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연구의 주제들
1. 왜 누가복음을 연구해야 하는가?
누가복음은 학계나 교계에서 최근까지만 해도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가장 인기를 누렸던 복음서는 마태복음이었다. 이런 마태복음의 인기는 후에 "마가복음 우선설"이라는 새로운 주장과 함께 마가복음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최근까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 인기를 구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부터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대한 관심을 일기 시작했다. "누가-행전"이라는 용어와 함께 누가가 전한 복음서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게 발전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추세에 맞추어서 누가복음을 개략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교회에 단 한 권의 복음서만 주신 것이 아니라 네 개의 복음서를 주신 의미가 있다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 동안에 이루어진 복음의 일을 네 명의 성경 기자를 통해서 부활의 빛에 비추어 해석하여 교회에 주신 것이다. 그 의미는 교회로 하여금 다양하게 풍부하게 복음의 복을 누리라는데 있다 생각한다. 이처럼 네 개의 복음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중에 어떤 하나를 등한시 하거나 또 하나만을 너무 강조한다면 교회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이 명확하다. 따라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사도행전, 요한복음을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해석하고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들의 교회는 어느 한 면에 극단적으로 나아가지 않고 균형잡힌 교회의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리라 확신한다. 이런 이유가 우리가 누가복음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특별히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 없는 많은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무시되거나 경시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책이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보물 같은 말씀 및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예를 들면, 세례 요한의 기적적인 출생(1.5-80), 사관에 방이 없어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과 메시야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목자들의 방문들로 구성되어 있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야기(2.1-20), 그리고 여러 가지의 소중한 비유들, 즉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0.25-37), 어리석은 부자 비유(12.13-21), 돌아온 탕자 비유(15.11-32), 불의한 청지기 비유(16.1-13), 부자와 나사로 비유(16.19-31), 무익한 종 비유(17.5-10), 불의한 재판관 비유(18.1-8), 이밖에 복음 전도를 위하여 각 동네와 마을을 여행하셨던 주님과 그 일행을 자기들의 소유로 도왔던 요안나, 수산나 및 마리아를 비롯한 갈릴리 여인들에 관한 기사(8.1-3), 전도여행으로 피곤한 예수님과 그 제자들 일행을 따뜻이 맞아 접대한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기사(10.38-42),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기꺼이 나눠주겠다고 선언한 여리고의 세리장 삭개오에 관한 기사(19.1-10), 부활 후 엠마오 도상에서의 주님의 출현에 관한 기사(24.13-35) 등등은 오직 누가복음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보석 같은 특별자료들이다. 누가복음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이러한 누가의 특별자료를 생략한 채, 혹은 무시한 채,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을 올바로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올바로 전파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저자 누가에게 크나큰 빚을 지고 있는 것이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및 교훈과 더 나아가 신약성경 전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반드시 명료하게 설교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신약성경의 4분의 1 이상에 해당하는 누가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물론 우리가 믿는 기독교 자체에 대한 이해에 있어 불구와 기형아가 되고 말 것이다.
2. 누가복음은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가?
크게 나누어 볼 때, 우리는 누가복음에 다른 복음서에서보다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는 여섯 가지 주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말해서 보편주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 여성의 향상된 위치, 빈부 문제와 관련된 구제 명령, 그리고 기도와 성령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주제를 누가복음에서도 다루어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공통적인 자료도 자세하게 비교해 보면, 많은 차이가 있다. 누가의 신학적인 의도와 전체 주제 때문에 차별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통적인 자료를 해석할 때도 그 차이와 문맥을 따라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특별히 누가복음의 연구자들은 누가복음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자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주제요 강조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런 강조점들을 통하여 성령의 영감을 받은 누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① 보편주의(universalism)
보편주의가 누가복음의 강조점 중의 하나이다.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되어온 유대인들만의 구원을 선포하는 특수주의(particularism)에 치우치지 않고, 헬라인을 포함하여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만인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보편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한 증거 구절은 다음과 같다. 즉 눅2:29-32), 눅3:4-6, 눅4:25-27, 눅14:23-24, 눅24:47 등등이다. 또 누가복음에는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취급받았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호의적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 역시 보편주의의 한 특징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눅9:52-56, 눅10:30-37, 눅17:11-19 등이다.
②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
소외된 계층에 대한 누가의 관심의 예로 먼저 우리는 아기 예수 탄생시 방문한 목자들을 들 수 있겠다(2:8-20). 당시 목자들은 남의 양을 훔치는 일이 많아 당시 사회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인물로 낙인찍혀 법정에서 증인의 자격도 부인되었던 하류 계층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목자들에게 구주 그리스도의 탄생이 제일 먼저 선포되었고 바로 이들이 주님을 찾은 첫 번째 인물이란 사실은 하나님께서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보다는 오히려 사회의 천대받는 자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갖고 계심을 밝히 드러내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참고; 1:51-53). 그밖에 당대 사회에서 역시 멸시받던 세리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것 또한 이런 특징의 한 예일 것이다. 세리장 삭개오(19:1-10), 세리 레위(5.27-30), 세례 요한의 설교의 대상이 되었던 세리들(3.12-13) 등이 그 예이다.
소외된 자들 가운데 특별히 누가복음에서 부각되어 등장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 즉 병신, 소경, 문둥이, 귀머거리, 저는 자, 앉은뱅이들이다. 증거 구절로 눅4:18, 7:22, 14:13, 14:21절 등이다.또한 과부들과 어린아이들도 포함된다. 예로 7:12, 8:42절 등이다. 당시 이런 불우한 자들은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없는 까닭에 구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물론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부자들과도 교제를 나눈 것은 사실이나(7:36-50, 10:38-42, 14.1-24), 주님은 항상 이와 같이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남다른 관심과 사랑을 가졌다. 다른 복음서에서 등장하지 않는 이들 불우한 사람들의 명단이 자주 반복되어 누가복음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누가가 이들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가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누가의 관심은 곧 하나님 자신의 관심인 것이다.
③ 구제 명령
이 주제와 함께 누가복음에서 또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구제의 명령이다. 구제의 명령은 크게 두 범주로 소개되고 있다.
먼저는 마태복음의 병행구절과의 비교에서 드러나는 강조점이다(마6:19-21//눅12:33-34, 마23:25-26//눅11:39-41). 위의 두 개의 병행 구절에서 누가복음은 구제하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일이며, 안을 깨끗게 하는 것으로 말한다.
둘째는 비유나 기사를 통하여 제시되는 강조점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0:25-37), 불의한 청지기 비유(16:1-13, 특히 9절), 만찬의 비유(14:12-24), 부자와 나사로 비유(16:19-31), 부자 관원 기사(18:18-30, 특히 22절), 삭개오 기사(19:1-10, 특히 8절), 세례 요한의 설교(3:10-11) 등등이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전도와 선교의 명령만큼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는 명령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특징은 누가복음의 속편인 사도행전에서도 발견되는데, 초대교회는 자기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가짐을 통하여 교회 내에 가난한 자들이 하나도 없었으며, 이로 인해 교회 밖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으면서 날로 더욱 부흥하게 되었다고 말한다(행2:43-47, 4:32-35). 또한 자신이 손수 만든 겉옷과 속옷으로 가난한 과부를 구제한 다비다는, 비록 병들어 죽었으나, 그녀에게 도움 받은 과부들의 노력으로 베드로를 통하여 다시 살아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욥바의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다(행9:6-43). 이런 사건들은 복음 전도의 효과적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구제임을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④ 여성에 대한 관심
누가복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여성에 대한 남다른 주님의 관심이다. 이런 까닭에 누가복음은 "여자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 등장하지 않는 여인들이 13명 정도 등장하고 있다. 엘리사벳, 사렙다의 과부(4:26), 마르다/마리아(10:38-42), 나인 성 과부(7:11-17),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를 포함한 갈릴리 여인들(8:1-3), 18년 간 꼬부라져 펴지 못하던 여자(13:10-17),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자, 여선지자 안나, 불의한 재판관에게 호소한 과부, 매를 가는 두 여자 등등이다.
이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몇 가지 경우가 있다. 첫 번째 경우는, 열두 사도들과 함께 예수님의 전도여행에 동참한 갈릴리 여인들이다(8:1-3). 이 사건이 시사하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남자 제자들만 동행한 것이 아니라 여자 제자들도 동참했다는 것이다. 이들이 주님을 따랐다는 의미로 여제자라 부를 수 있다. 누가는 복음서 기자 중에서 유일하게 여자에게 "여제자"라는 말을 쓴다(행9:36). 그런데 이 여자들이 단순히 여행에 동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유로 주님과 제자들 일행을 섬겼고, 그로 인해 가진 바 모든 것을 포기한 주님 일행이 일상적 필요에 대한 염려 없이 전도에 몰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이 여자들의 공로의 정도를 가늠하게 만든다.
두 번째 경우는,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던 여자가 주님을 만나자 곧 치유 받아 곧 펴게 되었다는 사건이다(13:10-17).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병자가 안식일에 고침 받은 것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다. 이 여자가 18년 동안을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였다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의 여자들의 사회적 위치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요하힘 예레미야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pp450-472를 보라). 한 마디로 고대 세계에서 여자들은 전혀 인정받지 못하였다. 남편의 재산의 일부로 간주되어 남편에게 돈에 의해 팔려가게 되었고, 인격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였기에 사람들의 숫자에도 포함되지 못하였다. 즉, 허리를 펴고 살지 못하였고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 여자가 치유 받아 곧 펴고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이 오시자 이제 여자들은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남자들과 동등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를 이 기사는 담고 있다.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단어가 바로 13장 16절의 "아브라함의 딸"이란 표현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아들, 씨, 자손"이란 표현은 볼 수 있지만, 오직 이곳 누가복음에서만 "아브라함의 딸"이란 표현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이 기사는 단지 한 여자의 육체적 치유에만 관심이 있는 것 아니라, 여자의 인격적, 사회적 회복의 의미를 아울러 담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가 누가복음에만 등장한다고 하는 것은 소외된 자로서의 여자에 대한 누가의 남다른 관심의 증거로서 간주되는 것이다.
세 번째 경우는, 누가복음에서 여자들이 등장하는 위치에 대한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여자들은 홀로 등장하지 않고, 거의 항상 남자와 쌍을 이루며 나타나고 있다. 즉 사가랴와 엘리사벳(1:5-25), 요셉과 마리아(1:26-56), 시므온과 안나(2:25-39), 나아만과 사렙다의 과부(4:24-27),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린 남자와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자(15:1-10), 잠자다가 데려감을 당하고 혹은 버려 둠을 당하는 두 남자와 매를 갈다가 데려감을 당하고 혹은 버려 둠을 당하는 두 여자(17:34-35), 불의한 재판관과 그에 호소하는 과부(18:1-8) 등등이다. 사실 이들 기사와 사건들에서 남자만 등장해도 이야기는 전개될 수 있으나, 여자가 남자와 나란히 함께 등장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것이다. 이런 의도적인 배열을 통해서 누가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앞에서 함께 그리고 나란히 서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아울러 그들은 명예와 은총에 있어서 동등하며, 똑같은 은사와 똑같은 책임을 지니고 있는 것임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다.
⑤ 기도
누가복음의 특징 중 중요한 하나는 기도이다. 기도라는 말이 누가복음에서만 33회 이상 등장한다. 또 기도의 사람들에 대해 언급한다. 세례요한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 요셉, 선지자 시므온, 여선지자 안나 등이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보면, 예수님께서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5:16, 6:12, 9:18, 9:28 등이다. 특히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기도를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을 보면, 누가복음에서만 "...예수고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 하늘이 열리며...(3:21)"라고 말한다. 열두 제자를 선택하여 부르시는 장면을 보아도 먼저 산으로 가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음을 강조한(6:12). 제자들을 향해서 사람들과 제자들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으실 때도 기도했음을 말한다(9:18). 변화산상에서의 변화하실 때에도 기도하셨음을 말한다(9:28). 주기도문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에도 기도하실 때와 관련시키고 있다(11:1).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때에도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22:44)"고 묘사한다. 또 기도에 대한 가르침과 비유가 많이 등장합니다.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후에 강청하는 자세로 기도할 것을 가르치시면서,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비유를 말한다(11:5-13). 또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18:1-8)을 말한다. 또 자신만이 의롭다고 말하며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 대한 비유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를 말한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기도가 11번 나타나 있다. 세례받으실 때(3:21-23), 광야에서(5:16),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6:12),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찬양하면서(10:21-22), 변화산상에서(9:28-29),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11:1-4),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심(22:32), 겟세마네 언덕의 기도(22:40-46), 십자가 상에서의 두 가지 기도 즉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23:34),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23:46 ), 제자들에게 축복하심(24:50,51) 등이다. 이런 특징은 누가복음의 속편인 사도행전에서도 계속되어, 사도를 비롯한 제자들은 오순절 날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을 받게 되었고, 그 후 중요한 시기와 사건 때마다, 스승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 기도를 통하여 위기를 극복해 나갔던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과 초대교회의 발전을 소개함에 있어서 기도를 중요하게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로서 누가 공동체를 비롯하여 후대 교회가 진지하게 본받아야 할 신앙생활의 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⑥ 성령
기도와 함께 누가복음에서 또한 강조되고 있는 것이 바로 성령이다. 세례 때 성령의 충만을 입으신 후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와 성령의 능력으로 메시야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눅1:35, 3:22, 4:1, 14, 18, 10:21, 12:11-12). 누가가 성령의 역사를 중히 여겼던 결정적 증거는 11장 13절이다. 여기서 누가는 구하는 자에게 천부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마태의 "좋은 것" 대신 "성령"을 소개하고 있다. 요컨대 누가에게 있어서 인생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바로 성령이란 뜻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의 성령에 대한 이런 강조는 후편인 사도행전에서 더욱 확대되어, 복음 증거의 실제적 원동력으로 성령께서 활동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성령은 기도할 때 강림하는 것으로 소개됨을 통하여 우리는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을 얻게 되어서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주님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됨을 아울러 깨닫게 만든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누가복음에서 우리는 기도와 성령에 대한 강조와 같은 영적인 측면을 발견하며, 아울러 소외된 자들에 대한 강조와 같은 사회적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만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가 또한 같은 비중으로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누가복음은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한 채 이상적으로 균형을 이루며 소개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곧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신 예수님의 새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과 정확하게 일치함으로 우리의 깨달음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든다(눅10:27).
3. 누가복음이 말하는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무엇인가?
이런 교훈을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복음에 합당한 삶"과 연결 지어 말한다면, 기도와 성령의 강조를 통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전제로 한 채, 무릇 모든 성도들은 주위의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신앙적으로 소외된 사람들, 우리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아끼면서 돌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특히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종종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만 잘 되어있으면 사람과의 관계에 모자람이 있어도 괜찮다고 하는 소위 "고르반"식 사고를 갖고 있다. 주님은 분명코 이런 "고르반"식 사고를 책망하셨다(참조; 막7:8-13).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도외시한 채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을 과연 주님은 원하고 계실까?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30-37)를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가난한 자에게 자기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약속한 삭개오의 선언(눅19:8)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날마다 호화로이 잔치를 베풀면서도 자기 집 문 앞의 거지 나사로에게 조금 치의 동정도 베풀지 않다가 마침내 음부의 고통 중에 떨어진 부자를 통하여(눅16:19-31)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당신의 지상 사역을 시작하실 즈음에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가난한 자, 눌린 자, 눈먼 자, 포로 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눅4:18)"이라고 표명한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선언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결국 소외된 이웃을 도외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쪽만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바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한쪽으로 치우쳐 하나님 말씀을 반쪽만 지키는 불구적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도 함께 사랑하는, 균형 잡힌 온전한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결과요 열매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바 "복음에 합당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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