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년아! 가슴에 하늘을 품어라』
이호혁 지음
차례
들어가는 말
1. 신앙
인간과 신앙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혼자가 아니다
두 세계
영생
성경
찬송
목적
예배와 기도
세상 속의 세 힘
축복의 원리
파멸의 원리
빵과 독약
2.자아
나는 누구인가
자기 존중
생명에의 놀람 영혼에의 관심
가치관
자기 모습
독서
정서
매력
3.인생
인생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
인생을 아름답게 하는 것
채무 심리, 채권 심리
생활 질서
비전
용기
관점
성공
소유와 존재
사람들 견해
사랑의 증거
사랑받는 길
약함의 장점
슬픔의 수업
Part 1 신앙
♣ 인간과 신앙
인간과 신앙, 그것은 몸과 생명의 관계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할 영원한 반석이시오 영원한 등대이시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니라.”(마 28:20)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아, 언제까지나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이런 관계는 이 세상에는 없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거할 수 있다. 이렇게 주님과 관계를 이루면 주님은 영원히 우리를 ㄹ떠나지 않으신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가 영원히 혼자가 아니라는 이 사실이 인생의 어려운 상황을 뚫고나갈 힘을 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부모를 잃고 비를 맞고 낙상한 새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그러나 믿는 자는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다.
♣ 두 세계
두 세계가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아래의 세계와 위의 세계, 물질적 세계와 영적 세계이다. 우리의 출생과 성장과 인생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식주와 금과 명에는 사람들의 목표가 되고, 세상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무대가 된다.
그런데 세상이 온통 세속주의와 물질주의에 물들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하지 않고 영생의 축복을 사모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적 생명을 소유하지 못한 그 영혼들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한다. 왜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영원한 세계를 추구하지 않는 것일까?
지상의 스크린에 마음의 시야가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주의는 신앙을 향한 눈을 가린다. 세속주의는 사람의 발목을 세상에 묶어놓아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세계로 나아감을 저지한다. 물질 밖에 보이는 것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이렇게 살아간 결과는 영원한 멸망의 세계인 지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살아온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곳이다. 두 세계가 있다. 아래를 향하여 산 사람들은 아래의 세계로, 위를 향하여 산 사람들은 위의 세계로 간다.
젊은이여, 위를 향해 걸으라. 네 인생을 생각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세계에 대한 비전을 가지라. 하나님 안에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높은 것이 있다. 슬프고 힘든 날에도 하나님이 널 위해 마련하신 이 무한한 세계를 바라보라. 지금 우리는 그 세계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하지만, 때가 되면 그 세계는 우리에게 다가와 그 영광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 영생
초등학교시절 내가 사는 동네는 산으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여름이면 산에서 매미를 많이 잡았다. 매미는 약7년 간 애벌레 상태로 땅 속에 있다가 열흘에서 보름 동안 성충 매미로 지내다가 죽는다. 유충의 기간에 비하면 성충의 기간은 억울할 정도로 짧다. 여름에 산에 오르면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매미 유충의 껍질을 많이 볼 수 있다. 매미 유충의 목적이 성충 매미이듯이 인생의 목적은 영생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으로 부르셨다. 어려운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리고 비현실적인 말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영생만이 영원한 인생관인 것이다.
가위의 법칙을 아는가? 시작점은 같지만 그 두 끝의 거리는 크다. 가위의 두 끝을 무한정 연장시켜 놓는다면 두 끝 사이의 거리는 어마어마한 것이 될 것이다. 영생의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도 그와 같을 것이다.
♣ 성경
내가 성경이 특별하다고 느낀 것은 성경이 주는 영적 생명과 신성함과 은혜 때문이다.
성경은 변론하지 않는다.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 구차스런 설명을 하지 않는다. 성경의 내용 전체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선포하며 믿음을 요구한다. 성경 속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격과 은혜가 빛난다. 참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 문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신격을 만난다. 성경의 진리에 부딪힌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으며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영접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준다. 성경은 우리를 지혜롭게 하며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성경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영원한 세계를 보여준다. 성경은 곧 복음인 것이다.
성경을 펴라. 복음이 교활한 세상에서 너를 지키고 영생에 이르도록 인도할 것이다. 조용한 시간에 성경을 펴 읽으면서 네 하나님을 만나는 습관을 길러라.
♣ 찬송
찬송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은혜롭게 한다. 찬송은 부르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자기 신앙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음악적 수단이 된다.
여러 가지 주제의 찬송곡들. 은혜, 회개, 구원, 신앙, 감사, 경배, 기도, 소망, 평화, 기쁨, 헌신, 전도, 시련, 환난, 질병, 고독 전투 등. 찬송은 위의 어떤 현실에서나 부르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게 영적인 감동을 준다. 찬송은 음악적인 기도이다. 우리는 찬송을 통해 음악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경배를 드린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하늘을 향해 열리고 그렇게 열린 마음을 통해 하늘의 정서가 전달된다. 우리는 다윗의 그 많은 찬송시들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찬송은 공중예배 의식뿐 아니라 개인의 영적 생활에도 필수적인 사항이다. 우리는 고철더미가 아니라 인격이고 인격은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노래에는 칼라일의 말처럼 예배의 본질이 들어가야 한다.
♣ 세상 속의 세 힘
하루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천국 진리를 가르치신 후, 제자들과 함께 바다 건너편으로 건너 가셨다. 행선 중에 주님께서는 배 뒤편에서 잠이 드셨고 제자들은 배를 몰아 나아가고 있었다.
이 때 기후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하늘 아래 거센 바람이 불고, 이 바람이 일으킨 파도는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를 덮쳤다. 광풍에 울부짖는 바다, 험악한 기세로 일어나 덮치는 파도, 파도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배. 제자들은 공포에 질렸다.
바다에서 뼈가 굻어진 제자들은 자기들의 경험과 기술을 동원하여 이 난국을 타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들은 비웃기라도 하는 듯 더 격렬해지는 바람에 파도는 소용돌이쳤다. 두려움에 질린 제자들은 그제야 후미에서 잠드신 주님께로 의식이 돌아갔다.
주님께서 다가간 제자들이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 라고 하면서 주님을 깨웠다. 주님께서 눈을 뜨셨다. 조용히 일어나신 주님은 하늘과 폭풍과 격랑의 한 가운데서 계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주님의 음성이 떨어지자 고삐가 풀린 듯했던 자연의 힘이 꼬리를 내렸다. 바람이 사라지면서 파도가 가라앉고 배는 평정을 되찾았다. 주님은 자신의 신적 권위로 풍랑의 바다를 잠재우신 것이다.
들어본 이야기이겠지. 어떤 감상인가? 이 사건이 나에게 주는 교훈은 이렇다. 이것은 세상 속에 움직이는 세 가지 힘의 도표와 같다는 것이다.
첫째는 죄와 세상의 힘이다. 죄는 분명한 실재이다. 죄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을 뜻한다. 제자들은 주님을 태우고 조용한 바다 건너편으로 행선하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 빛나는 태양, 모두 하나님의 은총을 말한다. 자연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전해주는 통로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 죄가 개입됐고 죄는 이상 현상을 일으켰다. 죄는 하나님의 축복을 변질시킨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크지만 인간의 죄는 중단되지 않고 문제는 파도처럼 증가한다. 이 울부짖는 거대한 바다 속에서 사람의 힘은 얼마나 약한가? 사람들의 수많은 노력은 파도 속에 삼켜진다. 우리는 우리가 당한 시련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론 미치지 못한다. 살아가노라면 죄악의 어두운 힘과 세상의 냉엄한 현실에 부딪힌 네 힘의 한계를 깨닫게 될 것이다. 성실하게 싸워라. 하지만 네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 인간의 힘을 믿지 말라. 낙엽은 파도를 이길 수 없다. 주님의 힘, 그것이 이 바다 위에 움직이는 세 번째 힘이다. 보라, 저 무서운 바람과 격랑의 바다 위에 우뚝 서 계신 주님을, 주님은 어려운 현실에 부딪혀 떠는 연약한 잎사귀를 불쌍히 여기신다.
주님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잎사귀에게로 가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 잎사귀 같은 배에 서서 조용히 단 한 마디를 하셨을 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인생에서 그리스도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고루한 장애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승리는 네 힘이 얼마나 센가에 달려있지 않고 네가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 축복의 원리
하나님 안에서 경건한 복을 누리는 사람들의 인생을 살펴보라. 그 안엔 어떤 원칙이 있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의 원리를 따라 산다. 복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배를 타고 축복의 원리라는 바람에 따라 가는 돛단배와 같다.
신앙생활에는 영적 부분이 있고 실제적 부분이 있다. 신앙은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차원 높은 교리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예배와 감사와 헌신과 십일조 생활과 전도 등 실제적 사항으로 완성된다. 만일 신앙생활을 교리만 가지고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머리만 가지고 살겠다는 것과 같고, 교리 없이 실천적 행위로만 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손발만 가지고 살겠다는 것과 같다. 신앙생활은 진리와 실천이 어우러져 이루는 수예와 같은 것이다.
지금 내가 진술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 실제적 부분이다. 전쟁터에는 안전지역과 위험지역의 분계선이 있다. 분계선은 사람으로 하여금 위험지역에 들어가 화를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경고이다. 위험지역에는 지뢰나 함정 등의 장애물이 있어 여기에 걸리면 인생이 조각난다. 이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 하여도 그것은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라 제한된 자유이다. 이 세상에 수천 갈래의 길이 있다 하여도 그 모든 길이 다 복된 길이 아니다. 어떤 길은 파멸의 길이다.
분계선에 위험 표지가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길과 파멸의 길 사이에 경고의 말씀을 두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 안에서 축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축복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선택해야 한다.
축복의 원리는 이렇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다.
둘째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다. 세속적인 인생론 행복론은 하나님 말씀과 무관한 행복을 가르친다.
셋째 하나님께 헌신하라 이 세 가지가 네가 축복 받을 커다란 원칙인 것이다.
♣ 파멸의 원리
축복의 첫째 원리가 경외하는 신앙이었으니 파멸의 첫째 원리는 불신앙이 될 것이다.
교만한 사람들은 신앙을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연약한 사람들이 도피하는 정신적 잉여물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 신앙을 인생의 실제적 문제와는 거리가 먼 마음의 문제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란 자기들이 꿈꾸는 인생에 거추장스런 장애물 같은 존재이다. 그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도하면 웃는다.
하나님 없는 마음은 태양 없는 지구와 같고, 하나님 없는 삶은 주인 없이 떠도는 배와 같다. 그것은 곧 죽음이다. 예레미야 2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학문도 연애도 직업도 취미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 본분에 순종된 부업일 뿐이다. 불신앙은 파멸의 길이다.
파멸의 둘 째 원리는 불순종이다. 하나님은 만물의 근본으로서 만물이 생존할 수 있는 진리를 설정하셨다. 피조물은 자신의 생존과 행복을 위하여 이 진리에 순복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일까? 전에 언급한 것처럼 죄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명령하실 수 있는 분이시오, 사람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해야 하는 존재이다. 불순종은 하나님과 우리의 행복한 관계와, 나아가 우리의 행복한 생존을 파괴하는 길인 것이다.
파멸의 셋째 법칙은 자기에게 헌신함이다. 한 구두쇠가 뒷마당 으슥한 곳에다 항아리 하나를 묵어두고 돈이 생기면 밤에 그 항아리에다 집어넣고는 흙을 덮었다. 은밀하게 행동했지만 담 너머 사람이 밤이면 담벼락 건너편에서 삽으로 흙을 긁어내는 소리를 이상히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구두쇠 가족이 나들이를 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밤에 담을 넘어 항아리를 파내어 감쪽같이 흙을 덮고는 항아리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갔다.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엔 돈이 가득했다. 다음날 구두쇠가 돌아와 살펴본 뒷마당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며칠 후, 돈을 넣어두기 위해서 구두쇠가 흙을 걷어낸 그곳에는 항아라기 없었다. 이때의 구두쇠 심정은 독자의 판단에 맡긴다. 이 알려진 이야기는 자기에게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그는 자기를 섬기며 자기중심적인 인색함을 즐겼다. 하나 둘 쌓여갈 때마다 그 달콤함이라니.
그런데 그 달콤함은 날아가 버렸다. 자기의 어리석음이 자기를 속였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지혜하고, 사람은 자기 외의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번개처럼 짧은 인생을 실속 없는 선행에다가 낭비할 수는 없다고, 재물이 쌓여가는 기쁨을 놓칠 수는 없다고, 항아리들이 늘어감에 따라 자기 존재도 늘어가는 것이라고 자기가 자기를 속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없다. 돈도, 소망도, 긍지도,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도 없이 완전 파멸이다. 이것이 평생을 자기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 도달하게 되는 결과이다.
Part2 자아
♣ 나는 누구인가?
인생에서 중요한 발견 가운데 하나가 자기 발견이다. 자기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인 것이다.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인생은 땅 위를 굴러가는 바퀴처럼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산을 뚫고 보석을 캐낼 수는 없다. 자기 발견은 그 보석과 같은 것이다.
구약성경의 다니엘서에는 교만에 대한 징벌로 7년간 병에 걸려 고생하는 느부갓네살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B.C. 626년 앗수르의 세력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여 신흥 바벨론을 세운 나보폴라살의 아들이었다. 그는 B.C. 605년 앗수르와 이집트의 연합군을 메소포타미아 북부 지역인 갈그미스에서 대파하고 근동을 통일한다. 그리고 이 해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정복하는데 이 때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 다니엘이라는 선지자가 있었다. 느부갓네살은 지혜롭고 열정적인 지휘관이었다. 또한 탁월한 군인이며 정치가요 건축가이기도 했다.
미디안 여자 아미야와 결혼할 그는 고대 세계의 유명한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을 만들어 그녀에게 주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는 백성들로 자기가 세운 우상 앞에 절하게 하고, 또 자기가 이룬 업적에 대해 자만하게 되는데 이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리며 그의 통치에 위기가 올 것임을 알렸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이미 그가 꾼 꿈을 다니엘이 풀면서 예언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숙하지 않고 계속 교만한 심리를 가짐에 따라 하나님은 그를 징벌하신다. 그가 걸린 병은 수화광이라는 것으로서, 영어로 하면 라이캔트로피라고 한다. 그리스어의 늑대라는 뜻의 lykos와 사람이라는 뜻의 anthropos의 합성어로, 낭화증이나 수화망상이라고도 불리는 이 병은 자신이 늑대나 짐승이라고 믿는 정신장애이다.
한때 늑대인간이라는 미신이 유행했었는데, 초현실 상태에서 사람은 늑대인간이나 다른 동물의 모습을 띤다고 믿는 것이다. 윤회나 환생을 믿는 사람에게 이런 망상이 많이 나타난다. 환자는 보통 그 지역의 난폭한 맹수의 모습을 띠는데, 중국, 한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에서는 호랑이, 아프리카에서는 표범이나 하이에나, 유럽에서는 곰이나 늑대이다.
느부갓네살은 병에 걸려 자신이 짐승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이상한 행동으로 와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왕궁에서 쫓겨나 들판으로 간다. 거기서 그의 머리카락은 짐승의 털처럼 자라고 손톱은 독수리 손톱처럼 되고, 짐승처럼 풀을 뜯어먹는 7년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본성이 사람이었기에 그는 그 생활의 고통을 어렴풋이 자각하면서 7년 후 하나님을 찾게 된다. 그러자 그의 짐승 생활은 끝나고 그는 다시 왕위로 복귀한다.
그 후 그는 사람의 생사화복, 정신의 움직임조차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전보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되었다. 그 증거로 건강을 회복한 후에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렇게 왕의 직무를 보다가 그는 B.C. 562년에 죽는다.
자기를 모르면서 살았다는 것은 아무리 잘 살았어도 손실이다. 마피아 단원으로 행세하기를 좋아하는 청소년들, 연예인적 기질이 흐르는 젊은 세대들, 부동산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기성세대들, 이 모두는 자기 상실의 현상이다. 자기를 안다는 문제는 중요하다. 그럼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회적인 자기가 아니라 본질적인 자기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학생이다, 한국인이다, 기술자이다, 교수이다, 라는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는 사회적 신분도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게 좀 잘못되어도 바르게 살 수는 있다. 하지만 자기 정체성이 오해되면 올바른 삶의 불가능하다.
세상은 우리에게 이것을 바르게 가르쳐줄 수가 없다. 우리의 정체는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인간과 하나님의 자녀, 여기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인간이라는 말에는 지적인 동물이라는 냄새가 나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에는 영적 존재가 느껴진다. 하나님은 우리를 단순히 지적 동물이 되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시려고 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이다.
자기를 물질이나 동물로 믿는 것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존엄성을 발견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우리가 찰나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임을 믿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이보다 더한 자기 발견은 없다.
♣ 영혼에의 관심
조금 있으면 죽어 멸망될 가엾은 목숨이 예쁜 머리핀을 꽂으면 무얼 하겠는가? 네 영혼에 관심을 가지라. 네가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를 확인하라. 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네 안에 영적 생명이 있는지 확인하라. 이 세상이 환난으로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화가 네 안에 있는지를 확인하라. 그렇지 않으면서도 네가 지금 태연하게 다른 것을 꿈꾸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만용이다. 주님의 말씀은 바꿀 수 없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 말씀은 육과 영의 가치를 뒤바꿔버린 삶의 위험성과 영혼의 가치를 동시에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 가치관
영적 가치관과 세속적 가치관, 이 두 가지는 조화될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물론 유명인사가 되고 재물이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세속적 가치관을 버린 사람들이다. 영적 가치관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선용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하늘에서 매가 덮치는 줄도 모르고 땅에 떨어진 몇 마리의 파리를 두고 병아리들이 다투고 있다. 그러한 삶이 우리가 아닐까? 세상에는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으며, 위에 있을 것이 있고 아래에 있을 것이 있으며, 먼저 할 것이 있고 나중에 할 것이 있다. 이것을 가치 순위라고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 순위를 분별한다. 참 신앙인은 하나님 안에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 안에 진정한 성공이 있다는 것을 안다.
신앙만이 산을 오르는 길이다. 신앙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신앙적 실패는 인생의 실패인 것이다. 순간의 사람이 되지 말고 영원한 사람이 되어라. 영원한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가치관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 매력
매력적인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매력적인 인물이 되고 싶은가? 흔히 여자들이 바람둥이에게 끌린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근거가 있는 말이다. 이때 바람둥이나 그에게 끌리는 여자는 속빈 사람들이다. 바람둥이는 사랑하려 하지 않고 경험하려고 한다.
그래서 한 사람에 진지하게 사랑을 주지 못하고 머물지 못한다. 바람둥이에게도 어떤 면에서의 진실성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라면 그런 종류의 감정이나 삶을 혐오할 것이다. 바람둥이가 상대에게 진지하고 상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고도의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인격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는 어리석게도 바람둥이의 이성 편력을 주목하며, 저 사람을 정복해보고 싶다는 허영심리를 가진다. 그런데 바람둥이는 자기에게 끌리는 여자가 머리 속이 빈 여자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기에게 끌리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바람둥이가 좋아하는 여자는 자기에게 끌리지 않는 정숙한 여자이지만, 그런 여자는 바람둥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람둥이의 한계이다.
그러니까 바람둥이가 유혹할 수 있는 여자는 대부분 속이 비었고, 바람둥이는 그런 여자를 좋아하지 않기에 결국 두 사람 사리엔 아무 것도 남는 게 없게 된다. 그러니 바람과 바람이 만나니 그사이에 무엇이 남겠는가? 강정과 강정을 합쳐 뭉치면 으깨어져 사라지고 만다. 바람둥이의 매력은 매력이 아니라 속이는 힘이다. 내가 말하는 매력은 그런 게 아니다. 진정한 매력은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결과로 오는 매력을 뜻한다.
자석을 서로 다른 극끼리 마주치면 끌어당기지만 같은 극끼리 마주치면 배척한다. 이때 끌어당기는 힘을 인력이라고 하고, 배척하는 힘을 척력이라고 한다. 인간과계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두 가지 형이다. 인력형과 배척형.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가까워지고 싶은 인간형과 멀어지고 싶은 인간형을 만난다. 가까워지고 싶은 인간형이란 인격적 매력을 가진 인물을 말하고, 멀어지고 싶은 인간형이란 비인격적인 인물을 말한다. 남에게 미움을 받고 싶은 사람은 없다.
남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려고 안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은 누구든지 남의 마음에 들고 이목을 끄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되어지는 게 아니다.
매력이라는 말을 매혹이라는 말로 오해해선 안 된다. 순전히 외모적 특징으로 남의 이목을 끌려고 하는 태도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매력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일종의 감화력 또는 인격이다.
선천적으로나 또는 후천적 이유로 기형이 되어 사람들이게 기피감을 일으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정상적인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기피감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여기 남들이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있다 하자. 그러면 그들이 똑같이 생겼기 때문에, 그들이 외부에 미치는 인상도 똑같을까? 그렇지 않다. 외모를 분간하기 힘들더라도, 그 사람들의 영혼이 다른 이미지를 발산시킨다. 이때 사람들은 두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두 사람의 인격으로 분간하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 몸 언어는 그의 영혼이 비쳐 나오는 통로가 된다. 이때 그의 얼굴과 몸과 언어를 통해 부정적 영혼이 느껴지면 사람들은 기피심리를 가지게 된다.
반대로 신앙 경건함 선량함 따뜻함 지혜로움 평화로움 온유함 관대함 품위 민첩함 예의바름 등은 긍정적인 인격의 특징들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에게 매력을 느낀다.
내 판단으로는 사람에게 매력을 일으키는 커다란 요소 세 가지만을 말하라고 하면 생명과 지혜 그리고 사랑을 들고 싶다.
매력을 일으키는 첫째 요소인 생명,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 죽은 아내와는 하룻밤도 잠자리를 같이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멋있게 생겨도 마네킹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고 동물이고 꽃이고 나무고 강한 인력을 일으키는 본질은 생명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최고의 관심은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점화시켜줄 수 있는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게 되어 있다.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라.
매력을 일으키는 둘째 요소는 지혜이다. 지혜는 인격의 빛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불이 켜져 환한 집과 같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을 신앙함으로, 성경을 읽음으로, 기도함으로, 인생을 체험함으로, 독서함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매력의 세 번째 요소는 사랑이다. 사랑은 집의 보일러와 같다. 사랑이 그 사람 안에서 그를 따뜻하게 만들면서 다른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아이든 어른이든 사라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부딪힌 따뜻한 가슴을 잊지 못한다. 한 번의 따뜻한 눈동자는 상대의 마음에 영원히 새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기성은 척력을 일으키지만 사랑은 인력을 일으킨다.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는 법은 없으니 사랑 받고 싶거든 사랑하라.
Part3 인생
♣ 인생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
청소년 시절 내가 애독하던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에서의 한 마디가 기억난다. “인생은, 그대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대한 봉사이다.” 청소년이나 청년 시절엔 자기가 바라볼 인물과 인생이 필요하다. 자기가 본받을 규범이 될 만한 인물의 인생은 그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런 인생의 비전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저울에 달린다. 우리는 자주 인생의 목적과 자기가 하는 일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언제나 인생의 목적을 유념하라. 하나님을 섬기는 길은 수없이 많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적성에 맞는 것을 찾아서 섬기는 마음으로 감당하라. 그리고 일단 자기가 할 일이 결정되면 거기에 충실하라.
바울 사도는 자기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혼도 하지 않은 몸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 길을 잃지 말라. 살아있는 동안 힘닿는 데까지 섬기도록 하라.
♣ 채무 심리, 채권 심리
한 사람의 심리는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 조성된다. 어떤 심리로 어떻게 생각하고 처신하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그 사람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 사람 안에 건전한 심리가 있으면 건전한 영향을 발휘하고, 불건전한 심리가 있으면 불건전한 영향을 발휘한다. 건전한 심리 가운데 하나가 채무 의식이다. 채무 의식이란 자기가 빚진 자라는 겸손한 마음가짐이다. ‘
자기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이 위에서 주어진 선물이라는 것, 그래서 자기를 빚진 자로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채권 심리란 그 반대이다. 자기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이 위에서 주신 선물임을 모르고, 오히려 모든 것이 자기에게 어떤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믿는 교만한 마음가짐이다. 채무 심리는 신앙적 마음이고 채권 심리는 불 신앙적 마음이다. 채무 심리는 감사 의식이고 채권 심리는 불평 의식이다. 채무 심리의 사람들은 황송한 마음으로 살지만, 채권 심리의 사람들은 당연한 마음으로 산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는 사람 모두가 죄인의 심리를 가지고 있다. 죄인의 심리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기적 정신이다. 사실은 완전히 빚진 자이면서도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기를 바라는 뻔뻔스런 마음이다. 그래서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만족하고, 그렇지 않으면 욕설을 한다. 당연히 자기에게 돌아와야 할 몫을 받지 못했다는 부당한 분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교만이요 감사하지 않는 마음이다. 버려진 자기에게 찐빵과 만두를 배가 부르도록 사주고, 그것도 모자라 사탕까지 사준 사람에게 사탕 한 알 주기를 거부할 만큼 사람은 타락해 있다.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지위를 노릴 만큼 염치가 없다. 살다보면 정말 원망스러운 일들을 만나기도 한다. 억울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조금만 더 꼼꼼히 계산을 해보면 자기가 억울함을 느껴야 할 일보다는 감사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잃은 것보다 주어진 것이 더 많은 법이다. 태어났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은 귀한 선물이다. 그런데 태어나모가 생명을 위해서 자기가 한 것은 전혀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더 큰 은혜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사아디의 말이 맞다. “개는 돌로 백 번을 맞아도 주인에게 받은 조그만 은혜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백 번을 잘해주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싸우려고 달려든다.”
채권 심리를 가진 자는 감사할 줄 모르고 경배할 줄 모른다.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대한다. 그런 마음은 고장난 마음이요 불행한 마음이다. 한 마디로 인생은 감사한 것이었다. 그래서 황송한 감사 심리는 가지고 사는 삶이 헌신의 삶이다. 이런 심리가 채무 심리인 것이다.
♣ 성공
알렉산더는 성공했을까? 그는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이집트를 정복하고 인도까지 쳐들어가서 더 이상 정복할 나라가 없음을 한탄했다. 그런 그를 본답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생각을 바꿔라. 알렉산더는 패배자이다. 자기의 정복욕에 지배되어 몰락해간 패배자란 말이다.
정권 말기 오랜 원정으로 그의 정신은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는 공황 상태에 빠져 불안하고 의심 많고 잔인하게 되었다. 그는 늘 술에 파묻혀 살다가 회군하는 도중 열병으로 죽었다. 그의 제국은 그의 자손에게 돌아가지 않고 분열되었다. 카이사르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펴나갔다. 크라수스가 죽은 후 폼페이우스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기다가 폼페이우스를 쳐부수고 일인 독재체제에 들어갔다. 간척 항만, 도로건설, 식민, 구제 등 개혁사업을 추진했다.
그의 행정력 통치력 웅변술 저술솜씨는 탁월했다. 그러나 공회장의 원수라는 이유로 원로원의 공화정 옹호파에게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다. 그를 살해한 무리 가운데는 그의 양자 부르투스가 끼여 있었다.
안토니우스, 네로,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코모두스 등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패배한 졸부의 명단에 넣고 싶다. 로마의 권력자들은 대부분 실패자들이다. 그들은 외부의 적들을 무찌른 권력자이지만 내부의 탐욕에 의해 무너졌던 사람들이다. 나폴레옹은 성공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역시는 실패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예수’ 등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여배우 비비안 리. 그녀는 청순함과 요염함을 갖춘 눈부신 여자였다. 두 번씩이나 오스카상을 받으면서 황금기를 누렸지만 그녀는 급성신경장애에다가 남편의 바람기에 시달렸다. 남편 로렌스 올리비에는 폐결핵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녀를 간호하다가 이혼을 요구한다. 결국 그녀는 고독과 폐암으로 자살이 아닌가 하는 의혹 속에서 자기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때 그녀의 나이 54세였다. 성공한 배우의 일상은 이랬다. 어디 이 한 사람뿐인가? 성공했다는 배우와 가수들의 인생은 이보다 비참한 경우도 많은 것이다.
성공에 대한 인류의 관심은 크다. 사람들은 성공을 위한 길을 찾으며 세상에는 성공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많다. 노만 빈센트 필, 나폴레옹 힐, 데일 카네기, 잭 스마일스 등은 모두 성공학 교사들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나 선배 중에는 잘못된 성공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자기 스스로 잘못된 성공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재산과 권력과 명예를 과녁으로 삼은 성공은 분명히 잘못된 성공이다.
참된 성공이란 그 이상의 문제에 있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내가 내 삶에 적용시키고 있는 간단한 성공 기준만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는 전에 언급한 바 있는 궁극적 목적을 갖는 일이다. 자동차는 자동차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는 차주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 때문에 있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다면 차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목적이 없는 사람은 편지 없는 우체통이다. 우체통은 발신자의 편지를 모아두었다가 우체부에 의해서 수신자에게로 전달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서,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태어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숭고하고 또 행복한 줄 아는가? 이 자체의 삶이 이미 성공이다. 평생 이런 노선을 따라 살아간다면 거기에 권태가 있을 수 없다.
목적위에 서라. 상황이 어떠하건 이 목적 안에서 성실하고, 결과가 어떠하건 이 목적 안에서 성실했는가를 물으라. 이 목적 안에서 성실했다면 설령 결과가 좋지 않게 보여도 최소한 행복하기 위한 전쟁에선 이긴 것이다. 그러나 이 목적에 충실한 사람은 하나님이 도우신다.
둘째, 목적이 확고하다면 그 목적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낙심하지 말고 끝없이 뿌려라. 교사가 제자에게 헌신했지만 제자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서 교사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교사는 제자들의 반응을 떠나서 교사의 도리를 다했느냐 하는데서 자기를 찾아야 한다. ㅁ루론 이것은 극단적 경우이다. 훌륭한 교사라면 대부분 제자들에게 훌륭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헌신의 중요성이다. 한 마리의 개미가 자기보다 세 배나 무거운 옥수수 알갱이를 물고 사람 머리만 한 바위 언덕을 넘어가려고 한다. 언덕 중간에서 개미는 알갱이를 놓쳐 알랭이는 바위 밑으로 떨어진다. 밑으로 내려가 알갱이를 찾아 물고 개미는 다시 조그만 바위 언덕을 넘으려고 사투한다. 다시 개미의 입으로부터 굴러 떨어진 알갱이는 아까보다 훨씬 먼 거리로 이동하여 있었다.
한참을 헤매던 개미는 알갱이를 찾아 물고 또 동일한 코스를 따라 동일한 노고를 반복한다. 개미의 진지한 전쟁이었다. 이러기를 수십 번,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일이 발생한다. 개미가 드디어 옥수수 알갱이를 물고 바위 언덕 저편으로 넘어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 개미보다는 참을성이 없다. 참된 사랑에서는 헌신이 나오고, 참된 헌신에서는 열정이 나온다.
때때로 힘이 들거나 낙심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쉽게 낙심하지 않으며 변덕스럽지 않다. 참된 헌신은 비록 화려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결과에 이를 것이다. 흔들림 없는 마음의 평화와 함께, 우리는 자주 우리의 헌신과 열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셋째, 그리고 기도해야 한다. 헌신을 자신의 힘으로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자신의 힘만으로 하는 것들은 곧 끝장이 나고 만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도 자신의 것으로 사랑하는 줄 아는가? 아니다. 사랑은 본질상 우리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자신의 힘으로 하는 줄 아는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기도는 십 분을 넘기기 힘들다. 하지만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드리는 기도는 무한정 활기차다. 우리가 자신의 힘으로 죄악이나 이 세상과 싸우는 줄 아는가?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영적 싸움은 자기의 무력함을 증명하면서 슬프게 끝날 것이다.
하지만 성령과 말씀과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싸운다면 그 싸움은 힘들지 않게 된다. 헌신이 그렇다. 하나님의 여광을 위한 헌신의 삶을 위하여 기도하라. 힘을 얻기 위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헌신의 열매를 위하여 매일 기도하라. 기도 없는 성공은 가짜이다.
마지막 한 가지 진정한 성공자는 마음의 성공자이다. 마음에 ㅍ 평화와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이 참된 성공이라는 말이다.
마음은 죽어버렸는데 겉으론 화려한 성고의 의상을 걸치고 있는 모습, 그것은 성공이 아니다. 조용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거기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라.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할. 하나님께선 자신의 방법대로 네게 충분할 만큼 축복하시고 성공하게 하실 것이다.
♣ 사랑의 증거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콜리느코프와 소냐의 이야기는 소냐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변화되는 사랑 이야기이다. 또한 롯테를 향한 자기 사랑이 성사되지 못함에 권총 자살을 하는 베르테르의 슬픈 이야기는 비극적인 연애 이야기이다.
이를 쓴 괴테는 74세의 나이에 19세의 울리케 폰 레베초프에게 청혼을 했었지만 주변의 만류로 성사되지 못한다.
어린 시절 베아트리체를 보았던 단테는 요절한 베아트리체를 평생 잊지 못하는 그리움 속에 살아간다.
역시 짝사랑했던 라우라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페트라르카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세상을 방황한다.
폭풍의 언덕은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을 방해했던 사람들에게 철저히 복수하는 히스클리프의 우울한 사랑이야기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랑이야기들이 있다. 이 사랑 이야기들이 모두 옳거나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인간의 중요한 관심사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사랑은 우리 마음에 비치는 태양빛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사랑을 거두어버리면 인생은 예수님 없는 마구간이 된다.
사랑의 증거는 몇 가지로 알아볼 수 있다.
첫째, 서로가 참된 사랑 관계 가운데 있다면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정신적인 연합이다. 참 사랑은 서로를 서루에게로 이끌어 일치시키는 작용을 한다.
둘째, 두 사람이 진정 사랑한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한다. 참된 사람은 주조오간계도 성적관계도 친구관계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내 삶이 당신의 삶을 당신의 삶이 내 삶을 보완하는 보완관계인 것이다. 서로는 혼자였을 경우보다는 더 완성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비록 재능이나 취미나 능력이 다르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분명히 어느 부분에선가의 보완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셋째, 안정감이다. 일체감이 주는 안정감은 일종의 심리적 평화이다. 진정한 사람의 교류는 서로에게 안정감을 주고, 이 안정감은 또 서로의 생활에 활력을 준다. 그래서 성공한 이성관계는 건실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반대로 일치되지 않은 쌍은 불안감이 쌓이는데, 이때 이들의 생각이 나뉘고 관계가 겉돌게 된다.
넷째, 진정한 사랑은 견고하다. 살면서 서로의 사랑은 상황, 환경, 성격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도전을 받는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연합된 사람은 사랑으로 이 모든 악조건을 헤쳐 나간다.
나로서는 여러 가지 사랑 중에서도 이 네 가지가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 많은 사랑 중에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랑 위에 빛나는 태양으로서, 이 태양빛이 스며있지 않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남녀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들어 거기서 나오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야말로 그들의 인생을 축복의 빛깔로 물들여줄 것이다. 이 빛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초가집은 황홀한 광채로 빛날 것이다.
♣ 사랑 받는 길
먼저 사랑하라, 그러면 사랑받을 것이다.
추운 겨울 저녁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거기 두 집이 있었다하자. 한 집에선 유리창을 통하여 따뜻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다른 한 집엔 사람의 기척이 없이 불이 커져 캄캄하다면 어느 집으로 들어가고 싶은가? 살랑은 이 등불과 같다. 애정을 품고 있는 사람과 이기심이 가득한 사람 중 너는 누구의 품에 안기고 싶은가? 물론 전의 사람이다. 너도 애정을 품은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존중, 관심, 자기부여이다. 인격에 대한 존중은 사랑의 시작이다.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수백 번 중얼거려도 거짓이다. 존중한다는 것은 상대가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상대가 나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생각을 존중한다. 의견을 존중한다. 사생활을 존중한다는 말들을 한다.
물론 이것도 존중임에도 틀림없지만,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인격을 존중하지 않을 수 있다. 또 그 생각과 행동이 하도 천박해서 존중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싫어하더라도 그도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람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것, 사람을 지위로서가 아니라 인격으로서 보는 것이 존중이다. 존중심리를 가지고 대하다 보면 그것이 상대방에게 전달되고 상대 또한 너에게 존경의 심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상대 또한 너에게 존경의 심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사랑받는 길이다.
다음은 관심이다. 관심은 상대를 기억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그렇다고 관심이 있다면서 상대를 귀찮게 따라다니면서 시간을 빼앗고 참견만 한다면 얼마 후 그 사람은 미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관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대의 사생활을 존중한답시고 상대가 무슨 일을 당하든 개의치 않는다면 그 사람도 혐오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첫째는 상대의 영혼에 대한 관심이다. 그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둘째는 상대의 필요에 대한 관심이다. 상대가 괴로워하는 것, 힘들어하는 것, 부족한 것 등을 헤아려 보는 마음이다.
다음은 자기 부여이다. 자기를 부여한다는 것은 자기를 나누어주어 공유하는 것이다. 공유란 그 사람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서 기꺼이 그 사람의 불행을 나눠 갖는 것이다. 그리고 내 인생 속으로 그 사람을 초대하여 기꺼이 내 행복을 나눠 주는 것이다.
상대의 행복을 공유하려고 해서는 안 되고 나의 불행을 공유시키려고 해서도 안 된다. 상대의 행복이나 영광이 아니라 불행을 공유하려고 하는 것, 나의 불행이 아니라 나의 행복이나 영광을 공유시키려고 하는 이것이 진정한 공유이다. 내가 불행을 겪고 있을 때 상대가 기꺼이 내 인생 속으로 들어와 내 불행을 공유하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또 상대가 자기의 인생 속으로 나를 초대하여 자기의 행복을 공유시키려고 하는 것도 별개의 문제이다. 상대의 불행은 공유하고 행복은 축복하라. 자기 아픔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의 아픔을 위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존경스러운 사람이다.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것과 남의 것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다. 그는 자기의 행복에 타인이 들어오는 것도, 남의 불행에 자기가 들어가는 것도 거부한다. 무론 우리가 이 원리대로만은 살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노력하는 자세는 중요하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간다면 상대가 구제불능의 죄인이 아니라면 너는 사랑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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