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비하와 그 목적(히 2:5-18)
2장 앞 단락에서는 구원의 복음의 확실성에 대해 설명하였다면 5절부터는 다시금 천사보다 우월하신 주님을 밝혀가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1장에서 주님에 대하여 하나님과 동등의 권능과 영광을 가지신 분임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비하의 신분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비천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신분을 갖게 되신 것은 그분이 본래 천사보다 낮은 위치의 신분이기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변증한다.
유대인들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일단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었기 때문에 본래 천사보다 못한 존재이거나, 천사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자기백성들의 구속을 위한 불가피한 것으로써 영원한 비하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저자가 이러한 목적을 위해 논증하고 있는 내용을 요약하면 크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그리스도는 장차 오는 세상의 통치자
저자는 5절에서 장차 오는 세상을 이야기하며 그 세상을 통치할 이는 천사들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장차오는 세상이란, 인류에 대한 종말과 백보좌 심판이 끝난 다음 도래하게 되는 새 하늘 새 땅으로 표현된 나라로서 성도들이 무궁토록 누리게 될 영원한 세상을 가리킨다. 바로 그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나라이지 천사들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논증을 빌려 유추해 보면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장차 성도들이 이르게 되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통치하는 나라일 것이라는 인식들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저자는 천사가 성도들을 섬겨야 하는 종으로서 창조 된 피조물이지 섬김의 대상이나 통치자로서의 권세를 가질 수 있는 그러한 존재가 못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논증은 육신을 입고 잠시 동안 비하하신 주님이시지만 주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의 세계를 통치하는 유일한 통치자로서 승귀하셨음을 나타내고자하는 의도도 담겨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것은 대속을 위해 잠시 취하신 비하의 신분일 뿐 주님은 장차 오는 세상, 즉 영원한 영광의 세계를 통치하실 높고 귀하신 분임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증거(6-8)
저자는 주님의 성육신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의를 진술하기 위하여 시편 8편 4-6절을 인용하고 있다. 시편 8편은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대하여 찬양한 다윗의 시이다. 그 가운데 여기서 인용한 4-6절은 아름다운 자연 만물을 창조하신 가운데 특별히 인간을 존귀히 여기사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인간들에게 위임해 주신 사실을 감격한 감사로 노래한 부분이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이 시를 공중 예배시나 특별한 절기 때에, 그리고 초대교회에서도 ‘예수님 승천기념일’에 낭송한 시로 유명하다. 저자는 6절에서 “사람이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데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한 시편 8편 4절을 인용하였다. 이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음에 대하여 찬양한 내용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의 ‘사람’과 ‘인자’란 표현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의 의도는 주님께서 우리 인간과 동일하다는 의미를 뜻하고자 함은 아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계시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주님과 함께하시며 주님을 높이 보셨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 있다. 비록 육신을 입고 우리 인간과 동등의 신분으로서 시공 세상에 거하셨지만 그러나 주님은 우리와는 다르다는 것을 만물 중에 인간을 으뜸으로 창조하신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
7절 역시 시편 8편 5절을 인용한 것이다. 시편에서는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여기에다 ‘잠깐 동안’이란 말을 삽입하여 보도하였다. 본래 유대인들의 인간관은 천사가 사람보다 높은 존재라는 전통적 인식이 있었다. 다윗도 이러한 인식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존귀한 자로 창조하시되 천사보다는 조금 못한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이 내용을 그리스도께 적용시켜 주님을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한 신분을 취하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잠깐 동안이란 말은 우리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간이다. 우리가 육신을 벗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되는 순간 우리의 신분은 천사와 비교할 수 없는 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셨다는 내용역시 인간을 특별한 영광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께서 대속 사역을 완성하신 후 부활 승천하시어 본래의 하나님의 신분을 회복하신 것을 나타내고자 적용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본장 8절과 9절도 시편 8편 6절을 인용한 것이다. 시편에서는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으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도록 권한을 주신 것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이를 주님께 적용시켜 모든 만사 만물이 주님의 통치아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사 만물이 주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은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어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함이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인간이 천사보다 못한 육신을 입은 존재로 창조함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육신을 입고 있을 동안의 잠시 뿐이라는 사실을 그리스도께 적용시켜 주님의 비하가 근본적인 것도 아니며 아울러 영원하지도 않다는 사실과 함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음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10-18)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근본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진술한 저자는 그 성육신이 가져다준 하나님의 은혜, 곧 성육신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는데 그 목적에는 3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1) 자기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9, 17)
이는 9절과 17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내용이다. 9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라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좀 더 직설적으로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시어 택한 백성들과 형제 같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고 진술하였다.
주님에 대하여 ‘대제사장’이란 호칭을 사용한 것은 신약 성경 가운데서 오직 본서뿐이다. 본서의 저자가 이 호칭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킨 것은 구약시대 대제사장의 역할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시대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보자로서 그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렇듯이 주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친히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으셨고, 그로 인하여 주님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 사이에 영원한 중보자란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것은 자기 백성들에게 저주를 가져다 준 죄의 형벌을 친히 담당하시려 죽으시기 위함이고, 그것은 곧 그들의 죄를 사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란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2) 구원을 온전케 하여 자기 백성들로 영광에 들어가게 하기 위하여(10-14)
이는 10절부터 14절이 담고 있는 의미이다. 저자는 10절 초두에서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란 표현을 썼다. 이는 또 다른 하나님의 이름으로서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표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은 유대교도들도 사용한 호칭이고, 초기 기독교 성도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이렇게 호칭한 내용들이 간간이 나타난다(롬 11:36; 골 1:16).
그런데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하나님을 가리켜 이처럼 호칭함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나 죽으심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임을 강조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리 섭리하신 이유에 대해서 이어진 10절에서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진술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영광에 들어가게 하려 하심이란 뜻이다. 곧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뜻하며, 그 온전한 순종은 대표 언약의 근거에 따라 모든 그의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가되어 그들로 하여금 값없이 영광의 구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구속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9절과 17절에서 언급한 문제가 속죄를 말한 것이라면, 10, 11절에서는 칭의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어진 11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하나에서 났음을 언급하며, 주님께서 그의 성도들을 형제라 부르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은 마태복음 12장 50절에서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1장 6절에서 주님을 맏아들로 표현했고, 여기서는 성도들을 주님의 형제들이라 호칭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주님과 그토록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장차 하나님의 영광스런 기업을 이어받을 아들의 신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표현이다. 특히 1장에서 주님을 하나님으로 소개하여 놓고 여기서 다시 주님을 성도들과 형제 관계로 소개하고 있는 것은 실제 형제라는 개념에서라기보다는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받는 영광에 동참케 되었다는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12절과 13절은 시편과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사실, 성도들과의 형제가 되신 사실을 밝힌 내용이다. 12절은 시편 22편 22절을 인용한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다윗이 쓴 시로써 그가 사울 왕으로부터 갖은 핍박과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결국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게 된 사실을 찬양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를 저자가 그리스도께 적용시켜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을 입고 고난을 당하셨지만 결국은 영광스런 승리를 하셨음을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13절은 이사야 8장 17-18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 내용은 이사야가 앗수르의 침략에 직면해서 백성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고취시키기 위해 했던 말이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사 8:17, 18)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 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즉 도저히 이스라엘의 군사력으로는 앗수르의 침략에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나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그 곤욕에서 구원함을 받게 될 것이란 사실을 고백한 내용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이를 그리스도께 적용시킨 것이다. 즉 주님께서도 육신을 입고 인간들이 당하는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성도들과 형제와 같이 되셨음을 변증코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4절에서 자녀들은 한 혈육에 속해있는 것이 아니냐고 언급하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으신 것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고자 하심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님께서 성육신하신 것은 성도들에게 하늘에 신령한 복, 곧 대속을 통하여 그들을 죄와 형벌에서 구해주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온전을 이루어 우리로 하여금 칭의를 얻게 하여 영광스런 구원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었다는 사실이다.
3)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마귀의 세력과 사망의 공포에서 해방 시켜주기 위하여
이는 14절과 15절에서 나타내고 있는 의미이다. 14절에서는 주님께서 육신을 입어 우리와 형제같이 되심은 사망의 세력을 입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고자 하심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란 두 가지 의미의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마귀로 인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기에 이런 표현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택한 백성들을 제외한 모든 자들에게 미치는 마귀의 권세를 의미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에베소서 2장 2절에서 마귀에 대하여 공중권세를 잡은 자라 표현한 것에서 보면 후자의 의미가 좀 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 이 세상에서의 사단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서만 허용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나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교회가 세워지고 그런 교회가 세상 전체 교회를 좌지우지 하는 것도 모두 사단 마귀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모든 것들이 결국 이르게 되는 사망 역시 그것들로 말미암은 결과임은 분명하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이에 대하여 15절에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인간은 그 죽음이란 것에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는 표현이다. 실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사망의 세력과 공포에서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성육신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그의 백성들은 죽음을 그렇게 부정적인 측면과 공포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죽음은 고난의 세월을 끝내고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는 문으로써 새롭게 인식하는 인식의 변화가 있게 되어있다. 그러기에 성도는 죽음을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로 노래하며 죽음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을 입게 된 성도들은 그가 두려워하던 두려워하지 않던 상관없이 사망의 세력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입고 영광스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어 있다. 때문에 바울은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고 고백한 바 있다.
바로 이를 위해 주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모든 인류를 위함이 아니라 오직 택한 백성들만을 위하신 역사였음을 천명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16절에서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진 17절과 18절에서는 결론적으로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인간이 되심이 꼭 필요하였다는 뜻에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라고 하였고, 그러한 어려움을 당하였기에 충분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피력함으로서 2장의 진술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2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 정리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천사보다 열등하다는 유대인들의 그릇된 인식에 대항하여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해 그리하셔야만 하는 필연적인 역사이며, 그리고 그것은 근원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이란 사실을 밝혀 주님의 높으심과 그로 말미암은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2장의 진술에서 다음과 같은 구속사적 교훈을 깨닫게 된다.
첫째, 주님의 대속의 역사는 오직 자기 백성만을 위한 역사였다는 사실
그것은 16절 말미에서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라고 한 표현이 담고 있는 의미이다. 여기서 ‘자손’으로 번역된 ‘스페르마토스’(σπέρματος)의 원형 ‘스페르마’(σπέρμα)는 본래 ‘씨’라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자손’이란 말로 번역되었다. 이 씨와 관련된 의미는 맨 먼저 창세기 21장 12절에서 나온다. 거기서는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통해서 낳은 이스마엘을 내어 쫓을 것을 청원하자 아브라함이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다.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을 것을 명하시며 네 씨는 오직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을 밝혀주신 내용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인 창세기 22장 17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씨가 바닷가의 모래와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여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다. 이 씨와 관련하여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해석한 바 있다.
(갈 4:28-31)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고 신약시대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3장 7-9절에서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갈 3:7-9)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이는 영적 이스라엘, 즉 창세전 선택된 하나님 백성들을 가리킨다. 본문에서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바로 이를 가리킨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말 앞에 ‘오직’이란 접속사를 첨부하였다. 이는 먼저 천사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란 의미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그러나 좀 더 확대 해석하면 사단이나 그로 말미암은 자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다.
구약시대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가리키고, 신약시대는 갈라디아서 3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오직 믿음의 사람들만을 제한한 표현이다. 따라서 주님의 대속의 역사는 천사를 위함도 아니고, 아울러 온 인류를 위함도 아닌 것이다. 창세전 선택하신 오직 그들만을 위한 역사인 것이다.
둘째, 장차오는 세상에서 성도는 하나님 다음의 영광의 위치란 사실
이는 9절의 말씀에서 유추되는 진리이다. 9절 서두에서 저자는 “오직 우리가 천사들 보다 잠깐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란 표현을 썼다. 물론 이는 그리스도의 신분을 소개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의 우월성을 찬양한 시편 8편 6절을 인용한 것이란 측면에서 보면 히브리서 저자는 인간 역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거하는 잠깐 동안만 천사보다 못한 위치임을 전제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그렇다는 것은 1장 14절에서 천사들에 대하여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라고 진술했던 내용에서 볼 때도 그러하다. 천사들은 부리는 영이며, 구원 얻을 후사들은 그리스도와 형제 관계로 언급할 만큼 천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였듯이 성도들 역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거하는 잠깐 동안만 천사보다 못한 위치에 있을 뿐인 것이다. 아울러 장차오는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위치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서 하나님 다음의 위치임이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계시록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성도들을 상징한 장로들의 24보좌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그야말로 최상의 신분이며 최상의 위치에 성도들이 서게 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란 이름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온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곧 성도란 이름이다. 그리고 늘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 말고는 성도들이 자리하는 곳이 천사보다 높은 최상의 신분, 최상의 위치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오는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바 있다.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우리가 세세토록 왕의 신분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야말로 성도란 이름의 가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심히 높고 존귀한 이름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히브리서 연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히 2:5-18 (0) | 2020.04.29 |
---|---|
히브리서 3장 주석 (0) | 2020.04.23 |
히브리서 1,2장에 대한 주해와 적용 / 변종길 (0) | 2020.04.15 |
새 언약의 우월성 9 장 (0) | 2020.04.08 |
히브리서 10장 -제사의 영원성 (0) | 2020.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