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 사본과 정경
집필시기 순으로, 전수되어 내려오는 신구약성경 사본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먼저 서술한 다음, 신구약 성서의 정경과 외경의 형성과정과 그 종류에 대하여 기술합니다.
쿰란문헌(사해사본,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s. Manuscript found at Qumran by The Dead Sea
1947년 쿰란의 한 동굴(Qumran Cave 1)에서 산양을 쫓고 있던 베두인족(유목민) 양치기 소년에 의해 히브리어나 아람어 등으로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된 850여 개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는데 이를 쿰란문헌(사해문서, 사해 두루마리, Dead Sea Scroll)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문서로는 에스델서를 제외한 구약성경의 모든 책과 일부 주석서, 외경, 공동체 조직과 생활 등과 관련된 여러 문서들이 있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히브리어 텍스트는 거의 전부가 마소라본으로 오래된 것은 서기 9~11세기에 이르는데(유대교 랍비인 벤 아셰르 학파와 관련한 A사본, L사본 등이 있음. 후술), 사해사본은 기원전 3~2세기로 연대가 추정되는 것으로 현존하는 사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들이다. (참고로 이 문서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BC 150년경으로 연대가 추정되며 신명기 7장 11절 이하의 십계명이 실려 있는 나쉬Nash 파피루스가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텍스트였음). 쿰란 사본들은 정경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들을 반영하고 있어 성경 본문의 형성과 전승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데 70인역, 사마리아 오경, 마소라본 등과 유사하거나 쿰란공동체 고유 방식으로 필사한 것도 있어 사본군 비교연구에 도움이 된다. 한편 쿰란의 두루마리들은 유대교 랍비들에 의한 히브리어 마소라본이 성서 본문을 충실하게 전수하였음을 입증하여 주는데, 이사야서 등은 오늘날 스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서의 본문 비판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 기타 쿰란문헌에 대해선 http://blog.daum.net/_blog/BlogView.do?blogid=0IDRC&articleno=569634&categoryId=102092 참고
Manuscript found at Qumran by The Dead Sea
70인역(略語
LXX)
Septuaginta, Greek version of the Old Testament
70인역은 유다교 랍비들에 의해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약 100여년에 걸쳐 팔레스티나 外域(디아스포라 지역, diaspora '흩어진')에 살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인 공동체를 위하여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긴 최초의 번역본이다.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살았던 히브리인 아리스테아스 Pseudo-Aristea의 편지에 적힌 전승에 의하면, 이 번역은 BC 3세기 중엽에 시작되어 BC 2세기 말엽에 완료되었으며 유다교 열두 지파에서 각각 6명씩 차출하여 72명(이후 70명)의 유다교 율법학자들이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이라고 부른다. 70인역 번역에 사용한 히브리어 사본은 쿰란 사본이나 마소라본과는 다르며 오늘날 그 사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서기 245년경 그때까지 전해오던 사본들을 오리게네스가 수집하여 집대성한 것이 오늘날 전해온다. (오리게네스는 당시 히브리어 본문, 그리스어로 된 히브리어 본문, 다른 그리스어 번역본 4개, 아퀼라본 심마쿠스본 70인역 테오도시온본 등을 종합하여 6단으로 이루어진 엄청난 분량의 육역대역본을 완성했는데 이중 70인역 이외의 것들은 638년 마호메트 교도들의 카이사리아 침공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0인역은 기원전 오랜 세월동안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다교 히브리인 공동체의 공식 성경이었으며(P.지로니, 구약성서 ABC, 바오로딸, P.59), 이미 오래전부터 회당을 선교하는 책이었고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매우 깊은 종교적 진리를 담고 있는 책으로 간주되었다(에른스트 다스만, 교회사 1, 분도출판사, P.102). 70인역엔 약 350여개의 인용구가 신약성경에 인용되어 있으며(상게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이 70인역을 공식 성경으로 사용하였다(H.R.드롭너, 교부학, 분도출판사, P.82). 70인역에는 서기 70년 제1차 유다 독립전쟁에서 예루살렘 함락 후 얌니아(야브네)로 옮겨간 유대교에서 서기 100년경 처음으로 경전목록을 정하며 '계시의 언어'인 히브리어 사본이 없다는 이유로 정경에서 제외한 7권의 책이 더 실려 있다(종류는 9권이지만 다니엘서와 에스델서 추가 부분은 별책으로 보지 않는다). 한편 유다교와 유대교의 용어 사용과 관련하여, 기원전 '유다교'는 민족국가로서 사두가이, 율사와 바리사이, 에세네파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었으나 제1차 독립전쟁에서 패하고 얌니아(70-135년, 135년 이후는 갈릴래아)로 옮겨 간 이후엔 사두가이의 세력은 식민지의 필연적 결과로서 약화되고 에세네파는 거주지를 잃고 사라져 버려 결국 율사와 바리사이로 구성된 랍비가 중심이 되어 오늘날까지 줄곧 영향을 미치는 랍비 중심의 '유대교'로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하 글에서 유다교와 유대교는 이러한 인식에서 교회사 학자인 에른스트 다스만의 분류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함. 이하 사진 아래는 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저) 등에서 70인역에 대해 발췌한 글이다.
70인역 텍스트
* 칠십인역(Septuaginta, 略語 LXX). 셉튜아진타Septuaginta란 단어는 70이란 숫자를 의미하는 말이지만 전통적으로는 현존하는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번역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히브리어 성서가 그리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세기 중엽이다. 처음에는 모세오경만 번역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푸스(Ptolemaios II Philadelpus, 기원전 285∼247)의 통치기간 중 그리스어에 정통한 72인의 유태인 학자들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었다고 한다. 모세오경 이외의 부분은 그 뒤 100여년간에 걸쳐 이뤄졌다. 이러한 번역의 필요성은 당시 유태인들 사이에는 히브리어보다도 그리스어가 더 익숙한 구어口語였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BC 6세기 바빌론 유배 이후 히브리어는 이미 구어로서의 자리를 상실하여 BC 20세기부터 사용되어온 아람어가 일상어로서의 구어가 되었고, BC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팔레스티나 점령 이후엔 그리스어가 공용어로서 구어가 됨) 실제로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는 70인역을 그들의 성서로 채택할 정도였다. 이외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해 번역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비교적 신빙성이 없다. 70인역에는 히브리어 구약의 정경의 번역 이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에스델서, 지혜서, 집회서, 유딧서, 토비드서, 바룩서, 예레미야 서신, 마케베오서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정경에서도 전통적인 마소라 본문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많은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70인역의 원문이 마소라 본문과는 다른 계보의 자료를 이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70인역은 마소라 본문비평에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70인역은 번역문서이기 때문에 원문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알렉산드리아 유태인의 신학적 윤리적 입장을 이해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더욱 중요한 70인역의 가치는 (쿰란사본이나 아람어 역본인 타르굼과 마찬가지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사이의 공백을 메워주는 교량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코이네(Koine)로 표현된 신약의 종교적 어휘는 헬레니즘 세계로부터 유래된 말이 아니라 70인역의 헬라어를 매개로하여 구약의 히브리 세계로부터 유래된 말이다. 현존하는 70인역의 여러 사본(寫本)들은 기원전 3세기경 복잡하게 전해져 내려오던 사본들을 오리게네스가 집대성하여 비판적으로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70인역을 원상태대로 회복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70인역의 자료적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해문서라 불리는 쿰란 동굴들의 두루마리에서 발견되는 여러 가지 자료들도 70인역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70인역은 종교학적 가치 외에도 문화사적 언어학적 자료로서도 크게 평가된다. (출처: 가톨릭대사전, 한국교회사연구소)
* 추가 발췌글. 예수님 역시 이 70인역 성서를 인용하셨고(→이에 대해선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0303&eid=4B+Z4KS1LFb1L43pG4neS56HHG4onO1s 참고하라) 사도들의 복음서나 서간도 이 70인역 성서를 기준으로 썼다(특히 바오로 사도는 구약본문을 전부 70인역에서 인용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70인역 성서는 당연히 성서인 것이다. 70인역 성서엔 당시 유대교 히브리어 성서에는 없는 7가지 성서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이 공동번역에는 제2경전이라는 이름으로 들어가 있는 책들이다(→번역시 제2경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정경이면 정경이고 아니면 아닐 것이므로 제2경전이란 용어는 사실상 부적절하다). 정경이란 성경 자체를 말한다. 이 성서에 들어가지 않은 성경 비슷한 것을 외경이라 하지만 서기 70년 이후 그리스도를 죽이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율사와 바리사이가 주축이 된 유대교는 당시 계시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된 사본이 없고 그리스 사본에만 있는 7가지 성서를 외경이라 하였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70인역은 성서이지 성서와 비성서가 모아진 책이 아니다.
히브리어 사본이든 그리스어 사본이든 주님께서 직접 사용하신 것(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당연히 성서, 즉 정경인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글자로 기록한 것을 성서라 하는데 하느님이신 우리 구세주께서 사용하시고 말씀하신 70인역 성서를 성서가 아니라 주장함은 구세주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니라는 주장과도 같다. 그런데 예루살렘 대성전이 파괴된 후 이를 재건하기 위하여 얌니아에 모인 유대교의 종교회의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이 바로 그리스도교(기독교)의 단죄였으며 그리스도교에 흡수된 유대인들을 민족 배반자라고 낙인을 찍었다. 더욱이 안식일마다 열리는 유대교의 전례(예배)에서 하루 3번씩 고백하는 18개 축복문 중 13번째에는 "야훼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 도당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라고 하는 저주가 포함되어 있었다(→오랫동안 원문으로 간주되어 온 카이로의 게니자에서 발견된 텍스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배교자들에게는 희망이 없으며 불손한 제국은 오늘날 급속히 전멸되고 나자렛파nostrim와 이단자들minim은 당장 파멸하기를. 그들이 생명의 책에서 지워지고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않게 하소서. 불손한 이들을 굴복시키시는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또한 70인역의 성서를 인용하며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라고 하며 전교를 하는 그리스도교를 원천상 막기 위하여 히브리어로 된 성서만 정경이며 그 외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는 성서가 아니다 라고 선언하였다. 또한 중세 종교혁명 때 루터 등이 일어나 분열을 일으켰는데 이들 교회 이탈자들은 자기들의 말을 믿게 하기 위하여 주님과 사도들이 사용한 70인역 성서를 유대교 전통에 따라 성서가 아니라 하며 성서에서 임의로 삭제하였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도 이 70인역에 의한 성경이 1800년대 초까지 성경목록 안에 들어와 있었다. 물론 이름은 외경이라 하면서.. 그
이후로 유대교 히브리어 사본이 없는 7개의 성서들은 성서 밖으로 추방되었고 오늘에 이른다. 그러다가 공동번역 성서 안에 다시 제2경전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서 인정하지 않고 신성을 부정하는 유대교라든지, 초대 교회에서부터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성서에서 나오는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의 일부를 부정하기 위하여 고의로 성경목록에서 성경 일부를 삭제시킨 개신교는 유대교 히브리어 사본만을 정경이라 하고 70인역
사본에만 있는 7권의 성서를 외경이라 하지만 오리지널 기독교의 눈으로 볼 때에는 가당치 않는 짓이다. (참고로
연옥교리와 관련지어 보면, 오직 마음으로 믿으면 천국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므로 마지막 렙톤까지 갚아야 한다는 식의 보속이나 정화의
개념은 혁명가의 교설에 들어맞지 않게 되는데, 이에 따라 유대교가 배제한 상기 7권을 성경에서 빼어 버리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어쨌든
유대교와는 성경에서 배척하는 이유가 다른데 실상 연옥 교리는 성경에서뿐 아니라 유다교 및 교회의 역사와 관습인 성전에서 비롯한다. 한편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의 기도에도 연옥 영혼을 돌보시되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아 주시도록 청하는 내용이
있다) 유대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예수님만을 믿는다는 개신교가 예수님이 사용하신 70인역 성서를 외경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의 성서학계에서도 70인역 성서에 대하여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으며 더욱이 70인역 성서를 외경이 포함되었다 하는 이유로 버린 것에
대하여 대단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음이 작금의 상황이다. (출처: 가톨릭 굿뉴스)
Septuaginta, Greek version
사마리아
오경 Samaritan Hebrew text of the Old Testament
사마리아인들이 경전으로 여기는 구약성서 오경을 말한다. 단편들까지 합쳐서 150여개의 두루마리들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9세기경에 기록된 것이고 대부분은 14~15세기의 것들이다. 특히 이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꼽히는 것은 세겜의 그리짐산 기슭에 위치한 사마리아 회당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아론의 증손자 이름을 붙여 아비샤 두루마리라고 불린다. 사마리아 오경은 기원전 108년에 하스모네 왕조의 히르카누스 왕이 그리짐산의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기존의 오경과는 신학적 차이를 반영하는 독자적 경전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사마리아 오경만의 독특한 히브리어 서체가 쿰란에서 발견된 기원전 1세기경에 기록된 소위 고어체 히브리어 두루마리들과 유사하다는 점에서도 당시부터 사마리아 오경이 구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오경은 약 1,900군데에서 마소라본보다는 70인역과 유사한 면을 보여 많은 학자들은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이 같은 히브리어 성서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사마리아 오경은 마소라본과 주로 철자 등에서 6천여 곳의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차이점은 복수형인 엘로힘 대신 단수형 엘라를 사용하거나 야훼를 의인화한 표현들을 고치는 등 절대적 유일신론을 더욱 강조하였고, 모세를 비롯한 이스라엘 조상들의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인간적 약점들이 언급된 구절들을 의도적으로 고쳤으며, 하느님이 지정한 거룩한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바로 세겜의 그리짐산이라고 한 점이다. 특별히 이 마지막 부분에서 출애굽기 20,17과 신명기 5장에 나오는 십계명 끝부분에 그리짐산에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별도의 규정을 첨가하였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등)
사마리아 오경
Samaritan Hebrew text
사마리아인들
사마리아 알파벳
불가타본 Vulgata, Latin Version
불가타본은 서기 391년부터 406년까지 성 예로니모 Hieronymus Sophronius(히에로니무스 또는 제롬으로도 불림, 아래 참고)에 의해 구약은 히브리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신약은 서기 2세기 이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던 고대 라틴어 역본을 그리스어 원문과 대조 수정하여 완성한 라틴어(고대 로마어) 성경을 말한다. 이때 구약 중에서도 시편을 포함한 6권은 신약성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라틴어 역본이 낫다고 여겨 히브리 본문과 대조하며 수정하는데 그쳤는데, 이 고대 라틴어 역본은 몇 권이나 되는지 오늘날 알 수는 없지만 불가타본 작업 이전에 70인역(구약)과 그리스어 원문(신약)에서 이미 라틴어로 번역되어 있던 단행본들을 통칭한다(최근 독일 보이론의 베네딕토 수도회에서 고대 라틴어본의 비판본을 출판 중이라고 함). 불가타는 대중적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 명칭이 붙여진 것은 13세기에 이르러서인데 번역이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할 뿐 아니라 당시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어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불가타본은 트리엔트 공의회(1546년)에서 법적인 정통성 및 신뢰성을 공인 받았는데 다만 미흡한 부분에 대해선 위원회를 구성하여 식스토판과 식스토-클레멘스판이 1590년대에 출간되었다. 이후 1907년에는 성 예로니모의 원래 텍스트를 복원하기 위하여 이를 위해 베네닉토 수도원을 건립하여 25권으로 된 베네딕토 수정판 불가타본을 1987년에 완성하였고, 1965년에는 교황청 위원회에 의해 히브리어 및 그리스어 본문과 대조하여 본문을 보다 정확하게 다듬은 네오 불가타본이 1979년에 완성되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반포되었다. 오늘날 가톨릭 라틴교회에서 공식 경전으로서 라틴어 전례와 공식문서에 활용되는 불가타본은 이 네오 불가타본이다.
Vulgata Text
Vulgata, Sixto-Clementina
* 성 예로니모(히에로니무스, 제롬Jerome, 예로니무스. 347-419년. 사제 교회학자 성서학자). 달마티아의 아퀼레이아 근처 스트리도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성 히에로니무스는 12세 때 로마에서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공부하였고, 373년에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성서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하였으며, 그 후 칼치스 사막에서 375-377년까지 은수생활을 하면서 어느 랍비로부터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다. 379년에 일정한 사목직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제서품을 받았고, 380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의 성 그레고리우스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Origenes의 성서 주석 방법에 매료되었으며 니사Nyssa의 그레고리우스 주교와 교류를 가졌다. 이때부터 그는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382년에 로마로 왔는데 교황 성 다마수스 1세는 그를 비서로 임명하고 신구약성서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이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서방 교회에서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서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히에로니무스에게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서본을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그 당시 그는 헬비디우스의 이론을 반박하는 "헬비디우스 논박, 복되신 마리아의 영원한 동정성에 대하여"(383년)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는 헬비디우스가 마리아는 예수 외에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교황 서거후 386년 여름부터는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성서번역 활동에 몰두하면서 당시 몇몇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한 반박글을 발표하였다. 예를 들어 요비아누스의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그리고 성인들의 유해 공경 반대에 대해서 명확한 근거로 반박하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서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391년부터 신약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고, 구약성서의 경우에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 Septuaginta을 배척하는 유대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면서 새로이 번역하였다. 406년까지 계속된 이 엄청난 작업으로 번역된 라틴어 성서에 불가타(Vulgata, 대중적이라는 뜻)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성 히에로니무스 당시가 아니라 13세기 때였다. 그 이유는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성서본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어 있었으므로 로마 교회가 트렌토Trento 공의회에서 이를 공식적인 성서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419년 9월 30일 베들레헴의 수도원에서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아마도 라틴 교부들 가운데에서 가장 박학한 학자였고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서 성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와 더불어 서방 교회의 4대 교부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가톨릭대사전)
성 예로니모 Hieronymus, Jerome
마소라본 Masoretic Text of the Old Testament (MT)
오늘날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히브리어 텍스트는 거의 전부(수천 개)가 마소라본이며 이중 오래된 것은 서기 9-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헌이다(→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텍스트는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해사본이며, 사해사본 발견 이전에는 BC 150년경으로 연대가 추정되는 나쉬Nash 파피루스). 이 히브리어 본문들은 마소레티 Masoreti들의 인내로운 작업의 소산인 바, 그들은 갈릴래아 도시 티베리아 학파에 속하는 전문가 랍비들로서(→앞서 언급했듯이 율사와 바리사이로 구성된 유대교 랍비들은 제1차 독립전쟁이 있던 서기 70년 이후 예루살렘에서 얌니아로 옮겨가 유대교를 재건했으며, 제2차 독립전쟁이 있던 서기 132-135년 이후 다시 얌니아에서 갈릴래아로 근거지를 옮겨갔다. 갈릴래아 지방에서도 처음엔 우사에서 벳셰아림으로, 세포리스로, 마지막 티베리아로 옮겨갔음) 그들은 서기 6세기부터 9세기 사이에 당시까지 구전으로 전해오거나 수사본으로 되어 있던 성경 텍스트들을 모아 작업하였다. 즉 문자 기록을 확정하고 단어의 모음표기 확정하였으며(그때까지 히브리어는 자음체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타 악센트의 위치라든지 중자음의 설정 등 여타 특정한 수정을 함으로써, 그때까지 구전으로 전해오거나 수사본으로 확정되어 있던 구약성서 텍스트 전체가 갖추어졌다.
마소레티는 오늘날에도 히브리어 성서에 그 이름을 남겨 학계에서는 이들이 작업한 구약성경 본문을 마소라본 Masoretic Text이라고 부른다. 이 텍스트를 작성함에 있어 마소레티는 당대의 가장 중요한 랍비 학파 가운데 하나인 벤 아셰르 Ben Asher의 서방 학파에서 도움을 받았는데, 이 학파에서 작업한 오경과 예언서가 오늘날까지 전수되어 온다(→이들 텍스트는 쿰란사본 발견 이전에는 나쉬 파피루스 이후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텍스트로서 의의가 있었으나 오늘날은 단지 마소라본의 기초문헌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이중 오경은 학자에 따라 서기 820-950년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예언서는 895년 집필된 것으로 알렙포의 스페인계 회당에 보존되어 왔으나 지금은 카이로에 소장되어 있다(카이로 예언서라고도 하는 듯함). 이것들의 보다 완전한 텍스트는 서기 950년경으로 소급되는 아아론 벤 아셰르 Aaron Ben Asher의 텍스트인데 학계에서는 이를 A사본이라고도 부르며 현재 이스라엘에 있다. 한편 파울 칼레 Paul Kahle는 이 텍스트의 다른 사본 하나를 레닌그라드에서 발견했는데 이 사본은 서기 10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레닌그라드 사본(L사본)이라고 부른다. 칼레는 이 L사본에 현대적 사료 비판을 가하였고 그것이 1927년부터 1937년 사이에 만들어진 키텔 Rudolph Kittel의 히브리어 성서 Biblia Hebraica이다(→제3판까지 나왔는데 이중 L사본에 기초하여 1937년에 간행된 3판이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대본). 칼레와 키텔의 히브리어 성서가 나오기 전 모든 히브리어 성서는 야콥 벤 카임 Jacob Ben Chayyin에 의해 편집되어 1524-1525년에 베니스에서 봄베르그 Bomberg에 의해 출판된 간행본을 따라왔다. 오늘날은 1947년 쿰란 유적의 발굴이 있고 난 다음이라서 히브리어 성서의 보다 완전한 간행본이 있는데 스투트가르트 히브리어 성서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 K.Elliger - W.Rudolph eds., Stuttgart 1967-1977; 일명 BHS)가 그것이다(→새로 번역된 가톨릭 공용 성경의 히브리말 부분의 번역대본). 이 간행본은 키텔본을 기본 텍스트로 유지하면서 쿰란에서 발견된 수사본(특히 이사야서의 중요한 사본들)을 반영하여 본문비판 측면에서 훨씬 가치가 있으며, 키텔의 히브리어 성서 3판에서와 같이 판면 하단에 본문 비평 각주가 덧붙여져 있다.
Masoretic Text of Old Testament
신약 사본
신약에 관한 한 사본 논의는 구약보다 훨씬 복잡하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원본은 전해져 오지 않으며 필사자들의 인내롭고도 고마운 작업을 통해 전수된 사본寫本을 가진 것이 고작이다. 필사자들의 작업은 엄청나게 많은 그리스어 수사본手寫本들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는데 현재 파피루스 80편, 대문자 사본 268편, 소문자 사본 2792편, 전례용 텍스트를 담은 독서경본 2193권이 전해온다. 이 사본codex들은 간행본 작업을 위해 사본마다 특정한 기호로 표시되었는데 이중 중요한 것으로 신약 전체를 담고 있는 시나이 사본(S사본), 히브리서 9,14까지 담고 있는 바티칸 사본(B사본), 기타 알렉산드리아본(A사본) 등이 있다. 이들 문헌들은 서기 120-124년에 필사된 요한복음서의 존 라일랜드 파피루스Papyrus John Rylands 단편(요한 18,31-33 및 37-38이 실린 P52 사본, 아래 사진)처럼 요한복음이 쓰인지 약 30여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필사되어 원전과 시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작품도 있지만 이런 필사본은 드물고 대부분 최초의 원본이 기록된 시기와 적지 않은 시간차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원전과 긴 시간차를 보이고 어느 수사본도 신약 27권을 빠짐없이 다 수록하고 있지 않으며 또 그중의 어느 한 권도 다른 사본에 비해서 이문異文(Variantes; 여러 텍스트들 사이의 차이를 말함. 혹자의 계산에 의하면 신약의 모든 어휘가 15만 단어인데 그 이문들은 무려 25만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렇게 많은 이문들이 나오는 것은 교리상의 문제라기보다 텍스트의 필사와 전승의 오류 때문이라고 함)이 없지 아니하므로 학자들은 최초의 저술가의 붓끝에서 나온 그대로 본문을 복원(해독, 번역, 수정)하기 위해 참으로 주의 깊고 면밀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이다. 학자들이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필사자의 실수에 의한 이문들을 수정하는 일인데, 이때 실수에는 i요타와 h에타의 첨삭 같은 그리스어 발음상의 오류, 동어이월同語移越 같은 시각상의 오류, 눈으로 보고 기억해서 옮기는 과정에서 나오는 기억상의 오류, 고의적인 수정이나 교리적 수정에 의한 오류 등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입수하는 비판본(여러 수사본들을 대조 수정하여 만들어 낸 간행본을 말함)들은 이런 사정들을 염두에 두고 복원 작업을 한 것이며, 본문 여백에 소위 텍스트 비판란(본문비평 각주, apparatus criticus)을 두어 이문들 가운데서 그 표현을 선택한 기준을 제시하고 중요한 수사본들 사이에 있는 텍스트의 전승 상태나 이문, 상이점 등을 알려 주고 있다.
Papyrus John Rylands - P52
Papyrus John Rylands - P957
신구약 정경 형성과 외경
정경(정전, 경전, 그리스어 Kanon)이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책으로서 신앙인의 삶과 믿음에 규범이 되는 책을 말한다. 서기 2세기 이후 영지주의 같은 이단적 사조들이 등장함에 따라 대략 2세기 중엽에 전통(성전)을 바탕으로 경전 기준을 정하려는 합의가 처음 이루어졌으며(H.R.드롭너, 교부학, 분도출판사, P.77), 교회는 어떤 책이 신앙에 대한 확실한 진리를 담고 있고 성서로 존경받기에 알맞으며 공개적으로 선포될 수 있는가를 권위로 확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4세기에 이르러서야 27권이 마침내 경전으로 확정되었지만 이러한 과정은 2세기 말에 대략 정해졌으며, 그때까지 경전으로 여긴 책들은 지역 또는 공동체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무라토리 경전은 거의 최종적인 꼴을 갖추고 있는 신약성서 경전 목록을 처음으로 증언한다. 이 목록은 정경목록이 유권적으로 결정되기 전인 서기 200년경의 것으로 1740년 루드비코 안토니오 무라토리 L.A.Muratori라는 사람이 발견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신약 27권 가운데 22권이 정경으로 실려 있다. 이후 정경목록은 서기 382년 다마소 교황의 주관으로 열린 로마 교회회의에서 27권으로 결정되는데, 이들 목록이 겔라시아누스 교령Decretum Gelasianum에 실려 있으며 또한 393년 북아프리카 히포레기우스에서 열린 교회회의의 기록도 이를 전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경전이 확정되면서 구약성경의 정경을 결정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대두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을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유다교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앞서 얌니아에서의 유대교 정경이 결정됨으로 인해 구약 정경목록에 대한 상이한 입장과 태도가 있었으나 393년 히포 교회회의와 397년 카르타고 교회회의는 아우구스티노와 아프리카 교회의 관습을 따라 46권의 구약 정경을 받아들였고(상기 구약성서 ABC) 별다른 이의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16세기 종교혁명 당시 특정 교설(예: 오직 믿음)과 주장에 따라 정경 문제를 포함한 갖가지 신학적 문제가 일어나자 1546년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서와 채택된 성전에 관한 교령 Decretum de libris sacris et de traditionibus recipiendis(DH 1501)을 통해 신구약의 정경목록을 과거와 변함없이 재차 확인(새로 승인)한 바 있다.
한편 교회는 작품의 제목, 내용, 형태에서 신약성경과 관계가 있고 사도적 권위에 알맞지만 경전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모든 작품을 외경Apocriphae이라고 부른다. 많은 외경은 교회의 신학, 경건, 특히 마리아론에 대한 믿을 만한 내용도 싣고 있다. 그러나 외경은 꾸민 이야기들과 이해할 수 없는 기적사화들로 가득 차 있고 전체적으로 경전과 같은 확실성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경전으로 인정받지 못한다(이상 상기 교부학 발췌). 외경에 관한 현대 비판적 연구는 신약의 외경들이 지리학이나 고고학, 환경 전반에 대해 괄목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알려주며 비록 지엽적인 내용이더라도 일종의 영적 독서로 취급할 만한 내용을 싣고 있다. 구약 외경은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에 나온 문서들로 중간시기 문학으로 알려져 있는데 말 그대로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 위치하는 작품들이며, 그 종류로는 에녹이라는 성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에녹서, 성경에서의 뜻 깊은 사건과 그 일자 등을 기록한 희년서, 묵시록 성격의 책으로 우울하고 비관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에즈라 4서, 야곱의 12아들 유언을 담고 있는 12성조의 유언, 에즈라 4서와 유사하지만 염세론에 가득 차있지는 않고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의 고난 등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바룩의 묵시록(제2,3바룩서를 말함, 1바룩서는 정경임), 마카베오 3,4서(1,2서는 가톨릭 정경이며 그리스 정교회 등은 3서까지를 정경으로 인정함), 시편 151장, 므나쎄의 기도, 이사야 승천기 등이 있다. 신약 외경은 수가 많으며 복음서, 행전, 서간, 묵시록으로 나누어진다. 이중 복음서에는 필립보 복음, 토마복음(최근 이슈가 되어온 책), 베드로 복음, 히브리인들의 복음, 야고보의 원복음(경전성을 띠고 있으나 결정시 제외됨, 경전 복음서를 보충하는 외경으로서 가치가 높음, 특히 성모 마리아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교의 경건성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 니고데모 복음, 나자렛파 복음, 유년기 복음, 假마태오 복음, 토마의 유년 설화, 가말리엘 복음, 구세주와의 대화, 프리어-로기온, 야고보의 편지와 두 묵시록 등이 있고, 행전에는 베드로 행전(유명한 쿼바디스 이야기가 실려 있음), 바오로 행전, 요한 행전, 토마 행전, 필립보 행전, 안드레아 행전 등이 있으며, 서간에는 바오로가 세네카에게 보낸 편지, 바르나바의 편지(지역에 따라 경전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정경 결정시 제외됨), 사도들의 편지(형식상 복음서로 보기도 함) 등이 있고, 묵시록에는 베드로, 바오로, 토마의 묵시록, 헤르마스의 목자(경전과 거의 다름없는 책, 아래 사진) 등이 있다.
야고보의 원복음 Protevangelium Jacobi
토마복음 Thomas Evangelium
바르나바의 편지 The Epistle of Barnabas
헤르마스의 목자 Shepherd of Hermas
헤르마스의 목자 Pasteur d'Her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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