나게 되었다. 야곱의 축복도 고난이 전제되었다. 사물에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 다윗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울 왕으로부터 받은 연단이었다. 조이 도우슨이 말한 대로 핵심은 바로 “성공이 아니라 순종이다.” 하나님은 지혜가 부족한 우리의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으시기 때문에 더 신뢰할 만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세계를 통치하신다. 욥기의 교훈은 주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현재의 상황을 허락하신 이유를 밝혀주실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받는 고난을 낭비하지 않는 비결이다.

 

 

9장 하나님은 일의 성과가 아니라 마음을 원하신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힘들어진다. 대부분 교회에서 일하다 지친다. 어느새 일 중심의 사람으로 바뀌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주일 아침부터 밤늦도록 열심히 일하면 아버지가 나를 더 사랑해주시고 인정해주실 거야’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값없이 복음을 들었고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새 이 큰 아들처럼 내가 하는 일의 대가를 바라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매일 성경을 읽고, 훈련받고, 교회의 여러 사역을 위해 시간을 내는 일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정비례하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고, 영적으로 더 깊어지려고 말씀을 보고, 운전을 하면서도 찬양을 듣는다. 물론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귀한 일이다. 하지만 혹시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더 많이 사랑해주시지 않을까? 남들보다 나를 더 특별하게 대우해주시지 않을까?’ 라는 동기가 밑바닥에 숨어 있다면 문제가 있다. 내가 일한 만큼 인정받지 못했을 때, 나는 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을 더 챙겨줄 때, 다른 건 몰라도 교회에서만큼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인정받고 싶었는데 오히려 핀잔을 들으면 더욱 속이 상하고 화가 난다.

 

왜 그럴까? 이만큼 일하면 이만큼의 보상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며 아들로서 자유를 누린 것이 아니라 품꾼의 정신을 가지고 대가를 바라며 일한 것이다. 결국 이 큰아들은 잘못된 동기로 착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착한 아들인데 속에서는 그 영혼이 썩어가고 있으며 아버지와 더 이상 인격적인 관계도 맺지 못하고 있다. 큰아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가치는 내가 하는 일에 달려 있어. 내가 세상에서 인정받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내 가치를 높여야 해. 따라서 내가 하는 일만큼은 완벽해야 해!’ 이런 사랑은 이 세상의 논리를 가지고 신앙생활로 들어와 자기도 힘들고 다른 사람도 힘들게 한다. 그런 논리로 보니까 여기저기 잘못된 것이 보이고 판단해야 할 것들이 먼저 드러나는 것이다.

 

 

3부 더더 내려놓기

 

10장 인생 계획의 모든 결정을 맡기는 더 내려놓음

하나님이 왜 당신을 통해서 일하실 수 없는지 아는가? 당신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당신의 자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이 들어가실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이 갖고 있는 틀, 당신이 고집하는 방식, 당신의 계획을 깨버려라. 그리고 주님의 것으로 채우라. 이것이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시 37:5)라는 말씀의 핵심이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세상에 한 발을 디디고 한 발을 하나님께 디디면 근본적으로 세상을 택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과 세상에 양 발을 걸친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세상을 따라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따라가는 법은 없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말씀이다.

 

 

11장 전적 의존자의 삶을 향한 더 내려놓음

우리의 관심은 늘 성공에 맞춰져 있다. 우리의 관심이 성공에 맞춰져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가 없다. 심지어 그 성공이 하나님의 사역의 일환으로서 성공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온전한 도구로 쓰임 받지 못한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거룩히 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에는 성숙의 기준이 다르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영적 존재가 하나님께 의존적인 상태로 들어갈 때 그것을 가리켜 성숙이라고 말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시 37:5).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성숙의 표징이 된다. 우리가 항복할 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이 아니라 성숙이다. 이때 성숙의 기준은 세상에서 말하는 성숙의 기준과 다르다. 세상에서는 종속적인 위치에 있다가 독립적인 존재가 되면 성숙했다고 이야기한다.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다가 독립할 때 성숙이라고 한다. 때로는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본질적으로 성숙한 개체로 분리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 이제 나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런 하나님나라에서는 성숙의 기준이 다르다. 우리가 항복할 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12장 아버지의 사랑을 만끽하는 더 내려놓음

쓰임 받는 것과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 중 예수님을 대접하기에 분주했던 마르다보다 예수님과의 교제를 택한 마리아를 칭찬하셨다. 예수님께서 그 집에 오신 이유는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제하며 나누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목적을 자아실현에 두는 경우가 있다. 내 가치를 증진시키고 내 행복을 확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가를 바라고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큰아들의 모습이다. 복음의 삶과 관계가 없다. 내가 죽고 주님이 사시는 삶, 성공이 아닌 주님의 거룩과 영광을 목표로 사는 삶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복음의 삶과 매우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13장 더 내려놓기 위한 온전한 내려놓음

《내려놓음》에 나오는 ‘내려놓음’이라는 단어는 복음의 핵심 가치인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받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을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좀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빌려온 표현이다. 내려놓음이라는 용어를 가장 간단히 정의하자면, 내가 추구하는 길과 주님이 내 인생 가운데 부여하신 목적이 서로 다를 때 내가 추구하는 것을 버리고 주님의 목적을 붙잡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내가 추구하는 것, 내가 목표로 삼았던 것이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뜻과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하나님의 뜻에 내 추구와 목표가 부합되도록 맞추어 가는 것이다. 즉, 내가 가진 열망과 내게 익숙한 길을 버려두고 주님의 뜻을 좇는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한 내 육신의 욕구가 죽고 주니의 거룩하심이 나를 지배할 수 있도록 내 의지를 주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내려놓음은 나의 갈망이나 욕구를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맞추는 과정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거소가 내려놓는 삶은 항상 맞물러 가게 되어 있다. 이 정의가 내려놓음과 관련한 많은 오해를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기보다 힘드니까 그만 포기해버리자는 식의 자세는 옳지 않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버리기로 결단하는 학생이라면, 설영 자기가 하기 싫더라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공부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공부를 포기하는 데 있는지 쉽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고려해보건대 하나님은 시작하신 일을 온전히 끝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내려놓는다는 것을 나의 욕구를 버리고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그 차이는 분명히 드러난다. 즉, 하기 싫은 일이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면 하겠다고 순종하는 것이 주님께 내려놓는 행위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하는 것은 주님께 내려놓는 행위와 관계가 없다. 하나님 안에서의 내려놓음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단순히 비워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책임을 떠맡는 자리를 감당하는 일,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자로 구비되도록 적극 훈련받는 행위가 내려놓음의 한 표현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주님 앞에 내려놓는 행위는 자포자기와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흔희 자기에게 행복한 일이면 하나님의 듯이 아닐 거라고 우려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저 음울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모습을 대단한 영성의 지표처럼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내 열망을 하나님께 투사하며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나 그 반대도 동일하게 문제가 될 수 있다. 마치 부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구체적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그 반대로 부가 인간 타락의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께서 부하게 하실 때는 부한 데 거하다가 핍절하게 하시면 핍절한 삶 가운데 겸비하며 감사함으로 영위하는 것이 주 안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에 순복하며 하나님의 뜻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 내려놓음의 지혜이다. 따라서 내가 포기하고 버리려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늘 물어야 한다.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께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사명, 영적 성장이나 유익, 하나님과의 교제, 섬김과 관련된 것들이다. 예를 들 어 어떤 배우자를 선택할 것인지, 어떤 직장을 구할 것인지, 사역과 관련하여 어떤 원칙을 세울 것인지, 어떤 집을 얻을 것인지 등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일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주님의 교제에 유익하고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