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요셉의 101가지 유비점-아더핑크
요셉은 창세기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들 가운데 마지막 인물이다. 그들은 모두 일곱 명이다. - 아담,아벨,노아,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특별히 마지막 인물인 요셉에게 다른 인물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요셉의 역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는 주된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마지막 열 장이 없다면 출애굽기의 앞부분은 불가해한 것이 되고 만다. 히브리인들이 고작 수십 명의 목자들로부터 큰 민족으로 번성한 것을 설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요셉의 생애이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가 그토록 상세하게 기록된 가장 주된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 안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기 떄문이다.
우리가 구약 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기에서 하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그 아들의 강림을 위한 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연구는 단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 곳곳에 신적 성육신과 주 예수의 생애와 죽음이 예표적으로 나타나며, 우리는 바로 거기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켜야 한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법들 가운데 다양한 사람들의 역사가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품이 나타나도록 하셨다. 이와 같이 아담은 그리스도의 머리됨(Headship)을 나타냈으며, 아벨은 그의 죽음을 나타냈으며, 노아는 그의 백성을 위해 피난처를 준비하는 그의 사역을 나타냈으며, 멜기세덱은 그를 제사장으로 가리켰으며, 모세는 그를 선지자로 가리켰으며, 다윗은 그를 왕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이 모든 인물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단연 요셉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생애 사이에서 최소한 100가지 이상의 유비점을 추적할 수 있기 떄문이다. 우리 앞서 많은 학자들이 이러한 매혹적인 주제를 다루었다. 이제 그들의 수고의 결과로부터 요셉의 역사의 상징적인 의미들을 최대한 끌어내 보도록 하자. [이러한 주제에 대해 우리는 할데만(Dr.Haldeman)과 냅(C.Knapp)에게 많은 빚을 졌다.]
위에 인용한 창세기 37:2-4로부터 우리는 요셉이 그리스도를 일곱 가지로 예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일곱 가지는 다음과 같다. 그의 이름의 의미, 그의 일의 성격, 악에 대한 그의 대항, 그의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나이에 대한 그의 관계, 그의 채색옷, 그리고 형들의 미움, 이제 이러한 것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도록 하자.
1. 그의 이름의 의미
그에게 "요셉"가 "사브낫바네아"라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던 것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창41:45). 유대 랍비들은 "사브낫바네아"를 "비밀을 드러내는 자"로 번역한다. 이러한 이름은 바로가 그의 신적 지혜를 칭찬하면서 지어 준 이름이었다. 우리는 요셉을 그의 인적 이름(human name)으로, 그리고 사브낫바네아를 그의 신적 이름(divine name)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요셉이 예표한 자 역시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 하나는 그의 인적 이름인 "예수"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그는 그의 인성을 가리키는 "사람의 아들"라는 이라는 이름과 그의 신성을 가리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제 요셉의 두 이름의 의미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관련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요셉"은 더함을 의미한다(창30:24을 보라). 첫째 아담은 "빼는 자"였다. 반면 마지막 아담은 "더하는 자"이다. 첫째 아담을 통해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가 된다. 반면 마지막 아담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백성들을 계속해서 "더하는" 자이다. 그가 이 땅에 오셔서 30년 이상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가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이러한 목적 떄문이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그의 죽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오실 때 그 모든 열매들은 천국 곳간에 들여질 것이다(요14:3)
한편 요셉의 두 번째 이름은 "비밀을 드러내는 자"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를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이름이었다. 요셉은 항상 "비밀을 드러내는 자"였다. 단지 꿈을 해석할 때뿐만 아니라 그의 삶의 모든 장면에서와 그가 맡은 모든 일 가운데,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비밀을 드러낸 자"였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얼마나 놀랍게 예표하는가! 그에 대하여 시므온은 이렇게 예언한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눅2:34,35).
창세기 37:2-4의 장면에서 요셉은 두 가지 측면에서 "비밀을 드러내는 자"로서 나타난다. 첫째로,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것은 그가 여기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특별한 대상으로서 나타나기 떄문이다. 둘째로, 그는 형들의 미워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복된 주님은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그는 또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내셨다. 사복음서가 제시하는 가장 두드러진 사실 가운데 하나는 주 예수가 어디를 가든 모든 것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가 접촉하는 모든 것의 은밀한 상태를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그는 진실로 "어둠" 가운데 비취는 "세상의 빛"이셨다. 그는 어둠 가운데 감추어진 것들을 찾아내며, 덮개를 벗기며, 폭로하며, 빛으로 드러내셨다. 이와 같이 요셉은 "더하는"자이며, "비밀을 드러내는 자"였다.
2. 요셉의 일은 목자로서 "양을 치는" 것이었다.
구약의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양을 치는" 목자들이었다. 아벨과 야곱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이 그러했으며, 그들 각자는 우리 주님의 목자되심을 다양한 측면으로 보여준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 가운데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시편23편은 그를 목자로서 묘사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우리 주님에 대해 배운 최초의 개념들 가운데 하나는 선한 목자였다. 이러한 상징은 그의 주의 깊은 돌보심, 그의 계속적인 보호하심, 그의 따뜻한 보살피심, 그의 복된 오래 참으심,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의 비할 데 없는 사랑 등을 표현한다. 이와 같이 요셉은 "양을 치는" 목자로서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해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을 가리킨다.
3. 악에 대한 그의 대항.
"그가 그들의 악(evil)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한글개역개정판에는 "그들의 잘못"이라고 되어 있음). 요셉의 이런 행동이 종종 논쟁이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이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옹호한다. 그러나 여기의 요셉은 고자질쟁이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자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그는 비겁한 침묵으로 그들의 악한 행동에 동조하는 자가 되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예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분별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7:7)
4. 그의 아버지의 사랑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이것은 요셉과 관련한 그림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야곱은 특별히 요셉을 사랑했다. 그가 요셉을 위해 채색옷을 지어 준 것,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먹혔다고 생각하면서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슬퍼한 것, 죽기 전에 사랑하는 아들을 보겠노라며 애굽까지의 먼 여행을 마다하지 않은 것 - 이 모든 것이 요셉에 대한 야곱의 특별한 사랑을 말해 준다. 이것은 우리에게 자기의 독생자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말해 주지 않는가? 솔로몬을 통해 예언의 영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창8:22,30). 이것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사랑에 의해 얼마나 아름답게 예증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늘로부터 울려 퍼진 음성이 무엇이었나? 그때 하늘이 열리면서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의 기뻐하는 자라"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다"(마17:5). 아들 역시도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증언하셨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10:17). 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마쳤을 때 그리고 그가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고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났을 때, 아버지는 그를 고통과 수치의 자리로부터 지극히 높은 자리로 옮기심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빌2:9).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지극히 높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자신의 보좌에 앉히셨다(계3:21)
5. 아버지의 나이에 대한 그의 관계
"요셉은 노년의 아들이므로"(한글개역개정판에는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라고 되어 있음). 여기의 그림 속에 있는 모든 특징들 가운데 의미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그림을 그린 자가 성령이심을 생각할 때,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여기에 있는 모든 단어들이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설교자는 이렇게 말한다. "노년을 영적인 언어로 바꾸어 하나님에게 적용하면, 그것은 '영원'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원의 아들이셨으며,모든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는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은 자가 아니라,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는 무엇으로부터 말미암은 자가 아니라, 영원히 낳음을 받으신 자이다. 그는 하나님이시오,아버지와 동등된 자시오,아버지와 동일 본체이시다." 요한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또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의 기도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 주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은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것이 없느니라"(요1:3). 그는 단순히 "신성의 유출"이 아니라., "그 안에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는"자이다(골2:9). 그는 하나님의 나타나심 휠씬 이상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육체"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이다(딤전3:16). 그는 시간 안에서 존재하기를 시작한 자가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자이다. 미가 5:2이 선언하는 것처럼,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자는 "그 근본이 상고에, 영원에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상징을 차용하여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는(그의 아버지의) "노년의 아들" 즉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6. 그의 채색옷
지금까지의 상징을 해석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제법 난해한 상징과 직면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럴 때 우리에게 도움을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채색옷의 의미를 추측하도록 우리 자신의 상상력에만 남겨 두지 않으셨다. 결코 그렇지 않다. 추측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된 말씀과 관련하여 무익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불필요하다.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 사사기 5:30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는다. "그들이 어찌 노략물을 얻지 못하였느랴 그것을 나누지 못하였으랴 사람다 한두 처녀을 얻었으리로다 시스라는 채색옷을 노략하였으리니 그것은 수 놓은 채색옷이로다 곧 양쪽에 수 놓은 채색 옷이리니 노략한 자의 목에 꾸미리로다 하였으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이 구별이 증표로서 채색옷을 입은 것을 발견한다. 또 사무엘하 13:18에서 우리는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라는 말씀을 읽는다. 여기에서도 같은 개념이 나타난다. 채색옷은 출가하지 않은 공주의 복장으로서 존귀의 증표였다. 사람들은 채색옷을 입음으로써 자신의 고귀한 신분을 나타냈다. 이와 같이 야곱이(라헬로부터 태어난) 요셉에게 채색옷을 지어 준 것은 그를 (여종들로부터 태어난) 다른 이복형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7. 형들의 마음
"그의 형들이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평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형들의 마음에 이움을 불러일으킨 것은 요셉에 대한 야곱의 사라이었다. 이와 같이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과 형들의 미움 모두를 나타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냄과 동시에 사람들의 적대감을 드러내셨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들의 적대감을 드러낸 것으로 인해 글르 미워했든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가 나타낸 은혜 안에서 피난처를 발견했다 - 둘 가운데 하나가 항상 따랐다. 그리스도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드러냈을 때, 그들은 그를 미워했다. 반면 그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그녀의 죄로 얼룩진 삶을 드러냈을 때, 그녀는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예컨대 "허물과 죄로 죽은 자연인의 잃어버린 상태"와 같은 하나님의 진리를 들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 그때 사람들은 그러한 진리를 미워하며 자신들의 자기의 누더기 뒤에 숨든지, 아니면 빛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리를 숙이면서 복음이 전파하는 구주를 믿는다.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의 어느 쪽인가? 당신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을 미워한 요셉의 형들처럼, 그리스도를 "멸시하며 배척하고" 있는가? 친구여, 착각하지 말라.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든지 미워하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16:22). 부디 시편의 다음과 같은 엄중한 경고를 가볍게 흘려듣지 말라.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시2:12)
이제 창세기 37:1-11에 나타나는 몇 가지 요점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끔을 들으시오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웧하더니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지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의 시신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말을 간직해 두었더라"(창37:5-11)
8. 요셉은 그의 말로 인해 미움을 받는다.
요셉과 관련한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은 아마도 요셉에 대한 야곱의 사랑과 그에 대한 형들의 미움일 것이다. 여기의 짧은 본문 가운데 형들의 "미움"이 최소한 세 번 언급된다. 4절에서 우리는 "그의 형들이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평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라는 말씀을 읽는다. 또 5절에서 우리는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라는 말씀을 듣는다. 계속해서 8절은 "그들이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세 언급으로부터 우리는 그들의 악한 적대감에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음을 보게 된다. 첫째로, 그들은 요셉의 인격(person)을 미워했다. 그것은 아버지 야곱이 그를 특별히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그들은 "그의 말한 것으로 인해 그를 미워했다. 요컨대 그들은 그의 인격으로 인해 그를 미워했으며, 그가 말한 것으로 인해 그를 미워했다. 이것은 요셉이 상징한 자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복음서로 가보라. 그러면 당신의 육체를 따라 우리 주님의 형제된 자들이 여기와 똑같은 두 가지 이유로 그를 미워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인 사실로 인해 그를 미워했으며, 또한 그가 가르친 것으로 인해 그를 미워했다. 전자의 실례를 위해 다음의 말씀들을 보라.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5:18).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요6:41).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요10:30,31). 이와 같이 육체를 따라 그의 형제된 유대인들은 그의 인격(person)에 대해 악한 적대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이 그를 미워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이것의 실례를 위해서는 다음의 말씀들을 보라.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한되"(눅4:28,29).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요7:7).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8:40)
9. 요셉에게 놀라운 미래가 약속되었다.
요셉의 두 꿈은 그가 위대한 운명의 주인공이란느 사실을 암기하면서, 동시에 그가 미래에 존귀한 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신적 확증이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그것이 예언적인 꿈이라는 사실을 감지햇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형들은 그로 인해 그토록 분노하는 대신 그것을 "허튼소리"로 여기며 무시했을 것이었다. 또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라는 말씀 역시 그러한 사실을 암시한다(11절). 이것은 요셉이 상징하는 원형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수치와 비천함 가운데 나타났던 자에게 놀라운 미래가 약속되었다. 장차 탄생할 아기에게 어떤 예언이 주어졌는지 주목하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모사라,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6,7). 또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천사가 말한 것을 주목해 보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이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1-22). 이와 같이 요셉에게 놀라운 미래가 약속된 것처럼, 그가 상징한 원형에게도 예언을 통해 놀라운 미래가 약속되었다.
10. 요셉은 자신의 미래의 통치권을 예언했다.
우리는 요셉의 두 꿈이 이중적인 통치권을 가리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밭"과 관련된 첫 번째 꿈은 상징적으로 우리 주님의 지상 통치권을 가리키는 반면 해와 달과 별과 관련된 두 번째 꿈은 그의 하늘의 통치권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졌기 떄문이다.
미래의 영광과 관련한 요셉의 말은 형들의 증오심에 더욱 부채질을 했다. 이것은 우리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주님이 자신의 영광을 더 많이 드러내고 자신의 미래의 존귀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수록, 육체를 따라 그의 형제 된 유대인들은 그를 더 많이 미워했다. 이것의 절정은 마태복음26:64에 나타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이 자신의 미래의 영광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면 이러한 말씀을 들은 자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무엇이었나? 다음 구절을 보라.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도다"(65절)
11. 형들은 요셉을 시기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4절). 이와 같이 형들이 요셉을 미워한 주된 원인 시기심이었다. 11절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그의 형들이 시기하되." 그들은 아버지의 편애로 인해 이복동생을 시기했다. 시기와 탐심은 모든 세대를 통해 인간 본성을 특징짓는 죄이다. 둘 사이의 차이는 시기의 대상은 사람인 반면 탐심의 대상은 사물이라는 것뿐이다.
이것 역시도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좋은 모형이다. 여기의 요셉처럼, 그리스도 역시도 육체를 따라 형제된 자들의 시기의 대상이었다. 악한 농부들의 비유 속에 이것이 잘 나타난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막12:6,7) 또 요한복음 12:18-19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는다.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이러한 말 속에 그들의 마음 안에 있는 시기심이 얼마나 분명하게 나타나는가! 그러나 그들안에 있는 시기심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는 말씀은 마태복음 27:17-18이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계속해서 다음 장에서 형들에게 배반을 당하는 요셉을 살펴보도록 하자.
창세기 37장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창37:12,13)
12.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요셉
위에 인용한 구절은 우리를 요셉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적으로 보여 주는 두 번때 그림으로 데려간다. 여기에서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내가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야곱의 마음을 잘 보여 준다. 그는 그들이 잘 있는지 여부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요셉의 형들이 잘 있는지 여부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낼 것을 계획한다. 그러한 아버지의 부름에 요셉이 즉각적으로 응답하는 것을 주목하라. 그는 추호도 싫어하거나, 머뭇거리거나, 핑계를 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행할 완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었던 "영원한 의논"을 되 돌아볼 필요가 있다. 주 하나님은 신적 전지로 인간의 타락과 인류가 자신으로부터 단절될 것을 내다보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 가운데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말씀을 그토록 자주 듣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인 우리 주님은 여기의 요셉처럼 기꺼이,즐거이,그리고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버지의 사랑의 일을 가지고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 역시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즉각적으로 응답하셨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10:7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데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13. 형들이 잘 있는지를 살피는 요셉.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창37:34). 요셉은 형들의 "시기"를 모를 수 없었다. 분명 그는 형들이 자신을 그토록 미워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아버지가 맡긴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이 도리어 그에게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넓은 마음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위해 기꺼이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14. 요셉은 헤브론 골짜기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성령께서 그리신 여기의 아름다운 그림 속에 있는 특징들 가운데 의미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기에서 냅(C.Knapp)의 "무성한 가지"(A Fruitful Bough)로부터 한 구절 인용해 보도록 하자. "헤브론은 교제 혹은 친교를 의미하며, 골짜기는 고요한 안식과 평온을 상징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죄와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늘의 영원한 평온 가운데 교제하고 계셨던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평화로운 헤브론 골짜기는 요셉이 아버지와 더불어 복된 교제 가운데 거하던 장소였다. 거기에서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며 평안히 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복된 장소로부터 그는 싸움과 피 흘림으로 특징지어지는 장소로, 그리고 그에게 감사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시기하며 미워하는 자들에게로 보냄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광의 주가 하늘의 집을 떠나 까닭없이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에게로 내려오도록 이끈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보여주지 않는가?
15. 요셉은 세겜으로 왔다.
세겜은 "어깨"를 의미한다. 그것은 서쪽의 지중해와 동쪽의 요단강 사이의 고원에 자리 잡은 그곳의 지리적 위치로부터 취하여진 이름이다(Smith's Bible Dictionary). "어깨"는 짐을 짊어지는 곳으로서 섬김과 예속을 상징한다. 그 단어의 의미는 창세기 자체가 분명하게 규정한다.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창49:15). 요셉이 아버지의 집이 있는 헤브론 골짜기를 떠나 세겜으로 온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이것은 우리 주님이 기꺼이 취하신 비천한 위치를 얼마나 잘 나타내는가! 그는 하늘의 평온한 장소를 떠나 죄와 고통의 무대로 내려옴으로써 스스로 종의 위치 즉 섬김과 예속의 위치를 취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또 갈라디아서 4:4에서 우리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셨다"는 말씀을 읽는다. 진실로 아버지의 사랑하시는 아들은 "세겜"으로 내려왔다.
뿐만 아니라 세겜은 전에 특별한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였다(창34:25-30을 보라). 거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생각해 보라. 세겜은 죄와 슬픔과 악한 정욕과 피 흘림의 장소였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있어 자기 아들들이 그러한 장소에 있는 것으로 인해 근심하면서 요셉을 보내 그들이 거기에서 잘 있는지 살피도록 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세겜의 모든 것이 주 예수께서 오신 장소의 성격을 얼마나 정확하고 적절하게 나타내는지 생각해 보라. 그가 취한 장소는 종의 장소였으며, 그가 온 장소는 죄와 싸움과 고통의 장소였다.
16. 요셉은 들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field)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창37:15,16). 주 예수께서는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밭(field)은 세상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13:30) 여기의 요셉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외인과 방황하는 자가 되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으셨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갈람 산으로 가시니라"라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요7:35-8:1). 이 얼마나 애처로운 말씀인가!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집이 있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집 없이 방랑하셨으며, 그러므로 황량산 산으로 물러가야만 했다. 내 영혼아, 부요하신 자셨으나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 자의 비할 데 없는 은혜 앞에 머리를 숙일지어다!
여기의 모형이 원형과 얼마나 정확하게 상응하는지 보라. 그와 관련하여 우리는 특별히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요셉은 분명한 목적과 함께 보냄을 받았다. 그것은 형들을 찾는 것이었다. 사복음서로 가보라. 그러면 당신은 여기의 모형이 원형과 완벽하게 상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의 임무는 육체를 따라 그의 형제 된 자들에게 한정되었다. 요한복음 1:11을 읽어 보라. "자기 백성에게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He came uoto His own, and his own received Him not, 한글개역개정판에는 "자기 땅에 오매"라고 되어 있음). 여기에서 "HIs own"은 그의 백성인 유대인을 가리킨다. 또 마태복음 15:24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또 로마서 15:8에서 우리는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추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시고"라는 말씀을 읽는다.
둘째로, 요셉의 임무의 성격이 무엇인지 주목하라. 야곱은 "가서 네 형들이 잘있는지 보라"고 말했다. 그가 보냄을 받은 것은 형들을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잘 있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그가 예표한 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요한복음 3:17을 읽어 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7. 요셉은 끝까지 형들을 찾았다.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창37:17). 요셉이 세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형들이 그곳을 떠난 뒤였다. 이와 관련하여 냅(Knapp)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의 마음이 아버지가 맡긴 일에 완전히 착념하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은 헤브론으로 돌아갈 좋은 기회였다. 맡은 일을 포가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는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맡긴 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것은 요셉이 예표한 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버지의 잃은 양을 찾는 수고를 끝까지 감당했다. 마침내 찾을 때까지 말이다. 사람들의 외면과 배척과 몰이해까지도 그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경멸하며 배척했으며,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베드로조차 "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며 그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버지의 일을 행하는 그의 발걸음을 돌이키지 못했다. 그가 행해야만 하는 일이 그에게 맡겨졌으며, 그는 그 일을 "마치기"까지 쉬지 않을 것이었다.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사복음에 기록된 이야기 전체를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바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우리의 구속자는 항상 그의 형제들의 뒤를 따라 갔다. 그가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의 글을 읽은 목적이 무엇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형제들에게 다가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또한 갈리리 해변을 다니면서 잠시 동안 자신과 함께 다닐 사람들을 찾으셨다. 또 성경은 그가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거기에 그의 몇 명의 "형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인자는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나의 독자여, 이러한 말씀이 당신에게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갔다"는 말씀을 일깨워 주지 않는가? 아, 요셉이 예표하는 자가 얼마나 큰 인내과 오래 참음으로 당신을 뒤쫓아 왔는지 생각해 보라! 그 사랑은 불신앙의 산을 넘고 죄의 벼랑을 지나 당신을 뒤쫓아 왔다.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할데만(Dr. Haldemann)은 "도단"이 "율법 혹은 전통"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잠깐 인용해 보도록 하자. "거기에서 예수는 그의 형제들이 율법의 멍에와 종교적 형식주의의 노예 아래 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 여호와의 율법은 바리새인들의 "전통"으로 변질되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막7:8). 바로 이것이 그들에 대한 우리 주님이 책망이었다.
18. 형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밈.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창37:18). 형들의 미움은 그들을 찾는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폭발시킬 기회를 발견했다. 여기에서 요셉을 죽이려는 음모를 "그가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꾸민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 주님이 아직 아기였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일깨워 주지 않는가?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신적인 사람들을 곧바로 자신들의 적의를 드러냈다. 헤롯이 새로 태어난 구주를 죽이고자 끔찍한 "음모"를 꾸몄다. 그때는 구주가 아직 "멀리 있을" 때였다. 그가 유대인들에게 스스로를 공적으로 나타내기 30년 전이었다. 그의 공생에 기간 동안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마12:14)
19. 형들이 요셉의 말을 믿지 않음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창37:19,20) 요셉의 예언적인 이야기는 그의 형들에게 허튼 이야기로 들렸다. 그들은 그를 미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한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이 믿지 않은 것은 "자, 그를 죽이자 그리고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자"라는 악한 제안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주목해 보라.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 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막15:29-32). 이러한 말씀은 그들이 그를 믿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공허한 헛소리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죽음과 장사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마27:62-64). 무덤을 돌로 인봉하고 경비병을 세웠을 때, 바리세인들은 사실상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볼 것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을 어떻게 다루는가? 복음을 듣는 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것을 신뢰하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참되시다고 인치는가? 그들은 "그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는가(요3:18)? 아, 불신자여! 당신은 바로 지금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죄가 당신 위에 임하여 있는 것을 믿는가? 당신은 마지막 큰 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당신은 크고 흰 보좌의 심판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렇다. 하나님의 정죄는 지금 당신 위에 임하여 있다. 이것은 얼마나 두려운 사실인가!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방주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피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대신하여 정죄를 당하셨다. 성육신한 진리인 그는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이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선언하셨다(요3:36). 아, 구원받지 못한 가련한 친구여! 만일 당신이 거짓말할 수 없는 자의 이러한 말씀들을 정말로 믿었다면, 틀림없이 당신은 나중으로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은 감히 더 이상 꾸물거질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당신 자신을 그의 발 앞에 던지라. 가련한 죄인으로서 믿음으로 그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라. 하나님의 아들의 이러한 말씀들을 허튼소리로 여기지 말라. 도리어 그것을 믿고 영혼의 구원을 받으라.
20. 요셉이 모욕을 당함.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창37:23). 이러한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요셉에 대한 형들이 잘 있는지 보기 위해 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를 그토록 미워했다. 마치 먹이를 덮치려는 짐승처럼, 그들은 즉시로 그에게 튀어 올랐다. 그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를 모욕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로부터 채색옷을 벗김으로써 노골적으로 그에게 수치를 가했다. 여기의 모형은 원형과 얼마나 완벽하게 상응하는가! 영광의 주님은 여기와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졌다. 그 역시도 모욕과 수치를 당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마27:27,28). 그는 십자가 위에서 또 다시 같은 수치를 당했다.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요19:23)
21.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짐.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창37:24). 할데만(Dr.Haldemann)의 글을 잠시 인용해 보도록 하자. "물이 없는 구덩이는 지하 세계인 하데스의 다른 이름이다. 그곳은 죽은 자들이 육체가 없는 상태로 거하는 곳이다.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슥9:11).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12:40). 우리 주님은 죽으셨을 때부터 부활하실 때까지 그곳에 계셨다."
22. 요셉은 구덩이로부터 끌어올려졌다.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창37:28). 이와 관련하여 할데만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일어난 순서는 먼저 요셉을 구덩이 안으로 던지고, 그 다음에 팔았다. 이것은 요셉의 원형인 그리스도의 경우와 정반대이다. 그리스도는 먼저 팔리고, 그 다음에 구덩이로 던져졌기 떄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원형의 빛 속에서 모형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어쨌든 구덩이로부터 끌어올려지는 것은 창세기로부터 말라기까지 구약 전체에 걸쳐 나타나는 부활의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23. 형들의 미움에 외식이 더해짐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창37:25-27). 먼저 25절의 첫 부분을 주목해 보라.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요셉이 구덩이 안에 있는 동안 그들은 앉아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마태복음 27:35을 일깨워 주지 않는가?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거기 앉아 지키더라."
다음으로 그들의 외식을 주목하라.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우리는 요한복음 18장에서 이것과 정확하게 병행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려고...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28절).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이와 관련하여 계속해서 31절을 주목해 보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24. 요셉이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창37:28). 요셉을 파는데 앞장 선 사람이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유다였던 사실은 너무나 놀랍지 않은가? 우리 주님을 판 사람이 열두 사도 가운데 유다였던 것처럼 말이다.
25. 요셉의 피 묻은 옷이 아버지에게 제시됨.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창37:31,32). 이와 관련하여 할데만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모형이 상징하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속죄양으로서 대속의 제물로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 아버지에게 제시되었다." 계속해서 다음 장에서 애굽으로 내려간 요셉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26. 요셉이 종이 됨.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창39:1). 요셉은 아버지 집의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애굽의 노예로 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주 예수의 자발적인 비하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나님과 동등되며 그의 본체의 형상인 자는 스스로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빌2:6,7). "노예"가 "종"보다 원어의 의미를 더 잘 나타낸다. 시편40편의 예언적인 언어는 이것을 가리킨다. 거기에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느다. "주께서 내 귀를 뚫으셨나이다 주는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6-8절, 한글개역개정판에는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이라고 되어 있음). 이러한 말씀은 우리를 출애굽기 21:5-6로 데려간다.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시편40편의 예언을 말하는 화자면서 동시에 출애굽기 21장의 상징을 성취한 자는 다름 아닌 주 예수였다. 그는 자발적으로 종의 위치를 취하고 노예의 자리로 들어가셨다. 요셉이 여기에서 상징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27. 요셉은 형통한 종이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여기에서 특별히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행한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셨더라"(the Lord made all that he did to prosper in his hand)라는 표현을 주목하라(한글개역개정판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이라고 되어 있음). 이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완전한 종을 가리키는 두 가지 예언적인 말씀을 일깨워 준다. 첫 번째 것은 우리 앞에 "복 있는 사람"을 제시하는 시편1편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1,2절). 그 사람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3절). 이것은 분명히 그리고 특별하게 주 예수를 가리킨다. 오직 그 안에서만 여기의 모든 표현들이 완전하게 실현되었기 떄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이사야 53장에서 발견된다(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여기의 모든 구절들은 특별히 그를 여호와의 "종"으로서 지칭한다. 창52:13을 보라). 10절에서 우리는 "여호와의 기쁨이 그의 손을 형통하게 할 것이라"라는 말씀을 읽는다(The pleasure of the Lord shall prosper in His hand,한글개역개정판에는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되어 있음). 이것은 창세기의 모형과 얼마나 놀랍게 상응하는가! 모형인 요셉에 대하여, 창세기 39:3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행한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셨더라"라고 기록한다. 한편 원형인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사야 53:10은 "여호와의 기쁨이 그이 손을 형통하게 할 것이라"라고 기록한다.
28. 요셉의 주인은 요셉을 크게 기뻐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창39:4).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요셉은 보디발의 다른 종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그 위에 있었으며,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면서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주인을 신실하게 섬겼다. 이것은 요셉이 예표한 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다른 종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그 위에 있었으며(사11:2을 보라), 그는 신실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그는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노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요8:29).
29. 종인 요셉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이 되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39:5).이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신적성품을 나타내는 일이라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라든지, 하나님의 왕권을 드러내는 일 등 자신의 모든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면 아들이 이 모든 일을 맡은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여기의 요셉이 예표하는 자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 애굽 사람의 집'이 상징하는 것"에 복을 주시지 않으셨나? 그러면 "그 애굽 사람의 집"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었나?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세상이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얼마나 큰 복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
30. 요셉은 용모가 빼어난 사람이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창39:6). 여기에서 성령께서 모형을 완벽하게 만들고자 얼마나 많은 주의를 기울이셨는지 주목해 보라.우리는 그의 인격과 그가 맡은 위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노예의 비천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맡은 위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노예의 비천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지에 예속되었다. 그는 더 이상 가나안에 있는 아버지의 집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한 애굽인의 집에 있는 노예였다. 바로 이것이 그의 위치였다. 그러나 그의 인격과 관련하여 우리는 그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다"는 말씀을 듣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 역시도 비천한 위치, 비하와 수치의 위치, 순복과 종의 위치를 취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인격의 영광이 온전히 보존되는 일에 얼마나 열심이셨는지 생각해 보라. 그가 (비천한 자리인) 구유에 뉘었을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지금 태어난 아기가 바로 "주 그리스도"임을 알리셨다. 그리고 곧바로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이 어린 아기 앞에 엎드려 경배한다. 또 그가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공생애를 시작할 때, 하나니은 그 앞에서 한 사람을 먼저 보내셔서 그가 자신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신들메조차 풀기에 합당치 못한 자임을 증언하도록 하셨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가장 수치스러운 장소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한 사람을 부르셔서 그가 십자가에 달린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도록 만드셨다(마27:54). 진실로 그는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자였다.
31. 요셉은 유혹을 당했으나 범죄하지 않았다.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깅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창39:7-12).
성령께서 창세기 38장의 유다의 추잡한 이야기와 39장의 요셉의 정결한 이야기를 나란히 놓으신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한 사람의 신실치 못함이 다른 사람의 신실함 앞에 놓인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요셉의 유혹은 마지막 아담인 주 예수의 유혹을 상징한다. 주 예수는 신실함 가운데 사탄의 악한 유혹을 물리치셨는데, 그것은 그 앞서 있었던 첫째 아담의 실패와 완전하게 대조된다. 여기의 모형의 놀라운 정확성은(우리 주님의 경우처럼) 요셉의 유혹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사실에 의해 한층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창세기 39장 7절과 10절과 12절을 보라. 나아가 우리는 요셉이 가나안에서 형들에 의해 유혹을 당한 것이 아니라,(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바로의 친위대장의 아내에 의해 유혹을 당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주 예수 역시도 육체를 따라 그의 형제된 유대인들에 의해 유혹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왕"인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당했다.
여기에서 요셉이 세 번 반복된 유혹을 얼마나 멋지게 물리쳤는지 주목하라 -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9절). 이러한 요셉의 말을 시편 105:19과 연결해 보라 -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정말로 놀랍지 않은가! 우리 주님도 같은 말씀으로 원수를 물리치셨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는 요셉과 주 예수 사이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12절). 요셉은 자신의 옷을 그녀의 손에 버려두고 피했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라고 명령했다(딤후2:22). 이것은 완전하신 우리 주님과 얼마나 다른가! 그는 피한 것이 아니라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셨다(마4:10).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라는 말씀을 읽는다(11절). 이와 같이 그는 모든 일에 탁월하신 자셨다.
32. 요셉은 거짓으로 참소를 당했다.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히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창39:16-18). 요셉에 대한 참소는 거짓이며 근거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졌다. 이것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 자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히7:26). 그의 원수들 즉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온 공회가 그를 죽이려고 그를 참소할 증거를 찾았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마26:59츨 보라). 그러니 결국 "두 사람의 거짓 증인"이 왔다(마26:59,60)
33. 요셉은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창39:19) 창세기 37장에서 우리는 요셉이 형들이 자신에게 가하는 악행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인의 아내가 거짓으로 참소했을 때, 그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호소도 하지 않았으며, 부당하게 옥에 던져지는 것으로 인해 불평하지도 않았다. 거기에 어떤 항변도 없었다. 다만 자신에게 가해지는 악행을 묵묵히 감당할 뿐이었다. 우리 구주와 마찬가지로, 그는 욕을 당하되 욕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이사야 53:7을 생각나게 하지 않는가?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34. 요셉은 옥에 던져졌다.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의 옥에 갇혔으나"(창39:20). 이와 관련하여 토머스 박사(Dr. G Thomas)의 글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에게 남겨진 요셉의 옷을 그의 죄를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했다. 처음에는 다른 종들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남편에게 말이다. 그리고 히브리 종을 감히 자신을 겁탈하고자 시도한 죄로 참소했다. 여기에서 그녀가 다른 종들에게 자신의 남편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14절). 그녀가 남편에 대해 말하는 방식은 그들의 부부관계가 어떠했는지를 은연중 암시한다. 또 보디발은 즉시로 요셉을 죽이지 않고 단순히 옥에 거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정말로 아내의 말을 믿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체면을 위해 보디발은 어떤 형태로든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요셉을 죽이는 대신 옥에 가두었다. 분명 그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요셉은 완전히 무죄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옥에 갇혔다. 그와 같이 우리 주님도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라고 반복적으로 고백한 사람에 의해 부당하게 사형 판결을 받으셨다. 여기에서 보디발의 행동과 빌라도의 행동이 놀랍게 병행되는 것을 주목하라. 분명히 보디발은 요셉에 대한 아라도이 행동이 놀랍게 병행되는 것을 주목하라. 분명히 보디발은 요셉에 대한 아내의 참소을 믿지 않았다. 만일 그가 아내의 참소를 믿었다면, 의문의 여지없이 그는 히브리 종을 죽일 것을 명령했을 것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체면(appearances)을 위해 요셉을 옥에 가두었다. 이것은 빌라도의 행동과 놀랍게 병행된다. 그 역시도 예수에 대한 유대인들의 참소를 믿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는 것을 그토록 꺼렸겠는가? 보디발과 마찬가지로, 빌라도 역시도 이 사건의 진짜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 총독으로서의 외양(appearances)때문에, 그는 가이사에게 반역을 획책했다는 죄명으로 참소된 자에게 사형을 판결했다.
35. 이렇게 하여 요셉은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졌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미우과 시기를 받아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졌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 의해 불법하게 다루어지고 부당하게 옥에 던져졌다. 이것은 그의 원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행4:26,27).
36. 요셉은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고난을 당했다.
스데반의 설교 속에서 우리는 여기의 사건과 관련한 언급을 발견한다. 그는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가하여 애굽에 팔았더니"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여 그가 애굽에서 종이 되었음을 말하고 난 후 곧바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행7:9,10). 이러한 말씀에 얼마나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나! 그는 얼마나 가혹한 시련과 고통과 모욕을 당해야만 했나! 시편 105편에서 우리는 좀 더 특별한 표현을 발견한다. "그(하나님)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7,18절). 이러한 언급들은 우리에게 모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당하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힌 우리의 복된 구주를 생각나게 하지 않는가?
37. 요셉이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음.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창39:21).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 구주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임무를 맡았던 백부장이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한 사실을 일깨워 주지 않는가(눅23:47)?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 아들로 하여금 요셉의 간수장과 상응하는 로마의 백부장으로부터 은혜를 받게 하셨다.
38. 요셉은 죄인들과 함께 계수되었다.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창40:1-3). 여기의 상징적인 그림에서 이것 역시 놀랄 만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요셉은 수치와 고통의 장소에 홀로 있지 않았다. 이것은 주 예수꼐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기에도 두 강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받혔던 것처럼, 여기에서도 두 죄수가 요셉과 함께 옥에 있었다.
39. 요셉은 한 사람에게는 축복의 도구였던 반면 다른 한 사람에게는 심판을 선언 하는 자였다.
두 사람 모두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는 가운데,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는 곧 풀려나게 될 것을 선언한 반면 떡 굽는 관원장에게는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라고 말했다(40:19). 성령께서 그들의 꿈을 자세히 기록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술 맡은 관원장과 관련하여, 우리는 포도를 짠 "잔"에 대하여 읽게 된다(10-12절). 이것은 어린 양의 보배로운 피 즉 그것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반면 떡 굽는 자와 관련해서는 각종 구운 음식이 들어 있는 광주리가 등장하는데(16-17절). 이것은 죄인을 구원하기에 완전히 무력한 인간의 공로를 상징한다. 거기에는 오직 "저주"만이 있을 뿐이었으며, 그것은 "나무에 달리는" 것으로서 나타났다 (갈3:13을 참조하라). 이것은 갈보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강도는 낙원으로 갔으며, 다른 강도는 멸망으로 떨어졌다.
40. 요셉은 미래를 아는 지식을 나타냈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는 가운데 그들의 미래의 운명을 예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라고 말하면서 모든 영광을 하나님에게 돌렸다(8절) 이와 같이 여기의 요셉이 예표하는 자 역시도 계속해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다(요12:49).
41. 요셉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함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창40:20-22) 모든 일은 요셉이 해석한 그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든 말씀 역시 그러할 것이다. 천지는 없어져도 그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아, 구원받지 못한 독자여! 떡 굽는 관원장에 대해 요셉이 선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역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42. 요셉은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랐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창40:14). 그와 마찬가지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우리 주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우리는 요셉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지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머리를 숙이며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운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시139:17).
43. 때가 되매 요셉은 옥으로부터 건짐 받았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배척을 당했으며, 애굽 사람들에 의해 부당하게 다루어졌다. 그는 아무 죄도 없이 옥에 던져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인생이 거기에서 끝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인생이 거기에서 끝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고통과 수치의 장소는 존귀와 영광의 장소로 바뀔 것이었으며, 비천한 감옥은 영광의 보좌로 대체될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도래했으며, 아무것도 그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할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이 그를 경멸하며 배척했는지 모른다. 악한 손이 그를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모른다. 어둠의 권세가 그의 대하여 격노했는지 모른다. 그의 시신이 무덤에 던져졌는지 모른다. 그의 무덤이 인봉되고 경계병들이 세워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사망에 매여 있는 것은 가능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2:24). 그렇다. 사흘 만에 그는 승리 가운데 무덤으로부터 일어나셨다. 그의 세마포는 그곳에 그냥 남겨진 채 말이다. 여기에서 요셉의 승귀가 그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예표하는지 주목하라.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깍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창41:14). 또 이것은 요한복음 20:6-7과 비교하라.
44. 요셉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옥으로부터 건짐 받았다.
만일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틀림없이 요셉은 평생 옥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가 깊은 번민에 빠진 것, 점술가들이 그의 꿈을 해석하지 못한 것, 술 맡은 관원장이 갑자기 요셉을 기억한 것 - 이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옥으로부터 끌어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셨다. 요셉 자신도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나중에 형들에게 한 말에서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창45:7-9). 이것은 우리 주님이 무덤으로부터 건짐 받은 것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행2:24).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행2:32).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행10:40). [물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일어나셨음을 보여 주는 구절들도 있다(요2:19,10:17,18등). 다만 위에 인용한 구절들은 창세기의 모형이 성취된 것을 강조하는 구절들이다]
45. 요셉은 이제 "비밀을 나타내는 자"로서 나타난다.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을 번민케 한 그리고 점술가들과 현인들이 해석할 수 없었던 꿈을 이야기 한다. 여기에서 요셉의 겸손이 나타나는 것을 주목하라.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창41:16). 이것보다 휠씬 더 높은 의미에서, 주 예수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하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요17:8). "나는 오직 아버지께서 그르치신 대로 말하노라" (요8:28).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요12:49)
바로의 꿈에 대해 듣고 난 후, 요셉은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라고 말했다(창41:25). 그러고 나서 그는 그 꿈의 의미를 알려 주었다. 이것과 계시록 첫머리가 완전하게 병행되는 것을 주목하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그가 하실 일"을 애굽 사람들에게 알리셨다. 마찬가지로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에서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 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둘은 얼마나 완전하게 병행되는가! 요셉은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실" 것이라고 말했다(창41:28). 한편 계시록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라는 말씀을 듣는다(1:1)
46. 요셉은 장차 임할 재난을 경고하면서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할 것을 촉구했다.
요셉은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낙관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아무 두려움 없이 진리를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하기를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신적 축복의 때에 이어 기근의 때가 임할 것을 선언했다. 근느 기근이 땅 전체를 삼킬 정도로 매우 "심할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계속해서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할 것을 촉구했다. 충성되며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며 내생이 있음을 알리셨다. 그는 세상의 재물을 의지하며 어떻게 그것을 향유할 것인지 자랑하는 자들에게 조만간 그들이 영혼이 부름받게 될 것을 경고하셨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가리고 있는 휘장을 열어젖히면서, 저주받은 자들이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을 보여 주셨다. 그는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장소에 대해 종종 말씀하셨다. 그곳은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영원히 울며, 통곡하며, 이를 가는 곳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미래에 대해 준비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모두 앞에 놓여 있는 것 즉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만날 것을 위해 준비하도록 명하셨다.
47. 계속해서 요셉은 "놀라운 조언자"(Wonderful Counselor)로서 나타났다.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난 연후에, 요셉은 장차 임할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취해야 할 조치에 대해 조언했다. 7년간의 대풍년에 이어 7년간의 대흉년이 따를 것이었다. 그리하여 요셉은 바로에게 궁핍의 때를 위해 풍부의 때 동안 곡식을 비축할 것을 조언했다. 이와 같이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나타내면서, 애굽의 모든 현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을 드러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스도 역시도 "놀라운 조언자" (Wonderful Counselor, 혹은 기묘자와 모사)로서 나타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장차 임할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지를 알려주는 메시지와 함께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았다. 그는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자이다(골2:3)
48. 요셉의 조언은 바로와 그의 신하들을 놀라게 했다.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창41:37-39). 바로는 이 히브리 노예에게서 나타난 지혜의 근원이 미신적인 점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임을 인식했다. 요셉이 가진 지혜와 명철은 애굽의 군중 점술가들이 가진 것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그러한 사실을 기꺼이 인정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그가 끼친 감화력 역시 그와 같았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8,29).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마13:54).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요셉 안에 있는 지혜를 보고 놀랐다. 그와 같이 주 예수의 말씀을 들은 자들 역시도 그의 지혜를 보고 놀랐다. 바로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라고 인정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자들도"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지혜를 인정했다(요7:46)
49. 요셉은 애굽 온 땅을 통치하는 자로 승귀 되었다.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다스리라 내 백성이 다 네 명령에 복종하리니 내가 너보다 높은 곳은 내 왕좌뿐이니라" (창41:39,40). 이것은 얼마나 복된 변화였나! 이것은 수치로부터 영광으로, 감옥으로부터 통치자의 보좌로, 차꼬에 채워진 가장 낮은 노예로부터 가장 높은 자로 우뚝 세워지는 변화였다. 이것은 그의 신실함에 대한 큰 상급이었으며, 그의 가치를 올바로 인식한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여기의 요셉이 예표하는 자를 얼마나 아름답게 보여 주나! 그는 여기에서 겸비와 수치 가운데 계셨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서 더 이상 그와 같이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드로가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벧전3:22).
50. 요셉은 다른 보좌에 앉았다.
여기의 모형이 얼마나 놀랍도록 정확한지 주목하라. 요셉은 그 자신의 보좌에 앉지 않았다. 그는 바로의 집을 다스리는 위치에 세워졌으며, 바로의 모든 백성이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좌에 있어 여전히 바로가 요셉보다 더 높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계시록 3:21에서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읽는다.
"이와 관련하여 할데만 박사(Dr. Haldermann)의 말을 잠깐 인용해 보도록 하자. "요셉이 바로의 보좌에 함께 앉은 것처럼, 오늘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아 계신다. 요셉이 그의 말로 바로의 집을 다스린 것처럼, 오늘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하더라도, 그 자신의 보좌에 앉아 계시지 않는다. 위에 인용한 계시록 구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자신의 보좌에 아버지의 보좌 사이를 구별하고 계시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는 이기는 자에게 아버지의 보좌가 아니라 자신의 보좌에 앉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준 약속과 하나님이 다윗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과 그에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호칭이 붙여지는 사실 등을 통해, 우리는 그의 보좌가 '왕의 도성' 예루살렘 있음을 알게 된다. 오늘날 그는 배척당한자, 배척당한 유대인으로서 아버지의 보좌에 앉아 계신다."
51. 요셉은 그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 때문에 보좌로 승귀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냅(Knapp)은 다음과 괕이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적인 승귀를 상징한다. 한때 십자가에 달렸던 자는 지금 영광 가운데 계신다. 한때 사람들에 의해 배척을 당햇던 자는 하나님에 의해 그의 보좌에 앉혀졌다. 요셉이 애굽에서 존귀한 위치로 승귀된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와 그가 애굽에 행한 실제적인 봉사 때문이었다." 이것이 빌립보서 2장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과 얼마나 아름답게 병행되는지 주목하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2:6-9)
52. 요셉은 그의 새로운 신분에 어울리는 복장을 갖추었다.
"바로가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실을 목에 걸고"(창41:42). 우리는 요셉의 원형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말씀들을 읽는다.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는니라"(행5:31).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히2:9). 또 계시록 1장에 묘사된 영화로워진 주님의 모습을 주목하라.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1:13)
53. 요셉의 권세와 영광이 사람들에 의해 공적으로 시인됨.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의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에게 애굽 전국을 총리로 다스리게 하였더라"(창41:43). 오순절 날 베드로는 구주를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받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사랑하는 독자여, 바로 이것을 꺠닫고 시인하는 것이 지혜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승귀된 존귀를 깨달았는가? 당신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자가 지금 위엄의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가? 당신으 그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이제는 오직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고 있는가? 당신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나?" 만일그렇지 않다면, 부디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나는 당신이 미래에 억지로 그렇게 하는 수많은 무리 가운데 들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장차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겠노라고 맹세하셨기 때문이다(빌2:10)
54. 요셉은 바로로부터 새 이름을 받았다.
"그가 요셉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라 하고"(창41:45). 사브낫바네아는 "세상의 구주"를 의미한다. 빌립보서 2:9에서 우리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는 말씀을 읽는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그는 "예수"라는 이름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그때 그 이름은 아직까지 약속과 보증일 뿐이었다. 천사는 요셉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말했다(마1:21). 그러나 그는, 나무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그들의 죄를 담당할 때까지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날 때까지 그리고 하늘로부터 돌아와 그의 완성된 사역의 은택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기 위해 성령을 보낼 때까지, "자기 백성을 귿르의 죄에서 구원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 그는 실제로 구주가 되셨다. "하나님이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행5:31). 이와 같이 하나님 자신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실제로 구주를 의미하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마치 수치의 때가 끝났을 때 요셉이 바로에 의해 높여지고 "세상의 구주"를 의미하는 새 이름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독자여, 당신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자와 개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지금 당장 그를 당신의 구주로 영접하라, 연결되어 있다면, 찬미와 경배로 그 앞에 무릎을 꿇어라.
55. 요셉은 아내를 얻었다.
"그가 요셉의 이름을 (액부어로 "세상의 구주"를 의미하는) 사브낫바네아라 하고 또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따 아스낫을 그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하니라"(창41:45). 이 부분에서 나는 다른 많은 주석가들과 의견을 달리 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여기의 아스낫을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렇게 간주하는 두된 이유는 요셉의 아내가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더라도, 나는 그와 상충되는 또 다른 측면이 있음을 느낀다. 물론 나는 여기의 영감된 이야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제각각 명확한 의미와 상징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또 나는 모든 구절들이 성령에 의해 지금의 자리에 놓였음을 믿는다.
56. 요셉의 결혼은 바로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우리가 마태복음 22:2에서 읽는 것과 얼마나 완벽하게 일치하는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요셉이 30세에 바로 앞에 서서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상징하는) 공적인 사역을 시작했다는 언급에 앞서 아스낫이 언급되는 사실과 그 후에 그녀를 통해 두 아들을 낳고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언급이 따르는 사실은 그녀에게 이중적인 상징이 있음을 암시한다. 요셉의 이방인 아내는 첫째로 여호와께서 다른 모든 백성들로부터 구별하여 자기에게로 취하기 이전의 이스라엘의 상태를 돌아보며, 둘째로 우리 구주가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때를 내다 본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옛 백성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실 때의 이스라엘의 영적, 시대적 상태는 또 다시 이방인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지금 그리고 그때까지 그들을 "내 백성이 아니라"를 의미하는 "로암미"라고 부르시기 떄문이다(호1:9) ] 이와 관련하여 예레미야 31:31-34; 에스겔 16:62-63); 호셍 2:19-23; 이사야 54:5-8등을 참조하라. 또 요셉의 두 아들의 이름 역시도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과거를 "잊으실"(므낫세) 것이며, 그때 이스라엘은 전과 같지 아니하고 "번성할"(에브라임) 것이기 때문이다.
57. 요셉은 30세에 공적인 사역을 시작했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창41:46). 요셉과 관련한 놀라운 그림 속에 들어 있는 모든 특징들은 다 나름대로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의미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령께서 여기에서 우리에게 요셉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할 때의 나이를 알려 주신 것을 생각해 보라. 도대체 어떻게 여기에 의미가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그때 그는 30세였다. 이 부분에서 모형과 원형은 얼마나 완벽하게 일치하는가! 누가복음 3:23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라는 말씀을 읽는다. 요셉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할 때의 나이가 30세였던 것처럼, 우리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의 나의 역시 30세였다.
58. 요셉은 자신의 사역을 위해 바로 앞을 떠나 나왔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삽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따을 순찰하니"(창41:46). 창세기 41장에서 바로는 - 애굽을 통치하는 자로서, 요셉의 탁월함을 기뻐하는 자로서, 요셉에게 자신의 집 전테를 맡긴 자로서, 그러면서도 여전히 최고의 보좌를 보유하고 계시는 자로서 - 아버지 하나님을 상징한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46절 하반절이 얼마나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보라. 요셉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한 것은 바로 "앞"을 떠나는 것으로부터였다.
이것은 우리가 누가복음 3장에서 읽는 것과 얼마나 놀랍게 일치하는가! 우리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의 나이가 30세 쯤 되었다는 언급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 그것은 그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울려 퍼진 아버지의 음성이엇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22절). 공생애를 시작하기 이전의 구주의 행적에 대해 우리는 거의 듣지 못한다. 나사렛에서 보낸 모든 세월은, 소년 시절에 성전에 왔을 때의 한 가지 짤막한 일화만을 제외하고, 침묵 안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세례 받을 때 그가 물로부터 나오는 순간,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이 땅에서 완전한 삶을 살았음을 공적으로 증언하셨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말씀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인격의 탁월함만을 확증하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한 아들이 살았던 30년의 모든 삶에 대해 아버지가 인정하신 것을 확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요셉이 바로 "앞"을 떠남으로부터 공적인 사역을 시작한 것처럼 주 예수께서도 아버지 "앞"을 떠나 요단강에 나타나심으로부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사실이다.
59. 요셉의 사역은 온 땅을 두루 다니는 사역이었다.
"요셉이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창41:46). 요셉은 결코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 대한 바로의 신뢰를 배신하지 않고, 신실하게 자신의 의무를 이행했다. 그는 안일한 장소에 머물지 않고 "애굽 온 땅"을 두루 다녔다. 이러한 말씀은 우리에게 여기의 요셉이 예표하는 자와 관련하여 사복음서가 말하는 것을 일깨워 주지 않는가?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마4:23). 또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9:35)
60. 요셉의 승귀후 풍요의 때가 뒤따랐다.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 두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창41:47-49). 이러한 말씀의 상징적인 의미와 관련하여 냅(Knapp)의 말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이러한 7년 대풍년은 현재의 은혜의 시대를 상징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7년 동안의 '풍년'이 아니라 '대풍년'이었다. 기 기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았다'(47절). 그것으 엄청난 풍성함의 때였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같은 시대는 결코 없었다. 현재의 은혜의 시대 이전에는 하나님이 모든 죄인에게 자유와 구원을 선포하도록 온 세상에 그의 사자들을 보내지 않으셨다. 이와 같은 대풍년 때는 결코 없었다. 또 성경에 언급된 각각의 시대들 가운데 현재의 은혜 시대가 단연 가장 긴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아, 이것은 얼마나 큰 은혜인가!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신다(벧후3:9)."
현재의 은혜의 시대에 구원받은 자가 이전 시대에 구원받은 자보다 휠씬 더 많은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아벨의 시대부터 홍수 시대까지 구원받은 사람들은 매우 적었다. 족장시대 동안 구원받은 사람들 역시 매우 소수였다. 또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이스라엘 전체를 통해 거듭남의 증거를 가진 사람들은 소수였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에도 적은 수의 사람들만 구원받았다. 단지 120명의 사람들만이 다락방에 모여 성령의 오심을 기다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전의 모든 시대들과는 대조적으로, 현재의 은혜의 시대에 땅은 "풍성한"소출을 내고 있다. 주님 자신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열매"가 맺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61. 풍요의 때에 이어 기근의 때가 따랐다.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먹을 것이 있더니"(창41:53,54). "일곱 해 풍년"(완전한 기간)이 풍성한 영적 추수가 거두어지는 현재의 은혜의 시대를 가리키는 것처럼, "일곱 해 흉년"(또 다른 완전한 기간)은 현재의 은혜의 시대 뒤에 올 시대를 바라본다. 은혜의 복음이 그 신적 목적을 완수하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난 후, 성령께서 세상을 떠나심과 함께 "대환난"의 때가 도래할 것이다(롬11:25).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이때를 가리킨다. 그때는 "야곱의 환난의 때"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그때가 이스라엘의 가장 어두운 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렘30:7). 다니엘이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라고 말한 것 역시 그때를 가리키는 것이엇다(단12:1). 또 그때와 관련하여 우리 주님은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이라고 말씀하셨다(막13:19,20). 또 그때는 사탄이 땅에 던져지고, 적그리스도가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군림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폭풍이 세상에 몰아치는 때일 것이다. 또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그때는 "기근"의 때일 것이다. 여기의 일곱 해 흉년의 날처럼, 그때는 기근이 "너무 심할" 것이다(창41:31). 더욱이 그날의 기근은 특정 지역에 한정된 지역적인 기근이 아니라, 세계적인 기근일 것이다. 요셉 시대의 기근이 애굽에만 한정되지 않고 "온 지면"에 가득했던 것처럼(41:56), 계시록3:10에서 우리는 "시험의 때"가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는 말씀을 듣는다. 아모스가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아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라고 예언한 것 역시 그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암8:11,12) 지금 세상은 대풍년의 때를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조만간 "기근"의 때가 올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독자여, 부디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는 말씀을 흘려듣지 말고 마음에 새겨라. (사55:6). 예레미야 8:20에서 우리는 "추수할 떄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도다"라는 말씀을 듣는다. 당신이 장차 임할 진노의 날에 이 땅에 남아 있다면, 다름 아닌 당신 자신이 그렇게 탄식하며 말하게 될 것이다.
62. 요셉은 이제 멸망의 세상에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자로서 나타난다.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창41:55). 이와 관련하여 힐데만 박사(Dr. Hildermann)의 말을 좀 길게 인용해 보도록 하자. "경멸과 배척을 당했던 한 유대인이 바로의 은총의 통로가 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나! 그 유대인이 기근에 빠진 세상을 위한 구주의 위치로 승귀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었나! 그 유대인이 굶주림 가운데 빠진 세상을 위한 유일한 구주가 된 것은 얼마나 놀아운 일이었나! 마차나가지로 오늘날 배척을 당한 유대인인 예수가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가 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사실과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배척을 당했던 그리스도가 기근에 빠진 세상을 위한 구주로 승귀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배척을 당했던 그리스도가 굶주리는 세상을 위한 유일한 구주인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아버지에 의해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그들의 축복을 위해 보냄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배척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의 죄가 그들 자신에게는 심판이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되도록 역사하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을 주시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배척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이 되도록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가 온 세상의 은혜와 긍휼의 기회가 되도록 만드셨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롬11:11),"
63. 요셉 홀로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주었다.
여기에 바로가 자신에게 양식을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을 모두 요셉에게로 보내는 것을 주목하라. "애굽 온 땅이 굶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야식을 구하는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55절). 요셉은 바로에 의해 공식적으로 임명된 구주였다. 굶주린 자는 누구든지 요셉에게 가서 도움을 받으라는 것은 애굽을 위한 복음, 복된 소식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완벽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미리 보여 주는지 보라! 죄인이 영혼의 굶주림 가운데 하나님에게 부르짖을 때, 그의 응답은 무엇인가? "나의 복된 아들에게로 가라!"가 아닌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 하나님이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많나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여기에서 바로가 애굽 사람들에게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고 말한 것처럼, 변화산에서 아버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셨다(마17:5). 여전히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다.
64. 요셉은 온 세상의 구주가 되었다.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긱느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창41:57). 요셉은 온 세상의 기근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았다. "기근"이 "모든 땅"에 있었다(41:54).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모든 필요를 채우 수 있는 충분한 양식을 준비하셨다.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요셉이 나우어 주는 양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요셉은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대햇다. 애굽 사람이든, 그의 형제들이든, 먼 나라로부터 온 외인들이든 문제될 것이 없었다.
모두가 다 양식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요셉의 원형에게도 똑같이 사실이다.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주는 결코 지역적인 구주가 아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부자와 가난한 자,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를 막론하고 모두를 위한 구주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그 안에서 자신들의 가장 깊은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복음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다만 그 조건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요3:16). "각국 백성이 요셉에게 온" 것처럼, 하늘에서 새 노래를 부를 자들은 다음과 같이 선포할 것이다.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5:9)
65. 요셉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무한한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쌓아 둔 곡식이 바다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창41:49).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식을 얼마나 풍성한가! 하나님은 인핵하게 준비하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충분한 것이 준비되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약의 서신들 속에서 너무나 자주 나타나는 표현들을 일깨워 준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의 은혜의 풍성함"이라든지 혹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과 같은 표현들을 읽는다(엡1:7,2:7). 또 거기에서 우리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라든지 혹은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와 같은 표현들을 읽는다(엡2:4; 벧전1:3). 또 거기에서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라든지 혹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와 같은 표현들을 읽는다(엡3:8; 골2:9). 또 로마서 10:12에서 우리는 "한 분이신 주님은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라는 표현을 발견한다.
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궁한 양식을 준비하신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안에는 부족함이나 궁핍함이 없다. 그가 십자가에서 속죄를 위해 흘린 보배로운 피에는 무한한 가치가 있다. 죄인들을 향한 그의 마음에는 무한한 긍휼이 있다. 그 안에는 자기에게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기꺼이 영접하고자 하는 무한한 의지가 있다. 그의 팔에는 그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며 지킬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그리스도의 피가 씻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한 죄인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풀어줄 수 없을 만큼 사탄의 멍에에 단단하게 결박된 죄인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만족시켜 줄 수 없을 만큼 낙망하고 절망한 죄인은 없다. 구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셨다(마11:28). 아, 죄 가운데 신음하는 영혼이여! 그가 정말로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라! 지금 모습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라. 당신의 모든 필요와 궁핍과 비참함을 그대로 가지고 그에게 나아가라. 그러면 그는 기쁨으로 당신을 영접하시고, 당신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당신의 입에 새 노래를 넣어 주실 것이다. 부디 하나님이 당신에게 자기 아들의 무한한 충족하심을 깨닫는 은혜를 주시기를 기원하다.
66.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의 땅으로부터 쫓겨난다.
창세기 37장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주고 난 후 42장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그러면 마침내 창세기 42장에 이르러 우리는 그들과 관련하여 무슨 말을 듣는가? "그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고만 있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저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고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라 간 자 중에 있으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창42:1-3,5). 가나안조차도 하나님의 형벌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그곳 역시도 기근에 의해 삼켜졌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죽음의 위험 가운데 떨어졌으며, 굶주림의 고통이 요셉의 형들을 그 땅으로부터 몰아내면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행동으로 나타난 예언" (prophecy in action) 으로서, 2,000년 후에 비극적으로 성취되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배척하고 얼마 후(하나님이 보낸) 기근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했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얼마 후 (하나님의 심판으로) 로마인들에 의해 그 땅으로부터 쫓겨나 세상 전체로 흩어졌다.
67.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곡식을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요셉은 그의 형들을 ㅇ라아보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더라" (창42:6,8). 요셉은 바로의 집 전체를 다스리는 총리로 승귀 되었지만, 야곱은 그것을 알지 못햇다. 이 모든 기간 동안 그는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심판인) 기근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으며, 그의 아들들은 굶주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가나안으로부터 쫓겨나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은 지금 누가 그 땅을 통치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자신들의 메시야를 배척한 이후의 야곱의 자손들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은가! 그들은 진리를 배척했으며, 거짓을 믿는 헛된 미망에 빠졌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가 죽었다고 믿었다. 기독교 시대 전체를 통해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었으며, 대환난의 때가 시작될 때까지 그들은 여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와 영광을 알지 못할 것이다.
68. 그러나 요셉은 그들을 보고 알았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창42:7) 그렇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보았다" 그들이 그를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은 그들을 향해 있었다. 그들이 그를 배척한 기나긴 밤 전체를 통해 말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그의 말씀을 들어보라.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기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숨겨지지 못함이라"(16:17) 그는 또한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에브라함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5:3)
69. 요셉은 형제들에게 형벌을 내렸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이다....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창42:7,17) 이와 관련하여 할데만 박사의 인상적인 글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지금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원인은 요셉 때문이었다. 요셉은 예전에 그들이 자신에게 악을 행한 것으로 인해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오랜 세월 동안 고난을 당한 것의 비밀은 그들로부터 배척을 당한 메시야가 그들을 '거칠게' 다룬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가 그들에게 형벌을 내리고 계셨던 것이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호9:7).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23:38,39).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세대에 돌아가리라' (마23:35,36). 유대인들의 특이한 고난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심판과 연단 외에 아무것도 없다."
70. 요셉은 그들에게 대속물을 통해 구원받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요셉이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창42:17-19,24) 다시 한 번 요셉과 관련한 할데만 박사의 뛰어난 글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삼 일 후 요셉은 형제들을 대신하여 시므온을 결박하면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 모두가 풀려날 것을 선언했다. 오순절 날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이스라엘에게 임금과 구주가 되게 하셨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이 그에 대한 자신들의 죄와 악행을 회개한다면, 하나님이 그의 죽음을 그들에게 함당한 심판을 위한 대속제물로서 받으실 것이며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다시금 아들을 메시야와 구주로 보내실 것이라고 선포했다."
71.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이 낯선 땅에 있는 동안 그들을 위해 양식을 준비했다.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창42:25). 그들이 요셉을 알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그가 거칠게 말하면서 그들을 감옥에 던져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판 속에 긍휼이 녹아 있었다. 요셉은 자신의 형제들이 길에서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이 낯선 땅에 있는 동안 그가 그들의 필요를 돌볼 것이었다. 이것은 은혜의 시대 동안 유대인들에게 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혹한 형벌을 받았다. 다른 어떤 나라도 경험하지 못한 특이한 고난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놀랍게 보존되었다. 자신들의 땅으로부터 쫓겨난 이후 오랜 세월 동안,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시고 보존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양식을 준비하셨다. 요셉이 자신에게 악을 행한 형들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옛 약속을 이루셨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너를 흩었던 그 모든 이방을 내가 멸망시키리라 그럴지라도 너만은 멸망시키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법에 따라 너를 징계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라라" (렘30:11). 또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세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겔11:16)
72. 요셉은 "두 번째에" 그의 형제들에게 알려졌다.
이것은 스데반이 이스라엘에게 전한 메시지 안에서 강조되었다.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행7:13). 처음 왔을 때, 비록 요셉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요셉이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낸 것은 그들이 두 번째 애굽에 왔을 때 즉 "그가 그들에게 두 번째 나타났을 때"였다. 여기의 모형은 얼마나 놀랍도록 정확한가! 주 예수께서 육체를 따라 형제된 자들에게 처음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나타날 때, 그들은 그를 알 것이다.
성령께서 이러한 중요한 상징을 다양한 모형들 속에서 계속 반복하는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그것은 모세와 이스라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출2:11,12). 그러면 그의 형제들은 언제 그가 자신들을 위해 나서는 것을 알게 되었는가? 그들은 그를 무시했다. 그들은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라고 말했다(출2:14). 그들은 사실상,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에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말한 셈이었다 (눅19:14).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두 번째로 (그가 그들로부터 감취어지고 난 오랜 후)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영접했다.
이것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여호수아가 처음 이스라엘 앞에 나타난 때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기 위해 보냄 받은 두 "정탐꾼" 가운데 취하자고 마랬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의 메시지를 배척했다(민13장). 그들이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영접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가 그들에게 두 번째로 나타난 때였다.
이러한 원리는 다윗의 역사 가운데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다윗은 아버지에 의해 그의 형제들이 잘 있는지 살피도록 보냄을 받았다. "이새가 그의 아들 다윗에게 이르되 지금 네 형들을 위하여 이 볶은 곡식 한 에바와 이 떡 열 덩이를 가지고 진영으로 속히 가서 네 형들에게 주고 이 치즈 열 덩이를 가져다가 그드르이 천부장에게 주고 네 형들의 안부를 살피고 증표를 가져오라"(삼상17:17,18). 그러나 그들에게 왔을 때, 그들은 그의 호의에 대해 분개하며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28절). 모든 이스라엘과 함께 그들이 그를 자신들의 왕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위에 열거한 인물들은 모두 주 예수의 모형들이었다. 주 예수께서 처음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두 번째로 나타나실 때, 그들은 그를 자신들의 지도자와 왕으로 영접할 것이다.
73. 요셉의 형제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창44:16). 이 부분에서도 모형과 원형은 정확하게 상응할 것이다. 선지서의 많은 구절들이 이러한 주제에 대해 빛을 비추어 준다. 그러한 구절들을 몇 개 인용해 보도록 하자. "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거기에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미워하리라" (겔20:42,43). 또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5:15). 이것은 요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형제들이 그들의 "죄"를 인정할 때까지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실제적인 회개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난 후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두 번째로 자기 아들을 보내실 것이다(행3:19-20을 보라).
74.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혼란에 빠졌다(troubled).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troubled) 대답하지 못하더라"(창45:3). 이 부분에서도 모형과 원형은 완벽하게 상응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배척한 메시야를 보게 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는다.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12:10).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메시야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깨닫게 될 때, 그들은 진실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75.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나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자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재셨나이다...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창45:4,5).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와 화해할 때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님을 위하여 열리리라"(슥13:1). 그때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주(Lord,한글개역개정판에는 "여호와"라고 되어 있음)꼐서 말씀하셨느니라" (사54:7,8)
76. 요셉은 동정의 사람(Man of Compassion)으로 나타났다.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 그 때에 그와 함께 한 다른 사람이 없었더라 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창45:1,2). 우리는 요셉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일곱 번 이상 듣는다. 그는 형제들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들을 때 울었다(42:24). 그는 베냐민을 볼 때 울었다(43:30). 그는 형제들에게 자신을 알릴 때 울었다(45:1,2). 그는 형제들과 화해할 때 울었다(45:15). 그는 아버지 야곱을 만날 때 울었다(46:29). 그는 아버지가 죽을 때 울었다(50:1). 또 그는 나중에 형제들이 자신의 사랑을 의심할 때 울었다(50:15-17).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동정심을 일깨워 주지 않는가? 그는 두 번 울었다. 한 번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울었으며, 다른 한 번은 나중에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울었다.
77. 요셉은 먼저 유다와 그의 형제들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그 후에 야곱의 나머지 가족들에게 나타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가랴 12:7에서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이는 다윗의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주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을 듣는다.
78. 그러고 나서 요셉은 야곱을 위해 사람들을 보냈다.
이와 관련하여 할레만 박사의 글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성경에서 유다는 유다와 베냐민 전체를 대표한다.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사람은 유다와 베냐민이었다. 한편 예언의 언너에서 야곱은 열 지파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야곱과 그의 가족을 위해 보내는 것은 상징적으로 이스라엘 열지파를 위해 보내는 것이다. 여기의 모형을 주목해 보라. 요셉은 먼저 유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 다음에 야곱을 만나게 된다. 그와 같이 성경은 그리스도가 먼저 예루살렘에서 유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그 다음에 야곱의 남은 가족을 만나게 될 것으로 가르친다.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뭇 나라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사66:20)
79.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영광을 전파하기 위해 간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창45:9,13).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와 화해한 후 자신들의 왕의 영광을 전파하기 위해 갈 것이다.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그들 가운데에서 도피한 자를 여러 나라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이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사66:19). 또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가운데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미5:7)
80. 요셉은 자신의 수레를 준비하고 야곱을 맞이하기 위해 간다.
"요셉이 그의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며"(창46:29). 이와 관련하여 할데만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요셉이 스스로를 나타낸다. 그는 먼저 고센에서 유다를 만나며, 다음으로 아버지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만난다. 여기에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진리가 또 다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먼저 유다를 만나고 다음으로 모든 이스라엘을 만나기 위해 영광 가운데 오신다. 여기에서 특빌히 그가 영광의 수레 안에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요셉의 원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우리는 '보라 주(Lord)께서 불에 둘러싸여 강림하시리니 그의 수레들은 회오리바람 같으리로다"라는 말씀을 읽는다(사66:15)."
81.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그들 자신의 땅에 정착시킨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창47:27). 고센은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가장 좋은 땅이었다. 바로가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그 땅의 가장 좋은 곳에 네 아버지와 네 형들이 거주하게 하되 그들이 고센 땅에 거주하고" 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창47:6,한글개역개정판에는 단순히 "땅의 좋은 곳에"라고 되어 있음). 이와 같이 팔레스타인은, 그 본래의 아름다움과 비옥함을 회복할 때, 세상에서 "가장 좋은 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천년왕국 시대에 이스라엘은 그 땅에 거주하며 거기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다.
82.요셉이 형제들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요셉 앞에 엎드린다.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 아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50:18,19). 요셉의 예언적인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형들은 요셉의 우월성을 인정하고,기꺼이 그 앞에서 종의 위치를 취한다. 이와 같이 장차 모든 이스라엘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주(Lord)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라고 말한 것이다(사25:9)
이제 처음 출발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하자. 요셉은 "더함"을 의미한다. "더함"은 성령께서 이사야9:7에서 여기의 요셉이 예표하는 자의 나라의 주도적인 특징을 묘사할 때 사용하신 바로 그 단어이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83. 요셉의 형제들은 양식이 없는 땅에서 거주했다.
그들은 가나안에 거주했다. 그런데 우리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라는 말씀을 듣는다(창42:5). 거기에 그들이 먹고 생명을 얻도록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기에서 계속 거주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따라서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 내려가 "우리가 살고 죽지 않을" 양식을 사오라고 명령했다(42:2). 바로 이것이 불경건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의 실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단절된 채 영적 기근 가운데 떨어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곳은 영혼을 위한 양식을 전혀 제공해 주지 못한다. 거듭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경험은 다름 아닌 탕자의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84. 요셉의 형제들은 값을 치르고 양식을 사려고 했다.
"요셉의 형 열 사람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으나"(창42:3). 이것이 얼마나 강한 상징성을 갖는지 주목하라. "사다"라는 단어는 본장 앞부분에서 5회 이상 나타난다. 요셉의 형제들은 필요한 양식을 구함에 있어 값을 치르고 사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발로 이것이 자연인의 생각이다. 자연인의 생각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을 받는 수준으로까지는 결코 올라가지 못한다. 자연인은 항상 값을 치르거나 혹은 어떤 공로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은총을 얻으며,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한다. 나아만이 나병을 고침 받고자 하고, 은총을 얻으며,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한다. 나아만이 나병을 고침 받고자 하나님이 선지자에게 올 때에도 그랬다. 이것은 탕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눅15:19). 다시 말해서 그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일을 하는 자로서 아버지의 호의를 입고자 했다. 그것은 여기의 요셉의 형제들의 경우에도 만찬가지였으며, 지금도 모든 자연인에게 마찬가지이다.
85.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의 주"앞에서 자기의 의 태도를 취했다.
그들이 요셉 앞에 나타났을 때, 요셉은 그들을 시험했다. "요셉이 보고 거칠게(roughly) 그들에게 말하여" (42:7, 한글개역개정판에는 "엄한 소리로"라고 되어 있음). 요셉은 그들에게 "너희는 정탐꾼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라고 말했다(9절). 이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무엇이었나? "내 주여 아니니이다 당신의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진실한(true)자들이니 당신의 종들은 정탐꾼이 아니니이다"(10,11절, 한글개역개정판에는 "확실한"이라고 되어 있음). 죄인들을 고치기 위해 일하실 때, 하나님은 항상 이렇게 시작하신다. 그는 치료하기 전에 먼저 상처를 입히신다. 또 그는 치료할 수 있기 위해 성처를 입히신다. 그는 자신의 영으로 "거칠게"말씀하신다. 그는 유죄 판결의 화살을 날리신다. 그는 자연인을 정죄하는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 죄인들의 첫 반응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와 같은 "거친"말에 분개한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며 "허물과 죄로 죽었음"을 부인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한 자들"이라고 자랑한다.
86. 요셉의 형제들은 삼 일 동안 감옥에 갇혔다.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창42:17). 이것은 부당한 것도 아니었고, 가혹하게 다루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그들이 받기에 합당한 것이었다. 그곳은 수치와 정죄의 장소로서, 그들이 있기에 합당한 곳이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잃어버린 자들을 다루신다. 죄인들은 자신들에게 합당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합당한 것이 오직 형벌뿐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있기에 합당한 장소가 오직 수치와 정죄의 장소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들은 높은 자리로 승귀될 수 있기 전에 먼저 낮은 자리로 비하되어야만 한다.
87. 요셉의 형제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42:21). 그들이 "서로" 말한 것을 주목하라. 아직까지 그들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 있지 못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안에서 우리는 종종 이와 비슷한 것을 발견한다. 영혼 안에서 하나님이 임하실 때,양심이 각성 되며 "괴로움"이 임한다. 그리고 죄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죄를 인식하며 괴로워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하나님 앞에 잃어진 죄인의 자리를 취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88. 요셉은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를 보여 준다.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창42:25).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상징인가! 생명의 떡은 돈 주고 살 수 없다. 그것은 오직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서 받을 수 있을 뿐이다. 복음의 조건은 "돈없이 값없이"이다.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이 "곡식을 사기 위해" 온 자들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명령한것에 그러한 진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나타나는지 주목하라. 분명 그것은 다음과 같은 같은 복된 진리를 예표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생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89. 이제 요셉의 형제들은 일시적인 평안을 누린다.
"그들이 곡식을 나귀에 싣고 그 곳을 떠났더니"(창42:26). 그들은 감옥으로부터 나왔으며, 원하는 곡식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마음은 안식과 평안 가운데 있었으며, 얼마 전 괴로움 가운데 빠졌던 그들의 양심은 다시 평온해졌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참된 안식에는 이르지 못했다. 아직까지 요셉과 화해하지 않았기 떄문이다. 결국 그들은 일시적인 안식과 평안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들 앞에 더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이것은 양심이 각성된 죄인의 경험을 얼마나 멋지게 보여 주는가! 사람이 처음으로 구원이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배울 때, 일반적으로 그에게 마음의 평안과 안식이 따른다. 그러나 참으로 그리스도 앞에 나오기 전까지, 그에게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90. 요셉의 형들의 일시적인 평안은 곧 깨어졌다.
"한 사람이 여관에서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고 본즉 그 돈이 자루아귀에 있는지라 그가 그 형제에게 말하되 내 돈을 도로 넣었도다 보라 자루속에 있도다 이에 그들이 혼이 나서 떨며 서로 돌아보며 말하되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가 하고"(창42:27,28). 이 또한 얼마나 멋진 모형인가! 여기의 모형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각성된 양심에게, 그것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참된 안식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거짓 평안을 쫓아내는 작업을 하신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을 읽어 보라.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버지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오라"(43:1,2). 여기의 모형 역시 쉽게 이해될 수 있다.영혼의 굶주림은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는 사람들 안에서 한층 더 날카로워진다. 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더 깊이 의식하며, 세상이 "기근"상태에 있음을 더 날카롭게 느낀다. 그들은 "진정한 애굽의 총리" 앞에 나아갈 때까지 참된 안식과 평안을 얻지 못한다.
91. 요셉의 형제들은 계속해서 율법주의적인 정신을 나타낸다.
"그들의 아버지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로 드릴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유향나무 열매와 감복숭아아니라...그 형제들이 예물을 마련하고 갑절의 돈을 자기들의 손에 가지고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요셉 앞에 서니라"(창43:11,15).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한 영혼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그들의 영혼은 불안하며, 그들은 세상의 헛됨을 점점 더 깊이 느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혼은 불안하며, 그들은 세상의 헛됨을 점점 더 깊이 느낀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고 하고자 갑절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스스로 마음을 새롭게 다잡으면서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자 더 힘쓴다. 그들은 여기의 요셉이 예표하는 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여기에서 새롭게 각성한 양심이 그리스도를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실을 발견한다. 요셉은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라고 말했다(16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해 잔치를 배설하신다. 복음의 언어는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이다(눅14:17) 준비하신 자는 그리스도이다. 죄인은 단지 그것에 참여할 뿐이다.
92. 요셉의 형제들은 다시 즐거워졌다.
"그들이 요셉 앞에 앉되 그들의 나이에 따라 앉히게 되니 그들이 서로 이상히 여겼더라 요셉이 자기 음식을 그들에게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다섯배나 주매 그들이 마시며 요셉과 함께 즐거워하였더라"(창43:33,34) 아, 사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아직 죄를 자백하지 않았으며, 올바른 관계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즐거워할"수 있었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오는 돌밭을 일깨워 준다.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마13:20,21). 오늘날 이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단순히 일시적인 즐거운 감정을 만드는 것 휠씬 이상이다.
93. 요셉은 형제들을 불화 가운데 몰아넎는다.
"요셉이 그의 집 청지기에게 명하여 이르되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운반할 수 있을 만큼 채우고 각자의 돈을 그 자루에 넣고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아귀에 넣고 그 양식 값 돈도 함께 넣으라 하매 그가 요셉의 명령대로 하고"(창44:1,2). 잘못된 것이 바로잡혀질 때까지,요셉과 형들 사이에 실제적인 교제는 있을 수 없었다. 죄를 충분하게 고백할 때까지, 참된 마음의 친교는 가능할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항상 염두에 두고 계시는 계획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과의 참된 교제를 이끌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는 거룩하시다. 그러므로 그와 화해할 수 있기 전에, 먼저 우리의 죄가 고백되고 도말되어야만 한다.
94. 요셉의 형제들은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참된 위치를 취한다.
그들은 요셉 앞에 있었으며, 그 앞에서 "즐거워"했다. 그리고 지금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었다. 한편 요셉은 그들 뒤에 자신의 청지기를 보내면서, 그에게 "일어나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가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하라"라고 말했다(44:4).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은 각성된 자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일을 계속 행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다. "청지기"는 형들을 다시금 요셉 앞으로 데려왔다. 이와 같이 성령은 죄인을 다시금 하나님 앞으로 데려온다. 결국 이 일이 어떻게 결말지어지는지 보라.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직함을 나타내리이까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44:16), 아, 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전에 스스로를 "진실한 자들"이라고 공언할 때의 태도와 여기의 태도를 비교해 보라.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나타내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음을" 인정하면서 요셉 앞에서 죄인의 위치를 취한다. 바로 이것이 요셉이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던 계획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죄인 안에서 역사하실 때 항상 염두에 두고 계시는 계획이다. 죄인이 스스로를 변명하며 옹호하기를 그칠 때까지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면서 빛으로 나올 때까지, 그는 결코 축복의 자리에 돌아오지 못한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파멸된 자이며 잃어버린 자임을 시인한다면, 곧바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그의 가장 깊은 필요를 충분하게 채워 줄 수 있는 자로서 나타나실 것이다. 이것은 여기의 요셉과 그의 형제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95. 마침내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을 알린다.
"그러자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 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들에게 자기를 알리니"(창45:1) 여기의 말씀이 "그러자"(then)로 시작하는 것을 주목하라(한글개역개정판에는 "then" 이 나타나지 않음). 이것은 얼마나 복된 사실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형들이 자신들의 죄를 시인하자마자 곧바로 요셉이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요셉이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던 것이 이제 사라진 것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면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게 하라"고 명령한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는 죄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회개하는 죄인과 구속자 사이에는 어느 누구도 있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중보자의 위치를 취하는 사제들이여, 떠날지어다! 구원의 조건으로서 이런저런 규례를 끼워 넣는 의식주의자들이여, 떠날지어다! 가련한 죄인과 그리스도 사이에 끼어들려고 하는 모든 자들이여, 떠날지어다! "모든 사람을 물러가게 하라."
96.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에게로 가까이 오라고 초청한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창45:4) 아, 이것은 얼마나 복된 사실인가! 요셉과 형들 사이의 간격은 이제 사라졌다. 이와 같이 우리 구주는 두려워 떠는 가련한 죄인에게 "내게로 가까이 오라"고 말씀하신다. 계속해서 요셉은 그들에게 요셉은 그들에게 놀라운 메시지를 선포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7절).
여기에서 잠깐 냅(Knapp)의 글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그것은 큰 구원이다. 그것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다느 식의 혹은 일단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잃어버릴 수도 있는 제한적이며, 부분적이며, 보잘것없는 구원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사역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구원이다. 큰 구원 외에 도대체 무엇이 우리와 같은 죄인을 구원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모든 큰 죄인이며, 우리의 죄는 큰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구원을 필요로 한다. 큰 구원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소용이 없다. 친구여, 나는 당신이 그것을 취하기 바란다. 부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히2:3)."
97. 요셉은 형제들에게 그들을 위한 충분한 양식이 준비되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머물며 나와 가깝게 하소서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야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께 속한 모든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나이다" (창45:10,11). 이것은 우리 주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그는 구속받은 자들이 자기 가까이 있기를 바라신다. 그들에게 이제 그는 더 이상 외인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98. 요셉은 자신의 형들과 완전하게 화해한 증거를 준다.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창45:15). "입맞춤"은 그가 그들을 용서한 사실을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그것으 또한 그의 사랑을 나타낸다. 탕자의 아버지도 이와 같이 먼 나라로부터 돌아와 죄인임으 고백한 아들에게 입을 맞추었다. 여기에서 형들이 요셉에게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 요셉이 형들에게 입을 맞춘 것을 주목하라. 이것은 탕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아버지에게 입을 맞춘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모든 부분에서 주도권(initiative)을 취하신다. 계속해서 하반절의 "형들이 그제서야 요셉과 말하니라"라는 말씀을 보라. 이 또한 얼마나 복된 사실인가! 이제 그들의 두려움은 모두 사라졌다. 요셉과 화해한 그들은 이제 그와의 교제와 대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구원받은 죄인과 구주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99. 다른 사람들이 요셉의 기쁨에 참여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하고"(창45:16). 이와 관련하여 냅(Knapp)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구약의 누가복음 15장이다. 죄인들이 화해되고,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들이 찾아졌다. 그것은 이를테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있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여기의 바로와 그의 신하들처럼, 하나님과 천사들이 기뻐한다. 모두에게 기쁨이 있다. 요셉도 기뻐하며, 그의 형들도 기뻐하며, 바로도 기뻐하며, 그의 신하들도 기뻐한다."
100. 요셉의 형제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을 찾기 위해 간다.
요셉은 형들에게 영광스러운 사명을 맡겼다.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아뢰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지체 말고 내게로 내려오사...당신들은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영화와 당신들이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아뢰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45:9,13) 이와 같이 우리 주님도 구원받은 자들에게 사명을 맡기신다. 그는 그들에게 "가서 나를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을 찾으라"고 명령하신다.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에게 가서 내가 살아 있는 사실과,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신 사실과, 내가 애굽에서 누리는 모든 '영예'(glory)를 알리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은 구주와 관련하여 그가 영원히 살아 계신 사실과, 하나님이 그를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신 사실과, 그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사실을 전파하라고 보냄을 받는다.. 여기에서 요셉이 "속히"라는 단어를 두 번 반복하는 것을 주목하라(9절과 13절).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에는 어떤 지체함도 없어야 한다. 왕의 명령은 "속히"시행되어야만 한다. 시간이 없다. 고귀한 영혼들이 우리 주위에서 계속 죽어가고 있다.
101. 요셉은 형들에게 "길에서 넘어지지 말라"고 훈계했다.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넘어지지 말라(ye fall not out by the way)하였더라" (창45:24, 한글개역개정판에는 "길에서 다투지 말라"라고 되어 있음). 이러한 훈계의 말은 우리에게도 너무도 필요하다. 우리 안에 여전히 육체가 있다. 마귀는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시기와 경쟁의 영을 충동시키고자 애를 쓴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라고 말한다(딤후2:24). 우리가 이러한 훈계에 주의한다면, 우리는 결코 "길에서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모형적으로 적용하는 작업은 그냥 독자들에게 남겨두고자 한다.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에 신실했다. 아버지에게 갔을때,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창안하지 않았다. 귿르에게는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요셉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분명하게 알려 주었기 떄문이다. 그들의 임무는 애굽의 "총리"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했으며, 모든 일은 계획대로 이루어졌다. 야곱과 70명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내려와 요셉으로부터 극진한 영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우리도 스스로 우리 자신의 메시지를 창안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도 우리가 전파해야 할 메시지가 분명하게 주어졌기 떄문이다. 그러한 메시지에 신실할 때, 우리는 보상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이 헛되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의 최초의 복음전도자들로부터 격려를 받도록 하자. 그리고 기근에 빠진 세상으로 가서, 굶주림으로부터 능히 구원해 줄 수 잇는 자에 대해 말하자. 그리고 우리가 어느 정도로 성공을 거둘 것인지 하는 것은 그의 주권적인 뜻에 맡기자. 그러면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영광스러운 사명을 이행하는 자들 가운데 서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여기의 요셉이 예표하는 자가 다시 오셔서 의와 평강 가운데 영원히 통치하실 그 영광스러운 날을 좀 더 앞당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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