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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비난에 대처하는 10가지 방법』블레인 앨러 저

by 은총가득 2020. 4. 20.

 

 

비난에 대처하는 10가지 방법

 

                                              블레인 앨러 저 

  

     차례

서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1. 비난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2. 최선을 다했는데도 비난받을 때

3. 하나님이 옹호해 주시지 않을 때

4. 비난이 사실일 때

5. 비난을 흘려버려야 할 때

6. 비난을 반박해야 할 때

7. 느긋해져야 할 때

8.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9. 감정 폭발이 불가피할 때

10. 용서하고 싶지 않을 때

 

 

 

1. 비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진리 : 당신은 그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다.

수요예배에 참석하고 나서 집으로 가는 길에 어린 조니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가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신 목사님의 얘기가 정말 사실이야?” “그래, 그렇단다.”하고 엄마가 대답했다. “우리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사실이야?” “그래, 사실이야.” “그렇다면 엄마, 내가 지난 밤에 기도하고 침대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내 눈에 보였던 먼지는 바로 누군가가 왔다갔다 한 것이겠네목회자인 당신이 바로 그런 존재일 수 있다.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먼지 같은 존재, 비난자의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마는 존재 일 수 있다. 만일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생존을 향해 의미심장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는 셈이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했을 때 이 같은 현실을 직시했다. 그는 모든 감정을 억제할 수 있는 남자다운 사람이 아니다. 특출한 성자가 아니며, 무엇이든 다 포용하는 사람도 아니다. 부서지기 쉬운, 금이 간 질항아리이다. 바울의 신체적, 정서적 스태미나는 질그릇스태미나였다. 우리가 경험하는 무력감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기를 원하신다. “나는 네가 할 수 없음을 알 고 있다. 이제 너는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알 필요가 있다. 너는 단지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에 불과하느니라.”

 

 

진리 :하나님이 처리해 주실 것을 기대하라.

공항에 가 보면 무빙 워크가 있어 이동 시간을 쾌 단축시켜 준다. 이 보도 위에서 걸으면 더 빨라진다. 거기서 큰 걸음으로 걸으면 훨씬 더 빨라진다. 우리가 걸을 때 움직이는 보도도 걷고 있는 것이다. 목회 사역 중에 심한 압박을 느끼는가? 핍박을 당하고 있는가? 사역 중에 거꾸러뜨림을 당하는가? 그러나 당신이 목회 사역을 계속할 때, 즉 자신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해내며, 주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때 하나님이 그 일을 하고 계신다. 힘든 시기를 부담스러워하지 말라. 그 시기는 하나님이 당신 안에서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실 기회요, 외부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부에서 당신을 돌보실 것임을 보여 주실 완벽한 기회이다. 만일 당신이 내부를 돌본다면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은 외부에서 이루어져야 할 일들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할 때 하나님도 그렇게 하신다.

 

 

이제는 어떻게 하나?

하나님이 명하신 일은 하나님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당신이 TV 리모콘을 누르면 TV가 작동된다. 리모콘으로 명하는 것이 실행되도록 우리 자신이 챙기는 것이다. 상처를 입을 때 당신이 단지 인간일 뿐이라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사방으로부터 우겨쌈을 당하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답답한 일을 당하면 낙심할 것이다. 핍박을 받으면 버림받았다고 느낄 것이다. 거꾸러뜨림을 당하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당지 인간일 뿐이라면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초자연적 생명이 드러나야한다.

 

 

2. 최선을 다했는데도 비난을 받을 때

 

그분을 위하여 일하라

인간 행동 연구자들은 과연 신학교에서 전문 목회 훈련을 받은 이들이 선한 사마라아인인지를 밝혀 보기로 했다. 다음은 윌리엄 맥래가 쓴 내용이다. <그들은 교회경력 연구를 구실로 삼아 40명의 신학생들을 만났다. 각 학생은 인근의 건물로 걸어가서 그곳에 마련된 녹음기에 특정한 주제에 대해 즉흥적으로 녹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어떤 이들은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 대해, 또 어떤 이들은 장래에 맡고 싶은 일에 대해 녹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그 건물로 가는 길목에 연기자 한 명을 미리 배치하였다. 그 사람은 신학생이 다가오면 신음하면서 길바닥에 쓰러질 계획이었다. 연구자들이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그 학생들 중 절반 이상이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선한 사마라이인에 대해 논할 계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가느라고 쓰러진 사람을 훌쩍 뛰어넘어 갔다.”> 우리는 의도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작은 행동이 가장 큰 감정보다 훨씬 더 낫다. 섬길 대상자들을 위해 실제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들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주를 위해 실제로 행하는 것이다.

 

 

비난받을 때 주님이 함께 들으신다.

만일 당신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면, 당신에게 행해지는 것은 사실상 주님께 행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2천 년 전 식사 자리에서 가해진 비난은 마리아 곁에 계셨던 분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마가복음 14:6,7의 예수님의 말씀은 마치 하늘을 가르는 번개 같았다. 왜 그러셨을까? 이는 마리아에게 가해진 비난이 마치 그분에게 겨냥된 흉기와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원칙을 다시 기억하자. 만일 당신이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면, 당신에게 행해지는 것은 사실상 또 다른 분에게 행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당신 혼자서 펀치를 맞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맞는 것이다.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9:4)라고 말씀하셨다. 신자들에 대한 사울의 비난은 그 신자들은 물론이고 또 다른 분에게도 해를 입혔다. 주께 해를 입힌 것이다. 예수님이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와 함께 계시듯이 육체로 사울 곁에 계셨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하늘에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셨듯이 육체로 사울 곁에 계셨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하늘에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셨다. 그러나 주님은 사울 곁에 계셨다! 사울의 핍박을 받은 자들은 주님의 영적인 몸의 지체들이었다. 그들에게 행해진 것은 그분께 행해진 것이다. 그분은 그것을 느끼셨다! 당신을 포함하여 주님께 속한 자를 해치는 것은 그분을 해치는 것이다.

 

 

지레 짐작하지 말라

당신은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본다. 온갖 측면에서 생각해보고, 모든 방법을 다 떠올려 본다.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더라면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막을 수 있었고, 당신의 성실성도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지나간 일들을 모조리 점검해 본 후 좀 더 많이 할 수도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것을 잊어버리라. 주님의 평가를 들을 수 있는 심판석이 마련될 때까지 기다리라. 중요한 것은 당신의 섬김을 받는 자들의 불평이 아니라 주님의 판단이다.

 

 

3. 하나님이 옹호해 주시지 않을 때

 

살아남을까?

만일 당신이 근거 없이 비난을 당한다면 언젠가는 옹호 받을 것이다. 그 시기는 빠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옹호받지 못하고 지내는 날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마치 정글과 같다. 주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산 채로 먹이가 되어 평안도, 삶의 낙도, 내적인 의욕도 없이 뼈만 앙상하게 남을 것이다.

 

 

어려운 물음들

<1902년에 애틀랜틱 먼슬리의 시 담당 기자가 다음과 같은 메모와 함께 시 원고들을 돌려보냈다. “우리 잡지에는 당신의 시를 실을 자리가 없습니다.” 그 시인은 로버트 프로스트였다. 1905년에 베른 대학에서는 한 논문을 엉뚱하고 공상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그 논문을 쓴 사람은 알버트 아인슈타인이었다. 1894년에 한 영어 교사가 어느 십대 소년의 성적표에 심각한 성적 부진이라고 적었다. 그 학생은 원스턴 처칠이었다.> 거부당했다가 모두들 앞에서 옹호되었다. 멋지지 않은가? 실패자가 아님이 입증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 얘기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비난 자체를 각색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밝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 특히 주님께 고할 필요가 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우리는 그분께 아뢸 필요가 있다.

 

 

당신의 고통 이면에 계시는 주님

비난자가 당신의 어떤 약점을 물고 늘어지며 사람들에게 폭로하는가? 다른 사람들은 충격을 받을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러시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아시는 그가 당신을 구원하셨다. 토저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온전히 아신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사실이다. 그 어떤 고자쟁이가 우리를 밀고해도, 어떤 대적이 우리를 비난해도, 소문날까 두려운 그 어떤 집안 비밀이 폭로될지라도, 숨겨진 그 어떤 약점이 드러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알기 전에 우리를 철저히 알고 계셨으며, 또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다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일들을, 그리고 달라질 수 있었던 일들까지 완벽하게 아신다. 결코 놀라지 않으시며 배우실 필요가 없다. 진상을 파악하실 필요가 없다. 그거 거기 차에 앉아 계신 것은 당신의 움직임을 굳이 점검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아신다. 그분은 늘 그렇게 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자녀들 각자를 위한 목표를, 그분의 성품에 부합하는 목표를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 가능한 한 가장 뛰어난 방편들을 활용하신다. 이를 가리켜 지혜라 한다. J.I. 패커는 이렇게 설명한다. “지혜는 볼 수 있는 능력이며, 최선의 그리고 최고의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들과 아울러 그 목표를 선택하는 성향을 가리킨다.”

 

 

지혜로운 선택

하나님은 자애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불변하시고, 진실하시고, 선하시고, 신실하시고, 친절하시고,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해 계심과 아울러 모든 것에 대해 친밀하시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불가해하시고, 탁월하시고, 초월적이시고, 장엄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공정하시고, 의로우시고 유일하시다. 비록 불명예스럽게 비난당하더라도 당신은 결정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 <“숯불을 불어서 자기가 쓸 만한 기계를 제조하는 장인도 내가 창조하였고 파괴하며 진멸하는 자도 내가 창조하였은즉 무릇 너를 치려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 것이라 무릇 일어나 너를 대적하여 송사하는 혀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요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54:16,17).> 그리고 당신은 경배해야 한다.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34:5p)

 

 

4. 비난이 사실일 때

 

신실성 : 비난자는 신실한가?

아빠 북극곰과 아들 북극곰이 일몰의 마지막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아들 곰이 말했다. “아빠, 나는 100% 북극곰인가요?” 아빠 곰이 대답했다. “물론이지. 완전한 100% 북극곰이지.” 10분 후에 아들 곰이 아빠에게 다시 말했다. “아빠, 진실만을 말해 줘요. 난 감당할 수 있어요. 내가 100% 북극곰인가요? 갈색곰도 아니고, 흑곰도 아니고, 회색곰도 아니고요?” 아빠 곰이 대답했다. “아들아, 내가 100% 북극곰이고 네 엄마도 100% 북극곰이니 너 역시 100% 북극곰일 수밖에 없지 않겠니?” 몇 분 후에 아들 곰이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야단치셔도 어쩔 수 없어요.난 알아야겠어요. 내가 100% 북극곰 맞나요?” 아빠 곰은 의심하는 아들로 인해 기분이 언짢아져서 물었다. “100% 북극곰이라고 하는데도 왜 줄곧 의심하려 드니?” 그러자 아들 곰이 대답했다. “자꾸 추워져서요.” 당신은 냉담한 말을 듣고 무감각하게 얼어 가고 있을 수도 있다. 비난자의 신실성을 대체로 인정한 후에도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 비난자를 의심할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한다면, 그의 비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그의 영적 건강 상태가 깨끗할수록 그 비난도 더욱 믿을 만하다.

 

 

공감 :비난자는 당신을 염려해 주는가?

이로 인해 당신보다 내가 더 큰 상처를 입을 거예요.” “만일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면 내가 그 말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기 힘든 말이지만, 그걸 지적하는 게 내 임무라고 생각해요.” 어떤 비난자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면 주의하라! 당신은 정서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그는 당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므로 개인적으로 큰 고통을 당하더라도 당신이 그의 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기를 원한다. 실없는 소리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속임수이다. 하지만 진정한관신, 즉 공감을 가진 비난자의 말은 타당하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17:17).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27:6).

 

만일 의사가 당신의 감염된 맹장을 제거하여 여러 주 동안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를 원수로 여기겠는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는 당신의 건강을 위해 필요한 시술을 했을 뿐이다. 친구란 그런 존재이다. 만일 비난자가 참된 친구라면 당신은 자신을 복 있는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당신을 염려한다면 그의 관심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라 당신의 고통에 있다. 그는 줄곧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 당신을 향한 그의 감정은 그의 비난에 대한 당신의 감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참된 우정이다. 비난 이전의 상호 관계가 그 비난의 가치를 분석하는 데 중요하다. 결속이 강할수록 비난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즉흥적인 비난이 무조건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서로 잘 아는 사이인 경우에는 상대방의 개선에 보다 도움이 되는 비난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당신이 마취 없이 수술받은 것처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을 때에는 친구의 말을 더욱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에 대체로 친구의 말은 상처를 주지만, 그 상처를 적절히 받아들일 때 곧 치유될 것이다.

 

 

적격성 : 비난자는 제대로 알고 있는가?

어떤 영역의 비난이든 비난자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 비난이 무슨 지식을 바탕으로 삼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평가 내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음 물음은 가능한 한 객관적인 대답을 요구한다. ‘당신에게 심한 말을 하는 자들을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 이는 지식이 부족한 듯한 사람들의 말을 무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들도 가치 있는 말을 할 수 있다. 공식적인 교육을 덜 받은 자들을 무시하는 것은 오만일 뿐이다. 발람은 자신의 완악함을 나귀를 통해 배웠다(22:21-35).  성경은 무릇 슬기로운 지식을 행하여도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내느리라고 말한다(13:16). 이것은 심한 비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말씀이다.

 

 

정확성 : 정확한 비난인가?

이제 우리는 비난 자체를 분별해야 한다. <무슨 내용인가? 증거가 있는가? 그 내용이 사실인가?> 이 물음들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그러면 그것은 밤새도록 곰곰이 숙고해 볼 가치가 있다. 만일 비난자가 레이저 광선처럼 정확하게 지적한다면 지적당한 내용을 부인하지 말라. 당신은 자신을 치유하면 된다.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는가? 그렇다면 그 비난에 신경 쓰지 말라. 자신과 상관도 없는 문제로 기분이 상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주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 비난이 중요한 행동을 수반한다면 그 정확성을 분별하는 일이 더욱 절실하다.

 

 

 고통 : 비난이 심한 상처를 주는가?

경청하라. 판별하라. 그리고 변하라.

 

옥토 가도

한적한 2차선 도로인 옥토 가도를 달리는 동안 줄곧 그 냄새가 났다. 밤중에 차 유리도 내려진 상태인데도 정말 역겨운 냄새였다. 숲속에 스컹크가 사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 자그마한 녀석이 그토록 고약한 냄새를 풍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400m 정도 내겨가도 그 냄새는 여전했다. 800m, 1,200m, 그리고 1,600m 정도나 지났는데도 계속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우리 집 차고까지 따라 들어왔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차에 스컹크가 치였던 것이다. 그 악취는 내 차에서 났으나 나는 그것을 몰랐다. 당신에게서 악취가 나는데도 그것을 모를 수 있을까? 비난자가 말한 내용이 사실이고 또 그 냄새가 지독할 수 있다. 본 장에서도 그럴 가능성을 인정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실제 형편을 파악해 내려는 시도인 것이다. 비난을 받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면 타당한 비난을 수용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그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당신은 비난자를 판별했다.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가 분노의 농양이 터져서 결국 엉뚱한 사람들에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들을 포함하여)표출되기도 한다.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라. 당신이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도 방향 감각을 상실할 수도 있음을 명심하라. 당신의 계기판을 점검하라.

 

전도자는 무릇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마음을 두지 말라 염려컨대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들으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한 것을 네 마음이 아느니라고 전했다(7:21,22). 정말 지혜로운 조언이다. 당신에게 가해지는 비난들을 모조리 믿는다면, 당신은 돌아 버릴 것이다. 도저히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전도서 기자가 아무 말에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비나들도 있다. 당신이 들은 모든 말들을 잘 분별하여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파악하는 요령이 필요하다. 생선을 입에 넣고 나서 뼈를 뱉어 내는 법을 배우라.

 

 

5. 비난을 흘려버려야 할 때

 

성공의 기준을 알라

부당한 비난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과연 내 비난자가 충성을 성공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 보라. 만일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의 비난에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 무시하라. 흘려버리라. 비난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다. 바울이 그렇게 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전 4:3 ). 이는 경솔한 자세나 비난자의 인격을 무시하는 거만한 태도가 아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에 근거한 현실적인 평가이다. 고린도교인들이 올바른 평가 기준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평가는 신뢰성이 희박했다. 무가치한 평가를 놓고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비난적인 고린도교인들에게 계속해서 그는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라고 대답했다(고전 4:3 ).

 

 

진정한 비판자가 누구신지를 알라

오프라 윈프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과 함께 리무진을 타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당신은 리무진이 고장날 때 함께 버스를 탈 사람을 원한다.” 어쩌면 지금 당신은 버스를 타고 있을 수도 있다.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역 도중에 일이 순탄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비난이 몰려올 때 당신은 외로움을 느낀다. 몹시 외롭다. 정서적으로 자포자기하기 직전일지도 모른다. 고린도교인들로 인해 바울이 그런 상태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나는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4 ). 밴스 해브너가 두 신사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두 신사가 걸음을 멈추고 박제상의 진열창 속에 있는 새 한 마리를 바라보았다. “저건 불쌍한 박제품인 게 분명해.”라고 한 사람이 말했다. 바로 그때 그새가 횃대에서 날아올랐다. 흠잡히고 있는가? 비방을 당하는가? 조롱당하는가? 누군가가 당신을 박제한 새로 여기는가?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모욕을 당했다. 고린도교인들은 그를 성직자 기념 묘지에 안치될 시체로 간주했고, 바로 그때 그 횃대에서 날아올랐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만일 견디기 힘든 모욕을 당했다면 바울을 본받으라. <당신이 누군지를 아라. 바로 임무를 맡은 종이다. 성공의 기준을 알라. 바로 충성이다. 진정한 비판자가 누구신지를 알라. 바로 주님이시다.> 만일 당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기다리라. 당신의 흠을 파헤치려는 자들이 노려볼 때 날개를 퍼덕이라. 횃대를 떠나라.

 

 

6.비난을 반박해야 할 때

 우리도 그런 과오를 범한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런 비난을 당하여 상처를 입은 적도 있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고 핀잔을 받는다. 올바로 하려고 애를 쓰는데도 잘못했다는 질책을 받는다. 당신은 축복된 존재가 되려고 하는데 사람들은 당신을 불운을 가져오는 자로 여긴다. 부당하고 엉뚱한 비난이다. 당신은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앞장에서 보았듯이 근거 없는 비난을 당할 때는 그것을 무시하라. 부당하고 엉뚱한 비난일랑 허공에 날려 버리라. 해리 아이언사이드는 만일 당신에 관한 말이 사실이라면 당신의 방식을 수정하라. 만일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을 잊고 주님 섬기는 일을 계속하라.” 고 했다.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은 근사한 조언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비난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날려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전도서 기자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3:1)라고 상기시킨다. 이는 모든 일에 적합한 때가 있다는 A라이다. 당신은 아침에 하는 어떤 일들을 저녁에는 하지 않는다. 사무실에서 행한 일을 상점가에서는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름대로의 때가 있다.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있다. 반박, 방어 또는 자신이 행동에 대한 동기를 옹호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가만히 흘려듣고만 있을 수 없는 비난들이 있다.

 

 

비난자를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라.

내 아들 브라이언이 어릴 적에 나는 마룻바닥에서 아들과 함께 뒹굴며 씨름하곤 했으며, 매번 아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퍼렇게 멍들거나 골절상을 입은 적은 없었다. 쓸 수 있는 힘이라고 해서 다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나는 자제했다. 그것이 온유이다.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힘, 어떤 정보다 돈, 지위, 지식 또는 연줄이 있지만 억제된다. 당신은 비난자를 능히 파멸시킬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온유는 황색기를 흔들며 자신의 파괴적인 방식에 대해 경고한다. 온유는 다른 사람을 추락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복수심을 억제시킨다. 쓰디쓴 나라들의 자동 분출을 막아 주는 안전 잠금 장치이다. 온유로 말미암아 우리는 분노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비난자들에게 손상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한다.

 

마태는 그리스도를 묘사하면서 이사야 42:1-4을 인용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12:19,20). 이것이 관용이다. 자비로운 배려인 것이다.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말로 반박하고 싶을 때 관용은 그런 상처를 최대한 예방한다. 온유는 자제이다. 비난자에게 타격을 가하는 말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관용은 표출이다. 세심한 배려로 말하는 것이다. 전자는 부정적인 것을 다루며, 후자는 긍정적인 것을 다룬다. 이들 둘 다 꼭 해야 할 말을 못하도록 막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을 막는다.

 

 

7.느긋해져야 할 때

 

마음을 진정시키라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은 다음 문구를 명심했다. “엔진을 잃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많이 걸리고, 이성을 잃으면 돌아오지 못하는 여행이 된다.” 비난자 앞에 앉을 때에도 이성을 잃고 공포에 사로잡히기 쉽다. 당신이 비난자의 독설을 듣고 있는 동안 주님은 당신과 가장 친밀하게 함께 계신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13:5,6, 31:6, 118:7).

 

당신이 비난자 앞에서 겪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임재 가운데에서 겪는 것이다. 충격, 불신, 혼란, 당황, 마음의 상처, 배신감, 분노, 되받아 치고 싶은 심정 등 이 모든 것들을 그분의 임재 가운데에서 경험한다. 그리고 만일 비난당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한다면, 당신은 상대방에게 분노를 폭발시키거나 정신적으로 굴복하는 등의 그릇된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 점검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임재에 대한 자각은 당신을 느긋하게 해줄 것이다. 당신은 혼자 겪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어떤 일을 만나든 주의 임재와 은혜를 자각하면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이 계신 곳에 은혜가 있다. 또한 그분의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어떤 일도 처리할 수 있다.

 

 

주의 깊게 경청하라.

효과적인 청취는 비난자의 입장에 서서 그의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솔직히 노력할 때 시작된다. 단지 말하는 내용만 들어서는 안 된다. 말하는 방식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그 사람의 심정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라. 그러면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당신이 우연히 피뢰침 역할을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신이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문제일 뿐이다. 비난자의 말 속에 진실이 담겨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 그는 진실을 밝히 드러내기보다는 은근히 숨긴다. “당신은 이 일을 내게만 맡기는 군요.”라는 비난을 들었다고 하자. 당신은 그런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람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분명하다. 무엇인가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의 생각을 헤아려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효과적인 청취를 위해 필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생각을 전환하는 것이다. 비난자의 말이 옳을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무작정 무시하는 태도를 갖지 말라. 성의껏 귀 기울이라. 시선을 마주치라. 따뜻한 표정과 제스처를 보이라. 주목하라. 그의 말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말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인정하려고 노력하라. 설령 그 비난이 악의에 찬 것이라고 해도 비난자를 사랑하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기억하라. 신자로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경청 과정의 일부이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듣는 것이다.

 

 

방어적이지 않은 질문을 하라

핵심은 이렇다. 비난하는 자의 말에 귀 기울이라. 면전에서 반박하지 말라. 그를 무시하지 말라.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라. 방어적이지 않은 질문을 하라. 그러면 과도한 반응이 진정될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은 당신이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태도는 결국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으로 존중합니다. 비록 당신이 내게 고통을 가하고 있지만, 당신은 중요하며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비난은 불가피한 일이다

한 노신사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이륙 후에 그는 조종사에게 두 번 태워줘서 고맙소.”하고 말했다. “두 번이라고요?” 하고 조종사가 물었다. “한 번 뿐이잖아요.” “아니오.” 노신사가 대답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두 번인 셈이지요.” 만일 다른 사람의 말로 인해 심한 상처를 입었다면 한 번으로 족하다. 다음 여행은 다른 누군가의 몫일 수 있다. 또 다른 사람이 그 의자에 앉을 수 있다. 당신은 거기 앉지는 않지만 그런 독설을 피할 수는 없다. 당신이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한다면 그런 일을 다시 만날 것이다. 곧 그럴 가능성이 많다. 스스로를 준비하라. 자신의 전략을 알라. <1.누가 당신과 함께 계시는지 그리고 그분의 놀라우신 은혜가 무엇인지 기억하라. 2.당신의 몸을 돌보라. 3. 진정으로 경청하라. 4.질문을 던지라.> 당신이 반드시 대답해야 할 경우에는 시의적절한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대답이 비난자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천국에서는 의미심장하며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신은 능히 헤쳐 나갈 수 있다.

 

 

8.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어떻게 비판받을까?

비난자에게 심한 말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심한 말을 하는 것이다. 말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것은 당신의 등에 과녁을 그리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만일 비판자에게 정말 도움이 필요한 어떤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주께서 일러 주신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3-5) 먼저 당신 자신을 점검하라. 사열 시간이었다. 한 병사의 군복 단추가 열린 것을 연대장이 지적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연대장이 걸음을 멈추더니 젊은 병사의 눈을 째려보며 호통을 쳤다. “이봐, 주머니 단추를 채워!” “지금 말입니까?” “그 따위 대답이 어딨어? 물론, 지금이지!” 그 병사는 매우 난처해하며 연대장의 주머니 단추를 채웠다. 비판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비교적 사소한 문제에 몰두한다. 그것이 별 문제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기준에는 턱없이 사소하다. 주님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라고 지적하셨다. 비판자에게 주머니 단추가 열렸다고 말해 주기 전에 자신을 먼저 점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신을 먼저 고치라. 일단 혹평자가 어떤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발견하면 그는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는 무슨 일을 하고야 만다. 들보는 제거되어야 한다. 냉정하게 자신을 먼저 바로잡으라. 앵무새의 기침 소리에 짜증이 난 한 부인이 새를 수의사에게 데려갔다. 앵무새를 살펴본 수의사는 이 새에게는 아무 문제도 없어요. 얘는 단지 들은 대로 흉내 내고 있을 뿐이죠.”라고 말했다. 줄담배를 피우는 그 부인은 만성 기침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작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 이내 싹트기 시작했다. / 씨앗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 “이제 어떤 꽃을 피우지? / 백합은 아름답고 당당하지만 / 약간 냉담해. / 내 상각에 장미는 너무 화려하고 / 구식이야. / 제비꽃이 아즈 괜찮긴 하지만 / 내가 고르고 싶은 꽃은 아닌 것을. / 초롱꽃도 아니야. / 난 남색을 좋아하지 않거든.” / 모든 꽃들을 그런 식으로 비판한 / 이 건방진 씨앗은 / 어느 여름 날 아침에 / 갈대가 된 자신을 발견했다. > 당신은 그런 존재가 되고 싶은가? 목회 사역에서, 결혼 생활에서,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훗날 삶을 돌아보면서 어느 날 갈대가 된 당신을 발견하기를 원하는가? 비판적인 행동이나 말로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역 대상자들을 포함하여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인내하지 않는다면 당신도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9.감정 폭발이 불가피할 때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말해 주라.

한 남편과 아내가 결혼 50주년을 기념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친지들과 함께 성대한 축하 파티를 즐긴 후에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버터 바른 빵과 차 한 한씩을 하기로 했다. 주방에서 남편이 새 빵을 꺼내어 끄트머리 부분을 떼어서 아내에게 건넸다. 아내의 감정이 폭발했다. “50년 동안 새 빵을 먹을 때마다 당신은 끄트머리는 내게 먹였어! 몰상식해요! 야비해! 더 이상 그런 싫어요.” 남편이 깜짝 놀라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위인데.” 상대방에게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말해 주라. 당신이 행한 일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라.

 

 

진심 어린 칭찬을 하라

해리 트루먼은 말했다. “만일 누군가가 내게 벽돌을 던진다면 나는 그것을 받아서 도로 던질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내게 훈장을 수여할 때 나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비난자들을 누그러뜨리는 탁월한 방법은 그들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당신의 사역을 힘들게 해온 자들을 칭찬해 주려고 노력하라.

 

 

관계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하나님이 하시듯 하라. 당신과 비난자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라. 물론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신이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라. 만일 그래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 탓이 아니다. 이것은 미래의 결단이 아니다. 이것은 지금내려야 할 결단으로 당신과 당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자들 사이에 일어날 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그것은 바람직한 관계 회복 및 유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당신이 주도적으로 나서고 싶을 때까지 미룬다면, 당신의 목회는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 것이다. 뒷전에 앉아서 형편이 나아가지기를 기다릴만한 여유가 없다. 현실을 저절로 형편이 나아지지는 않을 것임을 경고한다. 무엇인가가 변해야 하며 그 무엇에는 당신도 포함된다.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다 활용하라. 가능한 모든 것에는 상세한 설명, 진심 어린 칭찬, 모든 사람들의 눈을 고려하는 것, 그리고 팀워크 등이 포함된다. 최선을 다하라. 하나님의 은혜로 당신의 사역 대상자들을 계속 섬기라.

 

 

10. 용서하고 싶지 않을 때

 

용서의 길

하나님이 당신에게 원하시는 삶이 있다. 그는 당신을 위한 미래를 마련하고 계신다. 당신이 여전히 부당한 비난을 당하든, 아니면 이제 그로 인한 결과와만 씨름하고 있든 그 문제는 마감되어야 한다. 주께서 당신을 위해 지니고 계신 모든 것을, 그리고 그분을 누리기 위해 그것은 마감되어야 한다. 용서는 받아들여지든 받아들여지지 않든 제시된다. 만일 비난자가 자신의 영적 범죄를, 자신의 말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멸하려 한 죄를 깨닫게 된다면, 당신은 내적으로 이미 실행한 것을 외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용서에 관해 말하기는 쉽다. 당신이 성처를 입지 않았을 때에는 용서에 관한 시를 쓰거나 용서의 핵심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비난의 말을 듣고 나서 뒤집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을 때 용서에 관해 설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용서의 길을 택해야 한다. 이 길에는 영혼을 위한 신선한 산공기가 있다. 경치가 너무나 아름답다. 이것은 집으로 연결된 가장 안전한 길이다. 그것은 파렴치한 비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것은 또 다른 턱뼈를 진흙탕으로 던져 버리게 한다.

 

 

비결 : 그 장면으로 돌아가라

사업이 새로 개시되고 화환들이 배달되었다. 한 화환에 고이 잠드소서.”라고 쓴 띠가 둘린 것을 본 사장의 얼굴이 납빛으로 변했다. 그래서 꽃장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따졌다. 그러자 꽃장수가 말했다. “사장님, 제가 실수해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오늘 어느 장례식장에는 새 장소에서의 개업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화환이 도착될 것을 좀 생각해 보세요.”

 

 

비결 : 비난자들을 마음속에 그리라

비난자가 당신 앞에 소파에 앉아 있거나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다고 마음속으로 그리라. 당신이 비난당했던 장소로 돌아갈 수 있든 없든 그를 당신 앞에 앉히고 용서하라.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23:34)라는 주님의 말씀도 비난자들을 보면서 하신 것이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게 하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용서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감옥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것이다.

 

 

비결 : 글로 적으라.

C. S. 루이스는 자신이 용서를 실행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 용서를 아름다운 개념으로 여긴다.”라고 말했다. 그것을 실행하라.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

진리는 당신에게가 아니라 주님께 의존하는 것이다. 당신이 찬성하든 찬성하지 않든 용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만일 당신이 현명하다면 그 필요성을 절감할 것이다. 영혼에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용서가 필요하다. 주님의 고통에 비하면 당신에게 가해진 것은 너무나 사소하다. 너무나 작은 고통이다. 비난자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냉담함을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분노의 턱뼈를 붙들고 늘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고난을 당하셨다. 그것을 포기하라. 그것을 내던지라. 당신에게 가해진 상처와 관련된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주께서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원한다. 그리고 당신이 위로부터 오는 지혜와 은혜를 활용하여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능히 해낼 수 있기를 원한다. 누가 알겠는가? 이것은 당신이 그토록 갈망해 온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여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