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 히 2:5-18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영광(5-9), 인간을 위한 그분의 사역(10-18)을 들어서 천사보다 우월하신 분임을 논증하고 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낮아지셔서 인간으로 오셨고, 또한 죄인을 구원할 능력과 사랑을 구비한 유일자로써 영광을 받는 존재가 되어야 했다. 여기서 예수님의 비하(卑下)를 통해서 대속을 이루었으며, 승귀(勝歸)를 통해서 그 분은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1) 낮아짐과 영광 5-9
2) 인간을 위한 사역 10-18
v.5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 “장차 오는 세상 th;n oijkoumevnhn th;n mevllousan 텐 오이쿠메넨 텐 멜루산, the world to come”은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셔서 왕으로 등극하시고 온 우주에 대한 구원을 행사하시는 새창조된 세상을 가리킨다. 천사들은 이러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이 없으며, 이러한 세상도 천사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해 전전하신 율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속사역을 통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v.6,7,8 본 구절들은 시 8:4-6을 인용한 것이다.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 본문 ‘one testified in a certain place, saying:’은 유대인들의 문어체 표현 방식으로서 저자와 서신의 수신자들이 본절에서 인용된 시편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 '사람 man'과 '인자 the son of man'는 히브리 시(時)의 병행 법칙을 따른 것으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인자 곧 '사람의 아들'에서 '...의 아들'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어떤 것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란 '사람됨의 속성을 지닌 자' 즉 '사람'이란 의미이다. 본절에서 사용된 "인자 uiJo;" ajnqrwvpou 휘오스 안드로푸, the son of man"는 본래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인자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인자'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켜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인자와 동일시하고 있다. 한편 "생각하시며 mimnhv/skh/ 밈네스케, thou art mindful"는 도움을 베풀기 위해 '기억하신다'라는 의미이며 "권고하시나이까 ejpiskevpth/ 에피스케프테, thou visitest"는 '조사하다' 혹은 '방문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돕기 위해 기억하시며 돌보기 위해 찾아오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저를 잠깐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 "천사 ajggevlou", the angels"에 해당하는 맛소라 본문은 '엘로힘'으로서 RSV는 이것을 '하나님'(God)으로 번역하고 있으며, NIV는 '천상의 존재들'(heavenly beings)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70인역에서는 명확하게 "천사들 par j ajggevlou" 파르 앙겔루스, than the angels"로 번역하고 있으며 탈굼역(Targum)도 역시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저자는 70인역을 따르고 있다. 한편 '못하게 하시며 a little lower'는 맛소라 본문을 따를 경우 하나님보다 잠시 못하게 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저자가 1장에서 그리스도와 천사를 비교한 것으로 볼 때 천사보다 못한 상태 즉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음을 시사하는 것이다(빌 2:7).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 “관 씌우시며 ejstefavnwsa" 에스테파노사스, thou crownedst”는 '왕관을 씌우다'라는 의미로 왕위에 오르심을 시사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정복하신 승리자로서 영광과 존귀로 하나님의 우편 즉 왕위에 오르셨으며(1:3: 엡 4:8),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주권적인 권한을 소유하셨음을 시사한다.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 본문은 1:13의 인용문인 시 110:1과 연결된다. 1:13에서는 원수가 그리스도 앞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나나 본절에서는 '모든 만물 all things'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든 만물'은 맛소라 본문에서는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으로 되어 있어 만물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광과 존귀로 왕위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시므로 모든 만물 즉 온 우주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셨으며, 자신의 완전한 주권을 통해 온 우주를 지배하시고 다스리신다. 한편 여기서 '저에게 '가 지칭하는 대상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맛소라 본문을 근거로 그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저에게 aujtw'/ 아우토, him"가 대표적 단수로서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를 사람으로 이해한다면 바로 뒤에 이어지는 9절의 내용과 연결될 수 없으며, 저자가 시편을 인용하면서 '인자'나 '사람'을 순수하게 '사람'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자되신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6절).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 본절은 시 8편에는 없는 구절이다. 본절의 '저에게' 역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아직 ou[pw 우포, not yet"은 '일시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미래에 성취되어야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그의 모든 주권을 회복하여 만물이 저에게 복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그의 왕국이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이 이 때의 지배자처럼 행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마 4:8,9; 엡 2:2)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즉 그분의 왕국이 온전히 실현되는 날 보게 될 것이다.
v.9 천사들 보다 잠깐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 본 구절은 7절의 반복이다. 그리스도께서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신 것은 오직 잠깐 동안으로 이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본절에서는 "잠깐 동안 bracuv ti 브라퀴 티, little"을 7절과 다른 위치에 삽입함으로 이 말을 7절보다 더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7절 hjlavttwsa" aujto;n bracuv ti par j ajggevlou"
엘라트도사스 아우톤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You have made him a little lower than the angels
9절 bracuv ti par j ajggevlou" hjlattwmevnon
브라퀴 티 파르 앙겔루스 엘라트토메논,
was made a little lower than the angels
한편 "인하여 dia; 디아, for"는 예수께서 '관'을 쓰셔서 왕이 되시는 것이 '죽음의 고난'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빌2:8,9). 더욱이 저자는 여기서 특별히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그의 '인간되심'과 '죽으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 '이를 행하심'이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혹자는 예수의 죽으심과 영광의 관을 쓰심 모두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죽음의 고난'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uJpe;r panto;" 휘페르 판토스, for every man"에서 '판토스'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판토스'는 중심으로서 '온 우주'를 가리킨다. (2) '판토스'는 남성으로서 '모든 사람 every man'을 가리킨다.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저자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기 때문이다(16절). 한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cavriti qeou' 카리티 데우, for the grace of God"는 몇몇 사본에 '코리스 데우'(하나님을 떠나서)로 기록되어 있다(Minuscule 1739, Vulgate Codex, Peshitta Codices). 그래서 대부분의 교부들이 본문을 '코리스 데우'로 보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을 뜻하며(마 27:46; 막 15:34)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때에는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로서 그의 신성이 상실되었던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본문은 '카리티 데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대부분의 사본들이 이것을 지지하고 있으며 교부들의 견해도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속 사역의 성취는 그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됨과 영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10절; 12:15).
2) 인간을 위한 사역 10-18
v.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 "만물이 인하고 di j o}n ta; pavnta 디 혼 타 판타, for whom are all things"는 '만물'의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을 의미하며 "만물이 말미암은 di j ou| ta; pavnta 디 후 타 판타, by whom are all things"는 '만물'이 존재하도록 창조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예수의 고난을 통한 구속 사역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 본문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 목적을 나타낸다. "많은 아들 폴로스 휘우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구속받을 자가 극소수가 아님을 의미하며 나아가 '아들되었음'을 시사한다. 한편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킨다.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 본절의 “주 ajrchgo;n 아르케곤, captain”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주'(퀴리오스) 즉 만물의 통치자이며 주인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용어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아르케곤'은 문자적으로 '맨 먼저 시작하는 자', '개척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구원의 주'란 죽음을 통해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구원의 새로운 길을 이루사 구원받을 모든 후사의 맏아들 되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또한 “온전케 하심 teleiw'sai 털레이오사이, perfect”은 본래 모세 오경의 제의 본문에서 제사장이 자신의 직무를 거룩하게 하는 행위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출 29:9,33; 레 8:33; 16:32; 21:10; 민 3:3). 이런 제의적(祭儀的) 배경을 가진 '텔레이오사이'는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시고 승귀(勝歸)되심을 시사한다. 이러한 예수의 종말론적인 승귀되심은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똑같은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인간을 구원시키기에 완전한 조건을 구비하셨다는 의미이다.
v.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 “거룩하게 하시는 자 oJ aJgiavzwn 호 하기아존, He who sanctifies”는 모세 오경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출 31:13; 레 20:8; 21:15; 22:9,16,32). 그러나 본절에서는 예수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로 그리스도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거룩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온전케 하신다(10:14; 13:12). 또한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 they that are sanctified'은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비교와도 같다.
다 하나에서 난지라 - 비록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을지라도 양자는 모두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연합되어 있다. "다 pavnte" 판테스, all"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을 모두 내포한다. 한편 "하나 eJno;" 헤노스, one"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헤노스'를 중성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2) 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해석하여 그것이 아담이나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3)혹자는 '헤노스'를 남성으로 보면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아들인 그리스도와 아들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들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인간을 자녀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에 뿌리를 둔 영적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 '형제 brethren'는 영적인 의미의 형제로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를 의미한다(마 12:49,50; 막 3:33-35; 눅 8:21; 롬 8:29).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형제 관계를 이루며, 가족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1:6). 본절의 이러한 확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용기를 준다(11:16).
v.12,13 본문에서 저자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영적인 형제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 본절은 초대 교회가 메시야 시편으로 해석한 시 22:22의 인용이다(마 27:26; 막 15:34; 요 19:34). 본절의 내용 중에서 1인칭 대명사는 인용문인 시 22편이 메시야 시편이므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주의 이름 Your name' 곧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영적인 형제들에게 선포하셨다. '이름'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속성과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본질의 계시인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선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포하셨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본문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선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있다. 본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의 증거 본문이다.
한편 "교회 ejkklhsiva" 에클레시아스, of the church"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나(행7:38; 19:32,39,41)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를 나타내는 특별한 용어가 되었다. '에클레시아스'는 본절에서 '형제들'과 동일한 의미로,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함을 시사한다.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 본문은 사 8:17의 인용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로 사 12:2이나 삼하 22:3을 들 수 있다. 구약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이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들 즉 그리스도인들과 형제로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심을 시사한다.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 본절은 사 8:18의 인용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가 당시에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남아있던 자들인 그의 아들 스알야숩과 마헬살락하스바스와 그의 제자들과 관해 했던 언급으로 저자는 이사야를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고 그의 두 아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을 자들의 모형으로 해석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간의 친밀한 관계와 결속(結束)을 강조한다.
v.14,15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 '혈육 flesh and blood'은 인간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이 '혈육'에 속한 '자녀들 children'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1) 혹자는 '자녀'가 '전체 인류'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혹자는 '자녀'가 '구원받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하다. 한편 본절의 자녀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였으매 kekoinwvnhken 케코이노네켄, partakers"는 완료 능동태로 인간의 본래적인 특질을 나타낸다. 반면에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함께 속하심 metevscen 메테스켄, took part of"은 부정 과거 능동태로 그리스도께서 어느 정해진 시기에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음을 시사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설명한다.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 마귀가 사망을 다스리는 권세를 본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권세는 인류를 꼬여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해 반항하게 함으로써 얻게 된것이었다(창 2:17; 3:19; 롬 5:12). 한편 "없이 하시며 katarghvsh/ 카타르게세, he might destroy"는 '무효화하다'라는 의미로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가 끼치는 영향력을 제해버리셨음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마귀의 권세를 무효화시키신 방법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through death' 즉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인간과 같이 반역(反逆)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대속의 죽음이었다.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 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을 사단의 노예 상태에 있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무기력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을 사단의 권세와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하셨다. 한편 "매여 e[nocoi 에노코이, subject"는 ‘붙잡혀 있는’이라는 의미로 노예 상태를 암시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생동감(生動感)있게 묘사한 표현이다.
v.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주려 하심이라 - “붙들어 주려 하심 ejpilambavnetai 에필람바네타이, he took on him”는 '...을 붙잡다' 또는 '...성질을 취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혹자는 후자의 뜻을 받아들여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특성을 취하여 천사로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의 특성을 취하여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어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NIV). 한편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견해도 두 가지이다. (1) 혹자는 아브라함의 후손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한다(RSV, NIV). (2) 혹자는 '아브라함의 씨'로 오신 그리스도라고 주장한다(KJV). 두 가지 해석 중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첫 번째 견해가 더 타당하다(갈3:29).
v.17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마땅하도다 w[feilen 오페일렌, it behoved him”는 '...할 의무가 있다' 혹은 '빚지다'라는 의미로 책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형제들과 같이 되심' 즉 성육신 하심은 반드시 해야 할 일임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업을 스스로 떠맡으셨으므로(요 3:16; 10:17) 그의 성육신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 본절에 나타난 예수의 칭호 “대제사장 ajrciereu;" 아르키에류스, high priest”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나타나는 칭호로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 속에 구약 시대의 속죄 행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언약 백성 사이의 중보적 역할을 수행하여 대속을 위한 제사 행위를 주관하며(민 18:19; 렘 33:20-26),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성결(聖潔)을 보존시키는 일을 하였다(출 28:38; 민 18:1). 한편 '자비하고 충성된'에서 '자비'가 먼저 나온 것은 강조의 의미로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 사역을 이루셨음을 나타내며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충성을 시사한다.
v.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 예수께서는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과 유혹을 맛보셨으며(마 4:1-11; 눅 4:1-13) 그분의 시험과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절정을 이루었다(4:15; 5:2,7-10).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시험은 앞절에서 언급한 하나님에 대한 '충성된 대제사장'임을 입증하는 증거이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고통받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앞절에서 제시된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심을 입증하는 증거이다.<쉐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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