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짐을 진 사람, 아모스』
원 베네딕트 지음
차례
1.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하라
1장 무거운 짐을 지고 세상으로 간 하나님의 사람
2장 세계를 품과 가는 하나님의 사람
3장 백성의 아픔을 외치는 하나님의 사람
2. 무너진 장막을 복구하라
4장 세상을 향해 경고하는 하나님의 사람
5장 열심히 일하고 베푸는 하나님의 사람
6장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하나님의 사람
7장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
8장 말씀을 들고 세상으로 가는 하나님의 사람
3. 영원한 회복을 꿈꾸라
9장 민족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
10장 받은 축복을 나누는 하나님의 사람
11장 절망 속에서 희망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
1.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하라
1장 무거운 짐을 지고 세상으로 간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1장 1절)
어떤 사람의 표현을 빌리면, 아모스는 ‘바람과 함께 나타나서 바람과 함께 사라진 선지자’이다. 왜냐하면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모스 1장 1절에서 우리는 아모스가 드고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드고아는 베들레헴의 남동쪽, 사해 근처에 있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이다. 보통 성경에서 인물을 소개할 때 아버지가 누구이며 어느 집안의 사람인지 드러나는데, 아모스에 대해서는 그런 설명이 없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특별한 배경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학벌이 얼마나 좋고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고 명문가 출신이나 3~4대째 예수님을 믿는 집안의 모태 신앙인을 더 크게 쓰시는 것도 아니다.
집안과 학벌, 그리고 출신 배경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다. 그분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라도 다 쓰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경험과 배경을 사용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배우고 경험한 모든 일을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신다. 별 목적 없이 훈련한 작은 재능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다 쓰실 수 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면 무언가 버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것들은 이제 쓸모없어. 모두 다시 시작해야지’하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 바란다. 작은 능력이라도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면 그분의 뜻대로 선하게 사용하실 것이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집트의 궁전에서 왕자로 살았다. 이집트의 언어를 배우고, 그 나라의 학문을 익혔다. 긴 세월 동안 그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모세의 경험을 사용하셨다.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할 때 모세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궁전에서 나와 광야에서 양을 치던 40년 경험 역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다. 모세는 양을 지키고 돌보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갈 수 있는 목자의 마음을 단련한 것이다.
아버지의 양을 치던 다윗을 생각해보라. 자신의 양이 아니라 아버지의 양이었다. 다윗은 양을 해치려 하는 짐승과 싸우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왕으로 준비되었다. 목숨 걸고 양을 지키던 자세로 백성을 돌볼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경험을 선하게 사용하신다. 우리가 실수한 과거라 할지라도 그것을 바꾸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실 수 있다.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묵시가 필요하다. -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암 1:1)
오늘 우리에게는 세상의 기준과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묵시가 필요하다. 우리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봐야 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에 말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세상을 보라. 입시 위주의 교육 현실을 보면, 돈과 좋은 학벌을 가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가르치는 듯하다. 사람들은 돈을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부자가 되려고 아등바등한다. 이런 불의한 세상에 하나님의 묵시가 전해져야 한다. 명문대학에 가는 것보다 예수님 잘 믿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외치는 ‘왕따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바로 선지자이다. 선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관점을 대신 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묵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삼으라. 하나님께서는 열방의 선지자로 세우신 예레미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렘 1:9~10)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갈 때,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선지자로 세워질 수 있다.
2장 세계를 품고 가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1장 1절~2장 3절)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암 1:3)>
드고아 출신의 목자인 아모스는 하나님의 짐을 지고 북이스라엘로 가서 말씀을 전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오늘로 이야기하면 신학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설교하는 방법이나 기술을 배운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들판을 돌아다니며 양을 치는 목자일 뿐이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아모스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배경이나 인정받을 만한 조건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이었다.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은 더 중요하다. 하나님의 눈물로 세상을 바라보며 울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로 세상으로 가서 공의를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지자는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행하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선지자는 백성 앞에서는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 편에 서서 기도하고 중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선지자의 말은 절망의 메시지로 시작해서 희망의 메시지로 끝맺는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선지나의 예언은 꾸지람과 징계를 말하면서 동시에 위로와 희망을 약속하고 있다.
3장 백성의 아픔을 외치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2장 4~16절)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하며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조상들이 따라가던 거짓 것에 미혹되었음이라(암 2:4)>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는 예언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아픔을 표현하라고 빌려주신 말이며, 권력과 부를 가지고 남을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경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없다. 진실을 말함으로 고난과 어려움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당연히 진리를 선포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한마디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타락하고 부패한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을 만드는 사람이다. 우리는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든, 공부하는 학생이든 상관없이 지금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할 수 있는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매주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욕심을 부리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이 시대의 선지자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 살아가는 데는 돈도 필요하고 집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런 물질에 삶의 목표를 두거나 인생의 전부를 걸면 안 된다. 물질적으로 부유함을 누려야 잘 사는 것이라 착각하면 계속 욕심을 부릴 수밖에 없다. 그 욕심이 죄가 된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후6:10).>
지난 208년 12월 1일 자<동아일로>에 실린 기사를 보자. <아내 명의로 된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아내와 딸을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40대가 2년 전에도 유산 때문에 불을 질러 부모를 숨지게 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신이 진 빚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기 위해 아내와 딸을 죽인 남자가 경찰에 구속되었다는 기사이다. 우리 사회에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세상의 일반적인 기준은 돈 많은 부자가 잘 살고 돈 없는 가난한 사람은 못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돈 때문에 남의 것을 훔치고 때로는 속이면서 빼앗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다. 이 모든 것이 돈을 사랑한 결과이다.
인생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먹는 떡에 목숨을 걸고 있다. 떡이 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린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린다. 신명기 8장 1절부터 6절 말씀이다.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브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
예수님이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을 바꾸라는 뜻이다. 나의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꾸어야 삶이 변한다. 그런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선지자가 될 수 있다. 성경은 교회에 갈 때만 들고 가는 소품이 아니라 열심히 묵상하고 연구하며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거짓 신을 쫓아 살면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모스서 2장에서 북이스라엘 백성이 지적받은 문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것이었다. 그들은 조상들이 섬기던 이방 신을 따르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다.
아모스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분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이다. 오늘도 같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바로 지금 하나님의 선지자는 어디에 있는가.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이가 누구냐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시 35:10)>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강한 자에게서 건지신다. 선지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을 대신하여 외칠 수 있는 하나님의 입술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던 것일까? 재물을 좀 가졌다는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 이유가 무엇일까?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첫 은혜를 잊어버린 것이었다.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멀리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어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고 아모리 사람의 땅을 너희가 차지하게 하였고 또 너희 아들 중에서 선지자를, 너희 청년 중에서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스라엘 자손들아 과연 그렇지 아니하냐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암 2:9~11)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것은 그들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었다.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입고 나서, 곧 그것을 잊어버렸다.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한 죄인과 용서받은 죄인이 있다. 우리는 용서받은 ‘의인’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이다. 용서받았을 뿐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잘난 것이 하나 없다.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여기까지 올 수 없는 인생이 아닌가.
겸손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첫 은혜를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어떠한 고통과 어려움에서 살았는지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한마디로 노예로서 400년 동안이나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제 먹고살 만해졌으니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어렵고 힘든 이웃을 돌보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들의 과거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도 생각 못한 채 힘없고 가난한 이웃을 학대하고 무시했다. 이러한 교만이 사람과 사회를 망가트린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인생의 역전도 주신다. 어제의 눈물과 고통을 지나가게 하시고 오늘의 기쁨과 웃음을 주신다. 어두운 과거가 있다면 그것을 기억하며 자신과 같은 아픔과 눈물을 가진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
2. 무너진 장막을 복구하라.
4장 세상을 향해 경고하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3장 1~15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게는 선민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 배려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만 관심을 가지시고 다른 나라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하늘의 편애를 받거나 징벌을 면제받는 특권을 얻었다는 것이 아니다. 선택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다른 민조고가 나라보다 더 높은 도덕적 가치 기준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심판과 징벌 또한 다른 민족보다 더 엄격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분명히 구원받았다. 그러나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하나님께서 상관하시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큰 오산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는 기준을 가지고 세사오가 다르게 살아야 한다.
심판은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다. 경고 후에 심판이 따른다. 예고되지 않은 심판은 없다. 반드시 경고 다음에 심판과 징계가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행동을 돌이키라는 뜻이다.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하면 내 밖의 다른 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내 안의 소리밖에 듣지 못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겸손해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을 때 그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니느웨 백성들은 물론 그 나라의 왕까지 즉시 깨닫고 금식하며, 주님 앞에 회개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거두어졌다. 주님이 경고하실 때 잘못을 깨닫고 즉시 회개하면 심판을 면할 수 있다. 우리는 심판을 내리지 않기 위해 먼저 경고를 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점검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영향력을 회복하라. 당당히 세상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도록 담대함을 구하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주께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소원한다.
5장 열심히 일하고 베푸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4장 1~5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소금과 빛이 되어서 세상을 바꾸는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잊고 세상의 방식대로 살면,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매를 통해서 우리를 정신 차리게 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갖가지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이것은 백성들 자신이 기뻐하는 일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벧엘에 가서 죄 짓고, 길갈에 가서도 죄를 지으면서 예배 시간에만 거룩히 구별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마다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철저하게 십일조 예물을 드리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뻐하시지 않았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제사에 귀한 재물보다 나은 것이 바로 순종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제사보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모습의 예배를 받기 원하실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바로 이것이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6)> 위의 말씀에서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다. 선을 행하라는 것과 서로 나누라는 것이다. 쉬워 보이면서도 실제 삶에서 간과하기 쉬운 지침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킬 만하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행동을 권면하신다. 다음은 야고보서의 말씀이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여기서 말하는 ‘경건’은 헬라어로 ‘예배’를 뜻한다. 말씀에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자의 예배가 헛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의 경건함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일이지, 사람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또한 입으로는 자신이 경건하다고 말하면서 실제 생활은 그렇지 않은 것, 즉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삶으로 드릴 수 있는 또 다른 예배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기 쉬운 그들을 정성껏 대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된다.
세상에서 땅의 기준이 아닌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며 정결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훌륭한 예배와 아름다운 찬송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찬된 경건의 삶이 없었다.
4장에서 아모스는 그들의 이러한 문제를 지적했다.
부요한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궁핍한 자를 학대했다면 그것은 누구를 멸시한 것인가. 바로 하나님을 멸시한 것이다. 이 잠언 말씀에 따라 생각하면 관점이 달라진다.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하나님의 심정으로 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6장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4장 6~13절)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세상을 산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날마다 고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은 이 땅에 속해 살고 있지만, 땅의 원칙이 아니라 하늘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경제가 부흥하고 국권이 강했고 사람들은 여러 채의 별장을 짓고 무역을 통해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에 대해 진노하셨다. 사람들이 부작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을까? 그것이 아니다. 부자인 것이 문제가 아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했을까?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빠뜨리지 않았고 십일조와 헌금도 잘 드리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경제가 발전하고 먹고살 만해져도 여전히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4장 1절 이하에 기록된 것같이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무시했으며, 유흥을 즐기는데 돈을 쓰기 시작했다. 돈을 빌려갔다가 갚지 못하는 사람을 신발 한 켤레 값에 노예로 팔기까지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에 진노하셨다. 충분히 먹고살 만큼 부자이면서 나누지 못하는 것이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돈이 전부라고 믿으며,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우상숭배의 죄이다. 사람이 돈에 욕심을 부리면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심하면 하나님을 물질의 복을 보장해주는 신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래서 더 많은 정성과 헌금을 바쳐서 더 많은 복을 받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물질과 정성으로 신을 감동시키려 하는 이것이 바로 미신이다. 무당 종교는 사람의 정성으로 신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시도한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신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당 종교에서는 ‘정성이 부족하다, 성의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과 성의로 감동받기 원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다만 그분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신다.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했지만, 그들의 삶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늘의 뜻을 말하고 실제로는 땅의 뜻을 따라 살고 있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도 망하고 이웃도 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서면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신다. 경고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마음과 삶을 돌이키는 것, 즉 온전하고 완전한 회복에 있다.
기근이 생기면 기도해야 한다. 기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으로 돌이킬 수 있다. 창세기 12장의 아브라함을 보면, 기근이 생겼을 때 그는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두려움 가운데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결국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기고 만다. 백성의 굶주림 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자 그 다음은 가뭄이 시작된다. 농사를 지어야 먹을 것이 생기는데 비가 내리지 않으니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고, 마실 물조차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일어났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잘못해서 매 맞고 있는데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전염병이 돌고, 젊은 용사들이 전쟁에 죽고, 소돔과 고모라가 당한 것처럼 성읍이 무너지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매를 드실 때 민첩하게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 그 매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과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고난이 유익이 되려면 주의 율례를 깨달아야 한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난과 어려움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믿음의 삶이 되어야 한다.
선지자들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들었으면 잘못을 깨달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전혀 깨닫지 못한다. 늘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리가 은혜를 받기를 소원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으로 듣는다면 그분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기근의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기근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죄와 욕심에서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신,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볼 때는 최악의 경우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신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듯한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회복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7장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5장 1~27절)
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고등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첫째는 큰 건물을 지어서 그 규모를 통해 존재를 알리려고 한다. 건물의 크기와 회중의 수가 곧 자신들의 영향력이라고 여긴다. 외적인 선장에 치중한 나머지 내실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둘째, 영향력 있고 고등 종교가 타락하면 영혼에 대한 사랑이 변질된다. 더 이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며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다.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이 다른 대우를 받는다. 더 이상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도하지 않고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일꾼을 모집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셋째, 고등 종교가 타락하면 ‘집단 이익 추구’가 목적이 되기 시작한다. 즉, 집단 이기주의가 나타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 한다. 그러다 보면 베풂과 나눔에 인색해지고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일에는 잘 나서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비판을 듣고도 자기 성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락한 종교의 네 번째 현상은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수는 많아지고 있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미약하다. 심한 경우, 영적인 일이 아니라며 세상과 유리된 채 살려고 한다.
중세시대에 많은 젊은이들이 신부가 되기 위해 몰려들었고, 티베트가 나라를 잃기 직전에 남성의 70% 정도가 승려였으며, 고려가 망하기 직전 수많은 젊은이들이 승려가 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갔다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타락한 종교는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영향을 끼칠 만한 사람을 키워내지 못하며, 결국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예배당에 와서 위로받고 죄 사함 받고 거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드리고 말씀을 가까이 하며, 그 말씀을 들고 예배당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미의 관심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느냐에 있다.
8장 말씀을 들고 세상으로 가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6장 1-14절)
아모스서 6장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한 나를 들어 이스라엘을 치겠다고 말씀하신다. 한마디로 그들이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여러 죄악을 저질렀던 이스라엘은 결국 망하고 말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되어서,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모아서 큰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가 그것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키워서 세상으로 보내고 세상을 바꾸는 것이 교회의 중요한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배출되어야 한다.
인구의 84%가 기독교인이라는 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은 기독교 국가라고 자부하는 나라이며 인구의 70%가 매주 교회에 출석한다. 그러나 미국의 이혼율은 세계 최고이며 초혼의 45%가 15년 안에 이혼하거나 별거한다. 또한 200만 명이상의 사람이 교도소에 수감된 적이 있고, 알코올 중독자와 마약 중독자는 계속 늘고 있다. 총기 사고로 사망하는 사람 역시 매년 늘고 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많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것이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일까? 세계 100대 교회 중 50개 이상이 한국 교회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냉정하게 바라보자. 입시 학원으로 전락해버린 듯한 학교를 보면 교육의 문제가 심각하다. 기독교 재단의 학교가 수백 개에 달하고 있지만 한국의 교육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있다. 이혼, 청소년 범죄, 성범죄, 술 소비량의 증가는 우리 사회가 깊이 멍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문제라기보다는 교회의 영향력 상실과 관련 있는 문제이다. 집사, 장로 등 직분을 가진 시장과 국회의원은 늘어났지만 이들로 인해 나라가 변하고 사회가 변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곤란한 상황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넌(non) 크리스천’은 없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은 전부 ‘안티(anti) 크리스천’에 가깝다”고 말한다. 왜 이런 말들까지 나오게 된 것일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우리들만의 성전을 짓기에 바빠서 세상을 돌보고 변화시키는 일에 소홀했는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먼저 우리의 생각과 가치관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으로 가서 섬겨야 한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멸망의 길에서 돌이켜 변화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부흥이다.
아모스서 6장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교회가 왜 이스라엘을 변화시키지 못했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분명 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뜻으로 삶을 돌이키는 것이 그 방법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 교회는 말씀으로 세상을 섬겨야 한다. 말씀으로 무장된 실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방법은 말씀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각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행동이 바뀌려면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말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면 행동까지 변화가일어난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말씀의 사람, 성경의 사람이 되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훈련이 끝났다면, 이제 세상을 제자 삼기 위해 나아갈 차례이다.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3. 영원한 회복을 꿈꾸라
9장 민족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7장 1~17절)
아모스서 7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는지 알 수 있다. 쓰임받는 사람은 환상을 보는 사람이다. 환상을 보는 사람을 통해 민족이 새로워지고 회복될 수 있다.
아모스서 7장에서 9장까지는 아모스가 보았던 다섯 가지 환상이 기록되어 있다.
7장 1절에서 3절까지가 첫 번째 환상이다. 메뚜기 떼가 땅의 풀을 다 먹어치우는 상황이다.
두 번째 , 거센 불길이 일어나 지하수가 마르고 온 땅이 불로 태워지는 환상이다. 7장 4절부터 6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세 번째, 다림줄에 대한 환상이다. 7장 7절부터 11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다림줄이란 건물의 벽돌이 똑바로 세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리는 추를 가리킨다. 아모스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다림줄을 환상으로 본다.
네 번째 환상은 8장 전체에 걸쳐 보여진다. 아모스는 다 익은 과일들이 광주리에 담겨져 있는 환상을 본다.
마지막으로 9장의 다섯 번째 환상은 제단 옆에 서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환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다.
그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깨우시고 회복시키기 원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환상’이란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비전’을 가리킨다. 그것은 단순한 꿈, 또는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다. 아모스는 국가와 민족이 갈 길을 모르고 헤매고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졌다.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환상이요, 비전이다. 환상이 없으면 백성은 곁길로 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잠언 29장 18절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한다. 환상이 없으면 백성이 곁길로 간다. 그러게 방자히 행하다가 결국에는 망하게 되어 있다. 때문에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묵시, 즉 비전과 환상을 가지고 백성을 이끌어가야 한다. 문제는 모든 지도자가 하나님의 비전과 환상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환상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하다. 지도자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과 환상을 가지고 있어야 그 나라와 민족이 부흥할 수 있다.
10장 받은 축복을 나누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8장 1~14절)
아모스서 8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보여주신 다섯 가지의 환상 중에 네 번째 환상이다. 아모스는 탐스러운 여름 과일이 담겨 있는 광주리를 보았다. ‘여름 과일’은 다 익은 과일을 뜻한다. 이것을 보여주신 후 하나님께서는 “네 눈에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셨다. 아모스는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익은 과일이 담겨 있는 광주리를 보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 백성 이스라엘도 그 모양이니 이제 될 대로 다 되었다. 더 용서해 줄 수 없다. 이제는 끝이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인다. 과일이 담겨 있는 광주리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잘 연결되지 않는다. 대체 어떤 의도에서 이런 환상을 보여주신 것일까? 사실 이 말씀은 히브리어의 뜻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 쓰인 ‘여름 과일’이 히브리어로 ‘퀘이크’이기 때문이다. ‘퀘이크’는 ‘다 익은 과일’이라는 뜻과 ‘종말’ , ‘끝’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에게 다 익은 여름 과일을 보이셨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셨을 때 아모스는 “네, 하나님. 퀘이크를 봅니다”하고 대답했다. 아모스가 말하는 퀘이크는 ‘다 익은 여름 과일’이지만 그 단어의 또다른 의미는 ‘멸망’과 ‘심판’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래, 네가 말한 대로 이제 이스라엘에 끝이 온다.”하고 말씀하셨다. 다 익은 여름 과일이 종말을 뜻한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지닌다. 다 익은 과일은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좋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부요해지고 풍성함을 느낀다. 광주리 안에 과일이 가득하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다. 그러나 다 익은 과일은 신선함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계속 탐스러운 모습으로 있을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다 익은 과일을 광주리 안에 그냥 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것을 기억하라. 다 익은 과일은 광주리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 잠깐 동안 광주리 안에 담아둘 수는 있지만 오래 두어서는 안 된다. 먹기 좋은 때에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 광주리 안에 가득 찬 과일은 혼자서 먹기에 넘치는 양이다. 혼자 먹지 못할 것 같으면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으면 된다. 나누고 베풀지 않으면 썩어 없어진다.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누지 못하는 것은 욕심 때문이다.
야고보서 1장 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씀한다. 욕심을 가지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으로까지 이어진다. 광주리 안에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담겨 있어도 그대로 두면 복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누려야 진짜 복이 된다. 나누지 못하고 광주리 안에 가지고 있으면 결국 멸망을 향해 간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회를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믿을음 가진 우리부터 제대로 행동해야 한다. 자신의 광주리에 주신 과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욕심부리고 애쓰면 안 된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광주리에 가득 찬 과일을 나누고 베풀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가 없었을 것이다. 나누고 베풀지 않으면서 자기의 광주리에 더 많은 과일을 채우려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T는 것마저 잃어버렸다. 이게 욕심의 결과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비극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돈을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나라를 잃어버린 것도 아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더 이상 그들에게 말씀의 은혜가 임하지 않았다.
11장 절망 속에서 희망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 (아모스 9장 1~15절)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RP서 설마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실까’하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잘못을 반성하거나 돌이킬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불의를 행했다. 백성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신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라고 하여 잘못된 일을 저질렀는데도 칼에 맞아죽지 않게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북이스라엘은 결국 멸망했다. 아모스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를 통해 경고가 전해졌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았다.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되고 만다. 화려했던 궁궐과 별장은 불타 사라졌고, 그들이 가졌던 재물과 노예도 모두 빼앗겼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살아 있는 사람도 아시리아의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나라 잃은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민족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러한 멸망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다. 교사가 학생이 미워서 매를 드는 것이 아니다. 학생의 잘못을 고쳐주기 위해서, 매를 통해서라도 잘못을 깨닫고 달라지기를 원해서 때리는 것이다. 경고와 징계의 이유가 ‘회복’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경고와 징계는 우리를 절대 포기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의 선포는 멸망과 징계의 말로 시작해서 희망과 회복의 메시지로 끝맺는다. 아모스 역시 죄 때문에 망하게 될 것이라고 외쳤지만 그 내용으로 마무리하지는 않았다.
아모스서 9장 11절 말씀이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회복과 희망의 메시지이다. 성경의 모든 예언서는 멸망과 징계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희망과 회복을 말한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의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시 54:8)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는 절망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이다. 죄에서 돌이키면 반드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알고 있기에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외친다. 선지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하더라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선지자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문제를 바라보면 절망에 빠지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주위에 어렵고 힘든 문제에 부딪힌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진정한 소망의 길을 전하는 선지자가 되라. 수학 문제를 푼 학생이 답을 틀리게 적었다면 어디에서 계산이 잘못됐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시험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선생님은 학생을 다그치지 말고, 문제 푸는 방법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경고하시고 분노하시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았고, 나누지도 않았으며, 베풀려는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을 무사하고 학대했다.
화려한 예배는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그곳에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물질과 부를 예배하는 삶을 살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아모스는 이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또 지적했다. 문제를 알아야 돌이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결과만을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 선포하는 말씀의 배경과 원인을 충분히 밝혀, 듣는 자들이 자신의 문제를 성찰하도록 해야 한다.
예레미야서 3장 13절부터 15절의 말씀이다.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니들에게로 나아가는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했지만 하나님의 회복도 이야기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말한 것이다. 선지자에게는 눈 앞에 보이는 멸망과 절망이 전부가 아니라 그 이후에 이루실 회복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전할 수 있다. 사람들은 흔히 단점과 문제만을 지적한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절망한다. 젊은이들을 위해 사역을 하다 보면 자녀와 함께 상담하러 오는 부모들을 종종 만난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의 문제점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우리 아이는 문제아’라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호응하지 않고 자녀들의 가능성과 장점을 찾아내서 말해준다. 비록 현재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을지라도 지금부터 열심히 살아가면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되어 크게 쓰임받을 것이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넌 이것도 못하니?”하며 낙심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넌 그것도 잘하는구나”라고 말해줄 수 있는 선지자가 필요하다. 가나안에 들어갔던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아낙 자손이 강해서 취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면 어떤 조건에서든지 그 땅으로 들이실 것’이라고 말한다. 가은 환경을 두고도 이렇게 긍정과 부정의 자세를 갖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장점을 먼저 말하고 단점으로 마무리하면 듣는 입장에서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좌절하게 된다. 그러나 우선 단점을 지적하고 장점을 말하면 듣는 쪽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희망을 가지게 된다. 무슨 일에든 장점과 단점을 지혜롭게 말할 줄 알아야 한다.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고치고 돌이키면 다라질 수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회복의 원리이다. 그 회복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리니 그들이 황폐한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하며 포도원들을 가꾸고 그 포도주를 마시며 과원들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땅에 심으리니 그들이 내가 준 땅에서 다시 뽑히지 아니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9:14-15)
공의의 선지자 아모스/ Amos
(암 5:24)
1. 인적 사항
'아모스'라는 이름의 의미는 '짐을 진 자 또는 짐꾼'이라는 뜻으로 선지자
이사야의 아버지 '아모스(강한 자)'와는 음역은 같지만 원어는 전혀다릅니다.
그는 유다 베들레헴 남방 약 10Km 떨어져있는 고을 '드고아' 출신으로
빈농의 가난한 목자였으며 생계를 위하여 뽕나무를 경작하였습니다. (7:14)
그는 선지자도 아니었고 제사장 가문도아닌 무명의 목자이자 농부였는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쪽 유다출신이 었지만, 북 이스라엘을 위하여
예언사역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역이 하나님의 인자하심보다
공의와 심판을 통한 엄격성을 띄우고 있는 것은
그의 훈련받은 삶에의 한 성격때문으로 보입니다.
드고아는 광야와의 접견지경이며 주변에는 거칠고 메마른 산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주식은 가나안 땅에서 산출되는 모든 과일가운데 질이 가장 낮고
식물로는 부적당한 가운데 하나인 무화과 열매였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사역을한 세례요한과 비슷한 광야의 강인한 성격을 지녔음으로
타국까지 가서 위험을 무릎쓰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2. 그의 생애
아모스는 호세아보다는 조금 앞섰으나 그와 동시대의 인물이었으며,
요엘 선지자보다는 나이가 어려서 자신의 글을 쓰기전에 요엘의 글을
많이 읽고 자신의 글에도 인용을 할 정도로영향을 받았습니다. (1:2. 9:13)
그는 여로보암 2세가 왕위에 올라 41년간 통치한 세월의 2/3 기간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이 시기는 유다왕 아마샤 통치 14년과 그의 아들
웃시야 통치 27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B.C.780년 경부터 27년동안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직접적인 예언과 활동은 B.C. 760-755년 사이로 보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북 이스라엘이 최대 번성기를 누리는 시기로, 그동안 북 이스라엘을
위협하던 아람 왕 벤하닷 3세가 앗수르 에 의해 패배하여 자체 회복에만 힘쓰게되자
여로보암 2세는 용기있는 의욕적인 왕으로 이 틈을 타 다메섹을 점령하고
영토를 확장하여 '하맛'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넓혔습니다. (왕하14:28)
이로인하여 이스라엘은 경제, 사회. 문화등이 부흥하였으며 백성들은
번영에 만족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종교적, 도덕적 부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겨울궁과 여름궁이 있었고 상아궁도 있을정도로 계절마다
집을바꿔 살며 호의호식 하는삶을 살았읍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아모스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도록 북 이스라엘에게 경고하게 하셨습니다. 이에 아모스는
세가지 환상을 통해 여호와의 진노를 그들에게 전하였습니다.
1) 메뚜기의 환상 (7:1-3)
이는 풀이 움을 돋우려고할 때, 황충떼가 몰려와 모든 풀을 다 먹어 치우는 환상으로
장차 임하게될 외세의 침략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초토화 될 것을 예언한 것이며
2) 불의 환상은 (7:4-6) 바다와 육지를 다 삼키는 공포
이는 불이, 주로 '가뭄'의 현상을 비유로 나타낸 것으로 온 땅이
가뭄의 재해를 만나 흉년과 기근이 퍼짐을 예언한 것이고
3) 다림줄 환상 (7:7-9)
여로보암왕 가문을 칼로치고 멸망시킬 것이며 , 이미 다림줄로 재었은즉
온 성과 산당을 허물어 버리리라는 심판의 경고였읍니다.
이 경고는 당시 벧엘에 금송아지를 모시고있는 제사장 아마샤의 마음을
두려움과 격동을 일으키게 만들었고 그는 즉시 왕에게 아모스가 모반을
일으키고 있다고 모함하여 그를 처벌하게 만드는 한편 아모스에게 말하기를
'너는 유다땅으로 도망하여가서 거기서 예언하고
다시는 밷엘에서 예언하지 말라.'라고 위협하였습니다.
거짓 선지자, 삯군 목자의 대표적인 특징은 자기구역, 자기위치, 고수에 있는 것을 봅니다.
이에 아모스는 대답하기를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7:17) 하였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아모스는유다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이스라엘은
아모스의 예언 후 60년이지나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3. 신앙의 특징
1) 자연속에 하나님의 섭리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은 선지자였습니다.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5:24)
'미쉬파트'로 표현되는 '공법'은, 삶에 적용되는 윤리적인 율법이며,
정의는 '체다카'라는 말로 생활에 율법의 적용으로 나타나는 바른 결과를 의미합니다.
공법이 물같다는 말은 드고아 옆에 있는 커다란 사해바다가 은빛으로 넘실거리는
풍요함을 인용한 것이요, "정의가 하수같이 흐른다"란 생명의 강물이
메마른 곳곳에 흘러 내림으로 모든 만물이 생기를 얻어 소성하는
자연의 모습을 그리며 인용한 말입니다.
목자이며 농부였던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자연의 법칙에서 많이배웠읍니다.
그러나 나누어 주어야 할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있거나 흘러도
한 곳으로만 적셔지곤 한다면 하나님은 비 바람 폭풍우를 내리셔서
고정된 한계를 깨뜨려 버리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있었읍니다. 또한 선민이라는 모범, 우월의식이 있었읍니다.
그런데 율법은 시행되지않아 사해 같이 썪었고 모범 의식은 세상 풍속을 좇아
타락하였음으로 이방 민족같이 되버렸읍니다. 이제 남은건 천둥, 번개, 세찬
비바람만 남았읍니다. '이 심판을 두려워해야한다' 고 아모스는 경고하고 있읍니다.
신앙생활에 넘치는 물질이 썩고있거나 세상적인 삶의 교제와 유익을 위하여
교회를 다니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됨을 깨우쳐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2) 하나님의 일은 사역이지만, 인간의 일은 지역임을 분명히 구분하는 신앙인이었읍니다.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 하지말라 하매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7:12-17)
삯군 목자는 떡이 나오는 데서만 일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는
자기가 필요되어진 곳에서 사역을 합니다. 이 때문에 권력에 아첨하는
사역자들은 대중의 기호쪽에 맞게 행사에 관심이 많은 반면, 사명자들은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데 성실함니다. 권세는 사역을 탄압합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빛의 자녀를 미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세력은
세상 사람보다 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보다는 약합니다.
말씀의 대언은 말씀의 주인이 보장합니다.
말씀의 주인은 세상세력을 심판하는 권능의 세력입니다.
이 것을 알고 지닌 사람은 세상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종교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종교 대상의 부재때문입니다.
이 때 서로의 공존을 위하여 세상과도, 다른 종교와도 모두 짝하게 됩니다.
마땅히 섬겨야할 대상의 부재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모스는 세상권세 권력인에게 담대히 선포합니다.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더러운 땅은 타락과 죄로 뒤덮힌 세상입니다. 하늘에서 살 사람은
땅에 머무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이 것이 아모스의 참된 신앙입니다.
3) 진정으로 무서운 기근은 영적 기근임을 잘 알고 있는 신앙인 이었습니다.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못한 기갈이라."(8:11)
기갈은 생명이 느끼는 고통입니다. 육신이 죽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즉, 영이 죽은 자는 말씀의 기갈도 없습니다.
바로 세상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산자는 가장
큰 기갈이 영적 기갈임을 압니다. 사울왕도 사무엘 선지자를
그 토록 찾았으며, 밧세바를 범한 다윗왕도 성신을 자기한테서
거두지 말기를 괴로움 속에서 간절히 간구하였습니다.
그런데 한편, 영적 기갈이 있는 가운데 가장 번식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짓교리와 이론입니다. '영적기갈을 혼적인 풍요로 채우려는 시도'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부인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지 않습니다. 비과학적이며
비상식적인 것을 배제합니다. 지식과 과학에 의존합니다. 철학과 명상에 의존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은 언제나 가장 높임을 받으시다가는
가장 하찮은 존재로 전락되십니다. 바로 영혼이 죽어가는 자들에 의해서입니다.
이 때가 바로 신앙을 착각속에서 살 때입니다. 착각의 결과는 실패입니다.
신앙의 실패는 멸망입니다. 구원을 착각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십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아모스 선지자는 우리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영적인 기갈을 느끼지 못하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풍성히 먹어 '영의 탈진에서 벗어나라'고 경각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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