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상인의 후계자수업』
테리 펠버 지음
차례
제1장 성당의 계단
제2장 수도사와 상인
제3장 왕의 일지
제4장 유리알 화폐
제5장 부자와 천국
제6장 시련의 밤
제7장 해적 상인 아흐마드
제8장 돈을 다스리는 지혜
제9장 다시 시작되는 전설
제1장 성당의 계단
안토니오는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이제 길모퉁이를 돌아 서쪽 로마 방향으로 길을 잡아야 했다. 안토니오는 뒤돌아 어깨 너머로 손자 줄리오를 쳐다보았다. 많이 지친 듯했던 줄리오는 마차 뒤 칸에 쌓인 짚더미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많은 돈을 들여 가장 좋은 말과 마차를 구입했지만 안토니오와 줄리오가 집을 떠난 지 벌써 이틀이 넘었다. 사실 안토니오도 지치기 시작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몇 시간만 더 가면 손자의 삶이 바뀔 것이란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안토니오는 손자에게 특별히 들려줄 커다란 비밀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줄리오는 무슨 이야기냐며 할아버지를 재촉도 하고 매달리기도 했지만 성 베드로 성당에서 예배를 드린 다음에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대답뿐이었다. 안토니오는 성당 앞에서 발걸음을 늦추었다. 아직도 문 근처의 거대한 아치와 기둥 그림자가 안토니오 주변에 드리워져 있었다. 안토니오가 대리석 계단 위에 앉아 줄리오가 할아버지 앞으로 펄쩍 뛰어내려 1미터 정도 떨어진 돌 위에 앉았다. “할아버지, 이제 때가 된 거죠?” “그래, 드디어 때가 되었구나.”
제2장 수도사와 상인
“말해 주세요, 할아버지. 그 비밀 이야기 말이에요. 이젠 해주셔야죠.” 줄리오는 어떻게든 흥분을 숨기려고 애쓰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내 생각엔 수도원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는 게 제일 좋을 듯싶구나.” “수도원이요?” 줄리오가 물었다. “그래, 난 베네치아 교외에 있는 작은 수도원에서 자랐단다. 나는 걸음마를 배운 다음부터 수도원 안을 돌아다니며 간단한 심부름을 했단다. 처음에는 탁자에서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한테 물을 갖다 주는 일 같은 것이었지. 그 후 포도밭에 나가 포도를 수확하는 일도 거들었단다.” “어떻게 참고 견디셨어요?” “참고 견디다니?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일을 좋아하고 생각하는 것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곧 펠리포 아저씨와 함께 일하게 되었고 아이디어를 내어 수도원의 영향력도 키웠지. 16살쯤 되었을 때에는 몇 가지 새로운 방식을 개발해서 수도원이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도록 했단다.”
앞장서 걷는 안토니오의 발걸음이 뛸 듯이 가벼웠다. 그 옛날 자신이 찾아낸 새로운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기만 해도 힘이 솟는 모양이었다. 그 당시 수도원의 관습에 따르면 18번째 생일을 맞는 젊은 남자는 수도사로서 봉헌하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시장으로 나가 상인이 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 했어. 내게도 천직을 선택해야 될 때가 왔단다. “천직이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줄리오가 물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말하지.” 안토니오가 대답했다. “직업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글쎄다, 천직은 그냥 직업하고는 좀 달라. 그 이상이란다. 천직은 소명이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일이란다. 그래서 그 일을 할 때에는 사실 일하는 게 아니야.” “펠리포 아저씨는 나를 베네치아에 사는 부자 친구한테 몇 달간 보내기로 하셨어. 수도원에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지. 사업 세계를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셨던 거야. 나는 주말에 짐을 싸서 베네치아에 갔고 알레시오 밑에서 일을 시작했단다.” 몇 달간 사람들 관리하는 일이며 제품 수량 확인, 새 아이디어 짜는 일 등을 하면서 내 천적을 찾았다고 여겼지. 금세 두 달이 지났고 이 일도 끝이 났어. 나는 몹시 섭섭했단다. 수도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알레시오는 같이 저녁을 먹으며 미래를 얘기해 보라고 했지.
안토니오가 계속 이어서 말했다. “그날 밤 내 짐은 벽난로 근처에 단정하게 꾸려져 있었어. 알레시오는 나를 수도원까지 데려다 줄 마차도 준비해 놓았지. 그리고 나는 이곳에 좀 더 머물고 싶다” “얘기 했나요? 상인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알레시오에게 하신 거예요?” “그런 셈이지. 그러나 곧바로는 아니었어. 정확히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었고. 우리는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고 난 알레시오에게 내 아버지, 펠리포 아저씨를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물었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구나. 알레시오는 의자를 뒤로 밀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어. 그리고는 이야기를 시작했지. ‘내가 자네 아버지를 처음 만난 건 아홉 살 때였다네.’ 상인이 되겠다는 내 결심을 확신시켜 준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단다.”
제3장 왕의 일지
안토니오는 여기까지 말한 다음 잠시 말을 멈추고 기다란 어개 끈이 달린 가죽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지금까지 줄곧 안토니오가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었다. 안토니오는 가방에서 낡은 책을 꺼냈다. 가죽으로 된 겉표지는 많이 닳았고, ‘왕의 일지’라고 새겨진 금박 글씨는 여기저기 벗겨져 있었다. 가장자리는 너덜너덜했지만 여전히 원상태를 유지했고, 금색 잠금 장치가 앞표지에서 뒤표지까지 고정되어 있었다. “알레시오가 가르쳐 준 모든 것이 이 안에 적혀 있지. 이 책속의 말들이 이제껏 나에게 큰 도움을 준 덕분에 나는 아무리 무모해 보이는 꿈이라도 모두 이룰 수 있었단다. 이 책에 적힌 알레시오의 가르침을 원칙으로 삼고 내 사업과 삶 속에 적용했지. 그 덕분에 많은 기회를 얻었고 재산도 늘렸단다.” 줄리오는 문득 이번 로마 여행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쌓아 올린 부의 비결을 줄리오에게 물려주기 위해 이번 여행을 계획하신 것이다. 줄리오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할아버지,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저에게 그 말들을 들려주실 거죠?” “그럼, 그럴 생각이란다.” 안토니오는 천천히 책 표지를 펼쳤다. 수많은 추억의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알레시오의 집을 처음 방문했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3년이 흘렀고 안토니오는 약속한 대로 친구를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
제4장 유리알 화폐
알레시오의 집 앞에 걸린 등불이 운하 수면 위로 부채꼴 모양을 이루며 춤추고 있었다. 그 불빛 덕분에 부두의 윤곽선을 알아볼 수 있었다. 과연 이렇게까지 비밀스럽게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잠시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약속은 어디까지나 약속이었다. 나는 혼자였다. 이 역시 약속의 일부였다. 3년마다 한 번씩 오기로 했었다. 이 밖에도 알레시오는 내게 몇 가지 조건을 명확히 제시했다. 3년마다 한 번씩 이 날 이 시간 이 집으로 혼자 와야 한다고. 알레시오가 왜 이런 이상한 시간에 만나자고 하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성격이기도 했다. 알레시오는 항상 내게 궁금증을 안겨 주었다.
얼른 알레시오에게 가서 지난 3년간 내가 처음으로 겪었던 사업 모험담을 들려주고 싶었다. 또한 나를 괴롭히던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도 조언을 들어야 했다. 알레시오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우리를 반겼다. 일하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 다음 우리는 탁자에 앉았다. “안토니오, 세계로 향하는 문이 우리 눈앞 이곳 베네치아에 열리고 있다네. 세계 무역의 교차로인 셈이지. 수천 척의 배와 대규모 상산이 매년 이곳 베네치아를 거쳐 가고 있어. 한 가지 아쉬운 건 교환 체계가 더 나아졌으면 하는 것이지. 동일한 상품을 놓고 나보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상인이 있다면 경쟁을 통해 가격을 정하기가 힘들어.” “그런 불공평하잖아요.” 나는 알레시오를 더 부추길 생각이었다.
알레시오와 떨어져 지내는 지난 3년 동안 나는 새로운 교역 방식이 될 만한 것을 찾아냈고 적당한 기회에 알레시오에게 이를 물어보고 싶었다.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 “글쎄, 꼭 그들 잘못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그렇게 많은 종류의 상품이 거래되는 상황에서 공정한 기준을 정하기란 쉽지 않으니까 말이야. 낙타, 곡물, 유리 이렇게 세 가지 상품을 놓고 누가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겠나? 모든 것이 주관적일 수밖에.”알레시오가 말했다. 알레시오가 다른 말을 꺼내기 전에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화폐 같은 것으로 거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의 새 아이디어를 얼른 알레시오에게 알리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그런 게 있다면 기적 같은 일이지. 하지만 그런 게 어디 있겠나? 세계 경제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돈을 주고 상품을 산다는 건, 그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설령 가까운 도시의 화폐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지.” 나는 걸치고 있던 망토 안쪽 가슴께에서 작은 가죽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에 담긴 내용물이 부딪치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깨진 조개껍질이 돌에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나는 알레시오에게 가죽주머니를 건넸다. “열어 보세요.” 조금은 도전적인 말투였다. 알레시오는 가죽주머니 끈을 풀어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손바닥 위로 꺼내 놓았다. 작은 조각이 새겨진 유리알 열 개였다. 원형 모양에 파랑, 빨강, 하양 문양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독특한 생김새의 유리알 이었다. “유리알 아닌가?” 알레시오가 조금은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도 무라노 유리 제조공의 솜씨를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손바닥에 놓인 이런 모양의 유리알은 처음 보는 듯했다. “그냥 보통 유리알이 아니에요. 두 달 전인가 시칠리아 섬으로 장사를 하러 가던 길에 잠시 무라노 섬에 머물렀어요. 그때 한 신사가 내게 어떤 사람이 새로운 유리알 제조법을 발명했다는 얘기를 해 주었죠. 누구도 똑같이 만들 수 없는 그런 유리알을 만든다는 거예요.” “계속 얘기해 보게.” 알레시오는 이 새로운 이야기에 푹 빠진 눈치였다. “내 눈을 가린 채 말 등에 태워 그 제조공 가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갔어요. 그 집에 도착하자 나는 그 신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냈죠. 아무도 똑같이 만들 수 없는 그런 유리알 제조법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왔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유리알을 한 움큼 내밀었어요. 지금 여기 있는 유리알이죠.
나는 그 삶에게 아무도 이것과 똑같이 만들 수 없다는 게 사실이냐고 물으면서 믿을 수가 없다고 했죠. 그 사람은 정 못 믿겠으면 무라노의 최고 유리 제조공한테 이것을 갖고 가보라고 했어요. 이것하고 똑같이 만들 수 있는지 시험해 보라고 했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자기 공장을 모두 나한테 넘기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지?” 알레시오가 물었다. “당연히 시험해 보았죠. 그러데 불가능했어요. 무라노에서 내로라하는 다섯 명의 기술자가 달려들었지만 결국 모두 실패했어요. 누구도 복제할 수 없는 단 하나뿐인 유리알이라는 것을 알고는 곧 세계적인 유통화폐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모든 상인에게 통용되는 유통 화폐를 갖는 거예요. 제가 사람들을 설득해서 이 유리알을 쓰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했나?” 알레시오가 물었다. “다시 유리알 제조공을 찾아가서 유리알 공급권을 사들였어요. 나한테만 독점적으로 유리알을 공급한다는 조건으로요. 제 생각에는 이 유리알이 당신의 교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봐요.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화폐를 발견한 셈이죠.” 알레시오는 잠시 후 대답을 내놓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계산한 결과였다. “좋아, 사용해 보지. 얼마가 되던 유리알을 만드는 대로 모두 인수하겠네.
그리고 새로운 지불 수단으로 쓸 생각이야. 이 유리알을 일단 내게 맡겨 준다면 우선 내가 거래하는 큰 거래처에 사람을 보내 이걸 보여 주고 얘기를 해 볼 생각이라네. 자네 생각만 변치 않는다면 말이야.”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음, 일단 제 생각대로 진행시켜 보았으면 해요.” 줄리오는 더 이상 음식을 먹지 않고 있었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어 먹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줄리오가 불쑥 이야기 중간에 끼어들었다. “유리알이라면, 그 베네치아 유리알 화폐 말이에요?” “그렇단다. 맨 초기 것이지. 나는 마침내 유리알 공장을 사서 전 세계에 공급하기 시작했단다.” 안토니오가 대답했다. “하지만 유리알 화폐는 지금 어디에나 있잖아요.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다고요. 그게 할아버지 아이디어였어요.” “그렇단다, 줄리오. 그건 내 아이디어였지. 아니,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이디어였단다.” 어린 손자가 이 엄청난 사실을 감당하는 동안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안토니오가 손에 든 책 한 장을 넘기더니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주리오가 읽을 수 있도록 책 방향을 돌려놓으며 줄리오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게 바로 첫 번째 성공 비밀이란다.” 안토니오는 손으로 책을 가리켰다. 안토니오가 펼쳐 놓은 페이지에는 단 하나의 문구밖에 없었다. 줄리오는 소리를 내어 그것을 읽었다.
<첫 번째 원칙 = 열심히 일하라. 하나님은 땀 흘려 일하는 자를 부유케 하신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할아버지?” 줄리오가 물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곧 성공의 시작이라는 의미란다. 네가 하나님은 믿는다면 ‘무슨 일을 계획하든’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실 거라고 성경에 적혀 있지. 너도 알다시피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은 많단다.” “베네치아 유리알 화폐 같은 아이디어요?” “그래, 유리알 화폐 같은 것 말이지. 사람들은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만 그에 대한 행동을 하지 않아. 알레시오가 내게 가르쳐 준 첫 번째 원칙은 바로 자신이 믿는 일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이란다.
아이디어를 내기는 쉬운 일이지. 하지만 그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야.” “할아버지, 제 친구 아버지가 밭에 물을 대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셨대요. 하지만 다른 농부들이 그 아이디어에 반대하면서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막고 있대요.” “줄리오, 좋은 아이디어는 많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 영향에 흔들려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다면 결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성공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실제로 성공의 길에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단다.” “그렇군요. 하지만 하나님이 할아버지의 성공을 원하신다면 뭘 하든 축복을 내리시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커다란 오해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지. 너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해 주기를 원하고 계신단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일을 시작해야만 축복을 내리시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인도를 구하면서 동시에 열심히 노력하기를 원하신단다. 바울은 이런 말도 했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표현이 조금 강하긴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근면함의 중요성을 깨닫기를 바라신단다.” 줄리오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모든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이 성공의 원칙은 알레시오에게도, 펠리포에게도, 할아버지에게도 모두 통했다. 그리고 자신한테도 분명히 통할 것이다. 줄리오는 책 속의 다른 내용도 얼른 알고 싶었지만 그 전에 우선 이 첫 번째 원칙을 분명하게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첫 번째 원칙에서 기본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이런 건가요? ‘하나님을 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정하라. 무슨 일이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아, 그리고 도 한 가지,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실 것이다.’ 맞나요?” 안토니오가 미소를 지었다. 소중한 보물이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제5장 부자와 천국
3년 전에는 알레시오가 촛불을 들고 부두에 서 있는 바람에 너무 놀라 기절할 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단히 준비를 했다. 나는 천천히 부두에 다가가 나무 널빤지로 뛰어내렸다. 나무기둥에 배를 묶은 다음 곧 친구가 나타나길 기대하면서 부두를 서성댔다. 알레시오는 이번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적어도 여기에는 없었다. 나는 집 쪽으로 걸어갔다. 정문에 이르렀지만 집 안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음식 냄새도 풍겨나지 않았다. 문 앞으로 더 가까이 걸어가자 문 위에 작은 종이가 반쯤 접힌 채 못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내 앞으로 된 메모였다. 나는 얼른 종이를 떼어 열어 보았다. 검정 잉크로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적어 놓은 짧은 메모였다. 나는 다시 메모를 읽었다. 왜 성당에서 만나자고 하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우선 소지품을 잘 챙겼는지 확인했다. 길을 나서려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어깨에 멘 가죽가방에 손을 넣었다. 3년 전에 구입한 가죽일기책 모서리가 손끝에 느껴졌다. 신부님은 성찬 전례 전에 성경 말씀을 읽어 주셨다. 이어서 예수님과 젊고 부유한 관리에 대한 유명한 구절을 읽어 주셨다. 그는 예수님이 이 젊은 사람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라고 말씀하신 일을 특히 강조했다. 나는 신부님이 이 말씀을 하면서 알레시오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알레시오는 미사시간 내내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를 띠었다. 신부님은 이어서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명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갑자기 내가 쌓아 올린 부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떠나 결국 돈을 좇았던 걸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사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그날 밤 성당을 나서는 내 머릿속에는 설교 말씀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알레시오의 말소리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요즘 어떻게 지냈나, 안토니오? 유리알 사업 얘기는 나도 많이 들었다네. 내 생각엔 배운 것도 많을 거 같은데.” 알레시오의 말 속에서 왠지 뿌듯해하는 아버지의 느낌이 풍겼다. 나는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알레시오는 내 멘토이자 스승이었다. “그럼요, 알레시오. 그동안 아주 잘 지냈어요. 지난번에 만난 이후 첫 번째 원칙을 바로 적용했고 아주 멋진 결과를 얻었어요. 내 사업은 계속 성장했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지요. 물론 몇 가지 새로운 과제도 생겨났어요.” 알레시오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했다. “안토니오, 자네가 지금 어떤 기분일지 이해가 간다네. 난 신부님이 오늘 밤 그 구절을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했지. 나랑 신부님은 실제로 좋은 친구 사이야. 우린 자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곤 하지. 그는 좋은 뜻으로 말한 거야. 다만 성경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래, 나도 알고 있다네. 신부님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한테 베풀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어. 안토니오, 난 예수님이 우리를 일대일로 대하신다고 믿네. 그러니까 우리 각자의 삶을 독립적으로 특별하게 바라보신다는 뜻이지. 예수님이 젊은 관리에게 하신 말씀은 그 한 사람을 특정하여 말씀하신 거지, 일반 적으로 모든 사람을 상대로 말씀하신 게 아니야. 예수님이 보시기에 젊은 관리는 돈 때문에 어리석은 바보가 되었고, 그래서 자유롭게 해 주고 싶으셨던 거지. 그 사람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가 사로잡혀 있는 대상을 없애 버리는 것이라고 여기신 거라네.”
“돈이요?” “맞아.”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그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우선은 뒤에 나오는 구절 때문이지.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어. ‘주여, 이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어떻게 들어갈 수 있나요?’ 제자들이 이런 말을 꺼낸 것은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부자 출신이기 때문이지.” “정말이요?” “그렇고말고. 야고보와 요한은 성공한 생선 상인 세베대의 아들이었고 베드로도 그 사업을 같이하고 있었어.” 알레시오는 내게 성경의 기록을 상기시켜 주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 밖에 다른 사실도 있지. 예수님은 많은 부유층을 만났지만 그들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야 한다는 말씀은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 예수님이 만난 부자들은 세베대, 삭개오, 로마 관리이자 세금징수업자인 마태, 니고데모, 그 밖에도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몇몇 사람이 더 있지. 예수님은 이들 각자의 측수한 상황과 마음의 상태를 고려하면서 개별적으로 대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 그리고 예수님이 같은 장에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통해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을 통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하신 것을 기억하게.” “그렇군요. 그러면 낙타 얘기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알레시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몇 미터만 더 가면 알레시오의 집이었다.
집 어딘가에 불빛 하나가 또렷이 보였고 허기가 느껴졌다. 나는 내심 누군가 부엌에서 요리하는 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토니오, 난 예루살렘에 몇 번 간 적이 있지. 그때 들은 얘기인데, 옛날에는 성벽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입구에 아주 작은 문을 만들었다고 해. 그야말로 사람과 짐승이 무릎으로 기어가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작은 문이었다는군. 이 작은 물을 흔히 ‘바늘구멍’ 이라고 불렀다는 거야.” “그럼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게 가능한 일이네요. 그러니까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려면 몸을 낮춰 무릎으로 기어가야 했다는 의미죠. 부자 역시 마찬가지고요. 우리가 겸손하게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어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고 하나님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말이군요.” “바로 그거야.” “하지만 제가 듣기로 오늘밤 신부님의 말씀은 불을 나눠 주는 일의 중요성에 관한 것이었어요. 부자가 너무 안락하게 살면 가난한 이들에게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경계하셨죠.”
우리는 어느새 알레시오의 집까지 왔다. 우리는 식사 기도를 드린 뒤 매콤한 야채스프를 정신없이 먹었다. 알레시오가 먼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사실 자원이나 부를 하나의 파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 알레시오는 손을 뻗어 둥근 과일파이를 탁자 한가운데 갖다 놓았다. “그들은 누군가 파이를 너무 많이 가져가면 다른 사람들의 몫이 충분치 않다고 여긴다네.” 알레시오는 파이 한 조각을 잘라 자기 접시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아. 자네도 알겠지만 하나님의 자원은 이런 파이와 달리 무한하지. 하나님의 듯은 우리 모두를 잘살게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 원하시지. 하나님은 원하시는 만큼 파이를 만드실 수 있다네.” “상인들은 그저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 대가로 이익을 얻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러면 이 얘기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내 몫의 파이를 자르면서 물었다. “그건 사업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말일 뿐이지. 상인이 고객ㅇ게 물건을 팔거나 용역을 제공하는 것은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모든 이에게 이로운 일이야. 고객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상품을 구입하여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좋고, 상인의 입장에서는 좋은 물건을 제공한 덕에 이윤을 남겼으니 좋은 일이지. 안토니오, 부를 죄악시하는 생각은 거짓일 뿐이야. 성서에서도 하나님은 부를 이루라고 격려하시고 나아가 이를 약속해 주셨지.” “하나님이 약속하셨다고요?” “그래.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부를 약속하신다네.” 내 앞에 놓인 과일파이를 다 먹은 뒤 나는 마음속에 품었던 모든 의문을 알레시오에게 다 물었는지 확인해 보았다.
여전히 몇 가지는 해결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알레시오, 논쟁을 벌일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궁금한 게 많아요.” 알레시오가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원에서 자랄 때 사귄 친구 몇 명이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구들이고, 저를 무척 좋아하죠. 하지만 하나님은 제가 부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얘기를 자주 하고 해요. 하나님은 제가 가난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대요. 가난한 삶을 명세한 수도사들처럼 살기를 원하신다는 거죠.”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야.” 알레시오가 접시를 한쪽으로 치운 뒤 탁자 위에 팔꿈치를 얹고는 얼굴 앞에서 두 손을 포갰다.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지. ‘사랑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영혼이 평안함과 같이, 그대의 모든 일이 잘되고, 그대가 건강하기를 빕니다.’ 자네 친구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이해가 돼. 자네 친구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복종해야 하지. 그들은 수도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명에 모두 복종해야만 한다는 걸세. 그것은 영광스런 일이며 그로 인해 다른 축복을 받게 될 거야. 안토니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자네의 영혼이 성숙하기를 원하신다는 걸 이해해야 해. 하나님은 자네를 아주 가까이 알고 싶어 하신다네. 하나님은 자네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되기를 원하시지. 그러나 자네와 하나님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동안 하나님이 자네를 특별히 지목하여 청빈 서약을 하도록 하지 않으신다면 그건 자네가 경제적으로 잘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일세.”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것을 갖기를 원하시나요, 아니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 갖기를 원하시나요?”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어. 또한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자네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의 소망은 더 자연스레 자네의 소망이 될 거야. 자네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중심에 두는 한 마음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기를 하나님은 원하시지.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게 있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헤아리고 우리 동기를 알고 계신다는 거지. 우리는 하나님을 그 존재 자체로 사랑해야 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네.” 알레시오가 들려준 새로운 생각들이 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이야기를 한마디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싶었다. 줄리오는 자리에 앉아 안토니오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그와 알레시오의 두 번째 만남에 대해 들었다. 책 가운데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줄리오는 큰 소리로 읽었다.
<두 번째 원칙 = 네 영혼을 부유케 하라. 물질적 풍요는 영혼의 부유함에서 비롯된다.>
줄리오는 이 소중한 문구를 마음속에 새겼다. 열심히 일하면 하나님이 축복을 내리신다는 것,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영혼도 물질적으로도 부유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늦은 저녁 식사를 하면서 영혼의 성숙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토론을 벌인 뒤 우리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알레시오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사업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안토니오?” “한 가지 더 물어볼 게 있는데요.” “그데 뭔데?” “그러니까, 여자가 있어요.” 나는 알레시오가 어떻게 반응할지 차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여자라고? 이름이 뭔가?” 알레시오가 여전히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말했다. “마리아요. 완벽해요, 알레시오. 아주 완벽한 여자예요. 우리는 공통점이 아주 많아요. 펠리포 아저씨도 마리아를 마음에 들어 하세요. 아, 그리고 마리아는 나를 웃게 해요. 우리 지역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예요. 이 얘기 내가 했던가요?” “글쎄,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내 충고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거 같은데. 그 여자한테 필요한 것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면 일을 더 진척시켜 보게나.” “그 여자한테 필요한 것을 해 준다고요?” 내가 물었다. “그렇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족을 책임지지 않는 남자는 곧 신앙을 저버린 사람이야. 신앙이 없는 사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가가시지. 결혼하기 전에 우선 그 여자를 돌볼 능력을 갖추어야 해. 그리고 일단 결호한 뒤에는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 해. 이건 하나님의 원칙이라네. 내 원칙이 아니야.” 나는 가죽 책장을 넘겨 이렇게 적었다.
<세 번째 원칙 = 가장이 되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나는 알레시오에게 마리아를 충분히 부양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지난 3년간 유리알 화폐가 내게 꽤 많은 부를 가져다주었다고 알려 주었다. 알레시오도 수긍했다. 우리는 이른 새벽까지 함께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레시오가 배 있는 곳까지 나를 배웅했다. 나는 자랑스럽게 새 배를 알레시오에게 보여 주었다. 어느새 떠날 시간이었다. 나의 좋은 친구, 알레시오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다음 3년 동안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기다릴 수가 없었다. 미래의 모든 일이 약속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었다.
제6장 시련의 밤
영원히 잊지 못할 밤이었다. 내 사업 관리자이자 절친한 친구인 밀로스와 함께 유리알 화폐의 수량 확인 작업을 막 끝낸 직후였다. 우리 사업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공장을 넓히기 위해 증축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날의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나는 약속한 대로 알레시오를 만나러 가기 위해 짐을 꾸리러 밀로스와 함께 부둣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공장 쪽에서 우르르 하고 깊고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눈앞에 보인 것은 하늘 높이 10미터 가량 치솟은 불기둥이었다. 순간 우리는 얼어붙었다. 잠시 후 공장 쪽으로 뛰어가며 나는 두 발이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불이 다 타고 사그라질 무렵 새벽빛이 서서히 번지며 연기와 뒤섞였다.
말로스가 내 앞으로 걸어오더니 작은 나무상자를 내밀었다. 상자뚜껑에는 밀로스가 숯으로 쓴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밀로스이 얼굴에는 심한 화상 흔적이 있었다. 밀로스가 몸을 돌려 가 버린 뒤 나는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는 작은 유리알 네 개와 도표가 그려진 양피지 조각이 들어 있었다. 유리알 비밀 공정을 자세히 적어 놓은 귀한 설명서 같았다. 내 인생, 내 직업, 내 재산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것들을 바라보는 동안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끝났어.” 나는 천천히 나무상자를 닫으며 혼잣말을 했다. 나 혼자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실패했다. 내 손에서 나무상자가 덜어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마침 상자가 내 앞에 나뒹구는 바람에 밀로스가 새겨 놓은 글귀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것으로 다시 시작한다.’ 밀로스는 믿음을 가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개에 손을 얹었다. 별 소용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올려다보았다. 누구인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마리아였다. 마리아를 보자 눈물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안토이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막을 수 있겠어요?” 나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마리아가 내 입에 손을 대며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다. “쉿, 됐어요. 집까지 같이 걸어가요.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왔어요.” 우리 집 앞의 벤치에 알레시오가 앉아 있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뒤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고 방에는 나와 카이사르, 알레시오만 남았다.
나는 무언가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다가 멘토의 충고를 듣기로 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죠?” 내가 물었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건가?” 알레시오가 되물었다. “이제 다 끝났잖아요. 전 모든 걸 잃었어요. 새로운 걸 찾아 봐야죠. 사실 아침 내내 수도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물론 마리아와 함께 그곳에서 살 수는 없겠지만 근처에 살면서 일할 수는 있지 않을까 했죠. 사실 제 진짜 소명을 놓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글쎄요. 분명한 건 하나님이 제 사업의 문을 닫고 계신다는 거죠. 그렇지 않고서야 왜 제 공장을 불태우셨겠어요?”
그날 아침 이후 처음으로 알레시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안토니오, 내 말 잘 듣게. 어쩌면 지금부터 하는 말이 내가 자네한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될 게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빼앗아 버리지. 아마 절망감이 자신의 꿈을 앗아가는데도 그냥 바라보면서 허용하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알레시오, 저는 그저 용기를 잃은 게 아니에요. 전 망했다고요.” 알레시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을 만한 인내심이 점차 바닥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야, 자꾸 반발심이 생겼다. “안토니오, 꼭 기억해 둬야 할 게 있어. 실패는 자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한 절대로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네. 생각해보게. 나비는 고치를 뚫고 나오지 못하면 그냥 죽게 돼. 병아리역시 마찬가지로 달걀껍질을 깨고 나오지 못하면 그 안에서 죽어 버리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안토니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라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셔. 비극을 원하시지 않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힘든 시기를 겪게 하시면서 우리 안에 당신의 위대함을 마련하시지. 우리가 만일 시련을 뚫고 나가지 못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을 이룰 수가 없어. 한 가지 물어보겠네. 애초에 유리알은 어떻게 만들었지? 전체 공정이 어떻게 되냐고?” “우선 유리에 열을 가하고 형태를 만든 다음 다시 열을 가하고 그런 다음….” “정확하게 아는군. 유리가 열을 받지 않으면 결코 유리알은 만들어질 수 없어. 사실 유리의 최종 형태와 색을 마련하는 것은 열이지.” “저도 알아요. 하지만 어쩌면 제 삶의 문을 닫는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제게 주의를 주시는 거죠. 하나님은 제가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자네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마련하고 계신다는 거라네. 이것은 아마 한번은 부딪혀야 할 중요한 시험 중 하나일 거야.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하나님이 문을 닫는다고 여기는 것이지. 그게 아니라 뭔가 특별한 것을 준비하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데도 말이야. 이 점을 명심하게.”
<네 번째 원칙 = 시련은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킨다. 시련은 더 큰 축복을 위한 준비 기간이다.> “하나님은 실패를 허용하신다는 말인가요?” “하나님은 실패를 허용하시는 거라네, 안토니오.” “우리는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삶에 계획하신 목적을 이룰 만한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건가요?” “맞아. 그뿐만이 아니지. 하나님은 도전을 통해 우리를 더욱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키우신다네.” “알레시오, 불을 그느라 정신없이 애쓰는 동안 몇몇 노동자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어요. 악마가 우리 건물을 부순 거라고요. 사실 나 자신도 그런 생각이 들던 참이에요. 어떻게 생각해요?” “글쎄. 안토니오, 우리는 성과를 적에게 넘겨 버리는 실수를 자주 저지른다네. 사실 악마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처럼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잡아먹을 사람이 없나 찾아다니지. 우리를 죽이고, 우리 것을 훔쳐서 우리를 파괴해 버리기 위해 별별 짓거리를 다하는 거야.” “그럼 이건 악마의 짓이 틀림없어요.” “너무 섣불리 판단하지는 말아. 인과관계를 따지려면 그보다는 자네의 행동이 더 관계가 깊지.” “인과관계요?” “그래. 정말로 단순한 인과관계인데도 그 원인을 하나님이나 악마에게 돌리는 경우가 자주 있다네.
자네의 경우를 한 번 볼까? 자네는 한두 개의 화로를 놓아야 할 건물에 화로를 몇 개씩 설치했지. 아마 지붕에 비해 화로의 열기가 너무 강했을 테고 그러다 보니 결국 불이 붙은 거지. 그건 악마의 짓이라고 할 수 없어. 단순한 인과관계일 뿐이지.” 알레시오의 말이 옳다고 여겨져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알겠어요. 그럼 이게 오늘의 교훈인가요?” “그렇다네. 오늘의 교훈은 이것이지.”
<다섯 번째 원칙 =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면 스스로 책임지라. 절대 다른 곳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 마라.>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죠? 공장도 불타 버렸고 유리알도 없어요. 배도 한 척 남지 않았고 따로 모아 놓은 돈도 없고요.” “우선 현재 맞닥뜨린 상황이 결코 장벽이 아니라 디딤돌이라는 사실부터 확실히 깨달아야 해. 마음먹기에 따라 이번 일을 계기로 사업을 좀 더 튼튼히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어떻게요?” “자네는 밀로스와 곧 새 공장을 지을 계획이라는 얘기를 나한테 하지 않았었나?” “본질적으로 자넨 이미 계획을 세워 두었네. 다만 원했던 것보다 시기가 조금 빨리 왔을 뿐이지. 안토니오. 공장을 잃은 것을 더 큰 성장의 자극제로 삼을 수 있어. 그건 자네의 선택에 달려 있다네.” 줄리오가 갑자기 이야기의 흐름을 깨며 끼어들었다. “할아버지 원칙이 뭐예요? 알레시오가 할아버지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교훈이 뭐였나요?” 안토니오는 손을 아래쪽으로 뻗어 오랜 세월의 손때가 묻은 책장을 넘겼다. 줄리오는 고개를 돌려 찬찬히 살펴보았다.
<여섯 번째 원칙 = 시련을 장애로 여기지 말고 디딤돌로 받아들여라.>
줄리오는 이 원칙을 반드시 기억하겠다고 마음속에 새겼다.
제7장 해적 상인 아흐마드
굽이진 수로를 돌면서 알레시오와의 이번 만남 역시 뜻 깊은 의미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위에 걸린 등불에서 춤추듯 어른대는 빛을 보자 이제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난 하ㅗ재 사건의 공포가 떠올랐다. 그 당시 불꽃이 공장을 집어삼키면서 섬 하늘 전체를 환하게 밝혔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먼 일처럼 느껴졌다. 그때도 역시 알레시오가 옳았다. 엄청난 시련을 결국 위대한 승리로 이어졌다. 화재 사건 이후 나는 공장을 다시 지었고 중국과 스페인에서 온 몇몇 중요 상인을 만났다. 그들 모두 베네치아 유리알을 기본 통화 수단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참사를 겪은 뒤에도 유리알 아이디어는 여전히 효력이 있었다. 동양과 스페인에서 들어온 추가 주문을 소화하느라 섬의 공장은 풀가동되었다. 그해 말, 밀로스와 나는 또다시 공장 증축 계획을 세웠다. 일은 잘 풀려 나갔다.
아흐마드에게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모든 상황이 좋았다. 무서운 해적 상인 아흐마드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내면의 시선이 아흐마드로 향하자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광대뼈는 얼굴 바깥으로 툭 튀어나와 마치 동물의 얼굴 같았다. 꿰뚫어보는 듯하다 초록색 눈동자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인해 더욱 눈에 띄었다. 등 가운데쯤에서 묶은 검은색 긴 머리는 검은색 턱수염과 잘 어울렸다. 아흐마드는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상인이었다. [‘그동안 당신을 지켜보았소. 이제 만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으오. 달이 두 번 바뀐 뒤 모로코 해안 앞에 가로놓인 섬으로 배를 타고 오시오. 누구도 데려와선 안 되오. 이 약속을 어길 경우 당신 운명의 문은 닫혀 버릴 거요.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합시다.’] 아흐마드의 편지임을 보증하기 위해 용 문양의 밀랍도장이 찍혀 있었다.
나는 방안 작은 의자에 앉아 편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그 밤 내내 방안을 서성이며 생각했다. 해적 상인을 만난 일을 생각하니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낯익은 베네치아의 운하 풍경 덕분에 곧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달은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낮게 떠 있었다.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치고 대신 다른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뚜렷이 들려왔다. 한바탕 시원스레 웃는, 너무도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바로 알레시오였다. 나는 재킷 주머니에 손을 뻗어 작은 양피지를 꺼냈다. 접힌 상태 그대로였다. “모로코에 있을 대 이걸 받았어요. 전령을 보내왔더라고요.” 나는 알레시오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알레시오는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용 문양이 찍힌 밀랍 도장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더니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진짜가 맞네.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 생겼던가?” 알레시오는 언젠가 아흐마드를 직접 만날 날을 꿈꿔 왔기에, 이번 일을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카사블랑카에서 보았던 아흐마드의 배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남자에 대해 한 시간 가량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알레시오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되죠?” 내가 물었다. “무슨 뜻인가? 물론 아흐마드를 만나야지.” “제정신이에요? 그자는 유령이에요. 해적에다 살인자라고요! 게다가 그쪽에서 무슨 일이든 제안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공격적인 사업 성향을 보이는 것으로 평판이 나 있었고 알레시오 역시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내게는 목표를 향한 Em거운 정열이 있었고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단호한 성격 대문에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 “무엇을 겁내는 건가?” 알레시오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글쎄요. 악어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그렇고, 또….” “계속 말해 보게.” 알레시오가 말했다.
“지난달 펠리포 아저씨와 친구 몇몇을 만나러 수도원에 갔어요. 저녁 늦게까지 온유함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죠. 수도사들은 공격적인 사업 태도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어요.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어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요.” “안토니오, 말해 둘 게 있네. 방금 말한 내용 역시 성경을 잘못 이해한 부분 중 하나이지. 수도사들 말이 맞아. 온유한 사람이 이 땅을 기업으로 받으리라는 건 사실이지.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온유하기를 원하신다네. 그러나 하나님께 온유하기를 원하시는 거지 사람들한테 온유하기를 원하는 건 아니야.” “그럼 공격적인 사업 성향이 별문제는 아니라는 말이죠? 아흐마드처럼 공격적이어도 되나요?” “글쎄, 그 정도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게야. 분명 하나님은 우리가 친절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지. 그러나 하나님은 자네를 만드실 때 하나의 이유를 위해 만드셨다네. 하나님은 자네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서 살기를 원하시지. 사람들에게 온유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온유해지는 데 더 마음을 쏟아야 한다고 봐.” “그럼 제가 이대로 아흐마드와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렇다네. 하나님께서 자넬 위해 무엇을 마련해 두셨을지 누가 알겠나? 아흐마드를 만나게. 그리고 자네 믿음에 따라 강한 모습을 보여. 필요하다면 공격적인 태도도 괜찮아. 하나님이 자넬 그렇게 만드셨으니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실 거야.”
알레시오는 팔을 뻗어 탁자 너머로 내게 양피지를 돌려주었다. 줄리오의 얼굴이 생기로 빛났다. 해적! 칼! 모험! 믿기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순식간에 눈앞에서 영웅으로 바뀌었다. “할아버지! 정말 그자를 만났어요?” “물론이지” 안토니오는 다시 가죽 책을 펼쳤다. 한쪽 페이지에 양피지 조각이 붙어 있었다. 줄리오는 이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용 문양이 뚜렷하게 새겨진 밀랍이 양피지에 붙어 있었다. 양피지 위에 ‘아흐마드’라고 쓰여진 것이 분명히 보였다. 줄리오의 입이 벌어졌다. 양피지 아래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일곱 번째 원칙 = 하나님께 온유하라.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담대하라.>
“그 다음에는요, 할아버지? 아흐마드와는 어떻게 되었어요?” “줄리오, 그 이야기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게다.” 아흐마드가 메모로 알려 준 해안가가 눈에 들어왔다. 알레시오의 말을 떠올렸다. ‘사람 앞에서는 대담하라.’ 보름달이 환했다. 달빛에 눈부시게 빛나는 파도가 모래 위로 부서졌다. 바람결에 바닷물의 잔 내음과 잘 익은 두리안 냄새가 풍겨 왔다. 내 앞에서 불과 1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흐마드가 서 있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몰려왔다. 얼른 다시 배를 타고 무라노로 가는 상상을 했다. ‘사람 앞에서는 대담하라.’ 나는 마음속으로 이 말을 되뇌며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아흐마드를 향해 걷는 동안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이 코앞까지 걸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혹시 아흐마드가 허리에 위험스레 매달려 있는 칼을 뽑아들지나 않을까 불안했다. 다행히도 아흐마드는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다. 그날 밤 해안가에서 아흐마드와 나는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바다 건너까지 사업을 넓히는 중이기에 새로운 통화수단이 필요합니다. 한 친구한테 이걸 받았죠.” 아흐마드가 손을 펴서 베네치아 유리알 화폐를 보여 주었다. “이 유리알을 사용했으면 합니다. 내 선단에 유리알을 공급하겠다는 계약을 맺고 싶소.” 아흐마드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잠시 의심스러웠다. “그러니까 내 유리알을 구매하여 당신 사업에 통화 수단으로 쓸 생각이십니까?” 나는 물었다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흐마드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검게 그을린 얼굴 사이로 하얀 이가 빛났다. “물론 그럴 생각입니다. 이렇게 특이하게 약속을 정한 데 대해 사과드리오, 카사블랑카에는 벽에도 귀가 달려 있다는 말이있어요. 내 사업 거래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친구도 많이 생겼지만 그만큼 적도 생겼죠. 효율적인 작전과 빠른 배 덕분에 나는 경쟁자들보다 훨씬 싼 가격에 더 나은 물건을 팔고 있소.” “사람이 살지 않은 이런 섬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인가요?” 내가 물었다. 전해 들은 이야기 속의 인물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내 눈앞에 있었다.
그는 전혀 난폭하지 않았다. 오히려 똑똑하고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날 밤 우리 두 사람이 함께할 만한 여러 가지 사업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해변을 거니는 동안 아흐마드를 향한 존경심이 내 마음속에서 커져갔다. 다음날 아침 작은 배를 타고 섬을 떠나오는 동안 모래 위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알레시오의 말이 내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 앞에서는 대담하라.’ 사업은 기대 이상 훨씬 더 큰 규모로 성장했고 나는 곧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상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제8장 돈을 다스리는 지혜
아흐마드와 함께하는 동안 힘든 시련도 많았지만 몇 가지 소중한 교훈도 얻었다. 그 후 곧 다른 문제가 생겼다. 마리아의 막내 오빠 때문에 생신 일이었다. 마리아에게는 베니라는 별명으로 부르던 막내 오빠 외에도 세 명의 오빠가 더 있었다. 그 중에 베니라는 막내오빠가 나에게 찾아 와서 식당을 개업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두 눈에 가득한 생기와 모험심을 읽을 수 있었다. 몇 달 뒤 베니는 식당을 열었다. 새로운 사업이 늘 그렇듯이 처음 2년 동안은 무척 힘들었다. 베니는 열심히 일하며 작은 사업을 서서히 키워 갔다. 그러나 불행히도 빚도 함께 늘어 갔다. 돈 문제가 절박해졌고 베니는 딱히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 그때였다.
“안토니오, 원래 이런 부탁을 잘 하지 않지만 지금 당장 돈이 너무나 필요해. 나한테 돈 좀 빌려 줄 수 있나? 이번 고비를 이겨 낼 수 있도록.”
베니는 힘든 시기를 넘길 수 있도록 돈을 빌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당장 비려 주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약속을 하기 전에 먼저 다른 충고를 들어 봐야겠다고 했다. 베니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내가 돈 문제에 너무 인색하게 군다며 비난했다. 내 집을 나서는 베니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 그를 돕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수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전날의 일을 생각하는 동안,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알레시오의 충고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맙게 여겨졌다. 이번이 다섯 번째 만남이다. 처음 알레시오를 만난 후로 15년이 흐른 것이다. 알레시오의 턱수염은 이제 완전히 희색 빛으로 변했고 얼굴의 미세한 주름도 완연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건강해 보였다. 함께 걸어가는 동안 나는 아흐마드와의 새로운 동업관계와 사업 확장에 대해 이야기 했다. 우리는 때맞춰 알레시오의 집에 도착했다. 요리사가 막 탁자에 저녁식사를 차리는 중이었다. 방금 만든 파스타의 토마토 냄새에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며 입에 침이 고였다. 우리는 얼른 자리에 앉아 식사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지난 3년간의 이야기도 마쳤다. 그는 내 마음속에 할 얘기가 더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민이 뭔가, 안토니오?” 알레시오가 물었다.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잠시 흘렀다. 마침내 내가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이번 길에 오르기 직전에 마리아의 오빠와의 언쟁이 있었어요. 나더러 돈을 쌓아 놓고 산다면서 욕을 하더라고요.”
“왜 그런 말이 나온 건가?”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데 내가 망설였거든요.”
“왜 돈을 빌려달라고 한거지?” 알레시오가 집요하게 물었다. “사업을 처음 시작했는데 좀 무리했었나봐요. 현재 재정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죠. 나는 분명 돈이 있어여. 돈을 빌려 줘야 할 것 같아요.”
“돈을 빌려주고 나서 갚지 못하면 어떻게 할 텐가?” 알레시오가 캐물었다. “모르겠어요” “어떻게 될지 내가 말해주지. 처남과의 관계가 나빠질거야. 어쩌면 마리아하고도 좋지는 않을 거야. 돈 거래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망쳐 놓지. 그리고 이 경우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돈 관리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돈을 빌려 준다고 해도 또다시 문제 봉착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야. 안토니오, 이번 일을 기회로 처남에게 앞으로는 도움이 될 몇 가지 원칙을 가르쳐 주어야해.” 알레시오는 말을 이었다. “첫째, 빚을 지지 말 것.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피차 사랑은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모든 사람은 서로에게 사랑을 빚지며 살아가고 있지만 결코 돈을 빚지지 말라는 의미이지. 사고 싶은 것이 있는데 돈이 없다면 그 것을 사지 말아야해. 둘째, 가진 것보다 적게 쓸 것. 당장의 만족을 구하지 않고 후일로 미룰 때 하나님은 상을 내리신다네.”
줄리오는 손에 든 일기장을 쳐다보고는 책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여덟 번째 원칙 = 빚을 지지말라. 반드시 가진 것보다 적게 써야 한다.>
줄리오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물었다. “그런데 적게 쓰는 습관은 어떻게 기르셨어요?” “알레시오는 젊었을 때부터 매달 수입과 지출 예산을 짜는 습관을 길러 왔다고 내게 말했지. 그날 이후로 나 역시 늘 예산 범위 안에서 생활하며 사업을 키워 왔단다.” “할아버지, 예산을 어떤 식으로 짜셨어요?” 안토니오는 손을 뻗어 일기장을 넘겼다. 거기엔 다음 원칙과 함께 숫자 표같이 생긴 것도 보였다. 숫자 표는 두 칸으로 나뉘었고 가운데는 커다란 'T'자가 적혀 있었다. 줄리오가 다음 일기장을 눈으로 읽는 동안 안토니오가 이를 암송했다.
<아홉 번째 원칙 = 언제나 예산에 맞추어 생활하라.> 한쪽 칸 위에는 ‘지출’, 다른 한쪽에는 ‘수입’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출 항목에는 식비, 임대료, 배 수리비 내역이 적혀 있었고 수입 항목에는 월급을 비롯하여 다른 데서 들어온 돈이 기록 되어 있었다.
“처음에 베니는 내 충고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어. 베니와 마리아는 가난한 집에서 자랐지. 장인어른은 조그만 일도 열심히 하셔야 했어. 실제로 베니는 마리아와 내가 가진 재산 때문에 우리에게 와가 난 거였단다. 재산이 있는데도 돈을 빌려 주지 않은 일을 그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지. 그러나 얼마 후 베니는 다시 찾아와 돈이 아닌 충고를 부탁했어. 너에게 보여 주었던 그 원칙들을 베니와 함께 나눈 수 있었지. 그렇게 원칙을 활용하여 아홉 개의 식당을 열었고 그중 네 개는 여기 로마에 있단다.” 자신의 생각이 하나씩 맞아 들어가자 줄리오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일기장을 넘겨 큰소리로 읽었다.
<열 번째 원칙 = 친한 사이일수록 돈거래를 멀리하라. 돈거래는 인간관계를 깨뜨리는 지름길이다.> “할아버지, 돈 관리에 관한 가르침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사실 지금은 돈이 별로 없지만 이다음에 돈을 벌게 되면 잘 관리할 수 있을 거예요.” “이게 전부가 아니란다, 줄리오. 네가 가진 모든 것, 네 삶, 친구, 건강, 돈,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 네 수입의 10퍼센트를 하나님께 바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일이란다. 농부는 씨를 뿌려야만 추수를 할 수 있는 거야.”
<열한 번째 원칙 = 소득의 십일조를 가장 먼저 떼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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